제28회 신라문학대상 공모 요강
신라 천년의 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여 새로운 민족문학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신라문학대상을 현상 공모하오니 많은 응모 바랍니다.
1. 응모기간 : 2016. 10. 1〜10. 31 (1개월간)
2. 부 문 : 가) 시 ( 5편 )
나) 시조( 5편 )
다) 소설( 단편 1편)
라) 수필( 3편 )
3. 상 금 : 가) 시 6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나) 시조 5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다) 소설 1,0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라) 수필 5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4. 응모자격 : 대상 응모는 등단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며, 등단한 사람은 등단 장르 이외 타 장르라도 응모할 수 없다. (단, 등단의 기준은 한국문협 규정에 따른다.)
5. 응모 요령
가) 응모 작품은 과거에 발표되었거나 현상 공모된 바 없는 순수한 창작이어야 함.
나) 응모 원고 별지에 작가의 주소, 성명(필명일 경우 본명 표기), 전화번호를 명기하고 겉봉에 「신라문학대상응모작품 00부문 0편」이라고 반드시 주서 할 것.
6. 당선자 발표 및 기타
가) 2016년 12월 초순에 당선자에게 개별 통지함.
나) 당선작은 『월간문학』1월호나 2월호에 발표하고, 한국문인협회가 인정하는 기성문인으로 대우함.
다) 당선작에 대한 저작권은 당선작 발표일로부터 5년간 신라문학대상운영위원회가 보유하고 그 이후는 작가에게 귀속됨.
(단) 신라문학대상 수상 작품집에는 수록 할 수 있다.
라) 응모작품 반환의 책임은 본회에서 지지 아니함.
7. 원고 접수 및 연락처 (당일 소인 유효)
접수처 (우) 38089 경북 경주시 알천북로 1 (경주예술의전당 B1)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 사무국 ☎ (054)772-1962 / 010-2502-2740
신라문학대상운영위원회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신라문학대상>은 신라문화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개최되며, 문학애호가 및 문학에 뜻을 둔 문학도들의 등단 지름길입니다.
제27회 신라문학대상 수상자, 시-김미순, 시조-백윤석, 소설-서형숙, 수필-박경혜 당선
신라문학대상운영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협 경주시지부(회장 김명석)가 주관하는 제27회 신라문학대상작이 발표됐다. 시 부문에 김미순 당선자(부산)는 ‘감은사지에서’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시조부문에서는 백윤석(서울)의 ‘스팸메일’이 , 소설부문에서는 서형숙(경주시 현곡)의 ‘칠불암’이, 수필부문에서는 박경혜(대구)의 ‘씨오쟁이’가 각각 당선됐다. 이번 수상작과 관련해 시부문 심사평을 맡은 문효치, 강희근, 정민호 심사위원은 ‘전설속의 싸인 운무(雲霧)같은 시’라고 총평을 하면서 “‘감은사지에서’는 우선 시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시적인 뿌리를 역사적 사실에 두고 있었다.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를 풀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에 심사위원들이 의견을 같이했다. 너무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더구나 신라문학대상은 신인을 등단시키는 관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은밀한 내간체는 설화가 되고’에서 이 시인의 능력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고 평했다.
시조부문 심사평을 맡은 한분순, 이정환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스팸메일은 첨단 인터넷 시대를 급박하게 살아가며 겪고 있는 일상의 애환을 밀도높게 노래하고 있다. 구절구절이 실감실정이다. 시종 잔잔한 어조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징하게 형상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재로 볼 때 서정성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육화하는 과정에서 밀도높게 실존적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 3장 6구 12마디는 유기적 체계로서 다채로운 변용과 변주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조의 전개 유형은 시인의 역량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팸메일은 특별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네 수 한 편이면서 두 수씩 묶은 점도 효과적이었다. 이 시인은 오랫동안 절차탁마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소설부문 심사평을 맡은 이광복, 김선주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이번 신라문학대상 응모작들은 27회를 이어온 역사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백여 편이 넘는 열기를 보여 주었다. ‘칠불암’은 한 가족이 소박하게 살아가던 중, 남편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10여 년 동안을 간호하면서 살아가는 여자의 삶을 잔잔하고 차분하게 그렸다. 문장은 간결하고 깔끔했으며 칠불암에서 제를 지내는 삶의 모습이 슬프고 애잔하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솜씨가 치밀하며 격조가 높았다”고 평했다.
수필 부문 심사평을 맡은 지연희, 장호병 심사위원은 ‘참신한 비유와 형상화’라며 총평했다. “응모된 많은 작품들이 사실의 기록에 머물러 있었다. 주제를 향한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한 작품, 제목과 거리가 먼 작품, 새로움이 결여된 작품 등을 제외하고 ‘씨오쟁이’를 최우수작으로 선정하는데 심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30년 만에 들른 고향집에서 보게 된 씨오쟁이와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한 어머니의 지난한 삶속 핏빛 씨오쟁이. 참신한 비유, 탄탄한 긴장감, 그리고 의미화와 형상화를 높이 평가했다”고 전했다.
제27회 신라문학대상 시상식 및 경주문협의 밤은 오는 26일 오후 4시부터 The-k호텔(구 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리며 당선자에게는 시부문 600만원, 시조와 수필 500만원, 소설 1000만원의 시상금과 상패가 수여된다. 당선작은 ‘월간문학’2월호에 발표하고 한국문인협회가 인정하는 기성문인으로 대우한다. | |||||||||||||||||||||||||
선애경 기자
** 씨오쟁이(제27회 신라문학대상 수상작) - 박경혜(수필) ** 2013년 제25회 신라문학대상 수상작/메주각시(수필) ** 매생이/박모니카- 신라문학 대상 수상작(수필)
제28회 신라문학대상 당선자 발표(2016. 12. 2)
사문진 피아노
시 부문 심사평 당선작 <사문진의 피아노>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다. 대구시 달성군의 사문진 나릇터는 낙동강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나룻터이다. 그리고 그 나룻터를 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반입되었다. 이러한 것을 기념하여 최근에 달성군은 사문진 나루를 복원하여 축제를 하고 있다. 당선작을 쓴 이는 이러한 축제를 지극히 서정화 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사로 떨어진 위험이 있는 제재를 서정화 혹은 감각화에 성공하고 있다. 사문진(沙門津)이라는 지명에서 연상되는 모래의 상징성도 잘 살리고 있다. 당선작을 보내온 이의 다른 작품들도 서정성과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시단에 기여할 시인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질 수 있었다. 끝까지 당선작과 겨룬 <나비>를 보내온 이의 역량도 무시할 수 없었으나, 감동을 주는 면에서 당선작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입덧하는 봄> 역시 감각화하는 솜씨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 <반가사유> <가을비> 역시 수준급이었다. 시의 경우 당선작으로 겨룰 작품이 많았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보람을 느꼈다. 심사위원 : 문효치, 서영수, 양왕용(글)
당선 소감 윤상호 우선 초야에 묻힐 수도 있었던 시를 세상에 드러내어 기쁨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어릴 적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혼자 텅 빈 거리를 걷곤 했었는데 이처럼 마음에 와 닿는 한 편의 시가 현재까지도 지치고 힘들 때 저의 가슴속에 천둥처럼 울리고 있다는 게 너무 설레고 행복합니다. 바쁜 생활에 어느 듯 흘러가버린 세월 앞에 멈춰, 문득 문득 가슴속에 차오르는 기운을 외면할 수 없어서 몇 해 전부터 시를 쓰고 시론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화답인지 오늘과 같은 기쁨을 주셔서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문진 피아노라는 시는 1902년 5월 구한말에 금호강을 거쳐 낙동강에 위치한 사문진 나룻터를 통해서 최초로 서양에서 대구로 피아노가 들어오게 됩니다. 피아노를 신랑을 만나러오는 신부로 의인화하여 사문진 나룻터에 녹아있는 정서적인 배경과 신부가 느끼는 감성을 피아노의 선율로 그려나갔습니다. 즉 시 속에 담긴 한 폭의 동양화에서 울려 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내면의 순수한 소리가 서로 어우러져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우리의 정서에 작으나마 울림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하여 이 시를 통해 각 지방이나 지역에 담긴 아름다운 정서와 역사를 음미하면서 지친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잠시 잊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릴 적 이곳에서 아버지를 따라 나룻배를 타고 건너던 그 시절 동심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캄캄하고 적막한 강물에 떠있는 나룻배에서 들리는 노 젓는 물소리, 심장을 조이는 들짐승들이 우는 소리에 꽉 잡은 아버지의 옷자락, 그리고 저 멀리 절벽아래 하얀 도깨비불이 춤을 추는 모습을. 이제는 그리워만 해야 하는 그분을 떠올리며 그때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과 정서가 이러한 사문진 피아노라는 시를 쓰게 된 동력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출생지- 대구시. 현거주지- 경북 고령군.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 중어 중문과 3학년 재학 중. . 제28회 신라문학대상 시조 당선작품 및 심사평 당선소감-채종국
신문, 그 행간을 읽다
채 종 국
태생조차 잊은 채로 두 번째 생을 산다
들끓는 설레발에 제 슬픔은 숨겨 놓고
윤전기 돌리는 소리, 배를 깔고 눕는다
잉크 냄새 채 안 가신 행간 사이 톺다보면
내 들보 간데 없고 남의 티끌 부풀리다
구겨진 종잇장 뒤로 더 구겨진 세상사
곱사등이 굽은 허리 아침마다 곧추 편다
단 한 번 눈요기 끝 구석 저편 나앉아도
부릅뜬 형형한 눈으로,
먹잇감을 찾는다
<신라문학대상 심사평-시조부문> 시조의 연원을 캐다 보면 신랏적 향가에 닿는다. 시조 형식은 애당초 향가에서 와서 여요를 거쳐 완성되었다. 향가는 신라의 노래인 동시에, 시조의 모태인 것이다. 신라 천년의 문화예술을 계승하는 신라문학대상에서 시조가 어엿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생각을 전제로 응모작들을 한 편 한 편 짚어갔다. 꼲고 가리는 숙고 끝에 「신문, 그 행간을 읽다」를 맨 앞자리에 올린다. 이 작품은 신선한 발상과 정제된 호흡, 게다가 농익은 결구가 돋보인다. 죽은 나무가 종이로 거듭나고, 그 “두 번째 생”이 윤전기 아래 “배를 깔고 눕는다.” 신문은 시대를 가늠하는 첨단의 감성대다. 아침마다 “형형한 눈으로” “구겨진 종잇장 뒤로 더 구겨진 세상”의 구석을 살핀다. 신문의 행간읽기는 곧 세상읽기다. “잉크 냄새 채 안 가신 행간”에서 나와 타자, 세상과 존재의 불화에 틈입하는 것이다. 전편에 걸친 활유의 상상력이 이채롭다. '신라'를 앞세운 상의 공모취지에 매몰되다 보면 자칫 소재주의에 빠지기 쉽다. 서라벌, 석굴암, 첨성대, 토함산 같은 시어의 빈발이 그 증좌다. 섣부른 경향성은 작위의 실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경우 현실 언어의 진솔한 모습을 좇느니만 같지 못하다. 그 하나의 예증이 바로 이번 당선작이다. 「하피첩」「늙은 절집」「바탕체로 신라를 읽다」「쿠엔 씨의 하루」가 마지막까지 남아 앞뒤를 다투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의 분발을 빈다. <심사위원 : 이근배·박기섭(글)>
당선소감
여느 해 보다도 업무에 바쁜 12월 기나긴 피로를 풀어주는 뜻하지 못한 환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머릿 속에서 늘 시조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갈팡질팡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3장 6구 12음보 위에 우리 가락을 넣는 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신라문학대상의 당선 통보 소식은 제게는 시조를 쓰는데 있어서 크나 큰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처 준비되지도 못한 미흡한 작품을 뽑아 주신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큰 절을 올립니다 앞으로 더 시조의 길로 매진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새겨 듣고 우리 시조의 울림을 노래 하도록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신라문학대상 운영위원회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바쁜 일상 중에 글을 쓴다고 놀아 주지도 못하고 늘 미안한 마음만 가지고 있는 여덟 살 아들 그리고 제가 일과 글 속에서 일 년 열두 달 헤매고 있을 때 묵묵히 지켜 보아주고 위로와 따뜻한 말을 건네주던 아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 제28회 신라문학대상 소설 당선작품 및 심사평 당선소감-이수조 (200자 × 83.5매) 다투(dhatu)
유리문 앞에 섰다. 앰뷸런스의 불빛은 보이지 않고,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이 녹색 괴물처럼 보인다. 녹색 바지와 녹색 반팔 티셔츠, 녹색 수술모자 사이의 얼굴이 밖의 어둠과 절묘하게 섞여 괴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문을 안으로 잡아당기자 괴물 이미지는 픽셀이 부서지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밖으로 나서자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한여름의 열기가 식어 서늘해진 바람이다. 별 몇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먼 곳으로 떨어졌다. S시에 위치한 이곳 병원 응급실로 파견 나온 지 거의 한 달이다. 나를 보자마자 과장은 애인 없지? 하면서 야근만 시켰다. 야근만 했어도 그동안 별 일 없었고 불만도 없다. 사실 불만을 말할 그런 처지도 되지 못한다. 그런데 조금 전 구급대의 다급한 전화에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앰뷸런스의 녹색 경광등이 번쩍거리며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구급대원들과 함께 환자를 스트레처카로 옮겨 응급실 안으로 옮겼다. 김주희 간호사는 모니터를 연결하고 제세동기를 준비했다. 말초정맥의 정맥로까지 동시에 확보하는 그녀의 손은 빠르고 신중하고 정확했다. 조금의 오차도 없다. 이정도의 능력이라면 내가 있던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도 흔치 않은 실력이다.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한 중형 종합병원에 이런 간호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놀랐다. 연결된 모니터에서 알람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심박동이 없다는 알림이지만 나는 백밸브 마스크를 움켜쥐고 기도를 확보하려고 환자의 턱을 잡았다. 온기는 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어떤 느낌도 주지 않는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바닷가에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발견된 52세의 남자다. 정세윤이라는 이 남자는 서울의 성형외과 개원의라고 구급대원이 말했다. 뜻밖의 환자다. 구급대원이 심장압박을 하는 사이 나는 후두경을 들고 기도 삽관을 시작한다. 혈관이 확보되었다고 김주희 간호사가 외친다. 그녀의 손가락은 혈관을 찾는 데 마법사 수준이다. 에피네프린과 아트로핀을 3분 간격으로 1mg씩 주라고 구두처방을 내리면서 성대 사이로 튜브를 밀어 넣는다. 신규 이간호사로부터 주사기를 건네받아 대퇴동맥에서 피를 약간 뽑아 넘긴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날 경우를 대비한 동맥혈 검사다. 앰부백을 김주희에게 주고 흉부 압박을 넘겨받는다. 반쯤 열린 눈꺼풀 사이로 완전히 풀린 눈동자가 보인다. 서울에 두고 온 내 환자의 눈동자가 겹쳐 보여 손끝이 잠깐 떨렸다. 심장을 누르는 손끝의 촉각은 점점 둔해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심폐소생술 중에 나온 모든 검사에 이상 소견은 없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맞는 진단이 떠오르지 않는다. 건장한 체격이다. 그러나 소생술을 시행하는 동안 갈비뼈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지기 시작했다. 부러진 갈비뼈의 또닥거리는 소리가 공명을 일으킨다. 30분 지났어요, 선생님. 이간호사가 그만 하라고 애원하듯 말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자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사망 선고를 내려야 할 시간이다. DOA(도착시 사망). 몸에 삽입했던 것들을 빼고, 시신을 정리한다. 죽음의 원인을 ‘불명’으로 적고 신고를 받고 온 경찰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사체를 영안실로 내려 보냈다. 가족들이 확인한 다음 사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진다. 서울의 개업의가 S시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죽었다. 우연일까. 정말 죽음이란 의도되지 않은 우연한 불상사로 오는 것일까.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한 서울의 내 환자는 어떻게 될까. 죽은 환자를 보다가 죽음의 문턱에 선 서울의 내 환자 생각이 밀려와 등골이 오싹해졌다.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별들이 잇달아 떨어진다. 서울의 사건을 깨끗하게 지울 수만 있다면, 의식불명의 내 환자에게 시간을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면의 밤을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어둠을 응시한다. 잔별들이 무리지어 바람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성형외과 전문의 정세윤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고 두 달이 지났지만 국과수에선 아직도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일주일 뒤면 S시에 온 지 딱 석 달이다. 모교 병원에선 석 달 정도 파견 나가 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내 환자가 살아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도 환자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삶의 경계선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또는 테이블 위에서 진동으로 부르르 떨 때마다 내 몸뚱이도 함께 떨었다. 죄의식을 덤으로 얹은 기다림 때문에 나는 웃는 법을 잊었고 나의 뇌파는 종일 불안과 싸워야 했다. 새벽 세 시, 병원 전체가 무덤 속처럼 고요하다. 응급실을 나온다. 어둠속 유일한 발광생물처럼 응급실 창문만 불빛이 환하다. 어둑한 복도엔 내 발자국 소리만 공간을 울린다. 의국의 문손잡이를 잡는데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제약실 앞 복도 끝에서 고양이처럼 누군가 잽싸게 휙 지나간 것 같다. 보이는 건 어둠뿐이지만 무언가 허공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의국 안으로 들어와 얼굴만 내밀어 다시 문밖을 살핀다. 벽에 나란히 붙여 놓은 빈 침대들만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놓여 있을 뿐이다. 유령처럼 사라진 존재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리고 책상 앞에 앉는다. 시선이 닿는 위치에 A4용지 크기의 ‘다투(dhatu)’라고 쓰인 백색 종이가 붙어 있다. 다투라는 글자 옆에는 흐릿한 녹색괴물 이미지가 환영처럼 떠 있다. 다투와 괴물. ‘다투(dhatu)’는 ‘자궁 속 유골’ 이란 뜻으로 모두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심오한 뜻은 모르지만 인간의 생명은 2000만 마리 이상의 정자가 다투(싸움)는 데서 시작된다. 그 가운데서 딱 한두 마리만 살아남아 세상에 태어난다. 생명은 그렇게 다투고 다투어서 살아남은 유일체다. 살아남은 단 하나에게 조차 불법팝업창처럼 수시로 자기 안의 괴물이 튀어 나와 삶을 방해한다. 그동안 나는 삶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갈등은 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의를 거쳐 전공의 3년차가 되기까지 상위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질주 해왔다. 공부 밖에 할 줄 몰랐던 삼십 년의 삶이었다. 이곳의 환자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다투(dhatu)’. 벼랑 끝에 선 다음에야 살아남는 것이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오직 살기 위해 그 단어에 매달리게 되었다. 새벽 세 시, 이 시간은 ‘다투(dhatu)’를 만나는 시간이다. 글자에 정신을 집중시키면 글자가 꿈틀거리며 뇌파에 박힌다. 글자는 파장을 따라 움직이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녹색 괴물의 이미지도 유령도 다투를 따라 사라진다. 나와 인연이 된 사람들도 하나씩 사라진다. 모든 것으로부터 끈을 놓으며 나도 사라진다. 텅 빈 공간과 시간뿐, 나는 어디에도 없다. 세상에서 나를 지우는 이 시간은 대략 이삼십 분 정도다. 다투의 시간을 보내고 나야 비로소 나의 하루는 끝이 난다. ‘다투(dhatu)’를 보면서 하루를 끝내고 또 다시 밀려오는 하루를 시작한다. 컴퓨터를 켜고 서울의 모교 대학병원 사이트를 검색한다. 학술대회에 누가 어디로 갔으며, 어떤 논문이 주목 받았고, 고가의 새로운 의료기구가 도착했다는 의례적인 뉴스들을 스쳐 지나친다. 그리고 메일을 열어본다. 언제든지 휴대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새벽 세 시의 이 행위는 대단한 무엇이 아니다. 그러나 ‘다투’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중요한 의식처럼 되었다. 치프의 이름으로 새 메일이 와 있었다. 다음 주에 서울로 복귀하라는 내용이다. 기대했던 대로 복귀는 확정 되었다. 내 환자가 희망적이란 뜻이기도 해서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제 정말 서울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 나는 정말 서울로 돌아 갈 수 있는 걸까? 설렘만큼 알 수 없는 불안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 발목을 잡는다. 거미처럼 기어오르는 불안을 털어버리듯 로그아웃을 하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정확하게 3시 30분. 문을 열고 복도를 걷는다. 제약실 앞을 거쳐 로비 뒷문 쪽을 향한다. 두터운 고무로 덧댄 구두라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고양이 걸음으로 발소리를 죽인다. 간호사실 앞까지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인기척이 나서 뒤 돌아보면 어둠뿐이다. 며칠 전 과장의 말이 떠오른다. 한 선생, 새벽마다 의국 사무실에서 뭐해? 딱 30분간 인터넷 합니다. 낮 시간 숙소에선 뭐하고? 숙소에선 인터넷이 안 되거든요. 병원에서 정해준 숙소는 인터넷은 물론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고 허름한 5층짜리 모텔의 5층 객실이다. 모텔에는 엘리베이터 대신 침대 밑에 완강기로 여자 손목 굵기의 밧줄이 비치되어 있다. 객실의 한쪽 창은 열리지도 않았다. 창을 가린 블라인드도 고장이 나 먼지투성이 붙박이가 되어 있다. 나머지 한쪽 창만 삐걱거리며 열렸다. 창문 아래엔 녹슨 의자와 판자조각들이 쌓여 그늘을 만들었다. 그늘은 잡풀로 덮인 정원의 한 부분을 먹었다. 놀라운 풍경은 눈앞에 있었다. 탁 트인 바다가 환히 내다보였던 것이다. 바닷가에 세워진 모텔은 한 때 이 지역이 나름 인기 관광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 같은 건물이었다. “그래? 그 시간에 병원 복도나, 제약실 앞에서 누구 만나지 않았나?” “……과장님, 혹시 유령 소문 말씀 하시는 겁니까?” 과장은 힐끗 쳐다보다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얼른 뒤돌아 간호사들을 보았다. 언제부턴가 간호사들이 내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내가 다가서면 그들은 서로 등을 돌려 모르는 척 했지만 내가 유령일 거라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유령이란 무언가를 찾아 떠도는, 이 세계를 떠날 수 없는 절실함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는 존재다. 나도 그들이 말하는 유령이 궁금했다. 정작 유령과 마주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의국에 갈 때마다 유령이 나타난다는 제약실 문손잡이를 돌려 보곤 했다. 간호사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온다. 부목과 붕대들이 켜켜이 쌓인 테이블 너머 이간호사의 뒷모습이 보인다. 응급실 문을 열자 차트를 보던 주희가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는다. 그늘 없는 미소다. 나도 저렇게 웃을 날이 있을까. 스테이션에 의자를 끌어다 엉덩이를 붙인다. 어둠조차 지친 새벽. 해맑게 깨어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주희뿐일 것이다. 그녀는 동안의 얼굴에 뽀얗게 빛이 나는 피부를 가졌다. 누구도 그녀가 나와 같은 서른 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의료사고 이후 십 년은 더 산 것처럼 파삭 늙어 버렸다. 나의 파트너인 그녀를 환자들은 천사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쉴 틈 없이 일하는 천사 같은 그녀를 볼 수 있는 것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녀가 차트를 넘기며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약간 층이 진 길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하얀 목덜미를 스친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복어 꼬리처럼 흔들린다. 나도 모르게 쩝, 하고 입맛을 다신다. 허기가 밀려온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아침 9시, 신경외과 김 선생과 당직 교대를 하고 병원을 나선다. 납작한 돌들이 가지런히 깔린 산책로로 들어선다. 낮은 담벼락 위로 내 보이는 지붕들. 그 위로 부서지는 초겨울 햇살이 정겹다. 잔돌이 도톨도톨 박혀 있는 돌담이 끝나면 넓지 않은 모래밭이 나온다. 응급실 과장을 따라 가끔 가는 복어요리집이 있다. 과장은 복어요리를 끔찍하게 좋아한다. 그는 복어요리를 먹을 때마다 ‘독이냐 약이냐는 복용량의 차이에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독과 약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 천평칭에 올려놓고 바늘이 움직이는 미세한 차이에 따라 독이 되고 약이 된다. 술도, 담배도, 심지어 물도 과량 복용하면 죽는다. 그렇게 강조하는 그는 독이 있는 복어요리를 즐기는 복어요리 광팬이다. 과장은 몇 차례 복어독에 중독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럴 땐 스스로 응급실에 와서 처방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내겐 전설처럼 들렸다. 과장과 함께 갔던 복어요리집 앞을 지난다. 지난 회식 때 이곳에서 복어요리를 먹었다. 독이 없는 양식 복어회와 복어구이와 복어지리와 복어껍질 튀김 등 독을 제외한 복어의 모든 것을 먹었다. 복어 요리에 허접한 철학까지 얹어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이간호사가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종알거렸다.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목소리를 팍 낮췄다. 한 선생님, 김주희 샘 좋아하시죠? 왜요? 사귀는 남자 있다던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간호사는 한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무서운 간호사란 소문도 있어요. 저도 얼마 전에 들었거든요. 이간호사는 이 지방 사람이다. 게다가 병원장의 먼 친척이다. 귀엽고 예쁘지만 말이 많고 실수가 잦다. 이간호사의 실수를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은 매뉴얼대로 실천하는 주희뿐이다. 무섭다고? 그래 너에겐 무섭겠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희는 나로부터 거의 반대편 끝 지점에 앉았다. 복어회를 입안에 밀어 넣으면서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이간호사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나는 주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희의 하얀 얼굴과 핏빛 같은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들은 모두 독이 없는 복어회를 먹는데, 그녀만 독이 든 복어회를 상큼하게 한입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을 부르는 독처럼 치명적인 매력이 그녀에게 있었다. 핏빛이 배인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확대되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입술에 빨간 초고추장이 핏물처럼 묻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욕망에 휩싸여 사람들을 밀어젖히고 그녀 옆으로 성큼성큼 건너가서 입술에 묻은 핏물 같은 초고추장을 혀로 핥았다. 옆자리의 이간호사 입술을 보면서 그런 상상을 했다. 아직 오전이라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파도만 소리 내며 밀려왔다 밀려간다. 모래밭 가운데 놓인 나무의자에 앉는다. 의자는 돌처럼 단단하고 차갑다. 나무가 아니라 나무처럼 채색된 돌 의자다. 초겨울의 쓸쓸한 모래사장에 조개껍질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 병원에서 일어났던 작은 일상들이 반짝이는 조개껍질 같다. 복어독 요리를 즐기는 과장님, 독을 입에 문 것 같은 매혹적인 간호사 김주희, 실수투성이지만 귀여운 수다쟁이 이간호사 그리고 응급실 사람들. 떠나기도 전에 모두가 그리워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성형외과 전문의 정세윤의 심장 박동이 멈춘 곳도 바로 이 바닷가다. 신문과 방송에선 성공한 성형외과의가 의료사고 이후 정처 없이 떠돌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는 추측성 보도를 했다. 정세윤, 그가 앉아서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았을 그 자리에 지금 내가 앉았다. 겨울 빛에 물든 차가운 바다. 세상의 끝자락에 선 것 같다. 몇 마리의 새들이 물 위의 하얀 배 위를 빙빙 돌고 있다. 끼룩거리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배 위로 뚝뚝 떨어진다. 붉은 꽃 한 송이 바다에 던지고 싶다. 정세윤, 그를 위해. 또 나 자신을 위해.
서울에서의 사건은 지금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것처럼 뼈에 사무친다. S시 병원으로 파견 나오기 전날. 외상환자와 중독환자들로 응급실엔 입원환자가 넘쳐났다. 오랜만에 비번 허락이 났다. 잿빛으로 변한 가운을 벗어던지고 숙소로 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외상담당교수가 불렀다. 옆으로 찢어진 교수의 눈에서 흰자위가 번득이면 나는 오금이 저리듯 멈칫하는 습관이 있다. 그날도 교수의 날선 눈빛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저 환자 폐에 찬 물부터 빼. 칠십 대 환자를 나에게 들이밀었다. 교수님, 영상의학과부터 하는 것이 순서일 텐데요, 라거나 저 지금 오프 나가거든요, 라고 절대 대답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바로 나란 인간이다. 사흘 동안 숙소에 가보지도 못했다. 바닥에 등을 대어본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오래만의 비번이라 정신은 이미 숙소의 침대에 가 있었다. 풍성한 꼬리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말고 잠이 든 여우를 꿈꾸었다. 그런데 교수의 명령이라면 죽은 사람도 살려내야 하는 게 전공의들의 몫이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환자 앞에 섰다. 평소처럼 흉관을 환자의 가슴에 겨누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가 눈에 모래를 뿌리고 눈알을 파 간 것 같았다. 그 사이 가슴으로 들어가야 할 흉관이 손에서 미끄러져 복부를 뚫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문의들과 간호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환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교수는 나를 보자마자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고 발길질을 했다. 턱을 어루만진다.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턱이 아프다. 교수에게 얻어맞은 후 병실 바깥 컴컴한 곳에 오랫동안 혼자 서 있었다. 외상파트를 맡아 있는 동안 목 디스크가 올 정도로 그 많은 환자들의 찢어진 부위를 꿰맸다. 피도 한 드럼은 덮어썼을 것이다. 피 묻지 않은 가운은 내게 없었다. 병원으로 온 여자 친구가 피 묻은 가운을 보고 무섭다고 했다. 옷에 묻은 피가 무섭다고? 그 후 나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교수로부터 극한 상황으로 몰릴 때 동료들은 거의 한 번씩 도망갔지만 전공의 3년차가 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피하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오기로 버텨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잠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혼수상태인 환자를 두고 나는 그날로 협력병원인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걱정 마 살아날 거야. 동료친구는 그렇게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우울에 빠져들었다. 나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내 의식에서 지우고 싶었고, 내 자신으로부터도 달아나고 싶었다. 날마다 이 바닷가를 헤매고 다녔다. 언젠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다투를 만났던 것이다. 이곳 병실에서였다. 입원 환자 한 사람이 진리는 ‘다투’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진리는 예수라고 주장했다. 그 두 사람은 병세가 회복될수록 심하게 다투었다. 그러자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든 다툴 것 없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다투’는 그 순간 나의 영혼에 파고 들어왔다. ‘다투’가 나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축축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모든 것이 서럽고 그립다. 손등 위에 눈물이 뚜르르 떨어졌다. 숙소로 돌아가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로 있는 준수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준수는 사망원인이 검출되지 않은 정세윤의 최초 검안의의 말을 듣고 싶다는 이유로 나를 서울로 불렀다. 한강 다리를 건너자 눈에 익은 풍경들이 촘촘하게 다가왔다. 나의 환자와 나의 불확실한 미래가 회색 하늘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서울로 복귀 된다 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생활할 수 있을까. 회색 도시에 회색 인간이 되어 유령처럼 스며들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준수는 S시로 유배된 후 처음 만나는 친구다. 반가움에 손을 잡는데, 기밀을 지킨다는 각서에 사인부터 하게 했다. 해부병리학을 선택한 준수의 성격은 작은 일에도 치밀했다. 너, 냄새 지우려고 이거 사다놓았지? 통닭냄새가 고소하다. 소주도 한 병 그 옆에 있다. 뭐 그렇지. 그래도 여긴 지상이잖아. 포르말린 냄새와 시체 부패냄새는 지하에 가득 넘치고 있지. 검사결과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어 사인을 찾는데 열중했다. 무엇이 중년의 건장한 남자에게 호흡부전을 유발했을까? 통닭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결국 중독으로 돌아가야겠는데.” “왜?” 왜라니, 내가 응급의학과 의사니까 그렇지. 길 가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내과 의사는 저혈당을, 신경외과 의사는 급성 지주막하 출혈을, 신경과 의사는 급성 뇌경색을 의심한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중독을 의심해서 주변에 약봉지나 병이 없는지 살핀다. 맞다, 그때 차량에서 발견된 드링크 병이 있었지. 검사지를 뒤적거린다. 드링크 병에도 특별히 검출된 것은 없다. “이 약물 분석은 선별검사니? 어떤 게 나오지?” “정성검사니까 100%는 아니고, 그래도 주요 약물에 대한 건 다 있어. 요즈음 프로포폴 오남용 사고가 자주 일어나서 프로포폴이나 케타민까지도 검출 가능해.” 프로포폴은 마이클 잭슨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성형수술과 지방흡입술과 수면내시경에 마취제로 사용된 약물인데 연예인들에게 꿈의 피로회복제로 알려져 잠자는 약으로 오용되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까지 오남용으로 사고가 일어나자 마약으로 분류되었는데 정세윤은 그건 아니었다. “네 말은 결국 극미량의 강력한 독이 있었단 말이지. 검출 할 수 있는 독은 몽땅 해야겠다. 그래도 안 나오면 원인불명이지 뭐.” “사체는 진실을 말 한다는데, 부검을 하고도 사인을 밝히지 못하면 비난 받잖아?” “살아 있는 사람말도 못 알아듣는데 사체의 말까지? 부검의가 하느님이냐? 50대 여자의 지방흡입술을 하다가 복부의 동맥을 터뜨려서 사망하게 했지만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고 부인이 말했어. 그런데 말야. 피로회복제를 자주 마셨다는데, 피로회복제 성분이 전혀 나오지 않아. 아 미치겠네.” 정세윤이 수술한 50대 여자의 얼굴과 몸매는 20대 미모의 아가씨로 보였다고 한다. “요즘은 사체 얼굴만 보고는 나이를 몰라. 약간의 지방이나 주름도 용서가 안 되는 거야. 의사나 환자나 욕심이 지나쳤지.” 준수가 술병을 들면서 말하자 내가 물었다. “부검의, 할 만하냐?” “응, 사체는 이미 스위치 오프니까. 피도 안 나고 말썽도 안 일으키고, 너처럼 늘 스위치 온 할 필요도 없고.” 준수는 그제야 내 몰골을 아래위로 훑는다. “너, 아직도 잠을 못 자? 전에 그 환자,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이젠 네 책임만은 아니지.” 준수의 위로에 닭다리를 찢어 질겅질겅 씹으며 떠오르는 교수의 얼굴을 애써 지웠다.
서울 복귀를 이틀 앞두고 응급실 병상을 체크하는데 갑자기 간호사들이 문 쪽으로 몰려갔다.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 같아 나도 출입구로 달려갔다. 유리문 밖에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사람은 응급실 과장이다. 간호사들이 부축하자 과장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과장을 들어 올려 침대에 눕히자 눈도 뜨지 못하면서 스스로 처방을 내린다. 마취과 이 과장 불러. 프로포폴하고 펜타닐 준비해라. 이미 발음이 불분명하다. 복어 독, 테트로도톡신 중독이다. 과장님 또 복어 드셨나 봐. 직원들이 수군거린다. 벤틸레이터는 갈릴레오 모델 ICU에서 내려 달라고 하고……. 수액은 5%포도당 생리식염수 하나 달아 놔라. NG 튜브나 폴리 필요 없다……. 겨우 말을 마치자 반쯤 벌어진 입은 벌어진 채 굳었다. 눈꺼풀도 굳게 닫혔다. 응급처치를 하고 기도삽관을 한 후 집중치료실로 옮기는데 주희가 과장을 뒤따랐다. 왜 주희가 집중치료실로 따라 가는 걸까? 집중치료실 간호사는 다른 사람이다. 의아했다. 주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비상계단을 딛고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숨을 크게 내쉰다. 뿌연 입김이 찬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전설처럼 들었던 과장의 중독을 직접 보았다. 무표정한 척 했지만 실제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국과수에서 발표한 정세윤의 사인도 테트로도톡신, 복어독 중독이었다. 그는 복어독에서 추출한 테트로도톡신 성분으로 자신만의 피로회복제를 만들어 복용했다고 밝혀졌다. 복어독성분인 테트로도톡신은 청산가리의 1000배로 해독제도 없다. 24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응급실 의료진이야말로 독에 노출된 사람들이다. 이간호사로부터 주희의 과거에 대한 소문을 구체적으로 들은 것이 며칠 전이다. 주희가 신규 간호사로 서울의 대형병원에 있을 때였다.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깐 잠이 든 주희는 소아환자의 투약시간을 놓쳤고 아이는 죽었다. 죽음을 앞둔 아이였지만 주희의 투약실수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후 주희는 지방으로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간호사가 되었고 죽음의 천사, 무서운 간호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김주희, 나의 어둠과 그녀의 어둠이 닮았기 때문일까. 나는 처음부터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향한 광기의 사랑이 나에게 휘몰아치기를 바랐다. 어디서도 위로 받을 수 없었던 그때 내 안 깊숙이 처절하게 여자를 갈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유예된 인간이었고, 서울의 환자가 살아나기 전에는 내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 잠든 담장 낮은 집들을 내려다본다. 피곤에 젖은 밤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어깨를 치고 제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바람. 바람이 떠난 후 키 큰 삼나무 가지 끝에 별들이 와글와글 모여 들었다. 시간은 잔별들의 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따라 흘러갔다. 새벽 세 시, 이곳에서의 마지막 ‘다투(dhatu)’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죄책감과 불안에 옥죄어 죽음까지 생각했던 나에게 삶의 동아줄이 되어준 시간이었고 서울에 두고 온 나의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의 뜻을 담은 의식이기도 했다. 내일 모레, 서울로 돌아가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내 삶의 매뉴얼을 다시 쓰리라. 이제 새벽 세 시의 스위치는 오프로 돌린다. 리턴 불가, 용도 폐기된 스위치다. 의국의 책상 앞 마지막 의식을 끝내고 ‘다투(dhatu)’가 적힌 빛바랜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 낸다. 의국을 나선다. 응급실 약품 창고가 있는 복도 끝을 지난다. 검사실과 병실로 이어지는 왼쪽 복도의 어둠속을 고양이 발걸음으로 지난다. 어둠만 냉기와 함께 가라앉은 복도 끝이다. 나는 다시 제약실로 되돌아온다. 약품창고 문손잡이를 잡고 슬쩍 돌린다. 손끝에 얼굴에 소름이 돋는다. 유령과의 숨바꼭질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가 이곳을 떠나면 내 동선을 따라 움직이던 유령도 제 갈 길을 가야한다. 유령을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유령을 잡고 싶은 것도 아니다. 무얼 확인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런데도 유령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 못한다. 잠겨 있어야 할 제약실 문이 저항 없이 열린다. 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만 빼어 안을 들여다본다. 약품을 담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신음 소리처럼 들린다. 어떤 눈동자가 어둠 속에 찍혀 있을 것만 같다. 병원 직원들 생각처럼 유령은 나인가. 명계를 건너지 못해 이승과 저승의 틈바구니에서 헤매는 가련한 영혼.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얼굴과 날씬한 몸을 찾아서. 어떤 사람은 최고의 맛을 찾아서, 어떤 사람은 돈과 또 다른 안락을 찾아 유령처럼 떠돈다. 우리들은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에 한발씩 걸치고 있는 유령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금 전 어둠 속으로 사라진 형체는 나의 그림자인가.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폴이 제약실에서 조금씩 사라진다는 과장의 말을 떠올리며 약품 창고의 문을 닫는다. 방사선과를 지나 휠체어들이 즐비한 비상구를 지난다. 불빛이 환한 응급실을 보면서 나는 또 누군가를 생각한다. 새벽에 복도를 다니는 내 동선을 따라 제약실에서 프로포폴을 훔쳐가는 유령이 있다. 내가 떠난 다음 유령은 어떤 방법으로 살아남을까.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는데 머릿속은 주희 생각뿐이다. 해맑은 얼굴로 항상 스위치 온이던 그녀, 하얗게 빛나던 파트너 김주희. 파견 나온 다음날 그녀와의 첫 만남은 특별했다. 만성췌장염을 앓는 젊은 남자가 만취상태로 들어왔다. 마약주사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정상적인 진통주사를 주려고 하자 자신이 토해낸 피와 토사물을 받은 양동이를 내 얼굴에 던졌다. 그러지 않아도 나 자신이 극도로 혐오스러울 때였다. 나는 오물을 덮어쓴 채 췌장염과 마약과 술에 절어 왜소해진 남자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섰다. 그의 멱살을 잡아 집어던진 후 의사 가운도 함께 팽개치려 했다. 주희가 재빨리 끌고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샤워장으로 등을 떠밀어 넣었다. 빨리 씻고 나오세요. 쉴 수 있는 곳을 안내할게요.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는 씻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된 채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간호사들의 비밀휴식처로 안내되었다. 선생님은 지금 주무셔야 해요. 주희의 말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주희가 나의 손을 잡았는데 몽환적인 느낌은 찰나였고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몸이 가뿐했고 오물 냄새도 잊었다. 30분이 흘렀을 뿐인데 짧은 시간 죽음과 같은 깊은 잠을 잤다. 그런 잠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했다. 정세윤은 복어독을 피로회복제로 사용했고, 이 병원 응급실 과장은 복어독을 맛의 쾌락으로 이용했다. 나는 복어독 같은 주희의 매력에 빠졌다. 트렁크를 들어 침대 옆에 세운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난다. 떠난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는 실제 상황이 될 것이다. 늦은 저녁 시간 작별 인사를 겸한 회식 때문에 병원에 들렀다. 로비에 서 있던 그녀가 나를 보고 다가온다. 턱밑으로 다가와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선생님, 아직도 불면에 시달리세요? 눈이 빨개요. 주희는 녹색 간호 복 위에 검정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하얀 털이 보플보플한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주희가 서 있는 뒤 벽면에 부착된 포스터가 시선을 끌었다. 매일 보던 것인데 특별히 눈에 들어온다. ‘편안한 수면, 행복한 삶’, ‘숙면을 책임집니다.’라고 커다란 글자가 박힌 포스터다. 침대 머리맡에서 끝까지 펼쳐진 순백색 시트와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눕힌 남자와 긴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긴 채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여자. 그들 위로 핑크빛 이불이 달콤하고 따스한 물결처럼 덮였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 주희와 함께 잠들고 싶은 욕구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얼마 만에 느끼는 욕구인지 스스로 깜짝 놀라 주희의 얼굴을 외면하고 얼른 자리를 떴다. 문득 뒤돌아보자 수면 포스터 앞에 선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정물처럼 서 있었다.
두개골에 뚫린 구멍으로 뇌수가 빨려나간다. 또 그 물고기다. 한 뼘도 안 되는 길이의 물고기가 날카로운 이빨로 구멍을 뚫고 아주 맛있게 뇌수를 파먹는다. 지독한 통증에 진저리친다. 머리카락 사이로 황갈색 비늘이 반짝인다. 뇌가 텅 비기 전에 놈을 잡아야 한다.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 머리카락을 헤집어 안으로 집어넣는다. 차고 매끄러운 감촉에 털이 곤두선다. 손가락을 빠져나간 녀석은 다시 두피에 달라붙어 얼음송곳 같은 이빨을 구멍 속으로 박는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내려와 입술에서 뚝 떨어진다. 핏방울이다. 핏방울은 자꾸 떨어지고 가슴은 얼음처럼 차갑다. 어. 하고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다. 목이 마르고 머리가 깨지듯 아프다. 그것보다 몹시 춥다. 이불을 끌어당기려는데 팬티도 입지 않았다. 발가벗었다. 게다가 옆구리에 부드러운 뭔가가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앉는다. 침대 위에 나 외에 알몸의 여자가 잠들어 있다. 창문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여자의 맨살 위를 비춘다.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며 여자의 잠든 얼굴을 본다. 주희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다가 깜짝 놀라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자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숨소리가 없다. 주희를 바로 눕히고 가슴에 귀를 갖다 댄다.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있지만 아주 약하다. 침대에 내려서자 발바닥 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비틀거리며 형광등의 스위치를 찾아 누른다. 손끝이 떨린다. 불이 들어오자 발에 밟혀 부서진 주사기와 프로포폴 빈병이 눈에 들어온다. 프로포폴의 부작용인 무호흡증이다. 축 늘어지던 서울의 환자가 뇌리를 스친다. “안 돼, 안 돼!” 양손으로 주희의 뺨을 잡고 마구 흔든다. 반응이 없다. 인공호흡을 하면서 틈틈이 머릿속으로 어젯밤의 기억을 찾는데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알몸끼리 겹쳐 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다. 어떻게 해서 이 여자를 안고 자게 되었을까. 어째서 기억이 지워진 걸까. 회식이 끝났을 때 나는 이미 통제력을 잃었다. 인공호흡과 심장마사지를 반복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기억을 하나하나 끌어낸다. 그녀에게 이끌려 2차를 갔고 그곳에서 키스를 했고, 함께 숙소로 들어왔다. 졸음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늘 깨어 있고 싶었다, 라는 주희의 말도 떠오른다. 깨어있기 위해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고백을 바람소리처럼 들으면서 그녀의 입술을 빨고 젖가슴을 핥고 따뜻한 질 속으로 성기를 깊게 집어넣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바닥에 벗어 던져놓은 옷을 대충 입는다. 코트로 주희의 몸을 감싼다. 휴대폰의 시간이 새벽 세 시다. 병원과 모텔의 거리상 119를 부르는 것보다 내가 업고 뛰는 것이 빠르다. 그녀의 몸을 이불로 감싸 등에 업는다. 축 늘어진 그녀를 등에 업은 채 완강기로 이 방을 벗어나긴 어렵다. 발끝에 걸리는 밧줄을 걷어찬 후 5층 계단을 엎어질 듯 내려와 모텔을 벗어난다. 겨울나무들이 어두운 하늘을 향해 온몸을 흔든다. 윙윙 밤이 소리 내어 운다. 응급실로 가는 길은 텅 비었다. 입술이 떨리고 입김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만성췌장염 환자에게 수모를 당했을 때 나를 잠재웠던 일이 고마운 한편,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는 것이 또 다른 의식 저 편에 남아 있었다. 새벽 3시 ‘다투(dhatu)’를 통해 불면을 택한 이유 중엔 그녀가 던진 재갈을 물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행위가 깔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하루에 긴장이 풀려 죽음을 동반한 함정에 빠진 것 같다. 내 인생이 다른 어떤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프게 인식해야 했다. 복어독 같던 이 여자를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로 돌아간다 해도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이 시간을 잊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처럼 얼굴을 돌릴 수 있을까. 세찬 바람이 가슴팍을 친다. 그녀는 점점 무거워진다.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 물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다. 길바닥이 수족관이 된다. 한 방향 밖에 모르는 복어들이 자맥질한다. 꼬리에 붉은 꽃잎 같은 피를 똑똑 흘리며 눈앞을 빙빙 돈다. 꼬리가 뜯겨 나가는 중이다. 뒤의 놈은 앞에 선 놈의 꼬리를 물어뜯기 위해 작은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기 위해 뱅글뱅글 도는 복어들. 내가 그녀의 꼬리를 물었던가. 그녀가 나의 꼬리를 문 것인가. 등짝에 짊어진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맹도견 리트리버처럼 사슬 같은 어둠을 목에 감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긴다. 휘몰아치는 겨울바람 사이로 응급실 불빛이 보인다.♣ (200자×83.5매)
제28회 신라문학대상 심사평(소설부문)
총 75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다문화가정 체험, SF 장르, 동화 패턴, 전문 직업 영역 등 소재와 형식이 다양했다. 그 반면, 서술이나 문체 면에서는 그리 첨단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일차로 9편을 추렸고, 거기에서 5편으로 압축하여 최종심에 임했다. 「다투(dhatu)」「산세베리아」「초막 셋」「벚꽃 아재비를 위한 노래」「오해의 기하학」 등 5편은 단편소설의 골격을 제대로 갖춘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오해의 기하학」과 「벚꽃 아재비를 위한 노래」는 서술의 안정성에 비해 플롯의 안이함이 느껴져 아쉬웠다. 「초막 셋」과 「산세베리아」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에 비해 문장이 거칠었다. 이에 비해 「다투(dhatu)」는 압축성과 상징성 등에서 단편소설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병원에서 겪는 전문의들의 체험이 풍부하고 깊이 있는 전문성을 발휘한 점이 무엇보다 높이 평가된다. 전공의 3년차의 수면 부족과 과로에서 빚어지는 부조리한 삶의 조건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공감을 불러온다. 인물의 내면 묘사, 서사구조 면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단, 스토리 전개에서 필연성보다 의외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논의가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이광복 황충상 박덕규
당선소감
이수조
이무기는 용이 되기 위해 차가운 물속에서 천년동안 살아야 합니다. 여우는 천년을 죽지 않고 살아서 구미호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야 인간이 됩니다.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이유를 대지 않아도 이무기나 여우는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스스로 깊고 수준 높은 독자로 자부하면서 살았지만 심한 갈증과 끝없는 방황은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았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용이나 구미호를 꿈 꿀 수조차 없다는 것을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깨닫게 되었을까요.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면서 용기를 북돋워주신 이순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또 바로 옆에서 계속 소설을 쓰도록 독려해주신 양진채 선생님과 인천 새얼문학회 문우들 감사합니다. 엄마에게 병원 이야기를 자주해주는, 응급실에서 밤을 새는 아들 예완이와 저희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특히 뽑아주신 세분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키보드를 두드릴 힘만 있다면 손가락 열 개가 내 머릿속보다 더 빠르게 키보드를 쳐 나갈 때까지 소설을 쓸 것입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 늦은 나이에 시작한 작가 지망생들을 위해서.
▶약력 1950년 대구 출생, 2014년 인천시민문예대상, 인천시 거주 . 제28회 신라문학대상 수필 당선작품 및 심사평 당선소감-신정애 풀매
두 개의 행성이 맞물려 돌아간다. 드르륵 드르륵! 어처구니를 잡은 손등 위로 더운 김이 솟아오른다. 밖엔 눈이라도 내리는지 소란하던 사위가 고요하다. 미열로 시작된 감기에 잣죽이 좋다며 엄마가 풀매를 돌린다. 따뜻한 방 안에는 어린 내가 누워 있고 대청마루에 그린 듯 앉아있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솔향기 같은 잣 냄새가 난다. 유년 시절에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던 콧물로 코밑은 성할 날이 없었다. 환절기가 되면 편도부터 부어올라 밥보다 죽을 먹은 기억이 더 많다. 뽀얗게 불린 찹쌀과 잣을 풀매에 곱게 갈아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이면 온 집안에 잣 향기가 아늑하게 퍼졌다. 엄마는 남은 찹쌀가루로 작고 동글납작한 녹두전이나 찹쌀전병을 만들었다. 그 위에 꿀을 듬뿍 뿌려 먹는 것은 아플 때만 누리는 호사였다. 봄이면 창포꽃잎이 하얀 전병위에 피어나기도 하고 겨울이면 대추가 솔잎위에서 붉은 수를 놓았다. 풀쌀을 가는 작은 맷돌이 풀매다. 고운 돌로 만들어 맷돌보다는 작고 아담하다. 아랫돌과 윗돌이 만나 돌아가는 부분에는 서로 다른 무늬의 홈이 파여 있다. 맞물려 물샐 틈 없이 돌아가도 홈이 있어 마찰로 생기는 열을 적게 해준다. 불린 쌀을 아가리 속으로 물과 함께 조금씩 넣어가며 어처구니를 잡고 빙글빙글 돌려주면 곱게 갈린 곡물이 내려온다. 큰 맷돌보다 부드럽게 갈려 죽을 쑤거나 모시, 명주 같은 옷에 고운 풀을 먹일 때 주로 쓰였다. 여름 날 빳빳하게 푸새가 된 아버지의 정갈한 모시옷도 풀매가 한 몫을 했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 때쯤이면 아이들 등살에 너덜너덜해진 창호지문에도 겨울채비를 서둘렀다. 곱게 간 풀물을 창호지에 듬뿍 적셔 창살에 발라 두면 늦가을 볕에도 한나절동안 팽팽하게 당겨졌다. 살을 에는 동장군 추위에도 바람을 거뜬하게 막아주었다. 풀물이 고와야 얼룩이 지지 않는다며 풀매를 돌릴 때 엄마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악기를 연주하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리듬을 타며 박자를 맞추었다. 아랫돌 윗돌이 추임새를 넣으며 일심동체로 돌아가면 엄마의 가녀린 어깨도 함께 어우러졌다. 장단을 맞추며 한 몸이 되어 돌아가는 동안은 엄마 혼자만의 고유영역이 된다. 실타래처럼 엉킨 삶을 추스르는 의식 같은 모습이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던 육남매를 키울 때는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도 엄마의 하루는 부족했다. 일상이 전쟁 같은 날들에도 늘 아랫돌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주름살 하나 없이 정성들여 손질하는 모시옷처럼 구겨졌던 일상들이 하나 둘 펴졌다. 그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풀매의 힘이었다. 곡물이 잘 갈려서 나오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자꾸만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윗돌을 아랫돌은 지긋이 당겨준다. 아버지의 늦바람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자식들이 알세라 엄마는 내색 한번 하지 못했다. 육 남매 중 누구도 아버지의 일탈이나 엄마의 아픈 속내를 알지 못했다. 돌 틈사이로 비집고 나오던 하얀 한숨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들이었다. 궤도를 이탈할 듯 보이는 자전(自轉)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묶여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언젠가 잎 떨어진 나목이 되어 돌아 올 아버지의 빈자리를 아랫돌이 되어 묵묵히 지켜내었다. 풀매를 돌리면서 가끔 엄마는 낮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곡조도 없는 넋두리 같은 노래를 드르륵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에 반주삼아 불렀다. 때로는 우물 속 같은 깊은 한숨소리가 대신할 때도 있었다. 어처구니를 잡은 손등에는 고무줄처럼 파란 힘줄이 솟아올라 마치 작은 풀매에 온 몸이 매달린 듯 했다. 돌들이 부딪치면서 내는 마찰음이 신음처럼 돌아 나오면 넋두리 같은 노래도 풀물에 젖어 들었다. 흥건하게 젖은 넋두리나 깊은 한숨이 마를 때쯤이면 어느 듯 지친 마음도 팽팽하게 당겨 놓았다. 누구나 삶의 버팀목 하나쯤은 가졌다면 엄마에게는 아마도 풀매였으리라. 육남매가 모두 떠나고 빈 둥지가 되자 풀매 잡을 일도 없어졌다. 빳빳하게 푸새된 모시옷을 입어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쓸모없는 돌덩이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엄마가 다시 풀매를 잡았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손사래 쳐보아도 이미 풀매 앞에 앉은 엄마를 말릴 수 없었다. 믹서기로하면 빠르고 쉬우련만 애써 풀매를 고집했다. 힘들게 만든 전병도 옛날처럼 맛이 나지 않아 냉장고 안에서 굳은 채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귀할 것도 없는 음식을 만드느라 한나절을 붙잡아 두는 엄마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유학간 아들이 방학동안 잠시 다니러 나왔다. 생활패턴이 바뀐 탓에 적응하기 힘들다며 떠나는 날은 정성들인 아침상도 마다하고 주스 한 잔만 마시겠다고 했다. 믹서로 간편하게 갈면 될 것을 쓰지 않던 강판을 꺼내 토마토를 갈았다. 다시 볼 날이 아득해진 속내를 강판으로 감추었다. 식탁 앞에 앉은 아들을 바라보며 강판위의 손도 자꾸만 느려졌다. 내 자식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풀매를 잡던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때의 엄마도 나처럼 잡고 싶었던 속내를 대신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짜증을 부렸던 한나절의 시간들이 죄송함으로 아릿하게 가슴을 저민다. 엄마 치마폭에 배여 있던 솔향기 함께 풀매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입 안에 번지는 잣의 향기로 온몸이 알싸해진다. 이 모든 것들은 아랫돌처럼 가끔 궤도를 벗어나려던 나를 제자리에 당겨 놓는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삶이란 소소한 기억의 편린들로 잘 맞추어 나가는 퍼즐 같은 것인가 보다. 미열에 들 뜬 어린아이의 숨소리며, 푸새된 모시옷이며, 장구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창호지문이며, 찹쌀전병위의 진달래가 평면을 채운다. 둥글거나 모난 기억의 조각들이 함께 어우러져 빈틈을 메워 놓는다. 가만히 나만의 풀매를 돌려본다. 아직 못다 채운 여백이 고운 풀물에 젖어든다.
심사평(수필) 예심을 거쳐 온 <풀매>(신정애), 솟대(안희옥), 모지랑붓(김장배), 잠망(김옥한), 푸른 수의(최상근)가 심사위원들의 집중적인 논의 대상이 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수필작법의 기본을 비교적 충실히 갖추고 있었으나 신인다운 가능성과 패기라는 잣대만으로 보자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신인다운 패기와 새로움이란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세계가 드러내거나 감추고 있는 현상을 감지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한 깊은 인식과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풀매>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 ‘풀매’라는 소재를 통한 형상화의 능력, 더 나아가 주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과 사유는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있는 대로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만의 삶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성숙한 태도로 보이기까지 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풀매> 이외의 작품들도 비교적 고른 문학적 개성과 성취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높은 문학적 성취를 위해서는 수필을 통해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과 세상에 대한 보다 깊은 구체성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심사위원: 유한근, 허상문
당선소감(수필)
신 정 애 언젠가부터 가슴에 작은 씨앗 하나 묻어 두었습니다. 물을 주고 정성을 쏟았지만 단단한 흙을 뚫고 싹을 틔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설픈 열정과 실패와 불면들이 수없이 교차하는 동안 씨앗은 쉽게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인고의 대지위에 고개 내민 잎 하나를 바라봅니다. 아직은 성글고 부족하지만 처음 씨앗을 묻었던 그 순간처럼 설렘과 두려움으로 걸어가겠습니다. 푸르른 잎이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될 때까지. 그리고 아득한 공중을 꿈꾸겠습니다.
신라문학대상이라는 큰 상을 안겨주신 심사위원선생님과 경주문협에 감사드립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좋은 작품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같이 공부하고 있는 시거리문학회, 그리고 동리목월문학관 곽흥열교수님, 박양근교수님과 연구반문우들 함께 이 기쁨 누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거친 문장을 풀매처럼 곱게 갈수 있도록 지도해준 김영식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성 명 : 신정애 생년월일 : 1955년 학 력 : 한동대학교 영문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동리목월문예 창작대 연구반 시거리문학 ================================== [제27회 신라문학대상 소설 당선작품 및 심사평 당선소감 - 서형숙] <당선 소감>
칠불암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 신라 노래 <풍요>
화구(火口) 앞에서 관이 잠깐 멈추었다. 꼿꼿하게 버텨보려는 이성적 고집에 반발하듯 현수의 몸이 관을 향해 푹 꺾인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원망이 울음에 지친 가슴 속에서 방언(放言)처럼 터져 나와 유족 대기실 천정에 방향 모르고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처럼 날아다닌다. ‘당신이 내 발목에 채인 차꼬가 되어 영원히 날 옴쭉달싹못하게 할 거라고 원망하고 또 원망했는데, 겨우 십 년도 채 못 채우고 가는 거야? 그럼 순교자나 된 듯 생색 내던 나는 민망해서 어쩌라는 거지?’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당신도 고생은 많았지. 가장이라는 그 끔찍한 책임감이 당신을 그 몸으로 지금껏 버티게 했던가 봐, 그래. 그렇지만 꿈 속에서라도 그 대답은 듣고 싶었어. 왜 그랬었는지. 수도 없이 반복하던 내 물음에 당신은 아직 답을 주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내게 답을 주고 가야 하지 않아? 이렇게 갈 수는 없어, 안 돼!’ 검은 양복 입은 문상객 하나가 관을 매달린 현수의 허리를 끌어내듯 떼어내자 관은 빠르게 화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안에서 불길이 확 솟아나더니 화로 문틈으로 맹렬하게 퍼져 나와 현수의 검은 상복 앞섶에 옮겨 붙었다. 불길은 현수의 상복을 다 태우고, 오래 신어 뒤축이 낡아 실밥이 터져 나온 헝겊 편상화까지 남기지 않고 태웠다. 현수를 옥죄고 있던 보이지 않는 포승줄 같은 것도, 실체는 보이지 않고 거대한 무게감만으로 숨통을 누르고 있던 큰 바윗덩이 같은 것도 불길에 휩싸여 타 버렸는지 재로 변한 옷을 벗어버린 현수는 알몸인 채로 부끄러움도 없이 제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어서 불길은 수십 개의 작은 불덩이들로 쪼개지더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손이 횃불을 들고 춤을 추듯 현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현란한 불덩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는데, 갑자기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하늘로 휙 솟아올랐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현수는 그것들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두 손을 쳐들고 허우적거리다가 눈이 번쩍 떠졌다. 진득하니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오고, 몸이 물에 빠졌다 건져진 듯 무겁다. 또 비슷하게 반복되는 그 꿈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수는 산에 오를 채비를 차린다. 집을 나선다. 통일전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리니 살갗에 와 닿는 유월의 공기가 습기를 머금어 무겁다. 분무기로 허공에 물을 뿌리듯 는개가 내리고 있지만 아직 우산을 받칠 정도는 아니라고 현수는 생각한다. 서출지(書出池)에서 바라본 산 윗부분은 비안개에 가려져 있는데 옅은 잿빛 공기 속 풀과 나무와 농작물이 꾸며 놓은 들판은 연하고 짙으며 약간씩 색조가 다른 녹색천으로 만들어 놓은 조각보처럼 따뜻하고 평화롭다. 현수는 비가 더 내리면 비옷을 입어야지 생각하며 서출지 주위를 돈다. 못가의 배롱나무는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맺힌 꽃봉오리들 사이로 바알간 꽃잎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봉오리들은 의외로 단단하게 껍질을 닫고 있지만 이 단단한 껍질을 깨고 수레바큇살처럼 펴진 붉은 꽃들이 한여름 동안 못 주위를 아름다운 붉은 구름으로 물들일 것이다. 수면 위로 퍼져나가는 연잎에 개구리 한 마리가 펄쩍 뛰어 올라오니 흔들리는 연잎에 수정구슬이 도르르 생겨난다. 서출지 못 이름의 유래를 어릴 때 학교에서 들었다. 연못에서 나타난 노인이 전해 준 서찰이 왕을 살렸다는 이야기의 신령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이던 어린 시절에는 나라의 왕은 그런 보호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고, 그런 이야기가 있는 지방에 살고 있다는 것이 웬지 어깨를 으쓱이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요즈음 암자를 오르내리며 서출지를 지날 때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현수는 불륜의 댓가로 죽음을 당한 스님과 왕비를 위한 변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랜 시간을 부정한 여인으로만 알려져 온 그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스님을 가까이할 만큼 왕비는 외로웠던 거겠지요.’ 하고 말해 주고 싶어졌다. 그래놓고는 또 ‘외로워서’라는 변명이 현수 자신을 위한 변명 같아서 자신이 한 말에 불쑥 화가 나기도 했다. 십 년 가까이 식물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던 남편 곁에서 자신 또한 세상의 흐름과는 동떨어져 집안에만 있다가 남편이 떠나고 나 뒤에 돌아보니 현수는 자신이 세상 속에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유폐되었던 시간 동안 세상은 저만치 흘러가 있고 자신은 그 흐름에서 비껴나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큰물 진 후 급류에 휩쓸려 내려오던 쓰레기였다가 강기슭으로 비쭉 내민 나무의 밑둥에 걸린 채 검은 빛이 바래어가는 찢어진 낡은 비닐봉지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49일의 천도재(遷度齋)까지 지낸 후, 현수는 다음 해 봄이 올 때까지 거의 잠만 잤던 것 같다. 깨어 있으면 홀로인 자신에게 남은 날들이 마냥 아득하였고, 막연한 그 아득함을 잊기 위해서라도 잠을 잤다. 간혹 아들 아이에게서 잘 지내는지 전화라도 오면 걱정말라고, 운동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하며 씩씩하게 잘 지낸다고 하였지만 먹는 것도 걸러 가며 잠만 잤다. 자도 자도 잠이 왔지만 깨고 나면 늘 피곤하기만 했다. 뚜렷한 의미도 없는 단편적인 장면이 오래된 무성영화처럼 흐릿하게 꿈을 채우거나, 잘 알지도 못하는 얼굴들이 꿈속에서 끊임없이 현수를 닦달했다. 그들이 현수에게 요구하는 것의 실체도 분명하지 않은 채 다만 무언가를 요구당하고 닦달당하고 있다는 부담감이 꿈속에서도 생생했다. 봄이 오고 나른한 봄기운 속에 죽은 채 잠만 자는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 없어서 현수는 병원을 찾았다. 병원의 젊은 의사는 현수의 잠이 가면(假面)의 죽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수에게 낮 동안은 집을 나와서 어디든 걸어다니라고 했다. 약을 처방해 주면서도 이것만 먹으면 안 된다고, 매일 몸이 지칠 때까지 걸으라고, 그것이 진짜 처방전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두 달 가량을 이틀에 한 번 꼴로 전화를 걸어서 현수에게 집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현수는 의사의 정성을 무시할 수 없어서 집을 나서려고 애를 썼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듯이. 집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을 또 다른 자신이 어르고 달래가면서, 집을 나와도 딱히 갈만한 곳이 없던 현수는 남편의 천도재를 지냈던 칠불암에 오르는 것을 할 일로 삼았다.
- 우리가 살던 이 도시를 잠시 떠났지만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군요. 이곳을 떠나 우리가 서울 근교의 허름한 그 동네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는 사실 참 막막하더군요. 온 나라가 처해 있던 경제적 파산의 위기보다 사람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 가던 심리적 공황이 더 두려웠던 그 시기에 당신이 다니던 회사도 결국 문을 닫았고, 당신도 예외 없이 실업 상태로 내몰렸지요. 그래도 수도권으로 들어가면 살 궁리가 생길 거라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우리도 남은 것을 정리하여 성남의 허름한 동네에 자리를 잡았지요. 세상살이에 능숙하지 않던 우리를 듣기 좋은 말로 그곳에 불러들여 자신이 운영하던 작은 인쇄소를 넘기던 당신의 옛 직장 동료를 너무 믿었던 걸, 누구 탓으로 돌리겠어요? 집집마다 한 대씩은 다 있던 개인용 컴퓨터에 밀려 사양길이었던 명함과 광고지 따위를 인쇄하던 일은 시작한 지 한 해를 겨우 넘기고는 다시 접어야 했지요. 가게를 접던 날, 새로운 각오로 무리하여 장만했지만 거의 쓸 일이 없었던 맥킨토시 컴퓨터나 명함용 고급 인쇄기를 다른 비품과 함께 모개로 처분하여 매일 전화로 빚 독촉을 하던 은행에 대출금을 갚고 나니, 그래도 우리 세 식구 저녁 한 끼 먹을 돈은 남았었지요. 가까운 식당에 가서 돼지 갈비 4인분을 주문하여 구워 먹으며 우리 셋 중 누구도 말 한 마디 없었던 그날 저녁, 그런 지경에도 고기 맛에 끌려 자꾸 집어 먹는 내 손목을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나의 배고픔이 부끄러웠답니다. 인쇄소를 접은 이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궁핍으로 우리는 천천히 떨어져 가고 있었지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가며 허리띠를 졸라매어도,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사채를 감당하기는 너무 버거웠지요. 냉방을 하지 않아 온기라고는 없던 그 방의 겨울 냉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지운이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고, 얼마 되지도 못하는 벌이에 매달려 밤이 늦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던 우리 두 사람....... 한 줌 꽉 쥔 주먹 안에서 모래알갱이가 손가락 사이로 슬슬 빠져나가듯 우리 세 사람도 그렇게 서로에게서 빠져나가며 멀어졌던가 봐요. 겨울과 봄이 서로 머뭇거리며 세력을 견주느라, 이월 말이었지만 아직 매섭게 추운 날이 더 많았다. 그 즈음 현수는 학습지 교사로 이집 저집을 다니며 아이들 가정학습을 돌보는 일을 했다. 현수가 대학을 나왔다고 하자 학습지 지부장은 몇 가지 질문 후에 교사로 일할 수 있도록 어렵지 않게 채용해 주었다.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생을 둔 부모들은 개인과외를 대신할 학습지 한 가지 정도는 시키려고 하였고, 그래서 현수가 찾아다니며 지도해야할 집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다만 학습지를 다달이 판매하고 판매 부수에 따른 수당을 보수조로 받게 되는 형식이어서, 받아 둔 학습지 대금을 급한 대로 써 버리는 바람에 월말이 되면 현수는 한꺼번에 그 돈을 납부해 넣느라고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돈을 꾸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현수의 일이 아이들의 방과 후 가정학습이었기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은 밤이 늦은 10시나, 심지어 11시가 가까워지기도 했다.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은 것이 오래 된 기억 속 일 같았다. 몸이 초절임을 한 것처럼 처지거나 몸살 기운이 있어도 쉬겠다는 소리를 하면 학부형은 싫은 기색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쉰다는 소리를 하면 다짜고짜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불평하는 걸 겪어 본 터이라, 현수는 몸이 아파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은 심한 감기몸살인지 목이 잠겨서 말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 데다 견딜 수 없는 한기에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해, 학부모에게 구걸하다시피 시간을 얻어 약국에서 한방 감기약 하나를 사 들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찬 방에 들어 와서 난방을 대신해오던 전기장판의 전원을 꽂으려는데 서가 한 칸에 얹힌 수첩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곳으로 이사해 올 때 아깝지만 책을 많이 정리하여 없앴지만, 그래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 둔 책들이 꽂힌 서가 칸막이 위에 그것이 얹혀 있었다. 사륙판 정도의 크기에 올리브빛이 감도는 초록빛으로 인쇄된 겉표지의 감각적인 색상이 눈길을 끄는 수첩이었다. 형편이 어려워지기 전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던 남편은 서점에 서서 몇 시간이고 책을 읽다가 읽던 책을 사 가지고 돌아오기를 즐겼다. 그러나 남편이 무엇을 열심히 쓴 것 같지는 않았다. 가끔 작은 수첩에 문단 수준의 짧은 글을 써 놓은 걸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완성된 형태로 이어지는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전기장판의 전원을 올려놓고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현수는 별 생각 없이 수첩을 펼쳤다. 남편이 작업 일정을 적어 두는 수첩이었다. 여학생의 것처럼 동그랗게 모양을 낸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남자답지 못하고 색시처럼 수줍음 타는 글씨라고 현수가 남편을 가끔 놀리는 빌미가 되어 주던 글씨였다. 하던 일마다 자리를 잡지 못하던 남편이었지만 그때쯤 무선 인터넷 선을 설치하는 자그마한 통신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두서너 달 정도마다 일자리를 바꾸곤 하던 그가 두 해 넘게 고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게 되면서 현수도 희미하나마 그 암울한 구덩이를 벗어날 기대를 가져보기도 했다. 수첩에는 언제, 어느 지역의 어떤 집에서 작업을 할 것인지 하는 일정이 적혀 있었는데, 작업 일정이 빈 날의 칸에 그것이 적혀 있었다. ‘오다오다오다오다서럽더라서럽다우리네여공덕닦으러오다.’ 띄어쓰기도 문장부호도 다 무시한 문장이 수첩의 곳곳에 깨알 같은 글씨로 꼼꼼하게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주문인 줄 알았다. 그렇게 쓰인 글씨들은 특정한 의미를 담은 문자라기보다는 ‘아브라카다브라’나 ‘수리수리마하수리’ 정도의 무의미한 음성을 문자라는 기호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였다. 뒤쪽을 더 뒤적여 보니 같은 내용으로 채워진 칸이 최근까지 더러 있었다. 더듬더듬 반복적으로 읽노라니 뭉텅이져 있던 글자들이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로 분절(分節)되어 읽혔다. 그런데 그 문자들이 조합해 내는 의미가 궁금할 사이도 없이 ‘서럽더라’가 눈에 들어와 읽히는 순간, 현수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갑작스럽게 눈물이 고여서 후두둑 떨어졌다. 자신의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어린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누워 듣던 해질 녘의 빗소리처럼 을씨년스러웠고, 그 눈물 한 방울이 신호가 되어 현수의 속 갚은 곳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이 하는 일은 외부의 통신 단자에서 선을 연결하여 집안의 인터넷을 설치하는 일이었기에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선을 찾으려면 건물 꼭대기에 매달려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니 그전 해 여름에는 건물 지붕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쳐 열흘 정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부도가 나기 전 회사 총무부서의 부장으로 있던 남편은 그 일을 계기로 병문안온 그 업체의 사장을 설득하여 산업재해보험을 들게 하였다. 규모가 영세한 그 업체는 보험 따위의 안전장치가 없었지만 남편이 사고가 나기 얼마 전에 비슷한 사고로 직원이 다쳐 병원비를 물어야 했던 사장은 할 수 없이 산재보험에 가입하였다. 남루하고 누추한 일을 불평 없이 견딘 결과로 비교적 수입이 끊이지 않았지만 목줄을 쥐고 당기듯 독촉당하는 그달치 사채 이자를 메우고 나면 그뿐, 살림살이는 별로 더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은 저녁 늦게 지친 몸으로 들어와서 소주 한 병을 겸해 반찬이 부실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현수네 가족 세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고치 속에 웅크리고 사는 애벌레들 같았다. 그렇지만 악착한 노동에 따르는 열매가 영 없지만은 않았다. 받을 돈 대신에 전세계약서를 압류해 갔던 빚쟁이에게 원금을 갚고 계약서를 되찾아오던 날, 남편은 옥상에 놓아 둔 의자에 앉아서 깊은 가을밤 이슬을 한 시간이나 맞으며 앉아 있었다. 싸늘한 밤기운을 온몸에 묻히고 잘 시간을 한참 넘기고 들어오더니 말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남편답지 않게 코를 골며 잤다. 그렇지만 현수는 그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시월에서 십일월로 넘어가는 냉기 속에서도 현수네 가족은 난방을 하지 않고 방에서도 두터운 겉옷을 입으며 버텼다. 저녁상을 앞에 두고 남편은 수저를 뜨지 않고 소주만 마시다가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할까? 이 세상에 나는 왜 온 걸까?’ 하고 뜬금없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남편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겠지만, 현수 또한 그 말에 살가운 위로를 해 줄 여유도 없을 만치 매일 지쳐있었다. 유난히 추위가 혹독했던 그 겨울, 남편은 아침에 도시락 하나를 싸 가지고 나가 높은 데에 매달려 통신선을 설치하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 냈다. 산을 깎아 만든 고지대에 자리한 동네는 집을 찾아 올라가는 길이 언덕진 가파른 비탈인 데다 그 해는 눈조차 자주 내려 꽁꽁 언 빙판 길에서 현수는 여러 번 미끄러졌다. 넘어져서 일어날 때마다 현수는 넘어져 아픈 몸보다 누가 볼까 얼른 일어나려고 서두는, 아직도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는 자신의 오기가 더 아팠다. 반팔원피스를 입은 기상캐스터가 예쁜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그 겨울에 가장 추운 날씨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안내하던 날, 그 일이 일어났다. 추위 때문에 모든 것이 돌처럼 얼어붙었다. 공기 속의 수분이나 물 따위의 액체만이 아니라, 이미 고체인 땅과 담과 건물과 가게의 간판들, 아이들 놀이터의 놀이 기구조차 무기처럼 얼어붙었다. 아침 일찍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일터로 나간 남편의 전화로 낯선 목소리가 현수에게 남편이 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지금 곧 달려와야 하겠다고 알려왔다. 같은 문장 패턴을 반복해 가르쳐도 전혀 그 영어 문장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학습지 고객인 아이에게 현수가 짜증이 나려던 때였다. 전화를 끊고 ‘좀 일찍 마쳐도 되겠니?’ 하는 현수의 말에 아이는 갑자기 환한 얼굴이 되어서 ‘괜찮아요, 좋아요.’라고 외쳤다. 노선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현수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했다. 며칠 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들과 남편이 이마를 맞대고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은 모습을 오랜만에 보여서 현수도 덩달아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넘겨 보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사진첩이었다. 현수와 남편이 대학시절 만난 때 이후부터 함께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르고 여행하고 했던 그들 가족의 기록들이 색이 약간 바랜 채 정리되어 있는 앨범이었다. 바뀐 환경에 사춘기를 겪으며 속을 무척 썩이던 아들도 어느 새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다. 이제 조금씩 부모를 이해하는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이즈음에는 좀 고분고분해졌고, 남편의 말에도 입술을 깨물지 않고도,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말을 주고받았다. 설거지를 하며 두 사람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주고받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현수도 간간이 대화 사이에 끼어들기도 했다. 오랫만에 가족이라는 따뜻함을 느끼며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가, 남편은 돈을 제법 주었음직한 겨울 점퍼를 아들의 졸업 선물이라고 사 왔다. 오리인지 거위인지의 털이 두툼하게 충전재로 들어 있는 그 점퍼를 받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아들과는 달리 현수는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저녁상에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던 남편이, “내가 없으면......” 하고 입안에서 밥을 씹는 것처럼 웅얼거렸다. 현수가 잘 못 알아듣고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뒷말을 잇지 않고 그냥 한 번 웃어 주고는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러나 현수는 남편의 웃는 얼굴이 도무지 낯설어서, 같이 웃어지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수술실에서 다시 중환자실로 옮기는 동안에도 남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에는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추운 날씨 탓에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인지 그가 딛고 있던 고가 사다리가 어떻게 넘어져서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는지를 본 사람이 종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근처에서 조그만 잡화가게를 하던 가게 주인이 머뭇거리며, 사고가 날 무렵 그 좁은 길에 택시가 한 대 지나가기는 했다고 말해서 경찰도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데 애를 먹었다. 타고난 성격이 그래서인지 경찰관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원, 이렇게 매서운 날 뭐하려고 그 높은 데 매달려 있었노? 날씨가 좀 풀리거든 하라고 사장이 말했다는데, 자기 목숨을 걸고 이 추위에 거길 올라갔으니,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도 아니고. 쯧쯧. 얼어 있는 시멘트 땅바닥은 단단기가 강철인데, 거기 떨어지는 것은 쇠몽둥이로 머리를 맞는 것하고 다름없다니까요, 아주머니. 그러니까 떨어지며 땅에 부딪혔던 머리 한 쪽이 저렇게 온전히 다 날아간 거 아뇨.” 남편을 중환자실에 눕혀 놓고 하루에 두 번 면회하기 위해서 현수는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스물네 시간을 기다리며 보냈다. 가끔씩 갈아입을 옷가지 따위를 가지고 아들이 다녀가고, 문병이라고 더러 왔다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현수에게는 누가 왔는지 누가 제 손을 잡았다가 놓았는지 그들이 다녀가고 난 뒤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 소독된 옷으로 갈아입고 중환자실로 들어가 눈 뜨지 않는 남편의 손을 잡고는 ‘눈 좀 떠 봐, 눈 좀 떠 봐, 눈 좀 떠 봐’ 하고 주문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 시간 외에라도 현수는 병원 울타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병원을 비우면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에 병원을 벗어나서 다른 일을 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병원은 인심이 후한지 보호자 대기실은 바닥이 절절 끓도록 난방이 잘 되어 있었다. 그 뜨거운 방바닥에 누워서 다음 면회 시간을 기다리며 누우면 방바닥 저 아래, 아니 저 땅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누가 있어 현수 자신의 몸을 땅 밑으로 강하게 잡아당겨 끌고 가려는 것 같았다. 보호자 대기실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사람들이 바뀌었다. 현수처럼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며칠 전에는 간암으로 거의 죽게 된 환자 보호자의 푸념을 들어주어야 했다. 둘만 있던 대기실에서 마흔 좀 넘어 보이는 그 여자는 땅바닥을 치면서 울면서 주절거렸다. “글쎄, 집이라도 팔아서 이식 수술이라도 해 달라네요. 세 아이 눈이 새까맣게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들 가르치고 입히고는 어떻게 하라고 저렇게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우. 병원에서는 이제 마음에 준비를 하라는데, 중환자실에서 정신만 돌아오면 나를 붙잡고 저렇게 난리를 치니,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지. 아이구, 나도 힘들어 못 살겠어요.” 그 여자도 전날부터는 대기실에 보이지 않았다. 현수의 남편은 중환자실에서 두 달도 넘게 있다가 눈을 떴다. 그러나 눈만 떴을 뿐이었다. 수술로 뇌의 으깨어진 반쪽을 덜어내 버린 머리는 물웅덩이처럼 푹 꺼져 있었다. 식물처럼 누워만 있는 동안에도 머리카락은 자라 수술할 때 말끔하게 밀었던 남편의 머리에도 까실까실하게 머리카락이 제법 자라 있었다. 눈을 뜨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는 발가락조차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매일 회진해 오는 담당의사도 자세한 설명 없이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지켜 봅시다.’ 하고 가면 그만이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같은 날이었다. 그렇게 한 달 가량이 속절 없이 흘러갔다. 기대한다는 것이 욕심일까하고 생각할 때쯤, 남편이 발가락을 눈에 띌 듯 말 듯 움직였다. 의사가 ‘자주 자극을 주면 더 나을 것 같기는 한데...... .’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 것에 매달려서 현수는 면회 시간 내내 남편의 몸을 여기 저기 주무르고 찌르며 움직임이 있기를 바랐다. 석 달 정도를 중환자실에서 보낸 뒤에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뜨고 머리를 움직이고 발바닥을 찌르는 자극을 주면 발가락을 움직여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일반 병실로 옮겼지만, 더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간혹 격렬한 발작이 오면 온 몸이 뻣뻣한 나무둥치처럼 경직되고 그럴 때는 남편의 표정에 희미한 고통의 표정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누어 있는지 일 년쯤 되면서 의사의 회진도 형식적이기만 할 뿐 별다른 처리나 치료가 없었다. 남편의 사고는 작업 중의 사고로 처리되어 산업재해보험공단이 몇 번의 심사를 한 뒤에 산재 확정 판결이 났다. 일시금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현수는 지긋지긋한 나머지 빚을 갚았고 일정한 금액이 남편의 재해요양 연금으로 나오게 되었다. 남편의 목을 뚫어서 식도로 연결한 관으로 매일 처방해 주는 한 웅큼의 가루약을 주입하고 정해진 시간에 주사를 놓는 것 이상으로 의사가 더 이상 해 줄 게 없다고 했을 때, 현수는 조용한 외곽의 요양병원을 물색하고 남편을 그곳으로 옮겼다.
남산마을을 지나는데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흐린 하늘이 만든 옅은 보랏빛 공기 속에 돌탑 두 기가 마주 서 있다. 현수는 돌탑 주변의 잔디가 파란 크레파스를 짙게 칠한 도화지 같다고 생각한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 뒤 잘라서 세워 놓은 입체 그림 같은 배롱나무 네 그루가 비안개 속에 서 있다. 현수는 이 모든 정경이 사진 프레임에 갇힌 한 장의 흑백 사진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 간의 현수의 기억들은 안개 속의 이 정경처럼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듯 뿌옇고 희미하였다. 언제던가, 현수가 진료 상담 중에 의사에게 물었다. 그때까지 현수는 먼저 의사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의사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는 쪽이었다. ‘그래, 좀 어때요, 어떻게 지냈어요, 요즘 잠은 잘 자나요, 요새는 무슨 생각을 하나요, 약은 괜찮습니까?’ 이런 물음에 ‘예, 괜찮아요. 잠은.......,좀 나아지긴 했는데 꿈은 여전해요.’ 현수의 대답은 늘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은 현수가 자신의 속으로만 수없이 되뇌어 보던 말을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선생님, 저는 왜 살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까요........? 제 남편은 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십 년 가까이 버텨왔을까요?” 젊은 의사는 늙은이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그건 환자분만 아니라 저도 가끔 제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 한 번씩은 하고 살지 않나요? 더구나 지금 소중한 것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면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마음은 더 강하겠지요. 하지만 외부의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겠지만 그런 코마 상태에서도 환자의 남편분은 자신이 버티어야만 가족이 유지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힘겨운 싸움에서 그렇게 오래 버틴 것인지도 모르죠. 누가 알겠어요, 자신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어떤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지. 우리들 자신은 모르잖아요. 하지만 저 위에 있는 어떤 분이 이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 세상 하나하나가 모두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을 겁니다. 나 하나는 아무 의미가 없이 느껴지겠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생각하면 나도 아주 작은 한 조각으로 전체의 조화로움을 채워나가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는데요....... . 작은 조각으로 된 퍼즐그림 맞추기 게임처럼요.” 돌탑을 앞세우고 배경처럼 지키고 있는 저 마을이 없어도, 절도 없이 돌탑만 두 기 덩그러니 서 있는 이 경치가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질까 하고 현수는 생각한다. 마을 끝, 산길이 시작되는 소나무 숲쯤에 왔는데 빗방울이 굵어졌다. 산길 초입에 잡목을 쳐내고 넓은 개활지를 만든 과수원 집 추녀 밑에 서서 잠시 비를 피하려 하는데 그 동안 지나다니며 얼굴을 익혀 놓았다고 생각했던 그 집의 개가 줄에 묶인 채 짖어댄다. ‘쉬잇, 쯧쯧.’ 하고 현수가 어르는 소리에 개는 더 날뛰며 짖는다. 할 수 없이 가방에서 비닐 비옷을 꺼내 입고 현수는 산길로 들어선다. 날씨 탓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처음 암자에 오르기 시작할 때 분홍색 구름같은 꽃을 피우고 있던 진달래 군락도 꽃은 이미 이울고 잎만 무성해서 한 철 화려했던 흔적은 지나가고 없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비닐 비옷 안으로 끈끈하게 땀이 배어나온다. 비 때문에 흙길이 미끄러워서 걷기에 불편하다. 암자에 올라가는 길에 가장 숨이 차고 힘든 곳이어서 사람들이 깔딱고개라고 이름 붙인 가파른 고갯길을 현수는 숨을 헐떡이며 올라간다. 비는 점점 더 심해지고 빗물에 흠뻑 젖은 흙덩이들이 신발에 달라붙어 걷기가 더 불편하다. 하늘의 비구름이 빠르게 서쪽으로 움직여 가는 것으로 보아 비는 곧 그칠 것 같기도 하다. 현수는 큰 참나무 아래 너럭바위 위에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근처에 절로 자란 밤나무가 많은지 비에 젖은 공기에 밤꽃 냄새가 묻어온다. 밤꽃 냄새.........
- 이제서야 당신에게 고백하지만 밤꽃 냄새 때문에 흔들렸던 때가 있었답니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내 흔들림을. 우리가 그 요양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세 해에서 반 년 쯤 더 되었을 무렵이었지요, 아마. 특별하게 위험한 징후 없이 매일매일 비슷한 상태가 지속되는 당신 머리맡에 붙여 둔 나의 하루 일정은 기계처럼 반복되는 행동으로 채워져 있었지요. 목을 통해 위장에 삽입된 관으로 하루 세 번 액체 영양식을 주입하고, 그리고 30분 후에 항생제며 항경련제 따위를 또 주입하고, 그보다 더 자주 기도(氣道)에 고이는 가래를 석션해서 제거해야 했지요. 아침에 얼굴이며 손을 깨끗하게 닦으며 당신의 누운 자세를 바꾸었고, 오후에는 몸을 닦아내며 또 자세를 바꾸어 눕혀야 했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욕창이 생길 테니까요. 다행히 당신은 욕창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었지요. 의식이 없는 당신을 나의 작은 체구로 돌아눕히고,들고, 자세를 바꾸고 하는 것은 굉장한 노동이었지요. 가끔씩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당신이 오래 누워 있는 사람답지 않게 상처 하나없이 깨끗하고 말끔하다고 내게 칭찬을 하곤 했지만, 그들에게 내 손목과 어깨의 심한 통증을 말해줄 필요가 뭐 있었겠어요. 하루하루가 큰 변화 없이 지나가고 당신은 주입되는 음식물을 받아들이고, 눈을 껌벅거리며 깨어 있거나, 자고 있거나, 어린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거나, 기저귀를 통해 배설하고 또 주입되는 액체 음식을 받아들이고 하며 그 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머리맡 창가에 놓아둔 선인장 화분도 당신처럼 그다지 자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시들거나 하지도 않으면서 늘 거기서 거기인 채로 당신과 쌍둥이인 양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정말 궁금했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당신이 머물고 있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어디에 속한 곳인지, 당신과 나는 지금 같은 세상에 머물고 있기나 한 건지. 한때 나와 당신이 한 자리에 들어 서로를 쓰다듬고 한 몸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처럼으로도 여겨졌습니다. 무수한 별들로 가득한 우주가 우리 안에서 빛으로 가득 차 팽창하다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다시 캄캄한 태초의 어둠이 되곤 했던 그 아름답던 순간을 우리가 공유했던 밤도 내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다만 당신은 생존하기 위해서 양육자의 손길이 꼭 필요한 신생아처럼 내게 맡겨졌고, 나는 당신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보육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답 없는 당신을 향한 나 혼자의 주절거림도 그 무렵에는 거의 줄어들어서 나나 돈을 받고 옆 병상 환자를 보살피는 요양보호사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의 건조함에는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요. 어느 날 해바라기를 하러 1층 화단가에 앉아 있는데, 줄지어 지나가는 검은 개미떼를 보았지요. 사람들이 흘렸을 과자 부스러기인지를 하나씩 물고 줄 지어 개미 구멍으로 들어가는 개미들의 보잘것없는 삶에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발로 그 개미들의 대오를 짓이겨버리고 싶었습니다. 어느 시간 이후로 우리가 죽 겪어 오고 있는 삶의 신산함이 지겹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 세상이 우리, 즉 나와 당신이 여기 이렇게 살고 있음을 눈여겨 봐 주기나 하는지 와락 의구심도 들더군요. 그 남자는 다른 병상의 보호자였지요. 한 병실에 네 개의 침상이 있었지만 당신 바로 곁의 환자는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일반 병원의 응급실로 옮겨가고 한 침상 건너에 그 남자의 아내가 누워 있었지요. 처음 그와 그의 아내가 이 병실로 들어오던 날, 의식이 없는 아내를 아기처럼 안고 와서 침상에 누이는 남자 옆에서 어머니인 듯 나이 지긋한 부인 한 사람이 거들기는 커녕 이마 한 가운데 내 천(川)자를 그린 채 그저 혀만 쯧쯧 차면서 남자가 하는 양을 구경꾼처럼 지켜 보며 서 있더군요. 남자의 아내는 제왕절개로 분만하는 과정의 마취에서 아직 깨나지 못하고 있다 하더군요. 태어난 사내아기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력 호흡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내 를 남자가 살뜰하게 보살피더군요. 남자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는 아내는 무심한 의사가 사전에 테스트하지 않은 마취제에 거부반응을 일으켜 수술 중에 이미 뇌 기능이 마비되었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서른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아내를 수발하려고 직장까지 쉬고 있다 하더군요.
어느 날 탕비실에 숟가락이며 컵 따위를 들고 씻으러 갔는데 그 남자도 거기서 무언가를 씻고 있더군요. 두 개의 나란한 개수대에서 말없이 자신의 물건들을 씻다가 개수대 위 선반에 얹힌 세제를 집으려는데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물건 씻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의 유난히 긴 속눈썹이 내 눈에 들어왔지요. 그 속눈썹 끝에 물기 같은 것이 묻어 있다는 것이 내 착각이었는지......... 아직 행복해야 할 젊은 남자의 긴 속눈썹 끄트머리의 물기가 와락 가슴 아프게 애잔하고,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연민을 불러오더군요. 내가 그 남자에게 한 마디씩이나마 말을 붙여보게 된 게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습기가 좀 많은 날씨네요. 이런 날에는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더 신경 써야 해요. 환자의 자세 바꾸기를 한 번씩 더 해 주세요. 주입하는 액체 음식을 이 회사 제품으로 바꿨는데, 맛을 보니까 저번에 먹던 것보다 조금 더 담백한 맛이 나서 이걸로 바꿀까 해요, 아내 분도 이걸로 바꿔 보실래요? 물수건이 없으면 여기 이 일회용 물수건 쓰셔도 돼요.’ 이런 따위의 말들도 겨우 하루에 한 두 번이지만 그때마다 그 남자는 '예,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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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신라문학대상 ]
<단편 소설>
틸란시아에 길들기
박은후
어느 쪽이 맞는 거지. 여러 개의 좁은 통로 앞에서 나는 헷갈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웠다는 기억만 믿고 선뜻 들어섰는데 5열과 6열이 차이를 못 느낄 만큼의 거리로 양쪽에 버티고 있었다. 나는 입구에 선 채 잠깐 망설이다가 왼쪽에 있는 5열로 발을 들여 보았다. 통로 양쪽에 고인의 사진과 이름을 붙인 사각의 작은 벽감들이 바닥에서 천정까지 빼곡히 포개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후욱- 깊은 숨을 들이켰다. 눈 높이였던 것만은 분명한데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관리인을 앞세우고 오빠와 올케가 곧 뒤따라 왔다. 손에 쥔 열쇠꾸러미를 걸음에 맞춰 흔들던 관리인이 단걸음에 7열로 들어섰다. 내가 저울질 했던 두 열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넓은 입구의 오른쪽으로 비켜서서 보면 7열도 동떨어진 거리가 아니었다. 왜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통로 중간에서 관리인이 멈췄을 때 나는 눈높이에 나란히 붙어 있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을 보았다.
관리인이 아버지의 벽감 앞으로 다가갔다. 관리인은 잠금쇠에 전기드라이버를 대고 드르륵 잠금장치를 풀더니 열쇠를 꽂았다. 굳게 닫혔던 벽감의 문이 열리고 둥근 항아리의 윤곽이 드러났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고이 갇혔던 항아리는 오랜 세월에도 윤기를 잃지 않고 전등불빛에 반짝 윤곽을 내비쳤다. 어머니의 벽감도 열렸다. 고인님, 인제 고향으로 모실테니까 잘 가십시오. 관리인은 분골이 든 항아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읊조렸다. 희끗하게 머리가 바래기 시작한 관리인의 나지막한 음성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관리인의 말을 듣고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죽은 자들 속에서 일을 하는 관리인의 목소리에는 혼령과 통할 것 같은 특이한 진동과 빛깔이 깃들어 있었다. 도시의 숨 막히는 납골당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어머니 아버지는 기쁠까.
S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즈니스라 했다. 이재에 밝고 셈에 남다른 감각을 타고난 그녀였다.
“뭘 하든 남는 장사를 해야지.”
“너한테 남는 장사란 어떤 거니?”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던 그녀가 잠시 눈길을 모아 나를 쳐다보더니 남은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바로 이런 거야.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고 자신의 집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패밀리 룸으로 올라갔다. 곧장 창가로 간 그녀는 반쯤 걸쳐진 커튼을 벽 쪽으로 확 잡아 당겼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미세한 은빛 가루가 되어 실내에 흩어졌다.
“틸란시아, 뿌리가 없는 이런 식물을 키우는 일?”
의아한 내 시선이 S의 손끝을 따라 창가에 모빌처럼 떠 있는 화초 한 포기에 가 닿았다. 파인애플 잎을 닮은 화초가 겹겹으로 난 뾰족한 잎사귀를 끝에서 아래로 발갛게 물들이며 천정에서 늘어뜨린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있었다. 화초의 잎사귀 한가운데에서 놀랍게도 곧은 보랏빛 꽃대가 노란 술을 달고 자신만만한 몸짓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흙에 심기지 않은 채 허허로이 공중에 떠 있는데도 어쩌면 저렇게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을 수 있을까.
“흙이 아니라 공기로 사는 특이한 식물이야. 뿌리 대신 잎이 공기 중의 수분과 먼지 속의 유기물을 먹고 살거든. 원래 얘네들 조상이 중남미에 살았는데 지금 세상에 퍼져 있는 종족이 육백 가지가 넘는다는 거야. 이건 그 중의 하나, 이름이 이오난사래. 우 사장네가 키우다가 나한테 던지고 간 게 바로 이거야.”
우 사장네 가족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 언제였던가. 나는 그 식물을 꿈속인 듯 바라보았다. 마치 물고기가 공기 속을 헤엄치는 것 같았다.
“이 식물을 보면 세상이 살 만하다는 걸 느껴. 상식을 깨는 무한한 변칙과 자유. 어때? 꿈을 현실화 시키는 이 환상적인 투자가.”
꿈의 현실화…, 환상적인 투자…? 나는 어정쩡하게 그녀의 말을 되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구상에 이런 식물이 있다는 건 꿈이거나 공상이지 현실일 수 없었다.
“이걸 가져가서 한번 키워 봐. 포기 번식을 해서 얻은 새끼야. 얘가 꽃을 지우더니 밑동에서 이런 새끼를 낳았어.”
S는 용수철 모양으로 가지가 벋은 화분받침대에서 두 개의 틸란시아 중 작은 것을 집어 내게 건넸다. 갑작스런 S의 선심에 나는 엉겁결에 두 손바닥을 오목하게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S가 넓적한 종이봉투를 가져와 아가리를 벌렸다. 나는 그 이상한 식물을 잎이 다칠세라 조심스레 봉투에 집어넣었다.
관리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버지의 분골 항아리를 꺼내 오빠에게 건넸다. 나는 어머니의 것을 받아 안았다. 우리는 천천히 2층 계단을 내려와 납골당을 나왔다. 아침이 무르익은 열 시였지만 장마를 지낸 하늘은 아직 빗기를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낮게 가라 앉아 있었다. 구부러진 내리막길에 이르자 오빠와 나의 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길은 저 아래 공원묘원의 입구 쪽으로 굽어 내리다가 입구 왼편으로 드문드문 나무에 가려진 주차장을 지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더 올라 가면 영결식장이었다. 주차장에 자동차가 많이 보이는데도 납골당을 드나드는 발길이 없는 걸 보면 차의 임자들은 모두 영결식장이나 화장장으로 갔을 터였다. 나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저곳에서 보냈다. 십 년 전에는 어머니를, 더 오래 전에 아버지를 태워 보냈다. 뜨거운 연소실에서 살을 녹인 어머니의 뼈는 아버지의 것에 비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양이 적었다. 161센티미터의 체형을 갖추었던 뼈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마디마디가 가늘고 약했다. 오래 자리보전한 탓이었을 것이다. 칠십 년이 넘게 한 육신을 지탱해 온 뼈마디는 분골기 안에서 가벼운 소리를 내며 수 초 만에 한 줌의 가루로 갈려 나왔다. 아버지 옆에 어머니를 들이고 내려오던 그때 이 길에서 일으켰던 이상한 착시현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댄 듯 세상이 좁아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녹내장 환자처럼 시야의 가장자리가 지워지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워진 자리,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는 터에 자신의 땅을 만드니까. 사는 사람의 숨결과 혼과 생활이 녹아서 오랜 세월을 마치 소나무에서 송진이 흘러 호박이라는 보석으로 화하듯이 땅은 빚어진다. 그렇게 빚어진 땅은 오로지 그 사람의 소유이다. 오래 그곳에 산 사람은 그 곳의 더 깊고 더 넓은 땅을 가지게 된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땅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내 시야에서 지워졌던 망원경 바깥의 세상, 그것은 어머니와 내가 함께 살면서 서로의 숨결을 녹여 공유했던 땅이 아니었을까. 지금 한국에는 내 땅이 남아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땀 흘리고 먹고 웃고 걷고 달린 이십여 년 동안 내 땅은 차츰차츰 엷어지고 사라져버리지나 않았을까. 그런 조바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빨리 나는 내 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직 그 부피까지 가늠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내 땅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S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 나는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 땅을 만날 기대를 단단히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면서 벌써, 채비를 갖추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빨리 땅이 주는 전파를 수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S와 나는 피어슨 공항을 출발해서 시속 천 킬로미터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산맥과 호수와 바다 위를 하루 종일을 날았다. 인천공항 상공에 가까워지자 비행기가 빠르게 고도를 낮추었다.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비행기가 공항 주변의 바다를 낮게 선회할 때부터 나는 무언가에 감전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앉은 오른쪽으로 날개가 기울어질 때마다 싯푸른 바다가 손에 닿을 듯 다가왔다. 바다의 깊고 고요한 뒤척임이 나를 적시고 있었다. 비행기가 곧은 활주로를 향해 사뿐 몸을 낮추는가 싶더니 이내 바퀴가 땅을 그었다. 땅과 바퀴가 만나는 찰나의 굵고 강한 진동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전율이 되어 타고 올랐다. 나는 눈을 감고 사정없이 내달리는 가속도에 저항하면서 속도를 줄여 나가는 육중한 기체의 움직임에 집중을 했다. 긴 활주로에서 숨을 고른 비행기가 천천히 게이트로 진입을 할 때쯤 나는 눈을 들어 좁고 깊숙한 타원의 창틀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서성거리던 내 시선이 비행기 주위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작업복 차림의 세 남자에게 멈추었다. 나는 놀랐다. 그들의 체격이 너무 작고 왜소해 보였던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멀찍이 내려다보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한결같이 약했다. 불과 하루 전에 나는 피어슨 공항에서 형광의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작업을 하던 백인 남자들의 늘씬하고 우람한 덩치들을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네들의 큰 체구에 내 눈이 길들여진 탓에 한국남자들이 작아 보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타지의 득실거리는 서양인들 속에서 한국 남자를 볼 때는 왜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가. 내 눈에 갑자기 무언가가 덧씌워진 거였다. 아니 나는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림은 마치 무명의 화가가 죽은 뒤에 훗날 허름한 창고에서 먼지와 함께 발견되는 그의 필생의 대작을 대하듯 내게 다가왔다. 그림 속의 볼품없는 인물, 그들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갑자기 그들이 내 감정 속으로 뛰어 들어와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방어도 없었던 내 감정이 그들의 발길질에 마구 흐트러졌다. 반가움인지 연민인지 사랑인지 모를 것들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튕겨났다. 바로 그때, 오래 전부터 내 안에서 바람에 쓸리는 한 장의 낙엽처럼 이리저리 뒹굴고 있던 정체 모를 감정 덩어리 하나가 그제야 제 이름을 찾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느닷없는 감정들이 모두 내 땅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한 순간에 알아 차렸다. 나를 감전시키고, 제 나라의 평범한 인물이 등장하는 풍경을 제 나라에서 보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대작이 되게 하고, 모르는 얼굴들을 갑자기 내게 뛰어들게 하는 일, 그것은 내 땅이 없는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빠는 P시의 대단지 아파트만큼 밀도가 높아 보이는 납골 단지를 빠져 나와 H읍으로 차를 몰았다. 도시 어름을 벗어나자 오빠가 속도를 높였다. 새까만 아스팔트에 노란 중앙선이 선명한 찻길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찻길은 조도가 높은 진열장에 갓 올려진 명품 제화점의 신상품처럼 깔끔하고 매끄러웠다.
“오빠, 이 길은…….”
“너 참, 이 길 처음이겠구나. 개통된 지 얼마 안 됐어. 이리로 가면 두 시간이면 도착해. 전에는 세 시간 삼십 분이나 걸렸잖아.”
“오, 정말?”
뒷좌석에 앉은 나는 고개를 돌려 차바퀴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윤기가 까맣게 흐르는 길, 익숙했던 고향으로의 낯선 첫 길이었다. 나 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이 길은 처음이다.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이었을 때 H읍을 떠난 아버지는 줄곧 P시에서 살았고, 훗날 언젠가 이런 4차선 도로가 고향으로 곧장 이어지리라는 상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퇴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버지가 퇴임 후의 귀향을 염두에 두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의 귀향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도 죽은 아버지에게 고향으로 가시겠어요, 라고 묻지 않았다. 고인이라서가 아니라 물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였다. 길을 가다가 누가 이름을 부르면 응, 하고 돌아보듯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돌아오고 돌아가는 그 익숙한 되풀이는 우리의 일상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돌아오고 직장에서 돌아오고 여행지에서 돌아오듯이 우리는 늘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그건 ‘귀’가 지니고 있는 관성 탓이었다. 움직이던 물체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자연의 법칙, 그 물리적 힘을 ‘귀’는 지니고 있어서 늘 가던 곳으로 우리를 가게 만들었고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왔던 곳으로 가게 된다고 믿게 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면서 돌아올 것을 믿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랬다. 그건 내게 평소보다 긴 여행의 시작일 뿐이었고 나는 그 여행을 위해 간추리고 간추린 한 트럭의 짐을 꾸렸던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기억해냈고 그때마다 안도하고 고마워했다. 여행자에게 돌아갈 곳이란 무엇인가를 나는 살갗으로 느끼고 있었다. 관성도 낮잠을 즐기듯 대부분의 시간을 내 안에서 느긋했는데 어느 날 불현듯 나를 재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겨울 한밤중에 깊은 잠에서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 귀의 관성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영하 25도를 넘는 온타리오의 혹독한 추위를 싣고 날카로운 소리로 벽을 훑어대던 바람인 줄 알았다. 나는 저절로 눈을 떴고 촉수 낮은 벽등에 물들어 어슴프레해진 호텔방의 천정을 바라보았다. 초조함이 나를 휘감았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아! 어서 빨리 집으로 가야 해. 나그네의 피로가 가슴에 묵직하게 고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실내의 어둠이 아주 조금 밝아지자 침대 발치 쪽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반닫이가 눈에 띄었다. 반닫이의 오동나무 결과 귀퉁이에 붙은 놋쇠 장식이 한국에서부터의 내 손때 자국을 어둠 속에서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내가 잠든 곳은 호텔방이 아니라고 그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파트 8층 창문 아래로 담장을 휘도는 냇물이 까맣게 얼어 있었고 야트막한 둑에 줄줄이 선 단풍나무 가지가 벌거벗고 우우 바람을 맞는 소리가 들렸다. 저만치 냇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제설차 한 대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내일 아침 두 아이가 걸어서 등교할 다리였다. 여행은 아직 끝낼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느닷없는 조급함으로 관성이 나를 재촉하는 동안 두 아이는 그 다리를 걸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고등학교를 마쳤다. 지금 큰 아이는 토론토의 다운타운에 있는 금융가 빌딩 속으로, 작은 아이는 박사 과정을 밟으러 또 하나의 국경을 넘어 보스턴으로 스며들었다. 작은 아이는 보스턴으로 떠나면서 내게 선물을 남겨 놓았다. 아이가 선물을 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떠난 빈자리를 슬며시 채워 주던 그것을 내가 선물로 여겼던 것이다. 나는 그 선물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 혼자만의 것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천 공항을 나오다가 똑 같은 것을 보게 되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온 S와 내가 공항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갔을 때였다. 어머니 장례 때 보았던 공항이 규모가 많이 커지고 규모보다 훨씬 크게 복잡해진 것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어수선하게 흔들리는 인파와 차량의 물결 속에서 유일하게 질서를 이루는 건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뿐이었다. 표를 끊으려고 S가 줄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S를 따라가던 내 시선이 저만치 줄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두 외국 청년의 등에 멎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이 아니라 백인과 흑인, 두 청년이 메고 있는 배낭에 붙은 그림이었다.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룩한 배낭 한가운데에 커다란 해파리 한 마리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청년들을 향해 한 발짝을 뗐다. 그들에게 가서 그런 해파리가 진짜 있는 거냐고, 그렇다면 이름이 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내 옆에는 S의 짐 가방이 있었고 해파리는 다리가 긴 청년들의 보폭에 실려 금방 인파 속으로 멀어져 버렸다. 희끗하고 둥근 몸통에 틸란시아 잎 모양의 다리를 한 해파리. 작은 아이는 저런 해파리를 알고 있었던가. 저 해파리는 혹시 젊은이들 사이에 은근히 유행하는 무슨 상징이라도 되는 건 아닐까. 나는 모호한 수수께끼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에게 틸라시아가 전혀 새롭거나 진기한 식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젊은 세대인 저들 사이에서 틸란시아는 내가 모르는 어떤 기호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작은 아이는 그렇게 쉽게 내게 그 해파리를 만들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S에게서 받은 틸란시아를 집으로 가지고 갔을 때 나는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S가 해 놓은 것처럼 하면 될 텐데도 나는 그러지를 않았다. 공중에 매달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고 빈 유리잔이나 화분에 그냥 올려놓자니 성의 없이 방치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흙에 심어야 안심이 될 것 같은 내 마음이 이래저래 핑계를 대는지도 몰랐다. 마침 작은 아이가 식탁에 앉아 보스턴으로 가져갈 짐의 목록을 적고 있었다. 나는 식탁으로 가서 아이의 맞은편에 앉아 틸란시아의 밑동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거 어디 심을 데 없을까?” 무심코 고개를 들던 아이가 펄쩍 뛰었다.
“그건 심으면 죽어요.” 아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창고로 갔다. 창고에서 한참 만에 뒤져온 것은 둥글고 반투명한 전등갓이었다. 어떻게 했는지 아이는 전등갓의 오목한 곳에 틸란시아를 붙이고 볼록한 꼭지에 길게 끈을 이어 넓은 주방의 창 가운데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첫눈에 그것은 해파리였다. 아이는 며칠 뒤 보스턴으로 떠났다. 나는 그런 상태로 식물이 자랄 수 있을까 몹시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비현실적인 식물에게 때를 맞춰 물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의심을 비웃듯 그것은 갈수록 싱싱해지는 것 같았다. 아주 조금씩 자라는 것 같기도 해서 해파리로 변신한 틸란시아는 점점 내게 생명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틸란시아에 대한 나의 비현실감이 깡그리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직도 틸란시아는 꿈이거나 공상에 가까웠으므로 나는 그 식물이 내 손에서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해파리를 쳐다보는 횟수가 잦아졌고 아침마다 일어나면 잎의 상태부터 살피게 되었다. 언젠가 부터는 도마질이나 설거지를 하다가도 자주 손을 멈추고 창을 바라보고는 하였다. 그러면 거기, 깊고 넓은 유리 수족관에 바닷물처럼 햇빛이 넘실거리고 해파리 한 마리가 우산 같은 몸을 활짝 펼쳤다가 재빨리 오므리면서 한참을 헤엄치고는 했다.
아이는 틸란시아가 어떻게 그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 주었다. 1640년에 스웨덴에서 태어난 엘리어스 틸란즈라는 식물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학생이었을 때 투르크에서 스톡홀름까지 배를 타고 가다가 배멀미를 심하게 했다고 한다. 지독한 배멀미로 사경을 헤매기라도 했던지 그는 돌아갈 때 배를 마다하고 보스니아만을 돌아서 천 킬로미터나 되는 땅을 걸어서 갔다. 그는 그 일로 틸란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틸란즈(Till lands)는 스웨덴 말로 by land(육로로)라는 뜻이다. 틸란즈가 죽은 지 6년 뒤에 태어난, 역시 스웨덴의 저명한 식물학자이며 식물 분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린네가 틸란즈의 이름을 따서 어떤 식물에게 틸란시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틸란시아였다. 동물의 독성을 공부하는 아이가 어떻게 그런 진기한 식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거 귀한 거 아니에요. 마트에서 팔기도 하는 걸요.’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일주일에 두 번씩 장을 보러가는 나는 마트에서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영롱한 색깔의 꽃이나 특이한 모양의 식물에 눈을 빼앗기긴 했지만 틸란시아가 눈에 뜨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644km나 되는 보스니아만은 겨울철에는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춥다는데 틸란즈는 그 추위를 피해나 갈 수 있었을까. 하늘 길이 열리지 않았던 그때, 아무리 춥고 멀었어도 틸란즈에게 유일한 구원은 땅 밖에 없었다. 땅이 아니면 안 되었던 사나이의 이름을 왜 굳이 땅을 거부하는 식물에게 붙였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땅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틸란시아에게처럼 죽음이 아니면서 틸란즈에게처럼 목숨인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표를 끊은 S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코 베어가! S가 내 코를 아프게 꼬집었다.
차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휙휙 빠르게 밀려나는 나무와 들꽃과 푸새가 쓱 그은 붓질처럼 지워졌다. 오빠는 과속을 하고 있었다. 이 길 위에 오르면 누구나 이렇게 달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속을 하는 것은 오빠가 아니라 길인지도 몰랐다. 길은 쉬지 않고 달리면서 모든 것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던 즈음에 내가 올랐던 길의 속도는 이렇게 빠르지 않았다. 이것의 절반에서 더 자른 절반이 될까 말까. 나는 아직 그때의 속도에 머물러 있다. 내 속도에 걸맞게 부드럽고 낮은 모습으로 묵묵히 앉아 있는 산야를 가로질러 동떨어지게 우뚝하고 강하고 직선적인 이 새 길에 나는 익숙해질까. 길 위에서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잡기도 전에 넘어지지나 않을까. 외국 토양에 적응이 안 된다고 진작 타국 생활을 접었던 우 사장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증권사에 근무했던, 자칭 토종이라던 그는 이 속도에 금방 올라탔을지도 모른다. 해거리로 한국을 찾는 S에게도 길의 속도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투자할 만한 사업거리가 있으면 돌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남겠다고 했다. 전 박사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동창 부부와 함께 아예 캘거리 가까이 더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버렸다. 복잡한 거리, 고층아파트, 거 숨통이 막히지 않아? 나는 천혜의 자연 속에 남겠어. 그것이 이유였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만큼 무겁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늘 글쎄…,였다. 무엇이 나를 떠남과 남음의 경계에서 주춤거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속은 마치 오랫동안 묵힌 밭처럼 키 큰 잡초만 무성해서 나는 아직 거기 발을 들이지 못했다. 밭갈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에 S의 한국행 소식이 들렸고 나는 무조건 그녀의 옆자리를 예약했다. 오빠에게 부모님의 이장 소식을 들은 건 그 뒤였다.
S는 지금쯤 페스트 푸드점이나 커피숍의 투자가치랄지 그런 것을 따지면서 대학가와 대형 몰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사업거리가 여의치 않으면 그녀는 캐나다에 남아서 취미 겸 틸란시아 화원을 차리겠다고 했다. 남는 장사든 아니든, 이라는 그녀답지 않은 토까지 달았을 때 나는 그녀가 틸란시아를 두고 했던 환상적인 투자, 라는 말을 떠올렸다. ‘어디든 적응하는 놀라운 식물이거든. 장소를 가리지 않아. 사막의 바위 틈새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밀림의 축축한 나무 등걸에 발을 뻗기도 하고 높은 산의 암벽에 잡풀처럼 스며들 수도 있어. 얘네들은 어쩌면 장소에 길들여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소를 길들이는지도 몰라. 뿌리가 아니라 공기로 살아가는 식물이라면 그게 가능할 것도 같지 않니.’
그녀는 그새 스무 가지의 틸란시아를 서른 포기나 더 그녀의 창가에 모아 들였고 그 중 다섯 개는 동시에 꽃을 피웠다. ‘나는 틸란시아가 어떤 한 장소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아서 좋아. 다르기는 하지만 길들면 똑 같아지는 게 장소거든. 내게 한국이 그리운 이유라면 떠났다는 것, 그것뿐이야. 떠난다는 건 길들여진 상대에게 쓰는 말이고 그리움이란 떠난 다음에 생기는 거니까. 길듦과 그리움의 관계. 간단한 공식 아니니.’
인생을 비즈니스라고 하는 그녀의 셈 감각이 늘 내게 와 닿는 건 아니었지만 어떨 때는 시간이 지난 후에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공감이 될 때가 더러 있었다. 이번이 그랬다. 무심코 흘려들었던 그녀의 간단한 공식을 나는 어제 저녁 어떤 거리에서 실감을 했다.
불현듯 옛 생각이 났던 거였다. 무턱대고 길을 나선 나는 행인에게 물어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중심가로 나갔다. 대학 시절 유일했던 사랑의 흔적이 어느 구석엔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의 초입에서 나는 일찌감치 그 어리석은 기대를 접어야 했다. 옛 간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거리에서 겨우 옛 영화관 자리와 음악실이 있던 골목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갈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고 환승을 하고 마을버스 정류소로 갔다. 아까와는 반대편 정류소에서 기다렸는데 5번 마을버스가 좀체 오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과 비가 동시에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던 나는 노선을 확인하려고 팻말 뒤쪽으로 돌아갔는데 그제야 팻말에 작은 글씨로 붙어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다른 장소로 가서 타라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쪽지에 적힌 장소를 물어 보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까이 있는 휴대폰 대리점과 편의점과 도넛 가게에 들어가 차례차례 물어 보았지만 한결같이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내가 화성에서 물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 어디냐고 묻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 있을 것이 틀림없는 마을버스 정류장은 화성의 깊은 계곡처럼 그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그들도 모른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여기 살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이방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도 이방인인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하려고 가까운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어둑하게 젖은 거리를 걸어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등을 가리고 있는 우산의 둥근 지붕에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가려진 쉼 없는 발길에 멍한 시선을 뺏기고 있던 나는 갑자기 현실이 수증기처럼 증발되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인가. 내가 있는 곳은…, 캐나다의 어느 거리였다. 낯선 듯 눈에 익은 건물과 생소한 듯 익숙한 간판과 처음인 듯 그러나 코에 설지 않은 공기가 나를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었고 나는 묻지 않아도 좋은 편안함 속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서 있었던가. 오른쪽 앞가슴에 5라는 숫자를 단 마을버스가 눈앞을 휙 스쳐 갔다. 나는 버스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길듦과 그리움의 관계를 셈 했던 S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면서, 머나먼 땅에 이미 내 그리움의 조각들이 심겨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리움을 갖는다는 것은 거기 내 땅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느끼면서, 무엇보다도 타국의 한 모퉁이에 나의 숨결과 혼과 땀이 배어들어 나도 모르게 내 땅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에 놀라면서 나는 온몸으로 빗속을 뛰어 나갔다.
선산 마루턱에 단장한 가족묘는 막히는 데 없이 해를 잘 받는 자리였다. 완만한 경사에 수대의 자손이 너끈히 들어갈 만큼 여유 있게 다듬어 놓은 묘역에 심은 잔디는 방금 모심기를 한 논처럼 떼가 살지 않았는데도 엉성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묘역 가장자리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사촌 남동생이 나를 발견하자 벌떡 일어서서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포옹을 했다. 나보다 열두 살이 적은 그는 내가 도시로 나간 뒤에 H읍에서 태어나 나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지 않았다. 특별한 정이 들 리도 없건만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유난을 떨며 반가워하곤 했다. 허물없이 구는 그의 행동이 오늘 따라 왠지 가슴에 저릿했다.
산세가 기우는 데 없이 터가 안정되어 명당이라고 작은 아버지가 당신이 고른 터 자랑부터 했다. 사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아버지 바로 밑의 동생이었다. 평생을 고향을 지켜 살았던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숙원을 이룬 것이 몹시 흐뭇한 표정이었다. 서울 작은 종조부도 오실 거다. 작은 종조부라면 젊었을 적에 아내와 두 아들을 버려두고 바람처럼 타지로 사라져 처자식과 고향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던 사람이 아닌가. 죽어서 서울근교의 한 공원묘지에 묻혔다더니 그도 돌아오는가. 한사코 반대를 했다던 종조모는 증오와 귀의 관성과의 싸움에서 스스로 패배를 택한 것이리라. 다음 달 스무 아흐렛날로 날을 잡았다. 뿌리째 뽑혀 풀기가 시들해진 잡초더미에 작은 아버지가 쇠스랑을 갖다 대었다.
묘혈은 깊지도 넓지도 않았다.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항아리를 묘혈에 내렸다. 이어서 조심스레 감싸 쥔 어머니의 항아리를 그 옆으로 옮겼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틸란시아가 보이는 걸까. 작은 아버지의 손에서 나는 아주 잠깐 틸란시아를 보았다. 그것은 손바닥과 항아리 사이에서 방금 분무기로 샤워한 듯 싱싱했다. 어머니의 유골에 착생이라도 했단 말인가. 말이 안 되는 착각이었다. 그럼에도 그 둘의 의외의 어울림이 더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어디선가 저 비슷한 그림이라도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틸란시아는 정말 장소를 길들이는 힘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식물의 생존원리를 벗어나 밤이 되어도 이산화탄소를 내뿜지 않는 틸란시아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뿐인가. 틸란시아는 내 주방의 창을 한 마리 해파리가 너울거리는 작은 바다로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사라진 세대인 조상의 묘역에서 틸란시아는 이제 내게 꿈이나 공상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현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묘혈을 흙으로 덮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다시 어딘가로 가야할 일이 없는 그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내년쯤 다시 와서 여기 다져 놓은 황갈색 흙 위로 푸른 잔디가 바람을 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나는 그들의 외롭지 않은 시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시장기에 쫓겨 음식이 차려진 돗자리로 몰려갔다. 나도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올라 종조모가 차려놓은 음식 앞으로 다가 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탕국에 숟가락을 넣었다. 네모지게 썰은 두부와 무와 국물을 한 술에 떴다. 목구멍에서 저절로 하아,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혀가 느낄 수 있는 절정이 이런 것일까. 많이 먹어라. 거기서는 이런 거 맛보기가 힘들지? 종조모가 눈가 가득 주름을 지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맛보기 힘들다니요. 아예 구경도 못해요. 종조모는 찜통에서 탕국을 한 국자 더 퍼더니 줄지도 않은 내 국그릇에 넘칠 듯이 채웠다.
“그래 이제 돌아올 거냐?”
작은 아버지가 물었다. 막 떠 넣은 밥과 탕국이 입에 꽉 찼던 나는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요새 다들 기를 쓰고 외국이 좋다고들 나가더라만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가 제일이지.”
나는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짭짤하게 간이 밴 조기 살을 뜯었다. 노랗게 삭힌 콩잎 김치를 내 앞으로 밀어놓으며 종조모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들 공부가 끝났으니 와도 되겄네. 뭘.”
조기 살을 집던 내 손이 흠칫 멈췄다. 아이들 공부만 끝나면, 딱 그때까지만 있다가 오는 거야, 라고 남편에게 내가 못을 박지 않았던가. 나는 감추었던 물건을 들킨 도둑처럼 당황했다. 그랬다. 두 딸의 공부는 끝나 있었다. 이젠 아무도 내게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종조모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잡초더미가 무성한 내 마음 밭에 낫질이 시작된 것을 느꼈다. 잡초가 스러진 자리로 떠밀리듯 들어섰다. 거기 고스란히 묻혀 있던 기억 하나가 발끝에 부딪히면서 나와 부닥뜨리고 있었다.
작은 아이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공항의 국제선 출국 게이트는 단체 여행객들로 혼잡했다. 아이는 ㄹ자로 줄을 친 테이프 사이에서 줄을 따라 조금씩 앞으로 갔다. 제 덩치보다 커 보이는 랩탑 가방을 어깨에 멘 아이는 검색대 쪽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줄의 방향이 바뀌면 잠깐 나타나서 좁은 간유리 문틈 사이로 손을 흔들곤 하던 아이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검색대로 빠졌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ㄹ자의 맨 앞줄에서 아이가 한 번 더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만 가지, 하는 신호로 남편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남편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다른 걸 보고 있었다. ㄹ자 줄의 맨 앞에서 얼핏 모습을 드러낸, 막 꽃봉오리를 맺은 한 포기 틸린지아였다. 틸란지아의 당당한 모습은 이내 덩치 큰 서양인들의 어깨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박사 후 과정을 위해 다시 유럽으로 갈 저 아이가 언젠가는 아프리카의 오지로 날아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S의 말이 번개처럼 스쳤다. 꿈의 현실화. 뿌리가 없는 건 아냐. 여기 이파리에 무수히 돋은 솜털 같은 거 보이지. 이게 양분을 빨아들여. 뿌리의 개념을 화끈하게 뒤엎은 식물이지. 그때 내 귀에 벨 소리가 들렸다. 이제 여행이 끝났으니 호텔 침대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내 안의 여행자가 모닝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 자리에 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저절로 나를 움직이게 해 줄 ‘귀’의 관성이 힘을 다해 버렸다는 것을. 언제인지 모르게 관성은 바닥이 났고 그 바닥에 새로운 힘이 저절로 흘러들었던 것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있던 물체가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려고 하는 물리적 성질, 그 새 힘은 귀의 관성과 맞서는 또 다른 관성이었다.
이제 돌아가려면 내 스스로가 시동을 걸어야 했다. 내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 종조모의 미소 앞에서 나는 글쎄…,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도 모를 웃음을 그냥 씩 웃고 있었다.
과식을 했다. 바지 벨트를 끌러야 숨쉬기가 편할 것 같았다.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사촌 남동생이 커피믹서가 담긴 종이컵을 내 앞으로 밀어 놓고 보온병의 꼭지를 눌러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는 지방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H읍 근처의 중소 자동차 부품 회사에 취직을 했고 차근차근 승진을 해서 지금은 과장이 되어 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대학 시절과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는 H읍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나는 일어나서 벨트를 느슨하게 늦추고 벗어놓은 운동화를 신었다. 사촌동생이 따라 일어났다. 우리는 커피잔을 들고 묘역 바로 뒤쪽으로 벋은 아담한 능선에 올라갔다. 비탈을 타고 흐르는 밭뙈기와 그 아래 아버지가 낚싯줄을 드리웠던 연못이 내려다 보였다. 나는 변하지 않은 구석진 산야를 동공에 집어넣을 듯이 바라보았다.
“누님, 혹시 돌아올 생각이 있는 겁니까. 한 번 나가기도 힘든 외국인데. 잘 생각하셔야죠.”
“그러게. 쉬운 결정이 아니야. 거기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내가 여길 떠나면 돌아오고 싶어질까 하는…. 그런데 그땐 미련이 안 생기더라. 언제 떠나도 섭섭하지 않을 장소에 사는 건 슬픈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없어.”
“허, 참. 누님, 거기다 진작에 뿌리를 콱 박아버리지 그랬어요.‘
“뿌리라는 게 박는다고 다 잘 자라는 게 아니잖니.”
“아하, 거추장스럽게 장소를 가린다 그 말이군요. 맞아요. 뿌리란 거추장스런 거죠.”
그가 빈 커피 잔을 왈칵 한 손에 우그러뜨리더니 포환던지기 선수처럼 앞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구겨진 종이컵은 멀리 가지 못하고 바로 눈 아래 도토리나무 잎을 스치면서 가볍게 떨어졌다.
“향수라는 거, 저도 그런 병 한 번 앓아 봤으면 좋겠어요. 허허허!”
사촌동생의 시선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굽이굽이 멀어지는 능선 너머로 날아갔다. 지난 한때의 꿈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의 시선이 점점 아득해졌다. 그는 아마도 H읍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도 한 포기 틸란시아와 같은 삶을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가슴을 더듬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저만큼 옆으로 비켜나서 담배에 불을 당겼다. 라이터의 불꽃이 빨갛게 담배로 옮겨 붙는 것을 보다가 눈을 돌리는데 사촌동생이 섰던 자리에 손바닥만 한 새끼 소나무가 보였다. 그의 발에 밟혀 있었던지 소나무는 황갈색 흙 위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았다. 반쯤 드러난 뿌리가 보였다. 실 같은 뿌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줄기를 일으켜 세운 뒤 흙을 한 움큼 팠다. 장마철의 습기를 흠뻑 머금은 부드러운 흙 알갱이가 손에 가득 쥐어졌다. 나는 흙을 뿌리에 덮고 손 삽으로 꾹꾹 눌렀다. 땅이 단단해지도록 자꾸 눌러 주었다.
- 끝 -
신라문학대상 소설 심사평 틸란시아에 길들기 외
자주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지만, 심사에 임할 때마다 긴장한다. 어떤 도발적 상상력과 조우할 것인가, 하는 기대 때문이다. ‘새로움’이란 기존 가치의 전복이며, 부정을 자양분으로 싹트고 성장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과학 발전은 오직 편견, 자만심, 열정들이 이성과 합리성에 반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했다. 즉 일탈과 실수의 반복이 과학발전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그러한데 하물며 문학에 있어서랴. 그러나 매번 그렇듯이 이번에도 긴장은 곧 스러지고 말았다. 기대했던 일탈과 도발적이고 엉뚱한 상상력을 창작의 터전으로 삼은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재 제한을 풀어 응모작 편수가 1백 편 가까이 대폭 늘어났다지만, 신인의 패기 넘치는 참신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부생활이나 낯익은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나간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생기발랄한 젊은이의 이야기보다 나이 지긋한 이들의 묵은 경험담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신라’와 관련된 작품이 몇 편 보였으나 익히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재료로 낯익은 방법으로 구워낸 빵맛이 어찌 구미를 당길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서 ‘황룡사의 연인’, ‘처용의 노래’, ‘틸란시아에 길들기’ 등 세 편을 두고 최종심에 들어갔다. ‘황룡사의 연인’은 황룡사 9층탑 건립 과정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소설적 상상력에 의해 역사적 사실을 보완해 낸 점이 눈길을 끌었다. 전쟁발발 직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탑을 완성시킨 백제인 아비지의 장인 정신이 돋보이고, 그 딸 우아와 신라 화랑 진원의 잔잔하게 펼쳐지는 사랑 또한 호감이 갔다. 그러나 묘사보다 설명으로 처리한 부분이 많고 문장 또한 평이하여 아쉬웠다. ‘처용의 노래’는 1년여 전에 사별한 아내의 생전의 행적을 회고하며 ‘따뜻한 동행’이 되어 주지 못했던 남편으로서의 회한을 차분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자동차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아내의 의문의 행적에 전전긍긍했을 뿐,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원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내만의 외로움과 방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뉘우치는 남편의 망부가(亡婦歌)가 애절하다. 안정된 문장, 차분한 전개 등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작품의 벽을 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틸란시아에 길들기’는 부모의 유골을 고향 선산으로 옮겨와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중심축으로 해외 이민자들의 애환과 마음의 무늬를 섬세하고 적실하게 그려나간 작품이다. 흙이 아니라 공기 중에 생장하는 특이한 식물 틸란시아처럼, 태어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낯선 타국에서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해외 이주민의 생활과 감정의 기복을 상징과 환유를 구사하며 능란한 문장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간 우사장네, 더 한적한 산속으로 들어간 전박사 일행, 죽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부모의 유골. 그리고 보스턴으로 떠나는 둘째의 모습과 인천공항에서 조우한 흑백 청년의 배낭에서 본 틸란시아의 실루엣, 우리 모두 ‘뿌리’를 일탈한 세계의 유랑인들 아닐까! 그 때문인가, 새끼 소나무의 실 같은 뿌리를 꾹꾹 눌러 단단하게 심어주는 화자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잔상을 일으키며 오래 남았다. 두 심사위원은 흡족한 마음으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덧붙여,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제약회사 약물시험)’에 참여한 취업 준비생의 방황과 번뇌를 그린 작품 ‘코발트불루와 다른’이라는 작품이 있었으나, 소재의 장악력이나 주제를 파고드는 집요함이 부족했다. 문장이나 작품을 매만지는 솜씨도 앞의 세 작품에 훨씬 미치지 못해 ‘젊은가치’와의 조우를 기대했던 갈증을 풀 수 없어 아쉬웠다.(정종명, 서동훈, 유익서씀)
*당선 소감(박은후)
몸을 비운 감나무처럼
울을 친 대나무 숲을 바람이 흔들고 있었다. 대 잎사귀들이 몸을 비비는 소리와 뒷산 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문장을 가다듬었다. 빙 둘러쳐진 산 속 어디 방향을 모를 곳에서 가끔 노루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원고를 들고 우체국을 향해 집을 나섰을 때, 아직 익지 않은 감들이 대문 곁에서 주렁주렁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내게 벅찬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주 넘어졌습니다. 바람이 거센 길에서 때로는 돌부리에 걸렸고 때로는 비탈에서 구르고 때로는 스스로의 헛발질에 걸려 자빠지기도 했습니다. 상처가 아물 무렵이면 또 넘어졌습니다. 길은 내게 계속 나가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달릴 수 없어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주저앉는 건 외로운 길에서 구르고 다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다리를 끌며 조금씩 앞으로 몸을 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허락을 받았습니다. 주저함 없이 소설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 상은 비로소 제게 허락을 해 준 것입니다.
대문 곁의 감나무는 이제 잎을 다 지우고 가장 높은 가지에 세 알의 까치밥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농익은 몸으로 몇 입 새의 부리를 기다리는 까치밥을 올려다보는 눈이 시립니다. 새삼 목이 멜만큼 온갖 것들이 아름답습니다. 거듭날 봄을 위해 몸을 비운 감나무를 향해 이번에는 내가 크게 손을 흔듭니다.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께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소설의 미로에서 길찾기를 하도록 도와주신 윤후명 선생님 고맙습니다. 느슨해진 끈을 옥죄어주기를 서슴지 않았던 고마운 친구 옥자와 허샘, 국민대학원의 최규익, 황광수, 김택근 선생님, 오랫동안 지켜보기의 문우님들, 그리고 전상국 선생님도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최선을 다해주었던 남편과 든든한 후원자였던 두 딸에게 이 기쁨의 다발을 통째로 안깁니다.
*프로필
박은후 (본명 박미자)
1956년 경남 합천 율곡면에서 출생. 국민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수필>
갈목비
어두운 터널의 수렁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다. 여우비가 내리던 날 금빛 모래 쓸리어 내리는 강을 건너, 진달래가 흐드러진 산길을 지나, 너울너울 꽃상여를 타고 먼 길을 떠나셨다. 살아온 인생길 가장 화려하고 호강스런 순간이었다. 동구길에서 아버지를 보내고 일곱 계단을 올라 두 평 남짓 당신의 체취가 배인 사랑방을 찾았다. 문을 열자 움츠려있던 방의 기운이 보무라지처럼 풀썩 일어나 소스락거렸다. 당신의 향기였다.
아버지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가녀린 몸으로 농사일을 하셨다. 너울가지가 없어 아무 말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들의 밭갈이며 힘든 일을 도와주시던 듬쑥한 분이었다. 풀에 할퀴고 밭일에 무디어진 손으로 농사일이 끝나면 쉬지 않고 갈목비를 엮으셨다. 손놀림이 빨라지는 만큼 아버지의 손끝도 모지라 지문이 지워져갔다. 하지만 그 손끝에는 당신의 행복이 숨어 있었기에 한 순간도 소홀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 가만히 누워본다. 정사각의 공간이 참 좁다. 천정도 저리 낮았을까? 이 집에서 유일하게 당신의 공간이었던 방, 주인을 잃은 방엔 고요를 더한 적막이 들었다. 한줄기 빛기둥이 뚫린 창호지 문구멍을 통해 새어든다. 아니 그것은 빛기둥이 아니었다. 모래알 보다 작은 금빛 찬란한 입자의 무리였다. 문구멍을 통해 새어든 입자들이 네 귀퉁이 천정을 천천히 순회하다 기웃대듯 낡은 옷장 위에 잠시 머물렀다. 천천히 벽을 타고 내려와 낮은 문턱 옆에 서성거린다. 반쯤 닳은 갈목비가 잠깐 들썩 거렸다. 나풀 댄것도 같다. 시나브로 금빛 입자들은 다시 창호지 문구멍을 통해 서서히 타래 치며 구름발치 아래로 사라졌다. 순간 아버지를 만났다. 내 착각이어도 좋았다. 당신의 영혼이 떠나시기 전 다시는 못 올 이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시는 거라 믿기로 했다.
계절 중 가을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겨울도 좋았다. 언제나 일그러진 표정의 아버지는 가을이면 낯꽃이 환하게 피었다. 겨울이면 그 얼굴에 튼실한 열매가 맺혔다. 내가 좀 곰살갑게 굴면 평소 없던 너털웃음마저 웃으셨다. 가슴이 넉넉해지는 시간이다. 우리는 가으내 갈대를 꺾었다. 성지미 개울가에 숱 많은 갈대가 있고, 삭골 논 옆에는 잎이 잘 떨어지지 않는 갈대가 많다고 아버지는 일러주셨다. 경험에 따라 밀절미가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며 익혔다. 더러 억새를 꺾어와 갈대라고 우기는 막내딸을 보고 너털웃음으로 갈대와 억새의 차이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설명해 주시던 당신이셨다. 마뜩한 갈대를 꺾어 올 때마다 웃는 얼굴이 좋아 나는 연신 푸서리 가득한 강가에서 갈대를 꺾으며 방글거렸다. “일은 즐겁게 하는 거란다. 즐겁게 해야 쉽게 할 수 있지. 그리고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면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해야지.” 평생토록 내 삶의 지침이 되어준 입버릇 같은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막 피기 전 갈대를 사용하셨다. 이미 꽃이 피어버린 것은 꽃잎이 바람에 흩어져 빗자루로는 쓸 수가 없다. 꽃 피기 전 갈대를 꺾으려면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했기에 항상 강기슭을 기웃거렸다. 한 줌 두 줌 모인 갈대는 저녁이면 소여물 솥에 푹 찌셨다. 설마르지 않게 며칠을 그늘에서 정성스럽게 손질하셨다. 볕을 보면 잎이 너무 말라 바스락 거리며 부서지기 때문에 더디 마르더라도 항상 볕이 들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 한 귀퉁이에 긴 줄을 엮어 매달아 두곤 하셨다. 알맞은 바람과 정성스러운 손길에 질 좋은 재료가 준비되는 것이다.
가으내 모인 갈대는 농사일이 끝난 겨울이면 하나 둘 갈목비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숱이 많은 실팍한 방 빗자루를 엮으셨다. 반 타원형의 숱이 타박하고 손잡이가 통통한 짧은 빗자루는 다른 것과는 달리 방안의 작은 먼지까지 깨끗하게 비워내는 마술을 부려서 인기가 좋았다. 하나의 갈대가 열 개의 무리로, 그 열 개의 무리가 모이고 모여 한 자루의 갈목비가 완성되기 까지 때로는 종일 걸렸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의 빗자루를 참 좋아했다. 더러 엮는 분도 있었지만 유연 노장한 아버지의 매운 손끝이 만들어내는 비법을 따르지는 못했다.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당신들이 쓰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도회지에 있는 자식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매년 갈목비는 부족했다. 동네사람들은 완성된 빗자루를 받으며 한 두 갑의 담배를 선물로 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당신께선 손사래 치셨다. 사랑방 동쪽으로 난 창호지 문 옆에는 천정에 가까운 가장 높은 벽에서부터 갈목비가 하나씩 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성된 빗자루는 곧 주인을 찾아 떠났다. 처음으로 만든 것은 새 살림을 차린 자식에게 주셨다. 나에게는 작고 귀여운 나만의 것이 쥐어졌다. 특히 고마웠던 분들은 잊지 않고 챙기셨다. 그것이 당신께서 그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었다. 그 다음순서가 주문받은 것이었다. 빗자루를 받아 드는 그들의 표정과 감사의 말들이 당신께서 오랜 동안 갈목비를 엮게 하신 비결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배우지 못한 무지와 열등을 줄이고 자존감을 상승 시키는 아버지만의 슬기주머니였는지도 모른다.
여덟 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5형제 중의 막내였던 당신은 큰어머니 손아래서 자랐다. 유난히 작은 키에 가지처럼 마른 체구, 배우지 못한 열등, 한글에 대해 까막눈이었던 이유로 움츠러들었다. 전 재산과도 같았던 집을 아주 헐값에 팔고 난 후 처음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앓으시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 물질에는 욕심이 없던 분이셨다. 집 짓는 일을 하는 큰외삼촌의 권유에 없는 돈 긁어모으고 빚까지 얻어 집을 지었다. 그 집에서 큰 언니가 공장을 다녔고, 오빠 둘과 작은 언니가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골수염을 앓던 내가 머물며 병원을 다녔다. 그런 집을 언니들 시집보내랴, 오빠들 장가들이랴 형편이 부족한 탓에 지인의 소개로 팔았는데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집이 두 배로 뛰어 오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건 돈에 대한 욕심만은 아니었다. 평소 배우지 못한 무지함과 보고 듣는 귀가 어두워 헐값에 속아 팔아버린 것에 남세스럽고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런 열등을 잊고 자존감에 꽃을 피우게 만든 것이 갈목비였다.
“아제가 엮은 빗자루가 최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동네 분들의 말씀속에서 당신의 능력을 인정받음이 큰 기쁨이고 위안이었을 것이다. 집집마다 아버지가 엮은 빗자루가 없는 집은 없었다.
아버지는 갈대를 만질 때는 여유가 있었다. 가끔은 목청껏 노래도 부르셨고, 더러는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 옆에서 갈대 이삭을 정리하며 도란거리는 시간이 유일하게 부녀가 나누었던 즐거운 시간이었고 행복한 추억이었다. 당신의 헛기침 소리와 갈대 부딪는 사그락거림은 어둑새벽이 되어서야 조용해지곤 했다. 여린 갈대로 태어나 하나의 빗자루로 만들어져 평생토록 온 방안 먼지 비워내며 몸이 닳도록 제 역할에 충실하는 갈목비는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의 가풀막 같은 삶과도 닮았다.
생각해 보면 갈목비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지혜로운 삶의 지침이었던 것 같다. 갈대가 피기 전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여겨봐야 하듯, 적절한 시기의 중요성과 관심을 가르쳐 주셨다. 성급함 없이 천천히 말리는 일에서 인내와 진중함을 보여 주셨다. 추운 겨울 갈목비를 엮으며 시간의 활용법과 게으름 없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는 법을 알게 하셨다. 자신이 좋아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진정한 행복의 느낌을 일깨워 주셨다. 나누는 마음에서 기쁨을 얻게 하셨고 인정받는 삶의 소중함도 알려주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일일이 갈목비를 엮으며 가르치던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갈목비를 통해 준비하는 삶. 최선을 다하는 삶, 나누는 기쁨과 참 행복을 가르치려 하셨던 것 같다.
들썩이던 갈목비를 동행시키기로 했다. 동구길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너울너울 바쁜 걸음으로 꽃상여를 뒤따랐다. 당신의 생을 가장 빛나게 해 주었던 유일한 자존감이었고,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던 갈목비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가을바람으로 지천에 갈대가 은빛 물결처럼 일렁인다. 이 가을 아버지는 하늘나라 어느 한 모퉁이에 자리 틀고 앉아 처렁처렁 목청껏 노래하시며 갈목비를 엮고 계시지는 않으실까?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 사이로 백발의 인자한 아버지 모습이 오버랩 되고 있다. (20.7장)
수필 심사평
수필글은 타 장르와 마찬가지로 미(美)를 추구하는 글이다. 수필이 미를 추구하는 창작 품임에랴. 그래서 순수창작이 되지 않으면 단박 낙제다.
때때로 수필을 얕잡아보아 창작성이 없이 미사려구를 늘어놓거나 난삽한 문장으로 지식 자랑을 하는 글들은 볼 게 없다. 그래서 우리 심사위원들은 전적으로 창작성(문학성)의 유무에 치중하였음 밝혀둔다.
그 결과 예심에서 4명을 뽑아 엄중하게 논의하고 최종심에 다음과 같이 3명을 선정했다. 그래서 최우수작으로 「갈목비」로 정하고, 우수작으로「명품」과「둥지」를 뽑았다.
「갈목비」는 소재가 매우 참신하고 화자의 중심사상이 돌올이 빛났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빗자루에 불과하지만 가난한 아버지의 정성과 공이 들어있는 예술품으로 이웃과 가족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작은 공작품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장인정신은 타에 모범이 된다하겠다.
최종심에 올라온「명품」과「둥지」는 그 내용이 스토리텔링 시대에 전해주는 이야기가 아주 재미가 있었다. 특히「명품」작품은 명품가방 보다 동생의 마음이 더 명품이었다는 누나의 해석이 퍽 인상적이었고,「둥지」는 비둘기 둥지를 인간의 둥지에 빗대어 써놓은 감명 깊은 글이었다. 보다 좋은 수필을 써서 큰 별로 뜨길 바란다.
심사위원: 도창회(글), 구활
당선소감
여고시절부터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진솔한 삶을 이야기하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는 그 순간은 지친 삶도 잊게 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추억은 아픔조차도 그리움이며 소중함이라는 것을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카메라맨이 사각 틀 안에 가장 아름다운 화면을 담고 싶어 하듯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원고지에 담으며 소소한 기쁨을 느낍니다. 반듯하게 살아주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가르침과 본보기가 되어 주셨던 삶은 글밭이 되어 주었습니다. 글을 써 놓고도 부끄러워 남들 앞에 보이지 못하던 저에게 문학인의 길로 이끌어 주신 Y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떤 글을 써도 엄마의 글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 치켜드는 딸과 아들, 믿고 바라보며 응원해 주는 든든한 남편에게 기쁜 소식과 함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상처받아 힘겨울 때 영주문예대학 문을 두드린 것이 오늘의 영광을 얻게 한 것 같습니다. 회의와 실망으로 주저앉을 때마다 칭찬으로 일으켜 세워 주신 P 선생님, 수필에 대해 걸음마를 할 수 있게 손잡아 주신 K 선생님, 늘 따뜻한 시선으로 조언해 주신 김점순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같은 꿈을 가지고 매주 목요일 저녁 열정으로 교실을 달구며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준 문예대학 모든 회원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문학공모를 통해 등단하는 것이 꿈이었던 저에게 그 기회를 주시고 소중한 꿈까지 이루게 해 주신 신라문학대상운영위원회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따끈하게 가슴을 데우는 진솔한 글을 쓰는 수필가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25회 신라문학대상 ]
제25회 신라문학대상 소설 당선 작품 (2013년)
물계자의 노래
노 이 령
*
서 교수의 연구실에서 말라비틀어진 행운목을 싱크대에 옮겼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주 경찰서였다.
“김정인 씨죠?” 날카로웠다. 내 이름을 확인한 저의를 숨기지 않는 투였다.
“네, 그런데요.”
“서영식 씨, 아시죠?”
나는 서 교수의 죽음을 직감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정인 씨! 이거 끊긴 거 아냐? 여보세요?”
떨리는 손으로 수도 밸브를 열었다. 오랫동안 수도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줄기가 거세게 쏟아졌다. 행운목이 흠뻑 젖고 화분에 담겨 있던 돌 알갱이들이 쓸려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행운목을 건드려보았다. 힘없이 흔들거렸다. 뿌리가 썩어버린 듯했다.
같은 번호로 두 번 더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받을 수 없었다. 싱크대 선반 위에서 요란한 진동음이 울리다가 멎은 뒤 행운목 잎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툭, 툭 떨어졌다.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 연락 바랍니다. 경주서 박 경위.
*
서 교수는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이후에 종적을 감췄다. 교수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서 교수가 그렇게 서둘러 학교를 뜰 줄은 몰랐다. 연구실은 그대로였다. 핸드폰도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서 교수는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은 채 학교를 떠났다. 딱히 연락할 길이 없었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사람이었다. 전처가 서울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했으나 전처에 대해 들은 건 그게 전부였다. 서 교수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난 후, 나는 경찰서에 갔다. 실종 신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기거하던 집에도 없으며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실종 신고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가족이 없다는 것도 참작되지 않았다.
“그 교수라는 사람이 위험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유서나, 선생에게 보낸 메시지라든가, 뭐, 그런 거요.”
경찰이 말한 구체적인 정황이란 내 머릿속에 있는 거였다. 나는 별 소득 없이 경찰서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
2년 전 고전시가를 담당하던 한 교수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그 자리에 서 교수가 특채로 들어왔다. 서 교수는 지방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으나 고전시가 분야, 특히 향가 장르에서 독보적으로 연구물들을 발표하여 웬만한 현대문학 전공자들도 이름자 정도는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2년 전 학과장이었던 최 교수가 많은 공을 들여 서 교수를 초빙해 오기 전까지 그는 영남권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 외엔 모든 시간을 개인 연구에 할애했었다. 최 교수가 서 교수에게 전임강사 자리를 처음 제안했을 때만 해도 서 교수는 연구 시간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다고 한다. 최 교수가 그 후 어떤 말로 구슬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충 예상할 수는 있었다. 최 교수가 기획하고 있는 연구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주제가 바로 향가였던 것이다.
서 교수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좋다, 라는 평가는, 그 평가의 대상이 자신의 생활 반경을 침범하지 않을 때 더욱 후하게 내려지는 것이었다. 평생을 주정뱅이로 살다가 농수로에서 발을 헛디뎌 익사한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 기억 속엔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취했지만 그건 집에서만의 일이었다. 어머니와 나에게만 재앙이었지, 울타리 너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 교수는 권력을 좇지 않았으며 물욕에 찌들지 않았다. 그리고 착한 사람이었다. 내가 조교 자리가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 서 교수는 본래 계획에 없던 연구조교를 신청하여 내게 자리를 내주었다. 학교에서 따로 공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는데, 2층에 빈 연구실을 임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해준 사람도 서 교수였다. 그러나 그런 서 교수의 선의마저 불편하게 생각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서 교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들이 힘들게 쌓아온 이력과 덕망의 울타리를 함부로 넘어와 그들의 세계를 마구 휘저어버리는 어깃장이나 다름없었다.
*
핸드폰을 다시 열어 보았다. 낯선 지역번호가 눈에 서걱거렸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안녕하세요. 시면 곁을 지키는 든든한 경찰, 경주 경찰서에서는 시민 여러분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안내 멘트가 다시 반복될 때까지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 찰나 안내 멘트가 툭 끊겼다.
“여보세요?”
안내 멘트와는 달리 의외로 간결한 응대였다.
“박 경위님 좀 부탁드립니다.”
“전데요, 어디시죠?”
“아, 저, 김정인입니다. 아까 전화 받았던.”
“아, 네, 네. 통화가 잘 안 돼서 걱정했는데, 마침 전화를 주셨군요.”
경주에서 근무하는 경찰인데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박 경위가 구사하는 표준어는 어떤 편견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만큼 견고해 보였고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인다는 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박 경위에 대한 신뢰가 마음속에 가득차 있던 불안을 보다 확고한 두려움으로 변화시켰다. 나는 목울대에서 응고돼 있던 불안을 천천히 뱉어내었다.
“저, 혹시…… 교수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요?”
“네, 유감스럽게도 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사건은 매듭지어졌지만, 궁금한 것도 있고, 또 장례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아, 김정인 씨께 의무는 없습니다. 관할 구청에 통보하면 장례 문제야 뭐…….”
박 경위는 말끝을 흐렸다. 주저하는 것 같았다. 박 경위가 삼킨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저,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
학부생들은 서 교수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가 이번 1학기 때 담당한 전공과목은 ‘고전시가 강독’과 ‘고전시가론’이었다. 서 교수의 강의는 향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교재는 따로 없었다. 최 교수가 학교 출판부에서 발행한 『향가 연구』’라는 책이 있었지만 그 책을 교재로 선정하지 않았다. 강의 때마다 학생들이 알아서 해당 작품을 준비해오는 식이었다. ‘고전시가 강독’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향가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를 하게 되고, ‘고전시가론’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균여의 [보현십원가]의 주해까지도 막힘없이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서 교수의 강의를 들은 고학년들 열에 아홉은 향가에 관한 졸업논문을 썼다. 그러다 보니 다른 교수들과 자연히 비교가 되었다.
‘국문학개론’을 가르친, 정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이 교수는 교재에 빽빽하게 들어찬 한자 해석에만 열을 올렸다. 한자를 알아야 국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가르침보다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선택한 교수법이라는 걸 고학년들은 다 알고 있었다.
또 권 교수는 최근에 자신이 집필한 『21세기 新시론』이라는 책을 ‘현대시론’ 강의 교재로 활용했다. 말이 신시론이지, 지방 문인들이 자비로 출판한 시집에 실린 발문을 엮은 것이었다. 어용교수로 유명해서 고학년들은 알아서 회피하는 교수였지만 전공 학점이 부족한 경우 울며 겨자먹기로 들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거기에 덧대어진 권 교수의 측은하기까지 한 사변을 욀 수밖에 없었다.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 두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고만고만했다. 적당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 일찌감치 교수 자리를 꿰찬 유형들이었다. 중간고사는 리포트로 대체하고, 기말고사는 교재 내용을 달달 외고 있으면 능히 쓸 수 있는 문제를 냈다. 학생들과 특별한 갈등을 빚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어서 강의 평가 점수도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그런 틈에서 서 교수가 눈에 띄는 건 당연한 거였다. 향가에 대한 강의를 한다고 해서 향가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헌화가>에 대한 강의를 할 때는, 서정주의 <수로부인의 얼굴>이라는 시를 학생들에게 보이며, 수로부인의 고혹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에 대해 헌사를 늘어놓았다. <처용가>를 이야기할 때는 김소진의 소설 <처용단장>을 함께 들먹이며 관용과 해탈로 포장된, 처용의 패배의식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른 교수들의 강의가 뼈대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거라면 서 교수의 강의는 완강한 뼈대에 살이 있고 숨이 붙여진 거였다.
나는 본래 고전문학보다는 현대문학 쪽에 관심이 더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현대문학 관련 강의는 이미 다 들어 3학년 2학기 땐 들을 만한 강의가 없었다. 교양 강의 두 개를 억지로 끼워 맞춰 시간표를 완성해 놓고 있는데 그러던 차에 새로 부임해 온 서 교수 강의에 대한 호평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호기심이 생겨 어떻게든 강의를 들어보려 했지만 시간표가 맞지 않아 수강할 수 없었다.
한 학기가 지나 4학년이 되어 서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고전시가 강독’이었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강의’였다. 서 교수의 강의에서 향가는 제 형식을 버리고 한 편의 소설이 되었고, 제 주제를 잊고 사랑과 욕망, 질투와 좌절, 그리고 모의와 모반 등의 도정을 그린 한 편의 서사시가 되었다. 단 한 번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 난 서 교수에게 매료되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가서 그의 논문을 열람해 보았다.
그가 쓴 석·박사 학위 논문의 대주제는 둘 다 향가였다. 서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향가 연구의 한계와 극복 방안’이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제목인 듯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결코 평범한 내용이 아니었다. 대개의 석사학위 논문이 종래의 연구를 수합하여 정리하거나 답습하는 수준에 그치는 게 일반인 걸 감안하면 서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은 저만큼 멀리 나아가 있는 것이었다. 향가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연구 행태를 비판하고, 향가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내용이었다. 서 교수의 그 논문을 읽기 전까진 나도 그저 현대 작가 중 한 명을 골라, 가장 만만한 작품집을 선정하여 작가의식을 연구하는 평범한 논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연구 자료가 많이 적층돼 있는 김수영 정도가 마땅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고전 영역으로 바꾸고 향가를 대주제로 삼아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
광주에서 경주까지 가는 직통버스는 없었다. 부산으로 먼저 갔다가 다시 경주로 가야 했다. 경상도 쪽은 처음이었다. 부산행 버스에 오르는 발걸음이 왠지 무거웠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방의 세계에 진입해야 하는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 낯선 땅덩어리 어딘가에서 서 교수가 지축을 딛고 서 있다면 모를까, 그가 더 낯선 세계로 가버린 이상 경주는 요원하기만 한 곳이었다.
부산에서 40분가량을 차를 타고 들어가 경주터미널에 내릴 수 있었다. 박 경위가 터미널에 마중 나와 있었다. 목소리를 듣고 가늠했던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이는 얼굴이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하고 경주서로 향했다. 박 경위는 경찰서까지 가는 10여분 동안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가끔 룸미러로 내 표정을 살피는 눈치였다. 박 경위의 인상은 통화를 하면서 느꼈던 이미지처럼 날카로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인상이었다. 생업의 전선에 서서 일신의 안위와 가족의 화평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온 듯 몸짓 하나하나 성실해 보였다.
경찰서는 한산했다. 박 경위는 경찰서 안쪽에 있는 휴게실로 날 안내했다. 박 경위는 소형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내게 권하고 제 몫의 커피를 뽑아 탁자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우선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곤하실 테니 필요한 것 몇 가지만 묻고 끝내겠습니다.”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단호했다. 통화를 할 때 느꼈던 날카로움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 교수의 사체는 토함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박 경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도 나의 눈빛을 좇고 있었다.
“서 교수는 6월 20일에 경주에 도착했습니다. 터미널 근처의 한 모텔에서 사흘을 묵었습니다. 사흘 동안은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텔 주인의 진술도 있었고 근처 CCTV도 뒤져본바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서 교수가 모텔을 나선 건 23일, 일요일이었습니다. 서 교수는 터미널에서 10번 버스를 타고 보불삼거리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들머리 입구로 향하여 토함산을 올라갔습니다. 제가 포착한 서 교수의 동선은 여기까지입니다. 일요일이라 등산객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서 교수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목격자는 없었습니다.”
“그, 그럼, 교수님의 사체가 발견된 곳은 어디인가요?”
박 경위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부터 서 교수의 죽음을 짐작했지만 박 경위가 읊조리는 서 교수의 행적을 들으니 아직 진행되지 않은 서 교수의 죽음 앞에 선 듯 몸 안쪽에서 경련이 이는 듯했다.
“산중에 성화 채화지가 있습니다.”
“채화지요?”
“네, 그 채화지를 커다란 바위가 떠받들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 꼭 잠들어 있는 것처럼 죽어 있었습니다.”
“…….”
“그래서 이상한 겁니다. 사체에 타살 흔적이 보이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상태로 죽어 있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배가 고파서라도 산에서 내려왔을 텐데 이상하죠.”
박 경위는 타살의 가능성을 떨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타살로 볼 만한 정황이 전혀 없다고 했다. 남은 가능성은 자살뿐이었는데 서 교수는 목을 매지도 않았고 손목을 긋지도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 외엔 죽음의 흔적 자체가 없었다. 서 교수가 한 등산객에게 발견된 건 7월 15일이었다. 사체의 부패 정도가 심하지 않아 7월 10일 전후로 사망한 듯 보였다는 게 박 경위의 설명이었다. 서 교수는 종합병원 검안실에서 최종 사망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경주서 과학수사반에서 지문 감식 결과가 나와 박 경위는 학교측에 연락을 취했다. 행정지원팀에서 학과장이나 다른 교수들에게 알려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지만 박 경위는 그 후론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사체가 발견되고 이틀 후 전 현장에 가보았습니다. 솔직히 이미 죽은 사람이고, 그 죽음에 대한 어떤 것도 새롭게 밝혀질 만한 게 없는 상황에서 의미가 없는 짓이었죠. 하지만 현장 근처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박 경위가 주머니에서 꺼내 보인 건 서 교수의 수첩이었다. 서 교수가 항상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메모를 하던 거였다.
“여기서 선생의 연락처를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선생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첩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박 경위는 수첩을 내게 건넸다. 서 교수의 수첩은 서 교수가 추진했던 프로젝트와 관련된 메모들로 가득했다. 중간중간 전공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이름도 보였다. 그리고 내 연락처와 내게 부탁했던 일들, 그리고 내게 부탁해야 할 일들이 붉은 글씨로 메모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건 한자로 쓰인 두 줄짜리 글귀였다.
三丈矣刀乙杖古來日重如
重只安支叱所隱唯吾名分而乎多
박 경위는 나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 한자는 뭡니까? 독음이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더군요. 혹시 아십니까?”
정확히 말하면 한자가 아니라 향찰이었다. 서 교수가 온몸으로 겹겹의 세기를 통과하여 또 앞을 막아서는 억겁 속으로 팔을 밀어넣고 그럼에도 다시 뒷걸음질 치는 시간 속으로 간신히 검지를 뻗어 새겨 넣은 2구짜리 향가였다.
*
서 교수가 부임한 그 해 여름, 최 교수의 프로젝트는 기획안만 있을 뿐 실제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획안도 형식적인 것이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한 수정이 필요했다. 최 교수는 자신을 대신할,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서 교수를 지목했다. 그걸 두고 교수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았으나 최 교수는 신경쓰지 않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최 교수에게 들어오는 불만과 비난을 최 교수는 단호하게 돌려세웠다. 최 교수는 그만큼 서 교수를 신뢰하고 있었다.
최 교수로부터 프로젝트에 관한 전임권을 부여받은 서 교수는 한 학기 동안 기획안을 다시 짜고 프로젝트에 필요한 연구자들을 모았다. 서 교수가 재정비한 프로젝트의 주제는 ‘향가 복원 사업’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학과 교수들은 다시 그 주제를 걸고 넘어졌다. 대학에 몸담으면서 한결같이 정본과 정설만을 좇아 왔던 그들에게 ‘향가의 복원’이란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나 서 교수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연구 계획의 가치를 믿었고 그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프로젝트는 시(市)의 혁신사업 중의 하나였는데 시의 문화창조도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학교측에 의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서 교수가 머릿속으로 구상해오던 연구 주제와 일치하는 바가 있어 서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서 교수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일 먼저 발표한 논문은 「텍스트 생산 맥락을 통한 <원가> 복원」이었다. <원가>는 10구체 향가이지만 9-10구가 유실된 작품이었다. 서 교수는 강의 시간에 <원가>를 다루면서 유실된 2구 때문에 <원가>라는 텍스트가 더 완전해질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서 교수의 논문은 그 ‘미완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글이었다.
서 교수는 배경설화에 현전하는 8구의 내용을 그대로 겹쳐 보는 식으로 접근하였다. 배경설화의 내용이 노래의 전반부와 합치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미 알려진 내용이어서 서 교수만의 독자적인 아이디어라고 볼 수 없었다. 본론 두 번째 항목에서 서 교수는 다섯 가지 낙구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모델의 유형을 현전 텍스트와 조합하고 비교하면서 최종 모델을 선정하였다. 잣나무가 다시 살아나기를 희원하는 내용이었다. 서 교수는 <원가>가 <제 망매가>나 <찬 기파랑가>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의식한 듯했다. 감정의 갑작스러운 전환이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부자연스러움 또한 향가의 자연스러운 법칙이었다. 단순한 기망이 아니었다. 잣나무 소생의 원천을 화자에게 회귀함으로써 시적 대상에게 향하는 은근한 경고를 함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단순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함은 결국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판타지가 축조한 완전함은 숙명처럼 다시 붕괴될 수밖에 없었고, 허다한 미완의 세계에서 흘러나온 추문보다 더 설득력 없는 이야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다.
*
난 대학원에 진학하고 서 교수의 연구조교를 하게 되면서 자연히 서 교수의 연구를 돕게 되었다. 그러나 일이 많지는 않았다. 서 교수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 복사해서 가져다주거나, 서 교수가 참고한 자료들을 정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서 교수는 가끔 내게 연구 주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대개 서 교수가 이미 자신의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묻는 것이어서 내가 딱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목만 남아 있고 현전하지 않는 향가 작품 중에서 가장 복원이 쉬운 게 무엇일까 하고 묻는 게 그 예였다. <목주가>나 <방등산곡>과 같은 제목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서 교수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자네, <앵무가>라고 들어봤나? 흥덕왕이 지었다고 알려진 노래 있잖은가? ‘흥덕왕조’에 쓰인 내용은 그대로 노래가 되어도 무방할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지. 군주의 로맨스가 다 거기서 거기지만, 흥덕왕이 장화부인을 잊지 못하고 새 왕비를 맞지 않은 건 어쩐지 애잔한 데가 있지 않은가. 짝을 잃고 거울을 쪼다 죽어버린 앵무새 수놈이 필시 흥덕의 모습이 아닐까 싶단 말이야.”
<앵무가>란 제목과 그 배경설화 역시 알고 있는 거였지만 얼른 생각나지 않은 게 괜히 겸연쩍게 느껴졌다. 어쩐지 고약한 취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한없이 고고해 보이던 서 교수도 제 현학적 위세에 취해 우쭐거릴 때면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인 듯해 왠지 마음이 놓였다.
*
서 교수를 든든하게 지원하던 최 교수가 임기가 다 돼 학과장직을 내려놓았다. 새로운 학과장은 강 교수로 정해졌다. 서 교수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 하던 교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변화가 있었다. 권 교수가 교무처장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총장보다 더 힘이 센 직책은 교무처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 만큼 교무처장의 힘은 막강했다. 권 교수야말로 서 교수 부정 세력의 수장격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서 교수를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것 같았다. 허겁지겁 서 교수의 연구실로 올라갔지만 서 교수도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 교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날 달래는 투였다.
“무슨 큰일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인가. 자네답지 않게.”
“그래도 권 교수님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난 내가 하던 일, 마무리만 지으면 돼. 더 바랄 것도 없지.”
서 교수에게 해탈의 경지는 아직 이르다 해도, 충분히 그 근방에서라도 자적(自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서 교수의 자의적인 진입이어야 했다. 타인에 의해, 어떤 강압에 의해 격리된 형세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문득 지난 학기 강의 때 서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계자는 보라국이나 갈화국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그 공과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으로서 억울할 법도 한데 물계자는 하소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계자는 자신의 불충을 들어 조정에 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곤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으로 들어가버립니다. 물계자는 고사에 흔히 등장하는 인물 형상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겸양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하는 덕목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요원한 가치입니다. 만약 제가 물계자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건 제가 스스로 구해야 하는 답이겠지요.”
그 때는 서 교수에게 닥쳐올 어떤 시련의 징후도 보이지 않던 때였다. 그런데도 왠지 서 교수는 쓸쓸해 보였다. 서 교수의 얼굴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계자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그 때 느꼈던 심경을 서 교수에게 들려주었다. 아주 단순한 비유였지만 그것이 서 교수에게 앞일을 예단케 하고 차후의 일을 도모케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야기를 들은 서 교수는 묘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자신의 노트를 펼쳐 내게 내밀었다.
“마침 자네에게 한번 보일 참이었네.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
서 교수가 보여준 건 「<물계자가> 텍스트 복원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 계획서였다. <물계자가>에 관한 연구는 원본 텍스트가 없는 까닭에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배경설화에 관한 연구가 고작이었다. 내 생각엔 연구 자체가 불가능한 주제였다. <물계자가>라는 향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텍스트를 복원한다는 계획은 너무나 감상적인 발상이었다.
“무리인 것 같습니다.”
향가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진척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 시점에서 연구 주제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데는 기여할 수 있겠지만 연구라는 게 허구의 세계를 지어 보이는 걸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단, 서 교수가 지휘하는 프로젝트가 시에서 의뢰한,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것이라서 규격을 정확히 따져가며 연구물의 가치를 애써 폄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계자가>의 연구가 무리라고 단호히 말한 것은 서 교수가 도취돼 있는 향가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이 처한 곤궁함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서 교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내뱉지 않은 말들을 짐작한 듯한 표정이었다. 서 교수는 더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나를 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그 웃음이 나의 빈천한 학식을 향해 날아드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
서 교수가 부임한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서 교수는 조교수로 승진하고 2학기에 프로젝트도 매듭을 지을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우려했던 대로 ‘예정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서 교수는 조교수 승진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연구 실적이야 차고 넘쳤고 강의 평가도 우수했다. 표면적으로는 서 교수가 승진 대상에서 배제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서 교수의 재임용 부적격 판정은 교무처장 자리에 오른 권 교수와 서 교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학과 교수들이 담합하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공교롭게도 최 교수가 안식년을 얻어 해외에 나가 있던 상황이긴 했지만, 교수들의 모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게 이뤄진 것이어서 그가 있었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서 교수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프로젝트를 매듭짓지 못한 걸 애석해 할 뿐이었다. 서 교수가 애초에 학교에 온 이유가 교수라는 직함이나, 시(市)의 연구 지원비 때문이 아니라, 오직 풍족한 환경에서 진행되는 연구 그 자체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가해진 외압을 향해 어떤 포즈도 취하지 않는 서 교수가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서 교수를 부추겨 소송을 걸 수도 없었고, 서 교수를 대신해 학과 교수들을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市)와의 협의가 있었는지 프로젝트 최종 결과물 보고가 한 학기 더 늦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참 진행 중이던 서 교수의 프로젝트를 이어갈지, 아니면 다시 기획이 될지 알 수 없었다. 프로젝트 추진에 여념이 없던 서 교수는 강의할 때를 제외하곤 통 연구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궁색한 일거리를 들고 찾아가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자신이 부르기 전까진 연구실에 오지 말라는 당부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서 교수가 연구실로 나를 부른 건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주 월요일이었다. 서 교수는 봉인된 서류봉투를 내게 건넸다. 그러곤 기말고사 시험지니까 교학팀에 잘 가져다주라고 당부했다. 서류봉투를 받아들고 서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왜,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 그게, 혹시 어디 떠나실 건지 해서요.”
서 교수는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학교 떠나기 전에 매듭짓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네. 일 마치고 오면 짐 옮기는 거나 좀 도와주게.”
서 교수가 이야기한 매듭이 뼈대마저도 온전치 않은 <물계자가>에 있었다는 건 그 때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일신상의 문제라고만 넘겨짚고 연구실을 나섰던 게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
“이것은 향가입니다.”
“향가라면, 그 교과서에 나오는 옛날 시 같은 거 말입니까?”
나는 박 경위에게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고 서 교수가 수첩에 적어 놓은 구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서 교수의 학식을 얻어 글귀를 이해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고, 다만 서 교수의 영혼을 빌려 간신히 언저리에 가 닿는 일 정도는 깜냥으로 할 수 있을 듯했다. 서 교수가 늘 배경설화로부터 원형의 근간을 마련했던 사실에 기인하여 머릿속에 있는 물계자의 행적을 최대한 끌어내었다. 첫 번째 구는 ‘석 장의 칼을 집고 온 날 무겁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했다. 두 번째 구의 ‘安支’의 해석이 얼른 연결되지 않았으나, ‘安支’가 <찬 기파랑가>와 <우적가>에 부정부사로 쓰인 걸 떠올린 이후엔 쉽게 해결이 되었다. 두 번째 구의 의미는 ‘무겁지 아니한 건 오직 내 이름뿐이다’ 정도가 될 듯했다.
손바닥으로 가만히 글귀를 쓸어보았다. 글자 사이사이에서 서 교수의 체온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안온했다. 마치 손바닥과 지면 사이에 아직 굳지 않은 물컹한 지층이 밀려들어 온 듯했다. 그 지층을 들춰보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먹이 혼신의 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무수한 원전들이 쌓여 있을 것만 같았다.
“저, 혹시 교수님의 동선을 따라 걸어볼 수 있을까요?”
“네, 토함산 정상에 올랐다가 길을 따라 채화지 쪽으로 내려갔을 겁니다. 저랑 함께 가보시죠.”
박 경위는 자신이 형사로서 더 추적할 만한 사실이 없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대신 서 교수라는 인물이 이끄는 세계, 적요가 소요를 재우고, 소요가 적요를 깨우는 노래 속으로 가보고 싶어 했다.
*
보불삼거리에서 막 내렸을 때 서 교수의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을까 괜히 두리번거렸다. 고개를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땀이 나는 지독한 무더위였다. 토함산은 산세가 험해 초입부터 가파른 산길이 이어졌다. 턱 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길이 좁은 데다 나뭇가지들이 치렁치렁 내려와 있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 정상까지 절반도 채 오르지 못했는데 봉우리 하나를 넘은 듯 힘이 부쳤다. 한걸음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을 고르면서 서 교수가 남긴 두 구절 뒤에 이어질 구절을 떠올려 보았다. 서 교수가 마지막으로 매듭을 지으려고 했던 게 <물계자가>의 텍스트 복원이라면 내가 서 교수를 대신하여 끝을 매조지하고 싶었다. 서 교수를 동경하면서도 그의 프로젝트 연구 과제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었던 걸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 교수의 마지막 걸음까지 따라가 봐야 했다. 가 닿을 순 없어도 손끝으로나마 간신히 더듬고 싶던 이름자가 푸른 잎들 사이로 쏟아지고 있었다.
좁은 산길이 어디선가 지워지고 곧이어 잣나무 숲이 나왔다. 잣나무들은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다가 어느 순간에 서로 자리를 바꿔 열려 있던 길을 닫고, 숨어 있던 길을 열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나뭇가지들 사이로 툭 터진 하늘이 보였다. 수명이 다한 잣나무들이 몸을 던지는 열반이 그 하늘인 듯했다.
토함산 정상에서 서 교수가 바라보았음 직한 남산의 등성이를 더듬었다. 서 교수는 물계자가 들어갔다는 사체산을 생각했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남산이나 함월산보다는 자신이 딛고 서 있는 토함산이 바로 사체산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무거운 마음을 채 떨치지 못한 와중에도 알 수 없는 희락이 몸을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얼른 서 교수의 마지막 자리를 보고 싶어 아직 숨을 고르고 있는 박 경위를 재촉하여 산을 내려갔다.
과연 채화지 아래 커다란 바위들이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바위 같기도 하고, 채화지를 위해 일부러 바위를 옮겨놓은 것 같기도 했지만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바위가 가지런하게 다듬어진 듯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바위 아래쪽엔 종을 알 수 없는 키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죽을 결심으로 뛰어내릴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박 경위는 서 교수가 발견된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처음에 신고한 등산객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유심히 사체를 보고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계속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니까 수상하단 생각이 들어 저희한테 신고를 한 것입니다. 현장에 와서 확인해 보니 최초 발견자의 진술처럼, 사체는 아주 편안한 잠에 든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타살의 흔적은 물론이고 사소한 고통의 흔적마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서에서 박 경위에게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서 교수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는데 산을 오르며 서 교수의 행적을 뒤쫓아 보니 서 교수의 죽음이 그의 삶만큼이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서 교수가 굳이 토함산을 오른 것은 물계자의 상황과 심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서 교수는 눈에 보이는 길보다는 보이지 않는 길, 한 번도 길인 적 없던 길로 다니면서 그 옛날, 물계자의 절망을 가늠해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박 경위가 예측한 동선 밖에서 서 교수는 생각하고 걷고 잠들었던 것이다.
서 교수도 인간인 이상 자신에게 가해진 압력이 부당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물욕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목전에 두고 있는 결과물이 있었던 터라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 교수는 자신에게 닥친 거센 소용돌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물계자의 행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서 교수가 다루고 있던 과제 또한 <물계자가>여서 생각이 자연 그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물계자 역시 자신의 공과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군주에게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모든 부정적 상황을 자신에게 귀인시키고 스스로 야인이 되었다. 서 교수의 상황은 물계자와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판이하게 다른 게 있었다. 물계자가 겪은 갈등의 중심에는 공적이라는 게 놓여 있었지만 서 교수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몇몇 교수들이 긴밀하게 모의를 진행하는 동안,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서 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서 교수가 자신이 쌓아올린 덕망과 학문적 경지를 내세워 그들에게 어떤 대응이라도 하길 바랐지만 서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작당하여 서 교수로부터 빼앗으려고 했던 교수라는 직위가, 서 교수에게는 그다지 귀중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서 교수가 마지막까지 손길을 거두지 않았던 건 향가였지만 다른 교수들은 그런 서 교수의 순수한 욕망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 교수의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서 교수가 남긴 글귀를 다시 읽어보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느낌이 또 달랐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깊은 페이지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제 막 눈을 뜨고 나온 노래처럼 묵직하고 의연했다. 능선을 타고 내려온 산바람이 몸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언젠가 서 교수에게서 맡았던 마른 입김 냄새가 느껴졌다. 머릿속에 내내 고여 있던 어떤 한 생이 한 줄의 노래로 풀어질 것 같았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서 교수의 글귀에 2구를 덧대어 붙였다.
三丈矣刀乙杖古來日重如
重只安支叱所隱唯吾名分而乎多
忠誠而旣駟盧矣窮也
輕烏隱步路師彘山路入於去如
서 교수라면 15세기 국어 형태로 되돌린 이후, 현전하는 향가 원전의 한자 차용 사례를 검토하여 최종 텍스트를 완성시켰겠지만 내게는 아직 까마득한 일이었다. 그저 서 교수가 내어놓은 노래의 의미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글자를 정하여 어순대로 배치하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하는 양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박 경위가 노래의 뜻을 물었다. 박 경위는 새롭게 복원된 <물계자가>가 구비전승되는 첫 길목에 서 있는, 최초의 청자이자 독자인 셈이었다. 나는 박 경위에게 4구체 향가 <물계자가>를 들려주었다.
석 장의 칼을 짚고 온 날 무겁다
무겁지 아니한 건 오직 내 이름뿐이다
충성이 이미 사로에 다했으니
가벼운 걸음으로 사체산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미완의 노래에 뼈를 세우고 피를 돌게 하고 살을 덧댄 <물계자가>가 최초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 노래, 참 좋군요. 나같은 무식쟁이에게도 들리는 걸 보면.”
나는 박 경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고 있던 수첩을 힘을 다해 산 아래쪽으로 던져버렸다. 수첩은 꼬박 하루 품을 팔아도 찾을까 말까 한 곳에 떨어졌다. 등산로도 아니어서 쉽게 발견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박 경위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산 아래쪽으로 내려갔던 바람이 다시 등성이를 타고 올라왔다. 읊조렸던 노래가 메아리처럼 귀 안쪽에서 웅웅거렸다. 아무래도 끝을 알 수 없는 긴 노래가 다시 찾아올 것 같았다.
제25회 신라문학대상 수필 작품 (2013년)
메주각시
박헌규
절집 마당이 술렁인다. 이른 아침 고요는 잰걸음으로 뒷산 인봉재(嶺)를 넘고, 콩 익는 냄새가 산중에 진동을 한다. 검은 무쇠 솥 뚜껑을 비집고 나온 허연 김은 온 부뚜막을 휘감고 돌아 나풀나풀 춤을 추며 뒤란 장독대에 숨어들고, 울력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은 동짓달 짧은 해를 염두에 둔 듯 동동걸음을 친다.
자주 찾는 산사(山寺)에 메주 쑤기 울력이 있었다. 나는 볏짚을 가지런히 추발(抽拔)하여 깨끗이 다듬고, 녹녹히 축여 ‘메주각시’를 틀었다. “각시가 예뻐야 장맛이 난다.”라는 스님의 말씀에 욕심이 과했는지 힘이 너무 들어가 손가락이 아리고 물집까지 잡혔다.
이 일은 지난해에도 내가 했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어도 모양새가 얄궂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지난번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각시’ 이름값 할 정도로는 만들 수가 있었다.
메주각시는 메줏덩이의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묶어서 건조시킬 때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곳에 매달기 위해 볏짚으로 만든 새끼줄 모양의 끈을 말하며, 일명 ‘각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메주를 매달기 위한 끈만은 아니다. 끈으로만 친다면야 볏짚보다 더 미끈하고 질긴 것들이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지 않는가. 끈의 역할의미를 훨씬 넘어선, 아주 소중한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메주각시는 반드시 볏짚으로 만들어야 한다. 볏짚 속에 많이 들어 있는 ‘고초균’이라는 발효균을 메주에 접종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 전통 메주를 띄우는(발효) 데는 고초균 효소가 절대 필요하다.
물론 오늘날 공장에서 인공 배양균인 ‘황국균’이라는 것을 접종시켜 짧은 시간에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개량 메주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맛이라든가 영양 면에서 메주각시가 만들어내는 우리 전통 메주를 따를 수는 없다.
이처럼 좋은 된장, 간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효가 잘된 메주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의 전통 메주는 각시의 몸이 썩으면서 나오는 고초균 발효에 의해서만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끼니때마다 식탁 위에서 만나는 된장에 메주가 있다는 것은 쉽게 알고 있어도 메주가 만들어지기까지 각시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삶은 물론, ‘각시’의 존재마저도 지나치고 있어 안타깝다.
지푸라기 몇 올로 엮어진 가녀린 몸, 각시는 투박스럽고 무거운 메줏덩이를 가슴에 품고 뼈를 깎는 듯한 긴 고통의 시간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간다.
온전한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외진 곳에서 시렁에 목을 매달고 동지섣달 차가운 냉기와 맞서 온갖 시련과 아픔을 참고 삭인다. 시렁가래는 늙은 낙타 등처럼 휘어져 내리는데도 각시는 메주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발효 숙성과정을 위해 변변치 못한 구석방 냉돌 위나 헛간에서 낡은 이불 한 조각 뒤집어쓰고 제 몸을 썩히는 희생을 감내하기도 한다.
찰나의 시간도 엉덩이 붙이고 숨 고를만한 자리는커녕, 말라비틀어지고 썩어 문드러져도 누구 한 사람 애정 어린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각시’ 이름에 걸맞은 삶이라고는 잠자리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다.
메주각시의 삶을 보노라면 마치 우리 어머니를 보는 것 같다. 메주가 아버지라면 메주각시는 어머니이다. 그리고 메주와 각시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된장, 간장은 우리 사 남매에 비견 할만도 하다.
메주각시의 희생적인 삶이 양질의 메주를 낳고, 맛 나는 된장을 만드는 것처럼 아버지의 남다른 삶에는 어머니의 거칠고 힘든 세월이 있었다.
부(富)도 명예도 없는 시골 대서방(代書房) 말단 서기로 한평생 손톱 발톱 밑에 흙 넣지 않고 호강스런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 삶 뒤에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숨은 내조가 있었다. 힘든 농사일이며 집안일 모두는 어머니 차지였고 넉넉지 못한 시골 살림살이 형편에도 시동생과 우리 형제들 대처에 나가 공부시키느라 어머니의 마음고생 몸 고생은 한도 끝도 없었다. 지금 우리 형제들이 집안 대소사에서 만나면 웃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은 제 몸이 다 썩어 허물어지도록 희생하는 메주각시 같은 어머니의 삶이 우려낸 것이다.
어머니는 나이 열아홉에 칠 남매 맏이인 두 살 어린 신랑 만나 일흔이 넘도록 고된 시집살이를 해야 했었다.
십여 년을 중풍으로 방안에서 누워만 계시던 시어머니 병구완과 시동생, 시누이 그리고 당신 자식 뒷바라지에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사모님 소리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양복 차림으로 면소 앞 대서방으로 갈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입다 버린 구멍 난 바지를 입고, 호미 들고 논밭으로 나가야 했다. 어머니의 들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오후에 숨을 거두면 오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면서 쉼도 끝도 없이 밭고랑을 팠다.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고 ‘밤중 여인’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까지 얻어가면서, 고관절부위 뼈가 닳고 문드러져 인공 뼈를 넣는 수술 뒤에도 어머니의 일손은 멈추지 않았다.
메주각시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을 위한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에 공(功)은 늘 아버지 몫이고 잘못된 일에 원망과 허물은 어머니 당신 차지였다. 인생 삶에 고(苦)와 낙(樂)은 누구에게나 같이한다고 했지만, 메주각시의 삶이나 우리 어머니의 삶에는 기쁨과 즐거움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지난한 삶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아 가슴이 아린다.
어느 이른 봄, 말(午)날을 택해 메주는 떠나가고 각시는 허물어진 몸, 빈껍데기 신세가 되지만, 시골에 홀로 남아 외로이 고향 집 지키는 어머니처럼 지나온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 한 움큼의 검불이 되어 자신을 태우는 것으로 마지막 숭고한 삶을 바친다. 끝.(원고15매)
하는 짧은 대답에 예절바르고 정중하게'감사합니다.’를 꼭 붙이곤 했지요.
열린 창문 밖으로 아카시아 향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아카시아도 하마 지고 낮에는 닫힌 창문이 답답하여 자꾸 문을 열게 되는 철이었습니다. 소변통을 비우러 나왔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울긋불긋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녀들이 몇, 산을 내려오고 있더군요. 소리가 들릴만치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들의 웃는 얼굴로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상상해 보았지요. 문득 당신이 처음부터 말을 할 수 없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 한 번도 당신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착각에, 울컥 무거운 덩어리가 하나 목구멍으로 치받혀 올라왔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 끝의 휴게실로 갔습니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 뒷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보고 있었습니다. 좁다란 그 길을 따라가면 길 끄트머리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헛된 생각을 했다가 지우고 했다가 지우고하며 얼마나 거기 앉아 있었는지, 옆 병상의 남자가 나를 찾으러 왔을 때는 병실에 으스름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 같아서...... .”
남자는 변명같이 말하더니,
“환자 자세 바꿀 시간이 한참 지났어요.”
지금껏 옆 병상의 보호자들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관계가 없던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며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괴어왔습니다. 딱히 서럽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솟아오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손으로 훔쳐내고 훔쳐내어도 멈추지 않더군요.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여서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손수건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두 손을 내밀어 남자의 손수건 쥔 손을 덥석 쥐고는 그대로 한참 잡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손을 잡힌 채 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습니다만 난처해하는 기색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습니다. 창밖으로부터인지, 남자의 손수건에서인지, 그 남자에게선지 밤꽃 냄새가 배어나와 코를 스치는데, 전에 건강했던 당신에게서 그 냄새가 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럭저럭 울음을 수습하고 민망해진 내가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병실에 전등이 켜져 있더군요. 병실을 비운 시간이 제법 길었던가 봅니다. 밤중에 미등을 켜둔 병상 곁에서 잠든 남자의 웅크린 등을 안아주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에 열이 나고, 가슴이 잘 들지 않는 둔한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습니다. 날이 밝기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길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몇 번씩 우격다짐을 했습니다. 아침에 의사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당신을 집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을 때, 의사는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듯, 아주 쉽게 허락하더군요. 그리고는 간호사더러 가정 간호할 때의 주의 사항을 내게 잘 알려주라고 말하더군요.
남편이 그렇게 된 그 도시가 비열하고 냉혹하게 느껴져 현수는 거기서 더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전 해에 입대한 아들에게 살던 도시로 돌아가겠다고 편지로 전하고, 그곳 생활을 정리하여 그들 가족의 참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작은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현수는 남편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병실처럼 꾸민 안방에서의 일상은 병원에서의 그것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남편은 아기처럼 하품하고 자고 눈뜨고 찡그리고 하며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퇴원하면서 남편의 상태는 조금씩 나빠져 갔다. 원인 모를 열이 나서 피부가 홀랑 벗겨져 버리기도 했고, 가래가 끓어서 산소호흡기를 대 주어야 할 정도일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다시 회복되곤 하면서 용케 버텨 나갔다.
남편이 옆에 누워 있어도 현수는 꿈을 통해서만 남편과 의사소통이 있었다. 처음 사고가 나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의 꿈에서는 예외 없이 남편은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 서 있고 현수 자신은 누워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서서 누워 있는 현수를 한참이나 무거운 눈으로 내려 보다가 또 말없이 뒤돌아서서 멀어져 가는 꿈을 반복적으로 꿨다. 꿈 속의 공기는 끈적한 액체로 된 욕조 속을 걷듯이 무거웠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 온 후 상태가 나날이 나빠지면서, 꿈속의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지만 현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텔레파시가 되어 가슴으로 전해졌다. ‘이젠 가야할 것 같아. 그러는 게 더 좋겠어. 나를 놓아 줘.’ 현수가 마음을 나쁘게만 먹으면 그를 곧 떠나보낼 수가 있기도 했다. 기도의 주입구로 영양식을 한 주일만 주입하지 않더라도, 코 위에 슬쩍 젖은 수건을 얹어만 놓아도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수는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의 몸을 닦는 도중에 괴사가 온 엄지발가락이 뚝 떨어져 나왔을 때, 이웃의 벌 치는 사람에게 벌침 놓는 법을 배우고 벌을 구해 와서 남편에게 수도 없이 벌침을 놓았다. 원인 불명의 고열로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사지가 경직이 되면 현수는 밤새워 찬물로 닦고 몸을 주무르며 남편을 자신에게 묶어두려 애를 썼다. 식물처럼 수동적으로 누워만 있던 남편도 경직이 오면 눈썹을 찡그리며 고통스러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남편은 현수의 꿈을 통해 간간이 자기를 보내달라고 애원하며 두 해 정도를 보내더니 지난 해 가을이 깊어질 때 스스로 먼길을 떠났다.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줄곧 39도를 오르내리던 고열로 입술이 하얗던 벗겨지던 남편의 열이 내리고 안정을 찾는 것 같기에, 며칠 잠을 못잔 현수가 잠깐 졸다가 새벽에 이마 위의 물수건을 새로 갈아주려는데 남편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남편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그 작업노트가 눈에 띄었다. 수첩을 뒤적여 전에 현수의 가슴을 후벼 파던 글귀들을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남편은 이 주문 같은 글을 수첩에 베껴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다지도 기를 쓰며 살다 간 남편의 슬픔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현수의 가슴에 푹 꽂혔다. 처음 천도재를 올리던 날, 재를 주도하던 암자의 주지 스님 옆에 눈이 파란 외국인 비구니 스님이 나란히 앉아 경을 읽고 목탁을 두드렸다. 체구가 자그마한 스님에 비해서 크고 당당한 체격의 스님은 목탁도 잘 두드리고, 경을 읽는 목소리도 또렷하고 발음이 분명했다. 재를 올리고 법당 앞 좁은 마루에 앉아 있는데 눈이 파란 그 비구니 스님이 절집 마당 아래 샘터에서 물을 길어 돌계단을 올라왔다. 경사가 급한 돌계단을 올라오는 스님을 보면서 지구를 반이나 돌아가야 하는 곳으로부터 와서 이 스님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수는 궁금했다. ‘스님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현수가 물으니, ‘독일에서 왔어요. 여기 오는 것이 정해진 인연인가 봅니다.’ 하며 웃는 스님의 파란 눈이 참 깊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 스님도 청도의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떠나고 없다.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머리 위의 나무에서 빗방울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현수가 서 있는 바위의 약간 벌어진 틈새로 뿌리를 내린 노란 산괴불주머니꽃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맞아 ‘툭!’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가냘픈 꽃포기는 빗방울의 무게에 바위 위로 꺾어지듯 몸을 숙이다가 다시 일어선다. 머리 위 나뭇잎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만드는 궤적을 눈으로 좇다가 현수는 산 위로 걸음을 옮긴다. 이 비 한 방울이 있어 산이 적셔지고, 산이 품고 있는 모든 숨 탄 것들이 생명을 이어가는가, 자기 존재도 무엇에겐가 이 빗방울 무게만큼의 공덕을 되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현수는 걷는다.
비를 맞았지만 두 시간 가까이 걸은 터이라 목이 말랐다. 현수는 바위 아래 샘터로 몇 걸음 내려가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신다. 샘터 바로 위에서 시작되는 대나무 터널의 좁은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암자 마당귀를 돌아가며 쌓아놓은 석축이 있고, 석축 위로 올라서면 암자 오른쪽 마당에 칠불암의 일곱 부처님이 현수가 비를 맞으며 올라 온 길을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어른 남자 키 정도의 커다란 입방형 바위에 사방으로 돌아가며 바위를 쪼아 낸 사방불(四方佛)이, 사방불 바로 뒤에 땅에서 솟아오른 바위의 한 면에는 아미타 삼존불이 산 아래 남산 들판을 언제나 그렇듯이 굽어 보고 계실 것이다. 신라의 그 석공은 이 꼭대기 위까지 와서 바위 안에 감춰져 있던 부처님을 불러내며 무엇을 간절히 발원(發願)하였을까? 재를 지내러 온 첫날, 바위에 돌올(突兀)한 불상에 절을 하는데 현수의 눈으로 눈물이 또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수도 없이 합장한 채 고개를 조아려 절을 하고 나니 현수의 가슴에 얹혀 있던 돌 하나가 부처님 앉으신 연화대좌의 꽃잎 하나로 옮겨 가는 것 같았다.
샘터에서 올라와 대나무 터널의 돌계단을 디디다 말고 뒤를 돌아보니 현수가 왔던 산길에 구름 같기도, 안개 같기도 한 엷은 공기의 베일이 한 겹 흩어지고 있다. 비는 그치고 하늘의 구름들이 빠르게 서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다. 비 그친 산 어디선가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아파트 뜰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이제 온전한 나목(裸木)이 되어 서 있습니다. 여름볕이 뜨거울 때는 그 나무 아래에 서로 차를 대놓느라 나무도 덩달아 인기가 꽤 많았었지만, 햇볕이 엷어지면서부터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또 멀어졌습니다. 봄에 눈길을 끄는 화려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가을이면 맛난 열매를 주지도 못하는, 그저 범상하고 무난한 느티나무지만 가끔씩은 과묵한 성자처럼 ‘존재’의 가치를 내게 일깨워 줍니다. 봄기운이 돌면서 어린애 머리카락같이 노란 싹을 공기 속으로 밀어내면서부터 노랑빛이 점점 연두빛으로, 초록빛으로, 무성한 녹음이 되어 암록의 그늘을 드리우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저 먼저 때를 알고 황갈색의 잎을 떨구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몸에 지닌 것 모두 다 놓아버리고 다시 한 철을 자기를 단련하여 이듬해 또 그저 그렇게 슬며시 노랑빛 싹을 밀어올리는 순환이 저 느티나무의 실존이겠지요.
겨울이 되니 수량이 줄어 얕은 강물에도 부쩍 새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들은 어디에서 와서 이 겨울을 나고 다시 어디로 가는 걸까요? 느티나무가 불평 없이 자신이 서 있는 공간 하나를 해마다 조금씩 면적을 키워 메워가듯이, 저 어린 새들이 이 강물에 자맥질하거나 떠서 노닐며 강가 풍경을 늘 새롭게 갈아가듯이, 삶은 그러한 것이라 깨닫습니다. 다리 위에 서서 맞는 찬 겨울바람이 뺨을 할퀴는 날카로운 냉기의 감촉을 맛보게 함으로써 나를 아픔의 감각을 경험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더 이상 어리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사춘기 아이처럼 ‘왜 계속 살아가야 하지?’란 질문을 수없이 자신에게 던졌습니다. 아직도 답을 명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빈 뜰에 그저 그렇게 서 있는 느티나무를 보며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름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이제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게 될 줄도 알았습니다. 삶이 시지프스의 바위굴리기같다 하더라도 그 바위도 언젠가는 닳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자주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그럴수록 더 쉽게 놓지 못하는 아득한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글 뽑아주셔서 계속 나아가 보라고 용기를 주시는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 드릴뿐입니다.
신라문학 대상 심사평 (소설)
이번 신라문학대상 응모작들은 27회를 이어온 역사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백여 편이 넘었다.
그 중에서 심사위원 세 사람이 심사숙고 하여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이 6편이었다. 또다시 4편으로 압축하며 심도 있는 토론을 하였다.
<자개장롱이 있는 집>은 오래된 장롱에 대한 애착을 남녀의 애정과 결부시켜 작품을 만든 솜씨가 노련했다. <짓밟힌 개미집>은 군대에서 일어난 성폭행의 현실을 군견병의 눈으로 리얼하게 그렸다. 주인공의 고뇌를 개미의 생태와 비유한 것이 적절하고 돋보였다. <론리 플래닛>은 스리랑카에서 온 불법체류자의 고통스럽고 절박한 모습이 절제된 문장으로 잘 나타나 있다. 고국의 내란과 연결한 구성이 좋았다.
<칠불암>은 한 가족이 소박하게 살아가던 날, 남편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10여 년 동안을 간호하면서 살아가는 여자의 삶을 잔잔하고 차분하게 그렸다. 문장이 간결하고 깔끔하다. 칠불암에서 제를 지내는 삶의 모습이 슬프고 애잔하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솜씨가 치밀하며 격조가 높았다.
위의 작품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심사의 어려움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칠불암>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당선자에게 축하드리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훌륭한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이광복, 김선주(글), 이채형
<수필>씨오쟁이
박경혜
삼십여 년 만의 고향길이다. 도시를 벗어나 겨우 십여 분 달려왔을 뿐인데 풍경이며 공기가 완연히 다르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숨통이 확 트인다며 기꺼워하시던 어머니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언제부터인가 말이 없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어머니의 침묵에 차안의 공기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언 들판을 핥고 지나간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거름을 내었는지 군데군데 들 빛이 거뭇하다. 눈앞이 아롱거린다. 땅김이 겨우내 얼고 튼 살갗을 추슬러 햇살 속으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중인가보다. 아마도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고, 다사로운 기운으로 몸을 녹여 새 생명을 키워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부모님은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허나 도시생활은 어수룩한 시골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 년 만에 고향동네의 반이 넘던 전답을 야금야금 팔아먹고 집 한 채만 겨우 건졌다. 물론 어머니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자식들 공부바라지로 팔아먹은 것보다 마음만 태평양 같아 무턱대고 사람을 믿고 보는 아버지의 보증 빛으로 넘어간 전답이 더 많았다. 그때부터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며 어머니는 고향에 발길을 끊었다. 고향은 그 곳을 떠난 사람들이 힘겨운 삶에 치여 허덕일 때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보류의 땅이다. 그것을 잃어버린 삶이란 비빌 언덕을 빼앗기고 떠도는 부초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시어머니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건사하는 일은 늘 버거웠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다리가 휘청 꺾이는 날인들 왜 없었으랴. 허나 어머니는 한숨한번 크게 내쉬지 않고 힘에 부치는 순간마다 이를 악물었다.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한숨은 아마도 속으로 고여 들어 피멍울이 생기고, 오장육부를 병들게 했으리라. 살림살이가 오그라들수록 오대독자인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은 더 유난해졌다. 딸들에게 살가운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당신의 모든 일상은 늘 아들을 축으로 공전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다. 아직은 코끝이 매운 겨울의 끝자락이서인지 집집마다 문이 굳게 닫혀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재촉하는 어머니를 보며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삽작에 서서 어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다. 집에는 대문이 없다. 언제든 길손이 들러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추고 대문을 달지 말라고 하신 할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마당은 바로 골목길로 이어지고 있다. 서너 발자국이면 닿을 삽작과 마당 사이. 어쩌면 삼십년의 세월이 마음의 거리를 만들어 어머니는 선뜻 발을 들여 놓기가 쉽지 않은지도 모를 일이다.
집은 의외로 정갈하다. 마당에는 비질한 흔적이 곱게 새겨져 있다. 집을 관리해주는 먼 친척 아저씨의 바지런함 덕이리라. 발소리를 죽여 집안을 둘러보는 어머니의 발끝을 눈으로 쫒는다. 당신의 손길이 수천 번도 더 거쳐 갔던 장독대며 정성들여 사시사철 꽃을 피워내던 수돗가, 그리고 잠실과 일 년치의 양식을 갈무리해두던 두지를 더듬다가 시선이 벽에 머문다. 앙증맞은 망태기가 조롱조롱 걸려있다. 내려서 열어보니 마른 옥수수며 팥 등 곡식들이 조금씩 들어 있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기특하게 아직도 이리 멀쩡하냐고 탄성을 지르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신다. 그때서야 그 씨오쟁이의 비밀은 아저씨의 세심한 배려라는 것을 알아챘다. 다시 보니 모두가 탱글탱글한 알곡이다. 아이고, 실하기도 하다. 속엣 말을 하며 어머니의 입이 귀에 걸리도록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니 그것을 뿌릴 땅은 없지만 내심 고맙고 기꺼운 눈치다.
집은 고운 먼지에 덮여 은밀한 느낌이 든다. 바람 많은 날씨 탓이리라. 대청마루의 먼지를 손바닥으로 쓱쓱 훔친 어머니가 걸터앉는다. 발치의 뜰 위로 햇살이 허벅지게 쏟아져 내린다. 세월의 무게는 어머니뿐 아니라 집도 부피를 작게 만들었나 보다. 오형제와 닭과 강아지가 어우러져 종일 뛰어 놀아도 넓기만 하던 대청마루와 마당이 한 뼘에 잡힐 듯 자그마하다. 내가 나란히 걸터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꽁꽁 감추어 두었던 씨오쟁이를 슬그머니 꺼낸다.
스무 살에 시집을 와서 강보에 쌓인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잃었다. 어렵게 딸 하나를 키워냈지만 그 후로 오년이 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할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 귀한 집에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씨앗을 들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단호하게 반대를 하시던 할아버지마저 슬그머니 뒤로 물러앉으시는 눈치였다. 마음 여린 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하더니 종내는 종중 일이라거나 혹은 다른 핑계를 만들어 출타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짙은 암흑에 갇혀 숨이 막혔다. 칠흑 같은 어둠,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화살처럼 날아오는 할머니의 모진 말들은 뼛속깊이 박혀 아물지 못할 생채기를 만들었다. 대를 잇지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시집살이는 살이 얼어터지는 혹독한 겨울을 홑옷으로 나는 것보다 더 시렸지만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가 울 핑계로는 가장 좋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은 청솔가지 연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마음 단도리를 단단히 하곤 했다.
급기야 할머니는 대처에 새살림을 내어 손자를 보겠다고 나섰다. 할아버지는 헛기침만 자꾸 하시며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몇 번이나 대처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집을 사야겠노라고 할아버지께 논을 팔아 돈을 마련해 달라고 성화를 하시던 즈음 어머니가 입덧을 했다. 눈물마를 날 없는 새댁이 안쓰러워 조상님이 주신 선물이었을까. 시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삶의 벼랑 끝에 섰을 때 구세주처럼 아들이 태어났다. 그 날이 마침 고조부의 제삿날 인지라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한 시간이 넘도록 제사상 앞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다. 더 할 수 없이 기꺼운 마음에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이 더해졌음이리라. 어머니는 고운 씨오쟁이에 뜨거운 눈물과 함께 당신의 생명을 이어준 알곡을 넣고 마음 깊이 감추었다. “니 오빠 덕에 내가 이 집에서 살아남은 거라.” 말끝에 물기가 촉촉이 베어난다.
처음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씨오쟁이는 핏빛이다. 아들이 뭐라고 싶지만, 대 잇기를 중시하던 그 시대에는 귀하디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오빠에게만 유난한 사랑을 퍼붓던 어머니가 야속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허나 씨오쟁이에 감추어진 생채기를 보고나니 슬그머니 내가 아들이 아닌 것이 도리어 죄스러워져서 마주잡은 손에 땀이 베어난다.
말로 낸 생채기는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아물지 못하고 자주 덧나는 법이다. 산산이 부서진 젊은 어머니의 마음을 퍼즐처럼 아무리 끼워 맞춰 보아도 떨어져 나간 작은 조각들 때문에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제대로 봉합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려 둔 상처가 흉한 자국으로 흔적을 남겼다.
마음에 고인 물기를 훔쳐내며 어머니의 휴대전화기 단축번호 일번을 꾹 누른다. 무뚝뚝한 신호음이 몇 번 건너가더니 응석 섞인 오빠의 목소리가 건너온다. 얼른 어머니의 귀에 갖다대주는데 간질간질한 단어들이 통통 튀어 오른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는 어머니. 씨오쟁이 속 알곡하나가 당신의 마음에 싹을 틔우는 중인가보다.
참신한 비유와 형상화
수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단순히 ‘붓 가는 대로’와 ‘누구나 쓸 수 있다’에 있지 않다. 속도를 앞세우는 시대에 소설 못지않은 감동과 시에 버금가는 정서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체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수필은 쓰는 이나 읽는 이의 편에서 공히 각광을 받기에 충분하다.
창작 형식이 자유로운 수필에서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관한 한 금과옥조를 내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글 속에서 글쓴이의 진정성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절제된 감성으로 주제와 제재를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였는가, 그리고 감동은 제대로 전달되었는가를 염두에 두고 심사하였다.
아주 드문 독특한 체험이라 하더라도 코스모스의 의미망이 구축되지 않는다면 그 글은 살아있는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소소한 일상에서도 깨달음이나 반전은 발견된다. 이는 글을 쓰는 강력한 동기가 되는 동시에 독자로서도 읽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응모된 많은 작품들이 사실의 기록에 머물러 있었다. 주제를 향한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한 작품, 제목과 거리가 먼 작품, 새로움이 결여된 작품 등을 제하고, 「씨오쟁이」를 최우수작으로 선정하는 데 심사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30년 만에 들른 고향집에서 보게 된 씨오쟁이와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한 어머니의 지난한 삶속 핏빛 씨오쟁이. 참신한 비유, 탄탄한 긴장감, 그리고 의미화와 형상화를 높이 산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선외의 분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지연희, 장호병(글)
당선소감
“이 사람아, 술을 좀 적게 드시게. 몸 버리겠구만.”
팔순 노모가 오십 중반이 된 아들을 걱정하십니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 아들이 노모의 손을 잡고 공손하게 대답 합니다.
“네 엄마. 그런데 저는 세상에서 술이 젤 싫고 우리 엄마가 젤 좋아요.”
그 모습은 마치 유치원생이 엄마에게 부리는 어리광만 같아 우습습니다. 순간 노모의 유쾌한 웃음으로 집이 환해집니다. 늘 어머니 기쁨의 원천이 되어주는 오빠가 무척 고맙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당신께 그리 큰 기쁨을 드릴 수는 없음을 아는 까닭입니다.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축하합니다. 신라문학상에 당선되셨습니다.”
순간 아득해졌습니다. 기대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이 더 컸습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습니다.
수필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은 지 삼 년여가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곁에서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쳐주니 멋모르고 마구 썼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수필이라는 장르에 더는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머뭇거리기만 했습니다.
신라문학상이라는 큰 선물이 제게는 수필로 한 걸음 다가서는 디딤돌이 되 리라 확신합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글을 쓰라는 엄중한 말씀이라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돌아다보니 고마운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처음 수필을 가르쳐주신 ‘수필문예대학’ 선생님들, 칭찬으로 추켜 주시던 선·후배, 글벗님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못난 글을 곱게 봐주시는 ‘지음회’ 문우들께도 더없이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칭찬과 질책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고야 마는 삼십 년 지기가 눈물 나게 고맙습니다. 항상 최고의 독자가 되어 엄지를 척 세워주는 우리 가족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아직 서툴고 모난 글을 고운 시선으로 봐주신 심사위원님께 가장 진심을 담아 감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겨울 들판이 황량하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다가올 봄이면 다시 알곡을 품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온기가 느껴지는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온기 있는 글을 쓰도록 애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