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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 27회 인천시민문예대전 공모
2016년도 제27회 <인천시민문예대전> 신인발굴 문학 작품을 공모합니다.
올해 접수는 2016년 9월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두달 간에 걸쳐 작품을 받습니다.
그리고 작년보다 훨씬 시상금이 많습니다.
회원님들 널리 알려서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 바랍니다.
회장
한국문인협회 인천광역시회(회장 문광영)는 10월30일까지 시(시조), 소설, 수필, 아동문학(동시, 동화), 희곡(시나리오) 등 다섯 분야에 걸쳐 신인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을 공모한다.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시민을 대상으로 개최되고 있는 인천 유일의 문예 공모전이다.
각각 분야별 시상금은 시 분야 70만 원, 소설부문 100만 원, 수필부문 50만 원, 아동문학 부문 50만 원, 희곡부문 70만 원이다. 아울러 당선자는 인천문인협회 입회가 가능하고, 작가로 인정한다. 당선작은 12월 초순에 발표하며, 12월 하버파크 호텔에서 시상한다.
인천시민문예 대전은 분야별 당선작을 모아 수상작품집도 간행하여 인천지역 관계기관 및 도서관에 배부한다.
문광영 인천문인협회 회장은 “인천시민문예대전은 우리 한국 문단에 새 바람을 일으켜 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문학 인재를 찾기 위해 신인 발굴 문학작품 공모를 한다.”라며 "그동안 이 공모전을 거쳐 간 수상자들은 현재 문단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시인, 수필가, 소설가 등 작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전했다.
(문의 : 032-876-1797, 1004munin@hanmail.net)
[2015년 인천시민문예대전 시부문 대상작]
종이컵 / 오태근
아이들이 종이컵을 잘게 부순다
도화지에 풀칠하고 하나하나 붙인다
지구의 허파가 잘려 나간 자리
아이들은 잘게 부순 종이컵으로
모자이크 놀이를 한다
정글이 죽순이 기어 나오듯 자란다
아마존 강이 흐른다
노을이 쏟겠다
소 떼가 서쪽으로 치달았다
인천문인협회 http://cafe.daum.net/1004mu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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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시민문예대전 시, 시조 부문 대상 수상작]
총 응모자 : 82명
대상 수상자 : 정혜돈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
시 「귀향」외 6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2월 9일 송년회에서 시상을 하고, 상패와 상금 70만원이 수여되며, 아울러 인천문인협회 정회원 입회자격이 주어집니다.
앞으로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인천문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민문예대전 시,시조 부문 심사평>
체험의 깊은 인식, 감각적 심상으로 재구성해야
올해 시민문예 대전에 접수된 시, 시조 작품은 82명이 응모하여 500편에 가까웠다.
문제는 여전히 그럴싸한 화려한 수사를 한다거나 상투적이고 관념적이며 자기감정을 푸념하듯이 털어놓은 시들이 많아 안타까웠다. 하지만 좋은 작품도 상당수 발견하였다. 그중 1차 심사를 마치고 최종심에 올라온 시들은 박혜영의 「어머니의 계절」, 정혜돈의 「귀향」, 최하나의 「비문증」이었다.
박혜영의 시는 진솔하고 따뜻했다. 가을은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더욱 먹고 싶은 계절임을 시적으로 잘 표현했다. 다른 투고작에서도 소외된 인간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이 감지되었지만, 기시감으로 인해 식상하게 느껴졌다. 좀 더 참신한 시적 인식이 필요했다. 최하나의 시는 비문증을 “눈꺼풀 아래 까만 파리가 날아들었다”는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해서 신선했다. 그러나 함께 투고한 다른 시들과의 편차가 고르지 않았다.
이에 비해 대상 수상작으로 뽑힌 정해돈의 시 7편은 모두 참신한 발상과 이미지가 돋보였다. 그중 「귀향」은 추석 전야 귀성 차량 행렬을 보고 착안한 시적 인식이 아주 새롭다. 수도 서울의 주산인 남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거대한 용암이 고속도로를 타고 전국 각지로 흘러간다는 발상이다. 화산이 폭발하자 사람들이 피난 가는 장소는 부산, 목포, 강릉, 안동 등 각처의 고향이다. 화산 폭발의 발원지인 서울은 텅텅 비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는 소외된 이들은 그 위험한 곳을 떠나지 못한다. “외국인 근로자들”로 대변된 그들은 위험하고 텅 빈 곳에 남아 라면을 끓인다. “식어가는 용암에 냄비를 얹고 라면을 끓여” 먹는다니 얼마나 비극적인 인식인가. 시인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도 객관적 상관물인 화산폭발과 용암을 제시한 이미지로써 보여주기만 할 뿐인데 머릿속에 강렬한 그림이 그려지는 수작이다.
이처럼 집중해서 관찰한 사실적 풍경을 감각적 심상으로 재구성할 때 시가 된다. 묘사가 적절하다면 굳이 시인이 어떤 말을 하지 않더라도 현상이 말을 하게 된다. 시인은 어디까지나 언어의 심부름꾼이고 객체일 뿐이다. 앞으로 당선자는 더 좋은 시를 많이 써서 인천문단과 한국 시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기를 권한다. 또 안타깝게 탈락한 분들과 입상권에 들지 못한 투고자들께도 감사하다. 일일이 거론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 달라는 당부와 함께 문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미혜(아동문학가)
류인채(시인)
<수상작>
귀향
정혜돈
추석 전날 밤,
남산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거대한 용암이 사방으로 분출한다
서울에서 부산, 목포, 강릉, 안동까지
고속도로로 밤새도록 흘러간다
새벽이 되어서야 용암이 멈춘다
사람들은 각자 고향으로 대피하고
서울은 분화구 같이 텅텅 비어 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외국인 근로자들
식어가는 용암에 냄비를 얹어 놓고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거문도 사람들
거문도 여객터미널 앞
횟집 모퉁이를 돌면
바람들만 다니시는
바람 길이 있다
골목이 끝나는
하얀집 모퉁이를 돌면
하느님들만 다니시는
하늘담 길이 있다.
하늘바람과 함께 사는
거문도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느님이시다
모성(母性)
강물이 저렇게 넓고 깊은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마음이
바다같이 넓고 깊은 것은
엄마 뱃속에
마르지 않는 빈 마음이 펑펑 솟고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
집 떠나는 자식들 향해
손 흔들어 주는
허리 굽은 어머니
대문앞 풀섶에 서 있다
보슬비
나약한 몸이지만
포근하고 끈질기다
요란하지 않게
살그머니 다가선다
깊숙이 파고들어
마침내
완전히 우주를 적셔 놓는
어머니의 기도
섬은 맛있다
바다는 커다란 솥이다
간을 맞춘 바닷물에
섬을 넣고 햇볕으로 끓인다
섬이 야들야들하게 익는다
갈매기들이 날아와 맛있게 섬을
조금씩 쪼아먹는다
섬 바람이 불면
갈매기똥에서는 섬 냄새가 난다
저 건너 밤섬에서 밤을 뒤적이고 있는
햇볕, 고구마섬을 바라보고 있다
배가 고픈가보다
갈매기가 먹다 남은 섬
용광로
소리를 잉태했다
자궁
붉은 양수가 부드럽다
곧 태어날
시뻘건 울음덩어리가 끓고 있다
혈전을 걸러내야 맑은 소리가 난다고
에밀레의 기도를 먹인다
깨침을 기억한 듯
심장박동 소리가 맑아진다
노을빛 너머
수 천 킬로 날아갈 종소리
날갯짓이 배를 힘차게 걷어찬다
한 달 후면
멀리 크게 울려 퍼질 손자의 목소리
할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란다
[2016시민문예대전 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
총 25명 응모
대상 수상자 : 김선희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
소설「별꽃 아재비를 위한 노래」외 1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2월 9일 송년회에서 시상을 하고, 상패와 상금 100만원이 수여되며, 아울러 인천문인협회 정회원 입회 자격이 주어집니다.
앞으로 훌륭한 소설가로 성장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인천문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민문예대전 소설 부문 심사평>
글은 고뇌와 사고의 산물, 곧 자기 자신의 완성인 것
심사를 할 때마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문학의 최고 가치는 어떤 사물에게 나를 바쳐 제2의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작품 속에 자기의 영혼이 어떻게 존재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좋은 글은 언제나, 한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된 깊은 진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먼저 그 인격의 성숙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무릇 예술 작품은 오랜 고뇌와 사고의 산물이며, 글의 완성은 곧 자기 자신의 완성인 것이다. 글 쓴 이의 어떤 인격이 배제되어 버리면 그것은 기껏 저질스런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아무리 도둑놈의 이야기를 써도 결국은 그것이 자기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되기 전에 먼저 자기 수양부터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번에 응모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접근을 한 것 같아 아쉽다. 소설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소설이 될 수 없는 스토리는 아무리 매달려 노력을 해도 성공하기 어렵다.
다행히 그 가운데 김선희 님의 「별꽃 아재비를 위한 노래」는 충분한 소설의 골격을 갖추고 있는 정적인 작품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재가를 하는 바람에 동생과 함께 외가에서 어렵게 성장하게 된 한 여인의 애잔한 삶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다.
사회적 통념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는 아주 성공한 인생을 보여주는 따뜻한 소설이다. 우선 문장마다 은근히 사람 사는 인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기 좋았다. 이 정도의 글을 쓰기까지, 이 정도의 성실한 삶을 살기까지 고생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 인생을 ‘별꽃 아재비’로 연결시킨 솜씨가 돋보여 그 점을 높이 샀다. 거기다가 월미도의 한 모텔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감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문체로 쓴 이 분의 다른 작품 「시체꽃」도 1등을 정하는 데 있어 한몫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김완수 님의 「기억의 고집」은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다. 자기 아내에 의해 정신병원에 구속하게 된 전직 고교야구 감독인 화자의 ‘기억에 대한 단상’을 여러 각도에서 나름대로의 성찰을 시도해본 소설이다. 참으로 황당하고 기발한 발상이지만, 무엇보다 문장이 정확하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신선하다. 지적이면서, 아주 샤프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인간의 심리를 진지하고 매력 있게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꾼의 기질이 뛰어난 사람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고 설득력 있는 장면도 몇 군데 눈길을 끈다.
하지만 같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동료 환자의 기억을 찾아주기 위해 결국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얘기인데, 글쎄 과연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결행해야 할 가치가 있었을까?
……장갑裝甲처럼 둔중한 차들이 제 신호를 받으며 거침없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차도를 마주했다. 한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곧 신호가 바뀔 것 같은 불안을 껴안고서 붉은 표적을 향해 돌진하는 소처럼 앞만 보고 내달렸다. 아무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기억의 고집을 위해 나는 내 한 몸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며 피안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역시 너무 무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거기에 어떻게 피안의 세계란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김영덕 님의 「캐리어」는 모처럼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된 학원 청소부 여자의 얘기를 안정감 있게 전개하고 있는 비교적 무난한 작품이다. 가난 때문에 아파트 재활용 분리수거장에서 주워온 한쪽 바퀴가 깨진 남루한 캐리어에 얽힌 애환을 섬세하게 그린 것이었다. 그 캐리어가 제주 공항에서 어떤 젊은 남자의 캐리어와 부딪치는 바람에 그나마 깨진 바퀴가 잘못 되어 일어난 작은 소동이 무리 없이 어떤 진한 인생을 느끼게 하는 다감한 소설이다. 다만 군데군데 문장이 조금 부정확한 것이 흠이다. 이 분도 앞으로 자기 몫을 다할 훌륭한 작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의 소리를 내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글 속에는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야 한다. 그것의 정확성을 잃으면, 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그냥 무의미하게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실로 오랫동안 사물 하나하나와의 영적 교류를 시도하는 것이다.
심사위원 김진초(소설가)
강인봉(소설가)
<수상작>
별꽃 아재비를 위한 노래
김선희
휴대폰 벨 소리에 잠이 깼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이모부였다. 이모가 숨을 못 쉰다고 했다. 잠든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술이 덜 깬 남편은 눈도 뜨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택시를 타고 나서야 휴대폰을 두고 나온 것을 알았다. 손에 쥐고 있던 지갑이 자꾸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택시 기사가 룸 미러를 흘낏 거리며 괜찮은지 물었다. 아저씨 좀 더 빨리 가주세요. 재촉하는 말에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새벽의 응급실은 분주했다. 지나치게 밝은 불빛과 소란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모는 교통사고 환자 옆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작은 소리로 이모부를 불렀다. 이모부가 고개를 들었다. 축 처진 어깨와 헝클어진 머리칼이 이모보다 더 환자처럼 보였다. 이모가 응급실에 실려 온 것이 벌써 두 번째다. 이모의 야윈 팔뚝으로 스며드는 투명한 액체는 진통제일 것이다. 이모의 체력은 항암 치료를 견뎌내지 못했고 진통제 양은 점점 늘어갔다. 이젠 약발도 안 받네. 이모부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위급한 상황은 넘긴 거죠. 가서 조금이라도 주무시고 출근하셔요. 여기는 제가 있을 게요. 가시는 길에 진영 아빠한데 저 여기 있다고 문자나 해주세요. 이모부를 보내고 나는 이모 얼굴 맡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살가죽만 남은 얼굴이 새까맸다. 암 덩어리가 자라던 자궁을 들어냈지만 질기게 남은 암세포가 이모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나는 절대 자식들한테 병수발 안 시킬 거야. 병 걸리면 콱 죽어버릴 거야. 외할머니에게 두들겨 맞고 훌쩍거리던 이모는 다짐하듯 말했었다. 이모 말처럼 자식에게 병수발을 시킬 일은 없었다. 이모의 자궁은 아이를 품어보지도 못하고 버려졌다.
외할아버지가 쓰러지고 외할머니는 근처 공사장 인부들을 상대로 하는 함바집에 취직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살아남은 건 엄마와 외삼촌 그리고 늦둥이로 낳은 이모뿐이었다. 엄마와 이모의 나이 차이는 15년이나 된다. 엄마는 아버지가 죽고 나와 남동생을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재혼했다. 엄마의 남자에게 나와 남동생은 없는 존재였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외삼촌은 도시로 보내졌고 나와 남동생은 집안 허드렛일을 하며 밥값을 해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자연스레 이모의 차지가 되었다. 10살짜리 아이 몸에서는 항상 구린내가 났다. 외할아버지의 똥 기저귀를 빨다 보면 옷에 똥물이 튀기도 하고 채 씻기지 않은 오물이 손등이나 손목에 말라붙었다. 오줌 지린내와 무언가가 썩는 냄새도 이모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병적인 결벽증을 가진 외할머니는 금세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냈고 손끝이 야무지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모를 때렸다. 이모는 외할머니가 치켜든 빗자루만 봐도 다리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쏟아지는 매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이모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눈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외할머니 서슬에 남동생은 오줌을 싸고 나는 불똥이 내게도 튈까 두려워 이모가 우리의 잘못까지 모두 떠안고 맞아주기를 바랐다.
외할머니의 독기에 질식한 이모는 몸도 마음도 자라지 못했다. 키도 또래보다 작고 정신연령도 남동생 수준에 머물렀다. 나와 동생이 집을 나설 때면 이모는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등에 맨 내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공부는 남자의 전유물이라고 믿는 외할머니가 나를 고등학교까지 보낸 것은 엄마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새 아버지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기반을 잡은 엄마가 매달 학비를 보내준다는 사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서야 알게 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의사와 간호사가 옆 침대를 둘러쌌다. 사람들 틈으로 환자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고역이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가슴이 옥죄는 데 가족의 죽음은 고통의 질량을 측정할 수 없을 거였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물 한 잔을 마시고 왔다. 이모는 주변의 소동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이모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이모 괜찮아?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니. 이모부는?
-들어가시라고 했어.
-아침까지 기다리면 될 걸. 이 비싼 데는 뭐 하러 왔다니.
-이모는 별소릴 다한다. 지금 비싼 거 따질 때야.
나도 모르게 말투에 신경질이 묻어 나왔다.
-미안해.
이모가 바보 같이 웃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흘러내린 이불을 이모 목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얼굴을 마주 하면 모진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진통제를 다 맞고도 이모는 여러 검사를 해야 했다. 이모는 며칠 입원을 하자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응급실을 나왔다. 억지로 이모를 택시에 태워 집까지 데려왔다. 남편과 아이들이 빠져 나간 집안은 어수선했다. 딸 아이 방에 이모를 누이고 죽을 쑤었다. 식탁에 이모와 마주 앉아 죽을 먹었다.
-옛날에 나한테 죽 끓여줬던 거 기억나니? 그때처럼 맛있다.
-흰 쌀죽이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다고. 이건 전복이랑 양배추도 넣어서 훨씬 맛있을 걸.
이모가 베시시 웃으며 죽을 먹었다. 죽을 때가 되면 옛날 일만 새록새록 떠오른다더니 케케묵은 그 일을 꺼내보고 싶었나보다. 이모를 위해 처음 만들었던 흰죽 맛을 나도 잊은 적은 없었다. 이모가 잘못될까봐 가슴앓이를 하던 나는 손이 데이는 것도 모르고 온 정성을 다해 죽을 쑤었었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동생을 챙겨 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친구들과 한가롭게 노는 일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이모를 도와 텃밭에서 고추와 깻잎을 따고 외할머니와 우리가 자는 방을 치워야 했다. 그날은 집안일을 팽개치고 이모를 꼬여내 들과 산을 쏘다닌 벌로 학교를 가지 못했다. 동생만 아니었어도 우리의 일탈은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입을 다물기로 한 녀석이 놀다 냇물에 빠진 걸 핑계 삼아 외할머니에게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다리가 얼얼하도록 회초리를 맞았다. 같이 놀았던 동생은 아무 일 없이 학교를 가고 나는 외할머니가 시킨 일들을 해놓아야 했다.
종일 텃밭에서 일을 하던 나는 이모 부탁으로 외할아버지 점심을 먹였다. 똥만 퍼질러 싸는 외할아버지에게 꼬박꼬박 밥을 먹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말도 못하고 매일매일을 방에 누워 이모를 괴롭히는 외할아버지가 사라진다면. 외할아버지를 향한 미움이 점점 몸집을 불렸고 계집애라고 구박하는 외할머니에 대한 증오가 고개를 쳐들어 나를 부추겼다. 외할머니가 벌벌 떠는 유일한 존재를 없애버리는 것 이상의 앙갚음은 없을 거였다. 나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들어 올리듯 외할아버지의 몸을 뒤집었다. 방바닥에 코가 박힌 외할아버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침이 바닥으로 흐르고 피가 몰린 얼굴이 붉게 부풀었다. 수건으로 등을 닦아주는 척 하다 그대로 방을 나왔다.
나는 쟁반과 그릇을 부뚜막에 올려두었다. 아궁이를 청소하느라 엉덩이를 치켜 올린 이모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외할아버지가 다 드셨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도 않고 부엌을 나왔다. 가슴이 쉴 새 없이 콩닥거리는 중에도 외할아버지 방에 다시 들어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외할머니 말처럼 밥값도 못하는 외할아버지가 죽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지금쯤이면 외할아버지가 죽었을까. 언제 들어가서 다시 몸을 눕혀야 할까. 나는 뒷간 근처를 배회하며 외할아버지의 숨이 넘어가기만 기다렸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모의 목소리보다는 더 우렁차고 새된 목소리가 집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평소와 달리 낮에 외할머니가 집에 들른 걸 보면 외할아버지는 질긴 목숨을 타고 난 게 틀림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안정되게 숨을 쉬는 걸 확인한 외할머니는 나와 이모를 마당에 꿇어앉히고 빗자루를 휘둘렀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뒤집어 놓은 년이 누구냐고 소리소리 질렀다. 맞아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벌린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달았다. 어머니 용서해 주셔요. 불에 올려놓은 거 때문에 급히 나오느라 아버지를 제대로 눕혀 드리지 못했어요.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셔요. 이모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나는 내가 한 짓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매질에 입 안의 혀까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외할머니의 빗자루는 이모를 향했다. 외할머니는 빗자루가 부러지자 두툼한 손으로 이모의 등짝을 내리쳤다. 외할머니의 손에 이모 몸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매질은 이모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 되었고 겁에 질린 나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쌌다.
이모는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 외할머니는 함바집을 오가며 외할아버지 수발을 들었고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왜 그랬어. 하지도 않은 일을 왜 했다고 거짓말을 했어. 죽을 뻔 했잖아. 나는 죽을 떠먹이며 울먹였다. 너보다는 내가 맞는 게 낫잖아. 너는 나보다 어린데. 몇 살이나 차이난다고. 내가 이모보다 덩치도 크잖아. 나는 엉엉 울었다. 남동생은 심심하다고 징징대다 나와 이모가 우는 통에 같이 훌쩍거렸다. 이모가 기력을 찾고 나서 외할머니는 이모 몸에 약을 발라주었다. 피가 삭는 약이라고 했다. 이모는 눈물을 들킬까봐 고개를 숙였고 외할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나무라지 않았다. 화난 사람처럼 잔뜩 얼굴을 구기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약을 바르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모가 누워 있는 며칠 간 할 일이 쌓였지만 힘든 줄 몰랐다. 나는 이모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평생 빚을 갚겠다는 의지는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번호 키 누르는 소리에 이어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모를 본 남편이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모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섰다.
-왜, 먹던 것 마저 비우고 가.
-아니다. 강 서방 쉬어야지.
그릇에 새 죽을 담아 이모를 따라 나섰다.
-강 서방 혼자 있는 거 싫어하잖아. 얼른 들어가.
이모가 내 등을 밀었다. 이모는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워 있을 것이다. 곁에 있지도 못하고 더 붙잡을 수도 없는 상황에 힘이 쭉 빠졌다.
남편은 소주를 꺼내 식탁 앞에 앉았다. 안주로 찌개를 끓여 맞은편에 앉았다. 남편이 내게도 소주잔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한 잔을 비우고 손사래를 쳤다. 남편이 이모가 응급실에 실려 갈 만큼 위급한 거냐고 물었다. 진통제도 별 소용이 없는 거 같아. 남편이 말없이 잔을 비웠다. 남편이 다음에 그런 일이 있으면 꼭 깨우라고 당부했다. 나는 남편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빈 소주병을 치우고 새 소주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남편이 손을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들 만큼 취기가 오르지 않은 상태가 불안했다. 남편이 컴퓨터를 켰다. 설거지를 하는 내내 방 안의 남편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남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물소리에 못 들은 척 반응하지 않았다. 문이 벌컥 열리며 남편이 나와 내 팔을 낚아챘다. 침대에 나를 누인 남편이 다짜고짜 바지를 벗겼다. 눈을 감았다. 침대가 한동안 들썩이다 남편의 몸이 내 몸 위로 쓰러졌다. 조심스레 남편의 몸을 밀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포르노를 본다. 거칠게 살아온 남편의 유일한 취미를 막을 수는 없다. 거부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살아오면서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남편이 작게 코를 골았다. 싱크대 앞에 섰다. 불쑥 불쑥 화기가 얼굴로 몰려드는 것은 갱년기 탓일 것이다.
남편을 만난 것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였다. 외삼촌 소개로 취직한 용역회사에는 노총각이 많았다. 그 중 한 남자가 유독 내게 관심을 보였다. 남동생이 타지로 떠난 집에는 이모와 병든 외할머니와 나까지 세 여자가 살았다. 외삼촌은 결혼을 하고 어쩌다 한 번씩 외할머니를 보러 왔고 외할아버지 병수발에서 놓여 난 지 얼마 안 된 이모에게 당연하다는 듯 병든 외할머니를 맡겼다. 결혼이라는 것이 나 좋다는 사람 있을 때 하는 거라고 외삼촌은 말했다. 강씨는 시댁 식구라고는 시골 사는 아버지뿐이야. 배운 기술이 있어서 처자식 굶길 일 없는 사람이고. 부모도 없는 너에게는 그만하면 괜찮은 혼처야. 외할머니를 이모에게 맡기고 혼자 그 집을 떠나왔다. 남편은 무뚝뚝하고 외골수지만 성실했고 중장비 자격증도 여러 개여서 오라는 현장도 많았다. 술을 달고 살았지만 타고난 건강체질 덕에 병원 신세를 진적도 없었다. 아직까지 결혼생활이 유지되는 것은 두 아이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은 지방 현장에서 잡은 거라며 가지고 온 한우 고기와 시골 친구가 보내 준 해산물 등을 이모에게 군소리 없이 퍼주었다. 가끔 자식이 없는 이모를 측은하게 여겨 용돈을 챙겨줄 때면 남편이 미덥고 고마웠다.
소파 위에 휴대폰이 살짝 떨렸다. 액정에 아들 이름이 떴다. 나는 남편이 깰까 소리를 죽이며 아들과 통화를 했다. 아들은 지방 산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고 있어 서너 달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서로의 안부를 간단하게 묻고 전화를 끊었다. 아들이 취직을 해서 지방으로 내려가고 딸아이가 취업반이라 집에는 거의 남편과 둘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나의 관심사가 모두 남편에게 향하기를 바랐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의 집착은 더 강해지고 있다.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는 이모부가 와서 저녁을 먹고 약도 챙겨 먹었다고 했다. 죽은 낼 아침에 꼭 먹을 거라며 아프면 연락도 하겠다고 말했다. 바뀐 진통제가 좋다는 말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첫 아이를 가지고 만삭이 될 무렵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숙모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세상물정에도 어두운 이모가 골치 덩어리였다. 이모는 밥벌이를 하겠다며 공장에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이모부를 만났다. 이모부와 연애를 한 이 년의 시간이 이모의 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모부는 유치원 버스를 몰고 있다. 이모부는 공장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장사를 시작했지만 온 나라를 뒤흔든 IMF에 육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헐값에 가게를 처분하고 이모부에게 남은 것은 빚과 12인승 버스뿐이었다. 유치원생과 입시생들을 태워주며 받는 돈은 기름 값에 차량유지비를 빼면 겨우 생활비만 남았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빠듯한 살림에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 했다. 이모가 제 한 몸 추스르기도 버겁게 되고 이모의 시어머니는 다른 자식 집으로 옮겨갔다. 늘 쪼들리는 이모가 안쓰러워 같이 장을 볼 때면 갈치나 국거리를 사서 들려 보냈다. 마늘장아찌나 오이지를 해서 아이들 편에 보내면 이모는 맨날 이래서 어쩌니라며 미안해했다. 몸 둘 바를 모르는 이모는 백치 같기도 하고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모는 나를 친구처럼 의지했고 나는 옆에 이모가 있다는 것만으로 족했다.
남편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된장을 끓이고 나물을 무쳤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며 남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팔다리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가 힘겹다. 깊은 잠에 빠져 남편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엄마가 이모네 와 있다는 전화를 받고도 바로 집을 나서지 못했다. 엄마는 며칠 전 응급실에 실려 간 이모가 걱정되어 왔을 것이다. 외삼촌에게 등을 떠밀려 시집을 갈 때도 엄마는 친척처럼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이후에는 첫 아이의 돌과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여섯 살, 남동생이 네 살 무렵 엄마와 헤어졌다. 우리는 외할머니의 동거인으로 기록되었고 성인이 되기까지 엄마의 주변 인물로 밀려나 있었다. 엄마와 나는 닮은 구석이 없다. 죽은 아버지를 닮아 공유할 부분이 없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나이가 든 내 얼굴을 마주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였다. 엄마는 이모 앞에서 많이 울었다. 왜 하필 너한테 이런 일이 있는 거니. 말끝마다 보채는 아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모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댔고 나는 지루한 상황을 말없이 버티고 있었다. 엄마가 갑작스레 내 손을 잡았다. 나에게는 할 말이 없는지 손등을 매만지기만 했다. 나는 슬쩍 손을 뺐다. 늙어가는 처지에 새삼 모녀의 정 운운하는 신파는 질색이었다. 어색한 시간을 견디는 사이 식탁 위에 사과가 푸석푸석하게 말라갔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참을 통화하던 엄마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내 앞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인사를 했고 현관까지 따라 간 이모에게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딸이 애 낳은 지 얼마 안 됐거든. 산후통이 심해서. 주위가 너무 조용한 탓이었을 것이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굳이 내 귀에까지 전해진 것은.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해 준 사람은 이모였다. 엄마가 자연산이라며 보내준 비싼 미역은 산후조리가 끝나고 허옇게 바래 버려졌다. 커가며 정드는 시간을 생략한 모녀 사이에 서운한 감정은 없었다. 첫 생리가 터져 피가 묻은 내 팬티를, 외할머니가 볼 세라 쪼그려 앉아 빨아준 사람은 이모였다. 내가 외할머니에게 바락바락 대들다 뺨을 맞을 때도 몸으로 막아서 준 사람은 이모였다. 나는 이모 하나로 충분했다.
이모가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려 했다. 나는 받을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다. 공돈이라 여기며 주머니에 넣은 들 상관없었지만 나는 기어이 돈을 이모에게 주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불편한 사이에는 새삼 보상의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등학교까지 학교를 다닌 것도 모르는 이에게 장학금을 받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이모를 보살펴온 것에 대한 대가라 이름 붙일 수도 있지만 이모 앞에서 그런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모가 답답하다며 산책을 가자고 말했다. 5월인데도 초여름처럼 날이 더웠다.
저층 주공 아파트는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주차 공간이 부족해 불편하지만 녹지가 많아 쾌적했다. 동과 동 사이 굵직한 나무들은 이파리를 가득 달고 서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아파트 화단에는 키우기 쉬운 꽃나무가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이모가 사는 동은 뒷마당처럼 넓은 공간에 잔디가 깔려 있다. 햇볕도 잘 들어서 구석구석 야생화 천지였다. 올해도 보랏빛 엉겅퀴와 파란 개불알 풀이 잊지 않고 무리지어 피었다. 이모와 나는 하늘빛을 닮은 작은 풀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개불알 풀은 억울하겠어. 생긴 건 이렇게 이쁘게 생겼는데 사람들이 자기들 맘대로 상스럽게 이름을 붙여주고. 어머 그런데 이 꽃은 숨어 있네.
이모가 가리키는 꽃은 별꽃아재비였다. 꽃의 크기가 꽃마리처럼 작고 다섯 꽃잎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금색은 천박하게 번쩍이지 않았다. 작지만 기품 있는 꽃은 워낙 이파리가 길고 커서 얼핏 보면 이름 없는 잡풀처럼 보였다. 잎의 뿌리 가까이 벌레처럼 붙어 있는 꽃송이는 몸을 한껏 낮추고 눈을 바짝 들이대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바닥에 붙어 핀 꽃을 보려하지 않았다. 수많은 잡초 사이에 섞인 꽃은 화단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한데 휩쓸려 잘려 나가곤 했다.
-별꽃아재비야. 이모.
-세상에 이름도 예쁘다. 나는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네. 그런데 얘는 참 힘들겠다. 이렇게 큰 몸뚱이에 치여서.
이모는 별꽃아재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꽃잎이 떨어질까 스치듯 조심스레 꽃잎을 쓸어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모가 꽃을 가리고 있는 이파리를 뜯어냈다.
-이래야 여기 꽃이 있는 줄 알지. 이제야 잘 보인다.
이모의 야윈 어깨가 더 쪼그라든 것 같았다. 나도 이모를 따라 별꽃아재비를 덮고 있는 이파리들을 뜯었다. 이파리가 사라진 자리에 조그맣고 앙증맞은 꽃잎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모 김치 담갔어. 이모 겉절이 좋아하잖아. 허둥대느라 잊고 왔네. 저녁에 가져갈게.
-요새 금치라던데 뭐 하려고 그 비싼 걸.
-금치라도 먹어야 살지.
-강 서방 미안하게 스리.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앙칼진 목소리에 이모가 움찔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이모는 더는 묻지 않았다. 자기 몸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내 얘기까지 얹으면 이모의 걱정거리만 늘어난다.
의사는 보름 동안 부부관계를 피하라고 말했다. 도살장에 끌려간 가축처럼 다리를 벌리고 누워 제 살인 냥 박혀 있는 루프를 제거했다. 살점이 뜯기는 아픔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다. 금술이 좋으신가봅니다. 그래도 이제 기구는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처방해드린 약 드시고 이틀 후에 다시 나오시죠. 병원을 다녀온 후 침대 위에 축 쳐져 있었다. 남편은 콘돔을 쓰는 것을 싫어했다. 수술을 한다는 것은 남편에게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달려드는 남편 때문에 중절 수술도 두 번이나 했었다. 그때마다 남편 대신 이모를 보호자로 대동하고 뱃속에 아이를 지웠다. 임신한 사실을 알렸을 때 남편은 알아서 하라는 말만 했다. 뜻밖의 임신이 내키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 아이만으로도 버거웠다. 사랑보다는 책임감으로 아이들을 대해왔다. 사랑을 주는 것도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엄마라는 자리가 두려웠다.
현장 일을 마친 남편이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집에 왔다. 저녁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 남편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까무룩 잠이 든 사이 아랫도리가 서늘해지는 불쾌감에 눈을 떴다. 잠깐 일어나 봐. 낮은 남편의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오늘 어딜 다녀 온 지나 알고 이러는 거야? 산부인과에 다녀왔어. 너무 오랜 시간 내 몸에 박혀 있어서 그거 빼는 데도 애를 먹었어. 그만 좀 해.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나.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고 방을 나왔다. 급습을 당한 남편은 뒤따라 나오지 못했다. 나는 입은 옷 그대로 아파트 단지를 서성거렸다. 차마 이모에게 갈 수 없었다. 남편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행위는 시간이 지나도 견디기 힘들다.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인내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면 이모 앞에 누워 소리 죽여 울곤 했다.
폭언과 손찌검에 시달리던 두 여자 아이는 서로의 눈물에 익숙했다. 자신의 눈물을 닦기도 지친 우리는 상대방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모와 나의 오랜 습관은 나이가 먹어서도 진행 중이다. 햇살이 드는 거실 창가에 누워 각자의 아픔이 삭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 이상의 치유 방법은 없었다.
구석진 공원 벤치에 기대 앉아 시간을 죽였다. 아이를 지우고 누워있는 내게 이모는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애 낳는 거랑 똑같단다. 허기진 뱃속에 미역국을 들이밀 때처럼 헤집어진 상처를 어루만져 줄 따스한 온기가 그리웠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로 들어섰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거리에 가로등이 켜지는 걸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침대에서 코를 골아대고 아이는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어디를 다녀 오냐는 아이의 물음에 이모 집에 다녀왔다고 둘러댔다.
이른 새벽 집을 나가는 남편이 지방 현장에 가게 되어서 당분간 오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나와 남편은 얼굴을 붉혔던 일 따위는 잊은 듯 덤덤하게 인사를 나눴다. 지방에 머무는 사이 남편은 내가 병원에 다녀온 사실을 잊을 거였다.
-엄마한테 곰살 맞게 굴어.
이모가 눈은 꽃에 둔 채 화제를 돌렸다.
-넌 나보다 훨씬 똑똑하잖어. 느이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거야. 나처럼 미련한 인간이 어디 있겠니. 도망도 안 가고 아둔하게 맞는 내가 엄마는 꼴도 보기 싫었나봐. 덜 떨어졌다고 맞은 적도 있었거든.
-이모는 외할머니가 원망스럽지도 않아?
-저기 좀 봐.
이모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뭇잎 하나가 그네를 타듯 천천히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원래 씨앗 품은 잎들은 저렇게 떨어진다고 하더라. 저렇게 가로로 왔다갔다 하면서 떨어지면 바닥에 떨어져도 씨앗이 멀쩡하대.
-이모 똑똑하네. 난 그런 거 몰라.
-실은 어떤 할머니가 알려 준거야. 너 학교 가고 나면 나도 뒷산에 가서 꽃 따고 나무 올라가서 학교 바라보고 그랬어. 그때 할머니랑 본 건 나뭇잎 두 장이 날개처럼 펼쳐진 건데 사뿐히 내려앉는 게 뭔지 직접 봤다니까.
-그런 얘기는 왜 하는데.
-자식 아끼는 건 나무고 사람이고 같다고. 우리 엄마 누워있을 때 엄마가 나를 미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는 거 알았어. 너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잖아. 조금만 네 엄마한테 품을 내줘 봐. 저기 저거 할미꽃 아니니?
이모가 오리걸음으로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나가는 말처럼 불쑥 꺼내놓고 흐지부지 꼬리를 감추는 것이 이모의 오랜 말투였다. 나도 이모 옆으로 다가갔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 선 것은 야생 할미꽃이었다. 누군가 산에서 캐와 심은 모양이었다.
-요새 어릴 적 너랑 동네 어떤 여자 아이랑 놀던 산이 자꾸 생각 나.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가 천국이었어. 도시 나와서는 볼 수 없는 것들 거기서 다 본 거 같애. 이름은 잊었어도 색깔이며 모양은 또렷하거든.
도시의 꽃은 비슷비슷했다. 아파트 화단마다 비비추가 흔했고 봄이면 경쟁하듯 빨간 철쭉이 단지를 채웠다. 도로가에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도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시골에서 보았던 야생화는 눈을 씻고 찾아봐야 겨우 한두 가지 종류가 보였다. 동과 동 사이 빈 공터에는 민들레를 캐 가는 여자들이 간혹 눈에 띄었고 클로버가 지천으로 깔린 사이로 붓꽃이나 제비꽃이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간혹 수줍게 얼굴을 들어 보인 봄맞이와 별꽃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에게 죽을 만큼 맞고 난 이후에도 나와 이모는 외할아버지가 잠든 걸 확인하고 뒷산으로 놀러갔다. 우리는 숨 막히는 집안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행복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올라가 멀리로 보이는 능선에 시선을 빼앗기고 토끼풀을 치마 가득 담아 냇가 근처에 앉아 반지며 왕관을 만드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도 재미났다. 동네 아이들이 모르는 야생화의 이름을 학교에 있는 낡은 식물도감에서 발견했을 때는 연습장 귀퉁이에 그려 가 자랑하기도 했었다.
-너도바람꽃, 금낭화, 자운영, 용담꽃이랑 야생 잔대꽃, 구절초, 고들빼기, 무릇, 노루오줌......
이모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손가락을 접으며 꽃 이름을 외워댔다. 풀숲을 뛰어다닐 때는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귀한 줄 몰랐었다. 어딘가 숨어 찾기 힘든 꽃들은 이모와 나의 지난 시간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리 시어머니 동서들이 서로 안 모시겠다고 싸우나보더라.
-지금 이모가 그 노인네 사정 생각해줄 때야.
-사람이 미련해서 그러지. 그래도 안 된 거는 안 된 거잖아. 난 꽃으로 태어날란다. 이꼴 저꼴 안 보고 걱정거리도 없이 저 꽃처럼 조용하게 왔다 사라지게.
난 말없이 이모의 손을 잡았다. 짓무른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었다. 바람이 꽃잎 위를 스쳐가고 이모의 힘없는 머리칼도 따라 하늘거렸다. 이모의 생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육십 해를 사는 동안 이모의 맘이 편했던 날들은 얼마나 될까. 코끝이 아려 괜스레 클로버를 헤집었다.
-이모 내가 네잎 클로버 찾아줄까.
-난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는데.
이모가 나를 따라 머리를 처박을 듯 숙이고 무성한 이파리를 뒤적였다. 네잎 클로버를 찾듯 기적이 오리라 믿지 않는다. 이모에게 허락된 나머지 시간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듬섬듬성 머리가 빠진 이모의 머리를 스쳐 옅게 붉어진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이모와 있게 해주세요.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이모가 머리를 들어 나를 보고 웃었다. 수줍고 천진한 웃음이었다. (끝)
[2016시민문예대전 희곡,시나리오 부문 대상 수상작]
총 4명 응모
대상 수상자 : 서희윤
(인천시 계양구 귤현동 형제봉길)
희곡 「과자의 집」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2월 9일 송년회에서 시상을 하고, 상패와 상금 70만원이 수여되며, 아울러 인천문인협회 정회원 입회 자격이 주어집니다.
앞으로 훌륭한 희곡작가로 성장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인천문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민문예대전 희곡 · 시나리오 부문 심사평>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소통과 불통
금년 희곡 · 시나리오 부문의 응모작이 예년보다 적었지만 작품 수준은 높아져 즐겁게 심사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성소희의 희곡 「인간 김국동」과 서희윤의 희곡 「과자의 집」이었다.
성소희의 「인간 김국동」은 청년실업으로 꿈을 잃은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노량진 ‘컵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젊다는 게 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취업준비생. 날개가 돋아도 날 수 없는 현실, 허망한 준비를 멈춰도 돌아갈 곳이 없는 취업준비생은 독수리가 아니라 취객의 토사물이나 쪼아 먹는 비둘기라고 부르짖는 모습이 가슴 아프기는 하다. 하지만 어깨뼈에서 날개가 돋아난다는 진부한 설정,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전개가 몹시 아쉬웠다.
서희윤의 희곡 「과자의 집」은 하나의 공간을 두고 그 속에 담기는 내용물을 사람으로 설정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닉네임의 남매와 그들의 뒤를 이어 가게를 인수한 젊은 사장, 그리고 건물주가 만나 송별회 겸 환영회를 한다는 내용이다. 앞서 헨젤과 그레텔은 인형 만드는 공방을 하다 카페를 겸해 과자의 집을 운영했다. 그전엔 순댓국집이었고, 갈빗집이었고, 선술집이기도 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사장은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할 예정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장이 된 헨델은 못 가진 자, 능력 있는 부모를 둔 젊은 사장과 건물주는 가진 자, 이들의 대화는 악의가 없음에도 삐거덕거리고 틈이 생긴다. 그렇게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소통과 불통이 이 희곡을 읽는 재미다. 자연스러운 흐름과 재치 있고 상징적인 대사들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과자’의 집에서 이어지는 ‘아이스크림’ 가게다. 과자의 집도 위험하지만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더 빨리 녹아 형체를 잃어버린다.
서희윤 응모자가 끝내 하고 싶은 말을 여기서 찾으며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당선자에겐 축하를, 선에 들지 못했지만 아깝게 밀린 응모자들은 다음 기회에 좋은 성과 있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강인봉(소설가)
김진초(소설가)
<수상작>
과자의 집
서희윤
등장인물
헨젤 - 30대 초반
그레텔 - 20대 중반
건물주 - 60대 중후반
젊은 사장 - 20대 후반
무대 한 가운데 식탁과 의자 네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벽지나 바닥 등 전체적인 톤이 밝고 화사하다. 식탁에는 카나페, 초콜릿, 과일, 와인 등이 놓여있다. 무대 오른 편에 앞문, 왼 편에 부엌으로 가는 문이 있다.
앞문으로 헨젤과 그레텔이 들어온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에 의아해 한다. 실내를 낯설게 둘러보는 두 사람. 그레텔은 호들갑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수다 떤다. 헨젤은 어딘가 지쳐 보이는 얼굴. 맥없이 그레텔의 말을 받는다.
그레텔 : 아무도 없네.
헨젤 : 아무것도 없어.
그레텔 : 와아, 이렇게 보니까 전혀 다른 곳 같다.
헨젤 : (무심하게) 그러게.
그레텔 : 파스텔 톤으로 칠하니까 훨씬 넓어 보여. 우리도 이럴 걸 그랬다, 그치?
헨젤 : (대답하지 않는다.)
그레텔 : 하지만 이런 색은 관리하기 힘들 거야. 보기에 금방 질릴지도 몰라. (식탁을 보고) 아, 고기파이 구워오길 잘했다. 다들 저녁 안 먹고 모일 거 아니야. 이런 과자로는 성에 안 차지. 과자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허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밥이 되지 않는다구. 그리고 오빠는 술 마실 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잖아, 그렇지?
헨젤 :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레텔 : 안에서는 금연이야, 오빠. 이제 여기는 우리 가게도 아니잖아.
헨젤 : (말없이 담배를 집어넣는다.)
그레텔 : 물론 우리 가게였을 때도 금연이었지만. 아니 애초에 빌린 곳이었으니까……. 아 아니, 온전히 우리 가게였어도 금연이어야지! 담배 냄새가 식탁보에 밴다고 생각해 봐. 그걸 어떤 손님이 좋아하겠어? 안 그래?
헨젤 : (짧은 한숨) 그래.
그레텔 : 오빠 배고프지? 가져온 쿠키라도 조금 먹고 있을래? 땅콩쿠키, 달지 않으면서 맛있게 만들었어.
헨젤 : 나중에 먹을게.
그레텔 : 정말 다른 곳 같아. 새로운 장소처럼 느껴지네. 3년이나 일했던 곳인데도 말이야. 간판도 벌써 버려졌나 봐. 과자의 집.
헨젤 : 간판은 골목에 있어.
그레텔 : 골목에?
헨젤 : 깨져서 구석에 방치되어 있어.
그레텔 : 간판이? 아. (사이) 글자는 온전하지? 모음이라도 하나 떨어져 봐. 얼마나 웃기겠어. 과시의 집. 괴사의 집. 그리고 또, ‘과’자에서 ‘ㅏ’가 떨어지면, 과자의 집에서 고자의 집이 되는 거잖아. (천진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가 부끄러워하면서) 좀 그렇지, 오빠도? 고자의 집인 건 싫잖아.
헨젤 : 이젠 상관없잖아.
그레텔 : 그래도. 하하, 고자의 집……. 너무 천박한 유머인가?
헨젤 : 천박하면 어때. 우리 집도 아닌데.
남매는 잠시 말이 없다. 어딘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때 젊은 사장이 문을 열고 등장한다.
젊은 사장 : 안녕하세요.
그레텔 : 아, 안녕하세요.
젊은 사장 : 날이 덥네요.
그레텔 : 그래도 창문 열고 앉아있으면 밤공기가 선선해서 괜찮아요. 여기 앉으세요.
젊은 사장 : 주인아저씨는……?
그레텔 : 잠시 어디 가셨나 봐요. 저희도 방금 왔어요. 그치, 오빠? 오빠도 여기 앉아.
헨젤 : (말없이 그레텔 옆에 앉는다)
젊은 사장 : 아. 네. 고맙습니다.
그레텔 : 다음 세입자시죠?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님이라고 들었어요.
젊은 사장 : 아, 예.
그레텔 : 되게 젊은 사장님이네요.
젊은 사장 : 네? 아, 네…….
그레텔 : 동안이신가?
젊은 사장 : 동안……은 아닌데요. (그레텔을 보고는) 어려 보이시는데요.
그레텔 : 하하, 고마워요. 실제로 제가 여기서 제일 어릴 걸요.
젊은 사장 : 이전 세입자시죠?
그레텔 : 네. 저번에 한 번 뵀죠, 우리?
젊은 사장 : 아, 네.
잠시 어색한 침묵. 그레텔은 그런 침묵을 견딜 수가 없는지 이전보다 과장된 태도로 말한다.
그레텔 : 저흰 여기서 카페를 했어요. 오빠가 사장님이고 전 매니저였죠. 원래 둘이서 인형 만드는 공방으로 썼는데, 카페를 겸하면 좋을 것 같아서 시작했어요.
젊은 사장 : 생각났어요. 과자의 집. 미스 그레텔……. 명찰 달았었죠?
그레텔 : 와아, 기억하시네요? 헨젤과 그레텔이 카페 컨셉이었거든요! 오빠는 미스터 헨젤이었어요. 처음에는 명찰 다는 걸 싫어했는데 동네 아이들이 헨젤 사장님, 헨젤 사장님, 하고 말거는 게 좋았나 봐요. 나중에는 제가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명찰을 달고 출근하더라고요.
젊은 사장 :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겠네요. 동화에 나오는 집처럼 꾸며 놓아서.
그레텔 : 여대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어요.
젊은 사장 : 저 한쪽 벽면에는 인형들이 가득했잖아요.
그레텔 : 네! (실내를 걸으면서 설명한다) 바로 여기요. 식탁과 의자는 원목으로 된 것들이었고요. 저 구석에 길게 벤치처럼 만든 의자에는 크래커 모양의 쿠션들을 두었어요.
젊은 사장 : 수제 쨈도 만들어 팔았던 걸로 기억해요. 부엌 쪽에.
그레텔 : (부엌 쪽으로 가서 선다. 쨈 뚜껑을 여는 마임.) 맞아요! 언제나 제철 과일로만 만들었어요. 과일을 조리고 설탕을 넣은 게 전부였어요. 다른 향이나 첨가제는 조금도 넣지 않았어요. 그 옆에수제 쿠키도 진열해놓았어요. 국내산 유기농 밀가루로 만들었고 버터와 설탕 양을 최소화했죠. 주부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테이블마다 있는 유리그릇에 사탕을 한 가득 넣어 두는 건 오픈할 때 해야 할 일중 하나였어요.
젊은 사장 : 사탕도 오래된 브랜드로만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레텔 : 뜯어서 까먹는 사탕보다는 돌려서 까먹는 사탕이 클래식해보이잖아요. 그렇죠?
젊은 사장 : 동화책에 나오는 사탕이 모두 그렇게 생겼죠.
그레텔 : 맞아요, 동화책 느낌을 내려고 노력했어요. 마시멜로처럼 생긴 스툴도 사두었어요. 하얗고 푹신푹신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금방 더러워져서 다음엔 초코 색으로 샀어요. 때가 타도 눈에 안 띄는데다가 아이들은 마시멜로보다는 초콜릿을 좋아하잖아요.
헨젤이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문으로 나간다.
젊은 사장 : 어? 안녕히…….
그레텔 : 아니에요. 오빠는 잠깐 화장실에 간 거예요. 부엌 쪽에 뒷문을 통해 나가면 골목이 나와요. 그곳에 공용화장실이 있어요.
젊은 사장 : 아. 네…….
그레텔 : 공용이긴 하지만 관리를 잘해서 많이 더럽진 않아요. 오래된 건물이라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젊은 사장 : 공용은 어쩔 수 없죠……. 저, 혹시.
그레텔 : 그래도 이 건물 1층 사람들만 쓰는 곳이에요. 이 가게랑, 바로 옆의 샌드위치집 사람들이요. 샌드위치 가게도 최근에 생긴 거예요. 원래는 노부부가 하는 분식집이었어요.
젊은 사장 :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 말씀을 못하세요?
그레텔 : 네?
젊은 사장 : 전혀 못하시는 건가요?
그레텔 : 뭐를요?
젊은 사장 : 저 그러니까 말을…….
그레텔 : 벙어리냐구요?
젊은 사장 : 아니 사장님이,
그레텔 : 제 오빠가요?
젊은 사장 : 그러니까 실어증이라든지…….
그레텔 : (소리 내어 웃는다) 아니에요. 오빠가 낯을 많이 가리긴 하지만. 그래도 벙어리라니!
젊은 사장 : (당황) 벙어리라고는 안 했어요. 한 번도 말씀하시는 걸 못 봐서 혹시나 했죠.
그레텔 : 수줍음이 많아서 그래요. 이런 질문이 처음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오빠를 무뚝뚝하다고만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보기보다 수다스러운 사람이에요. 다정하고, 여리고. 오빠는 매일 가방에 사탕을 넣고 다녀요.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려구요. 주변 길고양이들을 위해서 사료를 사기도 해요.
젊은 사장 : 좋으신 분이네요. 전혀 상상이 안 되지만…….
그레텔 : 우리는 고아에요. 오빠는 저에게 부모님이나 다름없어요. 저 때문에 오빠가 포기한 삶도 많죠.
젊은 사장 : 소년 가장…….
그레텔 : 너무 일찍 가장이 된 거죠. 해야 할 것도 많고, 참아야 할 것도 많은. 참는 게 버릇이 되어서 표현하는데 서툰 것뿐이에요.
젊은 사장 : 한 번도 목소리를 못 들었어요.
그레텔 : 눈도 잘 안 마주치죠?
젊은 사장 : 한 번도.
그레텔 : 요즘에 특히 오빠가 지쳐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젊은 사장 : 최근에 일이 많았나요?
그레텔 : 카페도 정리해야 했고. 그냥…….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게 오빠를 지치게 하는 것 같아요.
젊은 사장 : 모든 것이요?
그레텔 : 모든 것들이. 건물의 모든 벽면들, 내벽과 외벽 모두가 오빠를 몰아세우는 것처럼 보여요.
헨젤 들어온다. 그때 잠시 대화가 끊긴다. 고양이 울음소리.
그레텔 : 이 동네에는 고양이가 많아요.
젊은 사장 : 저번에 왔을 때부터 느꼈어요. 방금 오면서는 고양이 가족도 봤어요. 어미 고양이를 쫓아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담을 넘어갔어요.
그레텔 :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 자주 물어봤어요. (아이를 흉내 내며) 그레텔 누나, 검은 고양이는 어디 있어요? 고양이도 내쫓았어요?
젊은 사장 : 내쫓다니요?
그레텔 : (웃으며) 그러니까 아이들은 마녀 할머니가 고양이를 키웠을 거라는 거예요.
젊은 사장 : 길에 많더군요. 검은 고양이가.
그레텔 : 검은 고양이 뿐일까요.
젊은 사장 : 전 길고양이가 쓰레기봉투나 뜯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습관은 고양이들에게도 해롭잖아요. 모두 유기동물 보호센터에 데려다줘야 해요.
그레텔 : (젊은 사장이 가져온 봉투를 내려다보며) 뜯을 봉투가 없는 곳으로 말이죠?
젊은 사장 : 아, 맞다. 잊고 있었어요. 이거 아이스크림이에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신제품으로 골라 담았어요.
그레텔 : 아이스크림이에요? 와, 지금 먹어도 되나요?
젊은 사장 : 그럼요. 녹기 전에 빨리 먹어야죠. 자, 숟가락도 여유 있게 챙겨왔어요.
그레텔 : 오빠도 빨리 와서 먹어.
젊은 사장은 스티로폼 박스에서 아이스크림 통을 꺼낸다. 잠시 멈칫하는 젊은 사장.
젊은 사장 : (당황) 아. 아이스크림이…….
그레텔 : (웃는다) 더 이상 아이스도 아니고 크림도 아닌데요.
젊은 사장 : 하아, 또 드라이아이스를 깜빡했어요.
그레텔 : (걸쭉해진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직원 분들이 많이 바쁘셨나 봐요.
젊은 사장 : 아니 제가 포장했는데……. 정신이 없어서요. 아 정말 죄송해요.
그레텔 :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젊은 사장 : 결국 쓰레기봉투를 가져온 셈이네요.
헨젤이 녹은 아이스크림을 통째 들어 마신다. 그 모습에 당황하는 젊은 사장.
그레텔 : 그걸 왜 먹고 있어?
헨젤은 대답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통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마신다.
그레텔 : 맛있어?
헨젤 : 달아.
젊은 사장 : 죄송해요.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돼요.
헨젤 : (차분하게) 아이스크림은 어차피 입안에서 녹아요.
젊은 사장 : 그렇긴 하지만…….
그레텔 :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면 내가 나가서 사올게.
헨젤 : 아니야. 그냥 맛이 궁금해서 먹어봤어.
젊은 사장 : (당황) 엉뚱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그레텔 : 그렇죠? 가끔은 오히려 동생 같다니까요. 그만 마셔. 그건 내가 치울게.
헨젤 : 됐어.
젊은 사장 : 아니 제가 치울게요.
헨젤 : 내가 먹었으니 내가 치워.
그레텔 : 오빠는 제발 고집 좀 부리지 마. 제가 버리고 올게요. 두 분이서 말씀 나눠요.
젊은 사장 : 아니에요. 제가 드라이아이스를 깜빡해서,
그레텔 : 별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제가 나가서 버릴게요.
세 사람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식탁과 바닥에 아이스크림을 쏟는다. 그때 건물주가 들어온다. 건물주는 한 손에 무알콜 샴페인을 들고 있다.
건물주 : 다들 빨리 왔군.
젊은 사장 : 아.
그레텔 : 안녕하세요!
건물주 : 무슨 일 있나?
젊은 사장 : 저, 그게 제가 드라이아이스를 안 가져와서요.
건물주 : 드라이아이스?
그레텔 : 별 일 아니에요.
젊은 사장 :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건물주 : 아이스크림?
그레텔 : 금방 치울 수 있어요!
헨젤 말없이 걸레를 가지러 부엌 쪽으로 간다.
그레텔 : 오빠, 올 때 화장실에서 휴지도 좀 가져와 줘. 식탁을 닦아야 하는데 행주가 없어.
젊은 사장 : 맞다, 차 안에 물티슈가 있어요.
그레텔 : 괜찮아요. 그냥 앉아계세요. 저희가 다 알아서 치울게요.
건물주 : 어수선하구만.
젊은 사장 : 자주 듣는 말이에요. 지금껏 아르바이트도 한 적 없고, 가게 일 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요.
그레텔 : 일을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죠.
젊은 사장 : (높은 목소리로)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이 말은 엄마한테만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헨젤이 걸레를 가져오자 젊은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그레텔이 그를 다시 자리에 앉힌다.
그레텔 : 저희가 금방 정리할 수 있어요. 아이들이 많이 와서 이런 일이 많았거든요.
건물주 : (젊은 사장에게) 시내에서도 가게를 하고 있다지 않았소?
젊은 사장 : 그저 제 명의로 된 가게일 뿐이에요. 부모님이 제가 노는 꼴을 못 봐서요.
건물주 : 일을 안 했나?
젊은 사장 : 작곡가가 되겠다고 매일 집에만 처박혀 있었거든요.
건물주 : 예술은 취미로만 하는 게 좋지. 아, 이제야 조금 정돈이 되었네. (헨젤에게) 이제 걸레를 내려놓아요. 그래, 그냥 그렇게 구석에 두고.
헨젤과 그레텔 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만족했다는 듯 웃는 건물주.
건물주 :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갑자기 우리 그레텔 매니저님이 술을 못 마신다는 게 생각나서. 무알콜 칵테일을 사 왔지.
그레텔 : 와, 고맙습니다.
건물주 : (헛기침 후) 자 일단 모두 자기 앞의 빈 잔을 채웁시다. 먹을 게 부족하면 주문해서 먹으면 돼요. 와인도 넉넉하게 있고요. 자, 우리 모두 건배할까요.
젊은 사장 : 무엇을 위해서요?
건물주 : 여러분을 위해서요. 이 자리는 송별회면서 동시에 환영회에요. 그럼 먼저 과자의 집 남매를 위해 건배할까요. 위하여!
그들은 잔을 부딪친다. 헨젤은 와인을 한 잔을 한 번에 들이킨다.
그레텔 : 오빠, 천천히 마셔.
건물주 : 몰랐는데 잘 드시나 봐요.
그레텔 : 잘 마시는 건 아니고 좋아해요.
건물주 : 미리 알았다면 자주 만나서 마셨을 텐데요. (헨젤에게 술을 따라준다.)
젊은 사장 : 과실주는 숙취가 심하던데…….
건물주 : 내일 주말이니까 상관없지 않나.
헨젤 : 이제 우리는 평일이어도 상관없어요.
건물주 : 아, 그렇겠군.
그레텔 : 그래도 적당히 마셔, 오빠.
건물주 : 그렇다면 더 부담 없겠어. 나도 출근하지 않는다네. 5년 전부터 그랬어. 이전엔 출근이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은 그립네. 새벽의 찬 공기, 버스정류장에서 같은 시간 대 만나는 직장인들, 내리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은 1호선 지하철…….
건물주는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건물주가 앉자마자 의자가 한쪽 다리가 부러진다. 그러자 남매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젊은 사장 : 아저씨!
그레텔 : 괜찮으세요?
건물주 : 아, 괜찮아요, 괜찮아.
그레텔 : 일어나보세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건물주 : 아냐. (껄껄 웃는다.) 놀란 것뿐이지. 난 정말 괜찮아요.
그레텔 : 제 자리에 앉으세요.
그레텔은 건물주의 옷에 묻은 와인을 닦아준다. 건물주 그레텔의 자리에 앉는다. 헨젤은 의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살펴본다.
그레텔 : 정말 괜찮으신 거죠?
건물주 : 그렇다니까.
그레텔 : 다행이다. 오빠도 자리에 앉아.
헨젤 :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레텔 : 고집부리지 마. 나는 서서 먹는 게 편해.
헨젤 : 나도야.
건물주 : 다들 놀랐겠네. 미안해요. 의자가 낡긴 했는데 이럴 줄은 몰랐어.
그레텔 : 저희는 괜찮아요. 그보다 오빠가 앉으라니까.
헨젤 : 난 앉지 않아도 돼.
그레텔 : 오빠, 좀! 그래. 됐어. 앉고 싶을 때 앉아.
남매는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서 있게 된다.
건물주 : 아, 음악을 했다고 했죠?
젊은 사장 : 네?
건물주 : 작곡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젊은 사장 : 아. 맞아요.작곡을 전공했어요.
그레텔 : 그럼 악기들도 잘 다루시겠네요! 작곡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악기를 할 줄 안다고 들었어요.
젊은 사장 : 모든 악기는 아니고요……. 기본적인 건 조금씩 할 수 있어요.
그레텔 : 멋지다. 전 작사가가 꿈이었어요. 그러고 보면 오빠도 시를 참 잘 쓰는데.
헨젤은 대꾸도 하지 않고 와인을 마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대화할 때에 혼자 따라서 홀짝홀짝 마신다.
젊은 사장 : 사람들이 원하면 만든 곡을 팔기도 했어요. 헐값으로. 헐값이 아니면 아무도 사주지 않았거든요. 제 재능을 의심하게 되고, 그만두어야 하나 싶었는데 음악 말고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건물주 : 그래도 부모님이 지원해주셨으니 다행이군. 부모님은 뭘 하시나?
젊은 사장 : 아버지는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변리사예요. 못 사는 건 아닌데 딱히 잘산다고도 말하기 힘들죠.
그레텔 : 시내에서도 그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신 거예요?
젊은 사장 : 네. 이제 그쪽은 슬슬 정리해야죠.
건물주 : 아니 어째서?
젊은 사장 : 장사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닌데,임대료가 비싸서요.
그레텔 : 아…….
잠시 어색한 침묵. 그때 또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건물주 : 그럼 우리 또 건배나 할까. 이 젊은 사장님의 사업을 위하여!
그레텔 : 그리고 사장님의 꿈을 위하여!
젊은 사장 : 고맙습니다.
그들은 건배한다.
건물주 : 모두들 와줘서 고마워요. 이 모임의 주인공은 여러분이에요. 이것은 일종의 전통입니다. 이전 세입자와 다음 세입자가 만나는 모임. 두 가지 시간이 모이는 거라고나 할까요.
젊은 사장 : 시간이요?
건물주 : 저는 철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요. 여러 학문에 의하면, 공간은 시간과 분리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레텔 : 와. 정말. 신기해요. 그러고 보니까 전 지금껏 공간과 시간을 분리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시간 없는 공간은 상상이 안 돼요.
젊은 사장 :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헨젤, 조용히 웃는다. 건물주가 헨젤을 흘깃 쳐다보다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건물주 : 시간과 분리된 공간은 없어요. 공간이 배제된 시간이 없듯이 말이죠. 그러니까 둘은 언제나 한 묶음이고, 시간이 지나면 공간 또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젊은 사장 : 철학을 전공하셨나요?
건물주 : 방송통신대학교로 강의를 듣고 있어요. 물리학은 따로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있고요.
그레텔 : 대단해요. 공부는 정말 평생 해야 하는 거라잖아요. 하지만 모두 그러진 못하잖아요. 그치, 오빠?
헨젤 : 그래. 좋은 취미지, 철학은.
건물주 : 이전에 이곳은 순댓국밥집이었고, 갈빗집이었어요. 과일 가게였던 적도 있고 작은 선술집이었을 때도 있었어요. 같은 공간인데도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이 되었어요.
그레텔 : 지금도 그래요. 씁쓸할 정도로 낯설어요.
건물주 : 꾸준히 낯설게 변화하는 것, 그게 제 공간철학이에요. 시간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공간은 계속 변하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적응해야 해요.
그때 헨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너무 큰 소리로 웃어서 건물주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한다. 이후로 헨젤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들뜬 태도로 대화한다. 목소리가 커지고, 사소한 말에도 웃음을 터뜨린다.
그레텔 : 왜 그래, 오빠. (헨젤이 너무 오랫동안 웃자) 아무래도 오빠가 많이 마셨나 봐요.
헨젤 : 아니야, 난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어. 그냥 (웃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웃기잖아. 당연한 이야기를 철학이니 물리학이니 들먹이는 게…….
건물주 : 허허, 재밌는 친구구만.
젊은 사장 : 벌써 취한 모양이에요.
그레텔 : 오빠는 원래 이 정도로는 안 취하는데……. 요즘 많이 지쳐서 그런가 봐요. 많이 지쳐서…….
헨젤 : 아니, 제가 무식해서 그래요. 사람들은 모두 철학을 갖고 살라고 하는데, 그 철학이 뭔지 알아야지 말이죠.
그레텔 : 오빠, 빨리 자리에 앉아. 물 가져올까?
건물주 : 나는 결국 인생의 흐름에 큰 법칙이 있다고 보네. 그것을 인정하면서 자기 나름의 원칙을 지키는 게 철학인 것이지. 그래. 일종의 원칙이라는 거야.
헨젤 : 그러니까 그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와인을 마신다.) 왜냐면 저는 원칙 이전에 현실이 먼저 오거든요.
그레텔 : 그만 마셔, 오빠.
헨젤 : 아냐. 술이 있으면 마셔야지. 그건 내 원칙이고 철학이야.
젊은 사장 : 원래 말씀을 이렇게 잘 하세요?
건물주 : 재밌네, 이 친구. 이런 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웃는다.)
헨젤 : 모든 게 다 재밌고 웃긴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눈앞의 현실 자체가 철학이 되잖아요. 사실 그것은 철학이 될 수 없죠. 원칙을 갖는 건 좋은 취미인 것 같네요.
젊은 사장 : 그래요. 돈이 되지 않으면 취미로만 즐겨야죠.
헨젤 : 돈이 없으면 취미도 즐길 수 없어요. 그리고 원칙 없이 그저 떠돌아야 하죠. 동생아, 우리 집은 과자의 집이 맞지?
그레텔 : 그래…….
헨젤 : 과자의 집이에요. 과자의 집. 아무도 먹을 수 없는 과자의 집. 환상은 짧게만 지속되죠. 금방 눅눅해지고 벌레가 꼬이고. 우리는 집이 무너지기 전에 또 떠나야 하죠. (웃는다.)
밖에서 크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비명에 가깝다. 헨젤이 웃음을 멈춘다.
그레텔 : 오빠. 처음부터 과자의 집은 우리 집이 아니었어.
헨젤 : 그래. 마녀의 집이었지.
젊은 사장 : 마녀는 어디에 있죠?
건물주 : (자신의 농담에 자신이 웃는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네.
그레텔 : 처음부터 마녀는 없었어요.
헨젤 : 역시 내 여동생이야. 똑똑하고 야무져.
그레텔 : 과자의 집도 처음부터 없었구요.
헨젤 : 맞아. 빵 부스러기만이 전부였지. (사이) 그러고 보면 우리가 들어올 때에는 환영회가 없었네요. 아니 송별회가 없었던 건가요?
건물주 : 그건 너무 오래 전에 세입자가 나가서…….
헨젤 : 그때도 이곳은 텅 비어있었어요. 지금처럼. 그치?
그레텔 : 그래……. 아무도 없었어.
헨젤 : 아무것도 없었지. (사이) 잠깐 담배피고 올게. (나가려다 말고) 화장실도 갈 거야. 아까도 담배 피러 나갔는데 너 내가 화장실 갔다고 하더라?
그레텔 : 말을 안 하고 가는데 어떻게 알아.
헨젤 : 그러게. 그래서 그 말 듣고 화장실 갔다 왔어. (실없이 웃는다.) 사장님, 저 화장실 가니까 인사하지 마요. 말을 못 해서 안 한 건 아닌데. 아무튼.
헨젤이 자리를 비운다.
그레텔 : 죄송해요. 오빠가 원래는 저렇지 않은데…….
건물주 : 알고 있어요. 지금도 취한 사람치고는 양반이야.
젊은 사장 : 그렇지만 정말 다른 사람 같군요.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어요.
그레텔 : 오빠가 술 마실 때마다 저러는 건 아니에요.
건물주 : 알고 있어요.
헨젤이 심각한 얼굴로 돌아온다. 처음 보는 외투로 무언가를 감싸 안고 있다. 피로 범벅이 된 외투 아래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레텔 : 그게 뭐야, 오빠.
젊은 사장 : 피!
건물주 : 무슨 일인가, 대체!
헨젤 : 쪽지가 있었어. (피 묻은 손으로 그레텔에게 쪽지를 건넨다.)
그레텔 : (쪽지를 읽는다.) 길을 지나다 고양이가 차에 치이는 걸 보았어요. 처음이었어요. 몸을 그대로 밟고 지나가더군요. 앞바퀴에 튀어나온 내장이 뒷바퀴에 짓이겨져 있었어요. 보기가 흉해서 제 외투를 덮어 놓았습니다…….
젊은 사장 : 역겹군요.
건물주 : 끔찍해.
그레텔 : 도무지 동물들 사체를 처리하는 법을 알 수가 없어서요.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렇게 급하게 처치하고 떠납니다.누구든 이 고양이 사체를 잘 부탁드립니다.
젊은 사장 ; 이해 돼요. 저도 지금껏 동물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했거든요. 고속도로에서 로드 킬 당한 고라니나 사슴을 보았을 때에도 계속 달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건물주 : (그레텔에게서 쪽지를 받으며) 어쨌거나 결국은 변명이잖나.
젊은 사장 : 이런 쪽지를 남기는 것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레텔 : 하지만 행인이 고양이의 죽음을 책임 질 이유는 없죠.
헨젤 : 아니, 이렇게 둘 수는 없어.
그레텔 : 그러면?
헨젤 : 사람들은 살아있는 길고양이들에게도 거부감을 가졌어.
젊은 사장 : 쓰레기를 뒤적거리는 건 고양이에게도 좋지 않아요.
헨젤 : 어차피 고양이에겐 철학이 없어요.
그레텔 : 그만해, 오빠.
헨젤 : 고양이는 원칙 없이 거리를 헤매고 원칙 없이 절망하다가 죽어. 이렇게 뜬금없이.
그레텔 : 오빠!
헨젤 : 너무하잖아. 살 곳도 없는 고양이가, 죽을 곳도 없다는 건.
건물주 : 누구도 그렇게 죽는 걸 바라지 않았어요.
헨젤 : (가볍게) 누구도 그렇게 사는 걸 바라지도 않았죠.
그레텔 : 그만해.
헨젤 : 뭘?
건물주 : 괜찮아요. 맞는 말이니까.
헨젤 : 안녕히 계세요.
그레텔 : 이 밤에 갑자기 어디를 간다는 거야, 오빠.
헨젤 : 너무 하잖아. 고양이에게.
그레텔 ; 뭐가?
헨젤 : 살 장소도 없애더니.
그레텔 : 오빠. 제발 자리에 앉아.
헨젤 : 적어도 죽을 장소는 줘야 할 거 아니야. 이전부터 궁금했어. 그 많은 비둘기, 고양이, 강아지들이 어디서 죽는 것인지. 죽을 때에는 쓰레기 더미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누이는 걸까?
그레텔 : 그럴 리가 없지.
헨젤 : 그럴 리가 없어. 그러니까 난 나가야 해.
헨젤은 고양이 사체를 안고 밖으로 나간다.
그레텔 : 어디 가는 거야, 오빠.
헨젤 : 무덤을 만들어 줘야 해.
젊은 사장 : 제가 알기로는, 일반쓰레기봉투에 버려야 해요.
그레텔 : 그만해요!
건물주 : 하지만 그게 법이라고 알고 있네.
헨젤 : 무덤을 만들어 줘야 해요.
젊은 사장 : 하지만,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한다. 헨젤은 고양이 사체를 안고 밖으로 나간다.
그레텔 : 죄송해요. 나가서 오빠를 도와줘야 해요. 왜냐면 오빠는, 많이 취했으니까요. 너무 많이 마셨어요.
젊은 사장 : 같이 가요.
그레텔 : 아니에요. 두 분은 여기 계세요.
젊은 사장 :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도 가겠어요.
그레텔 : 고양이가 죽은 게 내 탓은 아니에요. 책임감 가질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변명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젊은 사장 : 그래요. 작은 쪽지에 구구절절 적어놓아서 저희는 쓸 공간도 없어요.
건물주 : 나도 같이 가지.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 그는 어느 쪽으로 갔지?
그레텔을 선두로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간다. 조명이 점점 어두워진다. 퇴장한 후 그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레텔 : 핏자국을 따라가면 될 거예요.
젊은 사장 : 과자부스러기보다는 확실한 징표네요.
건물주 : 그래. 갑시다. 가요.
그레텔 : 저기에요. 오빠는 저쪽으로 갔어요.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암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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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시민문예대전 수필 부문 대상 수상작]
총 25명 응모
대상 수상자 : 조현숙
(인천시 계양구 계산로 )
수필 「기다리는 나무」외 2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2월 9일 송년회에서 시상을 하고, 상패와 상금 50만원이 수여되며, 아울러 인천문인협회 정회원 입회 자격이 주어집니다.
앞으로 훌륭한 수필가로 성장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인천문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민문예대전 수필 부문 심사평>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객관성의 확보
‘수필’ 부문의 응모작 75편 중에는 개인적 정서와 감정에 의존한 작품이 많았다. 서술자가 직접 드러나기 마련인 수필에서는 일상에서 건져낸 화소일지라도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객관성의 확보가 필요하다. 넋두리에 가까운 독백과 가족사 나열, 안온한 일상의 기록이나 단순한 추억담, 여행기, 작위적인 느낌의 미담이 좋은 수필이 될 수는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글쓰기의 기본인 문단 구성과 맞춤법의 오류, 비문(非文)에 무신경하거나 불필요한 대화체 남발 등도 간과할 수 없었다. 더불어 추운 계절을 묘사하며 봄이 개화기인 꽃과 푸른 잎을 현재의 배경으로 서술하여 논리성이 결여된 경우도 있었다.
조현숙의 「기다리는 나무」는 우울증과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은 숲에서 만난 요양원 할머니와의 인간적 교감에 머무르지 않고 할머니 모녀의 화해에 이르기까지 무난한 서술로 주제 구현에 이르고 있다. 간신히 열매를 맺은 노목과 모성의 메타포, 단정한 문체를 바탕으로한 문학적 변용과 개인적인 경험의 구조화로 생활수필의 한계를 극복한 점이 돋보였다.
김용자의 「수레바퀴」는 이른 아침 손수레를 끄는 초로의 부부를 통해 현실을 이겨내려는 희망을 보고 부모님의 예화를 불러온다. 객관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예시와 일반화를 거쳐 ‘나’로 돌아오는 구성으로 각자 주어진 삶의 무게야말로 우리가 살아야할 이유임을 일깨워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지면 상 거론하지 못한 입상자와 응모자들이 삶을 통찰하는 부단한 습작으로 내년의 시민문예대전 공모에도 큰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문광영 (문학평론가)
엄현옥 (수필가)
<수상작>
기다리는 나무
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생(生의)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사한 벌이리라. 하긴, 산처럼 쌓인 배추를 하루에도 몇 백통씩 다듬고 묶고 진열하다보니 몸은 소금에 절인 배추가 되기 일쑤였다. 새벽별을 보고 일어나 미명에 잠드는 일상. 그렇게 열 번의 겨울을 났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내게 혀를 차던 의사는 척추의 상태가 예순 넘은 노인과 흡사하다며, 당분간 외출금지령을 처방했다. 뼈에 좋다는 온갖 약을 끼니처럼 챙기고 연체동물마냥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사후약방문일 뿐이었다. 몸의 중심이 여의치 않으니 외출은 물론 끼니를 챙기는 것도,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때맞춰 우울증이 찾아왔다.
한집에서 하나의 식탁을 두고 한 냄비의 찌개를 떠먹는 식구임에도 생각의 가지는 사방으로 뻗쳐 있다는 걸 그쯤에야 알았다. 채 누워보지도 못 한 채 생을 마감하는 강대나무처럼 서러웠고 볕이 사라진 집안은 응달처럼 어두웠다. 웃자란 아이들이 엄마의 빈자리를 찾아 밖으로, 밖으로 외돈다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한 끼니의 밥을 벌기 위해 하루의 반을 전장 같은 삶터에 저당 잡힌 남편과 엄마의 자리를 애써 붙잡고 있는 두 딸아이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따뜻한 밥과 국을 얹은 밥상 정도는 직접 들고 싶었다. 구차해 팽개쳤던 환자용 복대를 차고 조금씩 운신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수면에 십자수를 놓는 자벌레처럼 느리게, 꾸준히 걷기 운동을 하다 숲에 이르렀다.
너울 같은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 섬처럼 그 숲이 숨어 있었다. 산이라기엔 작고 언덕이라기엔 꽤 규모가 컸다. 야트막한 둔덕과 완만한 능선이 산책 겸 운동을 즐기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품이 늡늡한 팽나무와 낮볕에 불콰해진 당 단풍, 성장(盛裝)한 벚나무, 새치름한 배롱나무를 지나 숲의 가장 내밀한 곳에 밤나무가 숨어 있었다. 나무 아래 길게 누워 있는 의자를 본 순간 나는 단박 그곳이 좋아졌다. 푸르고 촘촘한 그늘 밑에서 마실 온 바람, 볕뉘의 수다를 엿들으며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곤 했다. 때론 벌렁 누워 나무가 차곡차곡 쌓아 둔 이력을 읽다 보면 마음에 푸른 물이 번졌다.
할머니를 만난 건 밤나무에 막 아람이 들 무렵이었다. 하늘을 콕콕 찔러대는 밤송이를 바람이 흔들면 비 듣듯 알밤이 쏟아졌다. 족히 두 아름은 됨직한 둥치와 검푸르며 두터운 이끼 옷, 쟁반만 한 옹이가 나무의 나이를 말해주었다. 눈물겨운 노산, 나무의 산고가 두 아이의 어미인 내게도 짠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이 나무도 이제 늙어서 기력이 딸리나 보이. 아람이 도토리만 한 걸 보니 늙어서 열매 맺느라 을매나 용을 썼을꼬.” 할머니가 슬며시 알밤 한 주먹을 건네셨다. 머리에 하얀 갈대꽃이 수북한, 체구가 작고 아담한 할머니였다. 비어있는 의자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더니 할머닌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는 수다 너머 할머니의 쓸쓸함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얼비쳤다. 짙푸른 그늘이 일순 환해지는 듯했다.
할머닌 숲 아래 요양원에 계셨다. 2층의 맨 왼쪽이 할머니의 방이라 했다. 내가 주로 한낮에 공원을 찾는 것과는 달리 할머닌 해거름 녘 산보를 나온다 하셨다. 모르는 사이 우린 나무의자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실루엣에서 내 할머니를 뵈었듯 할머니 또한 내 또래의 따님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허리가 부실한 것까지, 두루 공통점이 많은 우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할머니에게 하나뿐인 따님이 언제부턴가 뜨막해지더니 일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는 것을.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 전 나 또한 할머니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지 않았던가. 이유야 어찌됐든 일찌감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주신 할머니를 3년 남짓 찾아뵙기는커녕 연락 한 번 안했던 터다. 첫 월급으로 내 손에 쥐어진 금액은 5만 6천원, 봉제공장에서 12시간 일해 받은 한 달간의 대가는 고향집으로 보내졌고 할머니는 그 돈을 큰오빠에게 오롯이 쏟아부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지친 나는 고향으로 향하던 마음을 거두고 발길을 끊었다.
겨우내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영하의 날씨 탓이거니 했다. 밤나무 우듬지에 봄햇살이 내려앉아 해실거려도 할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찾아간 요양원의 침상에 할머니가 미라처럼 누워 계셨다. 겨울 한철을 꼬박 앓고도 봄 맞을 기력마저 잃은 할머니가 날 보더니 희미하게 웃으셨다. 통증이 표정마저 앗아갔는지, 주름 깊은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했다. 짧은 면회를 끝내고 병실을 나서려는 나를 할머니가 불렀다. 삐뚤삐뚤한 이름 석 자와 쭉정이 같은 숫자 몇 개, 오랜 기다림이 해진 쪽지 안에 빼곡했다. 묻지 않아도 따님의 연락처란 걸 알 수 있었다. 늙고 주름진 손가락이 수백 번은 맴돌았을 숫자를 또박또박 눌렀다. 혹시 없는 번호는 아닐까 쪼그라들 듯한 심장을 다독거리며…. 나목이 울듯 공허한 신호음 끝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아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어머니께서 몸이 많이 편찮으시니 메시지를 보는 대로 오시라는 메시지를 적어 띄운 후 봄과 여름이 저물었다.
오랜만에 가 본 숲엔 밤나무가 주렁주렁 영근 밤송이를 달고 있다. 해거리조차 없는 모성을 어쩌면 그녀도 읽은 걸까. 미확인에 머물던 메시지가 ‘수신 완료’란 푸른 등불을 켜더니 며칠 뒤 푸석푸석한 음성의 여자가 안부를 보내왔다. 어머니를 뵙고 가는 길이라 했다. 일순 눈앞에 환한 보름달이 뜬 듯하다. 계절이 바뀌도록 명치끝을 누르던 가벼운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삼십년 전 내 할머니도 그러하셨으리라. 장손에게로만 향하던 미욱한 손길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못미더워하면서도 한달음에 고향집으로 달려갔더랬다. 사립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할매~” 하고 부르는 손녀를 눈물바람으로 맞아주신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가시집을 열어 알밤을 바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알밤을 찌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홍시도 몇 개 넣고 고구마도 넣었다. 달포만의 문병에 들고 갈 것들이 많은데도 허리가 한결 가붓하다. 오늘 밤, 모녀는 풀벌레 울음을 나란히 베고 잠들 것이다. 오글오글한 볕뉘가 밤나무 젖은 몸을 연신 닦아주고 있었다. (끝)
[2016시민문예대전 동시,동화 부문 대상 수상작]
총 18명 응모
대상 수상자 : 최하나
(인천시 남동구 만수5동 )
동화 「내 안의 불꽃놀이」외 1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2월 9일 송년회에서 시상을 하고, 상패와 상금 50만원이 수여되며, 아울러 인천문인협회 정회원 입회 자격이 주어집니다.
앞으로 훌륭한 동화작가로 성장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인천문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시민문예대전 아동문학 부문 심사평>
진심 어린 시선을 바탕으로 어린이를 담아냈을까?
아동문학은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다. 주된 독자가 어린이이기에 어린이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어린이 독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인천시민 문예 대전 아동문학 부문에 응모한 동시 12편, 동화 7편에는 아동문학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아동의 현실, 아동의 정서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 많았다. 어른의 회고에 머물거나, 관념에 치우쳐 생동감을 잃기도 했다. 오랜 습작을 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도 많았지만 새로움이 약했다. 신선함이 떨어진다면 안정성을 확보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최하나 응모자의 동화 「내 안의 불꽃놀이」는 현실 속의 어린이를 설득력 있게 담아낸 점이 돋보였다. 「내 안의 불꽃놀이」는 엄마와 아빠의 싸움으로 인해 평화가 깨어진 가정 안에서 고통을 겪는 아이의 마음을 진심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이야기이다. 자학하는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화해하고 가족과 불꽃놀이를 보러 간 아이는 ‘내 몸속에서 불꽃놀이가 일어나지 않기’를 꿈꾼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분명하고, 전개는 일관되고, 편안한 문체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도 안정적이다. 결말로 가는 과정이 과장되거나 억지스럽지 않아 설득력이 있다. 작가의 마음에서 우러난 소리는 넓은 이해와 깊은 공감을 얻는다.
장은선 응모자의 동시는 동시의 특성을 노련하게 잘 살려냈다. 「달팽이」는 노숙자를 달팽이, 종이 상자를 알껍데기에 빗대었는데 신선한 발상에 안정된 표현이 좋았다. 「숙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춤하게 숙제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잘 담아내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시들은 화자 감정이 즐겁게 전해진다. 리듬을 살려 간결하고 함축성 있게 전개하는 구성력도 좋고, 표현력도 좋다.
두 심사위원 모두 최하나의 동화 「내 안의 불꽃놀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아이의 현실에 바투 다가가 호소력 있는 작품을 터뜨려 줄 것을 기대하는 까닭이다. 정진하여 한국 아동문학 문단에서 빛나는 별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류인채(시인)
김미혜(아동문학가)
<수상작>
내 안의 불꽃놀이
최하나
“선생님, 어떤 느낌이냐면. 음. 불꽃놀이 아시죠? 작년에 엄마랑 아빠랑 서울에 갔었어요. 차가 완전 꽉 차 있고요. 올 때는 두 시간이나 걸렸는데. 음, 제 몸 안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것 같아요. 속에서 자꾸만 뭔가가 펑펑 터져요.”
한 달 전쯤이었습니다. 속이 너무 답답했어요. 국어시간이었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담임선생님이 계셔서 화장실에 간다고 손들기도 좀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뭔가가 밑에서 올라왔어요. 급한 마음에 저는 손을 입안에 들이밀었습니다. 그걸 끄집어내고 싶어서요. 손을 깊숙이 밀어 넣어보았지만 안되더라고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어요. 가슴은 점점 답답해지고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으로 목구멍을 할퀴기를 반복하는데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야! 어떡해.”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선생님이 달려와 제 목에서 손을 잡아 뺐습니다.
“뭐 하는 거야. 연우야! 피나잖아. 민지야! 윤서야! 양호실로 빨리!”
민지와 윤서는 양쪽에서 내 팔을 잡고 교실 밖으로 데려갔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웠어요. 그냥 속이 답답해서 그런 건데.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화장실에 그냥 갈 걸 그랬어요. 손을 들면 친구들이 쳐다보는 게 싫었던 건데.
“나 괜찮아.”
손을 뿌리쳤지만 민지와 윤서를 끝까지 저를 놓지 않았어요. 1층 양호실에 도착해 문을 열자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선생님이 앉아계셨어요.
“어디 아파서 왔어?”
선생님이 두 번이나 더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못 했습니다.
“친구들? 왜 그래? 너네는 왜 같이 왔어?”
“저....... 그거요....... 선생님이 같이 가래요.”
“그래? 그럼 너네는 잠시 저기 앉아 있을래?”
선생님이 손끝이 가리키는 소파에 친구들은 앉고 저는 동그란 의자에 앉았습니다.
“손가락에 피가 묻어 있네? 어디 베었니?”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선생님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손가락 끝에 묻은 피를 거즈로 닦아냈어요. 그러자 상처 하나 없는 뽀얀 손이 드러났습니다.
“까진 게 아닌데 피는 어디서 묻은 거지?”
하지만 저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보고 있었거든요. 속이 답답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언제부터 그랬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고 그러면 우리 엄마 아빠 이야기도 해야 하고 그럼 제가 너무 창피해지거든요. 그 이야기는 친구들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너희는 가봐. 선생님, 저 좀 잠깐만 밖에서 보시죠.”
잠시 후 친구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저만 남아 동그란 의자에 앉아서 양호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은 안 아파? 따끔거리진 않니?”
“모르겠어요.”
“침 좀 삼켜볼래. 꿀꺽 이렇게.”
침을 삼켰지만 아프진 않았어요.
“괜찮아요.”
“다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
엄마가 늘 하셨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지키지 못 할 약속은 하지 않는 거야.’
“왜요?”
“왜긴. 지저분한 손에 세균이 잔뜩 달라붙어 있어. 목에 넣으면 몸속으로 들어가서 몸이 아파요. 알았지? 약속!”
“.......”
“연우야 그럼 손가락 넣고 아파가지고 병원에 실려 가고 몇 달씩 학교도 못 오고 못 놀고 그러면 좋겠어? 친구들은 연우랑 놀고 싶을 텐데. 우리 연우는 아닌가 보다. 그럼 뭐 계속 그렇게 하구.”
결국 저는 양호선생님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고 도장도 찍었습니다. 저도 병균이 몸에 들어가는 건 싫거든요. 그것보다는 친구들이랑 못 논다는 게 더 싫었어요. 그리고 교실로 돌아왔더니 이미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면 또 저한테 눈길이 쏠릴까 봐 그냥 그렇게 돌아 나와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집에 갈까?’
하지만 집에 가기는 정말 죽기보다 싫었어요. 왜냐면 엄마 아빠가 요즘 매일 싸우시거든요. 언젠가 부터였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서로를 ‘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이 심해지면 ‘야 이 새끼야’라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와요. 저는 그러면 이불 속에 들어가서 스마트폰을 켜고 노래를 들어요. 제일 크게 볼륨을 해놓고 누워있다 잠이 든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전 집에 가기 싫어요. 그냥 아파트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죠. 얼마 전에 친구가 다운로드를 받으면 하트를 받을 수 있다고 스마트폰 게임 초대장을 보내줬는데 그걸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오늘도 그렇게 시간을 때웠습니다.
“연우야, 너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엉?”
엄마는 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너 도대체 학교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등짝이 얼얼하니 정신이 퍼뜩 들었어요.
‘아, 담임선생님이 전화했구나.’
그리고 엄마는 저를 부둥켜 앉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어어엉. 아이고.”
그렇게 그 다음날부터 저는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아줌마. 그래도 우리 엄마보다는 젊어 보여서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 나는 그거 들어주려고 여기 있는 거니까.”
하지만 처음 본 아줌마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요.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손톱만 뜯고 있었죠.
“요즘 연우를 힘들게 하는 일 없어?”
저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할 순 없잖아요.
“친구들은 안 괴롭혀?”
나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았죠. 사실은 한 번 말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한 번은 텔레비전에서 홍수가 난 걸 본 적이 있는데 둑이 터지니까 분수처럼 물이 솟구쳐 오르더라고요. 제가 꼭 그럴 것만 같았죠.
“그래. 괜찮아. 그런데 있잖아. 우리는 계속 만날 거야.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지 않겠어? 다음번에는 사소한 이야기라고 해줘야 해. 알았지?”
끝까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에게 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어요.
‘이야기 할 걸 그랬나?’
그리고 그 다음 주 또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란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모습이 호랑나비처럼 보여서 좀 웃겼어요.
“안녕. 오늘은 기분이 좀 어때?”
“나쁘지 않아요.”
기분은 정말 별로였지만 좋지도 않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건데 지난번이랑 좀 다른 점이 있어? 내가?”
“지난번에는 연두색 옷을 입었는데 지금은 노란색이요.”
“우와. 기억하네? 관찰력이 좋구나? 우리 연우는.”
그리고 그때 선생님의 눈웃음에 제 마음이 툭하고 터져버렸어요.
“그래. 요즘 연우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고 들었어. 뭔지 이야기 안 해줄래?”
저는 그렇게 정말 부끄러워 꽁꽁 감춰놓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야’라고 부르는 엄마 아빠의 표정이 너무 무섭다는 것. 서로를 밀치고 물건을 집어던질 때면 손발이 바들바들 떨린다는 것. 저를 보고도 엄마 아빠가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게 가장 힘들다는 것을요.
“연우야, 엄마 아빠는 연우에게 화가 난 게 아니야. 서로 의견이 달라서 그래.”
“그건 알지만. 그 표정이 너무 싫어요.”
“지금 연우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이제 엄마 아빠도 아실거야. 우리 예쁜 연우가 힘들어하는 걸 엄마 아빠도 원치 않으실 거야. 대신에 주먹을 입에다 넣거나 스스로를 아프게 하면 안 된다. 알았지?”
그리고 그날 밤, 우리 집은 참 조용했습니다. 아홉시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본 하늘은 참 맑았어요.
“연우야, 아빠가 참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이튿날, 현관문 앞에서 아빠는 나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 냄새. 그리고 저는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는 약속을 지켰어요.
몇 달 후 우리 가족은 다시 한 번 불꽃놀이를 보러 갔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 잡기가 힘들었어요.
“연우야, 아 해봐.”
입안 가득 달콤함이 퍼지더니 꿀물 같은 게 흘러나왔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배였습니다. 엄마가 뽀얀 속살이 드러나게 깎아놓은 배요.
“ 엄마, 더 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어요. 하늘을 예쁘게 수놓는 불꽃놀이를 저는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다시는 내 몸속에서 불꽃놀이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