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사 주최 다문화가정 수기공모

장호씨 '첩첩산중을 넘어 얻은 행복'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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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사와 법무부가 주최한 '2008 전국 다문화가정 생활체험 수기 공모'에서 장호(중국·부산 해운대구 중2동)씨의 '첩첩산중을 넘어 얻은 행복'이 대상을 받았다. 장씨의 수기는 부산으로 유학와 10년 연상의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표현했고 문장의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수상에는 이나오까 아끼(일본·대구 북구 침산3동)씨의 '경상도 아주매 아끼', 짠티튀안(베트남·경기 포천시 영북면)씨의 '한국 생활과 한국어'가 각각 선정됐다. 가작에는 니킷첸코 율리아(러시아)씨의 '한국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들' 등 5편, 특선에는 강동주(중국)씨의 '파란 물고기' 등 8편, 입선에는 한이슬(몽골)씨의 '무제' 등 32편이 뽑혔다.

이번 공모전에는 전국에서 모두 425명이 응모했으며 김종욱(수필가) 강세영(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백두현(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성휴(법무부 사회통합팀 과장) 최옥자(대구시 여성청소년가족과 과장)씨가 심사를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문장을 다루는 솜씨보다 그 내용에 비중을 두었고 내용의 진실성,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 문장의 완성도를 참작해 심사했다"며 "낯선 이국땅에서 겪은 애환을 진솔하게 풀어낸 글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시상 일정은 개별 통보한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가작

▲장옥련(중국·경기 시흥시 신천동) '나의 한국' ▲탕추이홍(중국·대구 동구 신암동) '행복의 가족' ▲두티감(베트남·경북 의성군 봉양면) '무제' ▲이지성(일본인 엄마·전남 화순군 화순읍) '슈퍼 울트라 킹 울 엄마' ▲니킷첸코 율리아(러시아·전북 익산시 영등동) '한국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들'

◆특선

▲강동주(중국·경북 김천시 지좌동) '파란 물고기' ▲미야치 사끼꼬(일본·전남 화순군 화순읍) '무제' ▲팜티하(베트남·전북 임실군 신평면) '한국사계절과 함께 한 나의 결혼생활' ▲호리까와 마스미(일본·전남 화순군 화순읍) '나의 소원' ▲이청화(중국·제주시 외도동) '나의 한국살이' ▲이광희(필리핀 부인·대구 동구 검사동) '나의 새로운 삶' ▲소하이샤(중국·경남 창원시 대방동) '무지개(활기찬 한국 생활)' ▲강홍매(중국·경남 하동군 고전면) '나의 결혼 체험담'

◆입선

▲한이슬(몽골·경기 김포시 장기동) '무제' ▲이금순(중국·대구 동구 신서동) '굳세어라 금순아' ▲유용식(베트남 부인·경북 예천군 예천읍) '무제' ▲마리아 미아선션 에이차베즈(필리핀·경기 성남시 중원구) '마리아의 결혼과 사회생활 이야기' ▲윤송월(중국·경기 평택시 서종동) '하늘' ▲손운산(중국·경남 진주시 하대동) '한국에서의 결혼생활' ▲라이다 알바레즈(필리핀·전북 장수군 장수읍) '남편에게' ▲류지애(중국·경기 광명시 철산동) '한국와서 다시 태어나고 찾는 행복' ▲이다 카말틴(필리핀·강원 횡성군 횡성읍) '나를 찾아가는 여행' ▲윙테이 메옥(필리핀·경북 포항시 장기면) '여보 고마워요' ▲김유진(필리핀·전남 담양군 금성면) '행복찾아 나는 새' ▲김향화(중국·전남 보성군 겸백면) '나의 결혼 원정기' ▲산티아고 라켈(필리핀·경북 군위군 군위읍) 'Korea, 너는 내 운명이다' ▲기네다 아키코(일본·전남 강진군 강진읍) '우리 가정의 목표는 참사랑입니다' ▲김지윤(필리핀·전북 군산시 대야면) '삶의 꿈과 희망' ▲보티미린(필리핀·대구 수성구 고모동) '무제' ▲문경성(베트남 부인·전남 해남군 송지면) '땅끝에서 부는 바람' ▲네미아 마퀼레로 에스(필리핀·전북 장수군 계남면) '안녕하세요' ▲김은옥(중국·전남 함평군 함평읍) '잊을 수 없는 가을' ▲제니퍼 비 파구이오(필리핀·대구 달서구 이곡동) '3명의 아들들, 3배의 어려움, 3배의 행복' ▲현지영(중국 남편·제주시 외도동) '남편은 외국인 노동자' ▲왕경숙(중국·인천 남구 도화동) '한국 생활 적응 체험담' ▲동티홍(베트남·대구 북구 태전동) '무제' ▲진혜금(대만·경남 마산시 월영동) '무제' ▲와치 아끼나(일본·경기 고양시 행신동)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허은영(베트남·경기 안양시 관양동) '한국생활기' ▲태호영(필리핀·울산 울주군 언양읍) '희망을 보았다' ▲최신자(중국·경남 산청군) '이제는 행복합니다' ▲오가타 유키에(일본·경기 김포시 통진읍) '꿈은 상상밖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박은정(필리핀·경남 마산시 상남동) '따사로운 햇살을 기다리며' ▲이찌끼 미호(일본·경남 창원시 남양동) '사랑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우엔티 옥로이(베트남·서울 강북구 수유동)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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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수기] 대상-장호 '첩첩산중을 넘어 얻은 행복'
 
 
 
▲ 장호(오른쪽)씨가 아내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매일신문사와 법무부가 주최한 '2008 전국 다문화가정 생활체험 수기 공모' 수상작 4편을 9일과 16일 2주에 걸쳐 싣습니다. 글쓴이의 마음과 현재 생활을 진솔하게 전달하기 위해 맞춤법 외에는 글의 첨삭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의 진실성 외에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과 문장의 완성도 역시 심사의 주요 항목이었습니다.<편집자 주>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엄마는 틀림없이 비행기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공항에서 아빠 품에 안겨 외아들을 한국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며 펑펑 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국 내몽고에서 소황제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 없이,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해방이다. 나만의 선택으로 뻗어진 성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한국 부산 해양대로 유학 오던 2003년 첫 날, 내 생에 최초로 바다라는 것을 보았다. 사막보다 광대하고 짙푸른 심연은 고향을 떠나길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선진 한국과 수년 뒤면 동문으로서 드나들 한국해양국립대학에서의 모습을 그리자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김해공항 근처의 삭막함은 내몽고의 시골과 다를 바 없고, 며칠을 걸어서 구경해야 교정을 다 볼 수 있는 중국의 대학교에 비한다면 해양대학교도 아주 작은 섬에 불과했다. 첫 날부터 무너진 기대. 그것도 잠시, 가나다도 모른 채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이 나를 매섭게 내몰고 있었다.

중국재료들을 챙겨온 것이 있어서 기름과 우유만 있으면 대충 오늘의 끼니는 해결할 것 같았다. 마트에서 고민하며 사 온 기름은 뚜껑을 열자 식초였다. 논리적으로 점도가 높은 것으로 사 온 것이 물엿, 점원에게 오일(oil)을 수십 번 말하다 포기하고, 온 진열대를 다 훑고서야 겨우 기름을 샀다. 우유도 결국 카운터에서 가슴에서 우유를 짜는 젖소흉내를 내면서 수치스럽게 사와야만 했다. 마트에는 의외로 영어가 적혀있지 않거나, 영어를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해놓은 것들이 많아 아직도 외국인에겐 원하는 목록을 제대로 사오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어쨌든, 내몽고에서 하루 세 끼를 생고기를 먹다가, 기숙사 식판에 오른 서너 가지 반찬은 밥을 반만 먹어도 모자라기 일쑤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김치는 고약한 냄새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늘 배가 고팠다. 어떤 친구는 밥만 냄비에 퍼나가서 몰래 반찬을 만들어 먹다가 들켜 졸업할 때까지 ‘밥도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배에게 물어보고 외운 첫 번째 한국어 문장은 “배가 너무 고파요. 반찬 좀 많이 주세요.”였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위 공산당이다. 그래서 종교를 권유당한 적도, 믿으려고 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나도 종교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한국 온 둘째 날, 한국인 여대생이 한국어를 노래로 재미있게 가르쳐준다며 단체로 초청해서 간 곳이 바로 교회였다. 본능적으로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활한국어를 빨리 터득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그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매주 교회라는 곳을 다니면서 중국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관심과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사랑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선배들이 학기 초에 군기를 잡는다고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면서 후배들을 기선제압하고 있었다. 내몽고에서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라, 어릴 때부터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잠이 드는 문화여서 술이 센 편이었다. 한국의 대학은 술을 빼고는 어울릴 수 없는 듯 보였고, 술이 센 것이 은근히 자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술이 세다는 소문에 선배들은 자주 나를 불렀고, 이렇게 지난 1년 동안 배운 한국어는 교회의 종교언어와 술자리에서 배운 취중언어가 내 입에 배이게 되어버렸다.  

날씨가 풀리면 해양대 앞바다에서 습관처럼 다이빙을 했다. 고향에서는 소독 냄새가 물씬 나는 수영장에서 밖에 할 수 없던 수영을, 학교가 섬이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진짜 파도와 해초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내겐 큰 매력이자 혜택이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좋은 것만 부모님께 말하고 안 좋은 건 그냥 속으로 삼키면서 나도 모르는 새 철이 들고 있었다. 환율차가 컸기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 보다 젊은 내가 고생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고생스럽고 서럽더라도 참고 두 배로 성실하게 일했다. 매스컴을 통해 한국인들은 중국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의외로 중국인이라는 것 보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성실과 신의를 인정해주고 대우해주어 참 고마웠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돈을 번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학교 친구들이 존경하는 한국인이 있는데, 그 누나 집에 놀러가자고 했지만 왠지 쑥스러워 못 갔다. 그러다 드디어 2005년도 여름, 그 모임에서 MT가는데 슬쩍 따라나선 길이 운명의 길이 돼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친구들이 말했던 바로 ‘그 누나’는 친구들의 표현보다 훨씬 이상이었다. 인형 같은 외모, 일본어통역사로 잦은 해외출장과 경력을 갖고 있고, 요리도 잘하고, 착하고 친절하기가지 했다. 여동생과 함께 우리 사이에서 천사자매로 통했는데, 자주 우리를 불러 요리도 해주고, 함께 병원도 가주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해결해주고, 그리고 오랜 유학경험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유학생활을 적절한 위로와 격려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냥 중국인 친구들이 정이 간다고만 얘기했다. 그렇게 하는 누나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게는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절실히 필요한 사람으로 금세 자리 잡아 버렸다.

  누나의 관심을 사기 위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말로만 해왔기 때문에 글로 쓸 때 맞춤법이 다 틀린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잘 보이기 위해 몇 줄의 메일을 쓰려고 몇 시간을 사전을 찾아가면서 수십 번이나 순서를 앞뒤로 바꿔가며 작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장은 매번 빨간색으로 빽빽하게 수정된 원문과 함께여서 정말 부끄러웠다. 한국어 작문을 밤새서 했다. 좋은 문구도 찾아 읽기 시작했고, 맞춤법을 그때그때 고쳐서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주면서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만나면서,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교제신청을 했다. 그러나 누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유는 내가 크리스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결혼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교회를 다니고는 있었지만, 한국어를 배우러 다녔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그게 우리 교제가 불가능한 이유였다. 게다가 누나에게는 오래전 한국에 오자마자 교회에서 느꼈던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난 없었다. 그래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로 옮겨서 출석하기 시작했다. 영도 해양대에서 해운대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첫차를 타고 1시간 반이나 걸려 새벽기도부터 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로지 누나를 감동시켜서 교제를 하기 위한 꿍꿍이였다.

누나의 마음도 서서히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장인장모가 될 분들을 만났는데, 절망하고 말았다! 완전 깡시골 부산사투리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식사 전에 “인자 묵짜, 니도 마이 무라”라든가, 짐을 들어드리고 나서 내게 “욕봤다”고 하시면서 등을 두드리시거나,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로 “니을 오요? 머라카노, 안 듣끼여?”라고 말하실 땐, 새로운 외국어같이 느껴져 정말 답답했다. 부모님에게도 점수를 따고 싶은데, 역시 외국인이라 말이 안 통해 힘들다는 말을 들을까봐 얼마나 촉수를 세우고 한마디 한마디 들었는지 모른다. 영화 친구를 보면서 사투리도 연습했다. 하루는 추운 겨울 누나가 길을 걸으면서 말하기에, 바람이 많이 불어 감기 걸릴까봐 “누나, 입 닥쳐요”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실전의 사투리는 수업 중 교수님의 사투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누나의 동생과는 친구로 만나서 나보다 나이가 5살 많았지만 그냥 중국에서 하던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한국은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기에 누나의 누나에게는 ‘누나님’,‘형부님’이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당시에는 웃기만 할 뿐 고쳐주지 않아 습관이 되어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누나의 동생도 여전히 이름으로.

2년 전 세례를 받고, 온갖 해프닝 끝에 크리스천이 되면서 누나와 결혼승낙에까지 갔다. 알고 보니, 누나도 나처럼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결혼이 어디 있을까! 결혼승낙만 받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혼서류가 산 너머 산이었고 소원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친부모님을 초청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먼저 혼인신고를 해야 했는데, 누나의 가족은 결혼도 하기 전에 절대로 먼저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고 하셔서, 우리는 중국을 바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결혼식 날짜는 잡혀있고 중국 부모님 없이 식을 올려야 할 판이었다. 울고불고 얼마나 실랑이를 벌였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중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결혼예비학교’라는 것에 등록해서 남녀차를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들, 조화롭게 양가와 누리며 사는 방법들,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먼저 죽어야 된다”며 죽는 방법에 대해 함께 배우면서, 한국의 이런 좋은 세미나들을 중국에도 알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강사가 되고 싶을 만큼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최고의 혼수인 부부의 자질을 갖추어가면서 결혼준비를 했다. 한국은 제대로 갖추려고 하면 결혼식을 위한 절차도 너무 까다롭고 갖출 것도 많아서 누나와 고민 끝에 양가의 허락을 받아 생략하기로 했다. 모든 어려운 난관들을 누나와 같이 기도하면서 국제결혼이라는 첩첩산중을 넘어 결국엔 2007년 10월 6일 대학 3학년 때 결혼식을 올렸다. 중국과 한국의 국적을 넘어, 종교를 넘어, 직업을 넘어, 10살 연상의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그 때 결혼식에 온 수백 명이 넘는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이란!!!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이 상상 이상으로 행복하게 신혼을 보내고 있다. 물론 지금은 부모님의 사투리에 사투리로 대답하는 센스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서류작업은 한 번 까다롭지만, 결혼의 행복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국제결혼이 힘든 것은 국적이 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원래의 나는 이미 없다. 그래서 아내와 가족을 위해 맞추어가며 살 수 있는 것 같다.

한국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치아를 아래위로 다 의치로 하고 계신다. 요즘 잇몸이 약해져서 교환해야하는 시기인데, 한국의 치과는 너무나 비싸서 결국은 중국에 가서 하기로 결정했다. 병원비가 한국은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 내게는 큰 부담이다. 중국 가서 부모님이 의치를 교환하고 나면 아내와 함께 내 나라 중국을 소개시켜주면서 맛있는 것들을 많이 대접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나를, 단지 비전하나 보고 결혼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조금이나마 표현하고 싶다.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성공으로의 첫 번째 선택은 한국으로 유학 온 것이고, 두 번째는 누나와 결혼한 것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성공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을 기대하며, 계획했던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싶다.

장호 (ZHANG HAO)


[다문화 수기] 금상-짠티튀안 '한국 생활과 한국어'
 
 
 
▲ 짠티튀안(왼쪽)씨가 결혼식에서 남편과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와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나도 공장에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부모님과 오빠도 열심히 살았지만 항상 힘들고 가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 부자 나라, 어느 집이나 돈이 많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흥분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을 안고 2006년 11월 29일에 한국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말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어렵고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우선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된장국을 먹었는데 냄새가 너무 이상해서 토할 것만 같았다. 또 모든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너무 매웠다. 날씨는 겨울이었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그저 울고만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국의 겨울을 좋아한다. 내가 살았던 베트남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에 눈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한국에 와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랍고 눈이 꽃처럼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봄에는 꽃이 피고 단풍 든 나무들이 산을 감싸고 있는 가을 모습도 아름답지만 나는 눈이 오는 겨울이 더 좋다. 처음에 먹을 수 없었던 한국 음식도 이제는 너무 맛있게 잘 먹는다. 특히 김치를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먹는 것은 베트남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김치를 기름에 볶기도 하고, 찌개도 하고, 김칫국도 끓이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맛있지만 특히 삼겹살에 구워 먹으면 정말 맛있다. 그 덕분에 한국에 온 후 몸무게가 5㎏ 더 나간다. 너무 잘 먹어서 남편은 내가 이제 한국 사람이 다 되었다고 웃는다.

어느 날 하루는 찜질방이라는 곳에 갔는데 너무 더워서 숨이 차서 힘들어 죽겠는데 한국 아줌마들은 ‘아 시원해, 시원해’라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님이 땀을 빼면 시원해진다고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해서 눈을 딱 감고 헉헉거리며 있다가 나왔다. 나와서 조금 있으니까 정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시원해져서 정말 좋았다. 또 전화만 하면 모든 것을 집으로 배달해 주는 일, 부산에 갈 때 타봤던 KTX라는 고속열차는 비행기만큼이나 빠른 것 같아서 너무 놀랐다. 컴퓨터로 옷을 살 수 있는 것도 좋고, 컴퓨터에 글을 쓸 수 있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도 올릴 수 있는 일, 이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한국의 모습을 좋아하면서 한국 생활의 편리함을 느끼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잘 살고 있다.

지금 내가 가장 기쁜 것은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 한국말을 몰랐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사람만 만나면 무서웠다. 한국말을 몰라서 남편이 젓가락을 찾으면 국그릇 갖다 주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나에게 ‘밥 먹었어?’ 하면 ‘없어요’, ‘추워?’ 해도 ‘없어요’ 무조건 ‘없어요’, ‘몰라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또 형님한테 ‘밥 먹어’라고 해서 남편과 형님이 놀라면서 웃었던 날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국말을 몰라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포천시청에서 한국말을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하여 한국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운천에서 포천시청까지 버스로 30분이 걸린다. 남편은 길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포천시청에 데려다 주고 내가 공부하는 2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가 공부가 끝나면 다시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게 작년 8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올해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공부방에서 4월부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집에 오면 또 남편과 함께 한국어를 공부한다.

우리 한국어 선생님은 나와 같은 외국인 신부들은 시간이 없고 힘들더라도 제일 먼저 한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자주 얘기하신다.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 첫째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그 말을 나는 알 것 같다. 한국어를 아니까 한국 요리책을 읽을 수 있고 그래서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다. 남편과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면 더 다정한 마음이 든다. 한국말을 할 수 있으니까 집 밖에 나가도 무서운 마음이 조금 든다. 그리고 훗날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도 한국말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지금 한국어 공부를 하는 공부방에는 처음에는 많았던 학생이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서너 명 온다. 아기를 낳아서 오지 못하고, 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한국어 공부에 오지 않는다. 한국어를 먼저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그럴 수 없는 여자들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 한국 남편들이 먼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이 많이 든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나처럼 한국에 시집 온 외국 여성들을 위해서 포천시청에서 베풀어준 많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국 문화도 많이 배웠다. 한국 요리를 배우는 체험, 농사 체험, 한국 민속촌 관람, 사물놀이 공연 등 여러 가지 문화 행사에 참여해서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익숙해졌다.

성공한 나라, 부자 나라인 한국에 오면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한국이 모두가 잘사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남편과 조그마한 치킨가게를 운영하고 있지만 장사가 너무 안 돼서 남편과 나는 걱정이 많다. 내가 공장이라도 다녀서 돈을 벌고 싶지만 공장에 취직하기도 너무 어렵다. 어쩌다 한 번 취직하여 몇 달 일을 했는데 월급을 안 줘서 남편이 의정부에 가서 고소해서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의정부까지 가려면 하루에 겨우 몇 번 다니는 버스로 1시간 30분을 가야한다. 이렇게 어려운 형편이지만 남편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돈을 부쳐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 남편은 다른 남자들보다 그렇게 잘생기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최고인 남자다.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 음식도 할 줄 모르던 나를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써주고 많이 도와 준 남편이 정말 고맙다. 한국어를 가르쳐 준 선생님께도 고맙고, 한국 문화 등을 체험하게 해준 분들께도 정말 고맙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우리 남편, 사랑해요.”

한국에 온 지 이제 2년,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처음과는 정말 다르게 이제는 어엿한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그리고 가끔씩 사랑하는 남편과 참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 한국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것이다. 한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 부끄럽지 않은 한국인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짠티튀안

[다문화가정 체험수기] 우수상-경상도 아지매 아키
 
 
 
대학시절에 교환유학생으로 중국 상해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었던 나는 같은 반 학생이었던 남편이랑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순조롭게 결혼까지 갔는지 참 신기하다.

우리의 공통어는 중국어였지만 1년만 어학연수를 한 우리의 중국어 실력은 뻔했다. 다행히 양쪽 집안에서 반대 없이 일이 잘 진행이 되었는데 상견례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우리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가 중국어로 번역하면 남편이 그 중국어를 한국어로 고쳐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식으로 왠지 레크리에이션에서 흔히 본 '전달게임' 같았다. 아마 100% 아니 70%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양가 부모님의 직접적인 의논이 불가능했던 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세한 얘기도 없이 한국·일본의 복잡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아주 편한 결혼식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 시집온 나는 시할머님, 시부모님, 시동생과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 시집오기 전 몇 달은 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웠지만 나를 힘들게 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경상도 사투리였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무리 갖고 오라”고 하셨는데 무리가 뭔지 모르는 나는 부엌에서 헤매다가 물을 갖다 드렸다. 그런데 무리는 사투리로 오이였던 것이다.

간장은 '지룽' '소이장', 부엌은 '정지', '괴안타', '뭐라 카노?', '천지 삐까리' 등등 학원에서 배워보지 못한 말들을 많이 배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제사 때 큰어머님이랑 날씨 얘기를 하며 “어제는 엄전나게 더웠어요”라고 했더니 큰어머님께서 막 웃으셨다. 그래서 “왜 그렇게 웃으세요?”라고 물었더니 “네가 아까 ‘존나게 더웠다’고 해서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나 싶어 웃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ㅈ'과 'ㅊ' 'ㅉ' 발음을 잘 구별 못했다. 그리고 '존나게'라는 말 자체도 몰랐고 그것이 상스러운 말이라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그 이후 발음에 신경 써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도 없었던 나는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시어머님 가시는 곳을 따라다녔다. 서문시장에 가면 쭈그려 앉아 수제비를 먹고 칠성시장에 가면 보리밥, 대구시내 시장을 누벼 다니면서 떡볶이, 납작만두, 호떡 등의 길거리 음식 맛도 다 보았다.

심지어는 어머님 계모임에까지도 따라갔다. 늘 어머님이랑 다녀서 그런지 우리의 얼굴은 점점 닮아가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고부간이 아닌 모녀지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나의 사투리는 날마다 늘어가고 한국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 부부에겐 딸 아들이 생겼고, 한국에서 말하는 200점짜리 엄마로서 행복한 나날을 꿈꾸던 나에게 큰 시련이 내려졌다.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행복했던 생활이 아주 우울하게 느껴졌다. 산후우울증으로 시작된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은 한국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몸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향수병을 앓았던 것일까? 아니면 시댁식구들은 아주 잘 해주셨지만 늘 크고 작은 긴장 속에 살고 있다가 분가하면서 그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그리고 보수적인 대구에서는 아직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다행히 둘째는 아들을 낳아서 안심했던 것도 원인의 하나였던 것일까!?

하여튼 이 우울증 때문에 항상 나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죽음'뿐이었고 그런 생각뿐이었던 나는 가족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몇 달 지난 어느 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나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했다. 그제야 남편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남편은 말수가 적고 표현을 잘 안 하는 편이었다. 특별한 취미도 없었던 그는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면 바로 자기 방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루 중 우리 부부간의 대화시간은 10분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게 너무 섭섭했던 나는 남편에게 “제발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만 이라도 옆에 앉아서 얘기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고 남편은 밥을 먹고 나면 바로 자리를 떠났다.

남편이 내가 우울증에 걸린 것이 자기 탓도 있다고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인지 그때부터는 늘 내 곁을 지켜주며 끊임없이 격려해 주었다. 남편이 회사에 갈 때는 시어머님께서, 그리고 가끔 친정 부모님께서도 한국까지 오셔서 번갈아 가면서 나와 아이들을 돌봐 주셨다.

병이 완치되는 데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온 식구가 너무 힘들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내가 힘들 때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도와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시련을 겪었던 나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작년에 '대구·경북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실시되었는데 거기에 나가서 내가 해왔던 한국생활에 대해 스피치를 했더니 놀랍게도 우수상을 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어느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38년 전에 결혼하셨지만 그때는 힘들었던 시절이라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셨다. 그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었고, 내가 아팠을 때 친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나에게 잘 해주셨던 시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우리는 그 촬영 중에 웨딩사진을 찍는 일을 계획해서 올해 환갑을 맞이하시는 시부모님께 그것을 선물로 드렸다. 그리고 2년 전에 결혼 10주년을 맞이했던 우리도 꽃단장해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국제결혼…. 이주민 100만 명 시대가 된 대한민국에서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이제 어느 지방에 가도, TV를 봐도 흔히 외국사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외국사람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특히 한일 간의 안타까운 역사 때문에 반일 감정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큰아이가 고학년이 되어서 사회 시간에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그런 갈등이 종종 있었다. “일본 새끼야! 네 엄마는 일본 사람이니까 일본에 가라~”라는 말을 듣고 와서 우리 딸은 집에서 엉엉 울었다.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지만 독도문제 등 한일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아 그럴 때면 안 좋은 말들을 듣게 된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했던 일들은 용서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은 나쁘다!” 같은 교육은 앞으로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 일본 의사 봉사단이 방한해서 옛날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했던 사람과 그 2세들을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모두 알고 있는 입장으로서 일본에 가면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친구와 이웃들에게 한국을 바로 알리고,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본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면서 일본문화와 국민성에 대해 얘기해주고 한국 사람이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로 알리는, 양국 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나의 힘은 작지만 이런 작은 노력의 씨앗이 언젠가는 큰 꽃을 피우고 한국과 일본이 '가깝고 먼 나라'가 아닌 '가깝고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서로 이해하고 힘을 모아 앞으로 겪는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 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두 나라 간의 교류는 물론 미래를 짊어진 아이들이 손잡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바란다.

아이가 유치원,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동네 아이 엄마들에게 먼저 인사하면서 친해졌고, 요즘에는 동네 아줌마들과 오봉산에 올라 운동도 하면서 수다도 떨고 아직 몰랐던 한국 문화와 관습에 대해 배우고, 아이들 교육에 대한 정보도 얻고 있다.

울긋불긋한 단풍 길을 걸으며 문득 씩씩한 대한민국 경상도 아지매가 되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외쳐본다. 경상도 아지매 아키 파이팅!!

이나오카 아키(일본·대구시 북구 침산3동)

[다문화가정 체험수기] 가작-즐거운 한국 생활
 
 
 
즐거운 한국 생활

안녕하세요!

저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두티감입니다. 제 이름은 감이지만 모두들 저보고 ‘예쁜 새댁’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경북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라는 20여가구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시골의 농촌 마을입니다. 이 동네에는 모두 다 나이 드신 노인들이고 젊은 여자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제일 젊고 예쁩니다.

4년 5개월 전 저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 하나만 믿고 멀고 먼 한국 땅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다니고 있을 때 저희 집은 자꾸만 가난해져 갔습니다. 왜냐하면 농사를 조금 짓고 있는 우리 집은 식구는 많고 오빠들도 학교 졸업 후 직업을 구하지 못해 돈을 벌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병이 자꾸만 심해져 돈 들어갈 데는 늘어만 갔습니다.

저는 학교에 가서도 공부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지만 사춘기 소녀였던, 멋 부리기 좋아했던 저는 모든 게 짜증나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의 한 아주머니가 “감아, 너 한국에 시집 가보지 않을래?”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인데, 한국으로 시집을 가면 친정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도 솔깃했지만 솔직히 저는 호기심 많은 나이인지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하여 시집을 가겠다고 말을 해버렸습니다.

철없는 저는 그날 이후로 빨리 한국으로 오고 싶어 다니던 학교도 중퇴해 버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해 마음이 붕 떠서 들떠 있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어머니는 걱정이 늘어났지만 저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4년 5개월이 지난 지금 저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생각을 해보니 그때의 철없던 행동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어머니가 저를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는 엄마, 멀리 시집가는 저를 얼마나 걱정하셨어요? 이제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이곳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처음 제가 한국에 도착하여 신랑을 따라 집에 들어선 순간 저는 너무도 실망을 하였습니다. 제가 막연히 동경하였던 발전되고 화려한 한국이 아니라 그저 제가 살았던 베트남의 시골 마을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날씨도 베트남은 바람이 불어 시원했지만 한국의 여름은 바람이 불지 않아 너무도 덥고 짜증이 났습니다. 게다가 음식은 매워서 도저히 먹을 수도 없었고 맞지 않아 먹는 대로 설사가 나곤 해서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학교만 다니며 한 번도 음식을 만들어 본 적도 없이 어머니에게 투정만 부리던 막내였던 저는 엄마가 너무나도 보고 싶고 떠나온 학교와 친구들,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립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군청에서 결혼이주여성들에게 가정을 방문하여 한글을 가르쳐 준다는 말을 듣고 신청을 하였습니다.

처음 배우는 한글은 너무도 어려웠지만 배울수록 재미가 있어서 저는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다면 베트남에서 아마도 1등을 하였을 것입니다.

한글을 배우면서 저는 점차 이곳 생활에 적응되었고 여러 곳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 등록하여 베트남에서 시집 온 고국의 동포들을 만나면서 활기를 되찾아 갔습니다.

그러던 중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귀엽고 예쁜 딸 서영이를 낳아 이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한국생활 4년 5개월이 지난 지금 아직도 한글은 나에게는 어렵지만 열심히 공부한 덕에 모든 책을 읽을 수 있고 TV드라마도 다 알아듣습니다.

이제는 한국음식도 잘합니다. 식혜도 만들 줄 알고 부침개도 잘 만듭니다. 김치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명랑하고 활달했던 저는 지금은 보건소 국제결혼이주 통역요원으로 2년째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록 일주일에 한번 출근하고 돈도 얼마 되지 않지만 저는 매우 좋습니다.

모두들 저에게 잘 대해 주시고 베트남에서 시집을 온 고국의 동포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그들의 고민도 듣고 보건소 선생님들에게 말씀드려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젠 경상도 사투리도 제법 합니다. “할매요, 할배요, 아지매요”라는 말은 일상용어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의 꿈은 국제결혼 중매인입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생활 4년 5개월 동안 저는 많은 것을 주변에서 보았습니다. 특히 속아서 바보에게 시집 온 사람, 술 먹고 주정 부리고 때리는 못된 남자, 구박하는 시집식구들 때문에 괴로워하던 여자 등 더 이상 꿈에 젖어 달콤한 한국생활을 꿈꾸는 들떠 있는 어린 나이의 베트남 아가씨들이 더 이상 속아서 결혼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과 베트남이 서로 좋은 사이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티감(베트남·경북 의성군 봉양면)

[다문화가정 체험수기] 가작-슈퍼 울트라 킹 울 엄마
 
 
 
우리 집은 엄마가 일본 사람이다. 나는 우리 엄마가 대단하고 자랑스럽다. 엄마가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점이 하나도 없다. 한국 사람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한국말 하는 것도 “저 일본에서 왔어요”라고 하기 전에는 모를 정도로 무척 잘한다. 한국 요리는 물론 일하는 것에서도 누구에게 뒤지는 법이 없다. 이 모든 면에서 볼 때 누가 과연 우리 엄마를 일본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지금 이렇게 엄마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건 아마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와 친구들의 편견,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일본 사람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애들은 “쟤 엄마 일본 사람이래”라면서 툭하면 걸고 넘어졌다. 물론 좋겠다 신기하다 부럽다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혼혈이라는 것 때문에 심한 말을 한 그 소수의 친구들 때문에 나를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친구들은 잊은 채 많은 상처를 가슴에 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새 학년으로 올라갈 때마다 친구들은 신기하다는 눈길로 날 쳐다보며 “야! 네 엄마 일본 사람이냐?”라고 물어보았고 그 질문 다음에는 항상 “너 일본말 해봐!”였다. 처음에는 모두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것이 점점 싫어졌고, 새 학년에 올라가는 게 두렵기까지 했었다. 선생님들의 눈길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언제나 학기 초가 되면 새로운 담임선생님들은 나를 따로 불러내서 물어보고는 ‘아 이런 아이도 있구나’라는 식의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친구들 집에 놀러 갔을 때도 친구가 자신의 부모님께 날 소개하는 말은 “엄마, 지성이 엄마 일본 사람이다!”였다. 그럴 때면 나는 친구들 부모님께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엄마를 많이 원망하고 엄마 앞에서 나쁜 말도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도 많이 되고 엄마한테 죄송스럽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가 창피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물론 원망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엄마가 일본 사람인 게 더 좋을 뿐이다.

내가 17년 동안 살아오면서 몇 년 동안이나 엄마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나의 사고를 바꿀 수 있게 해준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친구들의 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참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어렸을 적 철없던 친구들은 나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많이 했었지만 이 친구들은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우리 엄마가 일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등 부러움의 눈길로 나를 많이 쳐다봤었다. 아니 내가 그런 말만 들으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 대놓고 친구들에게 일본말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일본말을 해보라고 하면 거부하지 않고 당당히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변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 너무 기쁘고 그 친구들에게 많이 고맙다.

또 한 가지 계기는 엄마가 우리 학교 일본어 교사로 일했다는 점이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엄마는 우리 학교에서 방과 후 학교 일본어 교사로 활동을 했었다. 처음에는 ‘옆 학교로 가지 왜 하필 우리 학교에서 저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친구들이 일본어부에 들어 수업을 받은 후 "재밌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괜히 더 우쭐해지고 뿌듯해졌다. 또 수업이 있는 전날이면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해가고, “내일은 무엇을 하지”라며 고민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엄마가 자꾸 대단한 사람 같았다. 남의 나라말로 모국어를 가르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수업을 잘 해내신 것을 보니 엄마의 열정이 하늘을 찌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나는 그런 엄마의 열정에 감복했다.

엄마는 중학교 교사 외에도 외국인들에게 13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쳐 오셨고, 올해부터는 다문화가정을 돕는 아동양육지도사로서 일하시게 되었다. 전국에서 일하는 지도사들 중 외국인은 5%도 안 되는데 거기에 우리 엄마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하지만 우리 집은 엄마 아빠 두 분 모두 돈을 많이 벌지 않기 때문에 부모님들의 걱정은 요즘 들어 많아지고 있다. 아직 집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이 있고, 나는 올해 고등학생이 됐는데 앞으로 대학도 가야 된다. 그런데 이 모든 비용을 부모님 월급으로 대기에는 빠듯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 때문에 걱정하시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일본에서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고 훨씬 환경도 좋은 곳에서 일을 할 텐데 말이다. 또 힘들게 사시는 부모님들에게 잘해드린 게 하나도 없어서 슬프다.

우리 엄마에게는 다양한 재주가 참 많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점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었지만 엄마처럼 피아노를 잘 치지는 못한다. 엄마의 피아노 치는 모습은 정말 예쁘고 힘이 넘친다. 감히 내가 따라할 수 없는 모습이다. 엄마는 현재 교회에서 합창부 지휘와 찬송가 반주를 맡고 있다. 엄마의 반주에 맞춰서 부르는 찬송가는 활기차고 힘이 넘치며 즐겁다. 반면 엄마가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안 하는 날이면 그날은 노래를 부르기는 부르는데, 왠지 모르게 서운하고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 엄마는 과자 만들기도 수준급이다. 제과점만 안 냈을 뿐 맛은 거의 제과점 수준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쿠키와 빵을 자주 만들어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친구들 엄마들도 항상 그렇게 만들어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주는 엄마는 우리 엄마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항상 친구들 앞에서 “우리 엄마는 쿠키랑 빵 자주 만들어준다”라며 자랑을 하고 다녔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었는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가끔 우리 교회에서는 식구들을 상대로 바자회를 한다. 그럼 우리 엄마는 케이크나 쿠키를 만들어가서 파는데 엄마표 제과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우리 엄마는 여자로서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모든 점을 닮고 싶다. 절대 소심하지 않은 그 당당함과 적극성, 우수한 두뇌, 피아노 연주실력, 쿠키 만드는 실력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내가 엄마의 잘난 유전자를 많이 못 닮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아주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엄마는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사람이고, 나에게 많은 걸 배우게 해주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그늘은 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준다. 나는 엄마가 일본 사람이든 아프리카 사람이든 상관없다. 엄마들에게는 자식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공통적으로 다 적용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엄마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우리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주변에 놀고 있는 다른 친구들의 엄마를 볼 때, 자기 일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엄마의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다. ‘외국인이어서 못한다는 패배적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살려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엄마의 적극성이 오늘의 엄마를 있게 한 것 같다. 다른 외국인 가정도 엄마들이 우리 엄마처럼 깨어서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

이지성(전남 화순군 화순읍·능주고 1학년)

[다문화가정 체험수기] 가작-한국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들
 
 
 
요즈음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한국에 온 이유는 공부를 하기 위해 또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또는 저처럼 결혼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저는 고국 러시아에서 한국에 2000년에 왔습니다. 벌써 8년!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인지 이제는 제가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서 저는 저의 가족들과 다르게 매운 음식을 좋아했습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저는 한국음식이 제 입맛에 맞았습니다. 처음 먹는 매운 김치도 제 입에는 맛있게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김치가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특히 러시아에 있을 때 한국이 많이 그립습니다. 아마도 한국이 제 2의 고향이라 생각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의 전통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가는 얘기 중에서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완전한 한국 사람이 된 것 같다면? 만약에........ ”

- 냉장고에 언제나 김치가 들어있는 것.

- 일본 사람이 별로 좋지는 않은 것.

- 포크보다 젓가락이 더 익숙해진 것.

- 휴가는 꼭 여름에 가는 것.

- 원래는 러시아가 춥지는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춥다고 느껴지는 것.

- 러시아에 갔을 때 90도로 인사를 하는 것.

- 다른 외국인들을 보면 “어! 외국인이다!”라고 말하는 것.

- 친정에 전화했는데 어떤 소식을 들었을 때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

- 러시아 음식이 느끼하게 느껴지는 것.

- 한국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때.

- 고기 요리할 때 소금 대신 설탕 넣을 때

- 러시아에서 한국 상표나 한국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기뻤을 때

한국이란 나라는 아주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러시아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재미있는 나라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 러시아는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금지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발음을 잘 하지 못해서 말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웃긴 에피소드가 생깁니다.

예전에 제가 임신 했었을 때, 산부인과에 갔었습니다. 그 때 제 담당의사가 잠시 출장을 갔다고 간호사들이 말해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담당의사가 어디에 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 어디 가셨어요?”라고 물어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의사'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 어디 가셨어요?”라고 말했더니, 간호사들이 하하하하 웃었습니다. 그러고선 “이사 안 가셨어요, 내일이면 오실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간호사들은 의사를 이사로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너무 무안하기는 했지만 아무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또 비슷한 얘기가 더 있습니다. 예전에 친구가 저희 집에 놀러 왔습니다. 그 친구는 한 번도 다른 나라를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목욕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며칠 뒤, 저와 친구는 목욕탕에 갔습니다. 제가 먼저 샤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 친구가 이상한 행동도 하고, 보디빌더를 따라 하기도 하고, 워킹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뻔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친구에게 물어봤습니다. “너 어디 아프니?” 라고 말하니, 그 친구가 경고판을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SHOW YOUR BODY BEFORE USING SWIMMING POOL.(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몸을 보여주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난 이 글을 따라한 것뿐이야.”

그것을 보고 목욕탕 주인이 Shower를 SHOW로 착각해서 잘 못 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뜻은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샤워를 하시오”였습니다. 그 날 우린 배꼽이 빠질 때까지 계속 웃었답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는 춥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왜 사람들이 증거 없이 그렇게 생각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저에게 “러시아는 항상 춥기만 하지? 그렇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에요, 러시아도 여름이 있고 여름엔 반바지, 반팔도 입고, 해수욕장 가서는 비키니도 입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정말? 정말 여름이 있어? 더워? 안 추워?”라고 물어보며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아마 정말 못 믿는가 봅니다. 어느 날 친구가 아들이랑 지하철에 있을 때 한국 사람들이 그 애기가 한국말을 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한국말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친구 아들은 “학교에서 공부해요.”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래? 오~잘한다. 근데 왜 영어도 해? 영어도 배웠어?”라고 물어봅니다.

그럴 때 친구 아들은 “아니요. 전 영어 배우지도 않았고 못 하는데요? 전 영어는 못하고 러시아말로 해요.”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래? 영어는 학교에서 배웠어?”라고 합니다. 다시 친구 아들은 “아니요, 전 영어를 못 한다니까요? 전 러시아 사람이고, 영어는 하나도 못해요. 러시아말이랑 한국말 밖에 모른다니까요.”라고 합니다.

이럴 때 보면 한국 사람들은 너무 웃기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간에 다 영어로 보는 게 참 희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한국말 한마디만 하면 다 한국말을 잘한다고들 합니다. 예를 들자면 슈퍼에 가서 “안녕하세요? 참기름 좀 주시겠어요?”라고만 말해도 사람들 모두 “와~한국말 잘 하시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러시아에는 곰만 있는 줄 알고 “너희 나라에도 강아지가 있어? 고양이도 있고?”이렇게 말하는 경우, 그리고 호주에는 캥거루와 코알라만 있는 줄 알고 “너희 나라에는 다른 동물들도 있어?”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도 한국 사람들이 어이없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되고 그리고 웃기다고도 생각됩니다. 저는 한국 사람들이 이런 편견은 버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아주 좋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 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역시 한국은 정말 행복한 나라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의 재미있는 일들, 웃기는 일들, 어이없는 일들, 짜증나는 일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로 한국이 싫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놀리거나 우습게보거나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따돌리거나 힘들게 생각하는 건 정말 싫습니다. 저 같은 외국인들도 한국어, 한국의 전통, 한국의 예절 등을 모를 뿐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외국인들도 사랑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니킷첸코 율리야(러시아·전북 익산시 영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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