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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사 주최 다문화가정 수기공모 장호씨 '첩첩산중을 넘어 얻은 행복' 대상 | |||||||||||||||||
우수상에는 이나오까 아끼(일본·대구 북구 침산3동)씨의 '경상도 아주매 아끼', 짠티튀안(베트남·경기 포천시 영북면)씨의 '한국 생활과 한국어'가 각각 선정됐다. 가작에는 니킷첸코 율리아(러시아)씨의 '한국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들' 등 5편, 특선에는 강동주(중국)씨의 '파란 물고기' 등 8편, 입선에는 한이슬(몽골)씨의 '무제' 등 32편이 뽑혔다. 이번 공모전에는 전국에서 모두 425명이 응모했으며 김종욱(수필가) 강세영(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백두현(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최성휴(법무부 사회통합팀 과장) 최옥자(대구시 여성청소년가족과 과장)씨가 심사를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문장을 다루는 솜씨보다 그 내용에 비중을 두었고 내용의 진실성,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 문장의 완성도를 참작해 심사했다"며 "낯선 이국땅에서 겪은 애환을 진솔하게 풀어낸 글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시상 일정은 개별 통보한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가작 ▲장옥련(중국·경기 시흥시 신천동) '나의 한국' ▲탕추이홍(중국·대구 동구 신암동) '행복의 가족' ▲두티감(베트남·경북 의성군 봉양면) '무제' ▲이지성(일본인 엄마·전남 화순군 화순읍) '슈퍼 울트라 킹 울 엄마' ▲니킷첸코 율리아(러시아·전북 익산시 영등동) '한국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들' ◆특선 ▲강동주(중국·경북 김천시 지좌동) '파란 물고기' ▲미야치 사끼꼬(일본·전남 화순군 화순읍) '무제' ▲팜티하(베트남·전북 임실군 신평면) '한국사계절과 함께 한 나의 결혼생활' ▲호리까와 마스미(일본·전남 화순군 화순읍) '나의 소원' ▲이청화(중국·제주시 외도동) '나의 한국살이' ▲이광희(필리핀 부인·대구 동구 검사동) '나의 새로운 삶' ▲소하이샤(중국·경남 창원시 대방동) '무지개(활기찬 한국 생활)' ▲강홍매(중국·경남 하동군 고전면) '나의 결혼 체험담'
◆입선 ▲한이슬(몽골·경기 김포시 장기동) '무제' ▲이금순(중국·대구 동구 신서동) '굳세어라 금순아' ▲유용식(베트남 부인·경북 예천군 예천읍) '무제' ▲마리아 미아선션 에이차베즈(필리핀·경기 성남시 중원구) '마리아의 결혼과 사회생활 이야기' ▲윤송월(중국·경기 평택시 서종동) '하늘' ▲손운산(중국·경남 진주시 하대동) '한국에서의 결혼생활' ▲라이다 알바레즈(필리핀·전북 장수군 장수읍) '남편에게' ▲류지애(중국·경기 광명시 철산동) '한국와서 다시 태어나고 찾는 행복' ▲이다 카말틴(필리핀·강원 횡성군 횡성읍) '나를 찾아가는 여행' ▲윙테이 메옥(필리핀·경북 포항시 장기면) '여보 고마워요' ▲김유진(필리핀·전남 담양군 금성면) '행복찾아 나는 새' ▲김향화(중국·전남 보성군 겸백면) '나의 결혼 원정기' ▲산티아고 라켈(필리핀·경북 군위군 군위읍) 'Korea, 너는 내 운명이다' ▲기네다 아키코(일본·전남 강진군 강진읍) '우리 가정의 목표는 참사랑입니다' ▲김지윤(필리핀·전북 군산시 대야면) '삶의 꿈과 희망' ▲보티미린(필리핀·대구 수성구 고모동) '무제' ▲문경성(베트남 부인·전남 해남군 송지면) '땅끝에서 부는 바람' ▲네미아 마퀼레로 에스(필리핀·전북 장수군 계남면) '안녕하세요' ▲김은옥(중국·전남 함평군 함평읍) '잊을 수 없는 가을' ▲제니퍼 비 파구이오(필리핀·대구 달서구 이곡동) '3명의 아들들, 3배의 어려움, 3배의 행복' ▲현지영(중국 남편·제주시 외도동) '남편은 외국인 노동자' ▲왕경숙(중국·인천 남구 도화동) '한국 생활 적응 체험담' ▲동티홍(베트남·대구 북구 태전동) '무제' ▲진혜금(대만·경남 마산시 월영동) '무제' ▲와치 아끼나(일본·경기 고양시 행신동)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허은영(베트남·경기 안양시 관양동) '한국생활기' ▲태호영(필리핀·울산 울주군 언양읍) '희망을 보았다' ▲최신자(중국·경남 산청군) '이제는 행복합니다' ▲오가타 유키에(일본·경기 김포시 통진읍) '꿈은 상상밖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박은정(필리핀·경남 마산시 상남동) '따사로운 햇살을 기다리며' ▲이찌끼 미호(일본·경남 창원시 남양동) '사랑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우엔티 옥로이(베트남·서울 강북구 수유동) '무제' |
[다문화 수기] 대상-장호 '첩첩산중을 넘어 얻은 행복' | ||||||||||
보지 않아도 뻔하다. 엄마는 틀림없이 비행기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공항에서 아빠 품에 안겨 외아들을 한국으로 보낸 것을 후회하며 펑펑 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국 내몽고에서 소황제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 없이,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해방이다. 나만의 선택으로 뻗어진 성공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친구의 소개로 한국 부산 해양대로 유학 오던 2003년 첫 날, 내 생에 최초로 바다라는 것을 보았다. 사막보다 광대하고 짙푸른 심연은 고향을 떠나길 잘했다고 스스로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선진 한국과 수년 뒤면 동문으로서 드나들 한국해양국립대학에서의 모습을 그리자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김해공항 근처의 삭막함은 내몽고의 시골과 다를 바 없고, 며칠을 걸어서 구경해야 교정을 다 볼 수 있는 중국의 대학교에 비한다면 해양대학교도 아주 작은 섬에 불과했다. 첫 날부터 무너진 기대. 그것도 잠시, 가나다도 모른 채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이 나를 매섭게 내몰고 있었다. 중국재료들을 챙겨온 것이 있어서 기름과 우유만 있으면 대충 오늘의 끼니는 해결할 것 같았다. 마트에서 고민하며 사 온 기름은 뚜껑을 열자 식초였다. 논리적으로 점도가 높은 것으로 사 온 것이 물엿, 점원에게 오일(oil)을 수십 번 말하다 포기하고, 온 진열대를 다 훑고서야 겨우 기름을 샀다. 우유도 결국 카운터에서 가슴에서 우유를 짜는 젖소흉내를 내면서 수치스럽게 사와야만 했다. 마트에는 의외로 영어가 적혀있지 않거나, 영어를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해놓은 것들이 많아 아직도 외국인에겐 원하는 목록을 제대로 사오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어쨌든, 내몽고에서 하루 세 끼를 생고기를 먹다가, 기숙사 식판에 오른 서너 가지 반찬은 밥을 반만 먹어도 모자라기 일쑤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김치는 고약한 냄새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늘 배가 고팠다. 어떤 친구는 밥만 냄비에 퍼나가서 몰래 반찬을 만들어 먹다가 들켜 졸업할 때까지 ‘밥도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배에게 물어보고 외운 첫 번째 한국어 문장은 “배가 너무 고파요. 반찬 좀 많이 주세요.”였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위 공산당이다. 그래서 종교를 권유당한 적도, 믿으려고 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나도 종교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 내가 한국 온 둘째 날, 한국인 여대생이 한국어를 노래로 재미있게 가르쳐준다며 단체로 초청해서 간 곳이 바로 교회였다. 본능적으로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활한국어를 빨리 터득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그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매주 교회라는 곳을 다니면서 중국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관심과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사랑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선배들이 학기 초에 군기를 잡는다고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면서 후배들을 기선제압하고 있었다. 내몽고에서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라, 어릴 때부터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고 잠이 드는 문화여서 술이 센 편이었다. 한국의 대학은 술을 빼고는 어울릴 수 없는 듯 보였고, 술이 센 것이 은근히 자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술이 세다는 소문에 선배들은 자주 나를 불렀고, 이렇게 지난 1년 동안 배운 한국어는 교회의 종교언어와 술자리에서 배운 취중언어가 내 입에 배이게 되어버렸다. 날씨가 풀리면 해양대 앞바다에서 습관처럼 다이빙을 했다. 고향에서는 소독 냄새가 물씬 나는 수영장에서 밖에 할 수 없던 수영을, 학교가 섬이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진짜 파도와 해초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내겐 큰 매력이자 혜택이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좋은 것만 부모님께 말하고 안 좋은 건 그냥 속으로 삼키면서 나도 모르는 새 철이 들고 있었다. 환율차가 컸기 때문에 부모님이 고생하는 것 보다 젊은 내가 고생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고생스럽고 서럽더라도 참고 두 배로 성실하게 일했다. 매스컴을 통해 한국인들은 중국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의외로 중국인이라는 것 보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성실과 신의를 인정해주고 대우해주어 참 고마웠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돈을 번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학교 친구들이 존경하는 한국인이 있는데, 그 누나 집에 놀러가자고 했지만 왠지 쑥스러워 못 갔다. 그러다 드디어 2005년도 여름, 그 모임에서 MT가는데 슬쩍 따라나선 길이 운명의 길이 돼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친구들이 말했던 바로 ‘그 누나’는 친구들의 표현보다 훨씬 이상이었다. 인형 같은 외모, 일본어통역사로 잦은 해외출장과 경력을 갖고 있고, 요리도 잘하고, 착하고 친절하기가지 했다. 여동생과 함께 우리 사이에서 천사자매로 통했는데, 자주 우리를 불러 요리도 해주고, 함께 병원도 가주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해결해주고, 그리고 오랜 유학경험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유학생활을 적절한 위로와 격려로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냥 중국인 친구들이 정이 간다고만 얘기했다. 그렇게 하는 누나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게는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절실히 필요한 사람으로 금세 자리 잡아 버렸다. 누나의 관심을 사기 위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말로만 해왔기 때문에 글로 쓸 때 맞춤법이 다 틀린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잘 보이기 위해 몇 줄의 메일을 쓰려고 몇 시간을 사전을 찾아가면서 수십 번이나 순서를 앞뒤로 바꿔가며 작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장은 매번 빨간색으로 빽빽하게 수정된 원문과 함께여서 정말 부끄러웠다. 한국어 작문을 밤새서 했다. 좋은 문구도 찾아 읽기 시작했고, 맞춤법을 그때그때 고쳐서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주면서 일주일에 대여섯 번씩 만나면서,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교제신청을 했다. 그러나 누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유는 내가 크리스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결혼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교회를 다니고는 있었지만, 한국어를 배우러 다녔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았는데, 그게 우리 교제가 불가능한 이유였다. 게다가 누나에게는 오래전 한국에 오자마자 교회에서 느꼈던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난 없었다. 그래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로 옮겨서 출석하기 시작했다. 영도 해양대에서 해운대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첫차를 타고 1시간 반이나 걸려 새벽기도부터 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로지 누나를 감동시켜서 교제를 하기 위한 꿍꿍이였다. 누나의 마음도 서서히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장인장모가 될 분들을 만났는데, 절망하고 말았다! 완전 깡시골 부산사투리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식사 전에 “인자 묵짜, 니도 마이 무라”라든가, 짐을 들어드리고 나서 내게 “욕봤다”고 하시면서 등을 두드리시거나, 엄마가 아빠에게 전화로 “니을 오요? 머라카노, 안 듣끼여?”라고 말하실 땐, 새로운 외국어같이 느껴져 정말 답답했다. 부모님에게도 점수를 따고 싶은데, 역시 외국인이라 말이 안 통해 힘들다는 말을 들을까봐 얼마나 촉수를 세우고 한마디 한마디 들었는지 모른다. 영화 친구를 보면서 사투리도 연습했다. 하루는 추운 겨울 누나가 길을 걸으면서 말하기에, 바람이 많이 불어 감기 걸릴까봐 “누나, 입 닥쳐요”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실전의 사투리는 수업 중 교수님의 사투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누나의 동생과는 친구로 만나서 나보다 나이가 5살 많았지만 그냥 중국에서 하던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한국은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기에 누나의 누나에게는 ‘누나님’,‘형부님’이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당시에는 웃기만 할 뿐 고쳐주지 않아 습관이 되어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누나의 동생도 여전히 이름으로. 2년 전 세례를 받고, 온갖 해프닝 끝에 크리스천이 되면서 누나와 결혼승낙에까지 갔다. 알고 보니, 누나도 나처럼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결혼이 어디 있을까! 결혼승낙만 받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혼서류가 산 너머 산이었고 소원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친부모님을 초청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먼저 혼인신고를 해야 했는데, 누나의 가족은 결혼도 하기 전에 절대로 먼저 혼인신고를 할 수 없다고 하셔서, 우리는 중국을 바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결혼식 날짜는 잡혀있고 중국 부모님 없이 식을 올려야 할 판이었다. 울고불고 얼마나 실랑이를 벌였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중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결혼예비학교’라는 것에 등록해서 남녀차를 이해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들, 조화롭게 양가와 누리며 사는 방법들, “정말 사랑한다면 내가 먼저 죽어야 된다”며 죽는 방법에 대해 함께 배우면서, 한국의 이런 좋은 세미나들을 중국에도 알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강사가 되고 싶을 만큼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최고의 혼수인 부부의 자질을 갖추어가면서 결혼준비를 했다. 한국은 제대로 갖추려고 하면 결혼식을 위한 절차도 너무 까다롭고 갖출 것도 많아서 누나와 고민 끝에 양가의 허락을 받아 생략하기로 했다. 모든 어려운 난관들을 누나와 같이 기도하면서 국제결혼이라는 첩첩산중을 넘어 결국엔 2007년 10월 6일 대학 3학년 때 결혼식을 올렸다. 중국과 한국의 국적을 넘어, 종교를 넘어, 직업을 넘어, 10살 연상의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그 때 결혼식에 온 수백 명이 넘는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이란!!!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이 상상 이상으로 행복하게 신혼을 보내고 있다. 물론 지금은 부모님의 사투리에 사투리로 대답하는 센스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서류작업은 한 번 까다롭지만, 결혼의 행복은 영원하다고 믿는다. 국제결혼이 힘든 것은 국적이 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원래의 나는 이미 없다. 그래서 아내와 가족을 위해 맞추어가며 살 수 있는 것 같다. 한국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치아를 아래위로 다 의치로 하고 계신다. 요즘 잇몸이 약해져서 교환해야하는 시기인데, 한국의 치과는 너무나 비싸서 결국은 중국에 가서 하기로 결정했다. 병원비가 한국은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 내게는 큰 부담이다. 중국 가서 부모님이 의치를 교환하고 나면 아내와 함께 내 나라 중국을 소개시켜주면서 맛있는 것들을 많이 대접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나를, 단지 비전하나 보고 결혼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조금이나마 표현하고 싶다.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성공으로의 첫 번째 선택은 한국으로 유학 온 것이고, 두 번째는 누나와 결혼한 것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성공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을 기대하며, 계획했던 코리안 드림을 이루고 싶다. 장호 (ZHANG HAO) |
[다문화 수기] 금상-짠티튀안 '한국 생활과 한국어' | ||||||||||||||||||||||||||||||||||||||||||||||||||||||||||||||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 부자 나라, 어느 집이나 돈이 많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흥분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을 안고 2006년 11월 29일에 한국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말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어렵고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우선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된장국을 먹었는데 냄새가 너무 이상해서 토할 것만 같았다. 또 모든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너무 매웠다. 날씨는 겨울이었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그저 울고만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국의 겨울을 좋아한다. 내가 살았던 베트남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에 눈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한국에 와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랍고 눈이 꽃처럼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봄에는 꽃이 피고 단풍 든 나무들이 산을 감싸고 있는 가을 모습도 아름답지만 나는 눈이 오는 겨울이 더 좋다. 처음에 먹을 수 없었던 한국 음식도 이제는 너무 맛있게 잘 먹는다. 특히 김치를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먹는 것은 베트남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김치를 기름에 볶기도 하고, 찌개도 하고, 김칫국도 끓이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맛있지만 특히 삼겹살에 구워 먹으면 정말 맛있다. 그 덕분에 한국에 온 후 몸무게가 5㎏ 더 나간다. 너무 잘 먹어서 남편은 내가 이제 한국 사람이 다 되었다고 웃는다. 어느 날 하루는 찜질방이라는 곳에 갔는데 너무 더워서 숨이 차서 힘들어 죽겠는데 한국 아줌마들은 ‘아 시원해, 시원해’라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님이 땀을 빼면 시원해진다고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해서 눈을 딱 감고 헉헉거리며 있다가 나왔다. 나와서 조금 있으니까 정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시원해져서 정말 좋았다. 또 전화만 하면 모든 것을 집으로 배달해 주는 일, 부산에 갈 때 타봤던 KTX라는 고속열차는 비행기만큼이나 빠른 것 같아서 너무 놀랐다. 컴퓨터로 옷을 살 수 있는 것도 좋고, 컴퓨터에 글을 쓸 수 있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도 올릴 수 있는 일, 이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나는 이렇게 조금씩 한국의 모습을 좋아하면서 한국 생활의 편리함을 느끼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잘 살고 있다. 지금 내가 가장 기쁜 것은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 한국말을 몰랐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사람만 만나면 무서웠다. 한국말을 몰라서 남편이 젓가락을 찾으면 국그릇 갖다 주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나에게 ‘밥 먹었어?’ 하면 ‘없어요’, ‘추워?’ 해도 ‘없어요’ 무조건 ‘없어요’, ‘몰라요’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또 형님한테 ‘밥 먹어’라고 해서 남편과 형님이 놀라면서 웃었던 날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국말을 몰라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포천시청에서 한국말을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하여 한국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운천에서 포천시청까지 버스로 30분이 걸린다. 남편은 길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 포천시청에 데려다 주고 내가 공부하는 2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렸다가 공부가 끝나면 다시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렇게 작년 8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올해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공부방에서 4월부터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집에 오면 또 남편과 함께 한국어를 공부한다. 우리 한국어 선생님은 나와 같은 외국인 신부들은 시간이 없고 힘들더라도 제일 먼저 한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자주 얘기하신다.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 첫째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그 말을 나는 알 것 같다. 한국어를 아니까 한국 요리책을 읽을 수 있고 그래서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다. 남편과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면 더 다정한 마음이 든다. 한국말을 할 수 있으니까 집 밖에 나가도 무서운 마음이 조금 든다. 그리고 훗날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도 한국말을 더 열심히 공부해서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 지금 한국어 공부를 하는 공부방에는 처음에는 많았던 학생이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서너 명 온다. 아기를 낳아서 오지 못하고, 일 때문에 오지 못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한국어 공부에 오지 않는다. 한국어를 먼저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그럴 수 없는 여자들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 한국 남편들이 먼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이 많이 든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나처럼 한국에 시집 온 외국 여성들을 위해서 포천시청에서 베풀어준 많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국 문화도 많이 배웠다. 한국 요리를 배우는 체험, 농사 체험, 한국 민속촌 관람, 사물놀이 공연 등 여러 가지 문화 행사에 참여해서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익숙해졌다. 성공한 나라, 부자 나라인 한국에 오면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한국이 모두가 잘사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남편과 조그마한 치킨가게를 운영하고 있지만 장사가 너무 안 돼서 남편과 나는 걱정이 많다. 내가 공장이라도 다녀서 돈을 벌고 싶지만 공장에 취직하기도 너무 어렵다. 어쩌다 한 번 취직하여 몇 달 일을 했는데 월급을 안 줘서 남편이 의정부에 가서 고소해서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의정부까지 가려면 하루에 겨우 몇 번 다니는 버스로 1시간 30분을 가야한다. 이렇게 어려운 형편이지만 남편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돈을 부쳐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 남편은 다른 남자들보다 그렇게 잘생기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최고인 남자다.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 음식도 할 줄 모르던 나를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써주고 많이 도와 준 남편이 정말 고맙다. 한국어를 가르쳐 준 선생님께도 고맙고, 한국 문화 등을 체험하게 해준 분들께도 정말 고맙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우리 남편, 사랑해요.” 한국에 온 지 이제 2년,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처음과는 정말 다르게 이제는 어엿한 한국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그리고 가끔씩 사랑하는 남편과 참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 한국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것이다. 한 아내로서, 한 어머니로서 부끄럽지 않은 한국인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짠티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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