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역사를 갈랐다(9) 조광조와 중종 

문제는 중종이었다. 인간적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왕은 누구든 불신하였다. 우선 자신을 추대한 반정공신들도 믿지 못했다. 사림파를 요직에 임명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라고 해서 중종이 끝까지 총애할 리가 없었다.

중종은 4년간의 정치적 밀월 끝에 결국 조광조를 배신하였다. 처음부터 중종에게는 이상정치의 구현이라는 바람이 없었다. “왕은 (경연에서) 몸이 피로하고 괴로워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고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용상(龍床)에서 퉁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조광조와 김식 등은 중종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종이 ‘소인’(小人)들에게 쏠리는 날이 올 것을 예측하였다. 특히 조광조는 자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든 죄로 일망타진될 것을 내다보았다. 이러한 위험을 짐작하고서도 왕도정치의 길을 계속 걸어갔으니, 그들은 이상을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출처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423021001#csidx66250cc1de5a3ce9d7308af59a9a83b 


** [夜史야사TV] 야심한 밤 후궁과 조광조의 밀회 l 천일야사   

** 장금과 중종은 밀회를 즐겼다?! 위기를 느낀 경빈 박씨는 장금을 내치려고 하는데! | 천일야사 143회

** 조광조

월간조선

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3〉

조광조의 등장과 실패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 조선 성리학자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道統 주장
⊙ 남효온 등 ‘소학계’ 만들어 초보적 도덕 교과서인 《소학》에 입각한 정치 주장… 김굉필 거쳐 조광조에게 이어져
⊙ 조광조 일파, 서로를 ‘四聖十哲’이라 치켜세워… 운동권의 행태와 흡사
⊙ 이이, ‘조광조는 자질은 좋았으나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서 구세력에게 당했다’고 평가


[서울STV뉴스[歷史콘텐츠㊷] 중종 재위기 '38년 2개월' ... 허송세월로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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