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나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일주일간 노숙자 생활을 체험한 뒤 쓴 ‘버려진 우리의 이웃 노숙자 24시’라는 기획물을 보도한 적이 있다. 1996년 말 입사해 사회부 사건기자로 일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초년병 기자 시절의 일이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지금의 처로부터 노숙자들의 실태를 자주 전해들으며 노숙 체험에 도전해볼까 고민하고 있었으나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당시 사건팀장이 기획회의 시간에 같은 의견을 내놓았고, 결국 ‘해야 할 운명인가’ 하는 생각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젊은 혈기에 자원했으나 취재의 기초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나에게는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
“술 마시지 말고 건강을 유지하라”
1998년 5월16일 오전 11시.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허름한 옷을 꺼내 입고 버스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서울역 건물 처마 아래와 서부역 통로 등 곳곳에선 대낮부터 노숙자들이 술에 절어들고 있었다. 비를 피해 모여든 탓인지 당시 서울역 1층 대합실은 족히 100명이 넘는 노숙자들로 붐볐다. 노숙자들 대부분은 바지와 잠바를 걸친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텁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 설명하기 힘든 퀴퀴한 냄새들…. 서울역 1층 대합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낀 그 막막함과 불안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노숙자들은 언론에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 신분이 탄로 나지 않도록 계속 극도로 긴장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당시 만난 노숙자 정아무개씨는 천사가 아니었을까. 정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플라스틱제품 제조업체 사장이었다가 1997년 말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낸 뒤 한 달여 전에 서울역으로 나오게 된 분이었다. 그는 “어린이날 아이들을 데리고 에버랜드에 가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다”며 눈물 흘리는 평범한 대한민국 가장이었다.
취재 첫날 남대문 지하도 저녁 급식 현장에서 처음 만난 뒤 취재 마지막 날까지 함께 지낸 그는 나의 노숙자 생활 입문 스승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숙 생활 노하우를 성심성의껏 알려주었다. 급식은 언제 어디에서 타는지, ‘삥차’(지하철 무임승차)는 어떻게 하면 안 걸리는지, 노숙자들에게 적은 돈이나마 적선해주는 종교기관이 어디에 있는지, 노숙자 상담은 어떻게 받는지, 밤에 노숙하려면 라면 박스 등으로 어떻게 잠자리를 마련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당시 일하던 식당에서 쫓겨난 ‘알바’로 가장한 나를 그는 친삼촌처럼 다독여주었다. 그는 자신도 힘든 처지인데도 “빨리 힘내 이곳을 벗어나라” “힘들더라도 술 마시지 말고 건강을 잘 유지하라”는 등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취재 마지막 날 “취직이 돼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유를 대며 서울역을 떠날 때 그는 내게 호출번호를 가르쳐주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나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느라 얼른 등을 돌려야 했다.
거짓말을 했기에 감사하단 말도 못하고
정씨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마친 노숙자 체험기는 당시 <동아일보> 1면과 3면 등에 크게 보도돼 많은 화제를 불렀고, 한국기자협회로부터 ‘이달의 기자상’까지 받았다. 초년병 기자가 그토록 큰 기사를 쓸 수 있었던 데는 정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를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본의는 아니지만 그를 속이기까지 했다. 초년병 기자 시절 가장 큰 도전이었던 취재를 사정도 모른 채 진심 어린 마음으로 도와준 정씨가 당시 나에게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깊은 감사와 함께 사과의 뜻을 전하며 머리 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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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씨의 경험입니다.
 낡은 봉고를 빌려 강원도 여행을 갔는데, 결국 대관령 고개에서 낡은 차가 주저앉고 맙니다. 어두컴컴한 국도에 나가 플래시를 들고 신호를 보냈지만, 국도 위의 차량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지요. 몇 시간 뒤 트럭 한 대가 멈췄습니다. 그는 봉고 뚜껑을 열고 들춰보다가 고장이 크게 났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택시기사는 차 밑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보는 것 같더니 말합니다. “안 되겠소. 더 늦기 전에 이 차를 정비공장에 갖고 가서 고쳐야겠소. 내 차에 체인을 달고 이 차를 천천히 정비공장에 끌고 갖다놓고 다시 오겠소. 그동안 도로에 앉아 계시오. 그러면 내가 다녀와서 당신들의 목적지인 용평 스키장까지 데려다주겠소.” 택시기사는 말한 그대로 밤길을 오가며 일행을 실어주었습니다.
대관령에서 또 사고 난 차, 또 나타난 천사 이듬해 단풍철에 떠난 강원도 여행에서 또 대관령에서 차가 배탈이 나고 맙니다.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세차장이 있어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더니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던 그들은 사정을 듣고는 무서운 속도로 차를 고칩니다. 사례를 하려 했으나 이들은 마다합니다. 일행은 갖고 있던 김밥을 안깁니다. 덥석덥석 김밥을 들어 한입씩 베어문 그들은 말합니다. “그거 참 맛있네. 고맙소. 그럼 잘 가슈.” 소설가 최인호는 <최인호의 인연>(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에서 이런 경험을 펼쳐 보이며, 이들을 ‘천사’라고 칭합니다. “천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이웃들의 헐벗은 얼굴에, 우리에게 도움을 전해주는 고마운 이들의 손길에 천사는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경험은 보험회사가 긴급출동 서비스를 하기 전 ‘옛날’ 일이겠지요. 그렇다고 천사가 고릿적에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대관령에만 천사가 출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시민 K는 일본 여행 중 천사를 만났습니다. K가 시코쿠 산길을 걷는데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진즉에 나타났어야 할 숙소는 보이지 않고 산길에는 몇 시간 동안 사람 한 명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전화 로밍을 안 해갔는데 공중전화는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숙소로 가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11월 중순, ‘한뎃잠을 자야 하나’라고 낙심하며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지요. 그때 트럭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사이 트럭은 지나갔고, 트럭이 갔으리라 판단되는 곳(지도에는 절이 있다고 나왔습니다)을 향해 걸었습니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플래시를 꺼내서 걷는데, 아까 그 트럭이 나타났고 몸짓을 하기도 전에 옆에 멈춰섰습니다. 트럭기사는 휴대전화로 숙박업소에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숙박업소에서 걱정하고 있다. 그 집은 내가 잘 아니 데려다주겠다.” 일본어를 잘 못하는데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트럭기사는 말했습니다. “내일 그 절에 큰 행사가 있다. 행사에 쓸 물품 중 모자란 게 있어서 마저 가져다주러 간 것이다.” 숙소에 도착한 뒤 트럭기사는 짐칸에서 사과와 귤을 꺼내 K의 두 손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그는 “내일 그 절에서 우동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으니 꼭 와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거슬러 걸어 올라간 절에서 그는 우동을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까까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승복을 입고 있었지요.
이웃의 얼굴을 한 천사들나이가 꽤 많은 칼럼니스트 K씨는 “그렇게 젊은 시절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다녔는데 아무런 탈 없이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것이 다 천사들 덕분 아니겠는가”라는 말을 합니다. 가끔은 인사불성의 희미한 기억을 뚫고 천사가 또렷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취재원과 취재기자 사이였습니다. 술에 약한 취재기자 S는 술자리가 즐거워져 그만 인사불성으로 취했습니다. 취재원 D는 기자의 집을 물어 택시를 같이 탔습니다. 둘은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습니다. 여전히 S는 일어나지 못했고, D는 S를 업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S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든 것일까요, S는 꽝 하고 이마를 계단 모서리에 찧고 말았습니다. 피가 솟기 시작했고, D는 S를 응급실에 데려갔습니다. 가까스로 S의 동생이 도착한 시간은 새벽 6시였습니다. 그때까지 D는 보호자 노릇을 하며 옆에 붙어 있어주었습니다. 우린 뜻밖의 순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또 다른 천사를 만나기도 합니다. D씨는 김광수경제연구소의 부소장 선대인씨입니다(S는 차마 밝힐 수 없습니다). 선대인씨가 들려주는 천사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소설가 최인호는 같은 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가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는 내 곁에 살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며 부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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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와 만난 추억 고백? 빼도 박도 못할 곤혹스러운 요구 아닌가. 매개어 천사로 ‘수태고지’ 주제를 재현한 고전주의 회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회임 소식을 전하는 익숙한 도상- 를 고작 떠올릴 만큼 내 성정에는 비현실적 대상에 관한 한 관대함도 낭만도 없다. “천사를 그려줄 테니, 내 앞에 천사부터 데려오라”고 일갈한 화가 쿠르베의 원리적 사실주의에 가깝다면 지나칠까.
보은의 심정과는 연결되지 않는 ‘날개’그럼에도 현대 미국인의 절반 넘는 인구가 수호천사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는다는 여론조사(2008년 <타임>) 앞에서 이들과 동시대 공기를 호흡해야 함을 풀어야 할 과제로 믿긴 한다. 비단 근본주의 개신교 국가에 한정된 문제 같진 않다. 기부 연예인에게 ‘선행 천사’란 애칭을 다는 항간의 분위기, 등짝에 인조 날개를 부착한 백색 원피스 차림 멤버들이 출연하는 소녀 아이돌 그룹 홍보물에 대중이 농락되는 한국 사정까지 고려하면.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 보듯, 어느덧 부담스러운 좌우대칭 날개(때로 백색 원피스 옵션) 달린 육감적 미소녀는 천사 이미지의 가시화된 클리셰가 되었고 그 권능도 지대하다. 절명의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경험마저 구급차를 불러준 이름 모를 행인, 병원까지 후송해준 구급대원, 지극정성 병간호한 친구, 격려의 안부를 건넨 지인을 향한 내 보은의 심정은 그들과 등 뒤로 인조 날개 부착한 클리셰를 도무지 연결짓지 못한다. 훼손된 천사 이미지를 보은의 상대에게 덧씌울 심사가 생길 턱이 없다. 더구나 종교 색채가 깔린 천사라는 구시대 개념과 피구원자라는 당대적 실존자 사이의 관계가 종속적인 시혜주의로 묶인다면 더욱 난감한 일. 현재적 삶과 결합하되 구원이라는 낡은 개념에선 벗어난, 동시대 천사를 떠올릴 순 없을까? 하물며 천사를 꼭 동종(인류)에 한정할 이유가 뭘까 등등 회의주의 터널을 통과하자, 내 심장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흰 개가 튀어나왔다. ‘흰 개’란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15년 이상 함께 산 두 마리 개를 부르는 애칭이다(이름은 따로 있음). 군 복무 때 내 수첩 날개에 삽입된 사진도 흰 개였고, 개들이 세상을 뜬 뒤 거실 벽면에 부착한 사진도 출력된 흰 개였고, 노트북 바탕화면도 흰 개의 생전 모습을 깔아뒀다(이쯤 되면 신앙인가!). 이 정도의 천사 요건을 늘어놓으면 대번 ‘마냥 곁에 있어 좋아서 천사면, 애인도 살붙이(아기)도 마찬가지로 천사네?’ 하고 되물을 게 분명하다. 누가 뭐랬나. ‘마찬가지다’가 내 답변이다.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천사(angel)의 어원이 신의 뜻을 알리는 ‘전령’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왔단 얘긴 들었다. 어원마저 고대적 관념주의가 투영되었으나 그건 수용하도록 하자. 그렇지만 나 같은 무신앙자가 유대교 천사 목록표에서 흰 개에 어울릴 배역의 천사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보니 있더라. 치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천사 ‘라파엘’이다. 세간의 믿음과는 달리 인간을 향한 개의 이타성은 인간 본성을 역이용하는 개의 약삭빠른 계산이 만든 환상이라 한다. 이 때문에 동물행동학에선 개를 ‘사회적 기생동물’로 보고 인류에게 생물학적 순(純)부담을 안긴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펼친 과학자(스티븐 부디안스키)마저 “개의 두 눈을 들여다보노라면, ‘조건 없는 사랑’을 노래한 그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고백한다. 감정 교류와 치유 능력이 높다. 흰 개가 나를 어떻게 치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다. 마흔 나이의 나를 동심으로 퇴행시키는 동력인 점,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인 점에서 천사와 같다. 내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검은 개여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길고양이여도, 이모티콘으로 어설프게 조합한 포유동물의 이목구비여도, 애증이 교차하는 앙증맞은 애인이어도, 천사의 주문에 단단히 걸린 내 입은 동일한 탄성을 토해낸다. ‘흰 개다~!’ 지경이 이러니 흰 개는 나의 천사.
스코틀랜드 해적천사
- 연예중매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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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인호씨의 경험입니다.
 낡은 봉고를 빌려 강원도 여행을 갔는데, 결국 대관령 고개에서 낡은 차가 주저앉고 맙니다. 어두컴컴한 국도에 나가 플래시를 들고 신호를 보냈지만, 국도 위의 차량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지요. 몇 시간 뒤 트럭 한 대가 멈췄습니다. 그는 봉고 뚜껑을 열고 들춰보다가 고장이 크게 났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택시기사는 차 밑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보는 것 같더니 말합니다. “안 되겠소. 더 늦기 전에 이 차를 정비공장에 갖고 가서 고쳐야겠소. 내 차에 체인을 달고 이 차를 천천히 정비공장에 끌고 갖다놓고 다시 오겠소. 그동안 도로에 앉아 계시오. 그러면 내가 다녀와서 당신들의 목적지인 용평 스키장까지 데려다주겠소.” 택시기사는 말한 그대로 밤길을 오가며 일행을 실어주었습니다.
대관령에서 또 사고 난 차, 또 나타난 천사 이듬해 단풍철에 떠난 강원도 여행에서 또 대관령에서 차가 배탈이 나고 맙니다.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세차장이 있어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더니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던 그들은 사정을 듣고는 무서운 속도로 차를 고칩니다. 사례를 하려 했으나 이들은 마다합니다. 일행은 갖고 있던 김밥을 안깁니다. 덥석덥석 김밥을 들어 한입씩 베어문 그들은 말합니다. “그거 참 맛있네. 고맙소. 그럼 잘 가슈.” 소설가 최인호는 <최인호의 인연>(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에서 이런 경험을 펼쳐 보이며, 이들을 ‘천사’라고 칭합니다. “천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이웃들의 헐벗은 얼굴에, 우리에게 도움을 전해주는 고마운 이들의 손길에 천사는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경험은 보험회사가 긴급출동 서비스를 하기 전 ‘옛날’ 일이겠지요. 그렇다고 천사가 고릿적에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대관령에만 천사가 출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시민 K는 일본 여행 중 천사를 만났습니다. K가 시코쿠 산길을 걷는데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진즉에 나타났어야 할 숙소는 보이지 않고 산길에는 몇 시간 동안 사람 한 명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전화 로밍을 안 해갔는데 공중전화는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숙소로 가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11월 중순, ‘한뎃잠을 자야 하나’라고 낙심하며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지요. 그때 트럭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사이 트럭은 지나갔고, 트럭이 갔으리라 판단되는 곳(지도에는 절이 있다고 나왔습니다)을 향해 걸었습니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플래시를 꺼내서 걷는데, 아까 그 트럭이 나타났고 몸짓을 하기도 전에 옆에 멈춰섰습니다. 트럭기사는 휴대전화로 숙박업소에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숙박업소에서 걱정하고 있다. 그 집은 내가 잘 아니 데려다주겠다.” 일본어를 잘 못하는데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트럭기사는 말했습니다. “내일 그 절에 큰 행사가 있다. 행사에 쓸 물품 중 모자란 게 있어서 마저 가져다주러 간 것이다.” 숙소에 도착한 뒤 트럭기사는 짐칸에서 사과와 귤을 꺼내 K의 두 손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그는 “내일 그 절에서 우동을 대접하는 행사가 있으니 꼭 와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거슬러 걸어 올라간 절에서 그는 우동을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까까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승복을 입고 있었지요.
이웃의 얼굴을 한 천사들나이가 꽤 많은 칼럼니스트 K씨는 “그렇게 젊은 시절 인사불성으로 취해서 다녔는데 아무런 탈 없이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것이 다 천사들 덕분 아니겠는가”라는 말을 합니다. 가끔은 인사불성의 희미한 기억을 뚫고 천사가 또렷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취재원과 취재기자 사이였습니다. 술에 약한 취재기자 S는 술자리가 즐거워져 그만 인사불성으로 취했습니다. 취재원 D는 기자의 집을 물어 택시를 같이 탔습니다. 둘은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습니다. 여전히 S는 일어나지 못했고, D는 S를 업고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S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든 것일까요, S는 꽝 하고 이마를 계단 모서리에 찧고 말았습니다. 피가 솟기 시작했고, D는 S를 응급실에 데려갔습니다. 가까스로 S의 동생이 도착한 시간은 새벽 6시였습니다. 그때까지 D는 보호자 노릇을 하며 옆에 붙어 있어주었습니다. 우린 뜻밖의 순간, 누군가에게 천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또 다른 천사를 만나기도 합니다. D씨는 김광수경제연구소의 부소장 선대인씨입니다(S는 차마 밝힐 수 없습니다). 선대인씨가 들려주는 천사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소설가 최인호는 같은 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가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는 내 곁에 살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며 부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 나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일주일간 노숙자 생활을 체험한 뒤 쓴 ‘버려진 우리의 이웃 노숙자 24시’라는 기획물을 보도한 적이 있다. 1996년 말 입사해 사회부 사건기자로 일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초년병 기자 시절의 일이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지금의 처로부터 노숙자들의 실태를 자주 전해들으며 노숙 체험에 도전해볼까 고민하고 있었으나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당시 사건팀장이 기획회의 시간에 같은 의견을 내놓았고, 결국 ‘해야 할 운명인가’ 하는 생각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젊은 혈기에 자원했으나 취재의 기초도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나에게는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

“술 마시지 말고 건강을 유지하라”1998년 5월16일 오전 11시.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허름한 옷을 꺼내 입고 버스로 서울역에 도착했다. 때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서울역 건물 처마 아래와 서부역 통로 등 곳곳에선 대낮부터 노숙자들이 술에 절어들고 있었다. 비를 피해 모여든 탓인지 당시 서울역 1층 대합실은 족히 100명이 넘는 노숙자들로 붐볐다. 노숙자들 대부분은 바지와 잠바를 걸친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텁수룩한 수염, 헝클어진 머리, 설명하기 힘든 퀴퀴한 냄새들…. 서울역 1층 대합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낀 그 막막함과 불안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노숙자들은 언론에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 신분이 탄로 나지 않도록 계속 극도로 긴장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당시 만난 노숙자 정아무개씨는 천사가 아니었을까. 정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플라스틱제품 제조업체 사장이었다가 1997년 말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낸 뒤 한 달여 전에 서울역으로 나오게 된 분이었다. 그는 “어린이날 아이들을 데리고 에버랜드에 가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다”며 눈물 흘리는 평범한 대한민국 가장이었다. 취재 첫날 남대문 지하도 저녁 급식 현장에서 처음 만난 뒤 취재 마지막 날까지 함께 지낸 그는 나의 노숙자 생활 입문 스승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숙 생활 노하우를 성심성의껏 알려주었다. 급식은 언제 어디에서 타는지, ‘삥차’(지하철 무임승차)는 어떻게 하면 안 걸리는지, 노숙자들에게 적은 돈이나마 적선해주는 종교기관이 어디에 있는지, 노숙자 상담은 어떻게 받는지, 밤에 노숙하려면 라면 박스 등으로 어떻게 잠자리를 마련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당시 일하던 식당에서 쫓겨난 ‘알바’로 가장한 나를 그는 친삼촌처럼 다독여주었다. 그는 자신도 힘든 처지인데도 “빨리 힘내 이곳을 벗어나라” “힘들더라도 술 마시지 말고 건강을 잘 유지하라”는 등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취재 마지막 날 “취직이 돼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유를 대며 서울역을 떠날 때 그는 내게 호출번호를 가르쳐주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나는 붉어지는 눈시울을 감추느라 얼른 등을 돌려야 했다.
거짓말을 했기에 감사하단 말도 못하고정씨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마친 노숙자 체험기는 당시 <동아일보> 1면과 3면 등에 크게 보도돼 많은 화제를 불렀고, 한국기자협회로부터 ‘이달의 기자상’까지 받았다. 초년병 기자가 그토록 큰 기사를 쓸 수 있었던 데는 정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감사를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본의는 아니지만 그를 속이기까지 했다. 초년병 기자 시절 가장 큰 도전이었던 취재를 사정도 모른 채 진심 어린 마음으로 도와준 정씨가 당시 나에게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깊은 감사와 함께 사과의 뜻을 전하며 머리 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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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와 만난 추억 고백? 빼도 박도 못할 곤혹스러운 요구 아닌가. 매개어 천사로 ‘수태고지’ 주제를 재현한 고전주의 회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회임 소식을 전하는 익숙한 도상- 를 고작 떠올릴 만큼 내 성정에는 비현실적 대상에 관한 한 관대함도 낭만도 없다. “천사를 그려줄 테니, 내 앞에 천사부터 데려오라”고 일갈한 화가 쿠르베의 원리적 사실주의에 가깝다면 지나칠까.
보은의 심정과는 연결되지 않는 ‘날개’그럼에도 현대 미국인의 절반 넘는 인구가 수호천사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는다는 여론조사(2008년 <타임>) 앞에서 이들과 동시대 공기를 호흡해야 함을 풀어야 할 과제로 믿긴 한다. 비단 근본주의 개신교 국가에 한정된 문제 같진 않다. 기부 연예인에게 ‘선행 천사’란 애칭을 다는 항간의 분위기, 등짝에 인조 날개를 부착한 백색 원피스 차림 멤버들이 출연하는 소녀 아이돌 그룹 홍보물에 대중이 농락되는 한국 사정까지 고려하면.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 보듯, 어느덧 부담스러운 좌우대칭 날개(때로 백색 원피스 옵션) 달린 육감적 미소녀는 천사 이미지의 가시화된 클리셰가 되었고 그 권능도 지대하다. 절명의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경험마저 구급차를 불러준 이름 모를 행인, 병원까지 후송해준 구급대원, 지극정성 병간호한 친구, 격려의 안부를 건넨 지인을 향한 내 보은의 심정은 그들과 등 뒤로 인조 날개 부착한 클리셰를 도무지 연결짓지 못한다. 훼손된 천사 이미지를 보은의 상대에게 덧씌울 심사가 생길 턱이 없다. 더구나 종교 색채가 깔린 천사라는 구시대 개념과 피구원자라는 당대적 실존자 사이의 관계가 종속적인 시혜주의로 묶인다면 더욱 난감한 일. 현재적 삶과 결합하되 구원이라는 낡은 개념에선 벗어난, 동시대 천사를 떠올릴 순 없을까? 하물며 천사를 꼭 동종(인류)에 한정할 이유가 뭘까 등등 회의주의 터널을 통과하자, 내 심장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흰 개가 튀어나왔다. ‘흰 개’란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15년 이상 함께 산 두 마리 개를 부르는 애칭이다(이름은 따로 있음). 군 복무 때 내 수첩 날개에 삽입된 사진도 흰 개였고, 개들이 세상을 뜬 뒤 거실 벽면에 부착한 사진도 출력된 흰 개였고, 노트북 바탕화면도 흰 개의 생전 모습을 깔아뒀다(이쯤 되면 신앙인가!). 이 정도의 천사 요건을 늘어놓으면 대번 ‘마냥 곁에 있어 좋아서 천사면, 애인도 살붙이(아기)도 마찬가지로 천사네?’ 하고 되물을 게 분명하다. 누가 뭐랬나. ‘마찬가지다’가 내 답변이다.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천사(angel)의 어원이 신의 뜻을 알리는 ‘전령’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왔단 얘긴 들었다. 어원마저 고대적 관념주의가 투영되었으나 그건 수용하도록 하자. 그렇지만 나 같은 무신앙자가 유대교 천사 목록표에서 흰 개에 어울릴 배역의 천사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보니 있더라. 치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천사 ‘라파엘’이다. 세간의 믿음과는 달리 인간을 향한 개의 이타성은 인간 본성을 역이용하는 개의 약삭빠른 계산이 만든 환상이라 한다. 이 때문에 동물행동학에선 개를 ‘사회적 기생동물’로 보고 인류에게 생물학적 순(純)부담을 안긴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펼친 과학자(스티븐 부디안스키)마저 “개의 두 눈을 들여다보노라면, ‘조건 없는 사랑’을 노래한 그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고백한다. 감정 교류와 치유 능력이 높다. 흰 개가 나를 어떻게 치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다. 마흔 나이의 나를 동심으로 퇴행시키는 동력인 점,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인 점에서 천사와 같다. 내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검은 개여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길고양이여도, 이모티콘으로 어설프게 조합한 포유동물의 이목구비여도, 애증이 교차하는 앙증맞은 애인이어도, 천사의 주문에 단단히 걸린 내 입은 동일한 탄성을 토해낸다. ‘흰 개다~!’ 지경이 이러니 흰 개는 나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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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베푼 선행의 수혜자가 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천사 같았을까, 아니면 정말 천사였을까. 천사가 과학의 존재 증명 대상이 아니므로 굳이 따지지는 말자. 선행의 느닷없음, 곧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과 장소에서 기대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도의 도움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가 천사였다고 우겨도 상관없을 것이다. 나도 천사를 만났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천사임이 틀림없다. 2000년 여름이었다. 장애학생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과 영국에 갔다. 학생들에겐 선진국 현장 견학이었고, 내겐 취재였다.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굳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어 학생들과 어울려 지냈다. 영국 런던과 셰필드에서,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한 교실에서 함께 놀며 공부하는 통합교육 현장을 둘러봤고 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시설 등을 취재했다. 하루 두세 곳을 방문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1시간 넘으면 경찰에 알려라대학생들은 공식 일정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정이 들기도 했고 나이 어린 여학생이 많아 나름대로 보호자 노릇을 했던 터라 휴가를 내고 동행하기로 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스코틀랜드에 가볼 기회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숙소를 미리 구하지 못해 현지에서 부딪쳐보기로 했는데 에든버러에는 예정보다 몇 시간 늦은 밤에 도착했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수십 통 돌렸지만 여행 성수기라 빈방을 구할 수 없었다. 그사이 다른 승객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우리 일행만 남게 됐다. 역내 체류가 가능했다면 다른 여행객도 몇몇은 보였을 텐데 우리는 졸지에 낯선 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 모를 처지였다. 천사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우리는 천사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바이킹 모자만 씌우면 바로 바다에 나가도 될 듯한, 얼굴에 붉은빛이 도는 거구의 사내가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긴장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런던에서 듣던 영어와는 다른, 투박하고 거친 말투였다. 우리는 경계했다. 잘 봐줘야 역 근처 싸구려 숙소의 삐끼였다. 그는 숙소를 찾는 중이라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일행의 중론은 그 사람을 따라나서느니 아침까지 버티겠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나와 한 남학생이 해적과 동행하기로 했다. 남은 일행에겐 1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에든버러가 관광명소라고 해도 도시 전체가 거의 잠든 시각이었다. 이 해적 친구는 어리바리한 아시아인들의 숙소를 찾아주려고 자기 차로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1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한 유스호스텔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에야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는 기차역에서 유스호스텔까지 두 차례 오가며 나머지 일행을 실어날랐다.
연락처 대신 남긴 말일행 모두가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에 사례를 하고 싶어했다. 아마 첫인상을 보고 오해한 게 미안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천사는 거절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만나면 도와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휭 가버렸다. 그가 그 늦은 시각,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헤어진 순간까지 한 일은 우리를 도와준 것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선행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것 말고는 바란 게 없다. 그 흔한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변장술에 능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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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와 만난 추억 고백? 빼도 박도 못할 곤혹스러운 요구 아닌가. 매개어 천사로 ‘수태고지’ 주제를 재현한 고전주의 회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회임 소식을 전하는 익숙한 도상- 를 고작 떠올릴 만큼 내 성정에는 비현실적 대상에 관한 한 관대함도 낭만도 없다. “천사를 그려줄 테니, 내 앞에 천사부터 데려오라”고 일갈한 화가 쿠르베의 원리적 사실주의에 가깝다면 지나칠까.
보은의 심정과는 연결되지 않는 ‘날개’그럼에도 현대 미국인의 절반 넘는 인구가 수호천사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는다는 여론조사(2008년 <타임>) 앞에서 이들과 동시대 공기를 호흡해야 함을 풀어야 할 과제로 믿긴 한다. 비단 근본주의 개신교 국가에 한정된 문제 같진 않다. 기부 연예인에게 ‘선행 천사’란 애칭을 다는 항간의 분위기, 등짝에 인조 날개를 부착한 백색 원피스 차림 멤버들이 출연하는 소녀 아이돌 그룹 홍보물에 대중이 농락되는 한국 사정까지 고려하면.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 보듯, 어느덧 부담스러운 좌우대칭 날개(때로 백색 원피스 옵션) 달린 육감적 미소녀는 천사 이미지의 가시화된 클리셰가 되었고 그 권능도 지대하다. 절명의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경험마저 구급차를 불러준 이름 모를 행인, 병원까지 후송해준 구급대원, 지극정성 병간호한 친구, 격려의 안부를 건넨 지인을 향한 내 보은의 심정은 그들과 등 뒤로 인조 날개 부착한 클리셰를 도무지 연결짓지 못한다. 훼손된 천사 이미지를 보은의 상대에게 덧씌울 심사가 생길 턱이 없다. 더구나 종교 색채가 깔린 천사라는 구시대 개념과 피구원자라는 당대적 실존자 사이의 관계가 종속적인 시혜주의로 묶인다면 더욱 난감한 일. 현재적 삶과 결합하되 구원이라는 낡은 개념에선 벗어난, 동시대 천사를 떠올릴 순 없을까? 하물며 천사를 꼭 동종(인류)에 한정할 이유가 뭘까 등등 회의주의 터널을 통과하자, 내 심장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흰 개가 튀어나왔다. ‘흰 개’란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15년 이상 함께 산 두 마리 개를 부르는 애칭이다(이름은 따로 있음). 군 복무 때 내 수첩 날개에 삽입된 사진도 흰 개였고, 개들이 세상을 뜬 뒤 거실 벽면에 부착한 사진도 출력된 흰 개였고, 노트북 바탕화면도 흰 개의 생전 모습을 깔아뒀다(이쯤 되면 신앙인가!). 이 정도의 천사 요건을 늘어놓으면 대번 ‘마냥 곁에 있어 좋아서 천사면, 애인도 살붙이(아기)도 마찬가지로 천사네?’ 하고 되물을 게 분명하다. 누가 뭐랬나. ‘마찬가지다’가 내 답변이다.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천사(angel)의 어원이 신의 뜻을 알리는 ‘전령’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왔단 얘긴 들었다. 어원마저 고대적 관념주의가 투영되었으나 그건 수용하도록 하자. 그렇지만 나 같은 무신앙자가 유대교 천사 목록표에서 흰 개에 어울릴 배역의 천사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보니 있더라. 치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천사 ‘라파엘’이다. 세간의 믿음과는 달리 인간을 향한 개의 이타성은 인간 본성을 역이용하는 개의 약삭빠른 계산이 만든 환상이라 한다. 이 때문에 동물행동학에선 개를 ‘사회적 기생동물’로 보고 인류에게 생물학적 순(純)부담을 안긴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펼친 과학자(스티븐 부디안스키)마저 “개의 두 눈을 들여다보노라면, ‘조건 없는 사랑’을 노래한 그 어떤 시나 소설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고백한다. 감정 교류와 치유 능력이 높다. 흰 개가 나를 어떻게 치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다. 마흔 나이의 나를 동심으로 퇴행시키는 동력인 점, ‘내 맘속에 영원히’ 같은 클리셰의 대상인 점에서 천사와 같다. 내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검은 개여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길고양이여도, 이모티콘으로 어설프게 조합한 포유동물의 이목구비여도, 애증이 교차하는 앙증맞은 애인이어도, 천사의 주문에 단단히 걸린 내 입은 동일한 탄성을 토해낸다. ‘흰 개다~!’ 지경이 이러니 흰 개는 나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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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베푼 선행의 수혜자가 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천사 같았을까, 아니면 정말 천사였을까. 천사가 과학의 존재 증명 대상이 아니므로 굳이 따지지는 말자. 선행의 느닷없음, 곧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과 장소에서 기대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도의 도움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가 천사였다고 우겨도 상관없을 것이다. 나도 천사를 만났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천사임이 틀림없다. 2000년 여름이었다. 장애학생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과 영국에 갔다. 학생들에겐 선진국 현장 견학이었고, 내겐 취재였다.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며 굳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어 학생들과 어울려 지냈다. 영국 런던과 셰필드에서,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한 교실에서 함께 놀며 공부하는 통합교육 현장을 둘러봤고 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시설 등을 취재했다. 하루 두세 곳을 방문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1시간 넘으면 경찰에 알려라대학생들은 공식 일정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정이 들기도 했고 나이 어린 여학생이 많아 나름대로 보호자 노릇을 했던 터라 휴가를 내고 동행하기로 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스코틀랜드에 가볼 기회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숙소를 미리 구하지 못해 현지에서 부딪쳐보기로 했는데 에든버러에는 예정보다 몇 시간 늦은 밤에 도착했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수십 통 돌렸지만 여행 성수기라 빈방을 구할 수 없었다. 그사이 다른 승객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우리 일행만 남게 됐다. 역내 체류가 가능했다면 다른 여행객도 몇몇은 보였을 텐데 우리는 졸지에 낯선 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 모를 처지였다. 천사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우리는 천사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바이킹 모자만 씌우면 바로 바다에 나가도 될 듯한, 얼굴에 붉은빛이 도는 거구의 사내가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긴장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런던에서 듣던 영어와는 다른, 투박하고 거친 말투였다. 우리는 경계했다. 잘 봐줘야 역 근처 싸구려 숙소의 삐끼였다. 그는 숙소를 찾는 중이라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일행의 중론은 그 사람을 따라나서느니 아침까지 버티겠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나와 한 남학생이 해적과 동행하기로 했다. 남은 일행에겐 1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에든버러가 관광명소라고 해도 도시 전체가 거의 잠든 시각이었다. 이 해적 친구는 어리바리한 아시아인들의 숙소를 찾아주려고 자기 차로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1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한 유스호스텔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에야 우리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는 기차역에서 유스호스텔까지 두 차례 오가며 나머지 일행을 실어날랐다.
연락처 대신 남긴 말일행 모두가 생각하지 못했던 도움에 사례를 하고 싶어했다. 아마 첫인상을 보고 오해한 게 미안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천사는 거절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만나면 도와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휭 가버렸다. 그가 그 늦은 시각,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헤어진 순간까지 한 일은 우리를 도와준 것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선행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것 말고는 바란 게 없다. 그 흔한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천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변장술에 능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 1995년 소나기가 간간이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나는 청와대 가는 길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기습시위를 벌이려 모인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대학생 300여 명과 함께였다.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비호하는 김영삼 정부에 대한 항의시위였다. 1995년 7월18일 5·18 관련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지검 공안1부는 전·노 일당을 포함해, 피고소·고발인 58명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를 더 분노하게 한 것은 검찰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국가는 한순간에 봉건시대의 왕권국가가 되었다.

“투쟁 현장에서 만나서 갚겠다”시위가 벌어지자 곧 전경들이 학생들을 둘러쌌고 ‘닭장차’ 여러 대가 오더니 학생들을 모두 강제 연행했다. 닭장차에서 내려서 보니 종로경찰서였다. 유치장으로 이동하는데 경찰들이 여학생들에게 폭행에 가까운 손찌검을 하는 것에 맹렬하게 항의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우리가 격렬하게 항의해서였을까, 아니면 인원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유치장 비슷한 곳에 우리를 격리해 감금해놓은 경찰들이 자정이 다 돼서 풀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경미한 도로교통법 위반 시위에 대해서는 입건하지 않고 조기에 훈방하는 일이 많았다(도리어 현 정권은 48시간 가둬놓거나 사사건건 입건하는 등 과잉 대응을 일삼고 있다). 일단 풀어준다니 기뻤다. 그 전에 몇 번 연행돼서 즉심 판결을 받아본 적이 있어서, 판결일까지 며칠 갇혀 있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답답한지 알았다. 그런데 당시 경찰서에서 풀려나고 보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옆에 함께 잡혀온 여학생 후배도 돈이 없었다. 시간은 새벽 1시를 향해 가고, 버스는 끊기고, 잠자리가 있는 학교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고…. 난감했다. 그때 ‘마음 좋게’ 생긴 함께 나온 대학생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기약할 수 있는 거라곤 “‘투쟁 현장’에서 다시 만나서 갚겠노라”였다. ‘마음씨 좋게 생긴’ 대학생은 역시나 마음이 좋아서 한마디 덧붙이지 않고 1만원인지 2만원인지를 빌려주었다. 15년 전이니 지금 돈으로는 3만~5만원은 되겠다. 이름이나 연락처는 모른다. 다만 키가 크고 인상이 좋고 나보다는 후배인 92∼93학번이고, 건국대 학생이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덕분에 후배랑은 사랑이 깊어지고그 건대생이 고마운 이유는 또 있었다. 함께 풀려난 후배는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 후배였다. 그 후배 앞에서 위기 상황을 침착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학 시절 연애를 한 번도 못해본 나에겐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또 인연이 된다는 것이 이런 건지 우리 학교에서는 나와 그 후배 2명만 잡혀와서 이때다 싶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 출출하다며 남대문시장에서 내렸다. 시장의 정감 넘치는 활력은 우리 만남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후배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그런데 이 천사님도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_-;). 안타깝게도 이후로 나에게 돈을 빌려준 그분을 ‘투쟁 현장’에서 볼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혹시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건대생이 있으면 꼭 연락주시라. 돈도 몇 배로 갚고, 밥도 술도 사고 싶다.

*‘권선1동 담당 공무원을 찾습니다’ 글의 공무원을 아시는 분은 연락주십시오. 최수범씨가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는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20% 할인해드립니다. 정기구독을 신청하실 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울역의 조 교수 (제25회 근로자문화예술제 동상 수상 꽁트) |
황태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