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세종의 공부법’을 요약하면 ‘질문하고 토론하라’입니다. 1만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세종실록’에서 임금의 표현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는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입니다. 질문을 던져 상대방의 생각을 이끌어 내고 토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방식입니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도, 집현전 학사들과 격의 없는 논쟁을 벌일 때도 세종은 가장 먼저 신하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경연(經筵), 세종식 회의 방법
-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https://www.ktv.go.kr/program/home/PG1110786D/content/452378
기사입력 2013-10-09 오전 9:26:06
|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
박현모·한국형리더십개발원 대표
입력 : 2013.12.21 03:04
출처: http://weekly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20/2013122001977.html
출처 : 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89124
입력 : 2016.03.29 03:20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이를 실용화하는 단계에서 집현전의 부제학인 최만리 등은 6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막는 상소를 올렸다. "집현전 학사가 한글에 반대하다니…." 세종은 대로했다. 최만리를 즉각 하옥하고 임금이 친국을 했다. 친국이라고 해도 고문이 아니라 토론 또는 설득의 자리였다. 최만리가 굽히지 않자 세종은 그를 풀어줬다. 그럼에도 최만리는 사직하고 낙향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최만리의 무례함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진언하자 세종은 "노랫소리가 듣기 싫다 하여 새를 죽이려 함은 옳지 않다"며 그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최만리는 끝내 향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500년 전의 얘기다.
** 천일야사 2 회 170104 "청백리의 상징 황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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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 | 게재 일자 : 2018년 01월 17일(水) |
| 서둘러 제안하고 금방 유명무실해지는 관리들의 가벼움 ‘경계’ |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11701032630000001
**[역사저널 그날] 112회 - 장영실 2부작 제1편 태종, 노비 장영실을 발탁하다 2018/2/21
**[역사저널 그날] 113회 - 장영실 2부작 제2편 세종, 장영실을 버리다 2018/2/28
** 대마도 정벌? 완전 뻥 ‘환각의 정신승리’ [김용삼의 역사추적]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세종 치세에 여진·일본·아랍인 귀화 행렬… 明도 조선을 경계했다
‘천하 인재 모은 강한 나라’ 꿈꾼 세종 “귀화인도 우리나라 백성”
경제·안보 이유 “쇄국” 주장 물리쳐… 倭·여진·남만 등서 귀화
明, 세종 이민족 포용 정책에 “여진족 조선에 기울면 큰일” 경계
출처: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9/07/D4XWCF3XSBCLFGN5IOAJRC6VFM/
** [17회]여진족은 어떻게 청나라를 세웠을까?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 [여진 1부] 고려는 부모의 나라라고 했던 여진? - 당신이 몰랐던 여진의 기원부터 고려와 여진의 관계까지! (feat. 여진의 신라 기원설)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아버지 이방원이 함께 사냥을 가자고 조를 정도로 운동을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기를 좋아하고 운동을 싫어해서 비만해진 왕’ 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칼로 세워진 나라 조선에서 완벽주의자인 세종이 단순히 ‘하기 싫어서’ 무예를 멀리했을까? 합리적인 의구심으로부터 시작된 추리는 그가 운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까지 밝혀낸다.
태종 “아비가 아들에게 전위하는 건 천하고금의 떳떳한 일”
승지들에겐 “18년간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충분하다” 밝혀
드라마 ‘태종 이방원’ 속 전위하며 울부짖는 모습 사실과 달라
과연 그랬을까? ‘태종실록’ 18년 8월 8일 기사를 보면 ‘큰비가 왔다’고 되어 있다. 비 쏟아지는 사정전 뜰 앞 장면은 제대로 고증된 것이다. 이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정오 무렵 태종은 의관을 정제하고 보평전(報平殿·훗날 사정전)으로 들어갔다. “옥새 찍을 일이 있으니 속히 대보(大寶·임금 도장)를 바치라”는 왕명을 전해 들은 승지들은 보평전 문 앞으로 달려와 취소를 요청했다. 태종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을 보내 “세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대신들이 보평문 앞으로 몰려와 하늘을 부르며 목 놓아 울면서[呼天痛哭·호천통곡] 비상한 거조(擧措)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세종, 유능한 인재 가려 쓰고 엄정한 신상필벌로 공직 기강 세워
그물의 벼리[綱]를 들어올리면 그물눈[目] 펴지는 모습에 비유
인기영합 유혹서 벗어나 인재들이 신명나게 일하도록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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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munhwa.com/article/11574270[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신하들과 아들·딸 도움 받았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