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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62호 | 20120318 입력
신민부가 성립되면서 압록강 대안의 참의부, 그 북쪽의 정의부와 북만주를 관할하는 신민부의 삼부(三府)가 정립하는 삼부체제가 완성되었다. 삼부는 삼권분립의 정치체제와 독립군을 가지고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했다. 삼부는 만주 한인들에게 사실상의 정부 같은 조직이었다.
백범영-독립군 도강작전, 143×75㎝,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만주의 삼부(三府)
⑧북만주의 통합 바람

봉오동·청산리 승첩 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겪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아일보 1921년 11월 15일자는 ‘배일(排日) 거두(巨頭) 서일(徐一) 피살설’이란 제목 아래 “군정서 군무총재 서일은… 부하 삼사십 명을 거느리고 웅거하여 있다가 동월 8일에 돌연히 마적과 충돌해 밀림지대에서 장렬하게 싸움을 하다가 마적의 탄환에 맞아 그만 사망하였다는 말이 있다(군사령부 발표)”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자세한 진상은 ‘독립신문’ 대한민국 3년(1921) 12월 6일자가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독립신문’은 ‘고 서일 선생을 조(弔)함’이라는 애도문을 1면 머리기사로 실으면서 3면에 ‘독립군 총재 서일씨 자장(自<6215>:자살)’이란 제목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도했다.

서일은 1921년 9월 28일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무장 군사 12명을 대동하고 밀산(密山)현 흥개호(興凱湖) 부근 한 촌가에 머물러 있던 중 붉은 옷을 입은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을을 포위한 수백 명의 마적 떼가 주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서일의 호위병력이 응전했는데 수적으로 절대 열세여서 12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서일은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서일은 1916년 자결한 대종교 1대 교주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유서(遺書) 중에서 “…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라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서일의 죽음은 북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큰 타격이었다. 신단민사(神檀民史)의 저자이기도 했던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1923년 11월 영안(寧安)현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병사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북만주의 혈성단(血誠團), 북로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대진단(大震團) 등의 독립운동세력들은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것과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두만강을 자주 넘나들었던 역전의 용사들이자 봉오동·청산리 승첩의 주역들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기 때문에 북만주로 파고들던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1920년 3월 하얼빈에 ‘동지철도 부속지(東支鐵道附屬地) 공산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사회주의 전파에 나서자 목릉현 소추풍(小秋風) 일대에서 소비에트 반대 활동을 전개하고, 1924년에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적화방지단(赤化防止團)’까지 만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남만주에서 참의부와 정의부가 잇따라 결성되자 북만주에도 단체 통합의 바람이 불어서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군정부(軍政府) 설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3월 10일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가 만들어진다. 신민부는 김혁(金爀)·조성환(曺成煥)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金佐鎭)·남성극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의 두 군사세력이 주축이 되고 중동선(中東線)교육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민선대표들과 국내 10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신민부는 “아등(我等)은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이래(爾來:가까운) 단체의 의사에 기하여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 하에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된 것을 자(玆)에 선포한다”라고 시작해 “래(來)하라 단결. 기(起)하라 분투”로 끝나는 선포문을 발표했다.

신민부도 행정부인 중앙집행위원회와 의회인 참의원, 사법부인 검사원을 두어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대종교 계통의 김혁이었고, 민사부 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외교부 위원장 조성환, 교육부 위원장 허빈(許斌)이었다. 참의원 의장은 의병장 출신의 이범윤(李範允)이었는데 이미 만 62세의 노령이었다. 검사원 원장에는 대종교 계통의 현천묵(玄天默)이 선임되어 대체로 대종교 계통의 우위가 관철되었다.

신민부도 재만 한인들의 생활 향상과 군사력 증강,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민부는 결의안에서 “군사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屯田制)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해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서적을 편찬할 것” 등을 규정했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열고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양성했는데 교장 김혁, 부교장 김좌진, 교관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오상세·백종렬 등이었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해 전시가 도래하면 금방 대규모 병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군구제는 신민부 관할 내의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 장정들의 군적(軍籍)을 작성해서 독립군의 기본대오를 편성한 것이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가 지휘하면 금방 정규군으로 바뀔 수 있었다. 둔전제는 일종의 병농일치제도였다. 신민회는 결의문에서 교육에 관해 “소학교 졸업연한은 6개년, 중학교 졸업연한은 4개년으로 함. 단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필요에 따라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치함. 교육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민부는 주하(珠河)·목릉(穆陵)·밀산(密山)·요하(饒河)·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개 이상의 학교를 건설하는데 이때 신민부에서 파견되어 안도현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에서 “나는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송화강 상류 언덕 위에 학생들을 집결시켜 놓고 마주 보이는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당국이 신민부 탄압에 나섰다. 그럼에도 독립군은 중국군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어려웠다. 중국군 중에는 1920년대 초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이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알려주면서 독립군의 이동을 권한 것처럼 독립군에 우호적인 인물도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와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삼시협약)을 맺고 독립운동가를 조선총독부에 넘겨준 이후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졌다. 장작림 군벌 경찰은 1925년 10월 영고탑(寧古塔)에서 회의 중이던 신민부 별동대를 급습해 박순보(朴順甫)·신갑수(申甲洙) 등 8명을 연행했다. 이듬해 4월 여섯 명은 석방되었지만 위 두 사람은 그 사이 옥사할 정도로 혹독한 취급을 당했다. 1928년 1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 전에 신민부는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중국국민당의 장개석 정부와 연합전선을 결성하려 했다. 최형우(崔衡宇)의 해외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 따르면 신민부는 중국국민당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貢沛誠)과 연결해 ‘만주 군벌타도가 목적인 국민당 북벌정책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계획은 중국국민당과 손잡고 신민부 군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북혁명군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국민당에서 무기와 군자금 400만원을 제공하면 중앙군 제8군으로 명칭을 바꾼 신민부가 목단강(牧丹江)과 하얼빈을 점명하고 봉천(奉天:장춘)으로 진군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한다는 계획이었다.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1956)는 1927년 2월 중국 구국군 제13군 사령관 양수일(楊守一)이 김좌진을 백두산 산록의 군구 사령부로 초청해 한·중연합부대 결성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그해 8월에도 왕청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한·중연합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국민당 측에서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 기병 3000과 보병 2만을 지닌 악유준(岳維峻), 비슷한 규모의 군사력을 지닌 사가헌(史可軒)이 참석하고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외 2명이 참석해서 신민부를 중앙군 제8로군으로 바꾸고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작림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을 체포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한·중 연합부대가 계획대로 결성되었다면 독립운동사 자체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5월 15일자는 김좌진이 1925년 3월 신민부 특공대원 강(姜)모 등에게 권총과 폭탄을 주어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해림(海林)의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처단하는 등 신민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북만의 15~6개 현, 40만~50만 명의 한인사회를 관장했던 신민부는 이후 민정파와 군정파로 갈라지는 분열을 겪으면서 삼부 통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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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731'機 탄 아베 총리

김광일 논설위원

 

입력 : 2013.05.14 23:19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에 일제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만주국 황궁이 있다. 장쩌민 중국 주석은 거기에 비석을 세우고 '물망 구일팔(勿忘九一八)'이라고 썼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시작된 1931년 9월 18일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 교외에는 일본 관동군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 잔해가 있다. 중국은 '침화일군(侵華日軍) 제731부대 죄증(罪證) 진열관(陳列館)'이라고 써붙였다. 일본군의 죄를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라는 펼침막도 걸었다. 지난날을 잊지 말고 후세 교훈으로 삼자는 뜻이다.

▶731부대에선 1933년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많게는 하루 스무 명이 생체실험으로 죽어 나갔다. 2009년 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가 펴낸 '731부대 생체실험 증거 자료집'에는 아래턱이 떨릴 만큼 참담한 실상이 담겨 있다. 일제는 산 사람에게 서른 가지 넘는 생화학 실험을 했다. 조선·중국·몽골·러시아인이 3000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


	만물상 일러스트

▶일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못지않은 잔혹상을 숨기려고 부대 건물을 부쉈다. 요행히 살아남은 생체실험 대상자 400명도 화학 가스로 살해했다. 시신을 분쇄기에 넣었고 일부는 태워서 묻었다. 세균전 자료와 실험 도구도 폭파했다. 부대 건물은 보일러실 굴뚝쯤만 남았다. 731부대는 세균 640㎏을 생산했다가 처리하지 못해 하얼빈 인근에 몇 년 동안 페스트가 돌았다.

▶아베 일본 총리가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의 항공자위대를 방문했다. 그는 '731'이라고 쓰인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우선 미국 외교가(街)가 충격을 받았다. 워싱턴 정치·외교 정보지 '넬슨 리포트'는 "독일 총리가 '재미로' 나치 친위대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것이나 같다"고 했다. 어떤 미국 교수는 "모든 사람의 눈을 불타는 꼬챙이로 찔러버리는 짓"이라고 했다.

▶아베 총리가 '731'기를 고른 것은 우연일까 계산된 행동일까. 훈련기는 자동차 번호처럼 고유 식별 번호를 붙인다. 그곳 비행단에는 훈련기가 여덟 대 있다. 모두 세 자리 숫자 번호를 달았고 '731'도 그중 하나다. 아베 총리는 지난 5일 도쿄돔 행사 때 등번호 '96'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나와 논란을 불렀다. 평화헌법을 고치기 위해 개헌 절차를 담은 헌법 96조를 손보자는 평소 주장을 떠올리게 했다. 아베 총리와 항공자위대가 역사적 내력을 알고도 731을 골랐다면 남의 상처를 후벼 파겠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731부대는 살아있다 I 미완의 심판

chosun.com

日 731부대, 민간인 지역서도 세균 실험

양승식 기자 양지호 기자 입력 : 2013.10.30 03:54

[서울대 서이종 교수, 극비문서 분석]

지린성 農安에 페스트 벼룩 살포, 2500명 사망
日731부대 간부의 논문·문서 분석 통해 입증
731부대 민간지역 생체실험 세계 최초로 규명한 연구… 日실험결과 바탕으로 세균전


	일본군 생물학전 부대인‘731부대’가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던 각종 해부용 기구와 소화 13년이라 새겨진 방독면, 당시 부대원들이 착용했던 완장과 신분증.
일본군 생물학전 부대인‘731부대’가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던 각종 해부용 기구와 소화 13년이라 새겨진 방독면, 당시 부대원들이 착용했던 완장과 신분증.






















일본군 생물학전 부대인 '731부대'가 세균전에 대비해 1940년대 만주 일반인 거주지역에서도 광범위한 세균 살포 실험을 한 사실이 서울대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중국과 일부 일본 소장파 학자들이 당시 페스트균이 중국 전역에 퍼진 현상을 두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세균 살포 실험이 있었다"는 주장을 펴왔지만 진술에만 의지한 주장이어서 그동안 학계에서 격렬한 진실 논쟁이 벌어져 왔다.

이번 발표는 문서적 근거를 바탕으로 731부대가 민간 지역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만행을 규명한 세계 최초의 연구라고 서울대는 밝혔다.

29일 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가 중국 하얼빈 731부대 연구소의 극비 문서를 정밀 분석해 발표한 ‘일본관동군 제731부대의 생체실험 대상자 동원 과정과 생명윤리’에 따르면, 731부대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눙안(農安)현의 주민 2만여명을 대상으로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을 1만 마리 살포했다.

그 결과 3주 후 8명, 100여일 뒤 60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발생한 뒤 62㎞ 떨어진 당시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지금의 창춘)에서도 28명의 감염자가 나와 26명이 사망했고, 1000일이 경과한 뒤 인근 첸궈치(前郭旗)와 정자툰(鄭家屯) 지역에서도 각각 887명과 104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같은 결과는 731부대 사령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측근으로 알려진 가네코 준이치(金子順一) 소령의 논문 6편과 731부대 원자료, 기타 여러 사료의 심층분석을 통해 얻어졌다. 가네코 소령은 731부대 내부의 세균실험 작전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참조해 세균실험 효과에 대한 논문을 작성한 인물이다. 그는 생활조건에 따른 감염률, 페스트균의 감염력 등을 고려한 ‘도달률’을 비교해 눙안 지역 세균 살포 작전을 분석하며, 논문에 ‘세부적 사항은 (731부대의) 각 작전 상보를 상세하게 참조하라’고 명시했다.


	731부대 페스트 세균무기의 현장 실험과 효과 분석표

이와 같은 민간 마을 대상 세균전 전초 실험을 통해 731부대는 1940~42년 중국 본토에 대한 세균전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고 서 교수는 설명했다. 학계는 그동안 가네코 소령의 논문을 바탕으로 중국 저장성(浙江省)·장시성(江西省) 등에서 비행기를 통해 살포된 페스트균 폭탄으로 2만5000명이 넘는 감염자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고, 눙안 사건의 경우도 ‘실험’이 아닌 세균전으로 봐왔다. 서 교수 등 연구진은 “가네코 소령의 극비문서 분석을 통해 731부대가 눙안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며 세균전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며 “저장성과 장시성의 세균전도 대량 세균 살포전에 대비한 생체실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일본군이 전쟁포로가 아닌 반(反)체제범과 생활범 등도 ‘특수이송’이라는 명목으로 731부대에 보내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은 구체적 정황도 드러났다. 서 교수는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중국인·한국인을 대상으로 ‘첩자’ 혐의를 뒤집어씌운 뒤 그 중 적어도 3분의 1을 재판도 없이 731부대로 특수이송해 살해했다”고 했다.

독립기념관 조범래 학예실장은 “민간인을 상대로 화학무기 실험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반(反)인륜적·반도덕적 행위”라며 “그간 관련 분야 연구가 부족했는데, 충격적 사실이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

중앙SUNDAY

극한 치닫는 계급투쟁, 무덤서 끌려나온 류원차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7-

20여년 가까이 ‘수조원’은 중공의 교육기지였다. 문혁 시절인 1974년, 수조원을 참관하는 상하이 민병들. [사진 김명호]
20여년 가까이 ‘수조원’은 중공의 교육기지였다. 문혁 시절인 1974년, 수조원을 참관하는 상하이 민병들. [사진 김명호]
류원차이와 류원후이는 쌍둥이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류원차이(그림)는 제대로 된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류원차이와 류원후이는 쌍둥이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류원차이(그림)는 제대로 된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대약진운동 시절인 1958년 겨울, 쓰촨(四川)성 다이(大邑)현 안런(安仁)진에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엄동설한에 삽과 곡갱이를 든 청년들이 거대한 호화 분묘를 파헤쳤다. 시신을 강가에 패대기 치고 불살랐다. 폭죽 소리와 환호성이 요란했다.

사망 9년 후, 무덤에서 끌려 나온 류원차이(劉文彩·유문채)는 일세를 풍미했던 대지주이며 거상이었다. 현지 정부는 류원차이의 옛집을 “지주장원진열관(地主莊園陳列館)”으로 탈바꿈 시켰다. 계급투쟁의 열기가 극에 달했던 시절, 반면교사감으로는 딱이었다. 선전과 교육 효과도 노렸다. 지역 선전부에 지시했다. “유원차이의 진면목이 어땠는지는 알 필요도 없다. 악덕 지주의 표본으로 만들어라.”

선전의 귀재들이 창작력을 발휘했다. 거꾸로 매달린 채 두들겨 맞는 농민과 부녀자 강간, 산 사람 매장, 유아 살해 등 잔혹한 광경을 밀랍으로 만들어 진열관에 전시했다. 솜씨가 어찌나 뛰어났던지 관람객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악질지주 류원차이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지하실에는 붉은 물을 채운 감옥도 만들었다. 인형이긴 했지만, 핏물 가득한 창살 안에서 절규하는 농민과 살벌한 고문 도구를 본 관람객들은 흐느꼈다. 온종일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진열관은 상급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하루아침에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계급투쟁 교육기지’로 둔갑했다. 머리가 묘하게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밀랍 인형은 생동감이 떨어진다. 우리 중국인들은 진흙을 잘 다룬다. 악덕 지주의 조세(租稅)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참상을 니소(泥塑·흙인형)로 만들자”는 건의가 줄을 이었다. 성 정부는 탁견이라며 쾌재를 불렀다. 1965년 6월, 쓰촨미술학원 조소과 교수를 중심으로 ‘수조원(收租院)’ 창작조를 구성했다.

성 선전부와 문화국은 현장으로 떠나는 창작조에게 단단히 일렀다. “지주계급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이 창작의 최종 목표임을 명심해라. 수조원을 모든 착취계급은 물론, 구 사회와 연결시켜라. 수조원의 주인공 류원차이를 수천 년 간 내려오는 지주계급의 대표로 만들어라. 너무 터무니없어도 안 된다. 류원차이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집안에 불당 차려놓고 잠도 부처님 앞에서만 잤다. 한 손에 염주 들고 장부 뒤적거리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농민들이 반항하면 움찔하는 모습도 빼놓지 마라. 겉은 이리와 호랑이 같지만, 내심은 얼마나 허약한 지를 잘 표현해야 한다.”

쓰촨미술학원은 베이징에서 거행된 조소 전람회에서 이목을 집중받은 적이 있는 명문이었다. 정치적 임무였지만, 교수와 학생들의 출발점은 예술 창작이었다. 조소계에 혁명을 기대했다. 농민들 중에서 모델을 찾고 참여를 독려했다. 물 감옥을 경험했다는 노파의 경험담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순진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노파가 선전부원이 일러준 대로 주절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창작조는 방문과 관찰을 거쳐 100여명에 이르는 피착취자의 형상 재현에 성공했다. 작품이 완성되기 까지 4개월이 걸렸다.

류원차이의 권력은 동생 류원후이에게서 나왔다. 1939년 시캉(西康)성 주석 시절의 류원후이 부부. [사진 김명호]
류원차이의 권력은 동생 류원후이에게서 나왔다. 1939년 시캉(西康)성 주석 시절의 류원후이 부부. [사진 김명호]

같은 해 10월 1일 국경절, 류원차이의 옛집에서 수조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3일간 2만여 명이 참관했다. 한결같이 “니소 예술의 극치”라며 찬사를 보냈다. 둘째 날 깔끔한 새 옷으로 단장한 할머니 여섯 명이 나타났다. 그중 한 할머니가 들고 있던 대나무 지팡이를 치켜들고 유원차이의 머슴으로 보이는 흙 인형 앞으로 달려갔다. 당장 내려칠 기세였다. 창작에 참여했던 학생이 황급히 제지했다. “사람이 아닙니다. 흙 인형입니다.” 아무리 말려도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3일간 걸어왔다. 흙 인형이건 뭐건 때려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 뭔가 수상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베이징과 톈진의 조각가들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수조원 제작자들과 합세해 복제품을 만들었다. 마오쩌둥 생일 이틀 전인 12월 24일, 베이징 미술관에 수조원이 등장했다. 3일 만에 2개월 치 입장권이 동나버렸다. 25일은 영하 18도였다. 눈까지 내렸지만 표 구하려는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미술관 주변에 계엄을 선포하고 국민당 전범들을 참관시켰다. 참관을 마친 전범들은 좌담회를 열었다. 힐끔힐끔 눈치 보며 지난날 자신들의 죄과를 반성했다, 개중에는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찬양이 쏟아져 나왔다. 문혁 전야였다. 몇 개월 후, 문혁의 도화선이 될 중앙서기처 서기 캉성(康生·강생)의 평이 압권이었다. “보면 볼수록 뛰어난 예술품이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도 이보다 뛰어난 작품은 없다.”

후에 쓰촨성에 편입된 시캉(西康)성 전 주석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는 류원차이의 친동생이었다.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입도 벙긋 못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불평을 늘어놨다. “형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훌륭한 교육자였다.”

사람은 말년이 중요하다. 류원차이의 말년을 알던 사람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계속>

 

김명호

중앙SUNDAY

조각품 ‘수조원’은 신중국 문화폭력의 결정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8-

‘수조원(收租院)’ 국부(局部). 구넝산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노인을 후려치는 마름의 모델이 됐다. [사진 김명호]
‘수조원(收租院)’ 국부(局部). 구넝산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노인을 후려치는 마름의 모델이 됐다. [사진 김명호]

중국 홍색예술의 경전인 ‘수조원(收租院)’은 신중국 문화폭력의 결정판이었다. 1950년대 말, 정치폭력이 난무했다. 예술계는 한술 더 떴다. 창작을 중요시하던 사람들이다 보니 뭐가 달라도 달랐다. 사실을 부풀리고, 없던 일 만들어내는 솜씨가 정치가들 뺨칠 정도였다. 수사기관 못지 않게 증언과 증거도 중요시했다.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 “없는 건 만들면 된다.”

공포를 동반한, 문화폭력이라는 괴상한 유령이 중국 하늘을 휘감았다. 수조원이 공개되자 류원차이(劉文彩·유문채)의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둘째 손자 류스웨이(劉世偉·유세위)는 4000리 떨어진 신장(新疆)으로 이주했다. 현지 농민들은 악덕 지주의 후예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밧줄 들고 몰려와 목을 매달았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는 도끼 세례를 퍼부었다. 큰 아들 두 살, 작은 아들은 젖먹이였다.

최근, 중앙미술대학 교수 한 사람이 당시를 회상하며 가슴을 쳤다. “수조원의 성공은 대중의 우매함을 만 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류원차이가 예술을 통해 가공되자 박해가 합법화됐다. 혁명의 이름으로 지주와 반혁명 분자들을 학대하고 도살했다. 인신 모욕은 기본이었다. 혁명은 광견병과 흡사했다. 자신이 반혁명으로 몰릴까 두려워 미친 듯이 위대한 수령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남 깎아 내리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부자·형제·부부·사제 간에도 밀고했다. 공개적으로 관계를 청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진상은 밝혀지게 마련, 문화혁명이 끝나자 수조원 창작 과정이 드러났다. 상부의 지시를 받은 쓰촨(四川)미술학원의 예술가들은 자료 수집에 나섰다. “민간인들에게 뛰어들어라. 빈곤층과 동거동락하며 류원차이의 악랄했던 행동을 청취해라.”

예술가들은 류원차이의 머슴이었던 사람을 방문했다. 계급투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장황히 설명하며, 류원차이의 죄상을 맘놓고 얘기하라고 부추겼다. 머슴은 사실만 얘기하겠다며 말문을 텄다. 류원차이에 관한 좋은 얘기만 늘어놨다. 예술가들은 들을 생각을 안 했다. 한바탕 화를 내고 자리를 떴다.

건너편 집에도 머슴 출신이 있었다. 이름은 구넝산(谷能山·곡능산). 키가 크고 건장했다. 체격에 흥미를 느낀 예술가들은 스케치북부터 펴 들었다. 류원차이의 학대에 반항하는 영웅의 형상으로 제격이었다. 온갖 혁명이론을 동원해 구넝산을 구슬렀다. 구넝산은 예술가들을 실망시켰다. 들고 있던 망치로 땅을 내려치며 화를 냈다. “내일 나를 끌어다 총살시킨다 해도 내가 할 말은 하나 밖에 없다. 류원차이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음날 구넝산은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아들이 구술을 남겼다. “아버지는 노동개조 대상으로 몰렸다. 갇혀있는 동안 매일 밥을 해서 날랐다.”

앞집에 살던 머슴의 아들도 기록을 남겼다. “구넝산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자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50리 밖에 있는 산속에서 광부 생활을 했다. 쓰촨 미술학원의 예술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구넝산은 예술가인지 뭔지 하는 것들에게 끝까지 저항했다. 예술가들은 천재였다. 구넝산의 기개 넘치는 모습을 저승사자처럼 탈바꿈시켰다. 수조원을 관람한 사람은 노인에게 몽둥이 휘두르는 악질 마름의 모습에 경악한다. 나는 한 눈에 구넝산인 것을 알고 폭소했다.”

시캉(西康)성 주석 시절, 공자(孔子) 탄신일을 맞이해 교사들에게 연설하는 류원후이. 1944년 8월 캉딩(康定·현재 쓰촨성 장족 자치주의 중심도시).
시캉(西康)성 주석 시절, 공자(孔子) 탄신일을 맞이해 교사들에게 연설하는 류원후이. 1944년 8월 캉딩(康定·현재 쓰촨성 장족 자치주의 중심도시).

류원차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책을 열심히 읽어라. 그 안에 금은보화와 온갖 미인이 있다”는 권독문(勸讀文)을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았다. 도박장에 가면 돈이 굴러 다닌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도박에만 열중했다. 불과 몇 년 만에 쓰촨성 도박계를 평정해버렸다. 친동생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는 형과 딴판이었다. 낮에는 말 위에서 활 시위 당기고, 달이 뜨면 경전(經典)과 병서(兵書)를 펴 들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학교도 육군 소학과 육군 중학을 거쳐 바오딩(保定) 군관학교를 괜찮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난세의 군인은 죽지만 않으면 진급이 빨랐다. 쓰촨 독군(督軍)으로 부임했을 때 형 류원차이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형은 홍수전이 황제를 칭할 때 사용하던 용상에 앉아 나를 맞이했다. 형수 다섯 명이 포드 승용차를 한대씩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부하들에게 훈시할 때마다 공자와 쑨원(孫文·손문)을 초상화를 걸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소문을 들었던지 내게 핀잔을 줬다. 공자는 뭐고, 쑨원은 뭐냐.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다. 배우지 마라. 지금 중국은 여자 교육이 중요하다. 내가 멋있는 여학교를 세울테니 두고 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형은 농민들에게 관대했다.”

형제에게는 류샹(劉湘·유상)이라는 조카가 있었다. 류샹은 군에서 류원후이보다 두각을 나타냈다. 1911년 청 제국 멸망 이후 10년간 계속된 쓰촨 군벌 전쟁의 마지막 승자는 류샹이었다. 류원차이는 동생 류원후이와 우애가 유별났다. 류원후이가 조카 류샹과 쓰촨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중재 요청을 거부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충칭(重慶)에 있던 류샹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할 정도였다. <계속>

 

김명호

중앙SUNDAY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9] ’새옹지마’ 류원후이…조카와 전쟁 패배 뒤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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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성 주석 시절, 개간위원회 주임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비행장 활주로 건설 현장을 시찰하는 류원후이(오른쪽에서 둘째). [사진 김명호]


1931년 여름, 숙질(淑侄)간인 류원후이(劉文輝·유문휘)와 류샹(劉湘·유상)의 충돌은 극에 치달았다. 류원차이(劉文彩·유문채)는 동생 류원후이를 지원하기 위해 자객을 고용했다. 충칭(重慶)에 잠입한 자객은 류샹을 찾아가 이실직고했다.

형 류원차이가 조카 암살작전 시도
계획 탄로나 무차별 공습 받고 철수
피난지서 장제스와 손잡고 ‘왕’ 대접
형도 땅·금융업 손대 막대한 부 축적


류샹은 보복에 나섰다. 비행기로 류원차이의 근거지 이빈(宜賓)을 포격했다. 기겁한 류원차이는 그간 모아놓은 은 20만 냥과 금은보화를 큰 나무상자 4500개에 쓸어 담았다. 고향 안런(安仁)까지 선박 20척을 동원했다. 안런에 안착한 류원차이는 주변 7개 현(縣)의 땅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금융업에도 눈을 돌렸다. 은행 22개와 전당포 5개를 직접 운영했다.

류원후이와 류샹의 전쟁은 2년을 끌었다. 1933년 9월 중순, 패배를 선언한 류원후이는 병력 10만을 이끌고 시캉(西康)으로 철수했다. 시캉은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류원후이는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다. 한동안 쓰촨성 주석을 역임했던 탓이지 효과가 있었다. 티베트 지도층의 지지를 등에 엎고 ‘시캉성(省) 건성(建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난징의 국민정부는 쓰촨에 기반이 약했다. 군을 파견할 명분을 만들었다. 추적 중이던 홍군 주력을 쓰촨 쪽으로 몰아 부치고 류원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명의로 ‘국민정부 시캉성 건성위원회 위원장’과 ‘국민당 시캉성 지부 주비위원회 주임’ 임명장을 류원후이에게 보냈다.

1937년 여름, 항일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쓰촨 장악에 나섰다. 류원후이를 군단장에 임명했다. 쓰촨의 지배자 류샹이 우한(武漢)에서 세상을 떠나자 측근을 후임으로 내보냈다. 속셈을 파악한 류원후이는 류샹의 부하들과 연합해 장제스를 압박했다. “신임 주석을 거부한다. 장제스가 쓰촨성 주석을 겸하고 대리를 파견한다면, 그건 받아들이겠다.”

당황한 장제스는 류원후이에게 전문을 보냈다. “만나서 얘기하자.” 류원후이가 오자 속내를 털어놨다. “예로부터 쓰촨은 천혜의 요지였다. 일본과 전쟁을 치르기에 난징은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 충칭으로 천도할 생각이다. 쓰촨의 일부를 시캉에 귀속시키겠다. 시캉성 정부가 수립되면 국민정부와 쓰촨성 정부가 건설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겠다.” 류원후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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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에 진입한 국민당 중앙군. 1938년 8월, 장소 미상.


1938년 11월 20일, 우한에서 열린 국민정부 행정원 국무회의는 ‘시캉성 건성안’을 통과시켰다. 초대 주석에 류원후이를 임명했다. 지금의 쓰촨성 동부와 장족(藏族)자치구 동부를 장악한 류원후이를 사람들은 ‘시난왕(西南王)’이라고 불렀다.

장제스는 류원후이가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성 중심도시 시창(西昌)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연락사무소를 설치해 류원후이를 감시했다. 류원후이는 시캉성 개간위원회를 설립해 장제스에게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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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캉에 설치한 무전 송신소. 1939년 11월, 야안(雅安). [사진 김명호]


중공도 류원후이에게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식인들로 구성된 밀사를 꾸준히 파견했다. 류원후이는 이들에게 호감이 갔다. 중공 근거지 옌안(延安)과 연락 주고 받으라며 무전시설까지 갖춰줬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도 여러 차례 통화하며 가까워졌다.

류원후이가 시캉에 군림하는 동안, 류원차이의 사업은 번성 정도가 아니었다. 소금·약재·면직물의 가격을 농단(壟斷)하고 아편을 독점했다. 재물이 산처럼 쌓이자 공익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류원차이는 일반 악덕 지주나 아편상인과 달랐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기고 지식을 존중하던 습관이 평생 변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자 청소년 교육에 흥미를 느꼈다.

중학교 설립을 결심한 류원차이는 현재의 베이징대학 반을 능가하는 부지에 당시 돈 미화 2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4년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쉬지 않고 건설 현장을 살폈다. 벽돌 한장도 최 일류가 아니면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교사도 우수한 사람만 채용했다. 봉급은 일반 학교의 두 배를 줬다. 첫 번째 입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받지 않았다. 2회 입학생부터는 쌀 여섯 되를 받았지만, 못 내도 그만이었다. 교명은 자신의 이름을 땄다.

개교 첫날 류원차이는 성명을 냈다. “오늘부터 원차이중학(文彩中學)의 모든 재산은 설립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내 자손들은 학교에 어떤 권리도 주장할 자격이 없다.” 류원차이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개교 이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학교 운영에는 간섭을 안 했다.

류원차이의 비호를 받는 원차이 중학은 난세의 도원경이었다. 여학생 한 명이 지방 관리의 마름에게 조롱당한 적이 있었다. 보고를 받은 류원차이는 분노했다. 마름을 잡아다가 반 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서 거리에 내던졌다. 이튿날 전교생에게 지시했다. “교복이 너희들의 호신부다. 밖에 나갈 때 꼭 착용해라. 집에도 우리 학교 학생이 산다고 써 붙여라.”

류원차이는 중공정권 수립 직후 폐병으로 사망했다. 전교생이 유해 앞에 무릎 꿇고 통곡했다. 장제스와 불화가 심했던 류원후이는 중공에 투항했다. 수천만 명이 붐볐던 수조원을 저우언라이는 관람하지 않았다. 시캉성은 1957년까지 존속했다.
 

김명호
중앙SUNDAY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린썬 “끝까지 저항”… 장제스에게 비장한 유훈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61-

항일전쟁 시절 국민당과 민주세력, 공산당 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국민참정회 회의장에 도착한 국민정부 주석 린썬(가운데). 1941년 11월 17일 전시 수도 충칭.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시절 국민당과 민주세력, 공산당 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국민참정회 회의장에 도착한 국민정부 주석 린썬(가운데). 1941년 11월 17일 전시 수도 충칭. [사진 김명호]

1937년 11월 16일, 수도 난징(南京) 철도부 방공호에서 국방최고회의가 열렸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가 입을 열었다. “3년간 준비해온 일을 실현할 때가 왔다. 국민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이전한다. 동지들은 주어진 직분에 전력을 다해라.”

그날 밤, 국가원수였던 국민정부 주석 린썬(林森·임삼)은 충칭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경호원 230명과 100여 명의 군악대, 휘하 관원들에게 행장을 수습할 것을 지시한 후 장제스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후 그곳으로 가겠다. 할 말이 있다.” 평소 린썬은 장제스가 무슨 말을 하건 듣기만 했다. 결정에 이의를 제기한 적도 없었다.

이날 따라 린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말을 남겼다. “나는 고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떠나면, 살아서 난징 땅을 밟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일으킨 것이 아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다. 너희들의 항전(抗戰)은 도처에 어려움이 잠복해있다. 극한상황에 처해도, 끝까지 저항해서, 저놈들을 이 땅에서 내 쫓아라.” 재산 처리도 당부했다. “젊을 때부터 골동 수집에 열중했다. 모두 박물관에 기증해라. 소장품인 서화와 서적, 불경들은 도서관으로 보내라. 나는 자손이 없다. 배우자도 세상 떠난 지 오래다. 수중에 있는 돈 6만원을 양자와 양손에게 주고 싶다.”

허리를 꼿꼿이 편 장제스는 고개를 숙인 채 듣기만했다. 린썬은 국가은행에 예치해둔 50만원의 뒤처리도 당부했다. “전쟁 중이라도 교육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매년 나오는 이자로 과학도를 양성했으면 한다. 건장하고, 고전교육 제대로 받은 자연과학도들을 선발해 미국 유학을 보내라. 나라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서 보내라.” 꼭 다문 입술에 힘을 더한 장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썬의 마지막 말에 장제스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거렸다. “뜻을 세웠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향해 나아가라. 나는 날이 밝으면 쓰촨(四川)으로 떠나겠다.” 이튿날 새벽 린썬은 난징을 떠났다. 송별의식이나 성명서 따위는 생략했다.

린썬 휘하의 정부관원은 1000명을 웃돌았다. 수행원의 회고를 소개한다. “한달 전부터 짐작은 했지만,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재력과 인력도 한심할 정도였다. 강제로 원칙을 정했다. 당장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몇 달치 봉급을 주고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해군부가 제공한 군함으로 충칭까지 9일이 걸렸다. 선상에는 정부의 중요 문건들이 가득했다. 주석에게만 독방을 제공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뒤엉켰다. 가족 동행은 허락하지 않았다. 주석은 하루에 한차례 배 안을 돌며 관원들을 격려했다.”

 

린썬의 훈시를 경청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수뇌들. 오른쪽 세 번째가 위원장 장제스. 네 번째는 부위원장 펑위샹(馮玉祥). 1937년 12월, 우한. [사진 김명호]
린썬의 훈시를 경청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수뇌들. 오른쪽 세 번째가 위원장 장제스. 네 번째는 부위원장 펑위샹(馮玉祥). 1937년 12월, 우한. [사진 김명호]

난징 출발 3일 후 우한(武漢)에 도착한 린썬은 국민정부의 충칭 이전을 전 세계에 발표했다. 목적과 이유가 명확했다. “오늘 국민정부는 전쟁에 적응하고, 장기적인 항전에 돌입하기 위해 충칭으로 이전한다. 우리의 지구전(持久戰)은 일본군이 한 명도 남김없이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한의 병원에서 치료 중이던 쓰촨성 주석 류샹(劉湘·유상)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7000만 쓰촨인을 대표해 머리 숙여 환영한다.”
린썬 일행은 12월 26일 충칭에 첫발을 디뎠다. 쓰촨왕(四川王)이나 다름없던 류샹의 성명은 효과가 있었다. 2만여 명이 부두에 나와 린썬을 환영했다. 류샹은 충칭 교외에 있던 사택까지 린썬에게 내줬다. 충칭 직업중학에 국민정부 간판이 큼지막하게 내걸렸다. 충칭 시민들은 머리가 복잡했다. 잘된 건지, 못된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2개월 후 류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이 나돌았지만 유언이 공개되자 금새 수그러들었다. “민족의 생존과 쓰촨인의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적군을 국경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우리 쓰촨군은 하루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 국민정부는 쓰촨을 항일의 후방기지로 내주고 사망한 류샹에게 육군 1급 상장을 추서했다. 장제스 다음가는 계급이었다.

류샹이 사망하자 장제스는 “쓰촨 통일에 성공했다. 항전의 기반을 이제야 마련했다”며 측근 장췬(張群·장군)을 쓰촨성 주석에 임명했다. 장췬은 쓰촨 출신이었지만 현지에 기반이 약했다. 배척 시위가 잇따랐다. 린썬의 충칭 입성 후에도 우한에 머무르던 장제스는 오판을 인정했다. 직접 쓰촨성 주석을 겸임하고 대리인을 충칭에 파견했다.

쉬저우(徐州)를 점령한 일본군이 우한을 압박하자 일선 지휘관들이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충칭으로 이동하지 않으려면 황하를 범람시키자.” 먼 옛날부터 흔히 하던 방법이었다. 충칭행을 머뭇거리던 장제스는 결단을 내렸다. 3개 성(省)의 20여 개 현(縣)이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있었지만 일본군의 우한 공격은 지연시킬 수 있었다. 4개월 후 일본군이 우한 인근에 집결하자 장제스는 철수했다. 그래도 충칭에는 가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 찜찜했다. <계속>

 

김명호

중앙SUNDAY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일본군 무지막지한 공습… 충칭은 버텨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62-

5년간 계속된 일본의 공습은 충칭 시민들에게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1941년 가을 공습 직후의 충칭 거리. [사진 김명호]
5년간 계속된 일본의 공습은 충칭 시민들에게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1941년 가을 공습 직후의 충칭 거리. [사진 김명호]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두 배인 15년간 계속됐다. 1931년 가을, 일본이 동북을 점령했을 때부터 계산하면 그렇다. 전쟁의 전반부 6년이 동북3성에 국한된 국지전이라면 나머지 기간은 전면전이었다.

일본군은 동북 전역과 경제 중심지 상하이(上海), 수도 난징(南京), 교통의 요지 우한(武漢), 중남의 중심 창사(長沙), 남방 최대의 도시 광저우(廣州), 제국의 수도였던 베이핑(北平·현 베이징) 등을 점령했다. 충칭(重慶)만은 예외였다.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전쟁 초기부터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지구전을 염두에 뒀다. 든든한 후방이 있어야 지구전이 가능하다며 근거지를 물색했다. 군사가(軍事家)들의 주장도 별 차이가 없었다. “적이 방심했을 때 허를 치면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은 몇 차례 전투로 끝나지 않는다. 중국은 큰 나라다. 오래 끌수록 유리하다. 전략이 중요하다. 쓰촨(四川)은 주변 지세가 험한 오지 중의 오지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노래처럼 새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지만, 일단 들어만 가면 입이 벌어진다. 옥야천리(沃野千里), 기름진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천혜의 땅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이곳으로 쫓겨온 덕에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고, 제갈량(諸葛亮)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충칭은 창장(長江)과 자링장(嘉陵江)이 합류하는, 묘한 곳이다. 삼면이 강이다 보니 반도나 다름없다. 산은 높고, 강은 길고,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사람들은 상인 기질이 농후하다. 전쟁도 상품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붉은 등을 띄우는 중국군 병사. 경보와 함께 공습을 알리는 도구였다. 1939년 봄, 충칭.
붉은 등을 띄우는 중국군 병사. 경보와 함께 공습을 알리는 도구였다. 1939년 봄, 충칭.

틀린 말이 아니었다. 먼 옛날부터, 충칭 사람들은 뭐든지 상품화 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쓰촨인들에게조차 별종 취급을 받았다. 이를 조소하는 노래가 유전될 정도였다. “충칭에 가보니, 평지가 거의 없다. 산이 높고 길은 울퉁불퉁. 가난한 사람은 비웃어도 몸 파는 여인은 비웃는 법이 없다. 두 강의 물을 마셔서 그런가 보다,”

충칭이 전시수도가 되자 온 도시가 들썩거렸다. “행운이 제 발로 왔다”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던, 대규모 민족이동이 벌어졌다. 일본 점령지역의 정부기관·공장·교육시설과 난민들이 줄줄이 쓰촨으로 향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쓰촨으로 실어 날랐다. 일본 폭격기의 폭격 따위는 당하건 말건 상관치 않았다. 당시 중국 정부문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배와 항공기를 동원해 공병창 기계와 항공유·폭탄 등 19만6000t을 쓰촨으로 수송했다. 철강과 방직공장 607개에 딸린 기술자도 1만2000명을 상회했다. 일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윈난(雲南)과 구이저우(貴州)에도 분산시켰지만, 규모는 쓰촨에 비할 바가 못됐다.”

이전 과정에서 입은 피해도 컸다. 대공보(大公報)에 실린 기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중국 실업계의 ‘덩케르트 철수’였다. 전국에 등록된 공장이 3849개였다. 33%에 해당하는 1279개가 창장을 타고 이동했다. 일본 폭격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긴장감은 영국군의 덩케르트 철수 때보다 더했다. 40일간 대형 선박 16척이 침몰하고, 116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 덕에 충칭과 쓰촨 각 지역에 새로운 공업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 간부 5000명과 정부기관, 700개의 광산기업과 기술자 1만여 명의 이주가 끝나고, 48개 교육기관과 학생 2만여 명, 국보 1만6658상자가 쓰촨 경내에 들어오자 장제스는 안도했다. 38년 12월 8일, 중앙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이전시켰다. 우한에서 일본군의 포성을 뒤로한 지 47일째 되는 날이었다. 충칭에 안착한 장제스는 성명을 발표했다. “18개 성(省) 중 15개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도 쓰촨과 구이저우· 윈난 3개 성만 장악하면 어떤 적이건 때려 눕히고 실지(失地)를 수복할 수 있다.”

충칭은 국가의 위기에 중임을 떠맡았다. 중국의 정치·군사·경제·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일본군이 가장 노리는 도시도 충칭으로 변했다. “3개월이면 중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던 일본은 전략을 수정했다. 땅이나 강을 통한 접근은 불가능했지만,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38년 12월 말, 충칭 상공에 일본 폭격기가 출현했다. 중심가에 포탄을 투하하고 사라졌다.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43년 8월까지 계속된 일본의 충칭 공습은 무지막지했다. 5년간 218차례, 총 9513대가 출격해 폭탄 2만1593발을 쏟아 부었다. 40년 8월 19일 공습 현장을 지켜본 미국 기자가 기록을 남겼다. “평온한 거리에 예리한 경보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높은 지역마다 홍색 등이 솟아 올랐다. 충칭 시민들은 방공 경험이 풍부했다. 등을 발견하자마자 부두로 달려갔다. 초조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일본 공습기는 특징이 있었다.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그날 하루 동안 134대가 날아와 폭탄 262발과 소이탄 52발을 투하했다. 공습은 이후 3일간이나 계속됐다.” <계속>

 

김명호

메인로고

 

[인천 고택기행·12] 도원동 부영주택

조봉암 선생의 뜻이 머물던 곳… 돌아오지 못한 그를 기다리다
{ 도원동 부영주택 : 1940년 산비탈에 축대 쌓아 건축 }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6-03-24 제9면
[인천 고택기행·12] 도원동 부영주택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강점기 병참기지화로 노동자들 살 집 부족하자 주택단지 계획
인천 행정관청 첫 공급 도시계획 상징 한옥 3채·개량 1채 남아
1942~1948년 죽산과 가족 거주… 정치가 길 들어선 중요한 시기
2011년 무죄판결 불구 관심 사그라들어 공공차원 보존 필요성


◈죽산의 맏딸 조호정씨가 부영주택 단지에서 기억하는 아버지
그곳엔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
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오지 못했고
청년들이 집에 많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유독 로맨틱 영화를 좋아했다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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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지방관청인 인천부청(仁川府廳)은 지금의 중구 도원동,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등에 도시계획에 따른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1930년대 후반 인천지역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가 확장하면서 생긴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당시 인천부가 직접 지어 분양한 집을 '부영(府營)주택'이라 부른다. 지금의 '시영(市營)아파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인천 중구 도원동 12 일대에는 산비탈에 2m 남짓 높이의 축대를 쌓아 지은 부영주택 3채가 나란히 있다. 1940년 건립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이야 낡은 한옥쯤으로 여기기 십상이지만, 인천의 지방행정관청이 처음으로 계획을 세워 공급한 인천 도시계획 역사의 상징이다.

또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인천 출신으로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간첩으로 몰려 '사법 살인'을 당하고도 50년이 넘어서야 그 누명을 벗게 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 선생이 1940년대 살았던 집으로써 인천에 남은 죽산의 유일한 흔적이기도 하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도원동 부영 주택
현재 남아있는 도원동 부영주택(한옥) 3채 중 한 곳은 빈집이다. 전문가들은 이 빈집이 건축 당시 구조와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 인천 첫 단지 분양주택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 식민지 정책을 '병참기지화' 방향으로 바꾼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인천은 군수품 생산과 수송을 위한 군수공업단지로 성장하게 되는데, 각종 공장이 확장·신설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인천으로 몰려든 노동자들이 살 집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인천부는 1939년 '소(小)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단지 분양주택 건설을 논의, 1940년 '도산(桃山)주택'이라는 이름의 첫 번째 부영주택을 도원동에 지었다. '도산'은 도원동의 옛 지명인 '도산정(桃山町)'에서 가져왔다.

인천시립박물관의 2014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천부가 작성한 '인천부영주택조성계획서'에서 부영주택 계획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생산력 확충에 수반되는 각종 공장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이에 필요한 인적자원인 공장노무자는 증가를 보이기 때문에 주택의 품귀를 초래한다. 각종 중요 산업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하는 현 상황에 비추어 본 계획을 세워 300호를 건설하고자 하며, 부평을 포함한 병참기지로 장차 산업도시로서 목적달성상 크므로 국책에 부합 기의에 입각한 조치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도원동 부영 주택 조봉암 선생 거주 주택
죽산 조봉암이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살았던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 가운데 중간 집.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인천부가 도원동 부영주택을 건설한 것은 조선총독부가 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비슷한 기관인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단지주택 공급계획을 수립한 1941년보다 빠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2014년 조사에서 1940년대 위성사진 등을 분석해 도원동 부영주택은 총 28동이 지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부영주택은 도원동을 시작으로 동구 송림동, 남구 용현동과 숭의동, 부평구 부평동 등에 건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도원동 부영주택은 대부분 철거됐고,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와 일본식 개량주택 한 채만 남았다. 한옥은 지하 1층, 지상 1층짜리 건물로 158.7㎡ 대지에 건축 면적은 78㎡이다. 마루와 방 2칸, 부엌이 딸린 구조다.

2014년 인천시립박물관 조사에 참여한 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일제강점기 지방관청이 주도해 지은 한옥은 보기 드물뿐더러 일본이 한옥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주택"이라며 "역사적 관점에서 보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고택기행 죽산 조봉암 선생 장녀 조호정 인터뷰9
조호정 씨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죽산의 도원동 시절을 또렷이 기억했다. 자신과 아버지가 살던 부영주택이 보존돼 역사성을 지닌 장소로 활용됐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부영주택과 죽산 조봉암

죽산 조봉암은 1942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돼 서울로 가기 전까지 가족들과 도원동 부영주택에 살았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88) 씨와 죽산의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현재 나란히 남아있는 한옥 3채 가운데 중간 집이 죽산이 살던 집이다. 20채가 넘는 인근 부영주택이 헐리는 동안 다행히도 죽산이 살던 집은 아직 헐리지 않은 것이다.

죽산이 도원동에 살던 때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그가 해방을 맞고 공산주의에서 전향, 본격적으로 정치가의 길을 걸으면서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중요한 시기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조호정 씨를 만나 죽산의 도원동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부영주택으로 이사 왔을 당시 조호정 씨는 중구 답동 박문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죽산은 벼를 찧을 때 나오는 겨를 공급하는 인천비강업조합 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조 씨는 "(부영주택 단지에) 대부분 조선사람이 살았고, 일본사람은 두 집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며 "아버지는 바빠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못했고, 청년들이 집에 많이 찾아왔다"고 회상했다.

조 씨는 해방 전에는 집으로 죽산을 찾아온 경찰의 위협이 무서웠고, 해방 후 격동기 속에서는 공산주의 진영과 갈등을 빚으며 싸우는 게 불안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학생이라 세상 물정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갈등도 많고 (정치적인) 싸움도 많이 했다는 건 알았다"고 했다.

조 씨는 죽산이 도원동 집에서 키우던 '샤리'라는 애완견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곤 하던 모습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샤리'는 죽산이 좋아하던 할리우드 인기 아역배우 셜리 템플(Shirley Temple)에서 딴 이름이다.

조 씨는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집 근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유독 로맨틱한 영화를 좋아했다"며 "겉으로는 강인한 모습만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죽산이 살았던 부영주택을 인천시 등이 공공차원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왔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사건(일명 진보당 사건)에서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공소사실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죽산 재조명 바람'이 불면서 부영주택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죽산이 누명을 벗은 지 5년이 지난 현재는 그러한 관심이 적어진 것이 사실이다. 인천시가 '인천 가치 재창조'의 일환으로 '인천 인물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인천시청 홈페이지에 있는 '인천의 인물' 코너에서는 여전히 죽산 조봉암이 태어난 해를 1898년으로 틀리게 표기했다.

인물 소개도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처형됐다"에서 끝을 맺으며 그의 무죄 판결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

/글 =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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