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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사)한국잡지협회는 건전한 잡지언론 창달과 대한민국의 잡지발전을 추구합니다.

44. [공지] 제10회 전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PC로 등록된 글
관리자   조회 : 1911, 등록일 : 2017/05/08 09:29, 수정일 : 2017/05/11 10:17

()한국잡지협회는 잡지인구 저변을 확대하고 전 국민의 독서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해 10회 전 국민 잡지읽기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잡지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기다립니다.

 

주최: ()한국잡지협회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교육청

대상: 청소년부 고등학생 / 일반부 - 대학생 및 일반인

주제: 잡지와 관련된 자유주제

형식: ()한국잡지협회(http://www.magazine.or.kr/)홈페이지 지정된 형식의 참가신청서 및

     작품양식을 다운받아 사용

접수방법: 한국잡지협회 수기공모 담당 이메일 접수 (contest@magazine.or.kr)

분량: 청소년부 규격형식의 2~3매 내외, 일반부 -규격형식의 3~5매 내외

     (글자크기 12point, 줄 간격 160%, 바탕체)

접수기간: 201758~831

결과발표 : 2017929()한국잡지협회 홈페이지 공지

시 상20171027, 잡지회관

시상 내역 :

 

- 일반부

구분

내용

인원

시상품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1

   상장 및 상금 200만원

최우수상

한국잡지협회장상

1

   상장 및 상금 100만원

우수상

한국잡지협회장상

  3

   상장 및 상금 30만원

장려상

한국잡지협회장상

 10

   상장 및 상금 10만원


- 청소년부

구분

내용

인원

시상품

최우수상

(초중고등부)

한국잡지협회장상

(전국 초중학생)

1

상장 및 상금 30만원

최우수상

(초중등부)

서울특별시 교육감상

(서울시내 초중학생)

1

상장 및 상품

우수상

한국잡지협회장상

(전국 초중학생)

2

상장 및 상금 20만원

한국잡지협회장상

(전국 고등학생)

2

장려상

(초중고등부)

한국잡지협회장상

 10

    상장 및 상금 10만원

  

유의사항

-응모된 작품에 대한 저작권 및 소유권은 응모자에게 있습니다.

-출품된 작품은 반환되지 않으며 필요한 경우 응모작에 대한 저작재산권 중 일부를 양수하거나 이용허락을 받을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저작자와 별도로 협의하여 결정합니다.

-수상 후 창작이 아닌 모방 혹은 표절로 밝혀진 경우 수상은 취소되며 상금은 회수조치 됨에 동의합니다.

-위 사항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한국잡지협회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거나 02)360-0041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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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민 잡지읽기 수기공모 당선작

((2013년 제6회 전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수상작))
특별상(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상)-이경은
 
 작품명 :
좋은 잡지를 읽는 내가 좋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잡지는 어린이집에 다닐 무렵 아빠께서 가끔 집에 사 두셨던 <신동아>이다. 잡지 두께의 거의 반이 광고인데다, 기사 면은 얇은 종이에 흑백으로 인쇄하면서 광고 면은 두껍고 반들반들한 종이에 올컬러로 인쇄한 것이 그 나이에도 부조리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 와서 기억에 남는 것은 ‘쓰레기 만두’ 관련 기사와 한 사진 속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침울히 고개 숙이신 모습뿐이다. 당시 <신동아>의 노무현 대통령 관련 기사는 죄다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기사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우리나라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못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도 전혀 모르던 때였다.
  나는 <신동아>에 금세 싫증을 냈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역시 어린이집에 다니던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작고 가벼운데다 전면 컬러, 재미있는 사진과 삽화가 많았던 탓에 아빠와 쟁탈전을 벌이며 참 재미있게 읽었다. 기사 끝 여백을 채우던 짧은 유머도 재미있는 읽을거리였다. 물론 나는 그 중 상당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엔 아빠께도, 나에게도 <리더스 다이제스트>만큼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없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나는 <좋은 생각>을 읽게 되었다. 집과 가까운 할머니 댁에 삼촌이 사 놓으신 <좋은 생각> 과월호가 몇 권 쌓여있었던 것이다. 쉽고 재미있는, 또 감동적인 내용에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단어, 새로운 지식, 새로운 표현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절대 풀리지 않는 십자말풀이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언젠가는 책 사이에 두꺼운 용지로 자그맣게 붙어있는 독자엽서도 써서 부치고, 그 ‘원고지’라는 것에 사연도 써 보내리라 꿈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엄마께서 당시 1학년, 2학년, 4학년으로 나란히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 삼남매를 위해 <생각쟁이>와 <과학쟁이>를 1년간 정기구독 해 주셨다. 지금 보면 그림이 필요 이상으로 크고 많은 데다 내용도 너무  쉽고 글씨도 큼직해 시시하게 느껴지지만, 당시의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볼거리, 읽을거리였다. 만화와 그림만 보던 동생들이 점차 잡지 전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어린 누나로서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학교에서 다녀와 대문 밑에 밀어 넣어져 있는, 흰 비닐에 싸여 표지가 비칠락 말락 한 책 묶음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들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비닐을 뜯고 책을 읽는 것은 한 달에 꼭 한 번 있는 기쁨이었다. 난생 처음 스스로 보낸 독자엽서가 당첨되어 ‘프랭클린 주니어 스케줄 다이어리’라는 것을 선물 받고 엄마와 함께 기뻐했던 기억도 난다.
 

  시사 잡지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시립도서관 간행물 실에 비치되어 있는 <한겨레21>, <시사in>을 읽으며 조금씩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배워갔다. 처음엔 만화, 사진만 대충 보다가 기사를 읽게 되었고,  기사를 읽으면서 모르던 많은 용어들과 시대의 사회 문제, 정치 문제 등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룬 기사가 아니고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고 읽다가 졸기도 여러 번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서관에서 <한겨레21>, <시사in>에 계속해서 도난사고가 일어나 읽을 수 없게 되었고, 나는 시사 잡지 읽기를 포기해 버렸다. 애초에 알아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과 호기심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새로 오신  사회 선생님께선 진보적 성향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 하셔서 즐겨 보시는 분이었다. 또 그분은 사회 교실 한편에 우리가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책과 잡지를 비치해 두시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시사in>을 다시 만났다. 자연스럽게 읽기 시작했고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함께 읽게 되었다. 그리고 잡지를 함께 읽는다는 것은 혼자 그것을 읽는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 나는 사회 교실에 있는 다른 잡지 <전라도 닷컴>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자연의 풍경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미소가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사투리가 기사말의 80% 이상을 채우는 정겨운 잡지이다.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났고, 국영수 위주의 집중이수제 덕에 더 이상 사회 수업을 들을 수 없지만 가끔씩 교실에 들러 책이나 잡지를 빌려 읽고는 한다.
  이번에 읽은 <시사in> 311호는 내가 이제껏 본 중 최고이다.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사는 4대강 사업으로 파괴된 강, 그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심각한 낙동강의 문제를 다룬 커버스토리(표지기사)였다. 대운하를 목표로 강을 깎고 잘라 연속된 호수로 만든 전 정권의 과오를 통렬히 지적하며, 죽은 물고기를 품은 채 퍼렇게 썩어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가 났다. 자연을 거스르면 그 재앙이 인간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간단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되었을까. 왜 우리는 그의 삽질을 막지 못했을까. 커버스토리는 <굴업도야 굴하지 마 노래를 불러줄게>라는 기사로 이어지며 끝맺는다. 이 기사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희귀한 생태계를 갖춘, 그야말로 완전 소중한 섬, 굴업도가 대기업에 의해 골프장으로 개발될 위기에 처했음을 알린다. 또한 굴업도를 지키려 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노력도 함께 보여준다. 조금은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흐름이 바로 최고의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사를 읽고 든 생각은 이랬다. ‘더 이상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자연을 손 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을 제대로 아끼고 활용할 줄 모른다. 4대강 사업의 결과가 아프게 보여주듯이. 그러므로 우리가 나서야 한다. 굴업도처럼 위협받는 자연을 힘을 모아 지켜내야 한다. 당장 굴업도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탤 방법을 찾아야겠다.’ 이처럼 이 기사는 나에게 분노도 주고 절망도 주고 행동할 의지도 주었다. 바로 진정한 언론의 모습이다. 이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나에게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며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시사 in>을, 특히 이번의 311호를 최고의 시사 잡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시사in>을, <한겨레21>을, <전라도 닷컴>을, 그 외의 좋은 잡지들을 계속 읽어 나갈 것이다. 아빠, 삼촌, 사회 선생님 등등 좋은 잡지를 읽을 기회를 마련해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그리고 나도 좋은 잡지를 다른 이들과 나누며 열심히 읽어 갈 것을 다짐한다. 언젠가는, 내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 좋은 잡지에 내 글을 기고하고 싶다는 꿈도 가져본다. 그런 멋진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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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상(한국문인협회 이사장상)-한지수
 
 작품명 :
정기구독 년수에 비례하는 잡지사랑
                                                                                                           
 
연년생인 우리 남매는 서로 많이 가지려고 혹은  많이 먹으려고 싸운 적은 거의 없지만 유독 예외가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정기구독하고 있는 ‘독서평설’이라는 잡지가 그 예외다.
‘독서평설’이 도착하는 매달 25~28일 사이에 우리 집 우편함을 누가 먼저 보느냐에 따라 우선독서권이 주어지곤 했는데 그나마 요즘은 오빠가 고3이라 바빠서인지 좀 편하게 내 차지가 되고 있는 잡지다. 초등학교때는 오빠가 떡 하니 먼저 잡지를 읽고는 자기가 필요한 부분을 내가 읽기도 전에 스크랩해버려 싸운 적이 많았다. 오빠는 잡지가 계속 쌓이면 책꽂이도 산만하고 필요한 내용을 찾으려면 전체 잡지를 다 뒤져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광고 한 페이지 마저도 잘려 나가는 게 안타까웠다. 왜냐하면 ‘독서평설’에 실리는 광고는 단순한 상업성을 띄었다기 보다 그 자체만으로도 유익한 정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독서평설’이라는 이름답게 문학 작품을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하거나 다이제스트해서 소개해줌으로써 그때 관심 깊게 보았던 작품을 방학이나 시험직후에 원작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게 유도한다. 반면에 정말 어려운 내용이라 몇 장을 넘기고 덮어버렸던 책이나 시간이 없어 전체 원문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꼭 읽어두면 좋을 책들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정리해준다. 초등학교 시절에 독평이(독서평설의 애칭) 에서 보았던 책들을 중고등학생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을 때의 뿌듯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인문교양을 쌓는데서만 그치지 않고 역사나 지리,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 과학이나 수학 혹은 지구환경을 다루는 과학탐구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독평이에 들어있다.
역사분야의 경우 단순한 위인이나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위인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와 논란이 될 수 있는 여러 시각들도 함께 소개한다. 역사적 사건의 경우는 시대적 배경과 국제사회의 역학관계, 사건의 역사적 의미까지 모두 파헤쳐주어 교과서에서 배우는 단편적 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좋아했던 코너중 하나는 ‘역사의 라이벌’이었는데 이순신과 원균, 김구와 이승만 같이 동시대에 갈등을 보였던 인물들을 특정 누군가의 관점이 아니라 각자의 관점에서 다루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형식이 정말 신선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분류로 역사를 다루지 않아 나로 하여금 편견을 깨는데 큰 역할을 해 준 잡지였다.
 

고등학생이 되니 사회현상이나 이슈에 대해 관심은 더 많아졌는데 사실 입시에 시달리다보니 아무래도 뒷전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부분도 바로 독평이가 많이 해소해주고 있는 편이다. 군가산점 문제나 대체휴일제 같은 국내 이슈외에도 공정무역, FTA같은 이슈들도 모두 독평이의 친절한 해설로 알게 되었다. 덕분에 교내 논술대회에서도 대상을 받았으니 이래저래 독평이에게 고마운 일이 한 둘이 아니다.
과학분야는 이과생에게는 당연히 도움이 되는 내용들로 매호 구성되지만 나같이 과학이나 수학 분야에 취약한 문과생에게도 쉽게 과학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솔직히 말하면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지만 최소한 지구와 환경의 문제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학습적인 부분에서 큰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술적인 안목도 독평이의 정기구독 년수에 비례해 높여왔다. 영화나 뮤지컬 연극을 소개할 때에도 그 속에 숨은 문화현상이나 심리적 요소를 다 찾아내 절로 감탄할 때가 많았다. 아이들이 보는 잡지라고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친다. 오죽하면 성인인 이모가 교양을 쌓겠다며 지나간 독평이들을 가끔 열권 단위로 빌려가곤 한다.
하지만 내가 독평이를 더욱 사랑하게 된 건 독평이를 만드시는 편집진 선생님들의 독자에 대한 배려심 때문이다. 나는 거의 독평이를 꼼꼼이 읽는 편이기에 오타나 오류를 찾아낼 때가 가끔 있었다. 잘난 척 하려는 게 아니라 웬지 독자로서 이런 건 좀 알려주는 게 도리일 거 같아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마더데레사의 사망년도가 잘못 나온 것이었는데 마침 런던에 다녀 온 직후라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1997년 마더데레사와 사망날짜가 같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조심스럽게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린 학생의 전화라고 무시하지 않고 친절히 접수하신 후 나중에 내 말이 맞았다고 다시 전화해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해주셨다. 독자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하는 그런 자세가 독평이의 기사 하나하나에 다 배어있을 것 같았다.
한 권의 잡지가 거의 십년 가까이 나의 지적 호기심을 마음껏 자극해 지식의 창고를 가득히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은 잡지에 대한 애정을 넘어 존경심마저 갖게 했다.
언젠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라는 영화속에 잡지사 편집장과 기자를 보면서 어렴풋이 멋진 일일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쳤는데 아빠를 취재하러 온 여성잡지 기자 언니의 모습을 본 후 잡지 기자가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신문기자들의 문장이 짧게 끝나고 단편적인데 비해 잡지 기자들은 최소한 한 꼭지당 몇 페이지 분량을 쓸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큰 매력으로 보였다.
독평이가 내 인생에 미친 영향 만큼은 될 수 없겠지만 내 꿈은 어느 순간 나도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잡지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데 이르렀다. 단 한명의 독자라도 내 기사에 감동을 받거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잡지 기자로 우뚝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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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고등부-잡지협회장상) - 이세라
 
 작품명 :
 내 모든 삶을 커피에게 받치리라
 
                                                                                                           
 
 3년 전 겨울, ‘스위트 도쿄’라는 책에 이끌려 멀리 떨어져 있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그 책의 작가 언니가 생각하는 가치관, 느낌이 정말 나와 맞고 공감돼서 작가언니가 만드는 케이크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던 이유로 언니가 일하는 카페, ‘모모스’라는 곳으로 찾아갔다.
열심히 케이크를 만드는 작가언니가 좋았고 언니의 케이크가 너무나도 좋았으며, 단지 그 언니가 있는 모모스가 좋았다.
그런 모모스를 사랑하다보니 전에는 눈에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바리스타 언니, 오빠들이 커피를 추출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코끝으로 느껴지는 커피의 향이, 한 모금 입에 담았을 때 스멀스멀 올라오는 커피의 향미가 너무나 좋았다.
커피라면 인스턴트 커피가 고작이고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카페에서 내 키보다도 훨씬 큰 로스팅 기계로 생두에게 숨을 불어넣어주듯 생두를 직접 볶고, 바리스타가 마법을 부리듯이 각양 각색의 커피가 완성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두근거리면서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 작은 커피 콩으로 코끝을 자극하고 뇌를 깨워주듯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커피를 접하게 되고, ‘커피’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자 어른도 한 번에 읽기 힘들다는 두꺼운 커피 전문 서적, 그리고 매달 출간되는 ‘COFFEE'라는 잡지책과 함께 커피를 하나 하나 알아가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커피는 아주 과학적이면서도 조금씩 친해지려 하면 멀어지려는 부분도 있었지만, 잡지에서 새로운 메뉴가 소개되고 몰랐던 카페를 소개한 부분을 보면서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꼭 가보고 싶은 카페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었다.
카페에 찾아가며 함께한 친구,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바리스타 분들과 소통을 하면서 보다 넓은 인간관계를 몸소 배우면서 그들에게 커피란 어떤 존재인지 알게되었다.
 커피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런 커피 메뉴에는 그에 따른 어떤 빵이 어울릴지, 어떤 케이크가 더욱 잘 어울릴지’ 생각하는 도중 도서관에서 커피 잡지 뿐만아니라 와인, 여러 케이크에 관한 잡지, 그리고 인테리어 등등 카페에 관련된 잡지들도 많이 있었다. 여러 잡지를 펼쳐보며 노트에 내가 꿈꾸는 카페를 그려보고, 커피의 트렌드를 공부해가며 끄적이곤 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커피’로 하루를 마감하며 눈감기 1초전 까지 ‘커피’는 나에게 전부가 되었고,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 인문계와 전문계의 두 갈래로 나눠지기에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 내 손에서는 문학책이 아닌, 크게 ‘COFFEE' 라고 써진 잡지책과 커피 전문서적들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부모님이 보셨을 때, 그런 책은 때가 되면 천천히 읽어도 괜찮다고 그것보다 오히려 공부를 해야 할 때가 아니냐며 다독여주셨지만,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할 시쯤, 나의 길은 커피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늘 나를 잘 이끌어주셨던 부모님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 이렇게 일찍 시작할 필요도 없으며,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대학교에 들어가 그때 커피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혹은 다른 것을 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다그치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단지 작가언니의 영향인지 천직이 때가 되어 나를 부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나에게는 커피가 전부였다.
나의 생각이 부모님께 닿기까지,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그럴 수 록 나의 의지는 더 확고해져만 갔고, 커피가 단순히 음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음료 그 이상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잡지로 인해 이젠 ‘커피’라는 단어에 설레고 ‘바리스타’라는 진짜 스타를 꿈꾸게 되었다. 영향력 있는 바리스타로서 각양 각생의 사람들에게 ‘커피’한 잔으로 조언을 전달하고 그런 사람들을 대신하여 고민하고 기도하고 싶다. 그 얼마나 가슴 뭉클한 감동과 행복을 선물할 수 있는가.
 ‘적당히’, ‘어느 정도’, ‘대충’ 이라는 단어가 스스로 용서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
나의 길을 재설계하게 되고, 톱니바퀴에 맞물려가듯 무엇인가 천천히 차례대로 진행되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커피의 에센스, 커피의 심장, 커피의 영혼인 에스프레소 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감성적인 바리스타가 되고싶으며, 영향력 있는 바리스타가 되고싶다.
조금 두렵지만 그와 동시에 ‘설레임’을 느꼈고, 시간이 지날 수 록 불확실한 머나먼 미래에 대해 의심이 돼서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 잡고있어야 할 것들이 멀어져 가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나 씩 되짚으면서 다가가지 않으면 너무 많이 후회할 일들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한걸음 뒤로 나와 그동안 챙기지 못한 것 들을 다시 하나하나 챙겨가고 있다.
설레는 발걸음으로 한 걸음 내딛고, 노력하되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최상의 커피를 추출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 맛과 향미가 인위적이지 않도록,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욕심이 커진 만큼 나도 커져가고 있는것 같다.
잡지가 나와 커피를 만나게 해주면서 커피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고. 하지만 난 아직 커피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지를 못하고 있다.
더 잘하고 싶고, 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나고, 전엔 알지 못했던 일들도, 의욕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머리가 아닌 눈으로, 몸으로 알게 되었을 즈음, 잡지책을 뒤적거리며 무궁무진한 커피를 공부해가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게 많아 속상했지만, 지금 당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바라보고 더 큰 마음으로 다가가려 한다.
조금은 천천히 깊게 하나하나 써 내려간다. 비록 지금은 느리다고 느껴져도 믿고 나아가려한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태어난 이유를 알게해준 커피, 내 꿈을 쥐어준 작가언니와 잡지에게 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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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고등부-잡지협회장상)-김영진
 
 작품명 :
  나의 사진생활과 동고동락한 잡지......
 
                                                                                                           
 
    나는 원래 잡지나 신문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취미라는 것은 아주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구입한 카메라, 그것이 내 취미의 시작이었다. 사진을 배우기 위해 오프라인 사진 동호회도 나가보고 온라인 사진클럽도 들어가 보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비에 대한 욕심만 늘어갔고 사진에 대해 배우는 것보다는 장비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늘어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비를 배워가는 것은 좋았지만 장비 욕심은 내 주제를 넘어섰다. 그러던 중 접하게 된 것이 사진잡지였다. 사진잡지에서는 사진의 스킬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진작가의 사진에 대한 관점이나 신념, 생각 등을 배울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어떻게 사진을 대하여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사진잡지가 장비욕심으로 가득 찾던 나의 생각을 바꾸어 주었고 일반적인 풍경이나 인물 사진 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담긴 사진도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그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사진을 시작한지 2년이 흘렀다. 그 동안, 나의 사진은 나날이 발전했지만 사진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사진을 찍어도 컴퓨터로는 확인도 저장도 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보게 된 것이 잡지였다. 방을 정리하다가 책꽂이 맨 윗칸에 꽂혀있던 먼지 쌓인 잡지를 보게 되었고, 그 잡지를 펴보게 되었다. 잡지에는 이혁준 사진작가를 인터뷰 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 내용 중 “중3 때 였던 것 같아요. 사진을 시작하는 흔한 이유들 중 하나죠, 아버지의 수동카메라. 그때, 그 카메라를 접하고 바로 사진전공을 하는 대학은 어딜까 궁금해서 알아봤던 것이 생각나요.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고3때 허락을 해주셨고 그때부터 여기까지 온 것이죠.”라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사진학과 진학을 희망하며 사진기를 들고 나가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그때가 사진생활 중 가장 많은 사진을 찍었던 시기이고 가장 좋은 사진들이 탄생한 시기였다.
 
   그 날 이후로 매달 잡지를 사러 서점에 갔다. 주변에서는 잡지를 정기구독 하라며 매달 잡지를 사러 가는 나를 말렸지만 내가 직접 서점에 가서 잡지를 구입하는 쾌감은 이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매달 잡지를 사러 서점에 갔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이었고 그 중에 반을 잡지에 투자하다보니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머리와 마음은 정보와 뿌듯함으로 차곡차곡 채워져 갔다.   PC방을 가거나 매점이용을 줄여서 잡지를 구입하면, 뭐랄까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사진잡지는 나에게 있어서 사진 교본이자 선생님이자 길라잡이 이니까......
 

 
     예전에 비해서 카메라의 가격이 많이 내려가고 사진유저가 늘어감에 따라 청소년 사진 인구도 예전 같지는 않다. 실제로 큰 청소년 사진동호회가 몇 개나 되고 내 주변에도 나에게 카메라에 대해 문의하거나 사진을 처음 시작하는데, 비싼 카메라를 구입하고 싶다며 문의하는 친구들이 많다. 이러한 친구들에게나는 사진잡지를 먼저 구입해서 보라고 하거나 나의 잡지를 빌려준다. 그러면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어느 정도의 카메라를 구입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된다. 이처럼 잡지는 그 분야의 길라잡이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는 비단 사진분야 뿐 아니라 각 분야의 잡지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분야이든지 처음 시작할 때, 정확하고 수준 있는 정보를 얻고 싶다면 해당 분야의 잡지를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같은 분야의 잡지라도 각 잡지마다 너무나 다른 내용 구성과 주제선정은 여러종류의 잡지를 보아도 질리지 않는 잡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진작가를 꿈꾸기 전까지, 나의 꿈은 글을 쓰고 편집하는 에디터였다. 사진찍는 에디터...... 정말 멋지지 않을까. 중학교 때 신문동아리에서 3년간 편집장으로 학교 신문을 만들면서 느낀점은 글은 많이 읽어본 사람이 글을 잘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1학년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3학년이 되어서 후배들을 보면서 느껴졌다. 글 잘쓴다고 느껴지는 후배들은 책이나 잡지를 많이 읽는 아이들이었고, 일부 아이들은 잡지에서 문구를 인용하여 신문에 적용시켰다. 나는 3년동안 시도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1학년이 1년 만에 시도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내가 잡지를 볼때에는 평소에는 무시했던 끝맺는 말이나 시작하는 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한 순간에 글 실력이 늘지는 않겠지만 꾸준해 나간다면 늘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나에게 잡지란, 진로를 정해주고 취미의 길잡이이며 글솜씨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다. 앞으로 나에게 잡지란 성공으로 가는 열쇠, 힘들 때 도와주는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책꽂이를 보면 1년 반동안 모은 잡지가 한켠에 꽂혀있다. 그것은 나에겐 추억이자 꿈이자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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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상 (대한민국 클린콘텐츠연합 이사장상)-박정연
 
 
                                                                               
 
 작품명 :
새로 만든 잡지에선 갓 구운 빵 냄새가 난다
 
 
 
 
                                                           
작은 읍내와 시장, 그리고 학교 운동장과 뒷개울이 세상의 전부라고 알았던 열 살 남짓 어린 시절, 내 머리맡엔 늘 ‘새소년’이란 만화잡지가 놓여 있었다. 옴니버스로 연재된 만화들 중에서도 해외여행을 소재로 한 이원복 교수의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만화였다. 주인공 시관이와 병호의 좌충우출 해외배낭여행에 등장하는 파리의 에펠탑과 로마의 콜롯세움으로 대변되는 유럽이라는 세상은 ‘우물안 개구리’같던 내 작은 우주관을 흔들기 충분했다. 가보지 못한 먼 세상에 대한 어린 시절의 막연한 환상과 갈증은 입시준비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그렇게 잠시나마 잊혀진 듯 했지만, 스무살 무렵이 되자, 마음속 잠재 되었던 바깥세상에 대한 나의 꿈과 갈증은 ‘역마살’이라는 또 이름으로 다시 가슴 한구석에서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90년대초 해외여행붐이 본격화되자, 때를 맞춰 ‘여행전문잡지’들이 하나둘씩 출간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뚜르드 몽드(TOUR DE MONDE)’라는 잡지도 그 때 탄생했다. 나는 그 잡지에 국내여행중 생긴 에피소드 한 꼭지를 기고했고, 운좋게도 경품으로 1년치 정기구독권을 얻을 수 있었다. 멋진 풍경의 시원스런 브로마이드 컬러사진이 보너스로 들어간 그 여행잡지속에 투영된 바깥세상은 어린 시절 만화잡지 한권을 통해 키워 온 잠재되어온 내 ‘역마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인지라 해외여행을 실행에 옮기는 대신 ‘역마살’을 주로 여행잡지를 통해 대리만족하기 시작했다. 당시 8~9천원쯤 하던 신간 여행잡지는  당시 용돈으론 부담스러워 종로 YMCA빌딩 옆 골목 헌책방을 누볐다. 몇 달 정도 지난 헌 잡지들은 대부분 권당 2~3천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었고, 마음에 드는 괜찮은 잡지라도 건지는 날은 미팅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난 것처럼 설레이기까지 했다. 어느 새 4평 남짓한 내 작은 공부방은 전공서적대신 수 백 여 권의 여행관련 잡지로 가득 찼고, 그 덕에 어머니의 핀잔과 잔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한쪽 책장에 차곡 차곡 정리된 잡지들은 여느 소장가들의 고급 양장 장서보다 멋져 보였고, 그런 잡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좋았다. 하지만, 그게 훗날 내 운명을 바꾸는 전조가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잡지를 통해 해외여행에 대한 안목이 높아지면서, 여행지에 대한 선호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관광지 대신 사람들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오지나, 남미의 마추픽추나 아프라카, 동남아의 인간냄새 풀풀 나는 오지마을이 가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은 나라가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였다. 그렇지만, 언젠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마음속으로만 결심했을 뿐, 여전히 ‘내전’중이란 소식에 졸업할 때까지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95년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했다. 그렇지만, 매일 반복되는 다람쥐 체바퀴 도는 일상이 지겹고 답답했다.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퇴근후 책장을 뒤져 앙코르 와트 표지사진이 붙은 헌 여행 잡지 한권을 찾아냈다. 갑자기 꼭 가야 할 것 같은 묘한 충동이 밀려왔다. 운명같은 끌림이 있었다. 1999년 12월말 무렵, ‘밀레니엄 버그’ 신드롬 때문에 해외항공여행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때, 운좋게 나는 저렴한 항공권 한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휴가를 얻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잡지로만 보던 앙코르와트, 그리고 또 다른 운명의 기다림
   도착 다음날 이른 새벽, 앙코르와트가 붉은 새벽 여명속에 눈앞에 펼쳐지던 그 순간의 감흥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정글속에 6백 여년간 숨겨졌던, 기괴한 새소리만 들리던 그 으시시한 정적속 미지의 사원에서 느꼈던 소름 끼치는 전율 역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잡지에서 본 모습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읽은 여행잡지 한권으로부터 시작된 캄보디아와의 인연 앞엔 또 다른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일월드컵 준비가 한창이던 2002년 이른 봄, 휴가를 얻어 뭔지 모를 끌림에 훌쩍 캄보디아로 다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정말 소설처럼 우연히 만난 현지 여성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과감히 직장에 사표를 내 던졌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나는 캄보디아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을 했다.
 

 
   나는 현재 캄보디아의 평범한 교민으로 지금 10여 년째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 그 긴 생머리의 아내와 사이에서 세아이를 낳았다. 큰 아들의 이름은 나의 첫 해외여행지인 이탈리아의 수도 이름을 따 ‘로마’라고 지어 주었다.
 
  하지만, 여행잡지 표지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운명적 스토리는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캄보디아에서 오래 살다보니 종종 떠나온 내 나라와 가족, 친구가 그리웠다. 특히, 한글로 된 읽을거리가 그리웠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어쩌다 비행기서 얻어다 준 날짜 지난 신문쪼가리(?)라도 얻는 날에는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같은 기사를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보급되어 ‘읽을 거리’에 대한 갈증은 어느 해소되었지만, 10여년 전만해도 한글로 쓰여진 잡지는 동남아 현지에선 정말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교민수가 4천 여 명으로 늘며 교민신문이 한 두 곳 정도 주간지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발행부수가 그리 많지 않아 구하지 못할 때가 더 많고, 분량도 10 여 쪽 정도에 불과한 복사지 인쇄수준의 ‘타블로이드판’인지라 읽을거리에 대한 타오르는 목마름은 좀체 가시지가 않았다.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판다” - 뜬금없이 시작한 잡지 만들기
   어느 날 지인들과 늦은 밤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내가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업을 하며 몇 년간 모은 푼돈을 모아, 뜻이 맞는 지인 2명과 교민종합잡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교민들에게 현지 실생활생활정보를, 캄보디아를 찾는 배낭여행객들에게는 생생한 여행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정보잡지로 컨셉을 정했다. 기획한 지 한달여 만에 덜컥 주간지 발행을 시작했다. 다만, 기존 교민잡지와는 차별화가 필요했다. 인터넷에 나온 기사를 그대로 옮기거나, ‘짜깁기식’ 기사와 정보는 최대한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직접 발로 뛰고 쓴 생활정보로 지면을 채워야겠다는 의욕을 갖고 잡지 만들기 작업에 매달렸다. 교민생활정보지인 동시에 여행정보잡지인 만큼 캄보디아를 찾은 배낭여행객들을 위한 현지의 생생한 여행정보 제공 역시 필수였다. 이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 마다 전국을 돌아다녔다. 40여 년간의 긴 내전으로 인해 전국이 온통 ‘지뢰밭’인지라 포장도로 빼고는 모든 곳에 항상 폭발사고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마저 감수하며 산과 들녘을 헤맸다. 현지에서 고용한 디자이너들에게 여성동아, 레이디경향 등 한국 여성지 의 세련된 광고를 보여주며, 한국 스타일 광고에 대한 안목도 키워 나가도록  했다. 대신, 현지 인쇄기술과 설비가 워낙 조악하고, 납기를 어기기 일쑤라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조판과 인쇄는 이웃나라인 베트남의 전문인쇄업체에 맡기기로 했다. 교민수를 감안하여 일단 1천부 정도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잡지 만들어 부자된 사람없다”는 주변의 걱정과 비아냥섞인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미리 받을 예상 광고비까지 넣어 미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니 마누라와 아이 셋을 먹여 살리는데 큰 지장은 없을 듯 싶었다.
 

 
   하지만, 매주 새로운 기사를 쓰고 정리하고, 기획하고, 또 독자들이 원하는 생활정보잡지를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작업인 줄 미처 몰랐다. 때론 밤을 꼬박 새워가며 매주 새로운 기획안을 만들어야 했고, 광고영업이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일인다역(一人多役)을 자처하며 깐깐한 광고주들을 직접 만나 설득해야 했다. 나는 좋은 잡지만 만들면, 독자가 늘고 광고가 저절로 붙을 줄 알았다. 인생 최대 실수였고, 큰 착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한국어로 된 잡지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교민들은 제대로 된 ‘한국교민잡지’가 나왔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읽을 거리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시간이 갈수록 나아졌다. 잡지를 만드는 일에 조금씩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1년 쯤 지나자 생소했던 기사쓰기와 편집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광고들도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조금씩 서광이 비치는 듯 싶었다. 처음 36페이지 분량으로 시작한 잡지가 1년쯤 지나자 어느새 68페이지로 거의 두배 가량 늘어났다. 광고는 기대만큼 빨리 늘지는 않았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시작했다.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싶었다.
 
- “잡지 만들어 부자된 사람없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인쇄를 맡겼던 베트남업체 담당자로부터 전화한통이 걸려 왔다. 지면 한구석에 외국연예계 소식을 한 꼭지 실으며, 외국여배우의 늘씬한 비키니 사진 한 컷을 실었는데, 이게 말썽이 난 것이다. ‘선정적인 사진’이라 이유로 베트남 검열당국의 단속에 걸렸다. 한국에서라면 스포츠신문이나 연예잡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난이도(?) 무난한 이미지 컷이었지만, 보수적인 공산국가인 베트남당국의 검열기준은 우리와는 완전히 사정이 달랐다. 이 사실을 간과한 게 큰 잘못이었다. 이미 제본이 끝난 내 ‘생자식’같은 잡지들은 현지 당국에 압수되어 캄보디아 국경도 넘지 못한 채 결국 전량 폐기처분 당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통관에서마저 뒷돈을 요구하는 등 배송문제까지 겹쳐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온 종일 배송과 검열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원고작업과 마감도 자꾸 지연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그동안 참아주던 광고주들이 계약금 환불을 요구해왔다. 광고가 하나 둘 떨어져나가고, 현지직원들의 1~2백 달러 남짓한 임금마저 밀리기 시작했다. 매주 배송과 원고마감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도 결국 지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동업한 지인들과 장시간 논의 끝에 잡지 만드는 일을 포기하기로 했다.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약 2년이란 긴 시간을 결국 허송세월한 셈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잡지에 대한 미련은 남았지만, 이쯤에서 좋은 인생경험했다는 셈치고 마음을 정리했다. 원래하고 있던 여행업을 다시 하기로 했다.
 

 
  그러던 금년 초 어느 날, 뜻밖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4~5년전 쯤 내 뒤를 이어 새로 발간된 교민잡지사에서 “잡지 만드는 일을 도와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오직 의욕만 갖고, 무모하게 덤볐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과거 경험 때문에 나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하지만, 잡지사 사장님의 끈질긴 부탁 끝에, 부업삼아 한다는 조건하에 다시 잡지 만들기를 시작했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거울 삼아 독자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종합생활정보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 나는 갖구운 빵처럼 잡지 냄새가 좋다
   매일 아침 나는 캄보디아 영자신문과 잡지를 읽고 밑줄을 치거나, 인터넷을 검색한 후 중요한 부분은 따로 저장하거나 스크랩한 후 현지뉴스를 정리한 기사이나 논평을 쓰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한달에 한번쯤은 교민사회 유지나 저명인사를 만나 가끔 인터뷰기사도 쓴기도 하고, 교민들에게 꼭 필요한 현지 생활정보들도 꼼꼼히 챙긴다. 다행히, 격주간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발행되기 때문에 원고마감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담도 상당히 많이 줄고, 광고영업도 부서가 따로 있어 지금은 잡지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주력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늘 신선하고 살아있는 생활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애쓴다. 비록, 부업으로 다시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은 본업인 여행업보다 잡지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결국 잡지 만들기가 다시 본업이 되고만 셈이다.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즐겁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처음 잡지를 만들 때 고민꺼리였던 “독자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볼거리사이에서 고민” 역시 나에게 주어진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아마도 ‘잡지쟁이들’이라면 늘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한 달에 두 번씩 발행되는 새잡지가 완성되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빳빳한 표지사진 색상부터 흝어 본다. 그리고, 다소 들뜬 기분으로 페이지를 재빠르게 넘기며 손을 놀려 검사를 한다. 비둘기의 힘찬 날개짓처럼 파닥거리는 새책 페이지 넘기는 소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이다. 새 잡지책에서 나는 잉크냄새마저도 갖 구은 빵처럼 좋다. 검수를 마친 이 잡지들은 이제 내손을 떠나 회사내 캄보디아 직원들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실린 채 프놈펜 시내 교민가정과 교민업소 등에 전달될 것이다. 비록 발행부수 1천 여 권의 보잘 것 없는 작은 영세교민잡지지만, 이역만리 땅에서 고국을 그리워 하며 살아가는 우리 교민들에게는 고국과 세상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할 것이고, 비지니스맨들에게는 현지 경제의 흐름을 전달하는 충실한 신문과 정보지의 역할도 할 것이다. 또한, 생활정보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한 모금의 시원한 생수로, 그리고, 오늘 하루도 치열한 삶에 산 지친 누군가에게는 삶의 작은 낙이자, 활력소가 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내가 만든 잡지 한권이 멋진 서재의 한구석을 차지하길 원치 않는다. 잡지는 잡지가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속 주인공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역이나 엑스트라 처럼 말이다. 때론 던져지고 구겨지며, 휴지처럼 찢겨질 지언정, 10여 년 전 낯선 캄보디아에 와서, 읽을거리가 귀해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두고 두고 곱씹어 보던 그런 신문 쪼가리 처럼 내가 만든 잡지 한권이 누군가의 화장실에서 하루의 근심과 스트레스를 덜어 줄 그런 카타르시스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잡지 만드는 일을 업(業)삼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아직은 감히 ‘잡지쟁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기에는 감히 경력도 미천하고, 충분한 내공도 쌓이지 않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가 만든 잡지를 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유익한 정보를 얻고 유쾌해한다면 나로선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만화잡지에서 시작된 어린 시절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과 갈증은 ‘역마살’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바뀌어, 결국 나를 ‘캄보디아’라는 나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해주었고, 내생명보다도 소중한 내 아이 셋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잡지는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넓은 식견과 더불어, 인생의 쓴맛이란 교훈도 덤으로 안겨 주었다.  어찌 보면 하찮아 보이는 잡지 한권이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만화잡지 한권으로 시작된 나와 잡지 사이의 인연이 언제까지 계속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연으로 인연으로 만들고, 다시 운명으로 만들어준 잡지 한권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내가 만든 잡지가 만들어줄 또 다른 인연이 새삼 기다려진다. 
 
 

“잡지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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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서울특별시장상)-배효정

 작품명 :
플랫폼, 잡지
                                                                                                           
 
 잡지는 내게 그저 잡스러운 종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법전에 숨막히게 들어차있는 한자처럼, 나날이 피둥피둥 부풀어오르는 내 허벅지 셀룰라이트처럼, 책이라고 일컫기에도 민망한 종이더미에는 온통 색채 광고가 빼곡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종이더미’라고 불렀다.
 내게 있어서 잡지가 종이더미의 집합체 명명되던 시절, 나는 잉여더미의 종결체, 고시생이었다. 소위 잘나가는 특목고, 명문대를 나와 동기동창들이 번듯한 직장을 잡을 때 나는 끝도 없이 펼쳐진 법서(法書)를 붙들고 법전을 붙들고 답안지를 붙들고 스탑와치를 붙들고 하루하루를 절망스럽게 붙들고 있었다.
 아마도 잡지에 종이더미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운 것은 그런 이치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잘나가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스타벅스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잔에 멋드러진 패션잡지를 곁들였고 나는 퀴퀴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법서에 손 때를 타 구질구질해진 법전을 곁들였다. 내게는 절대로 여유롭게 엄지, 검지 손가락 지문에 부들부들하면서도 빳빳한 잡지 종이 오른쪽 귓퉁이의 감촉을 전해줄 수 있는 그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신세 한탄에 부러움 한 스푼을 얹어 바람에 흘려보내곤 하던 시절, 법서와 법전은 고시생이던 내게 뗄 수 없는 손발같은 것이었고, 손발을 멋드러져보이는 잡지로 갈아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가까이 할 수 없다면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현명했기에 나는 잡지에 종이더미라는 라벨이 붙이고 내 대뇌 속 금서(禁書)목록 깊숙한 어딘가에 쳐박아버렸던 것이다.
 그 다음 해 나는 1차 시험에 낙방했다. 불과 평균 1점도 채 되지 않는 점수로 낙방해버렸던 고시생은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자아를 놓고 정신을 놓고 어두운 원룸방에 침잠하고 말았다. 나는 빨간 추리닝(트레이닝복)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검정색 구두를 신고 근처 편의점에서 내다파는 냉동식품에 내 주둥이를 걸친 채 살게 되었다. 밤이 되면 또 이름 모를 자책감과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소주 몇 잔을 걸치고 잠들면 어느 덧 새로운 다음 날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뜨면 다가오는 새로운 아침에 몸서리치며 온몸으로 거부하다 마지못해 일어나 똑같은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렇게 어둠의 침잠기를 보내던 어느 초가을 즈음, 나는 택배를 하나 받았다. 거제도에서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거기서 예쁜 것 있으면 아무거나 하나 골라놔라. 한심한 것아’
쿨 하게, 산뜻하게, 고시생 잉여인간에서 공부조차 하지 않는 침잠기의 잉여인간의 늪으로 추락한 나를 나무라는 간결한 형용사, ‘한심한’을 녹여내어 엄마는 내게 책을 한 권 보냈다. 그것은 내가 작년에 종이더미라는 라벨을 붙여 대뇌 깊숙한 곳 어딘가로 추방시킨 잡지, 그 중에서도 소비와 허영의 총집적체로 여겨져 추방된 최고의 금서(禁書), 패션잡지였다.
 

 나는 그 때 해야할 일 자체를 상정함이 없이 흘려보내는 인생의 한 챕터 속에 헤매는 영혼이었기 때문에, 합격이라는 규율이 금서목록으로 지정해두었던 잡지를 일탈하는 심정으로 주저없이 넘겨보았다.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미세한 전류가 지문의 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전해졌다. 내가 ‘더미’로 규정했던 수많은 광고면들 조차 다양한 색감으로 내 동공을 흔들리게 했고 지면에 실린 글들은 눈에 띄는 글씨로 색다른 내용으로 내 눈을 크게 뜨게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지 못한 것들, 여름철 피부관리법, 이번 시즌 추천하는 휴양지 룩, 유명 스타들의 소식 등이 심층적으로 논의되어 독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청량했다. 그 정보들에 대한 유익함에 대한 평가는 뒤로하고, 내 몸이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 때의 그 느낌, 그것은 청량감이었다. 시원한 사이다의 병 뚜껑이 ‘펑’ 떠지는 동시에 탄산가스가 올라오는 미세한 소리를 극대화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도는 사이다 광고처럼, 그것들은 정말이지 청량했다. 
 외울 필요도 없었고, 필요 없는 것들은 내가 주체적으로 버릴 수 있으며, 눈길이 가는 것은 눈길을 두고, 시시한 것들은 재빨리 넘기면 그만이었다. 잡지는 보다라는 동사보다는 넘겨가며 읽는다는 동사가 적합한 장르였다. 나는 잡지를 넘기며 세상에 수많은 내 또래집단 여자(그 잡지의 주요 독자층은 2-30대 여성이었다)들이 이렇게 법 말고 다양한 곳에 관심을 두고 있음에 놀라움을 느꼈다. 일상적인 2-30대 여성들의 삶 한 켠에 아웃사이더로 1년여를 살아온 내게 그것은 영화 속 주인공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할 때의 클리셰한 표현,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천천히, 1950년대 흑백영화가 상영되는 것처럼, 1년 전 치열하게 법서에 묻혀 생활하던 내가 떠올랐다. 남들보다 빠른 합격, 더 좋은 직업, 더 높은 연봉을 위하여 내 생활의 중심은 ‘나’에서 ‘공부하는 나’로 전치되었고, 일상적 생활패턴 역시 법공부를 위한 최소화의 방식으로 차츰차츰 법공부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러면서 내게는 여러 가지 증상들이 나타났다. 공부를 하던 기간 동안 잊을만하면 찾아오던 여러 가지 증상들, 귓 속 달팽이관이 흔들려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은 느낌, 두통, 알 수 없는 우울감, 나는 고시생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고시병(考試病)이라고만 치부했었건만 그것들은 사실 삶의 균형감을 잃은 것에서 시작되는 증상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 없이 그날그날 봐야하는 법서의 진도와 모의고사에 내 삶을 기꺼이 내던져준 치열한 젊은 날이 내게 남겨준 상처였다.
 

 잡지의 마지막 부분 즈음에서, 별자리 운세를 보게 되었다. 그 달 별자리 운세는  “너무 큰 의미 부여하지 말고 세상과 내가 물아일체를 이루도록 힘 써”라고 물고기자리 독자들에게 충고하고 있었다. 심심풀이 땅콩 한 순간 재미를 위해 적혀진 별자리 운세풀이였겠지만 뭔가 따가운 회초리에 맞은 것 같은 통증이 전해졌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기억 속에서 고시생으로서 기꺼이 자기 삶을 오롯이 법공부에 바친 채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면서도 그것을 청춘의 치열함으로, 미래를 저당잡힌 이 시대 엘리트의 당연한 의무로 일종의 묘한 프라이드까지 느낀다는 것은 확실히 비정상적인 삶이었으니까. 물고기자리 가을 운세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은 기분이었다.
  지나쳤지만 결코 인정할 수 없던 학업량, 나를 태워죽일 것만 같은 경쟁의식,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지나친 성취중독... 나를 끊임없이 오롯이 투신함으로써 절름발이 위태로운 삶을 살게 해 온 그것들로부터 나를 놓아주고 세상과 물아일체가 되어야 할 시간이 왔음을 나는 직감했다.
 나는 잡지의 마지막 지면을 닫고 서점에 갔다. 그 다음해(2010년) 사법시험준비를 위한 교재를 몇 권 집고, 패션 잡지 두 권을 집었다.
 그 다음 날부터 다시 나는 도서관에 출근했다. 대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생활을 보냈던 도서관 동선에 변화를 주어 점심시간에는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잡지를 넘겼고, 밤 10시부터 친구와 운동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에는 잡지를 보면서 1-2주일에 한 번씩 내게 선물해준 일요일에 입고 도서관을 나갈 옷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매일 밤마다 씻을 수 있는 더 좋은 세안제에 관한 기사를 읽기도 했다. 언젠가는 가볼 맛집 주소를 메모해놓기도 하고, 언젠가는 해볼 스포츠 활동들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종이더미였던 잡지는 카페 한 구석에서 아메리카노와 함께, 내 좁은 원룸 방 베개 말미에서,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라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잡지는, 팍팍한 회색빛 고시생 일상 속에서 내가 파묻히지 않고 두 발로 당당히 버텨내며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나래를 기꺼이 허용케 하는 나만의 다채로운 플랫폼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잡지에서 보고 메모해두었던 몇 개 스타일의 옷들을 사고, 서울 몇 군데 맛집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고, ‘멋진 여성’이라면 배울 가치가 있다고 소개되었던 운동들 중 실내 암벽등반과 딩기요트를 배웠다. 이제 상상 속의 플랫폼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던 기차는 그렇게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현실 속 레일을 멋지게 달리고 있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은 ‘꽃’이라는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꽃이 아니라고 노래했었다. 잡지도 내게 마찬가지였다. 종이더미에 불과했던 그것은 우연히 엄마에게서 전해받아 내가 그것을 읽고 난 이후 ‘잡지’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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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문화체육부장관상)-김경인

 작품명 :
엄마의 첫 번째 선생님
 
                                                                                                           
 
  어릴 적 우리 집은 참 많이 가난했었다.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지만, 그래도 우리 집은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했었다. 게다가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엄마는 글씨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셈도 제대로 하지 못해 하루 종일 장사를 하고서도 거스름돈을 잘못 내줘 툭하면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야야! 이기 얼매고? 와 계산이 이레 안 맞노? 뭐가 잘못된 기고?”
  늦은 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엄마는 툭하면 잠자는 나를 흔들어 깨우며 도움을 청하곤 하셨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럴 때마다 짜증을 부려대며 엄마에게 면박을 주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엄마는 사람을 깨우고 난리야? 오늘은 또 얼마를 손해       봤는데? 세상에 엄마 같은 사람은 둘도 없을 거야!”
  그렇게 내가 짜증을 부리면, 엄마는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선 미안하다며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그 무렵 나는 모든 게 다 창피하고 싫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도, 우리 엄마가 친구들의 엄마처럼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도 나는 모두 다 싫기만 했다.
  가끔 길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엄마는 모두 다 한결같이 멋진 옷차림에 예쁜 화장을 하고 걸음걸이에서 조차 교양이 묻어나는 모습이었지만, 우리 엄마는 그게 아니었다. 언제나 무릎이 이만큼 튀어 나온 몸빼 바지에 부스스한 머리, 게다가 그 무렵엔 생선을 파시느라 몸에선 언제나 생선 비린내가 가시질 않는 정말이지 창피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하교 길에 우연히 만난 엄마가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를 때에도, 나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며 저만치 도망을 쳐버렸다. 또 학교에서 학부모 초대행사라도 할라치면, 엄마가 많이 편찮으시다거나 멀리 다니러 가셨다는 거짓말로 절대로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 일이 없게 만들곤 했다.
  ‘언제쯤이면 나는 이런 환경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될까? 그런 날이 내게        오기는 하는 걸까?’
  눈앞이 캄캄했다. 내겐 한 숟갈만큼의 희망도, 꿈도 없었다.
  그 날은 여름 방학을 며칠 앞 둔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선생님은 전교생 중에 납부금을 내지 않은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고 교장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내게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차라리 학교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내겐 없었다.
  ‘그래, 그만 두자. 학교가 다 무슨 소용이야? 돈을 버는 거야. 내가 돈을 벌      어야 내 동생들이라도 고생을 안 하지!’
  나는 그 날, 그렇게 가출을 결심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돈을 벌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자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엄마에게로 갔다.
  저만치 가게도 없이 남의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사를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큰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며 생선을 팔기 위해 애를 쓰고 계셨다.
  “보이소,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생선 좀 사 가이소!”
  아주머니 한 분이 엄마의 생선을 샀다. 엄마는 옆에 놓여있던 겉장이 떨어져 나간 잡지 한 장을 쭈욱 찢더니 그 종이에 생선을 둘둘 말아 손님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엄마 뒤편에 놓인 나무판자에 작대기 하나를 그어 놓으셨다. 아마도 그 날 그 날 팔려나간 생선의 숫자를 그렇게 엄마만 알 수 있게 적어놓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야 나를 발견한 엄마는 왜 이 시간에 내가 장터에 왔는지는 묻지도 않고, 교복에 생선냄새 벤다며 얼른 집에 가서 동생들 밥이나 해주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엄마는 생선좌판을 뒤져, 조금 있으면 상하게 될 고등어 한 마리를 찾아 잡지 종이에 둘둘 말아 내게 건네 주셨다. 얼른 씻어서 동생들과 구워 먹으라고 하시면서...
  그동안 엄마 속 썩인 거 잘못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글씨를 모른다고 무시했던 것도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나는 엄마에게 제대로 마음속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들이 먹을 고등어를 구워 놓기 위해, 고등어를 싸고 있던 잡지 종이를 풀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뿌옇게 변한 시야 속으로 울퉁불퉁 찢겨진 종이의 사진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거기엔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운 아저씨의 특이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위에는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단지 포기라는 말이 있을 뿐!’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의미 없는 나의 눈길은 그 한 장의 잡지 종이에 가 있었다. 사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
  사진속의 그 아저씨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한 자신의 장애 때문에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저씨는 꿈을 포기할 수도 없었단다. 오랜 생각 끝에, 손을 쓰지 못하면 발을 쓰면 될 게 아니냐고 생각한 사진속의 그 아저씨는 손대신 발로 붓을 잡고 그림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상에! 손대신 발로 그림을 그리다니...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까?’
  그러나 아저씨는 그런 힘든 과정을 잘 이겨냈고 결국 화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장애인으로 낳아 준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세상을 비관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자신이 희망을 버렸다면 자신은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라고 아저씨는 말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다음 내용은 찢어져서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발로 그린 그림도 일부만 남아 있었다.
  찢어진 잡지의 작은 종이 한 장이 내 눈 앞에서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대문짝만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나 엄마를 원망하고 이제 더는 희망이 없다고 그래서 더는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갈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동생들을 위해 밥을 지으려 하던 내게 그 한 장의 잡지 내용은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런 아저씨도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없는 노력으로 기어이 꿈을 이루어 냈는데, 나는 과연 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단 말인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납부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을 겪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출이나 하려 했던 못난 나!
  내 앞에 생선 비린내를 풍기며 아무렇게나 찢겨져 있는 그 종이 한 장은 나를 참 많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손대신 발로 붓을 잡고 있는 사진 속 아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넌 지금까지 무슨 노력을 해 봤니? 인생의 목표를 세우기는 해 봤니? 저        아저씨를 봐! 아저씨는 손을 대신해서 발로 붓을 잡았다는데, 바보야! 너는 지     금까지 건강한 몸으로 도대체 뭘 하며 살았느냐구?’
  스스로 던진 내 질문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는데도 아무도 나를 잘못했다고 나무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래,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냐. 납부금 조금 늦게 낼 수도 있는 거지.    학교에서 쫓겨 날 수도 있지 뭐! 안 그래? 그렇지만 내겐 손도 있고 건강한 몸    도 있잖아. 그런데 바보같이 뭘 두려워 해?’
 

  나는 비린내 나는 그 잡지 한 장을 걸레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구김살이 없어지도록 손으로 눌러가며 싹싹 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가출을 하겠다던 생각도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아니 오히려 건강하게 나를 낳아 잘 키워주신 엄마가 정말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나는 엄마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엄마를 꼬옥 안아드렸다. 다른 때와는 다른 나의 행동에 크게 놀란 엄마는 내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와 아카노? 니 무슨 일 있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그 종이를 내밀며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어왔다. 엄마는 내 손에서 그 종이를 받아 들더니 뚫어져라 그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엄마의 손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정말이가? 이 사람 참말로 대단태이, 우째 사람이 이럴 수가 있노. 멀쩡하게    두 눈이 있는데도 눈 뜬 장님맹키로 글씨도 모르고 사는 내 같은 바보도 있고    마는, 손도 몬 쓰매 발로 그림을 우째 그릴 생각을 다 했을꼬... 기적이라카는기    있다 카드마는...참말로 이기 기적이대이!”
  엄마는 잡지속의 아저씨 얼굴을 자꾸만 쓰다듬으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또 하나의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래, 우리 엄마한테도 글씨를 가르쳐 드리는 거야. 엄마도 할 수 있            어!’
   나는 흥분해서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도 글씨 배우세요! 그럼 엄마도 눈 뜬 장님에서 벗어날 수 있        어! 우리도 해 봐요. 그 기적!”
  그러나 엄마는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꿈을 향해 나가는 그 첫 번째 목표로 불쌍한 우리 엄마를 문맹에서 벗어나게 해드리겠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엔 싫다고 하던 엄마도, 결국엔 해보겠다며 용기를 내셨다. 우리는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마땅히 엄마가 공부할 교재가 없었다. 그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야야~ 이 종이에 있는 글씨부터 가르쳐주마 안 되겠나? 이 사람 이야기부터     내 눈으로 직접 읽어보고 싶대이.”
  엄마도 나처럼 그 아저씨에게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 종이를 교재로 삼아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는 엄마에게 우선 아주 기초적인 글자부터 가르쳐 드리기로 하고 매일 열 개씩 기초적인 낱말 숙제를 내드렸다. 물론 그 종이에 나오는 낱말을 중심으로, 장사하는 틈틈이 공부 하실 수 있도록 내 나름대로의 손 카드도 만들었다. 덧셈과 뺄셈도 함께 가르쳐 드리기로 했다. 그 잡지의 종이 한 장이 자연스레 엄마의 교과서가 된 셈이다.
 

  그 후로 우리 생활은 참 많이 달라졌다. 글씨도 모르고 셈도 할 줄 몰라 내가 창피하게만 생각 하던 우리 엄마가, 틈만 나면 공부를 하는 엄마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장터에서 제일 유명한 학생이 되었다.
  장터의 엄마 친구 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마에게 공책과 볼펜 등을 선물하며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덕분에 엄마는 누구보다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글씨를 터득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봐라. 내 오늘은 요까지 공부했는데 잘 몬 쓴 거 없나 보그라.”
  엄마는 내가 내주는 숙제보다 언제나 더 많은 양을 공부해 오셨고, 차츰 셈을 잘 못해 손해를 보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고 엄마는 서툴게나마 잡지에서 읽은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실 수도 있게 되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점점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글자를 모를 때는 종이만 보마 생선 싸는 데에 쓰고 싶었대이. 거기 써 있는     글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아이가. 그칸데 요새는 다른 기라. 아는 글            자가 보이니까 고물상 아지메가 잡지를 주마 뭔 사연이 있나 우선 읽어보고      싶은 기라. 그래가 요새 고물상 아지메만 기다린다 아이가.”
  엄마는 환하게 웃으셨다.
  이런 게 바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잡지 속의 아저씨에게서 일어났던 기적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리 집에도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친구들의 엄마처럼 향긋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엄마는 아니지만, 나는 어느새 엄마에게서 나는 생선 비린내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엄마의 딸이 되고 있었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글씨를 가르쳐 준 나도 물론 고맙지만, 엄마에게 공부를 하게 해 준 그 잡지와 그 아저씨가 나보다 더 고맙다고... 생각해 보니 엄마의 첫 번째 선생님은 바로 이름 모를 그 잡지라면서 엄마는 또 환하게 웃으셨다.
  이제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사진속의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내게 전해준 소중한 교훈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그  잡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그 날 가출을 했을 테고, 어쩌면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가끔 사는 게 힘겹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그 날 생선을 싸고 있었던 그 냄새나는 잡지 한 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몸이 일그러진 채로 환하게 웃고 있던 그 아저씨를 떠올린다.
 

  그러면 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세상에 절대로 불가능은 없어. 포기라는 말이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힘 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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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상)-신인혜
 
 작품명 :
 당신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약 500m 전방 교차로에서 좌회전입니다.“
 “약 300m 전방 교차로에서 우회전입니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음성 안내를 따라 자동차 핸들을 꺾는다. 처음 방문하는 낯선 도시. 운전을 처음 배울 때처럼 등줄기에 긴장이 흐른다.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몇 번 더 핸들을 꺾는다. 곧 시야에 목적지가 보인다.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초행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도를 살피고, 행인에게 물어도 목적지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두 시간 헤메는 건 기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전국 각지 어디든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국내 뿐이랴. 해외도 걱정 없다. 더 이상 초행길이 두렵지 않은 건 내비게이션 덕분이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언제 어디서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자동으로 보여주는 시스템. 이제는 내 삶에서 뗄 레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나에게는 이런 내비게이션이 또 한 대 있다. 아니 여러 대 있다. 바로 잡지다. 수많은 텍스트와 이미지로 채워진 잡지는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훌륭한 지도다. 그 안에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길이 표시되어 있고,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가 곳곳에 존재한다. 나는 잡지 안에서 내 삶의 목적지를 찾았고, 지금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열여섯, 목적지를 검색하다
 
 내가 처음 잡지를 구입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한 나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을 유치원, 초등학생들이 보는 어린이용 영화로 생각했었다. 그 안에 사회적, 문화적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주제 의식이 담겨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을 작가의 세계관과 철학이 담긴 한 편의 ‘작품’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나는 애니메이션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의 정보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단편적인 작품 소개와 작가 이력이 전부였다. 그 때 우연히 서점에서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를 보게 되었다. 국내외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소개와 분석이 가득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마냥 나는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 안에서 <공각기동대>, <아키라>, <원령공주> 등의 다양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접했다.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원더풀 데이즈>, <마리이야기>, <오세암> 등을 알게 된 것 역시 잡지 속에서였다. 특히 2003년에 공개된 <원더풀 데이즈>는 내 인생의 전환점과 같은 작품이었다. 2D와 3D 미니어처 촬영을 결합한 기술적 시도도 놀라웠지만, 관객의 폭을 넓힌 부분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국내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TV 애니메이션이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미국의 월트 디즈니나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 등에서 제작된 작품들 외에는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등장한 <원더풀 데이즈>는 우리나라에서도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적 소재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원더풀 데이즈> 개봉 이후 나는 나의 첫 번째 목적지를 설정했다. 바로 애니메이션 작가였다.
 목적지를 설정하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잡지 읽기가 단순 정보 수집이었다면, 이후의 잡지 읽기는 창작의 배양토가 되었다. 나는 잡지 안에서 만난 수많은 작품들을 뜯어보기도 하고 맞춰보기도 했다.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고,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나며, 그로 인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분석하는 과정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작품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그 작품의 내용을 새롭게 구성하다 보면 다양한 아이디어와 스토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잡지에 뿌리를 내린 한그루의 나무와 같았다. 잡지 속 작품들을 보고 배우는 동안 가지는 나날이 무성해졌다. 초록빛으로 물들은 나뭇가지는 애니메이션 공모전 수상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목적지를 설정한지 단 1년 만의 일이었다.
 
 스물, 경로를 이탈하다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겠다던 나의 경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막혔다. 집안 사정으로 인해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의 진학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급하게 수능 성적에 맞춰 일반 4년제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목적지를 상실한 길은 시시때때로 막히고 무너졌다. 나는 드넓은 사회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길은 갑작스럽게 열렸다. 약속시간에 늦은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찾은 서점에서였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내가 고른 책은 패션 잡지였다. 이번 시즌에는 어떤 옷들이 유행하고, 어떤 메이크업이 주목받을 예정이다 라는 내용의 기사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은 뒷부분에 자리한 문화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연금술사>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파울로 코엘료가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있었다. 나는 잡지를 덮은 후 파울로 코엘료의 책을 찾았다. <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등 몇몇 익숙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중 한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바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였다.
 

 집에 돌아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쉼 없이 끝까지 읽었다. 책을 덮은 후 나에게는 단 한 줄의 문장이 남았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뭔가를 바꾸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체념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체념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체념을, 나의 무기력함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목적지를 재설정하다
 
 내가 잡지를 고르는 방식은 단순했다. ‘흥미로운 이야기’. 나는 잡지 안에서 사람의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고난과 역경을 넘어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체념이 아닌 열정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나는 잡지를 통해 체념을 용기로, 무기력함을 열정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잡지 속에서 그 열쇠를 찾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일까>, <불안>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인 ‘알랭 드 보통’. 나는 당시만 해도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 패션 잡지에서 진행한 인터뷰 기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기사에서 책을 통해 ‘사람에 관한 순수한 관심과 생각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토론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애니메이션 작가를 꿈꿨었는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왜’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왜’ 라는 질문 앞에는 ‘그냥’ 혹은 ‘좋아서’ 등의 단편적인 단어들만이 줄을 섰다.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 때 나에게 ‘알랭 드 보통’이 떠올랐다. 사람에 관한 관심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던 그. 나는 다시 그의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마지막 단어를 읽는 순간 나는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애니메이션 작가를 꿈꾼 이유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야기가 지닌 메시지, 의미에 대한 동경이 나를 애니메이션 작가로 이끌었던 것이다. 경로를 이탈한지 6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나는 다시 목적지를 설정할 수 있었다. 그 목적지는 바로 스토리텔러,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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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상)-조향순

 작품명 :
휴대폰 대신 잡지를
 
 
1. 카톡 공해
 
어제는 파마를 하려고 미용실에 갔다. 파마도 하고 염색도 하려면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린다. 어떤 사람들은 파마 모자를 쓴 채로 집에 다녀오기도 하고, 메니큐를 이것저것 발라보고 지우고 했다. 상당히 지루한 표정들이다.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미용실에서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파마약을 바르고는 바로 마음에 드는 잡지 한 권을 집어 든다. 이 시간은 잡지를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다행히도 내가 늘 가는 이 미용실은 그다지 큰 미용실은 아니지만 여러 종류의 잡지들을 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잡지 한 권을 골라 읽기 시작하면 반틈도 못 읽어 어느새 중화제를 발라야 하고, 중화제를 바르고서 20분가량 기다리는 중에도 에세이 한두 편 정도는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어제는 이 즐거운 독서에 방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파마약을 바르고 있는 중에 20대쯤의 청년들이 세 명 들어왔다. 한 사람은 노랑머리로 염색을 해달라고 했고, 두 사람은 파마를 하러 왔다고 했다. 이들이 미용실에 들어서자말자 바로 카톡!카톡! 신호가 오고 여기저기서 쉬지 않고 카톡!카톡!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도무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예 포기하고 돌아보니 이들뿐만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아줌마 둘도 역시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잡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들이 나보다 늦게 왔으니, 나는 미장원을 나설 때까지 계속 카톡!카톡! 소음에 시달리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근래에 가장 참기 어려운 소음이었다.  휴대폰 대신에 잡지를 읽히는 방법은 없을까.
 
 
2. 어른 잡지 읽던 아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잡지를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읽을는지 모르지만 내게서 잡지는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생각해보면 내 꿈은 잡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경상북도에서도 오지로 소문이 난 청송군에서 초등학교시절을 보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책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우리 집에는 청송군에서 넷뿐인 대학생이 우리 집에 둘 있었으니 나보다 열세 살 손위인 오빠와 열두 살 위인 큰 언니였다. 오빠와 언니 덕분에 나는 다른 아이들이 구경도 하지 못하는 동아전과와 동아 수련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생인 언니가 가끔씩 다 읽은 잡지를 두고 갔다. 여상이었던가 여성동아이었던가, 그 중 어디에선가 강신재씨의 그대의 찬 손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소설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유세련이었던 것도 기억한다. 어른들의 책에 재미를 들인 아이였다. 어떤 책에 소개된 여중생의 소설 ‘살얼음을 디딘 소녀’를 보고 나도 쓸 수 있다고 샘을 내면서 밤잠을 설쳤다. 이미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3. 꿈을 키워준 그 잡지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줄곧 글을 써왔는데, 당시의 내 발표 공간은 주로 여성잡지들의 독자 문원이었다. 당시의 독자 문원은 상당히 막강했다. 지금 기성 시인들 중에는 그 때 거기서 이름이 오르내리던 분들도 많다.  박목월 김현승 손소희 등이 작품을 선정하시는 분들이었으니 투고량도 엄청나서 그 달에 뽑히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여기저기 숱하게 이름이 올랐다. 때로는 큰언니와 작은 언니의 이름을 빌리기도 했다.
방학 때 시골에 가보니 새농민이란 잡지가 보였다. 그래서 방학 중에 시 한 편을 보냈다. 선자인 이근배시인이 아주 아름다운 작품(佳作)이라고 칭찬을 하셔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아주 홍역을 치렀다. 그 작품의 주소를 시골집으로 했더니만 편지가 쏟아지는데, 하루에 여남은 통씩이나 우체부가 들고 왔다. 주로 남자 이름들이었으니 말하자면 연애편지라고 어머니는 그 편지들을 오는 족족 거두어서 아버지가 보실까봐 태우곤 하셨다.
 
學園과 여학생은 내 문학연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잡지이다.
학원은 그 당시 청소년들의 유일한 교양지였을 뿐만 아니라 내 꿈을 키워준 잡지이다. 학원에 연재되었던 김내성의 검은 별, 정비석의 홍길동, 김성환의 만화 삼국지 때문에 책이 나올 때쯤이면 나는 미리 서너 번이나 서점에서 헛걸음할 때가 있을 만큼 기다리곤 했다. 지금도 내게는 유비, 관우, 장비, 동탁, 여포 등의 얼굴이 김성환 화백이 그렸던 그 만화의 얼굴로 박혀져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으면서도 줄곧 그 때 그 얼굴을 상기하면서 읽었다. 그 후의 거꾸리군 장다리군도 잊을 수 없다.
 

학원 문단은 당시 청소년들의 최고의 문예 경연장이었다. 거기서 유경환, 이제하, 김옥영, 마광수, 정호승 등은 고정 스타들이라 지금의 아이돌 못잖은 선망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다. 작고한 우경환 시인은 수려한 용모로 사진 소설의 모델로도 등장했다. 아마 그들도 어쩌면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학원이란 잡지를 잊지 못하고 있을 게다. 특히 연말의 학원 문학상은 어른들의 신춘예장 못지않을 만큼 치열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원 문학상에서 ‘사진’이란 제목의 시로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상장과 상품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받았다. 
여학생이란 잡지에도 나는 종종 글을 올렸다. 그러나 학원보다는 통속적인 내용이 많았고  문예란이 그다지 치열하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내가 직장 생활에 들어서도 여성잡지의 독자문원란을 이용했다. 줄곧 잡지사의 독자 문원을 잊지 못했다. 시인이니 수필가니 등의 명함이나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내세우고 싶지 않았고,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문학 지망생이 좋았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주부생활이나 여성동아에서는 독자문원란에 꽤나 성의와 비중을 두었다.
80년대 어느 날 주부생활 문원란에 내 수필 ‘30대 예찬’이 실렸다. 당시 선자는 박완서 선생님이셨는데, 그 때의 격려를 나는 잊지 못한다.
- 조향순씨의 ‘30대 예찬’을 뽑는다. 그의 무르익은 30대의 자신감이 참으로 부럽다. 이런 유의 소위 긍정적인 인생 예찬은 자칫하면 과장되고 공소한 미사여구나 설교조의 도식적인 결론에 이르기 쉬운데, 그는 흉내 내지 않은 자기만의 체험, 자기만의 관찰과 유려한 문장으로 그만이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인생예찬을 창출해내고 있다. 내가 여기서 굳이 그의 30대 예찬을 인생 예찬으로 고쳐 부르는 것은 그는 40대에도 50대에도 아니 7,80대에도 역시 그 나이를 예찬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그의 감수성은 그만큼 건강하고 씩씩해 보인다. -
 
 
4. 휴대폰에서 잡지로
 
나는 지금도 잡지에 관심이 많다. 서점에 가서도 잡지들을 훑어본다. 미장원에 가면 지나간 잡지까지 샅샅이 훑어본다. 여성잡지들은 광고가 대부분이다. 누군가가 잡지는 사는 게 아니라 미장원이나 은행 등지에서 한번 쫙 훑어보면 끝이라고 하더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번들번들 좋은 용지에다 연예인의 인터뷰나 얼굴들, 그리고는  옷 광고, 구두 광고, 성형 광고, 주방용품 광고 등등 마치 광고 전문지 같다. 물론 광고 없이 잡지를 만들 수 있을까마는 어렵더라도 잡지를 만드는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념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잡지를 읽는 사람들로 바뀌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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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한국잡지협회 회장상)-박혜균

 작품명 :
 다시 한 번 날아보자!
 
                                                                                                           
 
  우리 집 우편함에는 매월 몇 권의 월간지가 배달되고 있습니다.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정기구독을 신청한 잡지들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마을이라, 신문도 우편으로만 배달이 되는 곳입니다.
마을에는 모두 일흔이 넘은 분들이 살고 있으며, 마을의 규모도 매우 작습니다.
한마디로 가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규모의 산촌 마을인 셈이죠.
그러니 이 마을에서 ‘문화적 혜택’이라던가, ‘문화생활’이라는 단어는 그리 효용성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문을 구독하는 집도 없고, 책을 읽는 분은 더 더욱 없습니다.
책이라고는 군청에서 증여하여 마을회관에 들어오는 [디지털 농업]이라는 농사관련 월간지뿐입니다.
이마저도 남자들만 건성으로 읽고, 여자들은(할머니들) 읽지 않습니다.
시력도 좋지 않고, 이제 와서 그 책을 읽어봐야 삶이 더 나아질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어떤 할머니들은 ‘글이란 남자들만 알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이런 마을에 저희 부부가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기신부전증 환자입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 직전에 혈액투석을 위한 혈관수술을 했습니다.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하니까 이틀마다 피를 걸러내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혈관수술을 하고 나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 이틀마다 그 굵은 바늘이 주는 아픔을 견뎌야 하나?’
결국은 공포감마저 생겨, 불면증이 생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그러더군요.
“책이나 방송에서 보면 말기암환자도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들어가서 열심히 사니까 병이 낫더라. 이틀마다 병원에 가서 투석을 하며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좋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당시에 저는 삶에 아주 무기력한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탓에 제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그냥 남편의 뜻에 따라 도시의 살림을 정리하고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를 와보니 정말 난감하더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책을 친구삼아 지내는 일이 익숙해서 도서관 근처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집을 구입한 이곳은 도서관과는 먼 곳인데다가 교통도 아주 좋지 않습니다.
자기 차량이 없으면 라면 한 봉지를 사는 작은 볼일도 번거로운 곳이었죠.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곳에 집을 마련할 수 있느냐?’며 남편을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구입하여 이사를 한 상태라, 제가 아무리 남편을 다그쳐도 우리의 삶터가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월간지의 정기구독이었습니다.
또한 남편이 2주에 한 번씩 저를 도서관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책의 대여 기간이 14일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결정을 하고 첫 달 치의 월간지가 저희 집 우편함에 착착 꽂혔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곳에서도 잘 하면 적응하며 살 수 있겠다!’는 행복함에 기분이 조금 나아지더군요.
시골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작게나마 찾았다는 즐거운 기분으로 첫 투석일에 병원에 갔습니다.
첫 투석을 하면 일주일정도 입원을 해야 해서, 배달되어온 월간지 몇 권도 가방에 넣어서 갔습니다.
임상 병리 검사 결과서가 나오고 담당 선생님 앞에 앉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검사 결과서를 보시다 말고, 두툼한 제 가방에 시선을 옮기셨습니다.
“그 가방은 왜 그리 불룩해요? 입원준비를 해 오신 겁니까?”
가방에 든 월간지들을 꺼내서 보여드렸습니다.
“병원에서 읽으려고 가져왔어요. 며칠 동안 입원해야 할까요?”
   그날, 저는 입원하지 않았습니다.
투석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때보다 수치가 조금 좋아져서 미뤄보자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시골에서 버텨낼 구실을 찾은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책장 정리를 했습니다.
앞으로 월간지를 받으면 정리해서 꽂아야 하기에 빈 칸을 좀 만들어두어야 했거든요.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이 별 이상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저는 투석을 하지 않은 대신, 투고를 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월간지는 ‘독자의 글’을 받는 코너나, 독자엽서를 작성해서 보내면 원고료나 상품권을 줍니다.
 

그동안에는 다른 구독자들이 맛깔스럽게 쓴 글을 읽으면서 ‘이 분들은 글을 정말 잘 쓰는구나!’하는 부러움만 가졌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집안일과 텃밭을 가꾸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뭔가 다른 일이나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긑에 ‘나도 글을 한 써볼까?’하면서 저의 소소한 일상을 적어 보냈는데, 잡지에 게재가 되었습니다.
5만원이라는 거금도 제 통장으로 입금을 시켜주셨어요.
투석을 하기 위한 혈관수술을 하면서 저는 경제적인 활동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나는 그냥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밖에 안되나 보다’
무능해진 자신이 참 싫었는데, 제가 쓴 글이 현금이 되서 돌아오니 신기하다 못해 꿈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렇게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겪어보니 삶에 있어서 자신감이라는 것은 물이나 공기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생기니 병을 이겨내야 한다는 다짐도 더 굳게 하게 되어 제가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을 정도니까요.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독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독서, 글쓰기, 가벼운 운동’이라고 대답을 하게 되었죠.
운동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꼭 마을회관 앞을 지나오게 됩니다.
하루는 운동을 다녀오면서 평소처럼 마을 회관 앞을 지나오는데 어르신들이 부르셨습니다.
“새댁아! 놀다 가라. 이사 왔다는 인사는 하고 놀러는 안 오고 그라노?”
별수 없이 들렀더니 제게 자꾸 재미있는 얘기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제 사는 것이야 날마다 같으니 별로 해드릴 얘기는 없고, 월간지에서 읽었던 가슴 따뜻한 이야기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어르신들께 들려드렸습니다.
매일 어르신들끼리 10원짜리 화투만 치면서 무료하게 보내시다가, 제가 얘기를 들려드리니 정말 재미 있으셨던가 봐요.
이튿날부터는 제가 운동을 가면 회관 창문에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마주쳐야 했습니다.
“새댁아! 어제는 무슨 책 읽었노? 와서 얘기 좀 해주고 가라.”
어르신들의 채근 때문에 저는 독자들의 글이 많이 게재되어있어 이야깃거리가 많은 월간지를 추가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어르신들께 들려드릴 수 있는, 짧지만 가슴에 남는 이야깃거리가 많아 제게 많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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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한국잡지협회 회장상)-김용찬
 
 작품명 :
추억과 현실을 넘나드는 잡지의 매력
                                                               
                                                                                                           
 
 
 현실에서 마주친 잡지의 추억
 
 45세.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 그게 나다. 가정에서는 1남1녀의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고, 학교에서는 반 아이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선생님이다. 조그만 평수의 아파트지만 제법 안정감을 갖춘 세대의, 평범한 가장이다.
 그렇게 20년을 달려왔다. 그리고 만난 건, 중년이 된 나의 모습이었다. 뭔가 흐릿한 눈빛. 푸석해진 머릿결. 나도 모르게 그어진 주름. 축 쳐진 배. 이 모든 게 2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겠지만 볼 때마다 나는 놀란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가 바란 미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하는 회한이 들었다. 한마디로 무기력한 모습의 소시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이 아팠고, 그래서 많이 슬펐다.
 
 이런 나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면 금방 소년이 된다. “야! 임마!!” 하며 서로 쥐어박고 웃으며 술을 마신다.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가슴 벅차는 순간인지, 다시 고등학생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한다.
 그런 자리에서 남자들의 술안주 패턴은 이렇다. 먼저 정치를 씹어먹다가 스포츠를 중계한 후, 여자 이야기로 막잔을 든다. 그런 생활이 벌써 25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너무 일찍 시작된 술자리 덕분에 3종세트 안주를 다 먹어치운 것이다. 그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시간들. 우리는 평소에 시키지 않았던 새로운 안주거리를 불러왔다.
 “야, 요번에 ‘미스터 고’라는 영화 나왔는데 봤냐?”
 “뭐? 미스터 고? 그거 고릴라 나오는 영화지?”
 “아냐, 야구 영화야.”
 “임마, 그게 그거지!”
 그때 문득, 생각이 나서 내가 말했다.
 “야! 그거 혹시 허영만의 ‘제 7구단’ 아니냐? 고릴라가 야구하는 거!”
 “어? 너도 기억나냐? 그거 우리 중학교 땐가 만화로 나온 거잖아! 크크.”
 맞다. 나의 우상 세 명중 한명이었던 만화가 허영만. ‘쇠퉁소’와 ‘무당 거미’. 이강토의 아버지로 시작해서 ‘미스터Q'와 ‘비트’, ‘오! 한강’과 ‘아스팔트 사나이’, 그리고 ‘타짜’, ‘식객’, ‘사랑해’, ‘꼴’,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까지! 이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인 허영만 화백은 나의 우상이었다.
 

 “야, 야! 전에 티비에서 ‘각시탈’도 했잖아! 그것도 허영만 꺼 아냐!”
 “맞아!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다 본건데!” 
 “그러게! 그 옛날 것이 다시 나오니까 기분이 묘하더라!”
 “맞아! 드라마랑 영화로 다시 보니까 그 옛날 만화들을 다시 찾고 싶더라구.”
 “얌마! 그런데 그거 다 옛날에 우리가 본 만화잡지에서 연재했던 거 아니냐? 거 왜 있잖아! <소년중앙>이랑 <어깨동무>!”
 “야~!! 너 왜 <보물섬>은 빼놓냐? 그게 대박이었지! 일단 두께가 장난 아니었잖아!! 크크.”
 그렇다. 그날 우리는 새벽까지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놀았다. 서로의 기억과 추억이 담겼던 만화 이야기와 함께 자신들이 애독했던 만화 잡지를 가지고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토했다.
 
 다음날,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눈만 떴다. 그리고 어제 일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친구 녀석들이 어찌나 우기던지, 자기가 본 잡지가 최고였다고! 오래간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생각해봤다. ‘30년도 더 된 연재잡지 속 주인공들이 하나 둘씩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드라마 ‘각시탈’부터 시작하여 영화 ‘미스터 고’까지, 내 안의 추억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현실에서 3D로 재현되다니!
 사람은 어렸을 때 많은 추억을 만들고, 나이들었을 때 그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내가 그런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지난 일기장을 꺼냈다. 지금부터 잡지와 함께했던 나만의 추억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다시 추억속으로
 
 내 어릴 적 꿈 중 하나는 만화가였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항상 ‘만화 가게’로 직행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만한 상상의 공간은 없었다. 거기서 난 야구선수도 되고 축구선수도 되었다. 꿈에 그리던 사장님도 되보고 권투선수도 되었었다. 만족한 미소를 머금은 체 가게 문을 열고 나온 나날들이었다. 그 때의 3대 우상이었던 이상무, 이현세, 허영만. 나는 거의 그분들의 작품만 섭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아마도 믿고 읽을 수 있는 이름값, 브랜드의 가치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뭐, 가끔 기분이 울적할 때는 고행석의 ‘구영탄’ 시리즈를 보기도 했었다. 기분전환에는 짱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만화가들의 만화를 모두 모아서 볼 수 있는 잡지가 나온 것이다. 한달에 한번, 만화를 연재하는 잡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새소년> 등이 유명했다.
 그 당시 우리들의 관심사는 누가, 어떤 만화연재잡지를 보느냐였다. 아빠의 허락으로 우리 삼남매가 처음 구독한 잡지는 <소년중앙>이었다. 이 잡지를 선택한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랬다. 부록. 정말 다양한 부록이 딸려있었다. 학용품부터 장난감, 그리고 우리들이 가장 좋아했던 단행본 부록!!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부록중 하나가 바로 ‘아스테릭스’ 시리즈였다. <아스테릭스와 클레오파트라>, <아스테릭스와 신들의 전당>을 그 어린 초등학교 시절에 다 읽은 것이다.
 또 하나 좋았던 것은 이두호 화백이 ‘벤허’를 그렸다는 것이다. 영화를 못 본 상태에서 만화로 만나는 벤허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렇게 스케일이 큰 만화가 있다니! 결국 중학교에 올라가서 영화로 보았다. 시험이 끝나고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람을 했는데 동서울 극장에서 봤었다. 영화가 너무 길어서 중간에 불이 켜지고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추억이다. 그리고 잡지속에서 만난 김형배의 ‘20세기 기사단’과 ‘로보트 태권V'를 따라 그렸던 기억도 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여러 만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했었다. 지금도 난 우리반 아이들 일기장에 가끔 로보트 태권V를 그려준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단, 일기를 잘 쓰는 아이들한테만 그려준다. 결국 태권V가 우리반 아이들의 글쓰기 실력을 높여준 셈이다.
 그러던 어느 해, 천지개벽할 잡지가 탄생한 것이다! 다른 잡지의 두배가 넘는 두께를 가진 만화 잡지!! 이름하여 <보물섬>. 우리 친구들은 정말로 보물섬을 발견한 기쁨을 느꼈다! 그 충격적 비주얼~!! 손에 꽉~ 잡히는 느낌!! 다른 잡지가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잡지. 우리는 그 섬에서 ‘미스터 고’의 원전인 ‘제 7구단’을 만나고, 시대의 반항아 ‘설까치’를 만났다. 빙하에서 깨어난 ‘둘리’의 마법에 즐거워하고 ‘독고탁’의 마구는 또 얼마나 놀라웠던가! 나에게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그 때 그 친구들. 까치, 탁, 강토, 둘리, 영탄으로 인해 내 삶은 조금 더 풍족해졌다고 나는, 느낀다.
 
 조금 더 컸을 때, 그러니까 질풍처럼 노도의 시기를 달릴 때 나는 누나의 잡지를 훔쳐보곤 했다. 주로 소녀들을 위한 잡지였다. 거기서 나는 사춘기의 황홀함을 배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하이틴 로맨스 속, 만화속 주인공이 현실로 나타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름하여 영화를 소개하는 잡지, <스크린>이 그것이었다. 그 속에선 살아있는 소피 마르소와 피비 케이츠가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를 향해!! 그리고 부록으로는 커다란 브로마이드가 달려있었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뜯었는지 그 순간의 떨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여자애들은 주로 <하이틴>을 애독했던 기억도 있다. 뭐, 나하고는 이제 상관없는 잡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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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한국잡지협회 회장상)-오호진
 
 작품명 :
평생을 함께하는 힘, 내 친구 잡지
 
                                                                                                           
 
곧 불혹에 접어드는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약간 활자 중독의 경향을 보일 정도로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또한 잡식성으로 다양한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특히 신문과 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 때 어른 것 어린이 것 등을 가리지 않고 읽느라 동네 어느 은행에 가서 선데이 서울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어머님께 혼난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신문에 한자가 많았음에도 나는 꾸역꾸역 동아일보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읽었다. 그리고 그 무렵 아버님이 퇴근길에 매월 사다 주시던 보물섬을 기다렸다가 받았을 때 느꼈던 잡지를 담은 밤색 서점 봉투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바로 어제 일 같다. 잡지를 가까이 하는 습관은 타임지, 신동아 등 시사 잡지의 열혈 독자시던 아버님께 자연스레 물려받은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집 골방에는 아버님이 사회 초년 시절부터 구독했던 국내외 잡지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나는 그것들을 맘껏 시간 날 때마다 보며 자랐다. 물론 간혹 잡지에 실려 있던 야한 사진 등은 어린 나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고...
 
하지만 그 뒤 중학생에 들어간 뒤의 본격적인 학생 시절에는 학과 공부 때문에 잡지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다만 새벗 같은 좋은(?) 잡지는 부모님께서 권유해 주셔서 읽었고,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독서 평설 같이 학업에 도움이 되는 잡지는 마음 놓고 읽었던 것 같다.
내가 중2 때 우리나라에 시사저널이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아버님께서 기다리셨다가 정기 구독을 하셔서 집에 시사저널이 도착했을 때 정말 그 당시로서는 신기한 미국의 주간지 같았던 얇은 종이 재질과 또렷한 인쇄 기술에 놀라고 신기했던 경험은 아직도 매우 선명하다. 그 때 매주 우편으로 오는 것을 모아서 놓고 간식을 먹으며 봤던 것은 내게 매우 큰 즐거움이었다. 공부하다가 지겨우면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잡지를 보며 머리를 식혔다. 이런 나에게 아버님은 무슨 중학생이 시사 잡지를 그렇게 많이 보냐며 나무라셨지만 크게 말리시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 같이 논술이 중요한 시절에는 더 정말 마음 놓고 봤을 것 같다. 이 때 읽은 시사 잡지들을 통해서 학과 뿐 아니라, 상식이 넓어졌고, 학교에서도 ‘만물박사’ 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성장기를 잡지와 함께 보내면서 돌이켜 보건데 잡지의 매체로서의 장점은, 원하는 어느 한 부분만 읽어도 된다는 것, 대개 사진 및 도해가 많아 시각적으로 효과적이라는 것, 정기적으로 간행되므로 한 잡지만 꾸준히 읽어도 어떤 분야에 대해서 중요한 사항을 놓치지 않는 것, 신문 보다 좀 더 심층적으로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 등 많은 유익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훌륭한 매체인 잡지가 우리들 인생에 주는 유익을 생각해 보니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가 되고 공교롭게도 모두 E로 시작하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5Es)
 
첫째, 잡지는 정서적인 공감을 가장 잘 제공하는 활자 매체이다 (Emotional)
 
20대 중반의 동경 유학 시절, 일본어는 어렵고 박사 논문을 위한 실험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아 교수님께 꾸중들을 때 나는 가끔 전철로 몇 정거장만 가면 있는 한국 문화원의 도서관에 가서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 한국 잡지를 보았다. 지금처럼 인터넷, 스마트 폰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본에는 한국어로 된 읽을 것이 귀했고 한국 서점도 변변히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쉬우나마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어로 된 고국의 소식들을 잡지를 통해 읽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고, 다시 연구실 일도 잘 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한국에 관한 소식을 보며 내가 감성적으로 치유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무래도 잡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다루고, 사진 등이 많다보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감정의 허기를 어느 정도 메꾸어 주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잡지는 내가 생활 영역 밖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주는 좋은 매체이다 (Expandable)
 
작년에 독일 뮌헨에 장기 출장의 기회가 있었다. 가족을 두고 혼자 갔기에 주말에는 시간이 많이 생겨서 주로 호텔에 있는 수영장과 사우나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무료한 시간도 많이 보내고 있었고, 그곳의 비치파라솔 옆에는 독일어 잡지들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독일어를 잘 모르지만 하나하나 펴보아 사진부터 보게 되었다. 잡지들은 주로 집안에 설치하는 자꾸지 및 사우나 설비 관련 전문 잡지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비록 잘 아는 분야는 아니고 기술도 없지만, 잡지에 나와 있는 사우나 설비 등의 설치된 형태를 보니 독일/스위스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주택의 형태 등을 대략 알 수 있었다. 만일 내가 그러한 잡지를 보지 않았다면 언제 그러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알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잡지란 이처럼 쉽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며 그간 연결이 되지 않았던 미지의 분야로 인도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 같다.
 

 
셋째, 잡지는 빠른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얻게 도와주어 일상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Express)
 
일본에 유학 시절 한국과 가까운 관계로 가족,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다. 사실 외국에 살고 있는 학생에게 그렇게 자주 한국에서 방문객이 올 경우 처음에는 반갑지만 간혹 곤혹스럽기도 하다. 매번 도쿄타워만 갈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 경우에 내 경우 유용하게 활용한 것이 잡지였다. 일본에는 유명한 잡지로 위클리도쿄라는 잡지가 있다. 그 잡지는 제목 그대로 1주일 동안 도쿄에서 어떤 놀 것들이 있고, 어떤 레스토랑이 새로 오픈했고, 어떤 축제가 있는지 일목 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따라서, 누가 온다고 했을 때 500엔 정도였던 그 잡지를 구입하면 매번 가장 최신 유행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 그 철에 맞는 곳으로 손님을 안내할 수 있었다. 잡지에 담긴 정보도 물론 매우 상세하여 레스토랑의 경우 상세하게 메뉴까지 보고 결정할 수 있는 등 가장 빠르고 편하게 내가 원하는 정보를 집약해서 싼 가격에 제공해 주는 매체가 잡지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넷째 실제 생업에서 어렵게 생각했던 일이 가능하게 되도록 도와 준다 (Enable)
 
나는 직업이 컨설턴트라 항상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해야 한다. 그러한 부분이 컨설팅의 즐거운 영역이기도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쉽게 중요한 쟁점들을 파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실제로 일을 할 때 전문가 인터뷰를 많이 활용한다. 그 업계에서 이미 일가를 이루신 분을 찾아뵙고 또는 전화로 중요한 내용을 물어본다. 그러한 경우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인터뷰를 하기까지가 어려울 때가 많다. 대개의 경우 바쁘신 분들이라 시간 내기가 어렵고 특히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으신다. 이럴 때 내가 나름의 노하우로 활용하는 것이 잡지다. 우선 그 분과 통화를 하기 전에 그 분이 잡지 등에 기고하신 내용을 숙지하고, 이해를 한다. 그러면 그 분이 어떤 논점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 수 있다. 그 뒤 전화를 드려서  ‘잡지에서 인터뷰 하신 (기고하신) 기사를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라고 하면 내 개인적인 예지만 추후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왜 일까 생각을 해보면 본인들이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읽어 주었다는 데서 오는 흐뭇함(?) 이 아닐까 싶다. 사소한 차이인 것 같지만 잡지라는 매체를 통해 나와는 연결 고리가 없을 것 같은 분과 소통할 수 있어 나로서는 잡지가 매우 고마운 존재고, 실제 생업에 유익을 끼친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잡지는 나 같이 평소에 정신없이 분주하게 지내는 현대인에게 일상에서 떠나 안락한 마음으로 잠시 생활을 관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Easy)
 
내게 누가 가장 일상에서 편한 순간을 떠올리라고 하면 두 가지 장소가 떠오르며, 이 또한 모두 잡지와 함께 한다.
 
한 가지는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아이들은 아이들 책을 읽고 나는 비스듬히 누워 내가 좋아하는 여행/건축 관련 잡지를 읽을 때이다. 간혹 막내가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읽어주고 그 외에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며, 한 주일의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때 여행 잡지를 보며 현실적으로는 멀리 여행을 못가지만 내 마음은 핀란드의 숲, 요르단의 건축물, 퀘벡의 단풍 사이를 거닌다. 물론 이 모두 잡지의 음덕이다. 또 건축 잡지의 최근 신예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주택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지어보리라고 꿈꾸며 건축가인 친구들 중 누구에게 맡길까 상상하며 혼자 흐뭇해한다. 
 
두 번째로 내게 쉼을 주는 일상의 장소는 국내 모 카드사가 얼마 전 삼청동에 오픈단 디자인 라이브러리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그곳을 오픈일을 기다려 가보고는 처음에 너무나 놀랐다. 일단 삼청동이라는 고즈넉한 동네의 분위기랑 어울리는 건물의 분위기가 좋았고, 보유하고 있는 책 및 잡지들의 유니크함에 놀랐고, 즐거웠다. 지적인 사유의 놀이터라고나 할까. 정말 그 라이브러리를 지은 목적처럼 그 곳에 가면 의욕이 솟고 창의적이 된다. 그곳에 비치된 많은 잡지 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1928년 이탈리아에서 창간한 건축 디자인 잡지 <도무스DOMUS>와 미국의 시사 주간지 라이프다. 도무스를 보며 1930년대 이태리 가정집의 인테리어가 2010년 대 지금 우리 집보다 더 아름답고 실용적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는데 놀랐고, 라이프의 1940년대 2차 대전 당시 발행판에 실린 전쟁 자금 마련 국채 발행, 군수 물자 모집 등 전쟁 관련 광고들을 보며, 실제 전쟁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 가늠할 수 있었다. 내게는 이러한 일들이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뇌를 정화시키는 하나의 리추얼과 같으며, 모두 잡지가 있어 가능한 일들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나와 잡지와는 내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뒤부터 30여년 참 긴 세월을 함께 했고, 앞으로도 오래 지속 될 것 같다. 잡지는 내게 넓은 세상을 보게 하는 눈이 되었고, 세계 어디를 가든지 그 곳에 있는 잡지는 또한 내 친구가 되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지구 어디서 어떤 잡지 친구를 만날지 벌써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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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상 (한국잡지협회 회장상)-이성은
 작품명 :
아내는 죽지 않는다.
 
                                                                                                           
 
 따뜻한 커피 잔을 들고 거실에 들어서니 창가를 향해 놓여 있는 흔들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흔들의자 옆 작은 탁자 위엔 아내가 즐겨보던 잡지책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흔들의자와 잡지책을 보는 순간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흔들의자에 앉아 잡지책을 펼쳐 품에 안고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오버랩 된다. 하지만 체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다잡자 금방 흔들의자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아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빈 흔들의자만이 눈앞에 그려진다. 순간 적막감이 거실을 휘어 감는다.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쓰디 쓴 맛이 더욱 쓰게 느껴진다. 흔들의자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는다. 흔들의자에 앉자 창 밖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지짐댈 것 같은 모습이다. 마당 곳곳에 나무들과 기화요초들이 금방이라도 지짐댈 빗님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기실 가을 가뭄이 심하여 온 대지가 바싹 마를 대로 말라 있는 상태이다. 50여일 가까이 비가 내리지 않아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커피를 한 모금은 입에 털어 넣는다. 쓰디쓴 맛이 더욱 쓰게 느껴진다.
 저 멀리 기차가 지나간다. 기적소리를 내며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자 그 위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또록, 또록 한두 방울 내리던 비는 금세 쏴아아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기차의 모습이 사라지자 내리는 빗방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한동안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다본다.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시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아내는 비를 참 좋아했다. 연애시절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내와 우산을 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었다. 밤새도록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걸으며 아내와 나누었던 담소들이 기억난다. 이곳 장수마을로 이사를 온 후엔 아내는 비가 오는 날이면 흔들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곤 하였었다. 창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흔들의자에 앉아 잠이 들곤 하였었다.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다. 아마도 오랫동안 추적추적 내릴 모양이다. 오랫동안 흔들의자에 앉아 아내를 추억해야할 것만 같다. 아내를 추억하는 것이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칠 정도이다. 아내를 위해 내려온 이곳 장수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한 나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괴로울 뿐이다.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우산을 들고 현관 밖으로 나온다.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어볼 생각이다.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걷다보면 세상을 떠난 아내가 찾아와 내 옆을 지켜줄 것만 같다. 아내를 찾아 우산을 쓰고 빗속을 하염없이 걷고 걷는다.
 
 ‘다발성골수종’ 아내가 이름도 생소한 희귀질환 판정을 받은 것은 3년 전의 일이다.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으로 인해 아내는 진단 5개월 만에 가슴뼈가 녹고 등이 튀어나와 신장 투석을 받게 되었다. 이 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급속도로 약해져 대상포진이 왔으며 이로 인해 대장까지 절제를 해야 했다. 지독스런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아내는 마약성진통제까지 투여된 상황에서 섬망(Delirium)까지 보이는 상태로 악화가 되어 버렸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차라리 하늘이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불치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지독스런 고통이었다. 어린 두 아이에게도 미안했다. 어린 두 아이를 품에 안고 흐느껴 우는 아내의 모습은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두 아이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아내가 죽을병에 걸려 언제 죽일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어린 두 아이들은 알 턱이 없었다. 아이들은 죽음을 깨우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포기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겠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생명연장 뿐이라고 했다. 주치의에게 대거리를 떨며 어떻게든 아내를 살려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주치의는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비록 병원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더 악지세게 아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병원치료로 할 수 없다면 자연치료로 해보겠다는 심정으로 도시 생활을 접고 물 좋고 공기 좋다는 이곳 장수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이사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 건설회사에서 전기소방기사로 일하던 나는 시골마을로 내려오면서 사직을 했다. 직장을 잃어 당장 생활에 어려움이 닥쳐왔지만 그것보다 아내를 살려야겠다는 신념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 내려 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나는 하루 1~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하고 틈 만 나면 아내의 희귀암 치료를 위해 각종 의학서적들과 논문들까지 찾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오로지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노력했다. 주위에선 이런 나를 두고 해도 너무한다는 말을 하며 그만 마음을 정리하고 아내와의 사별을 준비하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아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의 사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저 괴로울 뿐이었다.
 

 아내와 같이 희귀암으로 알려진 다발성골수종으로 고통 받는 환자가 대략 7000여명에 이른다고 했다. 문제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발성골수종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약 75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사실도 어느 논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현대 의학기술로 다발성골수종에 정확한 원인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내가 다발성골수종에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겠다는 생각까지 하며 아내의 희귀암과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갈수록 아내와 나는 점점 지쳐만 갔고 더욱이 전투의자로 불타올랐던 내 의지도 점점 꺾이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이젠 정말 아내와의 사별을 준비해야한단 말인가. 이젠 정말 이대로 포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아내가 잠이 든 깊은 밤에 잠든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소리 죽여 얼마나 울고 울었던지, 내 인생에 흘려야할 눈물의 절반을 그 시절 흘린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내가 흔들의자에 앉아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가구점에 찾아가 흔들의자를 사올 생각을 했지만, 어쩜 아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목공소에 들려 나무들을 사다가 직접 이틀에 걸쳐 흔들의자를 만들었다. 아내는 내가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함박웃음을 웃으며 좋아했다. 세상 그 어떤 의자보다도 값지다고 아내가 말했다. 흔들의자에 앉아 함박웃음을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엷은 미소 뒤로 쓰디쓴 슬픔이 곧 찾아들었다.
 
 “여보, 저녁 먹어야지?”
 아내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아내가 있는 서재를 찾았다. 아내는 서재 책상에 앉아 부산스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서재 책상에 앉아 부산스레 무언가에 집중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내는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녁 먹어야지? 식사 준비해놨어?”
 “응, 알았어요. 여보, 잠깐 이리 앉아 봐요.”
 아내의 말에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잡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연애시절부터 아내는 잡지 광이라 불릴 정도로 잡지를 좋아했다. 아내는 늘 핸드백 옆에 잡지를 한권씩 끼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읽고 맘에 드는 기사나 그림이 있으면 스크랩하여 따로 보관하곤 하였다. 기실 아내는 월간잡지 기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낙방을 경험한 뒤로 기자의 꿈을 접었었다.
 “자, 이거 받아요.”
 아내가 서랍을 열어 세권의 잡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세권의 잡지를 건네  받은 후 아내의 얼굴을 일별한 뒤 잡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잡지의 모양이 좀 이상했다. 어느 잡지사에서 발간한 잡지가 아니라 아내가 직접 만든 잡지였다.
 

 “아니, 이게 대체 뭐야?”
 내 물음에 아내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혈색 하나 없는 아내의 얼굴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내가 건네준 잡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권은 나를 위한 잡지이고, 또 한권은 아들 녀석을 위한 잡지이고 또 한권은 딸아이를 위한 잡지였다. 잡지를 살펴본 후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아내와 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뭐냐고?”
 “이곳 장수마을로 이사 온 후로 그동안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 만들었어요. 만약 내가 죽으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내가 직접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 잡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비록 보잘것없고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떠난 후에 당신과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잡지들이니 잘 간직해줘요. 그리고 아이들 좀 더 크면 그때 아이들에게도 전해줘요.”
 아내의 말에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힌 뿐이었다. 그동안 매일 같이 서재에 들어와 온갖 잡지 무덤 속에서 아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이유를 알게 되자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이 온 마음과 영혼까지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게 할게. 당신 뜻대로 할게.”
 아내를 품에 안았다. 삭정이 같은 아내를 품에 안고 한동안 소리 죽여 울었다. 울고 울어도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세상을 원망했다. 세상을 향해 분노했다. 세상은 뒤엎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말이 없었다. 그저 세상은 나와 아내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아내는 오후 내내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흔들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아내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멀찍이서 흔들의자에 앉아 잠든 아내를 바라보며 주말에는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아이들이 몹시 보고 싶다고 말하고 아이들은 아내가 몹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녀간 후 아내가 잘못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쉽사리 아이들을 데려오지 못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가장 실수요, 평생을 후회하게 만드는 고통이 되고 말았다.
 오후 내내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아내는 저녁 늦게까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내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깨워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운명한 뒤였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빗소리가 참으로 정겹다. 심난한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 같다. 아내가 남긴 잡지를 꺼내본다.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잡지표지엔 ‘여보, 고맙고 사랑해요.’ 라고 적혀 있었다.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건강과 경제> 그리고 <육아에 대해 좋은 글귀들과 사진>과 아내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이 스크랩되어 있다. 그리고 곳곳에 나를 향한 따뜻한 글귀와 편지들이 쓰여 있다.
 아들을 위해 준비한 잡지에는 의대진학을 꿈꾸는 아들을 위해 <공부 잘 하는 법> <수제들의 이야기> 또한 <이성 친구 사귀는 법> 등등이 스크랩되어 있다. 또한 아들을 향한 아내의 마음이 담긴 글귀와 편지가 쓰여 있다. 곳곳에 아내와 아들의 사진들이 스크랩되어 있다.
 연예인을 꿈꾸는 딸아이를 위해 준비한 잡지에는 <엄마가 직접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연예인이 되기 위한 자질과 방법> <미모를 가꾸고 유지하는 법> <여자로 산다는 건> 또한 <최정상에 오른 연예인들의 사연> 등등이 스크랩되고 곳곳에 딸을 향한 아내의 마음이 담긴 글귀와 편지가 빠지지 않고 쓰여 있다. 또한 아내와 딸의 사진들이 스크랩되어 있다.
 어린 아들과 어린 딸이 좀 더 성장하면 전해줄 생각이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잡지를 들고 어린 아들과 어린 딸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진다.
 흔들의자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간다. 창가에 서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내는 말했다. 산다는 것은 강물에 종이배를 띄우는 것이라고……. 아내의 말뜻을 이젠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아내는 떠나고 없지만 나는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가슴에서 놓지 않는 한 아내는 여전히 내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창을 열어젖히니 스산한 바람이 창을 통해 들어온다. 아마도 스산한 바람을 타고 아내가 다녀간 모양이다. 분명 아내가 다녀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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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한국잡지협회 회장상)-이혜경
 작품명 :
 남편의 고귀한 사랑
 
                                                                                                           
 
남편의 고귀한 사랑
 
  밤 12시가 넘어가도 남편은 소식이 없다. 그를 이해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속이 상한다. 새벽 두시가 다 되어 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번호를 보니 남편이다. 술에 취했을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그려지고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이 휴대폰 주인이 남편 되시나요? 저는 경찰입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경찰이라고 말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내 남편이 결국 사고를 당하고 말았구나.'
  그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이 그려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통증이 밀려드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큰 사고인가요? 그이는 얼마나 다쳤어요? 죽지는 않았지요?”
  그의 죽음이 떠오르고 눈물이 왈칵 솟는다. 울먹거리며 말하는 내게 전화 속 경찰이 웃으면서 말한다.
  “그게 아니고요. 남편분이 술에 너무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잠들어 버렸어요. 아    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니 얼른 오셔서 데려 가세요”
  순간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게 안심이 되고 커다란 기쁨이 되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다시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경찰에게 장소를 물으니 집 가까운 공원이었다.
‘휴우,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혼자 넋두리를 하면서 그가 잠든 곳을 향해 허둥지둥 뛰었다. 공원에 도착하니 경찰 두 명과 경비원 한 명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휴~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나요. 술을 많이 드셨나 봐요.”
  술과 잠에 취한 그를 나 또한 애써 깨워보았지만, 도무지 일어날 기척이 없다. 속이 상하고 애가 타서 한숨만 나오는데, 그는 가슴위에 올린 손에 무언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이상해서 빼내려고 하는데 어찌나 꽉 쥐고 있는지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경찰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안에 혹시 백지수표 있는 거 아닌가 몰라요. 어찌나 꽉 움켜쥐고 있는지 잡   아당겨도 꼼짝도 안 해요. 술에 취해 잠든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   하네요.”
  그게 뭔지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 그들은 우리 부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흔들고 때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인사불성이었다. 그를 마구 흔들자 잠시 후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는데 그런 원수가 따로 없었다. 경찰과 경비원 앞에서 우리부부의 모습이 초라하고 비참하여 자꾸만 속이 상했다. 그들을 보내고는 하늘을 보며 혼자 눈물짓는데 새벽 공기마저 차갑게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그를 흔드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다니 미안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거 받아. 당신 좋아하는 거.”
  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남편이 지금까지 꼭 움켜쥐고 지켜낸 것이었다. 가로등 불빛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G은행에서 매달 그이가 가져오는 S잡지였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라디오의 좋은 사연들을 모아 실은 월간 S잡지는,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작은 잡지책이었다. 매월 10일 경이 되면 G은행에 비치된다는 S잡지를 남편은 이렇게 날짜도 잊지 않고 가져오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자신을 잃는 시간에도 소중한 보물인양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던 그를 바라보면서,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아무데나 쓰러져 잠이든 남편의 현실이 비통함으로 다가오고 가슴이 아려왔다.
  “여보,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이거 당신 줄려고 빨리 오려고 했는데 형우 녀석이 어찌나 3차를 고집하        는지........ 미안해.”
  “ 나 이젠 이 따위 책 안 봐요. 제발 술 좀 조절할 수 없어요?”
  “알았어. 알았어. 다시는 안 마실게.”
  그렇게 미안해하면서도 그는 또 다시 술에 빠지면 시간을 잊고 가족을 잊고 세상을 잊어버릴 것이다. 반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그가 불쌍하면서도 야속하기만 했다.
그는 나와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내 손에 있는 S잡지를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웃는다. 그 모습이 화도 나고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잡지책을 던져 버렸다. 그가 놀란 듯 얼른 달려가 줍고는 내 손에 쥐어 준다. 그리고는 그만의 너그러운 웃음을 짓는다. 그런 그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화가 풀리면서 따라 웃고 말았다. 아직도 술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그를 부축하며 집으로 오는데, 서글픔 속에서도 가슴이 따스해지고 있었다.
 
  손으로 꼽아보니 남편이 실직한지도 5년째 였다. 탄탄한 직장에 잘 다니던 남편은 사업을 해 보겠다고 2008년 봄, 스스로 명예퇴임을 해버렸다. 사업을 시작하고 처음 1년간은 마음먹은 대로 순탄하게 잘 헤쳐 나갔고 모두가 부러워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3년도 채 못 되어 남편은 결국 몽땅 잃고 말았다. 더구나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까지 당한 그는 좌절했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말았다. 비참함 속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오로지 술만 먹고 잠을 자버리는 걸로 아픔을 대변할 뿐이었다. 그가 안쓰럽고 안타까웠지만 시간이 흘러 갈수록 그의 술 냄새와 코고는 소리는 듣기 싫었고 그가 점점 원망스럽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비를 쪼개 써야 하는 하루하루가 힘이 들었고, 산다는 것이 비참하기만 했다. 이제 먹는 것조차도 아끼고 아이들의 교육도 시킬 수 없을 만큼, 참으로 어렵기만 한 우리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가슴에 아픔을 품고 눈물도 지었지만 그래도 산목숨은 살아가는 것인지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초라한 그의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S잡지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행색을 보면서 속도 상하고 그가 너무도 원망스럽기만 했다. 직장이 없으면 술이라도 마시지 말지. 그의 모든 것들이 미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건네주는 잡지책을 던져 버리면서 맘에도 없는 말들을 내 뱉고 말았다.
 “당신은 그러고 다니는 거 창피하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참으로 당       당하네요? 시시하게……. 나 이런 거 안 봐요. 다른 남편들은 서점에서 비싸고    좋은 잡지책들을 잘도 사주던데, 당신은 좀스럽게 이게 뭐예요? 나도 이젠 이런   나부랭이 잡지들은 안 볼 테니 다신 가져오지 말아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가슴 먹먹했지만, 끝내 그를   모른 척 하고 말았다.
   며칠 뒤, 그는 새벽 일찍 일을 나갔다. 전화를 하니 건설 현장에서 인생 공부를 하고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남편은 매일 새벽같이 나가면서 그 힘듦을 참고 이겨냈지만, 밤이면 녹초가 되었고 끙끙대며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어느 날, 잠이 든 남편을 들여다보니 어깨의 피멍이 내 눈을 가득 채웠다. 살갗이 벗겨지고 그것도 모자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멍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들었던지. 일에 익숙지 않은 남편이 그 무거운 모래를 짊어지고, 수없이 계단을 오르내렸을 상황들이 그려지면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음날, 그이를 붙잡고 못 가게 했지만 몸에 익으니 할 만하다며 괜찮다는 말만을 남기고 서둘러 일터로 가버렸다. 그의 아픈 시간이 흘러도 남편은 힘든 그 일을 그만 두지 않았고, 여전히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는 길, 먼지와 땀에 전 남편이 내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속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표지와 각종 광고, 그리고 연예인들의 사건들과 요지경 속 세상이야기가 담긴 유명한 여성잡지였다. 서점에 가면 조명을 받아 반짝 거리며 유혹하던 그 잡지책이 내 손에 있는 것이다. 초췌한 남편을 바라보면서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잃었다. 
 

  “왜 돈을 주고 이런 걸 샀어요. 환불할 수 있으면 환불해요. 서민들의 삶이 담    긴 작은 잡지들을 내가 좋아하는 거 당신도 알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후회하며 자꾸만 울먹이는데 그가 내 손을 잡는다.
  “여보, 당신 고생시켜서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일자리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으니까 잘 될 거야. 우리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자.”
  “그런 거 아니었어요. 내 마음 아시잖아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는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돈이 무엇이고, 이런 잡지책이 무엇이고 우리가 산다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짧은 인생 그 어떤 물질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설움일 것인가. 나는 그를 못 믿고 사회의 눈과 돈 앞에서 아등바등 하는 못난 아내인 것이다. 나는 그를 보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날 우리 부부는 참 많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세상 다하는 그 날까지 우리 두 부부 모자란 부분은 서로 감싸주고 이해하면서 살아가자고… 그리고 가진 것에 감사하면서 살자고…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으니 좋은 생각만 하자고… 우린 마주보고 울고 웃었다.  
 
  이제 남편은 작은 보안업체에 몸을 담고 일을 나간다. 적은 월급과 힘들고 만족치 못한 여건이지만 그래도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런 남편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
  지금도 남편은 새로운 달이 되면 어김없이 사랑이 가득 담긴 잡지책들을 미소와 함께 건넨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잡지는 G은행에서 가져온 S잡지와 유명한 C회사의 사보다. 그 책들은 서민들의 삶이 다양하게  녹아든 월간잡지로, 내용이 알차고 따뜻해서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책이다. 다른 유명한 잡지책보다도, 두툼하고 화려하고 무거운 책들보다도 충실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 잡지책들을 나는 사랑하고 아낀다.
남편은 때로 1000원짜리 한 두 장이면 살 수 있는 작은 잡지책을 사오기도 한다. 담배도 끊고 술도 잘 조절하면서 모은 돈으로 말이다. 책을 건네는 그의 다정한 손과 따스한 눈빛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나는 미소 짓고 감사한다.
   우리 집에는 그동안 모은 잡지책들이 책장에 곱게 진열되어 있다. 작고 여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여쁘고 가슴 벅차다. 그 안에는 남편의 고운 사랑이 고이 쌓여 있고 나의 아픔들도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사랑과 우리들의 사연이 쌓인 지나간 잡지책들은 다시 읽어도 새롭고 신선하다. 지난 날 아픔으로 다가왔던 작은 책들이 기쁨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은 희망으로 나를 감싼다. 우리들의 삶이 부드럽게 녹아 있는 그 진실 속에서 나 또한 그들과 하나가 되면서 하루를 살아나간다.
   잡지는 내게 아름다움으로 온다. 그 안에는 나를 닮은 애달픈 모습들이 그려져 있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소시민들이 아픔을 이겨내면서 꿋꿋이 헤쳐 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서민들의 삶이 자유자재로 녹아있는 잡지들을 들여다보면, 감격스럽고 유쾌해서 저절로 웃음이 난다. 잡지책은 그렇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아름다운 존재로 함께하고 있다.  
  때로 고뇌에 빠질 때, 우리 가정의 아픔 속에서 이기심이 고개를 들 때, 나는 지난 시간들의 잡지 속에서 세상을 새로 보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면서 고요한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잡지를 볼 때마다 남편의 따스한 사랑이 안겨오면서, 문득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스쳐지나가곤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사업실패와 실직으로 인해 우리 집은 가난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사랑하는 그가 내 곁에 존재하고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한 나는 행복한 아내이다.
 
  또 다시 하루가 저문다. 시골 친정에서 보내준 시래기로 우거지 국을 끓이고, 고향 친구가 준 산나물들을 삶아 무친 소박한 저녁상을 차려야 겠다. 친정어머니가 직접 담가 보내주신 복분자주를 곁들이면 이만한 식탁이 또 있을까. 소박하지만 정이 듬뿍 담긴 식탁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지을 그를 그려보는데, 감사와 사랑이 솟아오른다.
오늘도 그는 한 손에 잡지책을 들고 환하게 웃음 지으며 집을 향할 것이다. 그의 모습이 가슴 벅차게 다가오고 내일은 또 다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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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 (한국잡지협회 회장상)-임지희
 작품명 :
잡지, 그 추억의 페이지를 넘기다
 
                                                                                                           
 
어렸을 적, 내 기억 속의 아빠는 언제나 월급날이시면 한 손에 노란 봉투를 들고 오셨다. 그리고 그 봉투를 받아 든 엄마는 세 아이를 키우고, 시동생에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사는 고단한 시집살이 속에서도 그날만큼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빠의 봉투 속에 들어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잡지였다. 어린 마음에도 저걸 베고 자도 되겠다고 느낄 정도로 두툼한 책. 나중에 기억해 보건데 그 책은 아마도‘여성 중앙'이나‘여성 동아’같은 한국 잡지사의 고전이었던 것 같다.
또 아빠는 매년 12월이면 한권도 모자라 여러 권의 다양한 종류의 잡지를 사가지고 오셨는데, 대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알뜰한 엄마를 위해 부록으로 나오는 가계부를 선물하고자 함이었다.
엄마는 요즘 주부들처럼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 한가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잡지를 보지 않았다. 종일 종종 걸음 쳐도 끝이 없는 빨래와 청소. 깨끗이 빤 이불 호청에 풀을 먹이고, 밑반찬을 만들고... 엄마가 잡지를 들추는 것은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모처럼 다리 한 번 쭉 뻗고 한숨 돌리는 깊은 밤, 잠자리에 들기 전이 유일했다.
하지만 변변한 외출이나 세상 물정에 서툰 엄마에게 그 순간은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는 겉장이 닳을세라 해 지난 달력을 뜯어 깨끗이 표지를 쌌고, 그 소중한 책을 옆집 아주머니에게도 빌려주고 뒷방 새댁에게도 빌려주며 수줍게 세상과 소통하고 지내신 것이다.
 
책을 좋아했던 나는 한글을 떼자마자 엄마의 잡지책으로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물론 그 내용은 7살짜리 꼬맹이가 알기엔 너무도 어렵고, 한자도 잔뜩 섞여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신기하게 느껴졌던 화장품 광고 모델 언니들의 사진, (유지인, 정윤희씨는 얼마나 예뻤던지) 또 재미있는 만화까지.
두 살 터울 위의 언니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몰래 엿봤던 엄마의 잡지는 우리 또래가 읽는 세계 위인전집과 그림책과는 또 다른 신세계, 그 자체였다.
아빠는 우리가 초등학생이 되자 이번에는 우리를 위해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 중앙... 같은 잡지를 사다주셨다.
아빠의 품에 안겨있는 잡지를 볼 때마다 언니와 나는‘우와~!’하며, 통닭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오실 때보다 더 큰 환호성을 질렀다. 과자나 군것질은 한 번 먹으면 끝이지만, 잡지는 두고두고 책꽂이에, 가슴 한 구석에 남는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알아챈 것일까?
 

내가 지금 부모님의 나이가 되고 보니, 당시 택시 운전 기사였던 아빠가 얼마나 자상하고 자식 사랑이 넘치셨던 분이었는지 새삼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때 우린‘어깨동무’란 잡지 한 권이면 한 달이 든든했던 기억이 난다. 또 매달 한 가지씩 나왔던 부록은 각종 과학 원리를 응용한 간단한 발명품, 장난감이었는데 아빠와 힘을 합쳐 조립하고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컴퓨터 게임도 없었던 80년대 초, 잡지는 다른 지역의 초등학생들과 만나는 새로운 문이었고 미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가상공간이었다.
지금도 인상 깊은 잡지 ‘보물섬’.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온 보물섬은 책 전체가 여러 편의 시리즈(연재물) 만화로만 이뤄진 획기적인 잡지였고 초등학생은 물론 어른들도 읽을 만큼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둘리’는 바로 보물섬이 탄생시킨 초특급 스타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넉넉하지 않았던 그때. 모든 어린이가 다 보물섬을 살 수 있었던 건 아니었고, 한 명이 잡지를 사면 순번을 정해 쭉 돌아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기랑 친한 친구는 제일 먼저 빌려주고, 내 앞 순서 애가 늦게 읽으면 그 애 집까지 찾아가서 빨리 좀 읽으라고 독촉했던 일들...
1초에 책 한 권을 다운받는 초고속 인터넷 통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돌이켜 보니 다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고, 한국 경제가 부흥하면서 잡지도 점점 세련되고 다양한 분야의 잡지가 쏟아져 나왔다. 고등학생이던 언니는‘여학생’이란 잡지의 팬이었고, 나는‘쥬니어’라는 잡지를 좋아했다. 우리는 회수권(버스 승차권)과 떡볶이 사 먹을 돈을 아껴서 금쪽같은 잡지를 샀고, 잡지는 사춘기를 맞은 우리의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달마다 연재된 박범신, 양귀자, 한수산... 기라성 같은 작가 선생님들의 소설. 지금은 문단의 거장이 되어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분들 또한 갓 문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풋풋한 신인이셨다. 생생한 그 분들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거기에 사르트르, 전 혜린, 헤세...그 이름도 유명한 사람들의 인생과 작품 세계 등을 다룬 특집 코너 또한 문학의 꿈을 키우던 내게 큰 감동과 자극을 주었다.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세기의 지성 보봐르처럼 계약 연애도 하고 싶었고, 전 혜린처럼 독일로 유학 가서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내가 공들인 것은‘애독자엽서’였다. 가수는 누구, 영화배우는 누구, 하며 당시 최고로 인기 있던 스타의 순위를 매기는 코너가 있었는데, 조용필·강수연·박중훈 등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가 1위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눈에 불을 켰다. 요즘의 사생 팬이 따로 없었다.
 

또 엽서를 공들여 꾸며서 보내면 뽑아서 상으로 다음 달 잡지를 무료로 보내주거나, 스타의 사인이 담긴 브로마이드를 주기도 했다. 나와 친구들은 오매불망 선물에 당첨되기를 기도했다.
잡지의 말미에는 독자의 시나 수필을 실어주는 코너도 있었는데, 뽑히면 그 글이 실린 잡지와 원고료를 주었다. 나는 며칠 밤을 꼬박 새서 쓴 시가 실리는 기쁨을 맛보았고, 반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부러움과 축하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전국에 나가는 잡지에 내 글이 인쇄되 나오다니... 정말 뿌듯하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나의 십대는 잡지와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 잡지가 나오는 날, 설레는 가슴으로 서점 진열대를 기웃거리던 행복한 기억들. 공부 고민, 이성교제, 친구와의 사소한 갈등. 이 모든 해답을 내 또래의 많은 학생들이 잡지 속에서 찾았고, 잡지를 벗 삼아 크게 방황하지 않고 사춘기를 보낸 것이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생으로, 성인으로 맞닥뜨린 세상 속에서도 잡지는 늘 변함없는 삶의 내비게이터가 되어 주었다. 한때 일본 잡지가 유행해서 논노나 앙앙 같은 잡지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패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자극을 받은 우리나라 잡지도 보다 전문적이고 칼라풀해졌던 것 같다.
패션 코디와 메이크업의 팁을 주었던 쎄씨, 에꼴, 연예계 소식과 젊은이들의 문화 트렌드를 다룬 영 레이디, 레이디 경향, POP 음악을 좋아해서 샀던 뮤직시티, 영화 쪽의 정보를 얻고자 봤던 스크린.
버스나 지하철에서 틈새 시간을 쪼개어 봤던 샘터나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부피는 작지만 내용은 풍성한 최고의 잡지였다.
마음은 있지만 쏟아지는 많은 잡지를 다 돈 주고 사볼 수는 없는 터. 대형 서점에서 샘플로 진열된 잡지를 초스피드로 읽기도 했고, 미용실이나 은행의 대기 시간에 공짜 잡지를 실컷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쉬울 땐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책 대여점의 회원으로 가입해서, 한 권에 천 원씩 주고 잡지를 봤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처럼 잡지를 많이 읽거나 기다리지 않는 것 같다. 손쉽게 스마트 폰으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고, 레시피를 다운받고, 화제가 되는 뉴스와 세상 돌아가는 풍경을 클릭하는데 익숙하다. 어떻게 보면 더 편해지고, 더 빨라진 것 같은데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드는 건 왜일까?
잡지가 우리에게 한 순간 스쳐가고, 금방 웃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짧은 감동을 준 게 아니라 두고두고 곰씹을 수 있는 정보와 지혜의 저장 창고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보고 다시 넣어두는 도서관처럼 말이다.
 

최 남선의 최초의 신체시가 실린‘소년’같은 잡지를 보면, 잡지는 소모품이 아니라 한 시대를 이끌었던 리더이자 희망이었다.
한 장 한 장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과 흔적이 너무도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그 추억과 깊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
 
이제 나는 그 옛날의 아빠처럼 엄마를 위해서 잡지 한 권을 사고 싶다.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지, 책이나 신문을 볼 때면 돋보기를 써야 하는 엄마의 주름살이, 굽은 어깨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엄마는 그 속에서 스쳐간 지난 시간과 추억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잠시 잊고 지냈던, 그 옛날의 정겹던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삶이란 어쩌면 기쁨과 슬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가 함께 공존하는 한 권의 잡지가 아닐까?
좋아하실 엄마를 생각하니, 내 가슴도 콩닥콩닥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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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6회 전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수상작))
대상_문화체육부장관상_안병리
 작품명 :
잡지 뜯는 남자
 
 
 융합적인 삶, 잡지가 나에게 선물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나는 건축가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가란 뜻이다. 전문가 최대 약점은 폭이 좁다는 점이다. 자기 분야에 대해선 깊이 알지만 다른 분야는 거의 문외한에 가깝다. 주변을 둘러 볼 틈도 없지만 관심도 없다. 폭이 좁은 사람이 되는게 전문가 운명이다.
 나는 30년 이상 설계밥을 먹고 있다. 건축 설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스펙트럼이 꽤 넓은 편이다. 상위 계층 성공자라 불리는 사람부터 소위 양아치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만나도 대화가 통한다. 어떤 남녀노소를 만나도, 다양한 직업군의 전문가를 만나도 서너 시간은 말을 이어갈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한 후배는 이건 나를 ‘브리지 메이커’라고 부른다. 즉 다리로 서로를 연결해 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브리지 메이커는 요새 화두인 통섭과 융합이란 말과 통한다. 나에게 융합적인 삶을 살게 해 준 가치를 준 것이 바로 잡지다.
 잡지는 나에게 3가지 길을 열어 주었다. 첫째는 인생 후반전을 융합작가로 데뷔하게 해 주었다. 둘째는 올해 17살인 내 외동딸에게 ‘홈 파티 디자이너’란 새로운 융합직업을 선물했다. 세 번째는 미래는 융합전략 시대가 대세라는 인식이다.
 
 융합작가는 내인생 후반적 새로운 길이다.
 
 이 길로 가게 된 것은 건축 잡지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학교 때부터 건축 잡지를 여러개 구독했다. 국내 잡지는 물론 일본, 미국, 유럽 잡지등 열권 정도를 매월 구입했다. 건축 잡지 생명은 정보다. 국내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새롭게 새워진 건축물을 매월 제일 먼저 안다는 것 만으로도 행운이다. 건축물 사진은 보는 눈을 높혀준다. ‘안고수비’란 말이 있다. 손은 비록 흉내도 못 낼 정도지만 보는 안목은 키우라는 뜻이다. 건축 잡지는 내 안목을 키워주는 훈련 코치였다.
 시간 나는 대로 전통건축을 답사했다. 건축 사진을 위해 카메라 찍는 기술이 필요했다. 사진 잡지를 구독하였다. 전통 건축은 이름난 산에 위치한다. 산에 관심이 생겼다. 등산 잡지를 구독했다. 유일한 취미는 낚시다. 답사하는 곳 주변 낚시터 정보가 필요했다. 낚시 잡지를 추가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기계발 차원으로 경제나 비즈니스 관련 주간지와 월간지를 신청했다. 각종 월간지와 주간지에 친해진 나는 대형 서점에 가면 꼭 잡지 코너에 들렀다. 각 분야의 그 다양성을 즐겼다. 내 필요에 따라 건강, 여행 관련 잡지도 추가하기 시작했다.
 

 건축 잡지를 구독한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매월 10권이상  모이던 책이 일년이 지나면 100권이 넘는다. 10년이 지나니까 1,000권이 넘었다. 건축 잡지는 ‘자료 활용’으로서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도서관 설계를 진행한다면 국, 내외 도서관에 대한 모든자료를 최대한 수집한다. 그자료를 찾는게 만만치 않다. 건축 잡지 목차를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대형 서점 책꽂이 분류 목록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필요한 것은 잡지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용도별 자료다. 잡지에 나와있는 건축물을 용도별로 구분했다. 집, 아파트, 호텔, 병원, 사무실, 은행, 박물관, 미술관 등으로 구분하여 그 종류 만큼 삼공파일을 준비했다. 그때부터 과감하게 잡지를 뜯기 시작했다.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앞면과 뒷면에 서로 용도가 다른 자료가 겹칠 때는 중요도에 따라 한 쪽면은 복사물로 대체했다. 자료 정리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 효과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잡지자료 찾는 시간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사무실 직원들도 사무실의 자료실을 활용하기 보다 내 삼공파일 자료를 더 선호했다. 그때부터 사무실에서 내 별명은 ‘잡지 뜯는 남자’였다.
 이 별명에 답장이라도 하듯이 분류 범위를 넓혀갔다. 잡지 최대 장점은 최신 정보다. 또한 초대 단점은 그 정보가 그냥 묻힌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게 된다. 매월 새롭게 배달된 잡지는 읽다 보니까 지난 것은 잊혀지거나 나중엔 재활용 용도로 폐기된다.
 다른 잡지들도 뜯기 시작했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 별로 파일 목록을 만들었다. 건강, 경제, 비즈니스, 자기계발, 운동, 시간 활용. 자녀 교육, 여행, 맛집, 고령화 등으로 파일 분류수를 넓혀 갔다. 지금은 40여 종류가 된다. 서재 책꽂이에는 책 장서수만큼 삼공파일이 꽂혀있다. 파일에 적혀있는 다양한 제목을 보면서 저 자료들을 한 곳으로 묶어서 정리하면 더 편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첫책이 쉰살이 되던해 나왔다. 제목이 ‘30초 건강코치’다 시간활용, 생활운동, 메모술, 단전호흡, 요가, 다이어트 등으로 합쳐서 만든 실용서다. 비빔밥처럼 비비고 섞어서 만든 책이다. 이 책 한 권으로 대여섯가지 분야가 정리되었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이젠 이쪽 분야 자료 모이기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한 권으로 통합된 이 책을 수시로 읽는다. 내 삶에 조그만 마디가 생겼다. 마디는 정리됨을 상징한다.
 지금 준비하는 책은 ‘자유인 프로젝트’다 나와 같은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은퇴를 하면서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자유롭게 살아가는냐에 대한 방법론이다. 6가지 분야를 섞은 인문서에 가깝다. ‘건강. 돈. 일. 시간. 사람. 사로’ 등으로부터 자유를 찾고 그것을 뛰어넘는 전략, 전술이다. 자기계발, 문학, 철학 등을 비비고 섞으면서 만들어 내는 실용서이면서 인문서다.
 

 3년에 책 한권씩 쓰는 계획이다. ‘기질. 심리학. 직업. 미래학. 트랜드. 놀이학. 건축설계. 디자인’ 등을 합쳐서 ‘자녀 설계학’, ‘건축과 인문학’, ‘음식. 문화. 역사. 철학’을 합쳐서 ‘혀끝의 인문학’ 등 제목을 붙여서 10여가지로 분류했다. 이 중심에 잡지가 있고, 뜯어진 자료를 계속 추가 하고 있다.
 난 일주일에 3번 대형 서점에 간다. 관심 있는 분야에 새로운 책을 찾아 보지만 잡지 코너는 필수 코스다. 목록 분류가 20여가지다. 관련 잡지 수는 그 몇배다. 구독하는 잡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잡지를 펼쳐본다. 방법은 선택과 집중이다. 우선 목차를 본다. 내가 앞으로 글을 쓸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선택해서 읽는다. 필요한 내용이라면 포스트 잇 메모지로   그 부분에 붙여 놓는다. 다음 잡지도 이런 식으로 읽는다. 난 이것을 ‘정보사냥’이라고 불렀다. 필요한 부분이 5페이지 이하면 그냥 노트 한쪽 면에만 베낀다. 이때는 기록된 노트를 뜯어서 파일에 보관한다. 포스트 잇지가 붙는 잡지는 구입해서 과감하게 뜯어 낸다. 이젠 나는 잡지를 책쓰기 위해서 뜯는다. 정보 사냥에서 한 차원 진화되었다.
 나는 내 책이 팔릴지 안 팔릴지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필요한 책,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직접 쓰고 싶을 뿐이다. 나는 이 일이 재미있다. 각분야를 비비고 섞어서 어떤 내용이 나올지 기대된다. 난 이제 건축가에서 융합작가로 인생2막을 꿈꾸고 있다. 잡지 덕분이다.
 
 ‘홈파티 디자이너’는 내 딸의 융합직업이다.
 
 잡지의 최고 수혜자는 딸이다. 그 녀는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이미 직업이 있기 때문이다. 딸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그 녀 명함에는 ‘홈파티 디자이너’라고 적혀있다. 이 일은 5가지 일을 융합시킨 직업이다. 요리사, 작가, 여행가, 취재기자, 네트워크 마케터일이다. 5가지 일 공통점은 딸 기질과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이미 검증도 끝냈다.
 딸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딸이 지닌 기질에 주목했다. 기질은 타고난 성격과 재능이다. 딸 기질은 4가지 였다. 자유본능, 사교성, 미각, 손재주였다. 그 핵심기질은 자유본능이었다. 딸에게 기질에 맞는 일을 찾아 주기로 했다. 건축가가 집을 설계하는 것처럼 딸을 디자인하기 시작한 셈이다.
 딸은 자유분방하다. 구속을 제일 싫어한다. 사교성이 좋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제일 행복하게 보인다. 미각이 예민하고 손재주가 좋아서 유치원 때부터 음식만들기를 좋아했다. 딸이 나아갈 길을 요리분야로 정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다방면으로 현장 체험학습을 했다. 식당체험, 시장보기, 맛집탐방, 먹거리 생산지 견학, 친인척 집에서 요리하기, 친구집 생일상 차리기등을 경험했다. 결론을 내렸다. 딸이 갈 길은 요리분야지만 자유롭게 일하면서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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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_서울시장상_김은혜
 작품명 :
 나는 오늘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친구와 만난다.
 
 
 
 3주에 한번, 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친구와 만난다.
 
 대학병원 3층, 암센터·골수이식센터는 오늘도 마스크를 하고, 다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 대신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환자들로 붐빈다. 백혈병으로 수혈을 받으러 온 환자, 항암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 등 각기 병명은 다르지만 침대 위에 누워서 굵은 주사바늘로 팔을 수 십번 찔려야 한다는 사실은 다 같다.
 
 그 중 한명의 환자가 바로 우리엄마다.
 지난 2010년, 엄마는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으셨고 수 없이 병원을 넘나들며 독한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늘 옆에서 우리가족을 지켜줄 것 같던 엄마의 암선고로 정말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다. 하던 일도 그만두고 엄마 옆을 지켜드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점점 수척해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옆에있어주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항암치료를 잘 헤쳐나가고 계신 엄마 덕분에 가족들은 웃음을 찾아가고 있다. 3주 마다 한번씩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몇시간 동안 주사를 맞아야 하지만, 엄마가 옆에서 항상 웃고 계심에 감사하다.
 
 가족 중 한명이 아파서인지 병원에 온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암센터·골수이식센터에서 보는 환자들을 보면 더 그렇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고생하다가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 이제 막 아빠가 되었는데 딸을 마음껏 안을 수 없는 환우 등 그 곳에는 언제나 불쌍하다는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나 역시 그런사람들을 볼 때면 불쌍하다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란 철 없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이 철없는 생각, 아픈 사람들을 더 아프게 만드는 불쌍한 시선을 고쳐먹게 된 것은 바로 병원에서 만난 "희망"이라는 이름의 잡지 덕분이었다. 이 잡지에는 백혈병, 혈액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 고통과 싸우고 이겨내는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그저 시간때울 요량으로 읽기 시작한 잡지 “희망”속에서 나는 한 눈금만큼 더 성장했다.
 
 

 이 "희망" 속에 담겨있는 백혈병 환우 가족의 이야기는 보통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아파 동네병원에 갔더니 어서 큰 병원에 가볼 것을 권유했고,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백혈병 판정을 받은 날 부터 시작된다. 갑작스런 백혈병 판정에 충격을 받은 가족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끝없는 간호와 환자 본인의 의지로 위태로운 시간들을 이겨내고 지금은 완치판정을 받으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짧은 글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고통의 시간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족과 골수가 맞지 않아 애 태우며 아마 일분 일초가 몇 배는 더 길게 느껴졌겠지...
 
 이러한 해피엔딩도 있는 반면에 어딘가에는 새드엔딩으로 막이 내려버린 경우도 있다.
 내가 희망이라는 잡지를 처음 만난 해, 친구 누나께서 백혈병으로 힘든 투병시간을 보내다 결국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해듣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에 건강한 몸으로 봉사활동도 다니며 간호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신 멋진 분이셨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조혈모 세포 기증, 헌혈증 기증, 머리카락 기증 등을 생각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가족과 조직적합성항원이 맞지 않아 절망의 늪에 빠져있는 환우와 가족들에게 조혈모세포기증은 한줄기 빛이다. 0.005%의 희망을 가지고 백혈병환우들은 지금도 조혈모세포은행에 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일치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혈액암으로 고통받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끈이다.
 이 희망의 끈을 단단히 묶어주기 위해 조혈모세포 기증을 선언했다. 물론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열심히 설득해서 오히려 이들 또한 조혈모세포 기증, 헌혈증 기증 동참을 이끌어냈다. 조혈모세포기증은 가까운 헌혈의집에 찾아가 등록만 하면 되니, 이것보다 쉬운 희망의 메시지가 또 있을까?
나의 이 조그마한 노력이 환우들에게 미소를 찾아주었으면 한다.
 
 이번 달에도 잡지“희망”에는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있다.
이 희망의 노래들이 많은 사람 귓가에 울려퍼져서 어린아이가 어린이답게, 첫 아이를 힘껏 안아주는 딸바보 아빠가 제 자리를 찾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이상의 새드엔딩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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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 금상]오미정_내인생에 엔진을 달아준 특별한 잡지
 작품명 :
내 인생에 엔진을 달아준 특별한 잡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꿈은 기자였다. 종이 위에 인쇄된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에 매료되었고 기사 말미에 나오는 기자 이름 석 자가 근사해 보였기 때문에 멋모르고 장래희망을 ‘기자’로 낙점해 버렸다.
 엄마가 읽던 여성지 ‘여원’, ‘주부생활’을 초등학교 꼬맹이 시절부터 탐독했던 나였다. 우리 사회의 여성리더, 멋진 여행지, 달달한 로맨스까지 온갖 세상 이야기가 잡지 한권 속에 다 담겨 있었고 어른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다는 짜릿함이 더욱 책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잡지를 향한 짝사랑은 그 후로도 내 또래들이 즐겨 읽던 만화잡지, 하이틴잡지로 연결되면서 쭉 이어졌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뒤 나는 케이블방송국에서 홍보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느닷없이 대표이사 호출을 받고 TF 회의에 참석하니 회사 고객을 위한 멤버십 잡지를 창간하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내심 ‘앗싸’ 쾌재를 불렀다. 지금까지 독자의 입장에서 잡지를 ‘우러러’ 보았다면 이제부터는 180도 입장을 바꿔 ‘기획자’가 되어 내려다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뛰고 신이 났다.
 우선 서점부터 달려가서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잡지를 섭렵하고 신문의 주요기사를 스크랩했다. 한편으로는 제작사를 공개 PT로 선정하며 잡지 제호, 판형, 콘셉트를 숨가쁘게 결정했다.
 
 애지중지 공들여 만든 창간호가 나오자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하지만 잡지를 받아든 대표이사로부터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디자인만 그럴듯할 뿐 정작 독자가 필요한 알맹이 있는 읽을거리가 없다는 매서운 질책이 이어졌다.
 아프지만 예리한 지적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대한민국 특구’에 산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강남사람들을 타켓으로 한 잡지였는데 잡지의 분명한 콘셉트도 없이 고만고만한 명사 인터뷰, 여행지 소개, 방송계 가십 등으로 채워져 사실 이 잡지, 저 잡지 베끼듯이 짜깁기한 수준이었다.
 그날부터 고난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흥미 기사 위주로 ‘휘리릭’ 읽었던 수십 권의 잡지를 한 권 한 권 찬찬히 다시 펴들고 입시 공부하듯 분석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발랄하고 위트 있게 비튼 ‘페이퍼’의 저력, 생활문화라는 쉽지 않는 코드로 우아하게 외길을 가고 있는 ‘행복이 가득한 집’의 뚝심, 30대 주부들의 가려움증을 살살 긁어주는 알짜배기 정보가 많아 깊이는 없어도 넓기는 한 ‘레몬트리’. 인기 잡지들의 콘셉트, 특징, 매달 선보이는 아이템과의 상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시작하자 한 줄기 ‘가야할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는 ‘촉’이 좋은 얼리어답터 성향의 일반 독자를 찾아다니며 회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모니터링을 부탁했다. ‘그네들’과 모니터링 회의를 하면서 날카로운 잡지 비평을 가슴에 새기고 ‘지금 이 시점’에 꼭 필요로 하는 정보가 무엇인지를 하나씩 알아나갔다. 독자와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나는 참 많이 배웠다. 잡지 기획자는 갑(甲)이요 독자는 을(乙)이라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못된 편견’을 버릴 수 있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필요한 콘텐츠가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잡지란 태생적으로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새로 생긴 맛집, 새로 부상하는 라이프 스타일, 떠오르는 인기 스타, 곧 ‘뜰’ 조짐이 보이는 샵들. 무수히 많은 ‘새로운 것’이 널리 알려지기 직전에 잽싸게 낚아챌 줄 아는 잡지 기획자의 순발력과 안목, 그리고 그 이면에 깔려있는 사람의 욕망과 심리를 꿰뚫어 볼 줄 아는 인문학적 통찰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ABC부터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잡지 콘셉트를 세우고 아이템을 발굴해 나갔다. 매월 한차례 회사 대표까지 참여하는 기획회의는 ‘지옥의 시간’이었다. ‘요즘 부상하는 트렌드는 무엇이며 이에 근거해 이달의 메인 테마를 잡아 주요 아이템들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매끄럽게 설득시키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특색 있으면서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기삿거리를 발굴해야 했고 녹초가 되도록 손품, 발품을 팔았고 한편으로는 기획회의 자리에서 무참하게 깨진 날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콘텐츠 발굴, 잡지 마케팅, 광고 영업을 입체적으로 조율하며 기획하는 능력까지 요구하자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가랑이는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잡지의 색깔이 잡히기 시작했고 멤버십 잡지지만 인지도가 쌓여나갔다. 다른 지역에서도 만들고 싶다는 문의는 계속 이어졌다. 고비고비 마다 힘들었고 스트레스도 심했지만 30대 그 시절은 잡지를 통해 많은 ‘공부’를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회사 대표도 ‘킬러 콘텐츠’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탓에 회사 전체 수익구조로 보면 크게 돈도 되지 않는 잡지에 미주알 고주알 관여하며 신경을 쏟았으리라 추측을 해본다.
 
 통권 60호까지 만들고 나는 회사를 나와 지금 다른 일을 하며 다시금 ‘행복한 독자’ 신분이 되었다. 서점의 잡지 매대에서 독자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각양각색의 잡지를 보면 문득문득 30대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이 아이템 짱이다’ ‘ 이 잡지는 짜깁기 아이템 투성이네’ 내 나름의 품평을 해보며 에디터와 기자들이 흘렸을 땀방울을 생각해 본다. 
 사실 요즘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개성 있고 깊이까지 갖춘 ‘웰메이드 잡지’를 만나기는 힘들다. 볼거리는 있으나 읽을거리는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든다. 물론 미디어의 각축과 광고수주의 어려움, 여기에 불경기까지 겹치면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일 게다. 하지만 난 ‘좋은 잡지’가 계속 나오리라는 기대를 늘 가지며 매월 서점을 찾는다. 잡지의 ‘킬러 콘텐츠’는 힘이 세고 늘 자기 진화를 거듭하면서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생물체’ 같은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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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 은상]은상_김란희
 작품명 :
 자동차잡지를 들여다보던 여사원
 
 
저는 비정규직 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까지 제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요.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비정규직’ 이라는 말은 못 배우거나 조금 덜 배운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택한 직업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어릴 적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냐구요?
물론 저보다 좋은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기본적인 학업과정은 모두 이수했답니다. 대학교 때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매 학기 마다 장학금을 받기도 했구요.
그런데도 지금 제가 앉아있는 이 자리는 모 대기업의 서무, 즉 대한민국에서 내놓아라 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있지만 살짝 다른 경로를 통해 들어온 특이케이스라 할까요. 계약 기간이 지나면 자리를 훌훌 털고 나가야 하는 전제 조건 하에 말이에요.
 
이 대기업은 이니셜만 들어도 모두 알법한 정말 큰 규모의 회사랍니다. 분야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편하고 빠르게 데려다 줄 ‘자동차’를 다루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는 온통 자동차로 가득 차 있답니다. 주위 사람들 또한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자동차를 쉼 없이 연구하는 열정적인 분들이 대부분 이구요.
 
그런데 문제는 일단 취업은 했지만 저는 자동차는 그냥 굴러다니는 줄만 알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에요. 아니 몰랐었어요. 회사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자동차 관련 잡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지금은 어떻냐구요? 국내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외제차들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이름을 척척 말 할 정도로 자동차 박사가 되어있답니다. 자동차에 관해 무지했던 제가 이렇게 된 건 어느 날 책상 위로 배달되어 온 작은 상자로부터 시작 되었어요.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계절이 아마 초여름 정도 였던것 같아요.
그날따라 할 일을 빨리 끝낸 탓에 지루해 하고 있을 때 제 자리로 택배가 하나 도착하더군요. 상자에는 팀명만 쓰여 있고 수신자가 적혀있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제가 상자를 개봉해 보았어요. 그 때 그 안에 들어 있던 게 바로 세 권의 자동차 잡지였답니다. 일단 잡지의 주인을 찾기 위해 사무실을 돌아다니던 저는 다른 서무 책상 위에 올려 져 있는 잡지를 보고 나서야 이 잡지들이 공용 잡지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 길로 자리로 돌아와 첫 장을 펼쳤지요. 심심한 차에 가볍게 읽기 딱 좋을 것 같았거든요.
 

 
솔직히 처음에 그 잡지를 읽었을 때 흥미가 없어서 그런지 별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었어요. 마치 일곱살짜리 어린이가 역사교과서를 들여 다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워낙 아는 게 없던 터라 그냥 자동차들의 사진만 대충 보면서 페이지를 넘겨나갔지요. 그 때 그 첫 자동차 잡지를 통해 제가 느낀 거라고는 자동차 한 가지 주제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분량의 책을 만들어 낼 수 있구나 정도였어요.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동차 사진들만 바라보았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는 어느새 다시는 펼쳐보지 않을 것만 같던 그 잡지를 다시 꺼내어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어요. 얇은 종잇장들을 빠르게 넘겨가며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형상을 열심히 찾던 중 원했던 그림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절로 ‘아!’ 하고 탄식이 터져 나왔어요. 꽉 막혀있던 속이 뻥 뚫리면서 답답함이 싹 사라졌지요. 제가 그토록 찾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한 장의 자동차 사진이었답니다.
 
사건의 발달은 점심시간부터였어요. 팀원 분들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도중, 저 멀리서 카키색상을 띈 자동차 한 대가 달려오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 자동차에 시선을 집중하더군요. 이 곳 에서는 발에 체일 정도로 흔한 것이 자동차인데 왜 유독 저 차에만 집중을 하는지 궁금하여 옆에 있던 분에게 바로 물어보았지요. 알고 보니 그 자동차는 이번에 새로 출시되는 신형 자동차였는데 시험주행을 나온 것이라 회사 사람들도 실제로는 처음 접한 것이기에 그리 집중이 되었던 것 이었어요. 잠시 뒤, 그 자동차는 바로 제 눈앞까지 왔고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랐답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결국 그 날 저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수수께끼 자동차 잔상의 출처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머리를 조아려야 했답니다. 책상 위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잡지 속에서 그 해답을 찾기 전 까지 말이에요.
 
 

그 날 이후로 저는 여유 시간이 생길 때 마다 자동차잡지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답니다. 잡지를 보고난 후 무관심이었던 대상이 점점 흥미로워 지고, 특히나 제 주변을 달리는 자동차들을 볼 때 마다 자연스레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것이 참 재미있었어요. 다 똑같은 줄만 알았던 자동차의 세계가 이렇게 넓은 줄 잡지를 통해 그제서야 알게 된 거죠. 음,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명색에 자동차 회사에 다닌다는 사람이 그렇게 무지 할 수가 있었냐고 묻는 분들도 있을거에요. 이 질문에 저는 다시 한 번 제가 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온 사원이 아닌 ‘특별케이스‘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답니다. 소속은 자동차 회사지만, 제가 하는 업무는 자동차를 전혀 몰라도 되는 사무적인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저와 비슷한 처지의 사원들 대부분이 자동차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이구요. 그래서인지 처음에 제가 자동차 잡지에 관심을 가질 때, “xx씨는 그런 거 몰라도 돼~”라고 장난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꽤 계셨는데 그 때 마다 저는 그냥 웃어넘기곤 했지만 사실 굉장히 씁쓸했답니다. 그 뒤로도 저는 틈틈이 자동차잡지를 손에 잡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닐 때에는 잡지를 잠시 내려놓는 버릇도 같이 생겼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회사에 완전 적응할 무렵 저의 회사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평소에 제가 자동차잡지를 즐겨 읽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한 과장님께서 제게 한 장의 사진을 내민 후 부터 말이에요.
 
“xx씨, 혹시 시간 괜찮으면 이 자동차의 역사에 대한 리포트 좀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저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고, 제 얘기를 들은 같은 팀의 언니들은 왜 사서 고생이냐며 일거리만 더 늘어 안타깝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그 때 저는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답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불타올랐던 일에 대한 열정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항상 고민하던 제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아마 그 때 처음으로 생긴 것 같아요. 입사하는 순간부터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던 자리였기에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지금껏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 제안을 듣는 순간 ‘아. 나를 인정해 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어깨가 절로 반듯이 펴지더라구요. 그리하여 저는 약 일주일간 그 리포트를 만드는데 모슨 신경을 집중했고, 후에 완성된 결과물을 과장님께 자랑스럽게 전해드렸습니다. 다행히 과장님께서도 리포트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그 날 저녁 답례로 식사를 사주셨는데 그 때 과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다른 서무들과 달리 평소에 자동차 잡지를 즐겨 읽더라. 저번에는 우리도 잘 모르는 외제차를 보고, 단번에 이름을 말하는데 이 친구가 정말 자동차에 관해 아는 것이 많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부탁하게 된 거라고.’
 
기분이 어땠냐구요? 당연히 최고였지요! 온 몸에 전율이 쫙 흐르더라구요.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주는게 이렇게나 기쁜 일 이라는 걸 그 때 깨달았으니까요.
 
그리고 다음 날, 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답니다. 안도의 한숨을요. 과장님의 권유로 중역 분을 비롯한 팀원들 앞에서 그 리포트를 발표하게 됐거든요. 아마 처음일거래요. 연구원도 아닌 여자 서무가 회의실 한 가운데서 자동차에 관해 발표를 한 것은. 다소 어설펐지만 다행히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저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쑥스럽게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박수소리를 따라 회사에 소문이 점점 퍼지더군요. 
 
‘저기 저 서무는 자동차박사 라더라’
 
솔직히 과장이 더해지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잡지를 통해 얻은 지식이 많아지다 보니 사람들과도 더 자연스레 소통하게 되었고 제 자신 스스로도 더 이상 자격지심에 빠져있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답니다. 아! 그리고 이젠 잡지를 보다가 사람들을 의식해서 내려놓는 행동을 할 필요도 없어졌구요. 
 
이렇듯 무심코 펼쳤던 잡지 한 권은 제게 많은 것을 가져 다 주었답니다. 적당량의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는데 부담스럽지 않다는 점이 잡지의 지속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아요. 그리고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잖아요. 누군가 갑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갈 정도로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친근한 매체 말이에요.
 
만약 우연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잡지를 발견한다면 한 번쯤 휘리릭 훑어보세요. 그 작은 행동이 일상을 바꾸어 놓을지도 몰라요. 
 
저는 몇 년 뒤, 이 회사를 떠나겠지만 저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은 남아있게 될 거에요. 그 사람들이 제가 없는 빈자리를 지나칠 때, 가끔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저 곳에 항상 자동차잡지를 들여다보는 당찬 여자 서무가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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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은상_김완욱
 작품명 :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해준 잡지
 
 
 죽고 싶도록 절망적이었던 나날, 나에겐 희망도 미래도 없어 보였다. 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고 매사에 부정적이었으며 무기력 했다. 오로지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있었을 뿐....! 그렇게 남은 인생마저도 허비하고 있을 때 나는 독서에 빠졌다. 너무나 무모한 시간이 힘에 겨워 손에 든 잡지 한 권.
거짓말 같지만 나는 그 잡지 한권으로 인해 독서를 하기 시작했고 삶과 생활에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 나 보다 못한 이들이 장애의 벽을 넘어, 환경을 뛰어 넘어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 들은 어리석은 나른 뒤 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장애가 있다고, 직장을 구하기 어렵다고, 왜! 나는 가족이 없느냐고!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놓아버렸다. 술에 의존해 살다가 급기야 되돌릴 수 없는 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어리석은 행동이 가져다 준 책임은 무거웠다.
현재 나는 교정시설에 수용되어 사회와 격리된 채 수형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내가 겪은 자책감과 죄책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심각한 것이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어 한때는 죽는것만 생각했을 정도였다.
녹내장과 근시성망막변성의증, 그리고 여러 가지 합병증 등으로 하나 남은 눈마저 죽어가고 있는 현실 또한 스스로를 괴롭혔다.
 
희망도 꿈도 없는 인생.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나 나는 변화되기 시작하고 달라지고 있다.
우연히 읽게 된 잡지 한권의 감동이 내가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서는 유일한 낙이 되어 갔고, 지금은 종교잡지를 비롯하여 시사, 문화, 스포츠, 과학잡지 등 보다 다양한 잡지를 읽고 있다. 잡지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독자를 울리기도 하고 웃게도 한다.
 
 

잡지 속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어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특히나 특수한 곳인 교정시설에서의 잡지의 소중함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루하지 않을 듯 싶다. 사회와 격리 되어 살아가지만, 세상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고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다시살 수 있도록 힘과 용기가 되어주며 피로한 이들에게는 휴식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잡지야 말로 수형자들의 교화상 꼭 필요한 교정이고 상식이자 정보제공처가 되어주는... 수형자들에게 잡지란 그런 존자개 아닐까! 나는 그리 확신한다.
내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조용히 다가와 위로해 주고, 삶을 놓아버리려고 할 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주며 ‘긍정의 힘’을 가져다 준 잡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독서광이 되어가고 있다.
 
한줄 한줄 페이지 마다마다 세상사는 이야기와 삶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잡지. 상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잡지.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지만 나는 독서하기를, 잡지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왜냐면 아직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해주었으니까! 고로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독서를 하고 잡지를 읽는다.
 
“그만 좀 읽어”라는 동료수형자들의 걱정을 뒤로 한 채......
인생2막. 내 인생, 나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며 스스로를 아끼고 나아가 다른 사람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보다 다양하고 유익한 잡지가 교정시설에 보급되어 수형자들의 교정교화에 도움이 되고 아울러 건전한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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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 동상]동상_김동희
 작품명 :
나의로또 잡지친구들
 
 
 ‘나는 왜 이렇게 살고있는 걸까? 과연 이런것이 삶의 의미란 말인가....’
 
  마치 사춘기가 다시 찾아온 것처럼 주체성을 상실한 어느 젊은 대학생의 방황
 은 지속되었습니다. 학점은 당연히 바닥이었고, 전공인 기계공학으로부터 점점 
 싫증을 느끼며 멀어져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귀었던 여친과도 헤어지고, 친한 벗들도 별로 없었던, 황폐한
 2년여의 대학생활을 접고 군대에 갔습니다. 공동생활과 내게 부여된 임무수행을
 하면서 책임감을 배웠고, 그동안의 나의 삶을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군 복부를 마치고 복학까지 몇 개월의 기간 동안 나는 전공과 어떻게든 친해
 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절실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기계 분야에서 유망했던 ‘캐드’라는 컴퓨터 기반의 설계를 배우기 위하여 
 무작정 학원으로 갔습니다. 처음에는 계획도 없이 시작했지만 점점 흥미가 생겨 
 몰입하게 되었고, 학원수업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면서 좀더 다양한 설계정보와
 경험을 접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서점 및 인터넷을 누볐습니다.
 그리고 발굴한 오하시스가 '캐드비젼‘이라는 잡지였습니다. 1995년 창간된 이
 잡지는 당시에 오토캐드라는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알려져 있었고, 업계현황, 전반적인 기술흐름, 설계사례 소개등의 다양한 정보를 
 다루어서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 불가한 부분의 부족함을 채워주었습니다.
 
   ‘캐드비전’은 글보다는 그림이 풍부한 잡지였습니다. 신문처럼 빡빡한 기사들
 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설계된 모양들을 대략적으로 보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인상깊은 형상은 설계하는 과정들을 머릿속에 차례차례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좀더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기사속에 표기된 저자의 웹주소에서 필요한
 내용을 검색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나는 제품설계의 기본원리와 방법을
 깨달았고, 다양한 관점으로 제품을 분석하는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나는 ’캐드비젼‘과 절친이 되었고, 늘 내곁에서 함께 했습니다. 
 

  대학 졸업후, 중견기업의 설계부서에 입사하였습니다. 업무는 제품에 대한
 기획 및 설계후, 도면을 만들어 가공업체에 전달하고 제작하는 일이었습니다.
  입사한지 1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어느정도 익숙해 질 무렵, 부서내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던 선배가 학문에 매진하고자 해외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나는
 선배가 하던 업무의 대부분을 인계받았고, 어렵고 버거운 업무들을 해결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하였습니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터에, 회사의 매출에 지대
 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규모의 프로젝트가 출현하였고, 우리 부서도 이
 사업을 수주받기 위하여 총력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왔던 설계방법으로는 수주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회사보다
 인정받고 있는 경쟁사들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좀더 획기적인 기획이 필요하였고,
 전문적으로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넓은 범위에서 보는 안목과 경험이 더욱더
 요구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위기속에서 ‘캐드비젼’에서 익혀진 여러설계 컨셉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내가 캐드비젼을 보면서 머릿속에 그려봤던 여러 설계안들을 융합해서
 설계요구사항들과 매칭시켜 보자‘
  내가 구상했던 형상들을 차근차근 컴퓨터에 옮겨 보았습니다. 석달전에 본
 유사구조물의 형상과 현재의 제품형상을 장점위주로 접목시키고, 1년전쯤 굉장히
 독창적이어서 인상깊었고, 꼭 만들어보리라 생각하며 여러차례 분석했던 제품의
 구조특징들도 포함했습니다. 결국 나는 겉으로는 홀로 일을 하였지만, 나의 설계
 에는 여러 전문가들의 경험을 담게 되었습니다.
 
  나의 기획안은 부서내에서 채택되어 프로젝트의 전체 제안서에 포함되었고,
 회사는 여러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마침내 프로젝트를 수주 받았습니다. 
  나는 프로젝트의 수주사업에 기여한 주요공신으로 인정받았고, 이에 부수된
 포상도 넉넉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캐드비젼’과의 우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도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를 가급적 빨리 해결하고,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커피를 한잔사서 회사
 도서관으로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그곳에 흐르는 잔잔한 음악을 함께 듣고 커피
 향을 음미하며 그 친구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지금은 캐드관련잡지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잡지를 봅니다. 간략하게 보는
 수준이지만 이 습관이 나에게 또다른 행운을 줄거라는 믿음과 함께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내가 잡지로부터 취득한 유익한 지식들이 나만의 새로운 ‘로또’가
 되는 날들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나는 두아이의 아빠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한글, 영어단어, 수학계산의  
 지식보다는 지혜를 많이 쌓을 수 있는 교육을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흥미롭게 이것저것 보면서 친구 삼을 수 있는 어린이잡지를
 찾고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을 위한 ‘캐드비젼’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아이들이 그들의 잡지보기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을 때,
 
  “얘들아! 아빠는 좋아하는 잡지를 많이 읽어서 얻는 지혜와 슬기로 힘겨운 과정
 들을 이겨낼 수 있었고, 남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었단다.“
 
  “지금도 아빠는 도움을 받을 새로운 잡지 친구들을 만나려고 찾는 중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한 미래의 잡지친구들은 과연 누가 될까요?
 
 그 친구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빨리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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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동상_김솔아
 작품명 :
잡지와 함께 한 화요일 -외로움을 달래준 나의 벗, 잡지
 
 
 
 매주 화요일은 내가 살던 아파트의 폐휴지 수거일 이었다. 때문에 화요일이 되면, 아파트 주민들은 너도나도 집안을 차지하고 있는 각종 종이뭉치들을 폐휴지 수거처인 놀이터로 들고 나왔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시절의 나는 방학이 되면, 하루의 대부분을 그 놀이터에서 홀로 보냈다. 내성적이며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랐던 나는 친구가 별로 없었고, 그나마 몇 명  있는 친구들은 모두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 역시 그런 나를 챙겨 주시기 에는 너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계셨다.
 
 내게는 자폐증을 가진 4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은 동생의 치료를 위해, 매일 병원과 여러 시설들을 전전하셨다. 자연히 나는 혼자 남겨져 있는 시간이 많았고, 덕분에 나는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긴 하루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때 내게 세상은 참으로 지루하고, 짜증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대체 왜 하늘은 파란지, 왜 나는 친구가 없는지, 왜 부모님은 나를 돌봐주지 않는지…….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없어 보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화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놀이터에서 모래장난을 하고 있던 나는, 심심함에 지쳐 사람들이 버리고 간 폐휴지 뭉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이, 전단지의 틈바구니 안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던 열 묶음이 넘는 잡지였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나와 잡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별다른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놀이터에 주저앉아 그 잡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흰 종이들에 빼곡히 인쇄된 것이 단순히 검기만한 활자가 아니라, 오색찬란한 하나의 ‘세계’ 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나는 그 잡지들을 낑낑거리며 집으로 옮겨와, 몇 날 며칠에 걸쳐 닥치는 대로 읽어 내려갔다. 당시 그 잡지의 묶음 안에는 과학동아 같은 과학잡지와 윙크나 파티 같은 만화잡지들이 한데 묶여 있었다.
 
 

 나는 과학동아를 읽으며, 하늘이 푸른 이유를 알았다. 하늘은 나를 짜증스럽게 하기 위해 푸른 것이 아니었다. 태양은 수많은 종류의 무지개색 빛들을 지구로 쏘아 보내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가시광선’ 이라는 빛뿐이고, 그 가시광선을 대기층이 산란시키기 때문에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이었다. 즉, 원래 하늘은 푸르지 않으며, 대기가 없는 달에서 하늘을 본다면 하늘은 온통 검은색일 것이었다. 나는 과학동아를 통해 그 사실을 안 뒤부터, 줄곧 달에 가고 싶었다. 또, 가시광선 이외의 빛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일까를 상상했다.
 
 만화 잡지는 내게 바로 그런 ‘상상의 세계’을 보여주었다. 만화 안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그 안에는 가시광선 이외의 빛을 볼 수 있는 인간도 얼마든지 등장했고, 너무나 손쉽게 달로 갈수 있는 미래가 펼쳐져 있기도 했다. 나는 만화잡지를 통해, 상상력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천연자원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석유나 석탄처럼 고갈되지 않으며, 공해를 내뿜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인간은 삶을 청청하게 만들고, 삶의 지루함을 훌륭하게 메워주었다.
 
 이 잡지들 덕에 나는 더 이상 시간을 ‘견뎌내지’ 않고, 시간을 재밌게 ‘보내는’ 법을 깨달았다. 하늘이 푸른 것에도 더 이상 짜증이 나지 않았고,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예전처럼 섭섭하지 않았다. 즉, 잡지는 내게 새로운 삶을 시간을 선사해준 셈이었다.
 
 그 뒤로 나는 부모님을 졸라 과학동아를 구독했다. 그러고는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모아 만화잡지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내 용돈은 하루에 300원이었다. 불량식품을 먹고 싶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며, 돼지저금통에 매일 300원씩을 모아 매주 발행되던 만화 잡지를 손에 넣으면 그토록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권의 잡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잡지를 읽고 또 읽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혼자 있는 시간뿐이었던 나에게 잡지는 가장 훌륭한 벗이 되어 주었다.
 
 그 훌륭한 벗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또 한 번 내게 아주 뜻 깊은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동생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신 부모님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너무나 지친 얼굴로 “니 동생, 이제 치료를 포기해야겠어. 아마 평생 고칠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셨다. 오래 묵혀두었던 희망이 산산이 부셔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점점 더 말이 없어지셨다. 집 안 분위기는 나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때문에 우울해질 때면, 나는 서점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잡지들을 들추어 보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 ‘좋은생각’ 이라는 작은 잡지였다. 그 잡지 안에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 소소한 희망을 발견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 잡지를 부모님께 선물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 대하고 드릴 용기는 나지 않아서, 몰래 부모님의 가방에 ‘좋은생각’ 을 넣어두었다. 부모님은 잡지를 읽으셨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한동안은 가타부타 말이 없으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부모님은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리고는 “니가 넣어둔 책, 잘 읽었다. 좋은 내용이 많더구나. 그래……이젠 힘내서 살아야지.” 라고 말하시며 웃으셨다. 그날 우리 동생을 포함한 4식구는 밖에 나가 외식을 했다. 동생에 장애 때문에 부모님은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러나 그날 우리 4식구는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너무나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가끔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그 아파트의 놀이터를 떠올리곤 한다. 만약 그 놀이터 모래 속에서 잡지라는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하고. 아마 그랬다면 어린 시절의 나는 좀 더 외로웠을 것이고, 아마 평생 동안 하늘이 파란 것을 짜증스러워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파란 하늘을 사랑하고, 부모님과 사랑하는 동생이 있어 전혀 외롭지 않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내가 그때처럼 여전히 잡지를 읽는다는 것뿐이다. 
 
 매주 화요일이 되면, 나는 놀이터를 서성이던 그 어린 시절의 내가 되어 잡지 가판대를 두리번거린다.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한 잔을 사마실 돈이면, 작은 잡지 한 권을 살 수 있다. 카페인이 사람들의 정신을 깨우듯, 잡지는 나의 영혼을 깨우고, 커피향기처럼 그윽하게 내 마음을 채워준다. 잡지라는 이 말 없는 벗은 앞으로도 쭈욱 나의 화요일을 향기롭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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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_오철환
 작품명 :
아버지의 유산
 
 
내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근엄한 무표정이셨다. 좀처럼 웃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감도는 때는 자식들과 함께 가을걷이를 하실 때뿐이었다.
 
"자, 이게 다 우리 자식들이다!"
"아부지, 그럼 이 벼들이 저희 동생인 거예요?"
 
철부지 막내의 말에 들판은 삼부자의 웃음으로 가득 찼다. 자식처럼 키우신 벼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매엔 흐뭇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린 더 없이 행복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난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2년 여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은 예나 다름없이 정겨웠지만, 큰 아들의 전역을 축하해주실 아버지의 자리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았다.
 
그때 허망한 가슴으로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이 ‘월간 새농사’라는 잡지였다.
 
서울에서 내려와 처음 농사를 지으신 때부터 20년이 넘게 정기구독하신 잡지는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신 농사일기까지 더해져 벽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추억이 된 기록에 담긴 아버지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잡지와 노트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러다 결국 끌어안고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다 보신 후에도 고이 보관해오셨을 잡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그날부터 일을 마치면 책상에 자리를 잡고 ‘새농사’와 아버지의 농사 일기를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이들은 내게 농사직설만큼이나 귀한 유산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결심했다. 아버지께서 정성으로 가꾸신 땅을 일구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농기구를 잡는 것도 서툴러 허둥거렸지만, 이내 아버지의 땅을 이루던 흙은 내 손에 오래 담겨 있었던 것처럼 익숙함을 전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농사일기에 담긴 지혜와 노하우를 현대 농사에 응용하는 방법을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농사 멘토가 되어준 잡지 ‘새농사’는 대를 이어 집으로 배달되었다. 잡지를 보고 땅을 일구었다. 잡지를 보고 씨앗을 뿌리고 잡지를 보며 열매를 얻어냈다. 어두운 곳엔 빛을 주고, 빛이 너무 밝은 곳엔 살짝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면서 땅과 새롭게 소통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다. 살아오면서 진지하게 꿈꾼 적 없던 농사꾼으로서의 삶. 그러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할수록, 홀로 외롭게 시작한 농사일의 파트너가 되어준 잡지가 있으므로 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특별한 희열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도시에서도 농촌에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버지의 농사 일기로 농업을 시작하고 잡지를 스승 삼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초보가, 이제 농작물과 아침 인사를 나누기만 해도 그네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농사꾼이 되었다. 한국 농촌의 미래에 대해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읍내에 있는 도서관에서 어려운 서적들도 한 가득 대여해 사전을 머리맡에 두고 밤늦게까지 공부도 하고 있다.
 
어릴 땐 농사짓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저 자연스러운 농촌의 풍경의 일부분으로만 느껴졌다. 일 년간 어르고 달래며 자식처럼 키워낸 농작물을 내다 파시고 돌아오실 때면, 못하시던 약주까지 하시고 허전함에 한숨을 쉬시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소중히 보관하셨던 잡지와 기록의 귀중함을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제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에 가슴을 적신다. 그렇게 사랑하시던 땅, 농작물 건사하는 일은 그 누구에도 맡길 수 없다 하시며 며칠간의 여행도 마다하고 지키셨던 땅. 이 땅을 두고 어찌 눈을 감으셨을지, 아버지 생각을 하면 어린 애처럼 마구 눈물이 쏟아져 견뎌내질 못한다.
 
“아비가 비록 배운 건 적지만, 땅을 일궈 농작물을 키우는 것에서만큼은 우등생이 되고 싶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갈 무렵이면 버릇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되뇐다. 농사 우등생 상패를 자랑스럽게 안고 계실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며, 아버지의 걸음을 좇아 으뜸 농사꾼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다시금 다짐한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잡지가 있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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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_김유진
 작품명 :
회상 그리고 사랑
 
  
 자기 키만한 잡지를 배를 깔고 누워 읽었던 어린 시절.
한글을 막 뗀 다섯 살배기의 손에 쥐여진 자기 몸채만한 잡지.
두 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운 커다란 잡지를 낑낑대고 아장아장 걸었던 꼬마.
 
22살 여대생이 자신의 5살 어린이의 모습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이 회상은 바로 저의 이야기입니다.
 
“애미는 어린 애 책을 뭐 그리 많이 사주노. 반찬 사라고 준 돈으로 쓰잘데기 없이. 쯧쯧.”
“… ….”
동네에서 유명할 만큼 고되고 고된 시집살이를 한 어머니. 반찬 하나 마음 놓고 살 수 없을 만큼 온갖 눈치를 보며 시집살이를 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한글을 막 뗀 아이에게 매주 배달된 국민서관의 어린이 잡지 구독료는 갖은 구박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산동네에 살면서 수세식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가난한 집의 며느리가 올컬러로 제작된 어린이 잡지는 사치로 보이기 십상이었는데도 5년이 넘도록 구독했던 어린이 잡지. 교육열이 높았던 가정에서 자란 어머니가 아니었는데도 두 아이 교육용으로 콩나물 값 아껴가며 산 어린이 잡지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깍두기 6칸짜리 공책과 뭉뚝한 연필 한 자루로 ㄱ,ㄴ이 아닌 어머니, 아버지로 한글공부를 한 다섯 살 배기.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야간 근무를 하셨을 때입니다. 주간에 근무하는 것 보다 야간에 근무하는 것이 더 월급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 두 아이와 노부모를 부양하기 위한 아버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귀가하는 아버지를 밤새 기다리며 긴 밤을 보내셨죠. 길고도 지루한 긴 밤에 어머니는 저에게 한글을 가르치셨습니다. 요즘처럼 변변한 한글 공부책 한 권 없던 시절, 아니 책이 있어도 사기에는 벅찬 살림살이었을 그 시절. 밤이 되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잠이 들지 않는 저는 그렇게  한글을 떼게 되었습니다.
새벽 5시 반. 귀가하는 아버지를 밤새 기다린 어머니는 제가 힘주어 눌러쓴 어머니, 아버지가 쓰인 공책을 매일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기름 떼가 묻은 손으로 공책을 만지면 혹시라도 종이가 더럽혀질까 눈으로만 보셨다는 그 시절 어머니의 회상은 아직도 저를 눈물짓게 합니다. 한글을 뗀 저를 위해 어머니는 더욱 공부를 시키고자 하셨고 애들 동네마다 돌아다니는 잡지 판매원 아주머니가 잡지가 애들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덜컥 구독을 결정하셨습니다. 워낙 작은 산동네라 시내에는 나가야 서점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아픈 제 언니와, 나이 드신 시어머니. 그리고 어린 막내딸을 두고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없었던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매주 배달된 국민서관의 어린이 잡지는 한글을 뗀 어린아이에게 누구보다 좋은 선생님이자 말동무였습니다. 큼직큼직하게 그려진 동물. 계절별로 다양한 식물. 주변 환경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고마운 잡지였습니다. 저는 매일 밤, 이제는 깍두기 8칸짜리 공책에 잡지에 나온 사자, 호랑이 등을 써 보기도 하고 잡지에 나온 해바라기를 그리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제 공책은 새벽녘 돌아 온 아버지를 환하게 웃게 했습니다. 공책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쓰는 저의 모습을, 틀린 글씨 지우겠다고 자기 손만한 지우개로 글자를 지웠을 저의 모습을 눈에 담으셨을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 본 어머니. 그렇기에 어머니는 그 갖은 구박에도 가난한 살림에도 잡지 구독을 그만두실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손에 책이 쥐여지고, 방 한 구석엔 이제는 자기 키만큼 쌓인 잡지가 있기에 저는 글자를 책을 잡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 후에도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습관과 글자 읽는 것을 좋아한 저는 공부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답니다. 또한 학교 숙제를 할 때 필요한 자료들이 전부 이전에 읽었던 잡지에 있었기에 언제나 숙제도 즐거운 마음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생생한 동물 사진을 오려 붙여 숙제를 했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까지도 배우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어릴 적부터 곁에 있던 국민서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한 키 한 키 성장해 가고, 마음도 한 뼘 한 뼘 자랄 때 언제나 곁에 있던 잡지들. 어린이 잡지에서 이제는 신문사에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조금은 두껍고 작은 글씨의 잡지들을 구독하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잡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따스함이 스민 잡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잡지를 소꿉친구처럼 껴안은 5살 꼬마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나아갈 한 발짝 한 발짝에도 곁에 있을 잡지라는 이름의 소중한 나의 친구. 그 든든한 친구가 있어 즐거운 여행 같을 인생이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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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_김의정
 작품명 :
tomato와 펜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약 십 년 전, 나는 당시 어떤 아이돌 그룹의 극성스러운 팬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 팬카페나 온라인을 통한 정보취득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달 자주 가는 서점에 들어오는 연예 잡지는 어렸던 나에게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그 당시 연예 관련 잡지에는 연예인의 사진, 프로필, 인터뷰 내용, 여러 가지 특집 이벤트 기사들이 실렸고 나는 매달 tomato라는 이름의 잡지를 즐겨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의 사진이나 기사를 집중적으로 보고 잡지의 다른 부분은 흘러 넘기는 식으로 잡지를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잡지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나와 같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어떤 학생이 펜팔을 찾는 다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주변에 펜팔을 갖고 있는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어렸던 나 역시 펜팔친구가 갖고 싶었고 같은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 사람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잡지에 적힌 이메일 주소로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그 우연찮은 메일을 시작으로 나는 내 생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면 빠지지 않고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나보다 3살 위의 중학생이었던 언니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친구이자, 든든한 언니였고, 사춘기라는 민감한 시기에 위로가 되어주는 그런 존재였다. 일주일에 4-5번 우리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진짜 언니, 동생인 사이로 지냈다.
 친구랑 싸워서 울적할 때, 학원에 다니기 귀찮을 때, 엄마한테 혼났을 때 이메일 속의 언니의 위로가 나를 울게 하고 또 웃게 했다. 우리는 같이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에 관한 이야기도 공유하기도 했고 또 서로의 사진을 주고받으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초반에는 잡지를 통해 그저 단순히 같은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친구가 되었지만 우리는 지속적인 대화를 통하여 그 시절의 즐거움, 고민, 슬픔, 기쁨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어린 시절, 용돈을 모으고 모아 언니의 생일 날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핸드폰의 핸드폰 고리를 생일 선물로 준비하여 보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내가 동네 문구점에 가서 한참을 고민하여 코게빵 인형의 핸드폰 고리를 설레는 마음으로 샀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선물을 받고 언니가 너무 기뻐하고 감동했다는 메일을 받았던 것도 눈에 선하다. 그 때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의 즐거움을 깨달았던 것 같다.
 

 1년, 2년, 세월이 흐르며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언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우리는 서로 바쁜 생활에 정신을 빼앗겨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봤던 언니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나의 메일함에도 언니의 메일이 남아 있지 않다.
 어른이 된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거기엔 꼭 언니가 있다. 언니와 함께 나눴던 추억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언니는 어떤 모습일까 그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런 날이면 추억속의 언니를 불러내어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을 늘어놓곤 한다.
 ‘계영이 언니, 그 땐 정말 고마웠어. 잘 지내고 있지?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웠어.’라고.
 그리고 그렇게 언니를 떠올린 날이면 그 당시 서점에서 표지를 고르고 골라가며 봤던 잡지가 떠오른다. 그래서 아직도 나에게 잡지는 그런 존재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주었던 다리 같은 존재. 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연예인을 만나게 해줬던 통로 같은 존재.
 문득 그 당시 즐겨보던 tomato라는 잡지가 그리워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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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선_임인섭

 작품명 :
내 책장속의 한권의 잡지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휴가를 떠나는 그곳. 
2008년도 3월 11일.
한겨울이라고 생각될만큼 입김이 하얗게 서리던 날, 나도 그곳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닌 친구 녀석과 동반휴가를 떠났다. 아무래도 휴가는 혼자보다는 둘이 더 재밌을거라는 생각이였다.
 
 아무래도 둘이라서 그런지 강원도 양구에서의 혹독한 훈련소 생활도 남들보다는 재밌게 끝마칠수 있었다.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양구의 한 박격포 중대였다. 일반 보병이 되리라고 생각하던 차에 박격포라니...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친구와 나는 중대는 같았지만, 소대는 각각 나눠서 배치받았다. 그리고 자대에서의 이등병 생활은 시집살이하는 며느리 그 자체였다. 겨우 두발자국 떨어져 있는 다른 소대의 친구와는 신병휴가를 같이 나갈 때까지 말 한마디 한번 해보지도 못했다. 워낙 이등병들에 대한 간섭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등병의 신분으로는 행동의 제약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런 곳에서 내가 이등병때 볼수 있는 책이라고는 2종류밖에는 없었다. 주특기 교본과 월간잡지 뿐이였다. 주특기 교본이야 공부를 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라 싫어도 억지로 보는 책이였고,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월간잡지였다. 군대를 가기전에 잡지라고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나다. 그런 내가 주특기 교본이 싫어서 쳐다보지도 않건 잡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군대에 들어오는 월간잡지의 종류는 좋은생각, 샘터, TOP CLASS가 전부였다. 좋은생각이나 샘터는 동네 병원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항상 찾아볼수 있는 그저그런 흔한 잡지로 기억하고 있었고, TOP CLASS는 생소한 이름의 잡지였다. 그때는 잡지 이름만 보고 클래식 음악잡지라고 생각하고는 금새 흥미가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날 배가 아파서 급하게 들어간 화장실에서 변기뚜껑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TOP CLASS를 발견했다. 그렇게 나는 화장실에서 처음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내용이 아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기업이나 조직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잡지였다.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인터뷰는 반크의 박기태 단장님 편이였다. 반크라는 단체는 대학생이라면 들어봤음직한 이름이였다. 내가 알고 있기로 반크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리는 일을 하는 민간단체라는 정도였다. 박기태 단장님과의 인터뷰는 고작해야 2~3페이지 였던걸로 기억을 한다. 그렇지만 그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하고는 별다를바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던 박기태 단장님이 어떻게 반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반크라는 단체가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무작정 한국을 알리기보다는 먼저 외국인들에게 친구로 다가가서 친해지고 나서 그들에게 우리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게 우선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할 일들을 박기태 단장님은 평생을 바쳐서 일하고 계셨다. 얼마되지 않는 인터뷰였지만 내 기억이라는 책장안에 한편의 책으로 자리잡게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후로 가끔씩 반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활동 성과, 혹은 우리 한국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2년이 지나고 나는 휴가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학교에 복학하고, 몇몇 대외활동을 하면서 생각의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반크에 대한 기억도 잊혀져 있었다.
 아는 형의 추천으로 외국인들과 4박 5일의 행사를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외국인들을 위한 투어형식의 행사였다. 많은 국가의 외국인들이 오기 때문에, 행사요원들은 국가별로 인원을 나눠서 함께 움직이는 형식이였다. 내 영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감 하나로 가득차 있던터라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사전교육때 각자 담당할 국가가 정해지고 간단한 교육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외국인들에게 뭔가 선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보면 보통 이런 행사에서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것이 가장 한국적일까라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불현듯 머리를 스쳐가는 단어가 있었다.
“반크!”
반크에서 외국인들에게 선물하는 작은 기념품들과 지도들이 떠오른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선물이면서, 한국을 가장 잘 알릴수 있는 선물들을 구할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바로 반크에 전화연락을 했고, 며칠뒤에 택배로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선물들을 챙겨서 행사에 갔다. 박기태 단장님의 말씀처럼 우선은 4박 5일이라는 일정을 진행하면서 외국인들과 많이 친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일정이 거의 끝마쳐 갈때쯤에 준비한 선물을 외국인들에게 주었다. 이미 친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외국인 친구들은 외국에서 알고 있는 한국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잘못된 인식을 많이 바꾸었다. 그때 친해진 외국인 친구들은 아직도 종종 연락을 하고 있다. 그때 당시를 떠올려보면 아마도 선물을 받는 외국인보다는, 선물을 주는 내가 더 보람있었다고 생각한다.
 

 
조그마한 소책자만한 잡지... 그 잡지에서도 고작 2~3페이지 밖에 안되는 인터뷰...
그렇지만 내 기억이라는 책장속에 꽂혀있는 한권의 잡지.
영원히 내 책장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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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입선_장현우.hwp
 작품명 :
 샛길을 보는 여유 
 
 
어린 나이에서 점차 어른이 되기 위한 길목에 서는 때, 모두가 그렇듯이 나도 불안을 속에다 품고서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런 불안과 아픔, 상처는 꺼내서 보이지 않고 속으로 들여 넣을수록 더욱 어둡고 깊게 곪아가는 성질을 가진다. 안타깝게도 그 상처가 가장 생기기 쉬운 혼란스러운 사춘기 시절에는 이런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나는 그것을 혼자서 품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사라지리라고 생각했기에, 그저 기다렸다. 13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동네의 매일 보던 친구들이 아닌 낯선 아이들과 맺어가야만 했던 관계는 그 아이들이 낯설었던 만큼 관계 또한 낯선 것이었다. 그때는 아직 자연스레 함께 섞여 어울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전학 전에 함께 지내던 친구들만을 그리워했고, 당장 주변에 있는 교우들에게는 관심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켜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기조차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작 열넷의 나이로 경험한 낯선 사람들의 무시, 즉 ‘왕따’로 인해 난생 처음으로 느꼈던 삶 전반에 드리운 회의감과 패배감은 나를 점점 더 혼란스럽게 하고 버티기 힘든 만큼의 고통을 주었다. 그들의 무관심과 따돌림에 상처받아,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이유로 방학조차 달갑지 않았던 이전의 환경과는 너무도 다른 생활에 결국 적응하지 못해 심각한 자괴감을 지니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자신감이 없어졌고,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는가, 내가 살아 있는 건 혹 세상의 입장에서는 낭비와도 같은 게 아닐까? 하지만 성장통이라고는 해도 아직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던 탓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답을 내렸지만 다행히도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길 정도의 용기는 함께 가지지 못했다.
 
두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결단을 실천으로 옮겨 스스로를 죽이거나, 겁쟁이로 남아 이도 저도 못하고 우물대며 결국 무너지는 정신에 미쳐버리거나. 그만큼 나의 내면에는 그동안 생겨난 상당히 많은 균열들로 인해 깨지기 직전의 단계까지 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당시에 정신 검사 따위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결코 일반적인 결과치가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 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곧 미치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막바지까지 이르러 더는 정말로 버티기가 힘든 수준까지 왔다고 생각될 때에는 정말로 그 기분이야말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라 하겠다.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잡고 버텨야 했지만 내 주변에는 그럴 만한 것이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홀로 남은 외톨이라는 피해의식뿐이었고, 그건 내 시야를 확연히 좁게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장의 내 고통 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세상의 크거나 사소하거나 내게서 가깝거나 멀리 있는 모든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 하나, 내 몸과 정신을 버티는 데만도 너무나 버거워서 곧 깨질 듯한데, 어찌 바로 한 발 앞의 주변이어도 볼 수나 있었겠는가.
 
단 하나 익숙한 환경, 집은 그런 내 고통을 스스로 받아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중에서도 화장실이라 하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나만의 공간으로써 고통의 흔적을 없애기에도, 고통 받는 모습을 감추기에도 더없이 적절한 공간이었다. 그날의 상처를 매일 그곳에서 쏟고, 그날의 불안함을 그곳에서 달랬다. 여느 때처럼 어김없이 상처를 내뱉으러 들어갔는데, 손바닥을 펼친 것보다 조금 큰 정도의 월간지 한권, ‘좋은생각’이 서랍대 위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보고 난 후 미처 정리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놓여 있었기에, 펼쳐져 있었기에 눈이 글자를 따라간 뿐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던져져 있던 월간지를 삽시간에 읽어 나가고 있었다. 잡지에는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처럼 상처를 품은 사람의 이야기, 즐거움을 품은 사람의 이야기, 외로움과 쓸쓸함을 품은 사람의 이야기, 감동을 품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잡지에 동질감과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이제껏 경험한 어떤 것보다도 큰 위로로 다가왔으며, 하루를 버티는 것이 기껏해야 매일의 상처를 토해내는 방식에서 치유에 의한 방식으로 변화했다. 작은 잡지로부터 얻은 커다란 희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좋은생각’을 읽고 난 후엔 언제 발행된지도 모르게 월호수에 상관없이 곳곳에 흩어진 또 다른 ‘좋은생각’을 찾아내 읽었고, 그걸 반복하며 마침내 어머니께서 정기구독을 하고 계시다는 걸 알아내어 잡지가 집으로 도착하는 날이면 막상 구독을 신청하신 당신보다도 내가 먼저 잡지를 펼치곤 했다. 혹여 내가 잡지를 받지 못하거나 잊었던 날에는 내가 먼저 읽을 수 있도록 언제나 양보하셨다. 직접적으로 그 잡지가 내게 가지는 의미를 말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내가 그 잡지에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신 것 같아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몇 권 잡지의 위로는 읽는 데에서 위로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쓰는 것에서까지 내게 위로를 주게 했다. 나도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내 상처를 공유하고 싶다. 이 생각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가장 필요했던 ‘터놓음’의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눈을 보고 말로 하지 못했던 내 상처들을 글로써나마 조심히 써 내린다. 내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을 공유한다. 비록 잡지에 내 글이 실린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는 열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균열로 가득 찬 내면을 채워 감싸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다양한 사람과의 사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런 지각은 내가 다시 버티고 설 충분한 이유를 주었다. 세상에 무수한 작은 것들에 시선을 돌릴 줄 아는 여유가 생겼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저 앞에 멀리 또 높게 자리한 것들 말고도 한 걸음의 샛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은 아무런 목표도 없이 눈앞에 놓인 것만으로 하루를 지내가던 내게, 진짜를 향해 도전할 용기를 주는 일이었다. 주변을 돌아볼 줄 알게 되자 그동안 듣지 못했던 세상의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들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서 그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는데,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럿들의 소리를 가르쳐 준 여유에 감사한다. 여유와 느려지는 습관을 가르쳐 준 글에도 감사하고, 글을 쓰는 재미를 가르쳐 준 읽는 재미에 감사하고, 읽는 재미를 가르쳐 준 작은 잡지에 감사하고, 잡지 속 사람들의 이야기에 뭉클함을 얻게 해 준 그때의 외로움에도 감사한다. 외로움을 품으면 날 외롭게 만드는 세상을 원망하기에 바빴는데, 잡지를 읽으며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오로지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충분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 절망이 마음을 집어삼키려는 찰나에 잡지에 담겼던 글들은 마치 하나의 신앙처럼 나를 구원해 주었고, 그것은 글이 가진 위대함을 새삼 실감케 하는 일이었다.
 
잡지, 말 그대로 여럿의 글들이 한 데 묶인 책이다. 하지만 정말로 잡스럽게 어우러짐을 간과하여 묶어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우름을 생각하며 엮지를 않아도 여기에 쓰인 그들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 이웃의 이야기는 곧 내 이야기가 된다. 마치 내 몸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오밀조밀 맛있게 모여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무엇 하나 거부하게 되는 글이 없다. 낱어 하나가 내 양분이 되고, 문장 어구마다 스며와서 세상을 향한 포용의 크기는 점점 더 커져간다. 잡지가 가진 매력이란, 앞을 향해 달려가며 놓치기 쉬운 것들을 쉬어가는 여유에서 찾게 만드는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매일을 같은 집에서 같은 직장으로 출근하면서도 출근길만은 항상 다른 방법으로, 다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매일 아침 다른 길로 나선다면 얼마나 불편하기 짝이 없을까. 교통사정이 좋을지, 나쁠지, 그 길이 오래 걸리는 길일지, 짧은 지름길일지, 또 어딘지 모를 그 길에서 자칫 길을 잃게 되지는 않을지를 모두 염두해야 한다. 헌데도 그가 굳이 그리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 매일 아침의 다른 길은 그 매일을 새롭게 해 주는 까닭이라 했다. 우리는 보통 명확한 목적지가 존재하면 그곳을 향하는 걸음이 빨라진다고들 한다. 어떻게든 그 목적지에 빨리 다가가기 위해서, 또 그렇게 목적지에 다가가는 시간을 줄여 그 시간만큼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과연 그 목적지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게 옳은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을, 우리 스스로 설정한 저 목적지에만 달려가면서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진짜 중요한 것들을 보기 위해선 목적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내려 놓고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잡지가 주는 여유는 아마도 내가 가진 상처를 나누고 우리가 가진 즐거움을 함께 하면서 내 삶의 지루함과 익숙함을 벗겨내어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쁜 삶 속에서 자칫 답답해질 수 있는 가슴에 언제 생겨난지도 모르는 상처를 메우려고만 하지 않고 여유를 되찾는 숨구멍으로 바꾸어 주는, 나를 향한 잡지의 ‘쉼’을 허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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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제5회 전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수상작))
[대상 -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심명주_잡지, 내 삶의 동반자

 작품명 :
잡지, 내 삶의 동반자
 
 열일곱의 여름, 4인용 병실에서의 하루하루는 길고 지루했다. 고등학교에 와서 맞은 첫 여름방학의 풋풋한 설렘이 뜻밖의 교통사고로 산산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차에 부딪친 충격으로 무릎인대가 파열되어 큰 수술을 받은 후, 후덥지근한 날씨에 종일 보조기를 차고 누워 있으려니 답답하기만 했다.
 여느 날처럼 관절운동을 위해 재활치료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통증이 유난히 심하게 느껴진다 싶었는데, 갑자기 무릎에 힘이 풀리며 복도 한복판에서 철퍽 주저앉고 말았다. 목발이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놀라 달려온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 겨우 대기실 의자 한 쪽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나 자신이 너무나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져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그때였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대기실 한쪽 구석, 나지막한 밤색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것들…….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해 병원에서 준비해 둔 잡지였다. 무심코 묵직한 잡지 한 권을 빼들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매로 웃고 계시는 한 할머니의 사진. 그 웃음이 너무나 맑게 느껴졌다. 이 사람은 누구지?
 홀트아동복지회 부속병원의 원장 조병국 선생님을, 그렇게 병원 대기실 복도에서, 엉거주춤 목발에 기대선 채 처음 만났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입양아들의 주치의이자 엄마였던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홀린 듯이 인터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자신에 대한 말을 아끼시는 분이었다. 대신 그 세월동안 만나왔던, 부모 얼굴도 모르고 버려졌던 수많은 아이들의 사연들이 조곤조곤히 풀려나왔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장애를 갖고 태어나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하지만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는 먹먹한 슬픔과 함께 희망이 있었다. 버려진 뇌성마비 장애아가 의사선생님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은 이야기, 눈물범벅으로 입양되었던 아이가 자라 훌륭한 부모가 되어 자신이 받은 사랑을 입양아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이야기, 생면부지의 장애아를 진짜 피붙이처럼 조건 없이 사랑한 입양 부모들의 이야기……. 조금 전까지 나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여긴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다시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주름진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세월이 비껴나간 것이 아니라 세월을 품어내 온 아름다운 얼굴이 나를 향해 말갛게 웃고 있었다.
 재활치료 받는 것이 힘들다고 늘 울상을 짓던 나, 병원 밥이 맛없다며 자주 불평하던 나, 엄마에게 자주 짜증을 내던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날 잡지가 만나게 해 주었던, 그 할머니 의사 선생님 덕분에.
 

 그 후로도 두 번의 수술이 있었고, 재활치료는 여전히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잡지와 친구가 되었기에 남은 병원생활을 웃으며 할 수 있었다. 밋밋하던 병원 대기실 복도는 잡지라는 친구와 매일 만나게 해 주는 가슴 설레는 공간이 되었다. 할머니 의사 선생님을 시작으로, 잡지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 본 수많은 사람들의 보석 같은 삶……, 그들은 내게 말해주었다. 편하게 늘어져 있음에도 근육이 저절로 붙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또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휘청거리지 않고 서는 법을 배우는 아기처럼, 끊임없이 근육을 단련하며 보냈던 열일곱의 여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매일의 재활치료를 마친 후 잡지를 만났던 그 시간을, 잡지라는 창을 통해 내 눈을 소중하게 단련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순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그것은 행운이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대학생이 된 나, 친구와 서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어느 날이었다. 늘 그랬듯이 미리 도착해서 잡지 코너를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아!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근황이 실려 있는 잡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1993년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에서 정년을 맞았으나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그 후로도 계속 아이들을 진료하고 계시다는 기사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아직 건강하시구나. 여전히, 정말 열심히 자신의 길을 걷고 계시구나. 아이들에게 가정이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입양을 주도했지만 대한민국의 국제 이미지를 망친다고, 국제 거지라고 욕도 많이 들었다고 말씀하시는 맑은 얼굴은 여전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며 그런 매도를 당했는데도 억울하다거나 서운하다는 빛조차 찾아볼 수 없는, 담담하고 맑은 얼굴. 나는 잡지를 사 와서 그 사진을 오려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나이가 들었을 때 이런 얼굴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깊은 눈빛이 내게 말씀하시는 듯 했다.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좋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만 찾아 하기에도 인생은 아주 짧다고.
 
 시간이 흘러, 졸업을 하고 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늘 숫자들과 씨름해야 하는 빡빡한 생활에서 잡지는 기꺼이 나의 위안이,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거의 매 주말마다 서점을 찾았고 돌아오는 길, 내 손에는 어김없이 잡지가 한 권씩 들려 있었다. 바싹 마른 뿌리가 달게 물을 마시듯 잡지를 읽으며 다음 한 주를 위한 힘을 내곤 했다.
 2008년 10월의 일로 기억한다. 결혼을 앞둔 나는 많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결혼은 현실이라더니, 여러 가지 신경 쓸 일이 많아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무거웠다. 퇴근하는 길,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서점의 잡지 코너로 향했다. 아, 그러다가 또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병국 선생님, 그리운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성함을 한 잡지 표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반가움에 뭉클한 마음으로 잡지를 집어 들었다. 다른 의사들보다 박봉에 일도 많기에 그동안 후임자가 나서지 않았던,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원장직을 드디어 75세에 퇴임하게 되신다는 인터뷰 기사였다. 너무 무리해서 어깨가 고장이 나 더 이상 일을 하실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분은 여전히 맑게 웃고 계셨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그 웃음 앞에서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이제 곧 세 살이 되는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살고 있다. 여전히 잡식성의 독서를 좋아하기에 여전히 잡지는 내 최고의 친구이다. 딸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손을 잡고 서점에 갔다. 아직 책을 읽지는 못하지만, 엄마가 골똘히 뭔가를 들여다보는 것을 보며 자기도 자주 책 읽는 시늉을 하곤 하는 아이다. 시간이 흐르면 딸아이의 작은 손에도 어린이 잡지 한 권을 들려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잡지에서 읽은 얘기들을 머리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것이다. 그 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몇 주 전, 딸아이와 함께 간 서점 잡지 코너에서 할머니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 만났다. 50년의 홀트아동복지회 일을 퇴임하신 후에도 책을 쓰시고 활발하게 입양아들을 위한 사회운동에 열중하고 계신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고 있는데 문득 십 사년 전, 열일곱의 그 여름날이 떠올랐다. 그 날, 병원 복도에서 목발을 엉거주춤 짚은 채 펼쳐든 잡지에서 만났던, 그 맑은 얼굴……. 세월이 흘러 주름은 더 깊어지고 백발은 더 성성해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힘들었던 시간,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던 그 얼굴. 목이 메어왔다.
 “엄마, 누구?”
 “응, 아주 훌륭한 할머니이셔. 엄마가 정말 좋아하는 분이야.”
 “와! 좋아해?”
 “응, 옛날에 만났을 때부터 엄마한테 힘을 많이 주셨거든. 이 잡지라는 책들이 만나게 해 준 분이야.”
 “잡지?”
 “응, 잡지. 우리 유진이가 좀 더 크면 엄마랑 잡지 많이 읽자, 응?”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서점을 나섰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잡지들이 있다. 그 중에서 나와 만남의 인연이 닿은 잡지들, 그 잡지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 속에, 내 삶을 따스하게 위로하고 힘차게 격려해 주었던 만남들이 숨어 있다. 할머니 의사 선생님과 내가 그렇게 만나게 되었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그냥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나긴 인생이란 결국 그런 보석 같은 순간들의 집합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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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서울특별시장상] 김혁근.어머니와의 기차여행
 작품명 :
어머니와 잡지여행
 
저희 어머니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문밖으론 혼자 외출을 할수도 없구요.....혼자선 티브이 리모컨 하나 잘 바꾸지 못하십니다....
현재 피해망상과  대인기피.약간의 우울증을 치료받고 계십니다...
그것 때문에  요양원에서 3년정도 계시다 작년에 퇴원해서 저희랑 같이 살고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태어날때부터 유전적으로 눈에 약간 사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로인해 어릴적 초등학교 입학식날  친구들에게 심하게 놀림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얻어
학교를 다니시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글을 전혀 읽거나 쓸줄 모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릴 때 받았던 상처때문인지
주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지 못하셨습니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수근대거나 쳐다보면  자신을 비웃거나 험담한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늘 주변 이웃과 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저희가 장성해서 까지 계속돼 이사도 참 많이 다녔었습니다
그로인해 결국 아버지와도 이혼을 하셨구요...
집안 형편이 어렵고 고생을 많이 하시다보니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악화되어갔고
모실 형편도 되지 않아 반 강제로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지요
어머님이 요양원에서 돌아오시고 처음 저희랑 같이 있게 된날
어머님은 반 식물인간처럼 보였습니다
우두커니 멍하게 앉아  대답도 잘 하지 않고....
잘 먹지도 못하셨지요....
마음의 상처가 컸었겠지요
티브이도 잘 보지 않으시고  그저 멍하니 그냥 앉아 있는게 대다수였습니다
아무리 옆에서 말을 걸고 맛있는걸 드리고 좋은곳을 데려가고 싶어도
어머니는 늘 그냥 침묵만 하고 계셨지요
병원에서는 완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좋아질수는 있지만 예전의 어머니의 모습은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고 말이죠
마음의 상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까지  뭉개버리고 있었습니다
 

집밖에 나가는걸 싫어하셨습니다
아무리 바람쐬러 나가자고 해도 .....아무리 덥고 추운 날에도
밖에 나가는걸 정말 싫어하셨습니다
저희도 힘들고  어머니도 힘든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동생이 보던 잡지를 만지작 거리고 계시더군요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님이 잡지를 읽는 것은 아니고
분명 관심을 보이는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얼릉 옆에 가서 앉자....
어머님이 첨으로 먼저 의사표시를 하셨습니다
“기차가 가네...기차..”
하며 손가락으로 잡지의 사진을 가르키셨습니다
잡지에는 멋진 풍경속을 기차가 달리는 사진이 실려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에  얼릉 맞장구를 쳤지요
“진짜네  야 기차가 신나게 어디론가 달리네...”
“엄마 여기 멋있지...?  우리도 기차타러 갈까?”
라고 묻자....
어머니가 살짝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 젓더군요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뭔가 희망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장을 넘겨보았지요
한적한 시골의 풍경.....맛잇는 요리......멋진 사람들과 물건들....
하나하나 넘겨가며  사진 구경하는것에 집중했지요
어머니는 작게나마 조금씩 의사표현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날부터 어머니와 잡지구경하는 것을 생활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잡지들 상관없었습니다
그림이 있고  사진이 있고 풍경이 있다면
어머니에겐 좋은 치료제가 되었으니깐요....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외출하기도 꺼려하던 어머님이
급기야 영등포 역에 가보고 싶다고 까지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방안에서만 있다  첨으로 영등포 역까지 걸어서 어머니와 외출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도 느껴지던군요
그 시선을 겁내거나 피하려 한다면  어머니는 영영 세상과 떨어져 홀로 지내야 한다는것에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꼭 부축한채
 

영등포역까지 갔습니다
수많은 오고가는 사람들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한참을 우두커니 구경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첫 외출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어머니는 몰라보게 좋아지시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의사표시도 잘하고 잘 웃기도 합니다
티브이도 잘보고....어릴때처럼 잔소리도 곧장 하실수잇을만큼
좋아지셨습니다....
그후로  늘 어머니 주변에는 잡지책이 한권정도는 늘 있습니다
그냥 한 장 한 장 넘겨보는것만으로도 어머니는 그것에서
기쁨을 보고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얻고 재미를 얻고 싶다면
간단하고 빠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티브이에서도...인터넷으로 알지도 구할수도 없었던 것을
저희 가족은 잡지에서 얻었습니다
빠르게 다음장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넘기기 전까진 그대로 기다려주는
잡지의 사진들처럼
어머니 스스로가 희망을 찾아갈수있다는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잡지를 통해 어머니는 기차를 타고 멋진 풍경을 지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상상을 지금 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말이죠.......
어머님이 더 좋아지신다면....멋진 기차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꼬옥 그런 날이 왔음 좋겠습니다............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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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김병주_글에 미친 15살, 잡지에 중독 된 20살의 그 소년은....
 
 작품명 :
글에 미친 15살, 잡지에 중독 된 20살의 그 소년은...
 
“책 좀 내려놔~ 국 그릇 올려놓을 자리가 없잖아.”
 
어릴 적, 우리 집 아침식탁에서 항상 들리는 소리. 고요한 적막도, 음식을 씹는 치아의 둔탁한 부딪침 소리도 아닌 그 소리. 바로 어머니가 제게 하시는 ‘핀잔 아닌 핀잔’이었습니다.
 
매일 버릇처럼 식탁위에 ‘과학동아’를 올려놓는 15살 아들의 행동에 때로는 기특한 눈빛으로, 때로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냐’며 흘겨보시는 눈빛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어머니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 옆에 국그릇을 올려놓곤 했습니다. 손이 닿기 어려운 곳에 국그릇이 위치하다보니 식사가 끝날 때 무렵이면 국은 항상 수저의 손길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 있기 다반사였습니다.
 
그때의 버릇이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지금도 저는 식사 중에 국을 잘 먹지 않습니다. 비록 국에 대한 입맛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지만 저는 그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습니다. 바로 글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확고한 ‘청사진’입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국 대신 선택한 과학동아라는 잡지, 나아가 잡지라는 매체가 저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릴 줄은 말입니다.
 
매주 화요일이었던가요, 고된 고3의 자율학습이 끝나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집에 가기 전 필수코스인 오락실과 분식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적어도 화요일만큼은- 없었습니다.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1층에 다다른 저의 시선은 우편함을 향합니다. 바로 매주 받아보는 잡지를 가져가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전 과학잡지인 ‘과학동아’와 인문잡지인 ‘좋은 생각’을 구독 중이었습니다. 과학동아는 순전히 저 만을 위한 책이었고, 좋은 생각은 평소 책을 즐겨 보시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잡지였습니다.
 
물론 저도 좋은 생각을 가끔 읽곤 했습니다. 비록 화장실에서 ‘거사’를 치룰 때로 한정 돼있긴 했었지만 말입니다. 은근히 좋은 생각과 함께하는 ‘거사’가 평상시의 그것보다 한결 편안함을 제공한다는 저 나름의 판단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각설하고 제가 즐겨보던 과학동아는 학생들을 위한 과학상식을 말랑말랑하게 풀어 써 놓은 잡지였습니다. 사실 과학이라는 분야에 큰 관심이 없었던 저는 그 잡지를 통해 과학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한 발 더 나아가 시험 때마다 평균점수의 2~3점 이상을 깎아 먹어 버리는 과학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 나름의 포석을 쌓았습니다.
 

 
그런데....과학 성적은 결코 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로다. 사진만 보는 우리 아들은 역시 대단해!”라며 핀잔을 주시곤 했습니다. 사실 전 당시 화요일에 도착하는 그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때로는 밑줄도 긋고, 형광펜으로 선을 그어가며 읽었습니다. 대다수는 그러한 행동이 방대하고 심오한 과학지식을 알기 위해서 일 것 이라 생각 했겠지만 저는 ‘문장’을 봤습니다.
 
‘어쩜 이렇게 문장이 매끄럽지.’,
‘와..교과서보다 훨씬 이해가 쉽네. 어떻게 이렇게 간결하게 풀어서 글을 쓸 수가 있지?’
 
이게 제가 생각한 전부였습니다. 할 말 다 했죠. 과학 잡지에서 ‘지식’이 아닌 ‘문장’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것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그 어떤 어려운 내용이라도 내가 쓰면 누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제 꿈이 비로소 명확하게 성립되는 때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기자’.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15살, 처음으로 과학동아라는 잡지를 보며 시작된 글자 중독이 어느덧 ‘기자’라는 미래를 설계해 준 것입니다.
 
하지만 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당시 전 문과가 아닌 이과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계열을 옮길 수도 없는 상황, 전 결국 재수를 선택했고 기자라는 꿈을 위한 첫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사실 핑계긴 합니다. 수능성적이 썩 좋진 않았습니다. 역시 과학 때문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언론정보대학에 입학했고 전 미친 듯이 잡지와 좋은 글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학교 도서관에서 1인이 대출할 수 있는 도서의 최대치는 5권. 1주일의 대출기간동안 5권의 잡지를 모조리 읽어내려 갔습니다. 스포츠, 문화, 경제, 시사 등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20살의 저는 그렇게 잡지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내용 뿐 아니라 구성, 문체, 그리고 기자들의 필력에 감탄하며 잡지 중독 1기에 돌입했고, 좋은 문장은 필사를 하고 좋은 구성의 문단은 어쩔 수 없이 ‘딱 한 장만’이라는 자기최면을 걸며 스크랩을 하는 중독 2기에 다다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기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친 지금, 20살 잡지 중독청년이었던 저는 그때의 기억을 큰 자산으로 간직한 채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생에서 한 번 쯤은 자신의 미래를 바꿔놓을 지도 모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대학생활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군 복무 시절일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한 순간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옵니다.
 
놀기 바빴던 15살 중학생 시절부터 읽기 시작했던 과학동아라는 잡지는 저에게 있어 터닝 포인트이자 기회였습니다. 제 꿈을 설계해 주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집에는 그때 당시 구독했던 과학동아가 책상 밑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지런히 정리돼있습니다. 이번 명절 때는 집에 내려가 잡지 위에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 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꿈을 향해 가는 길이 멀어 살짝 지치고 높은 장애물에 힘든 요즘, 꿈을 설계해준 고마운 잡지의 먼지를 털어내 주며, 저 또한 힘을 내고자 합니다.
 
잔뜩 그어진 밑줄과 이젠 색이 바랐을지 모를 형광펜의 색을 보며 다시 크게 심호흡 한번, 필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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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이탁연_잡지 소묘
 작품명 :
 잡지에 대한 다섯 가지 소묘
 
 네가 블로그에 내 연애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는 글을 올렸을 때, 사실 엄청 설렜어. 아마 연애라는 단어의 느낌이 날 그렇게 만든 거겠지. 생각해보면 난 연애를 통해 인생을 배운 것 같아. 그래서 지금껏 만났던 여자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내가 살아온 길도 뚜렷이 보이지 않을까?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 내 인생, 만남, 그리고 그녀들. 그녀들은 뜨거운 내 여정에 달콤한 생맥주 한 모금, 터져버릴 것 같은 상쾌함 그 자체였어.
 내 첫사랑은 중학교 때 시작됐지. 동네 치과 대기실에서 내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날따라 유달리 속이 안 좋았어. 난 원래 우리 집 화장실이 아니면 대변을 잘못보지만, 할 수 없이 치과 화장실로 들어갔지. 바지를 벗고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창피하게 그녀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지 뭐야. 그 때 방귀도 뀌고, 냄새도 엄청 고약했는데. 그래도 놀리지 않고 가벼운 미소만 짓고 있는 그녀가 오래된 친구인 듯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터놓게 됐어. 그녀의 이름은 ‘좋은 생각’이야. 볼꼴, 못 볼꼴 다 본 친구라 그런지 그녀도 날 배꼽친구처럼 진솔하게 대하더라고. 이를테면, 동물의 왕국만 보던 아버지의 이야기나 동네 국숫집 아줌마의 인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덧붙여, 내가 키 큰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 생활에 답답해 지치면 그녀는 어릴 적 도종환 선생님과 산골에 살며 느꼈던 봄 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어. 하지만 우리의 연애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소원해지기 시작했지. 내가 그녀와의 사랑을 그때는 조금 가볍게 보고 있었던 것 같아. 그녀의 편안함과 따뜻함을 언제, 어디서라도 얻을 수 있는 듯이. 그녀는 떠났고 나의 지독한 수험 생활이 시작됐지.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기숙학교였어. 난 무한경쟁에 도태됐고 심지어 가출을 하고 말았지.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아무런 계획 없이 집을 나간 건 아니야. 난 출가를 하고 싶었어! 하지만 부모님 동의 없이 무턱대고 찾아온 소년을 받아줄 절은 조선팔도 어디에도 없더라고. 난 집으로 돌아가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말했지만 엄마의 결사반대로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 맥없이 비틀거리고 있던 내게 엄마는 소개팅을 시켜주었어. 이미 그때부터 엄마는 내가 무지하게 여자를 밝히는 놈이란 걸 알았나봐. 하하하. 그녀의 이름은 ‘문학과 사회’야. 그녀는 성숙하고 감수성도 매우 깊은 친구였어. 특이하게 우린 계절에 한 번씩 밖에 만나지 않았지. 그래도 왠지 운치 있지 않아? 그녀를 통해 난 문학의 참 맛을 알게 됐어. 기껏해야 문학 교과서와 언어 문제집을 통해 배운 몇몇 국문학 작가의 작품만이 문학적 소양의 전부였던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시대상 속에서 국문학의 명맥을 이어가는 신진작가들을 소개해주며 내게 삶에 대한 열정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녀의 현명함과 어른스러움을 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어. 나의 열등감과 맹목적인 반항심에 그녀도 지쳐갔고, 우리의 소통은 내가 3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지.
 

 결국 1년간은 연애 없이 열심히 공무만 했어. 수능이 끝나고 여유가 생기자 대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소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내게 연애보다는 영화가 좋은 친구가 돼 주었어. 그래도 이 끓는 늑대의 피는 못 속이는지 하루는 영화를 예매하고 포스터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주 세련된 여자가 걸어 나오더라고. 그녀가 바로 나의 세 번째 여자친구 ‘씨네21’이야. 극장에서 만나서 그런지 우리는 주로 극장데이트를 했지만, 종종 연극도 보고, 카페에 앉아 시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 단순히 재미와 볼거리를 중시하는 나와, 촬영기법과 영화사적 의미까지 생각하며 영화를 보는 그녀는 가끔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다가 다투기도 했지. 대부분 누나였던 그녀가 성숙하게 양보했어. ‘수준 낮은 영화에도 배울 점이 있다’라는 말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우리에게 사단이 나고 말았지. 박찬욱 감독의 박쥐라는 영화 생각나? 그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난 기대가 너무 컸는지 그녀에게 이 영화는 실망이었다고 말했어.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보는 눈이 없냐면서 날 무시하는 거야. 자기가 본 영화중에 손에 꼽을 만큼 명작이라고. 조금 창피하지만 이 일로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결국 며칠 후에 이별을 고하게 됐어.
 대학교에 입학하고 바빠지면서 편하게 영화를 볼 시간이 줄었고 자연히 ‘씨네21’도 잊혀 지더라고. 경영학도인 나는 자연히 예술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많아졌고, 과 마케팅 동아리에도 가입했어. 동아리에선 신입회원에게 멘토를 지정해주었는데, 내 멘토는 수많은 공모전 수상에 빛나는 05학번 ‘매경 이코노미’선배였어. 동기들이 모두 부러워했지. 그녀가 알려주는 알토란같은 현대 경영에 대한 정보는 내 레포트를 읽는 동기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지. 그녀의 이야기는 교수님의 강의보다 흥미로웠고 난 지적인 그녀를 사랑하게 됐어. 학교 축제 날, 우리는 잔디밭에서 병맥주를 마시다가 달달할 뽀뽀를 하게 됐지. 우리는 데이트를 주로 동아리 방이나 스터디카페에서 했어. 그 곳에서 그녀가 들려준 구글의 안드로이드 폰이 가지는 IT시장에서의 의의, 삼성의 러시아 진출 전략 등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처음으로 내가 결혼까지 상상해볼 만큼 따르고 좋아했던 그녀지만, 알고 보니 그 누나는 다른 남자도 만나고 있더라고. 그 놈은 바로 내 같은 과 친구. 그녀는 경영학을 전공하는 모든 남학생의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오히려 그 배신감이 담담히 받아들여지기까지 하더라고. 화수분처럼 쏟아지던 눈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난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휴학 후에 입영 신청을 했고, 그 해 가을 박박 머리밀고 입대를 하게 됐어. 정신없이 일·이등병 생활을 보내고 상병이 되니까 어느 정도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라. 하루는 주말에 책을 읽으려고 부대 내 도서관을 찾았는데, 그 때 처음 도서관 담당 여 간부였던 ‘에세이’하사가 눈에 들어왔어. 어떻게 1년 동안 저렇게 예쁜 여군을 보고 설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난 매일 그녀를 보려고 도서관을 찾았고,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 서로 마음을 열고 드디어 떨리는 비밀 연애를 시작하게 됐지. 그녀는 보면 볼수록 내 첫사랑 ‘좋은 생각’과 닮았지만, 말하는 것은 더 논리적이면서도 문학적이었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여권이었고, 스트레스를 가라앉혀주는 목탁소리였고, 앞으로의 나의 길을 고민하게 하는 지도 한 장이기도 했어. 그렇게 소중한 그녀였지만 내가 전역한 후에 거리, 시간, 진로 상의 이유로 우리는 멀어져만 갔고 그냥 좋은 친구로 남자며 연애를 끝내고 말았지.
 

 내 연애 역사는 여기까지가 끝!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까 그녀들 모두 보고 싶네. 내일은 용기내서 그녀들에게 연락해봐야겠어. 아니,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설까?
 
 네가 처음 블로그에 잡지에 대한 수기를 공모한다는 글을 올렸을 때, 실은 무척 좋았어. 잡지라는 단어의 느낌이 교복을 처음 입어본 소녀처럼 날 설레게 만든 거야. 이렇게 한바탕 이야기를 쏟고 나니 역시 난 잡지를 통해 삶을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읽은 잡지들은 내가 살아온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 캄캄한 내 여정에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불 빛 하나, 할머니의 주름 진 손 같은 따뜻함 그 자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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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정지혜-잡지, 미지의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고마운 미끼
 작품명 :
잡지, 미지의 세상으로 데려다 주는 고마운 미끼
 
21살의 여름을 떠올릴 때면, 한줄기 가느다란 빛이 새어드는 어두운 동굴의 이미지와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내 이미지가 선명하다.
 
1.
 비록 일류는 아니었어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서 간 대학에서, 난 참 열심히 살았다. 날 무척이나 예뻐해주시며 축복해주신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생각하고, 또 학교 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힘을 얻는다던 엄마를 생각하고, 힘차게 씩씩하게 학교 생활하는 날 보며 자극받는다는 재수생 쌍둥이 언니를 생각하며, 나는 매 순간 밝고 힘차게 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대학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곳이었다. 삶의 의미를 찾지못해 방황하다가 남들 다 힘들다는 고3에서야 비로소 정신차려 전심을 다해 공부하고, 그 열정으로 모든 선생님을 탄복시켰던 나의 에너지는, 내 대학 동기들과 선배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는 것도 잠깐이다, 나라면 수능 쳐서 다른 대학을 가겠다, 걱정도 없고 뭐가 좋아 맨날 그리 헤헤 웃냐, 좀만 지나봐라 학벌차별 겪어봐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지.......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왜 저들은 회색안경을 쓰고 모든 것을 볼까, 그럴거면 자기들만 그러지 왜 나한테까지 안경을 씌우려고 애를 쓰는 걸까. 나는 더 미친 듯이 공부하고, 돈을 벌고,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목이 나갔다. 3시간 고음을 질러도 음색하나 변하지 않던 내 성대가 나를 배반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 대학에 온 것이었다. 멍청하지 않은 음악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꿈 때문에 나는 춥고 고달팠던 고3 겨울 내내 늘 그렇게 벙긋벙긋 웃었던 것이었다.......
 
 귀에 들리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고문처럼 느껴졌을 때, 나는 깨어있는 시간에는 두 귀에 어김없이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어 쓰레기통에 내버렸다. 그리고 노래를 그만둘 것을 결정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결정‘당했다’. 나는 인생의 그 가혹한 결정에 대한 항거로써, 더 이상 음악을 듣지 않기로 결정했다.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꺾인 내 꿈이 생각나서 밥도 먹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2.
 

 21살, 나는 남들이 다 말렸지만 휴학을 했다. 그리고 하루에 10시간씩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돈을 벌고, 남는 시간에는 활자를 읽었다. 매일마다 동네 교회의 도서관에 가서 표지가 맘에 드는 책이나 잡지를 골라 읽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좌절된 꿈때문에 문득 슬퍼지려 할 때면 예배당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불꺼진 예배당에 앉았다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어느 날 문득 골라들었던 잡지 <객석>을 읽다가, 나는 ‘펜데레츠키’라는 폴란드 작곡가의 이름을 발견했다. 펜데레츠키, 펜데레츠키... 그는 폴란드의 유명한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다. 그리고 고3 소녀의 은인이기도 했다.
 
 고 3시절, ‘제법 열심히 하지만 그래도 쟤는 너무 늦게 맘을 잡았어’라는 눈초리로 날 지켜보는 급우들과, 엄마와 선생님들의 기대반 의심반의 시선, 그리고 가난한 나를 위해 독서실 비용을 내준 나의 고마운 친구들의 진심어린 기대를 받으며, 나는 정말 이를 악물고 공부했었다. 나날이 높아져가는 점수와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격려 덕에, 나는 피곤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되었다.
 
 어느 날 늦은 밤, 독서실이 끝나고 터덜터덜 들어온 집에는, 엄마와 언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 날 따라 몹시 몸이 좋지 않아 자습시간 내내 졸기만 해서 자책감에 슬펐었다. 나를 기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옷 갈아 입을 힘도 없이 소파에 앉아 TV를 켰는데, 밤늦게 하는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오케스트라의 실황연주를 보내주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펜데레츠키의 <현악기를 위한 신포니에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단순하지만 파격적이고 힘있는 연주를 경청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현을 긋는 플레이어들을 응시했다. 곡은 10분가량 연주되었는데 나는 그 10분간 말할 수 없이 큰 위로를 받았다.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고, 왜 달려가야 하는지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고마운 펜데레츠키의 인터뷰가 잡지에 나온 것이었다.
 
 그의 인터뷰와 편집자의 친절한 설명을 통해, 나는 펜데레츠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음악관, 그리고 그에게 3만평의 정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막내 손녀딸이 작곡에 재능이 있다는 것까지! 나는 그 기사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는 멀리 폴란드의 노작곡가였지만, 19살의 나에게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날 수 있게 해준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객석>을 아주 열심히 읽었다. 잡지에 실린 향기나는 글들을 읽으며, 조금씩 기악곡을 찾아 듣기도 했다. 사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이순열 평론가님의 글을 만났다. 나는 평론이 딱딱하게 평가내리는 차가운 글인줄만 알았는데, 소나무 향도 나는구나 했다. 잡지를 통해 만난 이순열 평론가님의 더 많은 글을 읽고싶어, 책을 찾아보기도 했다. 평론가님이 추천한 음악가의 음악도 듣고, 그 삶도 찾아봤다.
 
 잡지는 내게는 마치 미끼 같았다. 나는 굶주린 물고기처럼 덥석 물었다. 그러면 그 미끼는 나를, 이전에 전혀 보지 못한 세계로 인도한 뒤 풀어주었다. 나는 그 새로운 세계에서 맘껏 노닐었다. 그 때만큼은 내가 암울한 청춘 - 일생의 꿈을 잃었음에도 아파할 시간 없이 시급 4천원씩 하루 10시간씩 서서 일해야 다음 학기 복학이 가능한 우울한 휴학생-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3.

 내가 일하는 까페는 손님이 적었다. 그리고 점장님이 인품이 좋았다. 그리고 날 매우 아껴주었다.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내가 보기좋다며, 친 언니처럼 대해주었다. 매우 고마웠다. 그러나 10시간 아르바이트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손님이 많으면 그만큼 시간은 빨리 가지만, 한산한 우리 가게는 초침이 두 번 돈 뒤에라야 그제서야 1분이 지난 듯 느껴지고는 했다.
 
 강남 논현동의 까페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살기도 하고, 다녀가기도 한다. 그래서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까페에다가 무료로 잡지를 비치해두고는 했다. 돈많은 사람들이 패션 잡지를 봐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잡지사 직원은 매달 몇일에 잡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면 아르바이트생인 우리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은 얼른 그 포장을 끄르고, 잡지를 뒤적였다. 패션잡지에 붙어 있는 쿠폰이나 화장품 샘플을 얻기 위해서였다. 우리들은 신나서 꺄르르 웃으며 종이에 붙어있는 샘플을 떼었다. 샘플이 없는 어떤 날에는 정말로 시무룩해졌다.
 
 그렇지만 샘플이 없어도 잡지는 소중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돈을 벌기 위해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하는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이 가장 빨리 친해지는 방법으로, 머리를 맞대고 패션잡지를 함께 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패션의 경향을 보며 토론을 벌였다. 왜 예쁜 옷은 다 비쌀까 함께 고민했다. 너에게는 이번 시즌 최고 유행 아이템인 코발트 블루의 원피스가 잘 어울릴 것 같아. 어머 고마워, 너야 말로 비비드한 컬러의 이 베레모가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원피스와 베레모는 우리 둘의 월급을 합쳐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한 명은 카운터 앞에 앉아 망을 보고, 한 명은 우유박스를 엎어놓고 그 위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만화잡지도 읽었고, 패션잡지도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주로 <객석>을 읽었다. <객석>을 통해 알게된 클래식을 까페에다 틀어놓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다. 어느 날은 손님이 곡명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럼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보이체크 킬라르의 ’Orawa‘에요. 보이체크 킬라르는 폴란드 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죠. 영화음악을 많이 만들었어요.’라고 말한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힘없는 알바생도, 을乙도, 고용인도 아니었다. 그냥 운좋게도 먼저 알게된 좋은 음악을 소개해주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겨울 밤에는 정말 손님이 없었다. 그러면 1시간 정도 여유있게 잡지를 읽을 수 있다. 잡지를 읽으며 가게 마감시간을 기다린다. 마감시간이 당도한다. 가게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귀에 낀다.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한다. 옷을 갈아입는다. 아르바이트 파트너가 그날 수입을 정산할 때까지 잡지를 읽으며 기다린다. 이윽고 정산이 끝나면 웃으며 내일 봐 하며 헤어진다. 코끝이 에이는 듯한 추위에 길을 걸어도, 왜 그렇게 밤의 귀가길은 행복했는지.
 
4.
 노래하는 사람목소리가 듣기 싫다며 기악곡 듣기만을 고집했던 나는, 합창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객석>을 통해 알게 된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성가대에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저녁 아르바이트를 매일 하던 나는 성가대연습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까페에서 매일 포레의 레퀴엠을 틀어댔다. 결론적으로 나는 특별찬양에 설 수 없었다.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 합창에 엄청난 관심을 갖게 되어, <Choir & Organ>잡지를 꾸준히 탐독하게 되었다. 중창단과 성가대를 하며, 함께 하는 화음의 아름다움을 깨달았고, 그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또 다른 잡지를 통해 나는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가난한 나라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청소년들 - 부랑아, 마약 팔고 술마시고 담배피는 애들-에게악기를 가르치고, 그런 애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진행한 결과, 아이들의 삶의 질이 놀랍게 향상되었다는 것.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전국적으로 이러한 오케스트라가 운영되고 있고,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클래식 강국으로 떠올랐으며, 엘 시스테마를 통해 교육받은 두다멜이라는 청년은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촉망받는 지휘자라는 것. 이 놀라운 기적의 오케스트라는 내 마음을 깊게 사로잡았다. 
  
 합창, 오케스트라.. 모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내는 것. 나는 이 점에 깊게 매료됐다. 거리의 부랑아였던 베네수엘라 아이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이야기하는 놀라운 변화, 그리고 관계속에서 절로 배워갔을 인생의 귀중한 가르침... 나는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인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음악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내가, 너무나 기쁜 맘으로 인생을 올인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것이라고. 통일 이후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개인적인 굳은 신념과 확신이 있다.) 전국적으로 합창단을 만들어내는 것, 남한과 북한의 아이들이 하나되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드는 합창단이 이곳저곳에 생기도록 하자. 처음에야 쭈뼛쭈뼛 하겠지만, 다같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로 파트를 나누어 <고향의 봄> 한 번 부르고 나면, 화음으로 그 마음들 하나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2살의 1월, 어느샌가부터, 예배당에 가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일은 없게 되었다.
 
 
5.
그 이후 나는 복학했다. 더 단단한 꿈을 얻은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총학생회에 들어가 조직운영의 메카니즘도 배웠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삶에서 우러나는 향기가 무엇인지도 배웠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던 독립도 했다.
자원봉사단체의 프로듀서로 엄청 깨지면서 나 자신의 부족함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쉴새없이 바빴던 3년, 얼마 전 좌절한 21살 나의 보금자리였던 동네 교회 도서관을 다녀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사서 언니,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몇시간씩 읽으시던 할아버지 두 분이랑, 책만 쌓아놓고 맨날 자는 중년의 여자분, 그리고 정갈하게 비치된 잡지들......... 나는 잡지 진열대 앞에서 마치 짬뽕을 먹을지 짜장면을 먹을지 고민하는 백수처럼, 어떤 것을 집어서 읽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 있었다. <객석>의 진열대는 비어있었다. 사실 아쉬웠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꿈을 잃어 아픈 또 다른 청년이 지금 꿈을 공급받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21살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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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나상은_잡지, 나의 소중한 친구
 작품명 :
잡지, 나의 소중한 친구
                                                                                               
  따가운 칠월의 햇살 아래로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의 향기가 푸르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 붓던 장맛비 뒤로 꽁꽁 숨어있던 여름은 실바람을 타고 날라 와 어느새 이렇게 내 앞에 다가와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계절의 녹음은 신비하고 영광스러울 정도로 푸르다. 농염한 자태로 저만치 자란 등나무는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커다란 푸른 잎 속에 숨겨 조심스레 흔든다. 마치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듯. 부채처럼 넓죽한 잎을 하늘을 향해 날갯짓 하듯 살랑거리는 적록의 상추, 그리고 모두를 호령하려는 듯 커다란 팔을 기세 높게 뻗는 토란잎. 모두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푸른 손을 수줍게 흔들고 있다.  
  바로 1년 전, 나는 이곳 대전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부모님 모두가 누나가 있는 미국으로 떠나시면서 서울에 홀로 남겨진 나. 부모님은 그런 내가 혼자 사는 것보다 차라리 대전으로 내려가 홀로계신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게 낫겠다고 하시며 날 그리로 보내셨다. 그간 살아온 서울에서 정들었던 친구, 그리고 추억의 장소들을 떠나보내고 오기까지는 망설임도 많았을 뿐더러 되레 겁까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막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홀로 지내시는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대전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버려진 짐짝처럼 기차 속에 몸을 꾸겨 넣고 서울을 떠나오게 되었다. 우습게도 대전으로 떠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언젠가 다시 꼭 돌아갈 거라고 얼마나 수없이 외쳐댔는지.
  마음이 그러다 보니 새로 이사 온 곳에 정이 붙을 리가 없었다. 우선 알고 지내는 친구 하나 없었고, 책장에 나열된 책처럼 아파트만 빼곡히 늘어선 이 동네는 마음에 드는 장소 또한 한 곳 없었다. 거기에 서울에서 떠밀리듯 내려온 터라 읽을 책 하나 들고 오지 못한 나는 억울하게 유배된 죄인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하루하루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소극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에게 이곳에서의 나날은 무료하고 외로웠다.
  그런 내 눈에 매일같이 우리 집에 놀러와 왁자지껄 떠드는 할머니 친구들도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살갑게 충청도 사투리를 써가며 다가오는 할머니들께 가식적인 대답만 짧게 하고는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리곤 했다. 외로운 나와 다르게 마루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할머니들이 어딘가 얄밉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철없는 행동일줄 알면서도 다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일부러 음악도 크게 틀기도 하고, 노상 전화기를 붙잡고 서울 친구들에게 할머니들에 대한 이런 저런 불만만 잔뜩 털어놓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춘기 소년처럼 마음의 문을 한 겹 한 겹 두껍게 쌓아나가며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인정마저도 막아 버렸다.
  그런 경직된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노크를 해온 것은 다름 아닌 조그만 잡지였다. 늘 집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지 말고 어디 좀 나가서 놀다 오기라도 하라고만 하시던 할머니가 하루는 아침부터 식탁에 무언가를 준비해 두신 것이다. 그것은 두 권의 과월 호 잡지였다. 재활용 하는 날 옆집 아주머니가 들고 나오는 것을 손자 좀 보게 해준다고 하고 얻어 오신 것이라고 하셨다. 그간 버릇없게 보였을 수도 있던 손자가 오히려 안쓰럽게 보이셨는지 아침부터 그런 수고를 해주신 것이다. 할머니가 주어온 조그만 잡지. ‘좋은 생각’이라는 이름의 그 잡지는 그렇게 식탁 위에서 우리 할머니보다도 더 조촐한 모습으로 나와 만나게 되었다.
 

  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생활의 무료함에 거부조차 지쳐버린 것이었을까? 고물 같이만 느껴졌던 그것들을 다시 내다 버릴 수도 있었건만 나는 그러지 않고 조심스레 읽기 시작했다. 마치 졸업하는 선배가 물려주고 간 문제집을 다루듯 다른 이의 손때가 묻은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겨보았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잡지는 손에 꼭 잡히는 크기만큼이나 소담스런 이야기들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퍼즐조각을 맞추듯 마음에 드는 제목을 찾아가며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글부터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잡지는 나의 수줍은 응석을 받아 주는 나이 많은 형과 같아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그것을 찾아보곤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잡지는 어느새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아 하루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잡지는 내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식탁에 앉아 읽는 글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나를 깨워주는 어머니의 음성과 같은 청아한 목소리로 하루를 싱그롭게 가꿔나갈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한낮에 읽는 글은 시원한 냉커피와 같아 후텁지근한 날씨에 무료해진 내 마음과 머리에 청량하고 달콤한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활력소였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 침대에 누워 읽는 글은 그 옛날 어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어 따스함과 그리움으로 아름다운 밤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답답하고 힘들 때, 잡지는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친구가 되어줬다. 말할 수 없는 이런 저런 고민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어른들이 억압적인 목소리로 설교하듯 소리치는 것과 다르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에게 교훈과 지혜가 담긴 따스한 말들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힘낼 수 있도록 격려해줬던 것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고 배려해주는 잡지, 이 친구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상처받은 내 마음도 조금씩 치유되고 마음의 문 또한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조금씩 잡지로부터 받은 위로가 어느새 약손이 되어 마음속 가득 찼던 분노와 쓸쓸함을 치유해주며 시간의 저편에 잃어버린 내 본래의 미소와 유쾌함을 조금씩 되찾아 올 수 있게 되었다. 굳게 닫혔던 내 방문도 손님이 오실 때마다 사뿐히 열리고 입가의 미소는 잡지를 넘어서 주위 이웃들에게도 향하게 된 것이다.
 

  또다시 찾아온 짙은 여름. 갈증을 식히기 위해 음료수를 사들고 오는 길에 여느 때와 같이 화단 일을 하고 계시는 경비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기다란 호스를 들고 아저씨는 더위에 지친 나무와 꽃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씩 건네주고 있던 것이다. 알을 토실토실 키워나가고 있는 개살구, 올망졸망 푸른 구슬 같은 열매를 풍성히 달고 있는 대추나무 사이로 번져나가는 물살이 시원하고 상쾌하기도 하다. 멍하니 바라보며 미소 짓는 내게 아저씨가 ‘안녕 총각!’이라고 하며 먼저 인사를 건네주신다. 반가운 인사에 나 또한 조금은 멋쩍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아저씨의 검게 탄 얼굴에 비춰진 밝은 웃음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준다. 우리 아파트의 경비아저씨는 다른 바쁜 일도 많으시건만 이렇게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도 모두를 위해 꽃밭을 가꿔주시는 것이다. 그것도 매일 매일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같은 인자로운 미소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려 하자 이웃집 할머니가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바쁜 걸음을 하며 다가오신다. 그리고는 인정 많은 웃음을 지으시며 무언가 소복이 담긴 봉지를 건네주신다. 그것은 새파란 상추 잎이었다.
  “총각, 이거 요번에 우리 집에서 농사지은 건데 너무 맛있길래 좀 먹어보라고. 이따 할머니 오면 밥이랑 고추장이랑 같이 비벼 먹어봐.” 
  이웃집 할머니가 주신 초록빛깔 행복. 또 한 번 나는 이웃의 깊은 인정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을 선사하고 챙겨주는 데 왜 나는 그것을 모르고 지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각각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각박한 생활 속에 나또한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와서 그런 것일 게다. 또한 가족을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스스로가 외부로부터의 따스함을 외면하고 두 손으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일 게다. 그런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며 이해해주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바로 잡지였다. 그것은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고 따뜻한 말투로 내게 다가와 나를 치유해 준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자상한 부모님이며, 동시에 반가운 친구였다. 외로운 시기에 새로운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나의 친구. 나는 이 소중한 친구를 통해 삶의 행복을 조금씩, 조금씩 깨우쳐 나가게 된 것이다. 인정, 행복, 따스함. 이것은 바로 내 주변에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오후 일광이 굉장히 밝다. 완연한 여름은 우리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한 손길로 우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밖을 바라보면 소중한 이웃의 손길이 닿은 푸른 화단이 내게 인사를 한다. 나는 행복을 느낀다. 세상만물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처럼, 언어의 마술로 마음의 치유를 받은 나 또한 많이 달라졌나보다. 이제는 서울에 놓고 와버렸던 나의 마음도 이곳에 서서히 뿌리내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소중한 친구도 생겼고, 이웃의 따뜻함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리고 나 또한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행복이란 풍요로운 토양, 그리고 인정이란 기름진 거름 속에 나의 삶은 더욱 줄기차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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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김인옥 - 달콤한 간식
 “취미가 무엇이오?”라는 질문에 간편하고 쉬운 대답으로 “독서”라는 말을 남용한 적이 있었다. 아니 ‘있었다’ 가 아니라 ‘있다’라고 해야지 맞겠다. 그 대답이 지금도 진행형이니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는 지금 딱히 취미라고 할 만한 것 없이 살고 있다오” 라는 것 같아 조금은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책장에 꽂혀 있는 몇 안 되는 책들로 그 취미 아닌 취미를 연명해 가고 있다. 아니 요즘에는 그 독서도 잘 안하고 있다. 30대 후반, 이제 마흔을 코앞에 둔 여자이고 꽃을 만지는 한 남자의 아내이며 그리고 세, 네살 연년생 아들들의 엄마인 나. 시간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핑계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그렇게라도 변명을 하고 싶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녹초가 되곤 하는 요즘의 일상. 아니다.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가 맞는 것 같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 컴퓨터 앞에 앉아 보통 한두 시간 정도를 인터넷 세상을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흔히들 빠져 지내곤 하는 게임은 아니지만, 쓸데없이 이런 저런 뉴스를 클릭하곤 하는 일이니 게임을 하는 일처럼 그저 헛된 일이라 하겠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눈의 피로감을 못 이겨 컴퓨터의 전원을 끌라치면 얼마나 후회가 몰려드는지...
 
어느 날 컴퓨터 모니터가 고장이 난적이 있었다. 그날 밤 그 예기치 않은 상황이 오자 잠시 동안이었지만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런 마음이 들었다. 이리저리 컴퓨터의 여러 가지 선을 나름대로 만져보다가 결국엔 그냥 포기해버리고 먼지로 범벅이 된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내친김에 찬물에 세수도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책상에 앉자 컴퓨터가 고장 났다는 반갑지 않은 사실도 덤덤하게 받아들여졌고, 한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바로 위의 책꽂이로 오랜만에 시선이 옮겨졌다. 그리고 딱히 쓸 얘기꺼리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묵직한 일기장을 꺼내 천천히 몇 자 끼적거리자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그 점이 내세울 만큼의 다독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여하튼 한때는 닥치는 대로 여러 책들을 섭렵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잡지는 거의 없었다. 잡지라 하면 여성잡지나 혹은 패션잡지가 연상 되면서 사치스러움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많이 알려진 월간지 ‘좋은 생각’ 같은 경우에는 잡지 제목부터가 도덕책 같은 느낌이라 왠지 싫었다. ‘좋은 생각’이라니.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사는데 그런 유치한 이름이 가당키나 한가 싶었다. 그리고 왠지 긍정적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 같다고, 부정적 생각으로 똘똘 뭉쳐져 있던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나의 오래된 편견은 어느 날 깨졌다.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지 아마. 

 
어떤 문제였는지 기억에 없지만 여하튼 나는 남편과 냉전 중이었다. 좋은 일도 혼자오지 않고 나쁜 일 또한 그렇다하더니, 짧지 않은 냉전 탓에 심신이 지쳐있었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지독한 치통까지 왔다. 신경치료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수년전 신경치료를 했던 경험이 있던 탓인지 나는 근심걱정에 잠을 설쳤다.
 
다음 날, 근처에 사시는 어머니께 아이들을 부탁하고는 아파트를 나섰다. 눈이 도대체 녹을 겨를 없이 많았던 그런 겨울이었다. 채 녹지 않은 거리위에 아직 부족하다는 듯 그날도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통스런 치통만 아니었다면 온갖 감상적인 기분으로 거리를 걸었겠지만 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 몰라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아이를 자연 분만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 극한의 고통 따위는 이미 희미해져버렸는지 치과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격하게 떨려왔다. 결국 나이 마흔이 다 되가는 아줌마는 겁을 잔뜩 먹은 아이의 표정으로 병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생각보다 병원은 규모는 컸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치료 대에 누울 수 있었다. 의사가 치아 상태를 보더니, 치석 때문에 그런 거라고 스켈링을 받고 나면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쪽에 사랑니가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참에 그냥 빼는 게 좋겠다고 권고했다. 4개를 빼야하니 앞으로 몇 번을 더 와야 하나 심란해졌지만 그냥 놔두면 나중에 더 뽑기가 힘들어질 거라는 의사의 말에 걱정이 되어 나오는 길에 예약을 했다.
 
며칠 후 예약한 날이 되어 어머니께 다시 아이들을 맡기고, 같은 길을 걸어 병원으로 향했다.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전처럼 심장은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었다. 안경을 낀 키 큰 의사가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로 나를 맞았고, 마취주사를 놔주고는 한 십 여분쯤 후에 마취가 되고나면 치료를 하겠다고 하더니 일어섰다.
 
나는 점점 이상해지는 입안의 감각을 느끼며 멍한 눈빛으로 누워있었다. 그때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처럼 이렇게 멍하니 기다릴 환자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것이리라. 손에 쥐고 보니, 그 ‘좋은 생각’이었다. 나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그때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갑작스런 이혼을 겪게 된 어린 남매가 아버지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엄마가 들어왔고, 새엄마는 어린남매를 심하게 구박하곤 했다. 그 자세한 내막을 모르던 아버지는 새엄마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역시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러운 마음에 남매는 가출을 했다. 헌데 길을 걷다가 잠시 가게에 다녀온 사이 오빠는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만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평소 자식을 짐처럼 여겼던 아버지는 여동생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남자는 자신의 실수로 여동생을 잃어버렸다는 깊은 자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짙은 원망의 마음으로 방황하다가 결국 어두운 길로 들어서고 만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교도소에서 남자는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보낸 사람은 남자가 그리도 애타게 찾았던 여동생이었다. 수녀가 되었다는 여동생은 오빠도 아버지도 오래전에 모두 용서했으니 오빠도 더 이상 마음 아파하지 말고, 앞으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짧지 않은 글이 어찌나 마음속을 깊이 파고들던지 주사를 심장에도 맞은 듯 했다. 얼마 후 약속했던 의사가 와서는 마취여부를 확인하고 사랑니를 뽑기 시작 했을 때도 병원을 들어설 때의 두려움 같은 것은 사라지고 자꾸만 그 남자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마 그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겪은 상처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많이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망하는 마음은 그 상처를 준 사람보다 원망을 품은 자기 자신만 힘들어지는 일이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던 감정들이 내가 내 아이를 키우면서 부정하고 부정하려해도 그 숨어있던 아픔들이 자꾸만 불쑥 올라와 때로는 지독하게 괴로웠다.
여동생이 했던 ‘더 이상 아파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이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사연을 읽은 것이 아주 조그만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쯤 육아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던 언니가 ‘그렇게 힘들면 친정에 내려가 한번 그런 얘기를 시원하게 털어놔봐’라고 조언해줬고, 이후 몇 달 뒤 나는 커다란 용기를 내어(입이 정말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엔 울음이 먼저 터졌다) 내 안에 있던 수십 년 묵고 묵었던 상처들을 얘기했고, 엄마는 나중에 어색하게나마 ‘미안하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도 내 안에는 남은 무언가가 여전히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쉽게, 또 깨끗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용서라니...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나를 비롯해 육남매를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셨는데 말이다.
  
 지금 계절은 여름이다. 지난달에 기차를 탈일이 있었는데, 기차를 오르기 전 매점에서 커다란 나비그림이(여름에만 볼 수 있는 ‘산 제비 나비’란다)그려져 있는 ‘좋은 생각’을 구입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이제 이렇게 가끔씩 잡지를 챙겨보는 걸 보면 나의 그 오래된 편견도 어느새 사라졌나보다.
 
서점에 가면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이 우리가 늘 먹는 주식이라면 이런 잡지는 어쩌면 간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잡지에는 소통의 공간이 있는 것 같다. 나만 이렇게 아픈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더 직접적인 위로를 받게 되기도 하고.
한때는 깊은, 진정한 진리는 무겁고 두꺼운 책 속에만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볍고 편안한 시선으로 이렇게 간식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간식들은 이따금씩 늘 먹는 주식보다 새롭고 더 달콤하다.
지금 컴퓨터 옆 책상 한쪽 자리에 좋은 간식, ‘좋은 생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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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은지 - 잡지 읽는 빨강머리 앤, 美人道를 찾다
 작품명 :
잡지 읽는 빨강머리 앤, 美人道를 찾다 
                                                                                               
  빨강머리 앤이 귀엽고 항상 밝은 소녀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빨강머리 앤은 자신의 볼품없는 외모에 열등감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아름다워진 자신을 상상하며 공상에 젖어드는 것을 위안으로 삼던 불쌍한 소녀였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불쌍한 빨강머리 앤이 있다. 거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내가 바로 현대판 빨강머리 앤이다. 게다가 나는 가장 예뻐지고 싶을 때인 스무 살 새내기 대학생이다! 다른 여자애들의 스무 살은 한없이 밝고 파릇하기만 한데, 예쁘지 않은 나의 스무 살은 칙칙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나는 모자를 쓰지 않고는 밖에 잘 나가지 않았으며 나가더라도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보며 걸었다. 그래도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또래 여자애들도 같은 교복을 입고 화장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점점 또래 여자애들로부터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내 외모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친구들로부터 느끼는 괴리감과 열등감, 그리고 그로인해 줄어드는 내 자신감이 점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게 했다.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은 모르는 사이에 나는 혼자 점점 학교생활에 지쳐갔다.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행히도 여름방학이 되었다.
 
  빨강머리 앤은 예뻐지는 자신을 상상함으로써 서글픈 현실에서 벗어나곤 했다. 나도 예뻐진 나를 상상하며 잠시나마 볼품없는 내 모습을 잊고 행복에 젖는다. 어떻게? 패션잡지를 통해. 내가 즐겨 읽는 패션잡지는 <보그걸>이다. <보그걸>은 패션, 트렌드, 화장품, 연예인 화보와 인터뷰 등의 내 또래 여자애들의 관심거리를 가득 싣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화보만 보았다. 잡지를 사면 화보만 오려내고 다른 부분은 읽지도 않은 채 버리곤 했다. 화보 속 연예인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멋졌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그들. 그들은 항상 나의 준거집단에 속해있었다. 나는 화보속의 화려한 그들의 모습을 동경했다.
 
  할 일이 없는 방학동안 잡지를 보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서점에서 <보그걸> 8월호를 사들고 돌아와 책장을 뒤적거리며 화보를 찾았다. 8월호의 주인공은 인기 아이돌 소녀시대였다. 화보를 들여다보며 공상에 젖기 시작했다. 어느새 화보속 소녀시대가 있던 자리에 내가 있었다. 여드름 흉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하고 하얀 얼굴에 빛이 흘렀다. 부스스한 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 속눈썹은 고운 곡선을 그리며 그늘을 드리울 만큼 길게 뻗어있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꼿꼿이 선 어깨가 몸짓 하나하나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
  
  그렇게 한창 상상 속에 빠져있었다. “은지야, 빨래 좀 걷어라!” 쨍그랑. 엄마의 잔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환한 조명이 사라지고 카메라가 가득했던 자리는 책이 가득했다. 내 방으로 돌아왔다. 빨래를 걷으러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거울이 보였다. 거울 앞에 서보았다. 여드름 흉터 때문에 뺨이 울긋불긋했고 광대까지 내려온 다크써클이 안 그래도 칙칙한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얼굴이 작아 보일까 해서 고개를 숙여보았다. 방학을 나태하게 보냈다는 표식인양, 턱밑에 살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면서 우울해졌다.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번 새롭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이 미웠다. 윤기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칙칙한 새내기 대학생. 거울 속에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었다.
 
  빨래를 걷고 방에 돌아와 다시 잡지를 들여다봤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가 짜증을 냈다. “엄마, 내 친구들은 다 예쁘던데 왜 나는 이렇게 칙칙해? 여드름 흉터 땜에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겠어!” 엄마는 쟤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도 화장하고 다니라니까? 화장하고 옷 예쁜거 입으면 너도 예뻐보여. 맨날 체크무늬 셔츠 같은 것만 입고 다니지 말고 치마도 입어보고 해봐. 그리고 솔직히 너희 나이 때는 화장 안 해도 예뻐보여. 아빠도 맨날 은지가 제일 예쁘다고 하잖아.” 더 짜증이 났다. “그건 우리 아빠니까 그렇지,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보곤 예쁘다고 한다잖아! 그리고 치마는 중학교 때부터 실컷 입었는데 그때도 안 예뻤어.” 엄마에게 괜히 화풀이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오는데 뒤에서 엄마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아니 왜 갑자기 짜증이야? 그러니까 화장도 하고 예쁜 옷도 입고 다니라니까, 매일 시퍼런 셔츠 같은 것만 사오면서?” 방문을 닫고 그 자리에 기대어 섰다. 우울했다. 반이 넘게 지나가버린 내 스무 살을 더 이상 이렇게 보내선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 끝나고 예뻐진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잡지를 집어 들고 목록에서 화장품을 추천하는 부분을 찾아 책장을 넘겼다. 화보만 찾아보느라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아이돌 화장법과 그에 맞는 화장품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6월호와 7월호도 찾아 읽어보았다. 따라 해보고 싶어졌다. 평소에 잡지를 보며 잡지에서 설명하는 대로 따라 해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비비크림도 발라본적 없는 내가 뭘 어떻게 따라하겠나 싶어, 막연한 마음에 이내 포기해버리곤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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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오정수_맑은 잡지여 흘러라
맑은 잡지여! 흘러가거라.
 
미용실에는 잡지가 있는데 이발소에는 왜 없는 걸까?
 
뽀글파마가 유행하던 시절 엄마 손에 끌려갔다가 손에 잡힌 책이 잡지다. 종이가 손에 잘 붙어 넘기는데 그림이 보였다. 컬러풀한 세상 속에 여자와 화장품, 시계가 살아 있었다. 머리에 비닐을 쓰고 기다리는 동안 잡지를 계속 넘겼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버텨내고 거울을 보았을 때 배추 한 포기가 머리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보자, 우리아들’
 
당시 이발소에서는 이발사 아저씨들이 면도칼을 들고 구레나룻과 뒷머리를 깔끔하게 면도하고 세숫비누로 북북 머리를 감겨 주었다. 손님을 보내고 쉴만해 지면 탁자 위의 신문을 펼쳐들고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 한자어, 흑백의 종이인 신문이 나에겐 어지러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용실은 증가하고 있는데 동네 이발소는 왜 하나씩 문을 닫을까?
 
이발소에선 기다리던 꼬마에게 차가운 요구르트를 빨대에 꽂아 건네주곤 했었다. 지금 미용실에서는 홍차, 녹차, 다양한 음료가 제공되고 있다. 식상한 타일과 벽지들을 벗겨내고 새롭게 리모델링한다! 
 
보그, 쌔시, 패션잡지의 표지 모델이 매월마다 꽃을 피운다. 몇 백 장의 사진들 중 선정된 단 한 장이다. 반면에 화려한 사진들 속에 숨어 있는 단 한 장. 깨알 같은 이름들을 이제야 발견했다. 편집장, 디렉터, 광고, 마케팅, 수십 명의 사람들. 하지만 아직도 모자라다. 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는 영화를 보면서 비서의 역할마저 얼마나 막중한지 알게 되었다. 양팔에 쇼핑백을 가득 걸고 빌딩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 다니는데 전화가 울린다.
 
‘빨리 안 와!’ 
 
그녀의 노고도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높은 잡지 빌딩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 급하게 뛰어다닌다. 그런 빌딩 속에서 하루 빨리 게임지가 발행되길 기다렸다. 발행된 게임지를 보고 나면 곧장 지하상가로 달려가 유리 안에 진열된 새로운 게임들을 보곤 했다. 주인아저씨에게 얼마냐고 물어보았고, 그렇게 비싸냐며 놀라고 한숨 쉬며 유리에 얼굴을 대고 보았다.
 
‘엄마, 있잖아, 근데.  .  . 아무것도 아니다.’
 
꼬리 내렸으나 다시 말하였다. 안된다고 하도 때를 썼다. 그래도 어머니는 승낙하지 않으셨다. 다음날부터 저금통에 동전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다. 추석, 설날에는 빵긋 웃으며 큰절하고 일부를 어머니께 드리고 저금통에 나머지를 넣었다. 소리 없이 저금통은 채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고,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 이런 얘기해도 되나. 엄마가 싫어하는 줄 아는데.  .  . 게임기 사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 말 잘 들을게요.’
 
기어코 어머니는 승낙하시고 말았다. 게임기가 처음 들어온 날, 게임을 다 하고 게임박스에 가지런히 넣고, 잠을 자다가도 깨어 잘 있는지 박스를 열어 다시 확인해 보곤 했고, 수시로 젖은 휴지로 게임기를 닦고, 마른 휴지로 또 닦아 주었다. 또 친구들이 게임을 하러 오면 작은 행동조차 신경 쓰여 소리 질렀다.
 
‘야, 살살 좀 해라. 부서지겠다.’
 
어머니께선 가끔 그 때 일을 떠올리시며 게임을 좋아하듯이 뭐든지 하면 성공할거라고 하신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게임과 나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는 잡지였다. 잡지를 통해 주간 게임순위 목록을 살펴보고, 흥미를 끄는 게임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러고 나면 게임은 마음속에 각인되었다가 뭉클거리며 변형되었고, 빨리 나는 손에 넣고 싶어졌다. 이렇게 게임 잡지를 건너게임을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게 일상은 재미없는 공부로 꽉꽉 차 있었다. 공부를 좋아하는 꼬마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집 건너편에는 게임에 대해 박식한 형이 살고 있었는데 엄마 몰래 밤늦게 까지 그 집에 가서 놀았다. 우리는 게임 잡지를 펼쳐놓고 게임을 하며 밥을 먹고 공부를 하며 음악을 크게 틀었다. 라디오에선 락밴드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 학교가기 싫은 사람. 모여라, 모여라,’
 
곧 우리는 불을 끄고, 소리치며 흔들며 방방 뛰었다. 카타르시스가 극에 달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매니아라고 부르지 않나 싶다. 늘 갈급했고, 형을 졸졸 따라 다니며 채웠다. 그를 스승이라 생각했고, 나도 무언가 되는 듯 했다. 나는 커서 게임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되거나 과학자가 되어 게임을 공짜로 하고 싶었다.
 
내일 모래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텐데도 아직 그 형이 게임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공부를 잘 하지는 못한다. 넥타이를 매고 교복을 입고 사회 속으로 끌려가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고 의욕이 없어질 때 그 시절 노랫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 학교가기 싫은 사람 모여라. 모여라’
 
비록 몸은 벗어날 수 없지만 잡지를 보고 있을 때면 넥타이를 던지고 교복을 벗어 던지고 즐기며 한 사람의 매니아가 되어가는 동안 복잡한 일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유년기 시절 나의 취미는 만화책과 게임 같은 시각적인 이미지들이었으나 세월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지금은 그림이 거의 없는 문학지를 읽고 있다. 실은 이것도 최근에 시작한 일이다.
 
서점에서 창작과 비평, 문학사상, 수필에 관한 책을 뽑아두고 한참을 서서 훑어보다가 겨우 한 권을 선택하였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들이 나오는데도 아는 사람이 하나 없다. 문학에 초보자인 내가 알 리 없다. 오히려 그래서 잡지가 좋다. 시로 깊이 표현하고, 소설로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다양한 작가들의 심정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늦게 서야 글을 읽는 즐거움을 배우고 있는 만큼 안타까운 것이 있다. 서점점원에게 문학지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참을 헤매다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받아서 찾아주었다. 잡지 코너의 중앙에는 헬스와 패션 같은 컬러풀한 잡지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책장 한 귀퉁이까지 가서야 문학지를 찾을 수 있었다. 
 
문자가 그림에게 밀려난 원인은 무엇일까?
 
돈을 찾으러 직접 창구에 가다, 현금인출기를 사용하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뱅킹을 하기에 익숙해진 것처럼 은행의 기능이 변하듯 잡지의 기능도 변한 것인가. 인터넷에 웹진이 증가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손바닥 안에서 세계가 창조되고 있다. 책은 어느 부위를 누르거나 심지어 던져도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전혀 반응 없는데 스마트폰은 미세한 손가락의 터치를 읽어내고 있다. 현대과학 기술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음에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나는, 손가락의 터치에 익숙해지자 직접 일어나서 찾아가길 귀찮아한다. 그리고 그림에 익숙해지자 문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걸 갑갑해한다. 문자가 멀어져가는 풍조에서 다시금 재발견하기위해 빠른 정보망의 장점을 이용하여 고전의 위대함을 광고하며 다시금 복구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년시절에는 주로 영상매체를 통해 곧바로 사물을 인식하였으나 지금은 문자속의 의미를 발견할 때의 유쾌한 마음을 알아가고 있다. 멀티미디어세계의 예술에서 문자는 영상으로 소리로 전환되며 또한 역으로도 전환되며 돌아온다. 그렇기에 잡지에 실린 사진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를 내포한다. 사진은 단 한 장이지만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토록 사진학이 중요해졌고, 독자적으로 학과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광고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욕구를 자극하여 물건을 파는 것만 아니라 하나의 표현예술로서 독립된 학과가 생겨났다.
 
이 같은 매체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여 연구하며 독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는 잡지가 흘러 나가길 바란다. 흘러간다는 말은 매월 발행되는 성질을 두고 말한 것이다. 잡지와 그 속의 정보는 세련되어지고 깊어지며 독자는 그런 잡지의 맑은 물을 마시며 변화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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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정병율-잡지 속 내 첫사랑
 작품명 :
잡지 속 내 첫사랑
 
 그 옆집 담벼락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할머니께 묻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장사를 하셨다. K읍 한 모퉁이에서 콩나물과 참기름 등, 각종 생필품을 대청마루나 부엌구석에 쌓아놓고 파셨다. 주말이면 꼭 나는 외갓집에 놀러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신이 나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라 한창 군것질거리가 생각나서도 더 그랬겠지.
 그 시절, 나는 할머니 댁의 마당 한쪽에 있는 우물가에서 노는 걸 무척 좋아했다. 감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가에서, 여름이면 홀딱 벗고 물장난을 치곤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강새이, 고추 비겠데이. 이제 그마하고 방에 들어 온나 고마.” 하고 소리치셨다. 사실은 내가 밤늦게까지 우물가에서 노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분명히 내 또래 여자애 목소리 같았는데, 매번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노랫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쨌든 노랫소리가 사뭇 아름답게 느껴져서 그 순간마다 나는 가슴 펄떡 떨려왔다.
 할머니는 가끔씩 내게 심부름도 시키셨다. 논둑에 나가 토끼풀을 뜯어오라 그러셨고, 장날이면 시장에 가서 들깨나 콩, 참기름 따위를 사오라고도 하셨다. 그래도 나는 재미있어 했다. 거기에 가면 나도 모르는 세상을 접해볼 수 있었으니까. 논으로, 밭으로 토끼풀을 낫으로 베다보면 어느덧 한나절이 성큼 저물고, 저 산 너머에는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나는 그만 넋을 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연이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땐 비록 내가 어린 나이긴 했어도 그것이 활기로 다가오는 것도 느꼈다.  
 무엇보다 5일장이 들어서는 동네시장, 그 생존현장구석구석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 시장은 내 눈엔 온통 신비스럽기 짝이 없었다. 갖가지 먹을거리며 탐나는 옷들,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팔고 사는 광경이 너무나 정겨웠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틈만 났다하면 할머니의 심부름을 자초해서 다니곤 했다. 연신 휘파람 불면서 고물자전거를 타고 그렇게 힘차게 쌩쌩 내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심부름 뒤에 할머니가 하사(?)하신 재미있는 책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낡은 궤짝 안에는 어디서 주워 모으셨는지, 잡지책이 늘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도 방학 때면 당신손자가 심심해 할까봐 평소에도 할머닌 그 책들을 이웃에게 얻거나 해서 보관해놓으셨을 게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책 내용은 온통 흥미꺼리일색이요, 재미로 가득 넘쳐났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안의 만화책 따위를 읽으며 깔깔거리던 그 시절이 왜 그리 달콤하던지! 정말 그랬다. 그 때는 잡지하나라도 가방에 넣고 다닌다는 자체가 또래 애들한테는 대단한 위세거리였다. 우리가 사는 데가 약간 한갓진 쪽이라서 그런 게 더 통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은 그 금쪽같은 잡지를 나 혼자서만 읽으려고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은 옆집에 사는 그 어여쁜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도 같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그 전에도 나는 빵 하나씩을 소녀의 방 마루 앞에다 슬쩍 던져주곤 했었다. 다음날 내가 눈으로 확인하면 그 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틀림없이 그 소녀가 먹었을 거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빵이 날개를 달고 공중으로 달아나지 않은 한은 틀림없이 그랬지 싶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봤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사실 외갓집 근처에는 두 눈 닦고 찾아봐도 여자친구라곤 하나도 없고 해서 방학을 맞이했을 때는 더더욱 나는 심심해서 아주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날부터 나는 외할머니께 얻은 잡지책을 슬쩍 담 너머로 한 권씩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밤에 몰래 책을 던져놓고는 한참 지난 다음날이 되어서야 눈으로 확인을 하니, 그 사이에 소녀가 잡지를 수백 번은 더 주워 읽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종일 담 너머로 목 빼놓고 기다리고 있을 처지도 아니라서 이래저래 나는 속만 바짝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아니 그 기회는 이웃집 소녀가 먼저 만들어주었다. 막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아예 활짝 열려있는 할머니 댁 대문을 통과한 소녀는 냉큼 내 앞으로 다가서더니 책이 가득 담긴 쌀자루를 하나 내미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볼멘소리로 내게 말했다.
 “얘, 내가 거지니! 왜 자꾸 쓸데없이 책을 던지고 그래?”
 그 순간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그런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을 주고 나서도 면전에서 이렇게 창피를 당하다니, 나로서는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사자가 자존심 상해하는데 어린 나로선 미안한 마음만 잔뜩 들 수밖에. 그리고 언뜻 봐서는 그 소녀가 나보다 두세 살 정도는 많아 보이기도 해서 거기선 함부로 대꾸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참 이상한 얘 다보겠네. 다시 한 번만 더 그럼 우리 아빠한테 일러줄 거야, 알았어?”
 그렇게 모질게 한마디 내뱉고는 소녀는 휑하니 돌아서가버렸다.
 그날, 나는 목소리도 아름다운 소녀에게 꾸지람만 실컷 듣고 말았다. 한동안 나는 기분마저 울적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예 외갓집에도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정말 할머니에겐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집에서 두어 시간 너머씩이나 차를 타고 가야 하는 K읍에는 더 이상 나도 가고 싶지가 않았고 또 만사가 싫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나로선, 그 일이 부끄럽고 충격이 컸던 탓 일게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만큼이나 내 마음도 자랐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 그 일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십 대 초반에 이르렀을 때쯤 그 ‘책사건’을 다시금 떠올려야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게 무안부터 주던 그 주인공이 내 눈앞에 아예 멀쩡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것도 시장바닥에서 마주치다니? 아무튼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성큼 성숙한 그녀는 다짜고짜 나를 데리고 근처 제과점으로 향해가는 게 아닌가. 서로 마주보고 앉자마자 그녀는 종업원에게 빵 한 접시를 가득 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녀는 너무나 다정하게 내게 말한다.
 “정말 그땐 미안했어. 괜히 내가 성의를 무시한 것 같아서 말이야. 사실 난 니가 담 너머로 던져준 잡지 다 봤거든. 밤잠도 안 자고 혼자 그걸 읽으며 얼마나 신나했다고. 깔깔, 미안해! 그러고도 야단만 치고.”
 그러면서 연신 나더러 빵을 더 먹어라 권하고는 또 깔깔 웃어댄다.
 아마도 그녀는 내게 창피를 주었던 그 일이 가슴에 사무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비로소 오늘 그 한을 풀 기회가 왔는지, 작심하고 반강제로다 시피 내게 빵을 권하고 있는 걸보면 그게 분명한 것 같다.
 그 자리에서 사실 내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외갓집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지금 그 시각, 그녀와 마주앉고 보니 자연스레 옛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러자니 눈부시기만 했던 언덕배기의 노을이며 반짝이는 밤하늘 별빛, 정겹기도 했던 마을공터의 느티나무, 그 가지위의 까치 까아악 하며 우짖는 소리, 그리고 따뜻한 시장풍경이 한꺼번에 내 뇌리에서 확 스쳐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괜히 속으로 즐거워져 그녀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빵 먹다가 혼자 웃고, 씩 웃다가도 빵을 먹곤 한다. 실제로 그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장밋빛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그렇게 무정한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가고, 지금은 엄연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을 그 첫사랑소녀가 오늘따라 무척 보고 싶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이쯤에서 나는 그녀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 암.
 “혹 지난 세월이 달콤한 책 같지는 않으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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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김류씨_『학원』 잡지에 대한 추억
 작품명 :
『학원』 잡지에 대한 추억
 
김 류 씨
 
휴전 바로 직후인 1954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읽을 책이라고는 교과서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미국공보원에서 우리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는 미국 역사에 관련한 한글판 책이나 아브라함 링컨 같은 미국 대통령, 혹은 위인들의 전기(傳記)를 다이제스트 한 얄팍한 인쇄물이 고작이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어린이 만화나 다른 여러 가지 책이 발간되기는 해서 눈요기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드문드문한 일이어서 내가 사는 당시 인천 변두리(그때는 완전히 시골이나 다름없었다.)까지는 거의 흘러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8년인가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를 처음 보게 되었다. 몇 월호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중학교에 다니던 바로 위, 학년 차이로는  5년이나 크게 위인 형이 어디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 『학원』을 빌려 오던 날 형은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책을 꺼내 놓으면서 내게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학원이라는 책이야. 학원이란 말은 중학교 이상의 학교를 뜻하는 것이거든. 그러니까 너 같은 국민학생은 어려서 볼 수가 없다는 말이야. 중학생 이상이나 보는 책이니까 절대 손대지 마. 알았지? 아버지나 어머니한테도 말하지 말고, 이 책에 대해서는 아예 못 본 척하라고.”
그리고는 그 책이 무슨 귀중품이나 되는 것처럼 방에서 잠깐 자리를 옮길 때에도 꼭 손에 들었다. 저녁을 먹으러 안방으로 갈 때조차도 형은 그 책을 우리 방 선반 맨 위에 올려놓고는 나를 한 번 쓱 훑어보곤 했다.
형은 책을 빌린 기한 며칠 동안 저녁마다, 휴전 직전 공습경보에 대비해 백열등 위에 설치해 두었던 전등갓을 내려 스포트라이트처럼 책 위에만 불빛이 비치게 해 놓고는 달팽이처럼 자기 이불 속에 쭈그려 엎드려서 읽었다. 그것도 혹시 내가 내용을 넘겨다볼까봐 책갈피를 절반 정도만 펴고 읽는 것이었다.
나는 좀 떨어져 모로 누운 채 형 몰래 실눈을 뜨고는 흐릿하게 그늘져 보이는 『학원』 잡지의 뒤표지만을 넘겨다보곤 했다. 첫 날 형이 책장을 넘길 때 슬쩍 본 바로는 이 책은 내용이 처음부터 죽 이야기 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화도 있고, 그림이나 사진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형은 눈곱만치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형의 옆얼굴이 그렇게 냉혹해 보일 수가 없었다. 늘 엎드려 무언가를 끌쩍일 때보다도 더 차가워진 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그러는 형이 참으로 야속하고 또 내 자신이 한없이 비애스러워서 소리 나지 않게 눈물을 흘리다 잠든 날도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책을 돌려준 뒤로는 어쩐 일인지 형은 다시는 『학원』 잡지를 빌려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제는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글만 가득 찬 이야기책들을 읽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잠들기 전에 ‘어서 나도 중학생이 되어서 마음대로 읽어야지.’ 이렇게 이를 갈고 잠들던 것을 눈치 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행본과 잡지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지 못했던 때여서 처음 형이 읽는 『학원』 잡지를 넘겨다볼 때는 나는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잡지는 결국 1960년 내가 중학에 입학한 후, 당시 중고등학교로서는 전국 제일의 시설과 규모를 가진 학교 도서관 잡지열람실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또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왜 한사코 형이 이 책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학원』 잡지는 어쩌면 이렇게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이야기들과 만화 같은 흥미로운 재밋거리와 풍부하고 기상천외한 교양과 지식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 더군다나 우리 같은 학생들의 문예작품도 실려 있는 것이다. 물론 어린 국민학생인 내가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고 해도 형은 왜 그토록 심하게 나의 접근을 막았을까. 이런 보물 창고를 형은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달이 잡지 열람실에 진열되는 『학원』 잡지를 보는 것이 이제 중학 시절의 큰 낙이었다. 그러다가 학원문학상 공모에 투고된 전국 각지 중고생들의 문예 작품을 자세히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실력들이 대단했다. 나도 학교 문예반에 나가 글을 씁네 했지만 수준이 영 아니었다.
중3이 되던 1962년, 당시 학원문학상 수상작인 원주고등학교 3학년 오탁번(吳鐸蕃)의 시 「걸어가는 사람」을 읽고는 정말이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열람실의 『학원』 잡지를 집에 가져가서 밤새 그의 당선작과 다른 입상작품들을 다시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잡지는 관외 대출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학원』 책을 살만 한 돈을 어디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 끝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첫 달 월급으로 나는 신간 『학원』 잡지를 사는 대신 헌 책방에 가서 오탁번의 시가 실린, 이미 달 지난 잡지를 다소 헐한 값에 샀다.
그러고 보니까 헌책방에는 몇 년 전의 『학원』 잡지들이 차례대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손길이 간 것이 1958년도 학원문학상 수상작이 실린 책이었다. 그 책의 뒤표지가 눈에 익었다. 책방 주인에게 조르다시피 해서 아주 싼 값에 그 책을 손에 넣었다. 그해 수상작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새 잡지는 학교 도서관에서 다달이 읽는 대신 묵은 것은 헌 책방에서 몇 권씩 구입해 어느덧 수십 권의 잡지가 집에 쌓이게 되었다.   

나도 1963년과 그 이듬해, 두 해에 걸쳐 응모를 했다. 그러나 낙방이었다. 가까스로 1964년 11월호 ‘이달의 시’에 「단풍」이라는 작품이 꼭 한 번 시인 김용호(金容浩) 선생의 추천으로 선정되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인기였다.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팬레터가 쇄도했던 것이다.
이때쯤 형은 군대에 가 있었다. 형이 그토록 못 보게 하던 『학원』 책에 내 시가 실렸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나는 형에게 편지를 썼다. 내 시도 편지에 옮겨 적었지만, 그 옛날 왜 그렇게 『학원』 잡지를 읽지 못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얼마 후 아주 기쁨 가득한 답장이 형으로부터 왔다. 형도 그러나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 채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군대에 갔다. 우리 집은 아버지의 실패로 말할 수 없이 살림이 피폐해 있었다. 첫 휴가라고 나왔지만 우울한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동생 둘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해 있었다. 또 다른 동생 하나는 폐결핵으로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내가 몇 해 동안 신문배달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사 모은, 그래서 더 신주 위하듯 위하던 100여 권의 『학원』 잡지들은 모두 어려운 살림을 위한 파지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께서 내 『학원』 잡지에 대해 전해주신 말씀의 요지는 대략 이러했다.
‘어머니께서 『학원』 잡지만큼은 작은아이 군에서 돌아온 담에 물어보고 하자고 했으나 아버지께서는 잡지라는 게 그달 지나면 다 묵은 게 돼서 아무 소용없는 종잇장에 불과한데 너절하게 두어 무엇 하느냐, 파지로 팔아 치우든지 아니면 불쏘시게를 해도 무방하다고 하시면서 다 처분해 버리셨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대가리 다 큰 어른 자식이 중학생 잡지나 부여잡고 뭐 할 텐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잡지의 효용도 운명도 다 잘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이미 과거에 잠긴, 묵은 『학원』은 폐지가 되어 결국 가난한 우리 집의 한 끼 호구지책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속절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내가 『학원』 잡지를 사 모으기 시작한 이유가 애초 형과의 그런 과거 일이 내 심리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거기 실린 학생 작품들이 좋았던 까닭인지는 지금도 분명히 대답을 못하겠다.
아무튼 『학원』 잡지들은 내 수중에서 사라지고, 부모님 두 분 역시 아주 오래 전에 다 돌아가셨다. 재작년 형이 불치의 병으로 타계했을 때 내게 전화를 건 옛날 동네 누나가 내게 ‘자네 글을 쓴다지? 생전에 형님한테 들었어. 자네 형님도 고등학생 때 학원인가 하는 잡지에 글을 내고는 떨어져서 아주 실망하고는 했었는데……. 그런데도 자네가 글을 쓰는 게 그렇게 자랑스럽다고 하더니……. 원, 사람, 뭐 그리 바빠서 빨리 가나.’       

형이 어려서부터 작문을 잘 지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저 1958년, 그해 며칠 밤, 내게 『학원』 잡지를 넘겨다도 못 보게 한 까닭이 혹시 형이 낙방한 사실을 국민학생인 나라도 혹 알아챌까 봐,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 아버지께도 알려질까 봐 그랬던 것일까. 자존심 때문에 며칠을 굶고도 집 밖에 나가 밥을 구하지 않던 형…….
이제 다 늙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온다. 『학원』 잡지에 대한 내 추억은 이렇게 쓸쓸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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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최영식-만리장성과 옛 그림자
 작품명 :
만리장성과 옛 그림자
 
 잡지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참으로 묘한 물상(物像)이다. 한 번 구독을 시작하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고, 잡지를 구독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춧돌이 놓여지고  벽돌이 쌓이면서 마침내 만리장성과도 같은 지식의 축성(築城)을 이루는 까닭이다.
 
 1978년은 내가 공고를 졸업한 해이며, 사회에 첫발을 내민 해였고, 첫사랑과‘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를 만난 해이기도 하다. 현장실습을 겸한 첫 직장은 경기도 이천의 산골에서 고압 산소통을 만드는 회사였다. 워낙 깡촌이라 외지에서 몰려든 공장 기술자들은 거반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기계를 돌리고 퇴근을 해도 마땅히 갈 곳 없는 따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첩첩 산골 어디 가서 통닭 한 마리 시켜놓고 맥주 한잔 기울일 곳이 없는 것이다.
 통닭은커녕 치약이나 비누쪼가리 따위의 생필품, 책 한권이라도 사 볼 요량이면 일요일을 기다렸다가  덜컹이는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야 했으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중 경리 보는 아가씨가 새로 들어왔다. 그녀도 그해 상고를 갓 졸업한 신출내기여서 또래인 나와는 쉽게 말을 트고 지냈다. 단발머리에 치마끝선이 단정한 예쁘장한 그녀는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꼬실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는 하루하루의 즐거움이 찾아든 것이다. 종일 신경의 촉수는 그쪽으로 뻗어 있었으니, 우주 저편에서 내려다보면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위성 하나가 탄생한 셈이 되겠다. 하지만 그녀 주위를 맴돌수록 어떤 경계선 같은 게 느껴졌다. 한 발짝 다가서려고 하면 갑자기 찬바람이 쌩하고 부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토요일 오후,  그녀가 나무 그늘에 놓인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께너머로 흘낏 보니 무슨 광고가 드문드문 실린 책으로 잡지책 같았다.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느냐고 물었더니 여전히 책에 눈길을 둔 채‘뿌리깊은나무야”라고 대답했다. 웬 뿌리깊은나무 타령이람! 나는 계속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그럼 뿌리가 얕은 나무도 있었나? 어쩌구 떠들어댔다.
“너 학교 때 용비어천가랑 월인천강지곡도 안 배웠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정인지등으로 하여금 짓게 하신 노래잖아 ‘불휘 기픈 남 매 아니뮐’하는 대목. 이 잡지 이름이 바로 그 뿌리깊은나무에서 따온 거라고...”
 그녀는 오래전 사라져버린 아래아ㆍ발음을 하느라 애써 혀를 입천장에 굴려 보이며 하얗게 웃었다. 나는 갑자기 무식이 드러난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난 이 책을 고1때부터 봤다. 아버지가 정기구독 하시는 잡지거든, 여기 조금 남은 거 다 읽으면 빌려 줄게. 재밌고 유익한 내용들이 너무 많은 잡지야”
 그렇게 해서 내 첫사랑과 뿌리깊은나무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가로세로가 대학노트처럼 큰 반면에 부피는 얄팍했던 뿌리깊은나무는  여러 면에서 특이했다. 당시 신문이며 잡지들은 대체로 세로짜기였는데 보기 드문 가로짜기 판형이었고 한자나 영어를 섞어 쓰지 않고 순 우리말만으로 기사를 썼다. 더러는 괄호()를 써서 한자나 영어를 병기할 법한데 그런 것조차 없었으니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스타일의 잡지였다.  

 내용면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잊혔거나 잊혀져가는 것들을 발굴해내는데 힘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숨어사는 외톨박이, 우리 것은 찾아서 무얼 하나, 털어놓고 하는 말 등의 기사가 그랬다. 특히‘외딴섬 나로도의 초분’취재한 이광규씨의 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 아직도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지 않고 볏짚을 쌓아 초분(草墳)을 만들고 풍장(風葬)을 하다니, 그런 일은 열대지방의 원시부족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 남쪽 섬 어딘가에 아직도 그런 풍습이 남았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잡지라고 해봐야 ‘어께동무’를 필두로 중학교 때‘진학’고등학교 때‘학원’정도를 뒤적거렸을 뿐인 나로서는 신대륙을 발견한 분이었다. 더구나 연모하는 미모의 아가씨가 이런 수준 높은 잡지를 나보다 훨씬 이전부터 보아왔다는 사실에 뭔가 한 수 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잡지를 빌린다는 구실로 나날이 그녀와 가까워졌고 풋사과가 가을 햇살을 받아 붉게 익어가듯 우리의 만남도 분홍빛으로 익어갔다.
 그렇게 산골에서의 젊은 나날은 휘몰아치듯 흘렀고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좋은 잡지를 한동안 읽을 수 없게 된다는 아쉬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논산 훈련소 입대를 앞두고 그녀 이름으로  일 년치 정기구독권을 끊었다. 그동안 빌려 읽은 책의 신세 갚음이라고 해 두었지만, 그 잡지를 매개로 행여 발생할지도 모를 그녀와의 헤어짐, 이를테면 궤도 이탈을 막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81년 최전방에서 포병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하니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투옥, 불심 검문, 국가보안법 등 살벌한 단어들이 신문과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새마을 운동본부니 뭐니 하는 관변 단체들이 앵무새처럼 ‘정의구현’을 외치고 있었지만 사회는 불신과 냉소라는 겨울 외투를 무겁게 껴입고 있었다. 신군부의 등장과 공안통치의 시작인 것이다. 뿌리깊은나무는 폐간 되었는지 서점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뿌리깊은나무만이 아니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나 지식인들이 무더기로 해직 되었고,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 등 신군부 세력에 밉보인 잡지들은 대거 정간이나 폐간의 서리를 맞은 상태였다.
 나는 짬짬이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뿌리깊은나무 과월호가 있는지 살피고 다녔다.  잡지가 폐간되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잡지를 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청계천 헌책방 골목에는 군복무 중 못 보았던 과월호뿐 아니라 내가 처음 읽었던 1978년 1월호를 거슬러 76년의 창간호까지 간간히 흘러 나왔는데 한권에 500원을 주고 구할 수 있었다. 한때 애지중지했던 잡지의 과월호를 뒤늦게나마 월별로 짝 맞춰 채워놓는 기쁨은 여간 재밌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창간호부터 폐간 직전까지의 잡지를 다 모았다.
 그러자 뭔가 보였다. 옛날 풋내기 때 느끼지 못했던 잡지의 품격이랄까 발행인과 편집자가 추구했던  목적의식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것 찾기였다. 이 땅의 사람들, 숨어사는 외톨박이, 민중의 유산 등의 기사들이 그것인데 ‘소중한 우리 것을 되살리자’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기록이라도 남겨놓자는 것이 발행인 한창기 선생님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난 세월의 흔적과 유물을 긁어모으는 식은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 바르게 말하는 기사도 실었다. 나는 이렇게 본다, 털어놓고 하는 말, 이것도 문제다 등의 코너가 그것이다. 
 과월호를 뒤적이노라면 폐간되기까지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표시들이 여러 군데 눈에 뜨였다. 목차에 검은 테이프를 붙인 듯 먹칠이 되어 있던 1979년 11월호는 박대통령의 서거에 관련한 어떤 기사였을 것이고, 기사가 들어갈 자리를 그냥 백지상태로 내보낸 1980년 3월호는 신군부에 대한 어떤 쓴 소리를 담았거나 권력에 밉보일만한 기사였을 것이다. 검은 먹칠과 휑한 백지상태의 잡지를 대하니 그것이 비록 과거의 흔적 일지라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아, 이 잡지가 이렇게 당하다가 결국은 폐간을 맞았구나! 하는 생각.
 
 나는 옛 직장으로의 복귀를 희망하지 않았다. 뿌리깊은나무와 함께 풋풋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던 내 첫사랑도 떠나고 없었다. 아니 그녀는 두 번째 휴가 때인 일등병 때 이미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많이 혼란스러웠고 새로운 진로를 놓고 한동안 우왕좌왕 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월급이 또박또박 나오는 기능공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무난했지만 뭔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 중 하나가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상을 따라 장사를 배우거나, 남대문 근처 길바닥에서 리어카 행상이라도 하면서 이재(理財)를 터득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때부터 종로나 을지로를 지날 때면 리어카나 길바닥에 간단한 좌판을 벌려놓고 인형, 옷가지 등속의 물건을 파는 길거리 노점상들을 유심히 보았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즈음 만난 잡지가 2~30대의 젊은 독자층을 겨냥한‘마당’이라는 잡지이다. 가장 돋보였던 점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르뽀 형식으로 취재 심층 분석한 기사였다. 포항 석유이야기, 사형수 박철웅 이야기, 강원도 소나무의 대학살 등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굵직굵직한 르포들을 줄기차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매달 한 작품씩을 30만원에 사겠다는 ‘르포작품현상 모집’을 하고 있었다. 주제는 자유고 원고 분량은 백 매 정도였다. 지금부터 30년 전의 30만원은 거금이었으므로 나는 원고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 노점상들의 곤고한 생활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막무가내로 밀어내는 단속반들의 행태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서울시의 노점상 단속은 살벌했다. 경찰이 호각을 불며 좌판을 엎어 버리는 것은 예삿일이고, 한 푼 벌어먹겠다고 힘들게 장만한 리어카와 포장마차를 골목 구석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버리곤 하였다. 무자비한 단속에 항의하던 어떤 상인은 리어카에 자신의 몸뚱이를 쇄사슬로 묶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분신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노점상들의 실상은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다. 새벽 4시에 용산 야채 청과물 시장이나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달려가 물건을 장만하고, 보통 밤 10시까지 길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종일 거리의 먼지를 마시며 중노동에 시달리지만 잠잘 시간이라곤 고작 3~4시간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릿세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는 건달들의 행패, 반복되는 시청 단속반과의 숨바꼭질.. 한마디로 악다구니를 품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현장감 있는 글을 쓰기위해 새벽 청과물과 수산시장을 돌았고, 서울시청 도시행정과를 찾아가 노점상의 단속지침의 문제점, 과잉 단속에 의한 약자들의 피해 보상에 관해 서울시의 입장을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백방으로 발품을 팔며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뛴 끝에 가까스로 150여 매의 원고를 겨우 완성했다. 그런데 이런! 원고 마감일을 사흘이나 넘기고 말았다.
 나는 원고를 들고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마당 편집실로 달려갔다. 늦었지만 다행히 원고는 접수 되었고, 편집실을 돌아 나오려는데 담당 기자가 좀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해서 30여분을 기다렸다. 그랬더니 큰 키에 얼굴이 길쭉한 사람이 제가 편집장입니다 라고 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훗날 월간조선에 굵직한 기사를 많이 써 이름을 날린 조갑제님이셨는데 당신의 원고가 당선작에는 못 미치지만 잡지에 싣고 싶은데 어떠냐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서울 노점상들의 세계’라고 하는 나의 르포작품은 83년 7월호의 마당에 실리게 된다. 기사 말미에 나의 간략한 약력과 주소가 실렸고 그 바람에 묘령의 팬레터가 한동안 집으로 배달되던 일들도 즐거운 추억의 중의 하나다.
 이후 마당에 짧은 글을 몇 편 더 썼고, 전문 르포라이터의 꿈을 꾸었으나 인문학이라든가 역사 전반에 관한 소양이 부족했고 필력조차 따라주지 않아 결국은 구로공단에서 쇠를 깎아 금형을 제작하는 기능공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도 거기 그 서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80년대 중반, 서서히 민주화 열기가 타오르던 시절. 그때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5거리에는 ‘공단서점’이라는 자그마한 서점이 있었다. 싸구려 극장가와 옷가게, 순대집과 튀김집들이 다닥다닥 뒤엉켜 거대한 먹자골목을 이루던 그 쪽방 건물들의 지붕위로 남부순환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공단서점은 기름때 묻은 기능공들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지는 바로 그 고가도로 아래에 검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납작 엎드려 있었다.
 공장일이 끝나면 머리도 식힐 겸 생맥주를 한잔 하고 버릇처럼 그 서점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공단서점답게 노동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 조정법 따위의 책들이 빼곡히 서가를 메우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서점에 들어설 때면 꼭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누가 나를 주시하거나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은 그 책방이 유일하게‘그’잡지를 몰래 구해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몰래 파는 곳’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리라. 서점에 손님이 있으면 괜히 딴전을 피워야 했다. 손님이 프락치인지 형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손님이 떠나면 주인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그 잡지주세요’라고 말한다. 주인은 벽장 은밀한 구석이나 창고 어디쯤에 숨겼던 얇은 잡지 한권을 슬그머니 꺼내와 씩 웃으며 내놓는다. 나중에는 손님이 있어 내가 딴청을 부리면 주인이 알아서 검은 비닐 봉투에 싼 잡지를 슬쩍 옆구리에 끼워 주기도 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이름으로 발간되던 그 얄팍한 그 잡지의 이름은‘말’이다. 해직기자들의 대부이자 한국 언론의 사표로 일컬어지는 송건호 선생님이 발행인이셨고, 올림픽에 가려진 스포츠 공화국 내막, MBC기자들의 폭로- 아직도 보도 치침 엄존, 한반도의 핵 위기, 인혁당 사형수들의 진실 등의 기사가 실렸었다. 그 당시 말지 어디에 우리가 읽어서는 안 되는 국가 기밀이나 국익에 해가되는 기사가 실렸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공단서점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한길사가 발행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 등의 금서(禁書)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또 구로공단에 위치한 여러 노동조합의 회보를 서로 바꿔보거나 대자보등 유인물 제작을 맡아 심부름해주거나 노동운동가들의 비밀 연락망 구실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투철한 역사적 소명의식이나 노조활동에 앞장섰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몰래 말지를 애독한 것은 감추어진 세상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는 욕구, 민주화를 열망하는 거대한 흐름에 동참한다는 자그마한 의무감. 뭐 그 정도의 가벼운 것들이지만, 도둑이 제발 절인다고 부정한 짓으로 권력을 찬탈한 세력들은 무엇이든 반대하는 낌새만 보여도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고 입에 재갈을 물려야 직성이 풀렸던 모양이다.
 
사기(史記)에 보면, 우주에서도 그 자취가 뚜렷한 만리장성과 그 축성(築城)을 명했던 진나라 시황제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흉노로 일컬어지는 북방 오랑캐의  외침에 대비해 기나긴 장성을 쌓는 일과 동시에 과거로부터 당대에 이르는 시(詩) 서(書)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불사르도록 명령했다고 적혀 있다.
 천하를 손안에 움켜 쥔 그였지만, 북방 오랑캐의 두려움보다 어쩌면 한 마디 말, 한 줄의 문장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전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들을 땅에 묻었다. 그럼으로써 시황제인 자신을 시작으로 2황제, 3황제, 4황제 하는 식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불멸을 꿈꾸었을 터였지만 황제의 제국은  단명하고 말았다.
 기원전 일들이 이 천년을 뛰어 현세에 반복되는 것은 정당성이 담보되지 아니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단명하다는 역사의 필연을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저 1970년을 돌아 80년대를 휘몰아친 우리나라 잡지들의 고군분투는 금지, 금서, 폐간이라는 쓰라린 상처를 뛰어 넘어 오늘을 새롭게 밝히는 유훈을 남기는 것이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잡지란 허기와 혹한의 시절, 한줄기 희푸른 빛살로 다가와 가만히 어께를 두드려 준 시대의 전령사들이 아니었나 싶다.
 올 곧은 대쪽 선비를 닮았던 뿌리깊은나무, 텁텁하고 구수한 시골 냄새를 풍기던 마당, 서릿발의 냉기로 진실을 외치던 민주언론협의회의‘말’이라는 잡지가 그랬고, 날카로운 논조의 창작과 비평, 꿈틀대는 오윤의 목판화를 생동감 있게 싣던 실천문학도 나의 오랜 벗이다.
 지금, 그때 그 빛바랜 잡지들은 숱한 이삿짐과 물난리의 고초를 겪고도 당당히 살아남아  나의 오랜 벗이 되고 있다. 가끔은 돌보는 손길이 소원하여 책장 한구석 빛바랜 먼지 속에 시무룩하다가도 내가 툭, 툭, 어께를 두드려 나란히 맞춰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갑게 웃기도 한다. 지난 시간 속을 맑게 유영하는 금빛 잉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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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제3회 전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수상작))
 
  [대상 -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윤재열-잡지, 결핍을 메워주던 삶의 에너지
잡지, 결핍을 메워주던 삶의 동반자 
 
윤재열
 
  우리의 삶은 늘 결핍의 과정이다. 흔히 인생을 항로(航路)에 비유하듯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하루 하루 힘겹고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생활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괴로움은 물론 이웃과의 조그마한 갈등도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특히 나의 젊은 날은 역사적 격변기의 한복판에 있어서 무척 힘들었다. 그때마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참는 척했지만, 마음은 늘 괴로운 물결이었다. 다행히 삶의 위기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고 위로해주던 것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책, 잡지, 그리고 문학 이런 것이었다. 특히 잡지는 내 인생 순간 순간에 삶의 결핍을 메워주는 친구였다.
  고등학교 때 잿빛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는데 내게는 그것도 결핍의 한 현상이었다. 공부는 저만치 두고, 삶의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서 더 메말라 버리고 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학교만 나서면, 방황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곳이 청계천이었다.
  청계천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저마다 삶의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의 비뚤어진 시선으로 꿰뚫어보면 그들은 일찍이 삶의 절벽에서 밀려나 버렸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청계천의 화려한 건물과 육중한 고가도로의 위용을 비웃기라도 하듯, 건물의 옆에서 혹은 다리 밑에서 의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청계천은 신상품이 많이 있기도 했지만, 길거리 좌판에 빛바랜 상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나를 이끈 것이 이 허름한 청계천이었다. 특히 촌스럽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점들이 묘한 흥분과 긴장을 만들어낸다. 책방에 빼곡히 쌓여있는 헌 책들은 주인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이곳에 밀려온 슬픈 운명의 주역들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삶의 변두리에서 방황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내 자신의 슬픈 자화상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학교를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서 시인 윤동주를 만났다. 쓸쓸한 감정이 밀려올 때면, ‘별 헤는 밤’을 읊조리는 버릇도 이때 생겼다. 단테의 신곡을 펼쳐들고 고민의 늪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던 경험도 모두 이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갈 때 많은 사람은 학과 선택의 고민을 한다. 적성에 맞는 과는 무엇일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 하지만 나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청계천에서 책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문학을 좋아했다. 문학은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문학을 통해 보는 세계는 내가 꿈꾸고 있는 행복의 무지개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내 삶의 호숫가에도 아름다운 꽃이 필 듯했다.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갔다. 공부도 열심히 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입학 한 그해 가을에 역사가 갑자기 바뀌었다. 철옹성 같은 유신 체제가 무너졌다. 캠퍼스는 군인이 주둔하고 기약 없는 휴교에 들어갔다. 이듬해에 봄에 대학은 문을 열었지만 극심한 혼란이 지속됐다.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는 민주화의 열망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사람들은 무력에 눌려 알고 있던 진실의 실체를 파악하고는 혼란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캠퍼스의 학우들은 매일 거리에서 경찰들과 투석전으로 맞섰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어둠살이 캠퍼스에 번질 때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배로부터 유신의 탄생부터 급속한 성장, 비극적인 종말까지 자세히 들었다. 제3공화국 이전에 자유당 시절도 학생들이 일어나 붕괴시켰다는 선배의 주장은 장엄하게 들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련 교육을 받고 경제개발을 일군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뿐이 몰랐던 나는 점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학교는 군인이 주둔하고 아주 긴 휴교에 들어갔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고교 시절 힘들 때 청계천이 위안을 주었듯이 나는 다시 청계천으로 갔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당시에 청계천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때 청계천에서 ‘사상계’ 잡지를 통해,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그리고 전설처럼 알고 있던 5․16 혁명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잡지더미에서 실체를 알았다. 잡지 ‘사상계’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순간 나의 심장은 뜨거워졌다. 나는 4월호, 5월호,……7월호를 샀다. 없는 6월호를 찾기 위해 청계천을 다 뒤졌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이 서점 저 서점을 헤맸다. 나는 책을 사러 다닌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르쳐주진 않던 역사의 진실을 찾아다녔다.
  책방 구석에 허름하게 버려져 있는 ‘사상계’라는 잡지는 역사의 진실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은 흐르지만 진실은 사멸하지 않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성 정치 세력이 진실을 덮으려고 폐간이라는 강제 수단을 썼지만 구석에서 의연하게 남아 있었다. ‘사상계’는 죽지 않고 우리 가슴에, 우리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사상계’의 문학 세계도 나를 감동시켰다. 소설가 황석영이 잡지 ‘사상계’로 등단했다는 것도 묘한 감동이 있었다. 이청준의 ‘퇴원’도 읽었다. 동인문학상 수상 작품은 읽지 않아도 수상 작가와 작품을 연도별로 외우는 것도 나의 재미였다.   

  내가 잡지를 읽으면서 금단의 구역을 넘나들고 있을 때, 5공화국이 출범했다. 이제 대학생들도 저마다 마음속에는 웅변을 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성향의 노출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때 군에 쫓기듯 갔다. 그리고 다시 찾은 캠퍼스는 평온을 찾은 듯했다. 하지만 캠퍼스는 최루탄 냄새만 나지 않을 뿐이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의 불안은 여전했다. 분노의 가지는 아예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학우들은 공백도 역사이고 침묵도 발언이라며 폭음을 했지만, 그 속에 있는 나는 더욱 고독해졌고 답답해졌다. 
  나는 군에 가기 전에 전투 경찰을 향해 같이 돌을 던지던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대학 후문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민중 문학, 민중시… 하면서, 먹은 술을 다시 게워 낼 때까지 토론을 했다. 첨예한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사랑이나, 눈물 타령만 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며, 강의실에서 조병화 선생님께 대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부총장실로 부르셨다. 그리고 등을 다독거리시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뜨거운 감정은 젊은이다워야 하고, 분출은 지성적이어야 한다. 아니 때로는 그 감정을 숨길 줄도 알고,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 문학은 삶의 흔적이지만, 올곧게 가꾸어야만 격조 높은 향기가 난다. 꼭 현실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글만이 좋은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이 아닐까. 오히려 네가 배척하는 시들도 그 뒤편에는 치열한 삶의 이미지를 불태우고, 마침내 현실을 모두 정화시키고 우리 앞에 나타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당신의 시가 실려 있는 잡지를 주셨다.
  대학에 오면서 늘 창작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답을 못 찾고 있었다. 당시 현대문학 편집장이신 김태준 선생님의 ‘문예창작론’ 수업도 건성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삶에 지쳐 있었다. 병영 생활을 하고 캠퍼스에 돌아왔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시 돌아온 캠퍼스는 전과 많이 달랐다. 대학과 사회는 제5공화국의 덫에 걸려 평온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온 국민들은 프로야구장의 하얀 공이 펜스를 넘어가지만 바라고 있었다. 컬러 TV 덕분에 사회는 더욱 화려함에 취해 있었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던 우리들 하고는 다르게, 후배들은 외향적인 소비문화에만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젊은이는 너나 할 것 없이 대중문화 속으로만 파묻혀 버렸다. 청바지를 즐겨 입던 여학생들도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몸치장을 하는 데만 관심사를 두고 있었다. 난 너무나 달라진 그들의 세계에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자연히 ‘나’를 잃었고,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조병화 선생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나는 다시 강의실에서 진지하게 앉아 있게 되었다. ‘윤동주는 식민지 현실이라는 모순의 시대 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망적인 허무의식에 빠지지 않고,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기 위해 등불을 밝히겠다는 자아의식을 노래했다. 늘 현실 생활과 괴리되어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무기력하게 사는 자신에 대해 자책과 현실적 괴로움을 노래한다.’
  혼자 생각이었지만, 선생님의 수업 내용은 나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혼자서 스스로 만든 현실의 차디찬 벽에 가로막혀 일없이 방황하는 나를 꾸짖기 위해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닐까.
  수업 시간에 시인 윤동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고등학교 때 청계천에서 샀던 시집이 떠올랐다. 특히 ‘별헤는 밤’이라는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맑고 앳된 감각과 구김살 없는 울림이 다시 왔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중략>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서
 
  별을 하나하나 세어보며 고향에서 같이 생활한 친지들과, 그에 얽힌 추억들을 떠올리고 있다. '아름다운 말'이란 궁극적으로 시인으로서의 자신이 투영된 것이다. 별을 세며 시인은 자신이 좋아했던 시인들을 떠올리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사는 시인에게 밤에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리는 벌레 소리는 마치 부끄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과 반성의 소리처럼 들린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자신의 현재가 지나고 희망과 활기를 얻을 수 있다는 다짐을 한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절망이 좀 걷혔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생각했다. 문학이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나쁘다. 문학은 현실을 담는 도구가 아니다. 진정한 문학 정신은 현실의 모순을 제기하고, 그러한 모순을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시킴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문학은 가볍고, 현실을 담은 문학은 고매하다는 편견은 심각한 대중적 오류다.  
  대학 생활에 안정을 찾으면서 다시 청계천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잡지 창간호를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 창간호는 회사가 세상에 처음 내놓으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책이다. 책의 호적부가 되고 속간되어지고 있는 잡지의 근간이 된다. 그 책의 첫 번째를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우월감이 나를 달치게 했다.
  오래된 잡지 창간호는 묘한 매력이 있다. 화려하게 탄생했지만 세상의 그늘로 밀려난 슬픈 운명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중심에 서지 못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내 삶과 비슷했다. 
  잡지를 모으는 일은 책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이 있었다. 생활이 답답하고 피곤하면 서점으로 간다. 책을 만져보고 구경하는 도락(道樂)이 그럴싸하다. 창간호를 사러 고서점(古書店)을 찾는 날은 주머니에 돈도 두둑이 넣고 가지만 전날 좋은 꿈을 꾸어야 한다. 욕심나는 책을 발견하고 돈이 부족해서 못 살 때는 팔리지 않도록 주인 몰래 서점 구석에 깊숙이 감춰놓고 돌아왔다. 뒷날 다시 돈을 모아 가지고 가서 그 책이 그대로 있을 때는 잃어버렸던 귀중품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어렵게 구입한 책은 더욱 애착이 간다. ‘현대문학’창간호(1955년 창간)가 그렇다. 이 책은 대학 다닐 때 구입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속간되고 있는 순수문예 잡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한국 현대 문학의 역사를 대변하는 잡지이다.
  그때 고서점 주인이 책의 가치를 앞세워 비싼 가격으로 나에게 흥정을 해왔다. 나는 돈이 없었으나, 서점 주인과 친분이 있던 관계로 서점 책 정리며 허드렛일로 책 가격의 두 배 가깝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책을 소장하게 되었다.
  조병화선생님 연구실에서 잡지를 선물 받았던 것처럼, 잡지는 나와 선생님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책이기도 했다. 선생님들께서는 기증받는 책이 많으셨다. 그 중에 문예 잡지가 많았다. 선생님들께서는 과월호 잡지를 내게 주셨다.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구걸하듯이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창작과비평’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이 잡지사에 직접 관여하고 계신 최원식 교수님께서 읽어보라고 주셨다. 이 잡지를 통해 진보적인 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학문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읽었다. 당시 ‘창비’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원천이었다. ‘창비’의 필진은 우리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다.
  잡지 읽기는 또 다른 공부였다. 잡지도 물론 학문을 다루고 있지만, 그곳에는 삶이 있고, 현실이 있었다. 학문이 관념적이라면 잡지는 현실적이었다. 강의실은 고답적인 학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불편했다. 하지만 잡지는 현실과의 소통을 추구했다. 그래서 잡지 읽기는 신선함이 있었고, 여유로움이 있었다. 
  젊은 날에 낡고 오래된 잡지가 나를 있게 했다면 지금은 새 책이 나를 있게 했다. 교직에 들어서도 책은 늘 나에게 목마름을 해갈해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것저것 정기 구독을 했다. 그러면서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문예지였다. 대학 때부터 가을이 되면 신문 신춘문예 공고를 오려가지고 다녔다. 정작 글도 못 쓰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병이 자연 치유됐지만 여전히 내면의 호수에는 갈등의 수초가 자라고 있었다. 그 갈등을 해결하는 길이 문예지 정기 구독이었다. 직접 글을 쓸 수 는 없었지만 문예지 신인상 수상작을 읽으면서 꺼지지 않는 창작욕을 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수필 문예지에 글을 보내 나도 등단의 절차를 거쳤다. 기뻤다. 오랜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나도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고 어엿한 작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과거에 선생님들께 잡지를 얻었듯이 나는 내 글이 발표된 글을 아이들에게 준다. 선생님께서 내 마음속에 문학의 씨를 뿌려주셨듯이 나도 아이들에게 잡지를 주면서 그들이 미래에 문학 공부를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지금도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면 먼저 눈으로 흘깃흘깃 책이 얼마나 꽂혀있나 보는 습관이 있다. 어릴 때 책 읽기는 좋아했지만, 우리 집엔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입고만 하는 데도 빠듯하던 시절이었으니 책을 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서 읽은 적이 많다. 그때 친구의 책을 빌려보면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제대로 돌려주지 못해서 설움도 많이 당했다.
  그 설움의 풀이로 모으기 시작한 것이 잡지였다. 어쩌면 잡지를 모으는 것은 아주 하찮은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물질과 향락으로 쏠리는 요즘 책을 모으는 즐거움은 그 혼돈의 생활에서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잡지를 모으게 된 것은 방황이 남긴 열매다. 세상은 점점 가팔라지고 치열한 경쟁 사회는 차갑기만 했다. 나이 먹어가면서 세상을 향한 삿대질도 힘을 잃었다. 다행히 책이 나를 위로했다. 쓸쓸히 책방에 허름하게 있는 잡지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잡지 창간호는 이미 시간을 지나온 과거의 산물이지만, 좌표를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삶의 진리는 여전히 담고 있었다.
  일상의 현상에 허우적대고 또 정신적으로 익사할 것 같은 거대한 도시에서 집으로 돌아와 책으로 장식한 서가에 앉아 있으면 흐트러진 영혼을 다시 추스르게 된다. 당장 읽지 않아도 좋았다. 모아 놓은 잡지는 언젠가 내 손에 들리게 되고 나는 그 잡지를 통해서 위대한 삶을 공급받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책을 모으는 것은 이처럼 그 책을 전부 읽겠다는 미래의 약속이 내재하기 때문에 즐거웠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라는 역사적 공간은 모든 것이 힘들었다. 그 시절 우리는 어두운 하늘 아래 방황하는 젊음을 안고 있었다. 까닭 없이 서러웠고, 많은 차가움을 참고 겨울을 나야했다. 그러면서도 안으로는 뜨거운 생명을 닦으며 밤에도 잠들지 않는 꿈을 꾸었다. 빛바랜 책이고 허름한 책이었지만 그 속에는 세상을 향한 진실이 있었다. 짓밟힌 자유와 버림받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 잡지는 청계천 구석진 곳에서도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이 비단 진리뿐이겠는가. 나의 삶 모두가 늘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터덜거리며 왔다. 그 삶을 함께 한 것이 잡지다. 잡지가 있어 추웠던 한 겨울의 삶도 나를 따뜻하게 했다. 오늘 거친 세상의 숨결이 나를 몰아칠 때도 나는 잡지를 읽으며 영혼을 달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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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 서울특별시장상] 이상미-잡지가 준 삶의 깊이.
 작품명 :
잡지가 준 삶의 깊이
―<르네상스>와 <키노>를 추억하며―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를 아시는가? 80년대에 나왔던, 이정애, 김혜란, 황미나 같은 대작가들이 한창 현역으로 만화를 연재했던 내 기억의 첫 잡지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5평도 안 되는 방 한 칸을 세놓았었다. 지금은 다가구 주택이 아니라면, 일반 가정집의 그렇게 좁은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려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일반 가정집도 안전과 프라이버시로 그러한 밀착형(?) 세를 꺼릴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세입자가 나가면, 주택 입구 정문에 ‘세놓음’ 방(榜) 한 장으로 금세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많은 얼굴들이 아직도 눈앞에 떠오른다. 나쁜 사람 하나 없었다. 엄마 혼자 일을 하는 가난한 집 딸들에게 적어도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한 번 사주지 않고 나간 사람이 없었다…….
  그 중 한 사람, 20대의 아가씨―당시 내겐 언니였다―그 언니가 <르네상스>를 책꽂이 한 가득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출근하면 나는 잠기지 않은 방으로 날마다 들어가 <르네상스>를 읽었다. 또한 그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잡지를 빌려주었다.
  나는 뜻은 모르지만 <르네상스>라는 제호에 무척 끌렸다. 이후 <나나>, <댕기> 등의 후발 순정만화잡지가 등장했지만 그들의 제호는 내 관심 밖이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떠올려 본 적도 없다. 지금의 여성지처럼 두꺼운 잡지 두께와 고딕제호 문양, 점잖은 표지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서도 하얀 바탕에 녹색 꽃모자를 쓴 여자의 일러스트는 <르네상스>라는 잡지의 상징처럼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것이 지금껏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잡지의 모습이다.
  <르네상스>에 실린 만화들도 최고였다. <르네상스>에 연재를 했던 대작가들의 작품만큼 진지한 작품들을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아마 시대의 분위기가 그러한 작품을 낳았을 것이다. 창간년도는 1988년, 막 민주화를 이뤄낸 직후였다. 물론 난 너무 어렸으므로 그런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었다.
  지금의 순정만화시장에서는 꿈도 못 꿀, 프랑스대혁명을 소재로 한 김혜린 작가의 <테르미도르>가 떠오른다. 진지한 SF작품들도 많았다. <라비헴폴리스>와 <1999년생>이 생각난다. <1999년생>의 등장인물들이 하늘을 나는 보드를 타던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뚜렷하다. 지금은 인터넷에 연재를 하는 황미나 작가의 작품은 멋진 드라마들이 많았다. 특히 <안녕, 미스터 블랙>이 기억에 남는다. 복수를 하려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차갑지만 슬퍼서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었던 걸작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복수극처럼 피범벅으로 통쾌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르네상스>의 거의 모든 만화들이 휴먼 드라마 그 자체였다. 순정만화 한 편 한 편 너무나 진지했고, 그 속에서 나는 일찍이 삶을 느꼈다. 그것이 80년대였고 90년대 또한 그러한 느낌이 이어졌다.  

  나는 아마 역사시간에 르네상스의 의미를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중세 암흑시대를 끝낸 자유의 꿈틀임, 해방의 시간……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간성 회복의 문예부흥운동 르네상스. 그때 나는 르네상스라는 네 글자가 반가웠고, 그 뜻을 알고는 빙그레 웃었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잡지 <르네상스>의 그 이름 그리고 그 만화들을 사랑했던 것은 영적인 필연이 아니었나하고. 르네상스가 상징하는 자유와 해방은 내가 삶에 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내가 타고난 자유주의자라서 르네상스에 깊이 빠졌던 것인지, 잡지가 나를 그리 이끌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시간들―잡지를 보던 어린 시절의 시간들이 그 자체로 내겐 소중했다는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불안 없는 최초의 지적인 순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엔 아련한 슬픔마저 있다.
  <르네상스>와의 작별은 이랬다. 그 직장인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사에 나가지도 않았던가 보다. 여러 사람이 찾아와 엄마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 물론 알 길이 없었다. 엄마는 그녀가 가출한 것 같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약 20일 만에 돌아온 그녀는 민폐 끼쳐 죄송했다면서 이사를 준비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녀가 일으킨 작은 소동은 내 마음을 끌었다. 반항하고, 때로 사고도 치며 사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모범생처럼 사는 것보다 매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 중요한 건 그녀가 <르네상스>를 두고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났지만 딱 하루뿐이었다. 다음 날 엄마는 잡지가 지저분하다며 밖에 내다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땐 이미 넝마주이가 주워간 뒤였다…….
  서른이 된 올해, 나는 그때 잡지서 보았던 고전만화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다. 대형 다운로드 사이트에 <1999년생><불새의 늪><테르미도르><안녕 미스터블랙><슈퍼트리오><라비헴폴리스>등을 구할 수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된 작품들로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이들을 추억하는 누군가가 공유해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만화가 그 시절로 자신을 데려다줄 것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추억에 매달린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만화들은 어쩌다 찍은 사진처럼 그땐 그랬지, 하는 정도의 가벼운 추억이 아니다. 다시 찾아 헤매어 볼 정도로 훌륭한 만화들이고 잡지의 모토 또한 그러했다. 검증할 수는 없지만, <르네상스>를 사랑하는 여기 한국의 동시대인들은 모두 휴머니스트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 만큼 잡지가 준 감수성이 예민하고 아름다웠던 까닭이다.
  <르네상스>로 쌓아올린 드라마를 이해하는 감수성, 지적 호기심은 비범한 고전문학들로 다가설 수 있게 하였다. 만약 내가 <르네상스>를 읽는 대신 매일 밖에 나가 고무줄놀이를 했다면 문학책을 읽을 능력도 없었을 것이고, 문학소설들의 제목이―이를테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것들―가진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감지할 재간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직감적으로 위대한 책을 고르는 대신 <꼬마 흡혈귀 시리즈> 따위나 계속 읽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고전의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덕분에 나의 독서는 이미 어렵고 깊은 사색의 지대에 들어섰으므로, 내 중학교시절 때 창간된 난해한 영화잡지 <키노>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그리고 아마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철학처럼 마음먹고 어려운 게 아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 철학에 근접할 정도의 사유를 보여주었던 잡지가 바로 <키노>였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때 그 글들을 다 이해했었을까 의문스럽지만, 기억 속에 당시 나는 키노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서 고개는 90도로 꺾은 채,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사유의 기사들을 한자 한자 쫓았었다. 그렇게 어려운 기사를 읽고 즐거움에 가슴이 부푸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한다면 필시 미쳤거나, 상대하기 어려운 작자라고 매도될 것이다. 그렇다. 사실 나는 상종하기 어려운 작자이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작자인 건 아니다. 유덕화와 장학우, 줄리엣 루이스와 장 클로드 반담을 좋아하던 나는 솔직히 약간 가벼운 경향의 <로드쇼>와<스크린>에도 열광하였다. 잡지들이 나올 즈음 되면 동네 서점에 가서 마치 서점이 지금의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이라도 되듯 그 자리에서 읽어버리는 일을 반복하였다. 돈이 없던 나는 잡지들을 다 훑고 나면 슬며시 그것들을 내려놓고, 마치 다른 책들을 사려는 듯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슬쩍 나가버렸다. 나가면서 서점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워놓고 뭐라고 하지나 않을까 늘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저씨는 서점이 이윽고 폐점할 때까지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하나 사겠지 그런 심정이었을까.
  그렇다. 사실 내가 아예 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장학우나 줄리엣 루이스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으면 나는 큰돈 들여 잡지를 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들이 매달 커버스토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책꽂이에 촘촘히 꽂힌 것은 <로드쇼>나 <스크린>이 아닌 <키노>였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실려 있어서, 혹은 브로마이드를 받기 위해 나는 <키노>를 산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키노>의 기사를 보려고 샀던 것이다. 도저히 앉아서 슥 보고 놓을 수 있는 잡지가 아니었다. 평론에 가까운 그 글들은 그 자체로 배우 브로마이드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끌고 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테오 앙겔로풀로스, 프리츠 랑, 베티블루, 디바, 노스텔지아, 메트로폴리스, 누벨바그, 홍콩 느와르, 네오리얼리즘……영화학과 학생이 아니라면 잘 알 수 없을 이런 엄청나게 낯선 인물들과 단어들은 모두 <키노>에서 알게 된 것이다. <키노>에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매우 훌륭할 것 같은 영화들과 감독들, 그리고 영화이론에 관한 이야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나는 기사를 읽은 후 실제로 소개된 영화를 보기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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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성연경_잡지 Job知

작품명: 잡지? Job知!
 
7시 30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회사 로비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이 의례적으로 방긋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다른 때와는 달리 긴장된 낯빛이 확연하다. 일찌감치 출근길을 서둘러 회사에 하나 둘 도착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몇몇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때 같으면 로비 옆 커피숍에 도넛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있는 직원들 모습이 보일 법도 한데 오늘은 텅 빈채 적막감마저 감돈다.
 
“중국 OO은행의 총경리님과 일행분들을 환영합니다”
로비 정면의 대형 LCD TV가 오늘 우리 회사에 방문할 귀빈들에 대한 환영 인사말을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로 띄워놓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받은 문자메세지에 의하면, 손님들은 이미 7시에 전용기로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것이고, 늦어도 한 시간 후면 회사에 도착할 것이다. 사장님을 비롯한 회사의 임원들은 그 전에 배석하여, 나를 비롯한 10여명의 발표자들의 프리젠테이션을 마지막으로 점검할 예정이다.
 
중국OO은행은 중국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 중 하나로, 은행장을 비롯한 중역들의 우리 회사 방문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결정되었었다. 우리 회사 방문 목적이나 배경은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나 같은 실무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방문자 중에는 중국 서열 몇 위가 있다는 둥, 우리 회사를 방문하고 나서 바로 우리나라의 정치인 누구누구를 만날 것이라는 둥의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는 이야기들이 무성했지만, 이는 그저 우리 회사 임원들 혹은 미국 본사의 업무일 뿐이었다.  

우리 팀의 부장님으로부터, 이 “손님”들을 대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명단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얘기인즉슨, 이 은행이 금융 사업 영역에 대한 한국 사례를 스터디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데, 소비자 마케팅 부분에 대한 사례 발표자로 내가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주제는 정해졌지만 발표 범위나 내용은 순전히 내게 맡겨진다는 것이었고, 발표 제한 시간은 20분이라고 했다. 의당 준비하겠다고는 했지만, 결국 사례의 발굴부터 발표할 내용까지 내가 알아서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데이터 분석이나 시장 조사 결과를 발표하라는 것이라면 모를까, 사실 어디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한 노릇이었고, 고작 20분이라는 시간 제한이 그나마 발표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무실 책상에 노트북 가방을 던져 놓고 둘러보니 한적한 1층 로비와는 달리 이미 많은 직원들이 출근해 있었다. 우리 팀원들과 간단히 눈인사만 나누고, 바삐 오늘의 회의장으로 뛰다시피 갔다.
회의장 옆 대기실에는 이미 오늘 발표자들은 리허설 때 정해진 자기 자리에 모두 앉아 있었다. 회의장에서 임원들의 호출이 이어졌고, 수정해야 될 부분에 대한 언급이 오가고 일부 발표자들은 허겁지겁 자료를 숫자나 페이지 순서를 바꾸기 시작했다. 나도 출력해온 내 발표자료를 다시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기실 바깥 회의장 앞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도착한 것이다. 십여분 후 다시 일순 조용해 지더니, 첫 번째 발표자인 기획실 이사님이 호출되어 나가셨다. 그리고 30여분 후 재무부 상무님이, 그리고 영업부 이사님이… 예정대로라면 내 차례는 점심식사 직전인 11시 30분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시간에 비서실 직원이 들어와 내 차례임을 알렸다!  
 
지난 8년 동안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들어가는 대회의장이지만, 직원이 열어주는 회의장 문이 그렇게 육중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들어가 서자마자, 인사팀 이사님의 나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시작됐고 나는 그제서야 자신감에 찬듯한(!) 표정을 지으며 좌중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직사각형 대형 테이블 정면에는 노신사 서너명이 앉아 있었고,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일행인 듯한 동양인과 서양인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반대편에는 사장님을 비롯한 우리 회사 임원들과 미국 본사에서 나왔을 사람들이 배석해 있었다.
불이 꺼지고, 내가 준비한 자료가 대형 스크린에 띄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2개월을 준비한 20분 분량의 프리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나는 당초 부여 받은 아젠더대로 한국의 금융 상품 성공 사례들을 중심으로 소개를 시작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은행 상품들, 신용카드, 보험, 파생 금융 상품들을 하나씩 소개해 나갔다. 발표가 거의 중반에 이르렀을 즈음, 맞은 편의 한 노신사- 적어도 00d은행 중역 혹은 부은행장급은 분명한 인물- 가 손을 들었다. 질문은 발표를 마친 후 받겠다고 했었지만, 어쨌든 잠시 발표를 멈추었고 그 노신사가 말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이었지만 유창한 영어였다. 요지는, 본인들은 시장 환경이 전혀 다른 한국의 개별적인 금융 상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금융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 즉 구체적인 마케팅 행동에 관련한 것이었다. 노신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내게 물었다. 
“우리는 한국에 금융 상품 개발을 위한 모티브를 얻으러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방문의 핵심입니다. 한국 금융 산업의 철학이나 상품 개발 배경, 새로운 아이디어의 시도 등에 관해 설명해 주십시오.”
 
중국에서 온 손님들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우리 회사 임원들은 낭패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 통역을 통해 이 노신사의 요구 사항을 들었을 미국 본사 임원들도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는 멈추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뒷편의 비서실 직원에게 빔 프로젝터를 꺼달라고 했고, 회의장은 훤히 조명을 밝혔다.
 
“여러분들이 중국에 돌아가시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에피소드 하나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심장 박동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중국 전국시대의 이야기이니까요.”
 
순간 답답하고 크게 의미 없는 숫자들만 몇 시간이나 듣고 있느라 경직되었던 좌중들이 다소  유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님들은 동시 통역기를 고쳐 끼고 있었고, 우리 회사 임원들은 이 친구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더욱 경직되고 있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옛날 중국에 증산군이라는 한 제후가 어느 날 잔치를 베풀어 인근 나라들의 문무대신들까지 초대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음식인 양고기 국물을 쭉 돌리는데, 그만 이웃 국가인 연나라 장군 차례가 되어 이 국물이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장군은 매우 모욕감을 느껴 본국으로 돌아가 왕을 부쳐켜 증산군을 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증산군은 영토를 잃고 쫓기게 됩니다. 결국 이 제후는 막다른 골목에 적군들로 둘러 싸이고 마는데, 어느 젊은 청년 둘이 나타나 목숨을 걸고 싸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후가 물었습니다. 처음 보는 군사들인데 왜 그대들의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느냐고. 그 둘이 말합니다. 둘은 원래 형제인데, 이 형제의 아버지가 옛날 제후가 던져준 찬밥 한덩이 때문에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노라고. 그 아버지의 유언이 만약 제후가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던져 지키라는 것이었고, 이제서야 은혜를 갚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제후가 이야기를 듣고 던진 말은…”
 
이 때 질문을 했던 노신사 옆의 또 다른 신사가 말을 꺼냈다.
“국물 한 그릇에 나라를 잃고, 찬밥 한덩어리에 목숨을 구했구나 라고 한탄했지요.”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노신사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한국 금융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 금융 시장에 대한 정보나 자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여러분들이 굳이 한국에 오셨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미 한국 금융 시장은 개방된지 오래되어 선진국 시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금융 회사들은 원칙을 지키면서 고객들의 아주 사소한 니즈와 요구까지 수용하는 경영 철학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는 중국 신용카드 시장과 중국의 레저용품 시장의 최근 성장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중국의 빈부격차에서 포착할 수 있는 시장기회를 말하면서 동시에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 중인 중국의 주요 성들의 환경 파괴에 대해서도 말했다. 물론 그 어떠한 내용도 내가 준비한 프리젠테이션 자료에는 없던 내용이었고, 따라서 우리 회사에서 리허설을 할 때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들이었다.
 
당초 내게 주어진 시간이 20분이었고, 이어서는 바로 점심식사였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빨리 말했고, 예정보다 약 40분을 넘기고 있을 때 잠시 발표를 멈추고 이즈음에서 발표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제 생각에는…”
맨 중앙에 앉은 은행장님이 중국어로 말씀을 시작했다. 
“이 발표를 1시간 정도 더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심식사는 호텔에서 먹기보다는 배달해서 회의를 계속하면서 먹을 수 있겠지요? 제가 알기로 한국의 비빔밥이 매우 맛있으면서도 간편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결국 미팅은 그로부터도 한 시간 반이나 이어졌다. 계속 쉼 없이 말하고 질문에 답하느라, 내 자리의 생수병은 어느 새 4개를 헤아리고 있었다.
 
“지금 발표하신 분은 전혀 자료에도 없는 그 많은 내용들을 어떻게 다 알고 설명하실 수 있었는지요? 지금 하신 말씀들이 정확하긴 한 겁니까?”  

젊은 중국인 중역이 발표 말미에 물었다. 중국인이 연간 발급 받는 신용카드 숫자나 중국 금융기관들의 규모와 주요 은행들의 지분 구조, 중국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숫자들과 주요 물가 지수들, 중국의 개혁 개방에 긍정적인 정치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정책, 중국 대기 오염의 심각성과 이로 인한 인구 이동 규모들 등 내가 두서 없이 쉼없이 쏟아낸 자료가 도대체 정확하긴 한 것인지, 어떻게 이를 미리 준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답변했다.
“사실 오늘 말씀 드린 내용들은 제가 구독하고 있는 잡지들에서 얻은 내용들입니다.”
다들 뭔가 한대 맞은 표정들이었다.
“여러분들은 IMF나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 혹은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 회사를 통해 훨씬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숫자들을 언제나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종이 속의 숫자들보다는 금융과 산업들의 거시적인 형태들을 말씀드리는 것이 더 객관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실 잡지광이고, 이러한 전문서적들을 통해서 인용하여 말씀 드렸으므로 자료의 신뢰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국 손님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어서 크지 않은, 그러나 나나 이번 회의를 몇 달씩이나 준비했던 우리 회사 배석자들에는 경쾌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회의장을 빠져나온 시각은 정확히 2시. 
30분 발표자가 2시간 30분 만에 대기실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다른 발표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면 질문들을 쏟아냈다.
“네, 그냥 제가 읽은 잡지들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게 이 분들한테 도움이 되는데 계속 물어보시길래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늦은 점심을 대강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한숨 돌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비서실이었다. 오늘 저녁 만찬에 참여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우리 회사 사장님이 그리고 중국 손님들이 원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스스로 잡지광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예닐곱 권의 전문지를 매월 정기적으로 구독한다. 그 중에는 현대나 고전 문학, 환경, 스포츠, 경영/경제, 건축, 금융, 물가에 관련된 것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느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단 기간 내에 학습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이렇게 각 분야의 전문지를 1년 이상 매월 정기구독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스마트폰 시대라고는 하지만, 매월 새로운 주제와 최신 업계 소식들 담아 배송해 오는 책 한권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더욱 크다.
번거롭지만, 내용별로 정리하여 스크랩해 놓고, 책을 복사하여 노트에 붙여 놓기도 하면서 기억하는 내용들은 그저 단순히 읽어 보고 닫아버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가치 그 이상이다.
 
21세기는 전문가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멀티 플레이어 시대이기도 하다. 가장 최신의, 가장 깊이 있는 정보와 취미 생활을 이러한 잡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잡지는 나를 많은 분야와 업무의 전문가로 이끌어주는 Job知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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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김영배_나의 잡지인연
 
 작품명 :
나의 잡지 인연기
                                                                                               
선데이 서울로 시작된 나의 잡지 인연
 
  어린 시절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한글을 알고 동화책을 읽게 되면서 어른들의 칭찬에 뿌듯함을 느껴 주위 사물에 글자만 적혀 있으면 그것이 신문이던 전자기기 설명서이든 그 뜻은 알지 못하면서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무작정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읽을 때가 있다.
  내가 잡지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 즈음이었다. 할머니와 기차를 타고 시골을 내려가면서 누군가가 다 읽지 않고 기차 좌석 주머니에 꽂아 놓은 책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때 역시 할머니가 ‘우리 손주 이런 것도 읽을 줄 알아!’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을 기대한 나는 무작정 꽂혀 있던 책을 들었다. 하지만 그 책의 표지는 내가 그동안 보아오던 곰돌이 등의 그림이 아닌 젊은 여자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그런 모습에 큰 감흥(?)이 없었던 나로서는 평소와 색달랐던 표지를 무시하고 또박또박 발음 내어서 제목을 읽었다.
“써언데이 서울”
나는 큰 목소리로 다 읽고 나서 기대에 찬 눈으로 할머니쪽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들은 반쯤 졸고 계시던 할머니는 거의 빼앗다시피 내가 들고 있던 책을 가져 가시며 말씀하셨다.
“어린애들은 이런 잡지책 보는 거 아니란다.”
왜 보지 말아야 되는지 이유는 듣지 못한 채 할머니의 꾸중섞인 듯한 눈빛을 보고 죄지은 사람 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 마음에 잡지책이라는 것은 내가 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전철 가판대에 보이는 선정적 표지의 잡지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가끔씩 사오시는 여성지를 볼때 마다. ‘저건 잡지책이야. 어린 아이인 내가 보면 안되는 책이야.’를 되뇌이며 호기심을 억누르고 애써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4학년이 될 때까지는 나에게 잡지란 선악과 나무와 같이 호기심이자 금기의 대상이었다.
 
뜻하지 않았던 잡지와의 재회
 
학창 시절을 보낸 아이라면 또래 아이들과 대화에서 뒤처지지 않게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해 될 것들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시절 남자 어린이들에게는 드래곤볼과 슬램덩크가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옆집에 살던 친구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내게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손오공이 천하제일무도대회에서 어떻게 될 것 같아?”
‘손오공?’ 손오공이라면 서유기에서 나오는 주인공이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천하제일 무도대회는 또 뭔가.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자 그 친구는 그 당시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있어야 할 교과서 마냥 가방 속에서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를 꺼내 들었다. 그 당시 아이들보다 유행에 뒤쳐줬던 나로서는 ‘드래곤볼’도 ‘아이큐 점프’라는 것도 나에게는 생소한 것 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지기 싫었던 나는 우리 집에도 ‘아이큐 점프’가 있다며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질문에 아무 말도 못한 채 묵묵히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어린 시절에는 가장 쉽게 하면서도 또한 큰 죄악이었던 거짓말을 내가 했다고 생각하자 안 그래도 약간은 의기양양해 있던 친구는 나를 거짓말쟁이라며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나는 친구의 비아냥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에 들어서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큰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아이큐 점프 사줘~!”
 위인전 이외에는 나에게 책을 사주시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내가 목놓아 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셔서 그 날 바로 나의 손을 잡고 서점에 가서 ‘아이큐 점프’를 사주셨다. 그리고 그것이 돈을 내고 산 잡지와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아이큐 점프’는 격주 간으로 화요일 마다 발행되었고, 난 누구 보다도 빨리 서점으로 뛰어가 샀다. 당시의 아이큐 점프에는 드래곤볼 뿐만 아니라 고행석씨의 ‘마법사 소년 코리’, 박산하씨의 ‘진짜 사나이’, 이충호의 ‘마이 러브’ 등 당대의 유명 국내외의 만화들이 실려 있었고, 거기에 수록된 만화들은 내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날 밤에 모두 빠짐없이 읽었다. 물론 이유는 나보다 먼저 읽고 소식을 전해주는 친구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매일 다음날인 수요일에는 항상 나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서 최신 만화 소식을 들려 주었다.
 하지만 꾸준히 책장 속에 아이큐점프가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3년 즈음에 화제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슬램덩크의 등장’ 덕분이었다. 농구를 소재로 그려진 만화는 당시 ‘마지막 승부’라는 최고의 인기 드라마와 연세대가 이끈 농구대잔치의 인기에 힘입어 ‘슬램덩크’는 당시 10대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최고의 필수 아이템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시 ‘아이큐 점프’만 사 모으던 나로서는 ‘슬램덩크’가 수록된 ‘소년 챔프’의 존재를 늦게서야 알았고, 괜한 자존심 때문인지 ‘아이큐 점프가 그래도 최고다’를 외치며 사실 몰래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앞에서는 ‘소년 챔프’를 애써 외면 했다. 하지만 슬램덩크의 인기 광풍 속에 나 역시도 ‘아이큐 점프’에 관심이 시들해졌고, 94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만화는 더 이상 사주실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와 당시에 도서 대여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만화 잡지 수집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사춘기 시절의 추억- 하이틴 잡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나 역시도 연예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최고의 관심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당시 10대들에게는 두 부류만이 있었을 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부류, 서태지와 아이들을 싫어하는 부류.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부류에 속했고(16년이 지난 아직도 나는 서태지의 팬이다.) 그들의 기사를 보고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하이틴 잡지가 필수품이었다. 사실 초상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연예인들 사진은 책받침의 사진이나 문방구에서 엽서로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서태지의 등장 이후 초상권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pc통신이 막 생겨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사진을 구할 수 있는 곳이란 신문과 잡지 뿐이었다. 하지만 팬들이라면 연예인들의 선명한 사진이 필요했고, 잡지만이 그 욕구를 유일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통로였다. 당시의 하이틴 잡지는 10대들의 관심사인 연예인 기사들 이나 큰 브로마이드 뿐만 아니라 다이어리 같이 실용적인 부록까지 한마디로 당시 우리들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책이었다. 그뿐이랴. 당시 우리에게 하이틴 잡지는 설레임이었다. 당시 휴대폰이 없었던 우리는 독자란에 주소를 적으며 이제는 거의 사멸된 단어가 되어 버린 ‘펜팔 이성 친구’를 만들어 편지를 주고 받았다.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당시의 여학생들이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원태연 시인의 시를 적어가며 좋아하는 구절을 논하곤 했었다. 당시의 펜팔은 지금의 자판기를 두들기면서 쓰는 이메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감성이 있었다. ‘사랑을 쓰려면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전영록의 노랫말처럼 못 쓰는 글씨나마 정성스레 연필로 써가며 조금만 글씨가 삐뚫어질때면 다른 글씨까지 지워나갈까봐 조심스럽게 지우개로 지우곤 했었다. 편지를 쓰다 연필심이 뭉툭해져 다시 깎아 내려갈 때는 로뎅의 조각품마냥 한올 한올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미니 홈피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인터넷이 발달된 시기도 아니니 서로의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순정 만화의 주인공을 상상해 가며 편지지에는 지금처럼 이모티콘이나 스킨이 아닌 반짝이 스티커를 하트 모양으로 붙여가며 빙그레 웃음 짓던 그 시절에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물론 펜팔에는 애틋함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쉬움 또한 있었다. 펜팔을 6개월 간 주고 받던 여학생과 종로 서적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날 그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에는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어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표시로 빨간 장미 한송이를 들고 두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만나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는 그 길에는 여학생이 급한 일이 있어 못 온 것으로 결론 내렸지만 그 이후에 더 이상 오지 않는 답장에 얼마 나지 않는 여드름을 짜내며 설레 였던 펜팔의 추억을 마감 해야만 했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에 나의 연예(演藝)와 연애(戀愛)를 알게 해준 하이틴 잡지는 고3 수험생이 되면서 추억 속의 책갈피로 접어 두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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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정호영_나의특별한잡지이야기

 작품명 :
 나의 특별한 잡지이야기 - 바보, 잡지를 만들다!
 
 지하철로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날마다 출퇴근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친구다. 이 친구는 말이 없는 과묵한 친구지만, 흥미로운 얘깃거리로 시선을 끌고 항상 새로운 정보와 소식들로 나의 지적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박학다식한 친구다. 때로는 지하철에서 맞은 편 사람들과의 어색한 시선을 피할 때도 요긴하고, 남들에게 지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데 좋은 아이템이 되어주기도 한다. 여러모로 쓸모 있는 친구, 사람들은 이 친구를 ‘잡지’라고 부른다. 잡지! 그것이 이 친구의 이름이다.
 내가 요즘 보고 있는 잡지는 ‘월간 HRD’와 ‘시사IN'이다. ‘월간 HRD’은 나의 직무분야와 관련하여 회사에서 정기 구독하는 잡지이고, ‘시사IN'은 사회를 보는 눈높이를 높이라는 직장 상사의 소개로 읽게 된 잡지다. 이런 종류의 잡지를 읽다보면 직장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하나, 사실 평소에 내가 즐겨 보던 스타일의 잡지는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읽을 잡지가 내 본연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기보다는 환경적인 요소들로 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잡지 구독’ 또한 자기계발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월간 HRD’와 ‘시사IN'과 같은 잡지를 처음 접했을 때 어색하기도 했고,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것이 오히려 더 거부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습관을 들이면 괜찮다고 마음먹고 가볍게 읽기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출퇴근 시간에 이 친구들이 없으면 굉장히 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이 친구들이 익숙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 지하철 맞은 편 자리의 여학생 두 명이 함께 잡지를 보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보고 어떤 잡지를 읽는지 궁금해진 나는 잡지 제목을 유심히 보았다.
 ‘PAPER?’
 잡지 표지에는 낯익은 서체로 큼지막하게 ‘PAPER’가 써져 있었다. 그 순간 아련하게 떠오른 학창시절의 기억이란...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3월의 어느 날, 절친했던 친구 C군이 내 품에 잡지를 안겨주며 말했다.
 “이거 요즘 내가 보고 있는 잡지인데, 너도 읽어 보면 좋아하게 될 거야.”
 “페이퍼?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잡지냐? 이제 고3인데... 에휴~”
 갑작스럽게 잡지를 넘겨받은 내가 친구에게 한 소리를 했지만, 결국 C군의 말대로 나는 ‘페이퍼’라는 잡지를 좋아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당시에도 기성 잡지와 하이틴 잡지들이 많았지만, 우리가 소통하고 감성을 공감할 수 있는 잡지는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처음 봤던 ‘페이퍼’는 기성 잡지와는 다르게 신선함이 있었고, 하이틴 잡지와는 다르게 무게감이 있었으며, 자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적절한 절제의 미가 돋보인 잡지였다. 참신한 소재에 독특한 구성의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잘 여문 사과를 한 입 가득 베어 먹는 느낌이랄까? 그만큼 기획자와 편집자, 작가들의 열정이 잡지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고, 독자가 그 열정을 바로 매력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잡지였다. 후에도 ‘페이퍼’는 다수의 마니아를 확보하였고, 마니아들 사이에서 작가들의 인기도 대단했었던 걸 보면 비단 나만이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으리라. 빌려 본 ‘페이퍼’를 친구에게 돌려주면서, 나는 멋쩍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잘 읽었다. 역시 넌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나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런 잡지에 글을 연재했으면 하는 욕심도 생기더라.”
 “그래서 말인데...” 
 친구 C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에게 동인지 개념의 아마추어 잡지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했다. ‘페이퍼’처럼 다양한 문화 장르를 아우르면서 뜨거운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잡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선뜻 친구의 손을 잡기에 고민되는 부분이 있었다. 대학 진학이라는 중요한 시점에서 대한민국 고3이라는 무거운 짐과 바보 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이 일을 어떤 친구가 뜻을 함께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를 등지고 C군이 나지막이 던진 한마디,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할 지도 몰라.”
 C군의 결정적인 말 한 마디에 나는 평생의 마지막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이 프로젝트에 기꺼이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뜻이 맞는 동인지 멤버를 찾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 만화를 잘 그리고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독설가 K군, 록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헤비메탈 소년 L군, 풍물패 동아리에서 장구를 치던 풍물꾼 H군, 동인지 창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학청년 C군, 그리고 시를 좋아하고 즐겨 썼던 나...
 이렇게 모인 다섯 친구는 그해 봄, 마침내 아마추어 잡지 ‘’을 창간했다. 잡지명을 두고 어떤 친구는 ‘돌’이라 부르고, 어떤 친구는 ‘달’이라고 불렀는데, ‘’(아래아)의 발음이 ‘ㅏ’와 ‘ㅗ’의 중간음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돌’과 ‘달’의 단어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주었던 것이다. 거기에 ‘돌’은 단단한 우정을, ‘달’은 순수한 호기심-인간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을 상징하는 대유적인 의미-을 동시에 상징했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한 글자에 담을 수 있었다. ‘’은 우리들만이 소통할 수 있는 단어이자, 우리들만의 잡지였다. 창간호가 나온 날, 잡지 한 권씩 들고 학교 매점에서 음료수로 축배를 들던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창간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지만, 더 인상에 남는 건 서투르고 어설펐던 창간호의 표지였다. 연두색 장판과 같은 배경에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달에 도달하려는 그림이 들어갔는데, 초보적인 수준과 그 순수한 발상에 실소가 저절로 나온다. 그렇게 탄생한 ‘’은 격주로 발행했고, 수시로 기획회의와 집필회의를 가졌다. 원고 마감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벌금을 내자는 등, 인쇄를 맡기는 일은 돌아가면서 하자는 등 우리들만의 규칙도 하나씩 생겨갔다. 원고가 나오면 편집은 컴퓨터를 제일 잘 다뤘던 H군의 몫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임에도 아무 불평 없이 열심히 편집 작업을 해주었다.  

 모두가 기획자이자 편집자이자 작가였던 우리 5인방은 각자가 관심이 있던 분야를 대상으로 자신만의 글을 기고했고, 나는 주로 시와 생활에 대한 칼럼을 연재했다. ‘’을 발행하면서 적지 않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나의 경우, ‘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반 여학생을 평소에 짝사랑해왔던 터라 ‘여름花’, ‘여름星’ 등의 제목으로 그 여학생을 연모하는 시를 연달아 기고했었는데, 보다 못한 C군이 그 여학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내 시에 대한 답시를 청탁했다가 거절당했던 일은 ‘’의 역사상 최고의 굴욕으로 남아있다. 또 한번은 잡지를 인쇄할 돈이 없어 유일하게 집에 프린터기가 있던 H군의 집에 가서 A4로 인쇄한 후, 손수 제본을 하다가 종이에 손가락을 크게 베었던 암울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보람과 자부심이 생겼던 일도 있었다. ‘돌’을 처음 발행했을 때 주변의 친구들은 조소 섞인 웃음을 보냈지만, 친구들 사이에 ‘’이 소문이 나면서 구독을 희망한 친구들이 생겼고, 자신이 쓴 글을 싣고 싶다며 직접 글을 보여주던 친구도 있었다. 그 주에 새로운 호가 나오면 우리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슈가 되기도 했다. 우리의 동인지가 주변의 관심을 받자, 더 잘해보자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면 압박감과 긴장감이 들기도 했다. 잡지에 대해 잘 몰랐던 초보들이었지만, 잡지에 대한 열정은 생생한 잡지 제작 현장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원고 마감일에 대한 압박에 고3 스트레스가 더해지면서 ‘’은 6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이 되고 말았다.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뭔가를 해내라. 당신은 열정이 있었던가?’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바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진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어야 할 그 시기에 한눈을 팔았다고 하면 그것은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부모님과 선생님께서 아셨다면 꾸지람을 들었어야 할 일이었기에... 하지만그 시절에 바보 같았어도 뭔가를 해냈고, 열정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열정의 산물로 아직도 내 서랍장을 열면 ‘’의 창간호부터 마지막 호까지 보물처럼 남아있지 않은가? 나이를 먹어가고 바쁜 생활에 쫓기면서 현실에 조금도 역행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그렇다고 열정을 잃어가는 것까지도 습관이 되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 시절의 열정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열정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길들여지지는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본 ‘페이퍼’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여전히 나에게 그때처럼 뭔가를 해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그 시절 ‘페이퍼’를 처음 알려준 C군과 ‘’을 통해 뜨거운 감성을 공유했던 친구들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그들도 나처럼 가끔은 그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할 때가 있겠지. 오늘은 퇴근하는 길에 서점에 들러 ‘페이퍼’를 사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안는 것처럼 가슴에 꼭 품고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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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사치스러운 저축
 
이순옥 
 
 하늘은 요즈음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만 같다.
아니면 지천명의 문턱에 들어 선 나처럼 갱년기 증상을 앓는 것일까.
걸핏하면 소나기에 폭염에 갱년기 우울을 겪는 나처럼 들쭉날쭉한 나날의 연속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민센터에서 실시한다던 건강검진까지 놓치고 나니 평소에도 좋지 않던 몸이 더 삐걱거린다.
‘다음 기회엔 꼭 건강검진을 받아 봐야지’ 생각으로 다짐을 하던 차에 마침 딸아이가 다니는 회사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에 사원 가족들도 저렴하게 해 준다는 말을 듣고 딸아이와 함께 지정해준 병원엘 갔다.
 사회가 갈수록 노령화가 되어간다는 것은 병원에 가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마음에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요즘 한눈에도 직장인 아닌 사람들이 건강검진을 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두 세 시간 걸린다는 건강검진이지만 건강을 위해서라면 시간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병원에 가면 누구나 긴장하게 마련이다.
아픈 사람이거나 보호자이거나 기다린다는 것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럴 때 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속으로 생각하며 둘러보니 오오! 이게 웬일인가 꼼꼼하게 비치되어 있는 책들이 가지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한 권의 책을 골라잡으려는데 아니 저 책은?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가지런히 꽂힌 책 옆에 한 권 떨어져있는 책 한권 샘터였다.
나는 손길을 멈추고 누군가 읽다 두고 간 샘터를 집어 들었다.
이 책이 아직도 발간이 되어 나오는구나싶어 반가움과 함께 묘한 감격이 넘쳐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까 취미가 독서라고 했다가 담임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있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고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친구 같은, 스승 같은 존재라고.  

그땐 당연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때만 해도 책은 귀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었기에 책을 사 본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내겐 책을 사 본다는 것은 사치였으니 말이다.
 첩첩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라 도서관이 있다 해도 빌려보는 일도 수월찮았고 ‘보물섬’이나 ‘소년중앙’ 같은 책들도 여러 손을 거쳐서야 겨우 볼 수 있었을 때였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준책이 ‘걸리버 여행기’와  ‘소공자’ ‘소공녀’였다. 읽고 또 읽고 책장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덤으로 선물해주신 ‘소년중앙’ 일 년치 구독은 내게 잊을 수 없는 행복과, 인생에 있어서 책에 대한 크나큰 동기부여를 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어디서나 언제나 무조건 읽기의 습성은 그 시절에 붙은 재미였는데 사는 동안에 근성으로 아주 굳혀져서 오늘을 풍요롭게 하는 부의 근본이 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던가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초등 시절과는 영 딴판으로 책이 넘쳐났다. 아니 읽을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읽어야 할까 고민부터 해야 했다.
 빌려보고 또 빌려보고 읽고 또 읽었다.
한번 맛을 들이고 나니 끊임없는 갈증이 밤낮으로 나를 책만 붙들고 있게 만들었다.
공부 시간에는 물론이고 남들은 시험공부 하느라 바쁜데 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심지어 40분쯤 걸리는 길을 자전거로 통학을 했는데 자전거 위에서까지 읽었으니 내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신통하다며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책 저 책을 읽다보니 한동안 만화 속으로 엄청 빠져들었다.
가방에 책 대신 만화책을 가득 넣어 다녔으니 말이다.
그러다 한 번은 선생님께 걸려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
 ‘독서 왕’에 뽑혀 상과 장학금까지 받은 내가 만화책에 빠져 공부를 등한시 했으니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담임선생님한테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만화책 보는 것을 접을 수 있었던 하얀 웃음 같은 추억이 스쳐지나간다.
 
 지금이나 어릴 때나 내게 가난이란 하나의 기다란 콤플렉스로 따라 붙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행복은 돈으로 사지 않는다.’ ‘가난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라던가 등등의 많은 말로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지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극복하기 쉽지 않은 것이 가난인 것 같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작가의 길을 꿈을 이뤄보겠다는 야무진 내 꿈을 가난은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가난은 그 센 힘으로 나를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인 대구 여자상업고등학교에 데려다 놓았고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 생뚱한 공부를 하기 싫은 내게 자유와 방종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 시절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도 수두룩했기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픔을 부모님께 편하게 말씀드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실업계도 감지덕지다 하고 생각하려했지만 주산을 튕겨 숫자를 배우는 것은 정말이지 죽고 싶을 만큼이나 내 체질에 맞질 않았다.
 주산, 부기, 타자란 말은 내게 너무나 생소했고 급우들을 따라잡지도 못하고 뒤처지기만 한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자연히 공부와 멀어져갔고 그렇다고 나쁜 길로도 빠져들 수 없었던 나는 책을 들고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너무 무지했고 무능했다.
가난하다는 생각에 몰두해서 길을 찾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용기도 없었다.
그땐 야간학교가 있었으니 야간 학교로 돌리고 낮엔 학원엘 갔으면 대학에 진학 할 수도 있었는데 난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난한 부모님만 원망하고 처지만 비관했다.
갈 수 있는 데라곤 도서관 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도 마음껏 공짜로 책을 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박혀 난 프로이드를 만나 정신세계에 탐닉했으며 세계의 철학자들과 깊은 정신의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갖은 사연을 안은 연재소설에 심취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인생에 있어서 꼭 공부가 전부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감히 큰 소리로 말하곤 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 여식 하나를 낳아 키우면서 늘 하는 말이 ‘인생에서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때를 놓치면 하기 힘든 것이 공부다. 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곡선도 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는 용기가 늘 필요하다’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도서관에서 만난 많은 책들 중에서 나의 손을 잡아 길을 열어 준 책 한 권이 있었으니 ‘샘터’라는 잡지 한 권이었다.
도서관을 배회하면서 책에 미쳐있던 내게 우연찮게 눈에 띈 작은책으로 인해 내 인생의 조그마한 반환점을 삼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난 지인들과 샘터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누곤 했는데 그 시절 획기적으로 내 싱그러운 십대를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에너지를 부여해준 고마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끼리 모여 의견을 나누면서 행복의 길을 찾자’를 모티브로 언제나 편하게 가지고 다니며 볼 수 있도록 포켓 크기로 펴낸 이 책은 우리말 찾기에 앞장섰으며, 최인호의 가족과 법정스님의 수필이 실렸었다.
특히 근로청소년의 수기는 방황하던 내게 갈 길을 제시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교통비를 아껴서 다달이 ‘샘터’를 사 보면서 차츰차츰 비관적인 생각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돈을 아껴 모아서 스스로 사 본 책 샘터, 그래서 더 소중한 책이었다.
 시를 음미하며 숨 쉬는 일상 속에 녹아나는 삶을 느끼면서 내 마음속에 조금씩 문학의 꿈을 키워 나오며 근면하며 부지런한 삶을 배운 길잡이기도 했다.
그것은 순전히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니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가를 보여준 희망이었다.
나는 샘터를 통해 그렇게 싫던 주산을 다시 잡고 부기를 익히고 부지런히 타자를 치면서 학업으로 돌아갔다.
 
 책과 나
책과 떨어진 책을 떼어 놓은 내 삶은 얼마나 황폐할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교통비를 아껴서, 생활비를 아껴서 그렇게 사 본 한 권 한 권씩 불어나는 책은 이사할 때마다 크나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선물로 받은 책이라면 더욱 더 소중히 간직할 수밖에 없으니 가난한 터전에 책은 남편 말을 빌자면 애물단지다.
가난한 부모, 가난한 남편. 문학을 알고 예술을 아는 남편은 연애 할 때만 멋있었다. 생활은 멋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었고 가지지 못한 자의 설움은 결혼을 했어도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사업에 맛을 들인 남편은 따분한 직장생활을 견디지 못했고, 맺고 끊는 것이 부족한 남편은 늘 사기 당하기 일쑤였다.
힘들게 마련한 터전을 날리고 가구에 붉은 딱지가 붙으면 또 이사를 가고 전세, 심지어 셋방을 전전할 때는 책은 늘 구박덩어리였다.
그러나 난 안다.
 그것이 내 삶의 근원이요, 내 삶의 희망인 것을.
결코 버릴 수 없는 내 유일한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끌고 다니던 보배로운 나의 책들을 지난해에 나만의 자그마한 서재를 꾸며 정리해 놓았다.
신문지로 도배한 서재지만 그 방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손때가 묻은 책들을 보노라면 살아 온 세월이 고스란히 그려져서 때론 눈물이 나기도 한다.
가난은 지긋지긋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내 인생의 기나긴 파렴치한 같은 존재지만 실은 난 가난한 자가 아닌 실로 부요한 자가 틀림없다.
 
 책이 넘쳐난다.
월간지, 계간지 다달이 늘어나는 책을 이제 수용할 수가 없어서 조금은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직도 남의 집을 방문하면 책장부터 뒤져서 읽고 싶은 책은 빌리기도 하고 얻어오기도 한다. 한번은 어느 잡지사를 방문했는데 마음껏 가지고 가라해서 박스에 넣어 포장했더니 어찌 가져 가냐면서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웃었다.
한번은 치과에 갔다가 읽고 있던 책을 내 것인 줄 알고 들고 나온 적도 있을 만큼 난 책에 순간 몰입하고 만다.
책은 그렇게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이며 넘치는 사치품이 되었다.
내 가방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책 한권은 늘 들어있다.
 
 우리는 애써 저축을 하려고 애를 쓰며 산다. 

저축이라고 하면 먼저는 가장 필수적인 돈을 생각하고 돈을 저축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삶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축할 수 있는 꺼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평생 하고 사는 말을 좋은 말로 저축하면 존경으로 풍요를 얻고 나처럼 책 읽는 취미를 저축하면 재능을 얻고 그 재능으로 부요한 사치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샘터’라는 책이 가져다 준 내 삶의 부요한 사치는 가난한 내 삶에 큰 저축을 가르쳐주었다.
성실을 저축하고 열심을 저축하고 희망을 저축하는 법, 그리고 꿈을 저축하고 책을 통해 온갖 지혜와 지식을 저축하는 법을.
나는 비록 돈을 저축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해 가난한 사람이지만 책을 통해 무한한 것들을 저축해 온 나는 부자 중에 부자요 으뜸 부자이다.
모처럼 만난 ‘샘터’를 펼쳐들고 타임머신 여행을 한 오묘한 오후였다.
 
 이 모양 저 모양, 이런 사연 저런 사연을 안고 내게 찾아온 많은 모든 종류의 책들이 어느 한 권 소중하지 않을까만 그 중 또 특별한 책이 있다.
 누구의 손길을 통해 내 손에 전해졌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지만 10여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꾸준히 배달되어 오는 ‘시 하늘’이라는 작은 책이다.
받아드는 그 순간 평생구독 해 버린 책. 철없던 시절 꿈꾸어 왔던 문학소녀의 가슴으로 돌아가 아직도 문학을 꿈꾸게 하는 책이다.
여행할 때는 길동무로, 차 한 잔의 여유로, 음식을 할 때는 요리재료가 되고, 심지어는 화장실에선 상념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소중해서일까 어느 곳에나 있다. 남들 눈엔 그저 흔한 시가 적힌 작은 책에 불과 하겠지만.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마친 딸아이가 고3 시절에 입시를 얼마 앞두고 몹시 고민에 빠졌었다.
난 딸아이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가 시인이 되었노라고.
배운 것 없고 많이 모자라지만 꿈을 성실함과 희망을 버무려 저축하다보면 언젠가 그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리고 우리가 살아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저축할 수 있는 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아이는 어머니의 취미를 저축해서 무한히 퍼 올려 새물처럼 사용하는 어머니의 글을 좋아해 준다.
딸아이도 열심히 성실함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저축을 한다.
아마도 딸아이 인생에 있어 중년의 문턱쯤에선 커다란 샘터가 마련되리라.
 
 나의 샘터는 이제부터 새 물을 길러 올리는 새 근원이 될 것이다.
그간 저축해 온 잡지들의 지혜를 모아 샘으로 저축했으니 마음껏 퍼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나래를 펴고 이륙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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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김현숙-나의 고마운 인연 잡지
 
 작품명 :
 나의 고마운 인연, 잡지
 
1.
잡지에 대해 처음으로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 날의 풍경은 아직도 선명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젠 손가락으로 햇수를 꼽기도 힘들게 된 10년도 훌쩍 넘긴 중학교 때의 일인데도 말이다. 평소 소설을 즐겨보던 나한테 ‘잡지’라는 건 어머니나 숙모, 혹은 성숙한 사촌 언니들이 즐겨 보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보이는 건 온통 아직 접해보지 못한 세계의 모르는 용어일 뿐이고 화장이니 살림이니 하는 주제는 어린 내게 영 재미없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도 운명처럼 ‘잡지’가 살포시 마음 속 문을 두드린 일이 찾아왔다. 바람에 벚꽃들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던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새 학기를 맞이하여 의욕도 돋울 겸 뭐 재미있는 책들이 없을까 싶어 시내에 있는 큰 서점으로 여느 때처럼 마실을 나가게 되었다. 소설 코너를 한참 뒤적거리며 살펴보다 흥미를 잃은 나는 평소 쳐다보지도 않던 잡지 코너 앞을 우연히 서성이게 되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충대충 표지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유독 눈길을 끄는 한 잡지가 있었으니, 바로 그 잡지가 나와 잡지와의 첫 인연을 열어준 <KiKi>였다.
겉표지부터 여타 잡지들과는 다르게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상큼한 모델이라 친근감부터 먼저 생겼고 표지를 채운 글자 폰트도 깜찍하고 색색깔로 예쁘게 꾸며져 있어 어린 마음을 동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창간호라는 글자와 창간 선물이 적힌 종이는 나로 하여금 얼른 잡지의 첫 장을 넘겨보게 만들었다. 우와.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어렵고 재미없고 어른들의 세계라고만 생각하고 멀리했던 잡지의 내용은 그 곳엔 전혀 없었다. 중학교를 다니는 내게도 충분히 흥미롭고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서점에서 내용들을 읽다 그 자리에서 다 소화하기 힘들겠단 생각이 든 나는 부모님께 책을 사라고 받은 용돈을 결국 <kiki> 창간호를 사는 데 고스란히 쓰게 되었다. 잡지를 부모님 몰래 숨겨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날 밤을 새어가며 잡지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땐 이미 그 잡지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있었다. 그동안 잡지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 제대로 깨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을 공략한 패션잡지의 탄생을 함께 지켜보게 되어 기쁜 날이기도 했다. <KiKi>는 그렇게 창간호부터 매달 챙겨보게 된 나의 첫 잡지가 되었다.
학창시절의 8할은 그 잡지의 도움으로 이겨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그 잡지에서 얻은 정보들을 일상생활에 활용해나갔다. 그때그때 소개되는 옷이나 소품들을 미리 사서 친구들에게 유행을 전파하기도 했고 중간고사 대비책들을 따라 하며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생활을 소개해주는 기사를 읽으며 먼 훗날 나의 대학생활을 그려보기도 했고 잡지에서 소개해주는 영화나 소설 들을 찾아서 보기도 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그렇게 얻는 정보들이 끼치는 영향력을 실로 대단했다. 내게는 잡지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을 친구들에게 해주며 얻은 ‘만물박사’란 별명도 있었다. 처음에 잡지를 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던 부모님들도 내가 잡지를 잘 활용하고 있다는 걸 아시고는 매달 잡지를 사 모으는 것을 눈감아주셨다.  

그러나 <kiki>는 나와의 인연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폐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 학창시절을 제대로 책임져 준 잡지가 떠나가는 걸 보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그 잡지의 창간과 함께 잡지의 전속모델을 뽑았었는데 그 모델이 바로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 ‘신민아’이다. 그때는 본명 ‘양민아’로 매달 <kiki> 기사 속 여러 가지 화보로 만나보곤 했는데 나와 나이가 같아 유독 정이 가던 모델이었다. 아직도 브라운관에서 신민아를 보게 되면 잡지 <kiki> 생각이 간절해지곤 한다.
 
2.
중, 고등학교를 그렇게 보내고 대학교를 입학하면서 만난 잡지계의 대표적 친구는 <코스모걸>과 <세븐틴>이었다. 당시 못난 열등감과 헛된 욕심으로 입학한 대학이 맘에 안 들었던 나는 반수를 결심했었다. 신입생들의 설렘과 흥분이 공기마냥 교정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3월, 정작 내 마음엔 꽃샘추위만 강하게 불어 닥쳤다. 결국 난 따뜻한 봄이 얼굴을 내밀기도 전에 1년 휴학계를 과사에 제출하고 다시는 이 학교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반수생활을 시작했다. 꼴에 자존심이라고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감을 드리지 않기 위해 독학반수를 시작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난 친구들의 풋풋한 대학 로맨스 이야기들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외면하고 골방에 홀로 박혀 읽히지도 않는 책을 앞에 두고 외로움과 자격지심, 그리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괴감과 수없이도 싸워야 했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게 바로 <세븐틴>과 <코스모걸>이었다.
이 두 잡지는 부록으로 독자를 현혹하고는 정작 잡지의 내용은 광고로만 꽉 채워진 채 기사는 부실한 여타의 것들과는 기본이 달라던 것 같다. 일상, 더 나아가 인생에까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과 조언들이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꽉꽉 들어차 있어 매달 이 두 잡지를 만나는 것이 힘든 수험생활 중 유일하게 설레고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나는 이 두 잡지를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좋은 내용은 일일이 스크랩해서 스크랩북에 각각의 섹션에 나눠 옮겨 넣기도 했다. 그리고 잡지를 보고 생각했던 점들을 직접 손글씨로 독자엽서를 꾸며 잡지사에 보내기도 했고 잡지 속 독자들이 참여하는 코너에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가며 참여하기도 했다.  잡지에 대한 내 순수한 애정과 열정이 통했던 것일까, 유독 내 엽서와 내 사연이 자주 뽑혀 잡지에 종종 실리곤 했다.  

수험생활에 지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던 나는 이런 조그만 성과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갈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우쭐해지기도 하고 내 이름과 아이디가 박힌 내 글이 잡지에 실린 걸 한참이나 들여다보기도 했다. 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서점으로 끌고 가 내 사연이 실린 페이지를 직접 펼쳐 보여주기도 했었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하며 잡지에 글이 실리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냐며 나를 칭찬해주기에 바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칭찬에 목이 말랐었나 싶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지만 먼저 웃음부터 배시시 묻어나오는 흐뭇한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스스로가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던 독학반수 시절, 나의 어깨를 당당하게 세워 준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잡지였던 것이다. 잡지 속에 적힌 글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미래의 당당한 나를 꿈꿨으며 잡지 속에 실린 나의 글을 보며 가슴 속을 자신감과 희망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잡지도 역시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둘 다 폐간이 되었던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헤어질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많이 컸다. 스크랩 해 둔 기사들을 가끔 다시 보다보면 이 두 잡지가 유독 그리워진다.  
 
3.
대학교 2학년, 영화 <달콤한 인생>에 빠지게 되면서 접하게 된 영화잡지는 지금까지 내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백수로 지내고 있는 지금도 내 꿈을 정확히 몰라 방황하고는 있지만 언젠가 닿게 될 그 꿈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영화와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까지 만나게 된 온갖 잡지들은 10권이 넘는 스크랩북을 만들면서 다 정리하고 아쉽게 폐지상으로 떠나보냈지만 영화잡지들만큼은 한권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져가며 과월호들을 구입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눈 앞의 책장에는 영화잡지들이 층층마다 한가득 꽂혀있다. 몇 년에 걸쳐 모았고 한권 한권 추억이 새겨진 잡지들이기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영화 잡지를 보고 알게 된 영화 감상문 공모전에서 당선이 되어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경험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잡지를 통해 참석한 강연에서 존경하는 감독님께 마음이 담긴 편지를 건네 드릴 수 있었다. 또한 인생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게 해 준 영화를 알게 해 주었고 영화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면서 숱하게 만난 고난의 순간마다 영화 잡지의 기사들을 읽으며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었다. 평소 내 미래, 내 꿈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에게 털어놓는 일을 워낙 거북스러워하는지라 그 누구에게도 내 고민을 제대로 말할 수 없었고, 해결책을 제시해 달라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내게 영화 잡지는 고민 해결소이자 멘토나 다름없었다. 그 안에서 다뤄지는 정보나 기사들이 따뜻한 조언처럼 들리기도 했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나 질책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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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신예라-잡지를 추천합니다.
 작품명 :
잡지를 추천합니다.
                                                                                               
― 잡지로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키워가는 한 사람의 잡지 추천하는 이야기.
 
 
미장원, 병원 대기시간, 은행, 커피 전문점 한 구석의 책꽂이, 서점 한 모퉁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뭘까요?
바로 잡지입니다.
 
미장원에서 사람들은 파마를 하기 위해 머리를 돌돌 말고 열기구 밑에서 2~3시간을 기다립니다. 기구 밑에 앉아 있으면 미용사들은 마실 것과 함께 잡지를 한권 가져다줍니다. 병원에 가면 접수를 하고 수많은 환자들 뒤 자신의 진료 순서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동안 잡지를 펼쳐듭니다. 은행에서는 순번표를 뽑아들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옆에 진열된 잡지를 펼쳐봅니다. 카페에서는 어떨까요? 커피를 마시며 친구들과 한참 수다를 떨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때, 옆의 책꽂이에서 잡지 한권을 꺼내 같이 읽다보면 다시 이야기가 꽃을 핍니다. 서점 한 구석 잡지코너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각종분야의 견본품 잡지를 읽으면서 책을 구경하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잡지”는 다른 서적보다 우리 생활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잡지가 우리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정작 잡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잡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TV나 영화, 우리 주변 사람들이 잡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죠.
사실 그 동안 잡지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만은 아니었습니다.
TV 드라마에는 남학생들이 학교에서 야한 잡지를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켜서 혼나는 장면이 많이 나오죠. 「여우야 뭐하니」라는 드라마를 아시나요? 드라마 속 여주인공 성인잡지 ‘쎄씨봉’의 기자 고병희는 자신의 직업을 당당히 밝히지 못합니다.
드라마 속 뿐 아니라 우리 실제 생활 속에서도 잡지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죠. 그 속에서 잡지를 읽는 사람을 보면 ‘책은 안 읽고 딴 짓하면서 놀고 있군’ 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고급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성공한 커리어 우먼, 모델이나 영화배우와 같은 스타들만이 읽을 거라 느껴지는 잡지들도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로 많이 나오는 잡지들이 그렇죠. 영화 「약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드라마 「스타일」속의 악명높은 에디터들을 화면에서 보고 있으면 그들이 만드는 패션 잡지들은 평범한 우리가 읽기에는 굉장히 멀게 느껴지죠. 그 잡지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당당하고 깐깐한 사람들의 전유물일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잡지부록 때문에 잡지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록 때문에 같은 잡지를 몇 권씩 사서 부록은 챙기고 잡지는 버리거나 아예 서점에 두고 오는 사람들도 있죠.
물론 부록은 잡지를 읽으면서 함께 써보면 좋은 화장품, 생필품 등을 소개하는 것으로 잡지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록에만 눈이 멀어 잡지의 내용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또 모든 잡지에는 진지하게 읽을 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죠. 그들은 잡지를 “눈요기”로만 생각하고 광고나 예쁜 사진들만 보면서 책장을 빨리 넘기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이렇게 잡지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생각되고 있고 그저 하나의 오락거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쉽게 접할 수 있고 많이 이야기 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이 잡지의 다일까요? 우리가 잡지라는 존재의 아주 일부분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잡지의 영역이 얼마나 다양한지, 다른 어떤 책도 줄 수 없는 잡지의 특별한 점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고,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게 이끌어 주는 잡지.
당신에게 잡지를 추천합니다.  
 
우선 제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접한 잡지는 어머니께서 가끔 사 오시는 주부 잡지였습니다.
그 잡지는 월간 잡지였는데 어머니께서 잡지를 사 오시면 어머니가 잡지를 다 읽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받아서 읽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 하고 싶을 때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를 따라서 호기심에 잡지를 읽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계속 읽다보니 재미있는 것입니다. 다음 달 잡지사는 날이 기다려지고, 어머니께서 잡지를 구입하지 않은 달은 서운하기까지 하였죠.
그 시절 잡지에서 읽었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잡지 독자들의 집 자랑 기사들이었습니다. 아이들 방 가구 배치, 주방 수납 활용법, 냉장고 정리 노하우, 거실 꾸미기, 화장실 정리…… 아름다운 집의 사진을 보는 것은 TV 만화보는 것 못지않게 흥미로웠죠. 사진 옆에는 집 주인이 꾸민 방을 설명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집 주인의 가구배치를 어떻게 하였고, 2층 침대를 이용해서 공간을 활용했으며, 자투리 공간에 수납장을 짜 맞추어 좁은 집에 수납공간을 만들었다는 설명을 읽으며 창의적인 그들의 생각에 박수를 치고는 하였습니다. 게다가 주부들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가구들, 인테리어 소품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방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잡지를 보면서 상상 속에서 나만의 집과 방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교복을 입는 시기, 중·고등학생 때는 그 당시 다른 또래 여학생들처럼 아이돌 잡지를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이 나오는 달에는 그 잡지를 사려고 모아둔 용돈을 털어놓았습니다. 인기가 많은 가수의 사진이 실리는 달은 치열했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등교하기 전에 문구점에 들러 잡지를 사야 했으니까요. 늦게 가면 잡지가 다 팔리고 없을 수도 있었거든요.
그렇게 구입한 잡지는 반에서 돌려보곤 하였습니다. 사진을 잘라서 필통에 붙이고, 코팅을 해서 가지고 다녔습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이 끝난 날에는 만화잡지 「윙크」,「파티」를 책방에서 빌려 읽었죠. 만화책을 빌려 읽을 수도 있지만, 만화잡지에는 연재되는 수편의 만화를 고루 읽을 수 있어서 좋았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독자 선물 코너에 실린 필기구들 사진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였습니다. 키티 캐릭터가 그려진 수첩, 분홍색의 예쁜 문구들은 저의 눈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용돈 받는 날은 큰맘 먹고 구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입한 잡지는 시간 날 때 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 지나쳤던 내용들은 한번 더 읽을 때 자세히 보면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는 것 같아 한 달 내내 같은 잡지를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잡지 인생을 살아오던 저는 대학생이 되어서 잡지의 무궁무진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다른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한 소파가 있었고 그 옆에는 읽을거리가 진열되어 있었죠. 그 속에서 저는 공연 잡지 「객석」을 발견하였고, 이런 잡지도 있나하는 호기심에 펼쳐 들게 되었죠.
「객석」은 뮤지컬, 연극, 오케스트라 연주회 등의 공연을 소개하는 잡지였습니다. 신선한 주제의 잡지 때문에 궁금한 마음으로 잡지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그 당시 저는 대학교에서 오케스트라 동아리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가졌기 때문에 클래식 연주회, 문화 행사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객석」속의 공연에 관한 소개, 출연진과의 인터뷰, 공연장의 분위기, 느낌을 써놓은 기사들은 진료 대기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공연에 관한 필수적인 지식 뿐 아니라 그달의 공연 일정, 주목받고 있는 공연을 소개 하는 등 최신의 공연 소식도 접할 수 있었죠. 그 잡지를 읽느라 병원에서 나가는 것이 아쉬웠을 정도로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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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상]이나연-잡지는 잡채다
 
 작품명 :
잡지는 잡채다
 
 소포가 도착했다. 한국으로부터 온 고대하던 소포다. 미술잡지와 영화잡지, 먹을거리가 상자 가득 빈틈없이 들어있다. 단순히 미술잡지, 영화잡지라 말하니 매우 건조하지만, 이건 내가 특별히 미안함을 억누르고 억눌러 지인에게 부탁해서 얻은 성과물이다. 미국에서 유학중인 나에게 가장 갈증 나는 것은 다른 유학생들이 공통으로 입을 모아 말하는 한국 음식이 아니라 한국 잡지다. 요즘 대부분의 잡지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정작 잡지의 핵심이라 할 만한 특집기사는 보기 어렵다. 음식이야 한인슈퍼에서 사온 재료로 직접 만들어 먹으며 아쉬움을 채우겠으나, 잡지는 나에게 불가피한 ‘배송요망’ 아이템이다.
 
 미술이론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터라 미술잡지를 통해 한국미술계의 흐름을 읽는 것은 필수다. 또한 한국에서 지하철을 이용하며 꾸준히 사 읽었던 한겨레 21, 씨네 21 등의 잡지에서 관심을 끌만한 특집이라도 마련했다 치면, 지구 반대편인 여기에서도 꼭 읽어보고 싶게 되는 것이다. 잡지는 현지에서 도무지 구할 수 없노라고 이것저것을 챙겨서 부탁을 해두면, 친절한 가족이나 친구들은 상자의 남는 공간에 직접 내린 참기름, 참깨처럼 미국 땅에선 구하기 힘든 식재료도 함께 보내준다. 그렇게 잡지 하나를 매개로 먼 고향땅의 인정과 사랑도 참기름 향만큼이나 고소하게 실려 온다.
 한인슈퍼에서 사온 당면에 소고기며 당근을 잘게 채 썰어 한국에서 갓 넘어온 참기름과 참깨를 넣어 휘휘 저으며 오랜만에 잡채를 만들어 보았다. 한국에선 명절 때나 먹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이곳에선 오히려 자주 만들어 먹게 된다.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 음식을 맛보고 싶다고 말하면 잡채며 비빔밥, 김밥 등을 주로 만들어 주는 까닭이다. 잡채, 비빔밥과 김밥. 나열해 놓고 보니, 이런 한국 음식들은 잡지와 그 특성이 많이 닮았다. 여러 재료가 들어가지만 그 모양과 맛이 조화로운 음식들과 여러 가지 꼭지와 필자가 모여 한 권의 책에 잘 버무려져 있는 잡지.
 하여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맛있는 잡채를 만드는 방법이 곧, 재밌는 잡지를 만드는 방법과도 공통되지 않을까 하는.
 
 맛있는 잡채를 만들기 위해선 재료 각각의 성질에 맞게 따로 따로 삶거나 볶아서 준비해야 한다. 양파와 당근은 볶는다. 시금치는 살짝 데친다. 소고기와 표고버섯은 양념장에 버무려 둔다. 달걀은 따로 지단으로 만들어 둔다. 하지만 모든 재료를 당면과 함께 참기름과 간장으로 살짝 볶으며 버무리는 마지막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참기름으로 파르르 윤기 도는 코팅을 해주고, 간을 해주는 간장이 적절한 색깔도 만들어주면, 이제 젓가락 들고 후루룩 먹기만 하면 되는 맛있는 잡채 완성이다.  

 잡지도 꼭지 각자의 개성을 살리되 잡지 전체의 결을 맞추는 조화가 중요하다.  담당 에디터가 누구건 필자가 누구건 간에 각각의 꼭지는 나눠지지만, 잡지 전체의 색깔 안에 어울리게 잘 버물려져야 한다. 잡지라는 문자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잡스럽고 다양한 것들을 다 담는 책이지만, 절대 잡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는 균형점 하나는, 잡지의 색깔일 터이기 때문이다. 흡사 참기름과 간장이 잡채의 전체 맛을 결정짓는 것처럼 말이다.
 미국의 전통 있는 잡지 <NEW YORKER>를 좋아한다. 풋풋한 대학생의 처녀작도, 무라카미 하루키, 우디 알렌처럼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작가뿐 아니라 J.D 샐린저, 트루먼 카포티 등 전설이 된 글쟁이도 <뉴요커> 안에선 나란히 존재한다.  평등선에서 ‘글 쓰는 사람’ 이라는 타이틀로 한권에 책 안에 같이 존재할 수 있는 잡지. 화려한 연예인의 사진 한 장 없이 표지부터 삽화까지 잔잔한 일러스트만으로 승부할 뿐만 아니라, 잡지의 대부분은 글자밭이지만, 글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보다 알찰 수가 없는 잡지. 한국에도 <뉴요커>같은 색깔 분명한 잡지가 나오길 기대한다. 논평, 만화, 시, 예술비평, 소설, 에세이 등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듯 하지만, 모든 것이 <뉴요커>의 것임이 분명한 잡글들. 잡지 속에 잡글로 시작한 그 컨텐츠들은 후에 하나하나의 걸작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을 사서 읽는 기분과 뉴요커의 실린 하루키의 수필 하나를 읽는 기분은 천양지차이다. 마스터피스가 되기 전의 따끈따근한 글. 그런 글은 잡지를 통해서만 읽혀지는 까닭이다.
 
 잡채는 대한민국 대표 음식이다. 혹자는 필리핀이 찹수이가 그 만드는 방법과 재료가 흡사하여 그 유래를 중국 어디쯤에서 시작한 음식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유래가 어찌됐든, 잡채는 우리나라의 명절에 즐겨먹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식이다. 전술했지만,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선보일 때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기도 하다.
잡지도 잡채처럼 우리나라 국민들의 관심사나 시대적 흐름을 잘 담아내므로, 외국인에게 우리나라를 알리기에 적합한 매체다. 딱딱한 티비 뉴스, 억지 웃음만 만들어 내는 코미디 프로, 똑같은 리듬에 비슷한 가사에 그럴듯한 안무만 맞춘 음악 방송이 한국 문화를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 때쯤, 난 한국의 패션지나 미술 전문지, 영화 전문지, 시사 전문지, 심지어 여성지 등이 한국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지 떠올린다. 각 시사 전문지의 타이틀은 그 주, 혹은 그 달의 이슈를 얼마나 콕 집어내 주는지. 언어의 문제는 차후에 생각할 노릇이다. 풍성한 사진 자료와 일러스트를 동반하는 구성들은 이미지만으로도 그 대강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케 하니까. 유명한 패션지 <보그>가 각 도시별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듯이, 잡지는 그 도시, 나라를 담는 훌륭한 문화적 그릇 노릇을 해준다. 
 
 잡채는 배부른 음식이다.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넉넉한 양의 당면은 밥 없이도 든든한 한 끼를 책임져주는 일등 공신이다. 명절날 끼니를 기다리며 조금씩 집어먹어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도 이만한 음식이 없다.
 잡지도 참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따뜻한 책이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여행이나 장기간의 비행기여행에서 잡지 한권만큼 든든한 벗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 짧은 지하철 이동에도 잡지는 서로 다른 부피가 컨텐츠의 섭섭지 않게 제 역할을 해준다. 이런 문화적인 배부름 외에도, 무리적인 배부름도 잡지는 제공한다. 
 영국에서 시작한 홈리스들의 잡지가 한국에서도 창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홈리스의 자립을 지원하는 착한 잡지 <빅이슈 코리아>가 그것이다. 기쁜 소식이다. 홈리스들에게 잡지를 무료로 배포해 그 판매수익금으로 생활하게 하자는 똑똑한 발상으로 시작한 이 잡지는 실제로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을 배부르게 해주고 있다. 그 발행주기가 빠르고, 지속적이며, 판매와 구매가 간편한 잡지의 성격을 영리하게 활용한 경우다.
 
 잡지 애호가로서, 잡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한해에도 얼마나 많은 잡지가 야심차게 창간되었다가 폐간되는지를 안다. 그 업계의 힘든 사정도, 힘듦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야 하는 저널리스트들의 전의도 이해할 수 있다. 멀리 돌아볼 필요도 없이 <시사인>이라는 잡지의 창간은 얼마나 드라마틱했나. 그런 잡지를 일개 잡채 따위에 비유하는 것이 조금 치기어린 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다. 잡지는 모든 것을 담는 관용의 책이라는 것을. 그런 잡지는 사소한 발상이나 따끈하고 새로운 시선을 모르는 척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뉴욕은 요즘 그라운드제로(9.11의 화마가 지나고 남은 자리) 근처에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는 것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하지만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말한다. 뉴욕은 종교의 관용을 가진 도시라고. 이민자로부터 시작한 이 시끌벅적한 도시에선 불가능이 없다. 전 세계의 요리를 맛 볼 수 있으며, 전 세계의 인종을 만날 수 있다. 전 세계를 품은 이 ‘빅 애플’에선 포용만이 미덕이다. 배척과 편견은 살아남을 수 없다. 문득, 잡지는 뉴욕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지는 뉴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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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희-드라마틱하게 해줄 내 인생의 인연
 
 작품명 :
 운명처럼 다가온 나의 인연
                                                           
 제주도로 동창모임을 갔다 오신 아빠께서 대한항공에서 발간되는 사보인<스카이뉴스>를 읽어보라며 나에게 주셨다. 지구촌을 여행하면서 겪은 여행자들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웃기도 하였고 항공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꿈을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감동도 받고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접하는 것 자체가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그리고 확실한 목표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내온 내 삶에 울림의 시작이자 첫 만남이었다.
 스스로 원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공부하라, 책 읽으라는 강요를 하지 않으신 아빠덕분인지 부작용인지 성적이 항상 상위권인 언니와 다르게 친구들과의 즐거운 학창시절의 추억을 제외하고 책상에 앉아 글자에 관련된 것들에 무관심했던 나.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친할아버지의 강력한 판단으로 약대에 입학하고 약사직업을 갖고 계신 아빠께서는 원하는 꿈을 포기한 후회 때문에 자식들만큼은 스스로 느끼고 선택하도록 자유분방하게 키우셨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자매를 위해 차로 통학해주시며 신문에 매일 나오는 영어유머를 스크랩해서 한 달이 차면 버리고 또 다시 시작하며 새벽 아침시간을 즐겁게 보내라고 하신 일, 잠이 안 오도록 약까지 먹으면서 시험 공부하는 언니에게 어느 날 ‘뇌 기억과 집중력’에 관한 의학상식 칼럼과 뜬금없이 탁구대를 사갖고 오신 일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깨도록 도와주고 포기와 좌절 속에서 용기와 도전을 하도록 도와준 1등공신이 잡지와 사보를 끊임없이 구매하고 보는 동기부여의 시작이 아빠 교육관 덕분이라 꼭 애기하고 싶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흔한 만화조차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좋은 구절이나 평론을 보면 스크랩하고 사람들의 삶이 들어있고 접하기 어려운 분야를 알아갈 수 있는 깊이 있는 잡지를 접하는 게 너무나 행복해 잡지를 보다가 학교 시험공부도 못했던 적이 있을 정도가 된 것은 잡지에 고마움을 표시하기에 앞서 계기를 만들어 주신 아빠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두 번째 만남
 편입이냐 졸업이냐를 놓고 진로고민을 하면서 갈림길에 서있던 나는 전공대학 건물과 거리가 멀어 잘 가지 않던 도서관으로 나도 모르게 향했다.
베스트셀러인 장문의 소설도 몇 장 읽다 의욕이 떨어지고 자기계발서도 그 내용이 그 내용 같고 어학공부나 전공 관련 서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화려하게 치장한 표지에 ‘저를 읽어주세요’ 하며 개성껏 뽐내는 모델처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잡지들이 웃으며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더운 여름 날씨와 잘 어울리는 국외의 어느 바닷가에서 서핑 하는 표지가 인상적인 여행 잡지 ‘뚜르드몽드’가 눈에 들어왔다.
철없고 단순하게 지내온 학창시절과 달리 대학시절에는 학과공부에만 매달리고 장학금을 받으며 열심히 산 것 같지만 학점만 관리했을 뿐 뭔가가 빠진 허전함이 컸었다. 이 책에는 어느 여행지를 가면 유명한 명소, 음식, 오락 등 소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명소의 유래, 역사, 그 나라의 전통체험 등 평소 몰랐던 생소한 것들을 알려주고 직접 경험한 저자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 허전함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세계사시간에 배우는 역사들은 공부라는 생각에 전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대학시절 역사학 교양과목을 들으며 역사의 재미를 알기 전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을 정도로 나는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여행 잡지에 나오는 글과 사진을 읽으면서 그 속에 있는 명소와 역사 속의 유명 인사들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게 되었고 드라마나 신나는 액션종류의 영화를 주로 봤던 내가 역사에 관한 영화는 물론 역사교양프로그램이나 교육방송에서 하는 명작드라마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말고사와 동시에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정기구독하고 있는 뚜르드몽드의 세계 곳곳에선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고 어학공부에 올인 하기 위한 계획을 포기하고 짧은 준비와 함께 유럽배낭여행을 선택하였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한국이 아닌 다른 세상은 어떨지, 잡지 속 여행 작가들의 글처럼 많은 감동과 지혜가 있고 여행자들의 말처럼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겪으며 조금씩 커가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을 돌아볼 소중한 시간이 된다는 것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미숫가루와 함께 헝그리정신으로 여행 중 고장 난 카메라로 유럽의 9개국을 다니면서 고생도 많고 탈도 않았지만 돌아올 때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큰 그릇에 담아오게 되었고 한동안 여행의 후유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삶의 일부로 정한 여행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 나의 두 번째 인연인 여행잡지 ‘뚜르드몽드’ 그 외의 많은 여행 잡지들은 어디를 가든지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행복을 나눠준다.
세 번째 인연
 시간은 흘렀다. 하루하루가 똑같이 반복되는 짧았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안정적이고 보장이 되어있는 공직을 위해 고시준비를 시작했다. 처음 1년은 쉽게 생각하고 처음 접하는 법과목만 집중하는 등 혼자서 공부하는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보고 어설프게 했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생각에 첫 번째 고배를 마시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이다 이민이다 유학이다 하며 자신들의 갈 길을 찾아가고 있을 때쯤 아직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못한 내 자신을 다 잡고 합격만을 위해 책꽂이에 수험관련 서적을 제외하고는 나의 유일한 낙이었던 여행 잡지 조차고 눈에서 없앴다. 학원가는 시간을 빼고는 가까운 도서관을 이용할 때도 서적관련 층에는 가보지도 않았다.
정신없이 수험생활만 하고 있을 시기에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하루아침에 망해서 아무것도 없이 길로 나갈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사는 물론 전과는 분명 달랐다. 그래서 더더욱 시험공부에 매달린다고 했지만 두 번째 도전한 시험결과 역시 참패였다. 집 분위기를 바꿀 합격이라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는 게 재미없고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처럼 눈에 불이 나도록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안에 공부만 하는 방법이 문제인지? 내 능력의 한계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생활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정말 열심히 한 것인지? 앞으로 또 하면 합격한다는 보장은 있는지? 경력도 없는 현재 상황에서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있는지? 수많은 생각과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2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공부한 2년의 시간도 분명 나에게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또다시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하는 열망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시험 준비 과정이 쉽지 않지만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아 4시간 학생을 가르치는 학원강사를 시작했고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과 나또한 노력으로 직접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다 이사 온 후 한 번도 출입한 적 없는 서적 및 간행물실에 학습교재 준비로  도서관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교재를 찾기도 전에 반가운 간행물코너로 가보니 길게 늘어서있는 많은 잡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는 그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2년 새 처음 본 녀석도 있고 늘 항상 있던 녀석들이 마치 학원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앉아서 볼 시간은 없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구경을 하다가 장애물을 힘차게 뛰어 넘는 멋진 말 사진이 눈에 포착되었다. 한국 마사회에서 사보로 출간하는 ‘굽소리’ 사진 속의 말처럼 엄청난 노력으로 멋진 경주마가 된 것처럼 그렇게 되고 싶고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하는 상황이 딱 들어맞고 제목마저도 한걸음 두 걸음 나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는 듯 나에게 세 번째 인연이 다가왔다. 

 회사나 정부기관의 사보를 접한 적이 거의 없었던 나는 이런 좋은 책자를 왜 이제껏 홍보가 되지 않았는지 늦게 안 것에 대한 탓을 하고 있었다. 평소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에도 눈에 쉽게 들어오는 여성잡지나 경제잡지를 본 적은 있었지만 농협사보 ‘두레’라던가 농촌진흥청 사보인‘그린매거진’이 꽂혀 있어도 사보라는 것들을 전혀 몰랐기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전문서적처럼 두껍지도, 실용서처럼 요구만 하지도, 소설이나 판타지처럼 흥미진지하지도, 잡지처럼 컬러풀하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그 이상의 것을 만날 수 있고 멘토까지 얻을 수 있는 횡재를 하였다.
그저 회사 정보소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나 계발을 위한 실용정보, 알기 쉽게 써진 재테크, 문화, 여행, 음식, 교양,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 정보들을 두루두루 접할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생소했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노하우, 어렵거나 행복한 이야기와 봉사하는 내용을 읽고 있으면 나도 그들처럼 살도록 노력하고 본받으려고 하니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어디 있을까? 시험에 나오는 우리말 관련 상식이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문화생활, 힘들지만 보람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수험생활을 보냈다면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한 것보다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빼곡하게 정렬되어 있는 책꽂이의 책을 장식처럼 놓고 거의 보지 않거나 중요한 내용 부분만을 보는 것, 이는 무조건 두껍고 전문적인 책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며 평균 30장 정도의 사보도 분명 자기만의 가치가 있고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주리라 확신이 들었다.
‘함께 길을 가는 세 사람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처럼 어떤 사람에게든 배울 점이 있듯,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행복의 요소들을 다룬 기사에서 배울 게 얼마나 많을까?
 운명의 만남 그 후부터 매달 한 번씩 우편물에 들어있는 각 사보들이 나를 찾아오면서 진정한 내 꿈을 위한 도전을 시작했다.  
 
 성공한 사람의 책을 봤다면 누구나 성공하진 않는다. 패션잡지를 본다고 누구나 모델처럼 옷을 맵시 있게 보이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내가 과거에 만났고 현재까지도 인연이 되어 만나는 잡지(사보포함)들을 읽고 내 자신이 하루아침에 바뀐다거나 놀라운 성과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첫째, 잡지에 나온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희망을 얻기도 하고 가르침도 받으며 마음속의 부족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주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둘째, 접하기 힘든 분야에 대한 지식들을 나눠주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셋째, 말하지 않고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사진과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쉽게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궁무진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나의 나침반이 되어 줄 잡지의 수만큼 내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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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이정숙-나와 잡지의 운명적인 만남
 
 작품명 :
 
나와 잡지의 운명적인 만남
 
                                          
사람에게는 인생에서 서너 번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있었다면 그 중 한 가지는 아마 아버지와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셨던 아버지는 자식사랑의 하나로 유난히 우리들에게 책읽기를 강조하셨고 아직 어렸던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위인전이랑 동화책 같은 것들의 책장을 넘기며 그림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네가 1초를 쉬면 다른 사람들은 2초를 앞서가게 되는 거란다.’ 혹은 ‘이제 한국에서의 금메달은 의미가 없다. 세계에서 금메달을 따야 해’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형제들이 게으른 것을 너무나 싫어하셨던 아버지. 그 덕분에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책읽기와 공부뿐만 아니라 음악 감상과 주산, 암산 학원 다니기, 심지어 간단한 영어단어까지 외우며 자라나게 되었다.
 
당신이 포기하셨던 법관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던지 우리들에게 매사에 목표를 정했으면 포기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는 언제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되풀이 해 말씀하셨고 또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 걸친 다양한 지식습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기에 항상 우리 주변에는 신문이랑 동화책 등 여러 가지 읽을거리들이 그 증거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때 한창 유행하던 ‘소년OO’라는 어린이 잡지 1권을 사오셨다. 이것이 나와 잡지가 처음 만났던 순간인데 그 짜릿함을 나는 아직도 희미하지만 기억하고 있다. 화려한 그림과 만화, 재미나고 풍성한 읽을거리들로 가득한 그 곳에서 나는 그 때까지 알지 못했던 세상의 상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물론 심심풀이로 연재만화를 읽는 재미에 빠져 한 달 한 달 지나갔지만, 아버지께서 당신 월급날마다 과자와 함께 들고 와 내 손에 쥐어 주시던 그 잡지에 어느새 중독되어 어떤 날은 숙제도 잊어버리고 밤늦도록 기사를 읽곤 했다.
 
그런데 거기서 내 일생을 지배할 좌우명을 한 구절 만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누가 옳으냐! 보다 무엇이 옳으냐! 가 더 중요한 일이다. OOO 헉슬리’ 라는 한 구절. 아마 초등학교 5학년쯤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는 이 구절의 정확한 뜻도, ‘OOO 헉슬리’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냥 내 마음에 박히게 되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면 맨 아랫부분에 조그맣게 한줄 박혀있던 그 글귀가 왜 그렇게도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하지만 지금도 이 구절은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손색이 없는 아주 소중한 친구가 되어있다.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이 구절을 적용시켰으며 선택의 갈림길에서는 나침반으로 톡톡히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그 때 읽었던 만화 속 그림과 내용들이 나의 꿈과 상상력을 자극시켜, 약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부모님을 1년 동안 끈질기게 설득한 후 내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유추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틈만 나면 잡지 속 만화 주인공들을 모방해 형태를 따라 그린 후 선물로 받았던 색연필로 색을 입히며 꼭 디자이너가 된 듯이 혼자 흐뭇해했기 때문에 사실 맨 처음 품었던 나의 꿈은 의상 디자이너였다.
나중에 크면 서울에 가서 의상실을 차리고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로 나름 계획을 세웠다가 가정 사정상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로 진학하였기 때문에 졸업 후 교사로 일하면서 의상디자인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계획을 일단 수정하게 되었었다. 물론 계획한 대로 다 되지는 않았고 대학시절에는 화가가 되고 싶어 의상 디자이너의 꿈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지만, 미술이 잡지의 편집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 내가 조그만 잡지의 편집위원이 되어서야 깨닫고는 꿈을 어느 정도 이루어 준 그 어린이 잡지가 너무나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대학에 입학한 후 멋모르고 우쭐거리며 그림쟁이 폼만 재고 다니느라 빈 껍질만 요란했던 나를 보시며 안타깝게 여기셨던 아버지께서 추천해 주신 ‘주간OO’이라는 시사교양잡지와의 만남이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하시며 막무가내로 그 잡지를 정기구독까지 해 주시는 게 아닌가. 매달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전해지는 터라 외면할 수도 없었고 아버지의 정성어린 설명보다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억지로 참고 읽기는 했지만 ‘월남패망사’니 국내외 정치상황과 기업이야기 그리고 전문 지식인이나 읽을법한 난해한 내용들이 나에게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내 나이 고작 19세인데······. 내가 장래 정치가가 될 것도 아니고 경제인이 될 것도 아니고 사범대학 졸업해서 중학교 미술교사가 될 것이 뻔한데 이런 것들은 왜 자꾸 읽으라고 하시는지’  쫑알거리며 정말 돈이 아까워 매달 읽어주었다. 
 
그런데 자꾸 잡지를 읽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나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듯이 나도 모르게 여러 방면에 서서히 지식이 쌓여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왠지 내가 대단한 지식인이나 된 듯 자부심이 생겨나 나름대로 문제의식과 판단능력도 가질 수 있었다. 때문에 조금씩 관심분야가 다양해 졌고 잡지에서 미처 얻을 수 없었던 철학, 문학, 역사, 문화사에 관련된 서적, 심지어 인물평전 같은 책들까지 읽으며 초보 대학생으로서는 꽤 많은 독서량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그 당시 유행하던 ‘OO의 소리’같은 잡지를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더 적극적으로 찾아가며 읽게 되었다.
 
물론 내가 어떤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들지는 않았기에 지금은 그 당시에 읽었던 책의 내용에 관련된 기억 몇 자락조차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 무렵 나는 인생에 대하여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답은 얻었다고 본다.
 
내 개인적으로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지만 대학 2학년 말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졸중이라는 생소했던 병명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친척들의 걱정과는 달리 가족들이 큰 소용돌이 속에서 장녀였던 나의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대응하며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았고 5형제가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를 겪으며 아버지께서 생전에 심어 놓으셨던 엄청난 교육 효과의 일등 공신은 당연히 잡지였다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잡지 덕분에 빨리 인생의 지침을 가졌기에 큰 충격 속에서 위기대응 능력이 미약해 6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를 대신해 동네어른의 소개로 초등학생 과외를 하며 얻은 수입과 아버지께서 남기신 약간의 퇴직금을 쪼개어 가족의 생계유지와 미래 설계를 조금씩 세워갈 수 있었다면 이 또한 지나친 억측일까?
아무튼 서로 도와가며 그 후 우리 형제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꾸려 이제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리고 있으며 어머니 또한 교회활동에 열심히 참여해 이웃들과 늘 행복함과 감사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 전혀 억측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 번째 만남의 대상은 대학 졸업 후 교직에 있으면서 우연히 판매사원의 상술에 말려 구독하게 된 ‘OOO지오그래피’ 라는 잡지이다. 지금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세계적 권위를 가진 잡지이지만 십수 년 전 그 잡지는 다소 생소한 그리고 꽤 비싼 구독료를 지불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나는 첫 달부터 그 잡지의 매력에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고급스럽고 지적인 잡지도 있구나! 내가 미처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구촌 사람들, 곤충이나 숲, 혹은 먼 우주의 경이로움 까지. 너무나 다양한 주제들과 사진이 빚어내는 신비로움은 나의 호기심을 온통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나는 자연환경이나 과학 분야에는 거의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살아왔지만 문화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매달 전해 주는 이 잡지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프리카는 가난과 헐벗음의 대명사가 아니라 자연의 보고이자 원시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보존된 인류의 고향 같은 곳이요, 곤충이나 미생물처럼 하찮게 생각되었던 미물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삶의 방법이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공짜로 부어주는 유익함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 때 비로소 나는 자연의 일부이고 앞으로도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께 대한 경외심이 솟아 ‘겸손’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을 보는 눈도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아무리 피부색이 검고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혹은 장애가 있거나 불치병으로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거나 내일 곧 죽음이 닥쳐올 듯 한 노인이나 사회적 약자로 무시 받으며 사는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므로 그들의 삶은 마지막까지 나와 똑같이 존중되어야 할 존재들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몇 년 후 내가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 난생 처음 병원에 입원을 하고 정밀검사를 받고 종양제거 수술까지 진행되었던 두 달 동안의 전 과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잡지를 통해 자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예방주사를 미리 접종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여튼 2년 동안의 계속된 만남이 끝나고 투병생활도 무사히 통과하게 되자 이 잡지는 나의 후반기 삶의 방향을 봉사와 사랑실천이라는 곳으로 확실히 잡아서 교회 활동을 통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를 발판으로 그 후에는 시야가 세계로 넓혀져 기아대책본부를 통한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생활비를 후원하는 기부활동으로, 탈북동포들을 구출하고 한국정착을 지원하는 OOOO라는 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 2010년 2월에 명예퇴직을 하게 되면서 나는 OOOO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월간소식지 편집위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내가 코흘리개 잡지 구독자에서 이제 어엿한 잡지 편집위원이 되다니 정말 꿈같은 반전이 아닌가?
비록 24면의 얇은 홍보잡지 이지만 매달 4,000부씩 인쇄하여 후원자와 관련 단체들에게 발송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비전문가이기에 기사 수집과 원고 작성에 시간이 꽤 걸리는가 하면, 페이지맵 작성, 사진 편집, 제목 정하기, 지면 편집 등 단계 단계마다 여간 잔손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될 수 있으면 사람 냄새가 많이 풍기고 독자들도 읽으면서 함께 행복해지는 그런 잡지를 만들고 싶기에 어린 시절 부터 이어져 온 잡지와의 만남들을 조금씩 기억해 내며 꿈을 꾸듯이 그림을 그리듯이 매달 지면 위에 탈북동포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진솔한 삶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요즘은 사진의 매력에 빠져 편집을 도와주시는 간사님과 함께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포토에세이’ 라든지 사람을 사랑하는 인간미가 흠뻑 베어 나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탈북청소년들에게 자립의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교육프로그램 활동’ 등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화하고 있다.
 
이제 또 9월호 준비를 위해 서서히 담금질을 시작할 때가 다가온다.
‘어떤 반찬들을 준비해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밥상을 차려줄까?’를 늘 고민하는 어머니처럼, 맛있는 기사로 독자들에게 쉽게 잊히지 않는 감동을 선사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행복한 고민에 빠져 지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가 되는 것이 생겼다.
 
‘다음엔 어떤 모습으로 나와 잡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서 또 다른 사건과 인연을 맺게 될까?’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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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잡지와 광고-김지나
 
 작품명 :
잡지와 광고
                                                                                               
 그 날은 보통 때 보다 조금 더 아팠다. 버틸 만큼 버티다가 병원으로 갔다. 열이 내리지 않아 진료 순서를 기다리면서 체온계를 겨드랑이 안에 두고 심드렁히 앉아 있었다. 범인답게, 남들도 다 감기에 걸리는 시기에 나도 감기에 걸렸다. 병원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내 생각에는 이정도 시간이면 되었다 싶었는데도 간호사들은 내 체온계를 가져가지 않았다. 바빠서 잊었으려니 하고 있었지만 체온계를 끼운 팔에 힘을 주고 있어 불편했다. 결국 목마른 사람처럼 비적비적 걸어가 우물에 손을 뻗듯이 간호사에게 내 체온계를 내밀었다.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는 간호사보다 더 지루한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간호사 데스크 옆에 비치된 잡지꽂이였다.
 체온계를 내려놓고 여성잡지 하나를 골라 자리에 돌아와 앉아 읽기 시작했다. 감기로 인한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인지 내용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용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대부분 번득이는 코팅지로 이루어진 모델 사진을 후닥닥 보고 넘기는 것으로 잡지를 내려놓았다. 사실 뒤 쪽의 깨알 같은 글씨는 읽지도 않았다. 나는 잡지가 무슨 광고지 모음집 같다고 생각했다. 
 광고가 많이 들어가는 잡지일수록 사정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병원에서 여성 잡지를 읽은 얼마 후였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잡지를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잡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에 대해서는 더욱이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웨스트라이프’라는 그룹을 좋아하는 친구가 가져 온 한 음악 잡지를 옆에서 구경하다가
 ‘이 잡지는 음악 잡지인데 음악이랑 관련 없는 광고들이 왜 이렇게 많이 끼워져 있냐.’고 물어 봤다.
 나는 친구를 통해 광고 수입과 잡지 출판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잡지를 많이 읽기도 했지만 잡지를 만드는데 있어서 광고는 곧 잡지 출판의 동아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친구가 친절히 잡지와 광고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지만 나는 그 때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고는 곧 잊어버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상술이 잡지라는 것에 교묘히 침투해 호시탐탐 독자들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잡지의 내용보다는 매력적인 광고모델이나 그 광고모델들이 입은 옷과 장신구에 더 정신이 팔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평소에는 시, 소설 창작과 합평, 비평과 독서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고 그 결과물들을 가지고 일 년에 한 번, 11월 즈음에 문집을 발간했다.
 잡지 출판과 광고의 관계를 다시 떠올린 것은 동아리에 내가 가입하고 나서 첫 문집을 발간할 때였다. 문집을 발간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신국판 크기로 150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문집이었다. 그렇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발품을 팔아볼 요량으로 을지로로 향했다. 10월의 청명한 하늘과 오래된 을지로 인쇄골목의 낡은 분위기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미로 같은 을지로 인쇄골목을 한나절이 넘도록 돌아다니며 가격을 물어보고 다녔다. 조그마한 공간에 인쇄기 기계음 소리가 쉬지 않고 시끄럽게 울리는 곳에서 큰 소리로 가격과 재질과 수량을 맞춰보았다. 발품으로도 모자라 인터넷에서 가장 저렴하게 한다는 곳을 고르고 고른 업체를 선정했지만, 갱지보다 조금 나은 재질의 종이를 쓰고도 150권에 70만원이 넘는 비용이 기본적으로 들어갔고, 책의 날개를 추가 하는 데에도 비용이 들었다. 게다가 표지의 재질에 따라서 가격의 차이가 났고, 컬러를 쓰는 데에도 역시 비용이 추가 되었다.  

 회비를 모으고 동문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동아리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는 것은 대부분 ‘스폰서’에게서 ‘스폰’을 받는 것이었다. ‘스폰’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모금 수준이었다. 스폰서는 그동안 자주 다니던 학교 주변의 음식점과 술집이 대부분이었다. 조심스런 인사와 함께 지난해 발간된 문집을 보여드리며 스폰서를 부탁드린다고 말하면, 조금은 난감한 표정으로 5천원이나 1만원을 꺼내 주거나 자주 가서 안면이 있는 가게 주인은 2~3만원씩 주시기도 하였다. 때로는 더 미안한 목소리로
 ‘아직 개시를 못해서……’
 ‘요즘 경기가 나빠서……’
 하면 조심스레 문을 닫고 되돌아 왔다.
 보통 스폰은 ‘소정의 스폰을 해 주면 문집 뒤쪽에 가게의 이름과 코멘트를 달아 홍보를 해준다.’는 명목으로 받았다. 문학 동아리인 만큼, 식당이라면 ‘밥 함부로 남기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끼 배불리 먹여봤느냐’ -XX식당-, 술집 이라면 ‘술이 차오른다, 가자’ -학사주점 XXX-하는 식으로 문집 뒤쪽에 광고를 실어주곤 하였다.    
 이 경험은 개인적으로는 달콤 쌉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실 150부에서 100여부 가량을 동아리 사람들끼리 나누어 보고 50여부가 동아리 외부의 사람들에게 나가게 되는데, 이정도의 수량으로 큰 광고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스폰서 해주는 분들도 알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학생이라는 신분이 돈이 없으려니 하고 적은 액수의 돈을 주시는 식이였다. 동아리 입장에서도 문집에 광고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집을 발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호소하듯이 매년 스폰서를 구하곤 하였다. 문집과 광고의 관계는 마치 성격 차이로 헤어져야 하는데, 각자 독립할 능력은 없어서 이혼하지 못하는 부부 같았다.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후로 도서관에 가는 일이 더욱 잦아졌다. 대학의 도서관은 책도 많았지만 잡지도 여러 종류를 볼 수 있었다. 책등이 가득한 도서관 공간에서 책표지를 겉으로 두는 잡지 책장은 단연 눈에 뜨일 수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창작과 비평’이니 ‘문학과 사회’니 하는 잡지를 찾으러 갔다가 자연스레 다른 잡지에도 눈길이 갔다. 시사 주간지들을 차례로 훑어보다가 배드민턴 잡지, 산에 대한 잡지, 전원생활에 관한 잡지,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의 잡지들을 하나씩 꺼내서 보았다. 처음에는 선채로 몇 장을 넘기던 것이 다음날에는 한 권을 자리로 가져가 앉아서 보았고 다음날에는 몇 권의 잡지가 내 옆에 놓아져 있었다. 그 잡지들은 병원에서 체온계를 빼며 지루한 눈길이 닿은 여성지나,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보던 음악잡지와는 다르게 잘 읽혔다.
  그만큼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잡지에는 깊이 있는 기사와 관련된 정보가 풍부하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정보와 지적 욕구를 단번에 채워주는 매체가 바로 잡지였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잡지를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몇 권씩 잡지를 쌓아놓고 보다 오고는 하였다.
 차츰 잡지를 보다 보니 다시 잡지와 광고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적으로 불리는 주간지는 양주, 외제차, 골프 광고가 있지만 진보적으로 불리는 주간지는 이런 광고가 없었다. 배드민턴 잡지에는 배드민턴 라켓과 운동화, 사진 잡지에는 렌즈와 카메라, 렌즈 보관함, 카메라 가방광고가 있었다. 잡지에 따라 다른 광고가  게재되어 있었고 그 말은 곧, 그 잡지를 보는 독자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런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곧 고등학교 시절 무의식적으로 ‘호시탐탐 독자들을 노리는 상술’에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잡지의 광고도 하나의 정보제공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련한 마케팅에 포섭된 사람처럼 나는 잡지와 광고의 불편한 부부사이를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잡지를 보는 시간이 많아지자 친구들이 잡지를 왜 이렇게 오래 보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잡지가 가진 장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고는 잡지 보는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관심이 없는 분야의 잡지나 직접 돈을 주고 사서 보는 것은 손쉽게 하지 못했다. 누구나 자신이 흥미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 분야의 잡지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외국에서는 잡지가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된다고 한다. 신문 같이 500원 ~ 1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비록 종이의 질은 코팅이 빳빳하게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한번 읽고 버리는 식으로 잡지를 사서 손쉽게 읽고 버린다고 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잡지가 나온다면 잡지사들은 광고주들의 요구를 위해서 종이의 질을 높이지 않고도 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사람들은 손쉽게 사보고 버릴 수 있을까? 이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잡지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하고 사람들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광고에 대한 의존이 아예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판매 수익으로도 잡지사들이 경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런 문화를 바꾸는 일은 의외로 광고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관에 가면 영화를 하기 전 광고가 나온다. TV-CF와 동일한 광고가 극장에서 달라지는 점은 마지막에 극장의 에티켓을 지켜달라는 스타들의 말이다. 극장에서 안내판을 아무리 붙여놓아도 영향력 있는 스타의 한마디가 훨씬 더 효과적이고 광고 수입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잡지도 이런 방식의 광고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자전거 잡지의 광고에는 자전거 타러 가는 사람의 배낭에 잡지가 꽂혀 있고, 앞쪽 광고에서 잡지내용이 시작되는 전 광고에는 ‘다음 페이지부터 잡지가 시작 됩니다’라는 문구를 스타가 들고 있다. 그동안 잡지와 광고가 서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를 활용하는 관계였다면 사람들의 인식의 바꾸기 위해서는 잡지와 광고가 거부감 없이 융합하여야 한다.
 그것이 곧 사람들이 잡지를 더 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잡지를 보는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잡지와 광고가 이혼하지 못하는 부부관계처럼 각자의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4주간의 조정기간에 들어서서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언젠가부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내 생각은 어떠하다.’ 라는 말을 잘 찾을 수가 없고,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의 이야기만 넘쳐났다. 자기 생각을 하기보다는 대화의 소재거리를 가십기사나 단순 정보에서 찾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사회 문화적인 변화 요인도 크겠지만, 초 단위로 업데이트 되는 인터넷 매체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그 정보들은 보는 사람들이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을 방해 한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와 광고들을 습득하는데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지는 그렇지 않다.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고 자세하게 읽을 수 있다. 종이 매체가 가진 특징이기도 한, 집중력을 크게 분산시키지 않는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는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 해 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긍정적이다.
 이런 잡지가 독자들에게 더 많이 읽혔으면 하고 바란다. 광고 수입이 아니라 독자들의 구독료만으로도 맥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러니 하게도 독자들이 늘어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 역시 광고가 될 수 있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소설이나 베스트셀러는 광고하지만, 어떤 잡지이건 잡지의 광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광고를 하기 위한 비용은 지금 같이 열악한 잡지사들에는 무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잡지에 관련된 법이 따로 만들어진 만큼, 잡지의 활성화를 위해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은 무리일까. 혹시 취재 형식을 띤 간접 광고는 어떨까.  

 살아남기 위해서 무조건 독자들의 요구에만 맞추거나 광고를 내기 위해서 잡지의 색깔을 잃어버리는 일(시사저널 사태 같은)이 없도록 잡지가 안정적인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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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최지원 -남성잡지, 여자가 읽어도 재미있다
 
 작품명 :
 남성 잡지, 여자가 읽어도 재미있다
 
 내가 남성잡지를 즐겨본다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그것도 시중에 발간되는 남성 잡지는 종류별로 전부 탐독한다고 하면 더욱 의아해 한다. 여자가 왜? 남자 보라고 만든 남성잡지를 왜 여자가 좋아하는 거지?
 그렇다. 내 성별은 여자고, 나는 여자지만 나는 남성잡지를 좋아한다. 잡지에 메모를 하면서 읽을 정도로 좋아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걸까?
 나는 내 취미를 단번에 이해하는 사람을 두 번 만난 적이 있고, 내 취미에 전도당한 사람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셋 다 여자였고, 처음 두 명은 역시나 남성잡지를 읽는 사람이었으며, 후자는 내가 건네준 남성잡지 더미를 읽고 난 뒤로 남성잡지를 좋아하게 되었다. 여자라면,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왜? 라고 물어보게 되는 취미가 남성잡지 읽기고,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 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남성잡지 읽기가 아닐까싶다.
 
 처음 남성잡지를 읽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밤 열두시까지 매일 읽는 것이라고는 문제집이나 입시관련 서적뿐이었다. 물론 자극적인 추리소설이나 판타지 번역소설도 많이 읽었다. 필수 교양이라는 소설은 깊이는 있었지만 너무 이상적이었고, 매일 같은 부류를 읽으면 재미있는 것도 재미가 없어진다.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고나 할까.
 그러던 중에 지하 주차장에서 남성잡지 두 권을 주웠다. 남성지 GQ. 그냥 바닥에 있기에 봤다. 봤는데 그냥 놓고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들고 왔다. 밤에 잠 안자고 읽었다. 오오! 감탄사 까지 내면서. 재미있었다는 말보다, 반했다는 말이 옳다. 나는 그 두 권의 남성잡지에 반해버렸다.
 꼭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기분이지만, 남성잡지의 어디가 매력이냐고 물어본다면 가장 큰 매력은 젠틀함이다. 학교에서 매일 보는 남자애들과는 달랐다. 위트도 있고,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 남성잡지에 있는 남자는 진짜 신사였다. 그래서 반했다. 남성 잡지는 진짜 남자라면 갖추어야할 센스와 위트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외적인 부분뿐 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감수성이나 사회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매너. 그냥 남자가 아니라 신사일 수 있도록 하는 책이 바로 남성잡지였던 것이다. 진짜 신사한테 반하는 것은 여자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면, 포르노의 상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다룬 기사였다. 포르노라는 1차원 적인 관심을 상업과 관련시켜 이야기 하면서 사회, 시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있었다. 어떤 관심도 깊이를 담아 화제의 격을 높이는 기사가 감동적이었다. 
 
 남성잡지를 읽으면 꼭 남자의 세계를 여자인 내가 당당하게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절대로 엿보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뭘 보나, 무슨 생각을 하나,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혹은 우리들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나. 의외로 여자와 남자가 좋아하는 것은 같은 수도 있다. 남자가 봐도 여자가 봐도 괜찮은 남자가 남성지에 나온다는 것이 그 증거일 수도 있고, 와인은 어떤 것이 좋다거나, 음악에 대한 관심사 같은 것이 그렇다. 더구나 요즘은 남자나 여자나 좋아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지 않다. 여자도 스쿠터, 오토바이, 자동차, 신형 가전제품 같은 것에 관심 많은 사람도 많다. 나처럼 남자형제가 있다면 남성의류나 남성 코스메틱도 재미있을 것이고, 나와는 달리 애인이 있다면 여행정보도 관심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모두 떠나서 그냥 사회적인 문제나 조금 전문적인 곳까지 다룬 영화정보나 도서정보도 재미있을 것이다. 같으면 같은 데로 다르면 다른 데로 재미있다. 같은 면은 공감을 다른 면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남성지에도 여성이 있다. 여성지에 나오는 화보와는 다른 것에서부터 남성지가 여성을 주목하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칼럼이나 이성에 대한 기사를 보면, 남자가 여자를 보는 시각이 보인다. 여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여자의 매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남성과 여성이 다르다는 것을 항상 말로만 들어왔고, 글로만 읽었다면 절대 모를 부분이다. 이렇다 저렇다 애매한 설명만 듣는 것과는 다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는 것이 빠르다. 그럼 알 수 있다. 아, 다르구나. 그런데 같구나.
 나는 동성의 친구들에게 남성 잡지를 권할 때 이렇게 말한다. “여성지보다 남성지에 멋진 남자가 더 많아.” 내 전체적인, 솔직한 총평은 그렇다. 그럼 친구들은 웃으면서 “아, 잘생긴 남자”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남성지를 읽어 본 친구들은 다시 이해했을 것이다. “아, 멋진 남자.” 화보에 나오는 늘씬한 모델들만 봤다면 겉만 핥은 것이고, 뭔가 새롭다고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남성 잡지를 꼼꼼하게 읽다보면 여성 에디터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자가 여자로서 남자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어떤 남성 잡지에서는 여성의 시선으로 이상화된 남성상을 볼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조금 남자를 이해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남성잡지를 읽으면서 남자도 여자도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남성 잡지는 이를 테면 중립 구역 같은 느낌이다. 완전히 남자의 영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도 허용된 것 같다. 남성잡지가 과연 남자만 보라고 만든 잡지일까? “누구든 보세요.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은 남자에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성잡지를 읽으면서 나는 새로운 세계를 얻었다.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잡지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속한 세계가 아니더라도 잡지라면 당당하게 내 나름대로 그 세계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문학, 디자인, 음악, 영화, 패션, 시사 등 분야가 뭐든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죄다 읽는다.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리고 다닌 만큼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꼭 자신이 속하거나 관심 있는 분야의 잡지만 읽어야한다는 편견을 버리면 더 쉽고 편하게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넓고 다양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잡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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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윤다영-갓 구운 빵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작품명 :
 갓 구운 빵을 기다리듯이
 
  우리 가족은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거의 매주 빠짐없이 도서관에 다녔습니다. 보고 싶은 책을 대출해서 읽기를 반복하여 많은 책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자연환경에 관심이 많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월 집으로 오는 어린이동산의 연재만화를 먼저 보려고 동생과 다투던 생각도 나는군요. 제가 어설프게 그린 만화 캐릭터가 잡지에 나왔을 때 가슴이 뛰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5학년 때는 우리 동네 뒷산에서 새로 발견된 고인돌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월간 어린이동산에 실리기도 했으며 이런 인연으로 어린이동산 명예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동산에 저의 글이 실렸을 때는 친구들에게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목걸이형 명예기자증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답니다. 지금도 책읽기는 좋아하지만 글을 쓸 기회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서툴고 글 쓰는 것이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군포시청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 잡지를 통해 말레이시아 청소년 문화교류 공모를 알게 되어 응모하고 선정되어 11박 12일의 해외연수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 현지 말레이시아인의 집에서 숙식을 하고 가족들과 사귀며 그 나라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영어에 대해 조그만 자신감을 얻게 된 것도 저에겐 작은 성과였고 그 이후로는 작은 간행물 하나도 꼼꼼히 살피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제 공부방의 책꽂이에는 노란색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geographic) 잡지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서 정기구독하였는데 아프가니스탄의 ‘샤르밧 굴라(Sharbat Gula)’라는 소녀 이야기가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1985년 6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표지모델은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에서 찍은 초록색 눈을 가진 12살의 예쁜 소녀였습니다. 특히 그 아름다운 눈은 깊은 호수와 같이 보여 정말이지 모두가 빠져 들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전쟁을 치르기 전이었지만 매우 오지에 살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 때 생전 처음으로 카메라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사진 찍힐 기회가 없었답니다. 인생에 단 한번 찍힌 사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문잡지의 표지모델로 나오게 된 거죠. 전쟁의 상처가 많은 이슬람 문화권이긴 하지만 저도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잡지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독자들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진을 보았던 세상 누구라도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얼굴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알지만,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어린 소녀의 커다란 눈과 얼굴 표정에는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감 그리고 생명력이 뒤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는 이 기사로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진기자로 부상했고 퓰리처상도 받았습니다. 잡지를 본 전 세계의 사람들은 어린 소녀의 사진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참상을 보고 전쟁의 참혹함을 함께 느끼며 공감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죠. 
 
  더 놀라운 것은 이 사진기자가 17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소녀를 찾아 아프가니스탄으로 모험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녀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정보도 없이 위험한 그 곳으로 떠난 그는 사라진 파키스탄 난민촌 부근에서 17년전 표지사진을 주위에 보여주며 많은 어렵게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굴라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답니다. 
  오랜 세월 속에 가난과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굴라와 그 가족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그 기자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하지만 23년간의 전쟁, 사망자 150만명, 난민 350만명, 이것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였습니다. 기자는 전쟁으로 6살 때 부모를 여의였던 굴라의 어려웠던 지난 여정과 가족사를 취재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의 가장 큰 장점은 세계인들이 언어의 소통이 다소 힘들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사진 그 자체로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진기자는 다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표지와 화보기사로 엄마가 된 굴라의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십년이 넘어 다시 보게 된 한 여인의 이야기에 세계의 많은 애독자들이 크게 공감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또 발생했습니다. 잡지에 실린 굴라의 이야기를 접한 한 네덜란드 노인 부부가 굴라의 사진을 매우 커다란 그림으로 정성껏 창작한 것입니다.  

  그 소재는 다름 아닌 형형색색의 5만 송이 히아신스 꽃과 잎, 줄기였습니다. 다양한 색의 꽃으로 굴라의 모습을 예술로 아름답게 장식한 것입니다. 어렵지만 꿋꿋하게 살아온 굴라의 인생에 축복이라도 보내듯이 말입니다. 아름다운 꽃 그림은 다시 다음 호의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습니다. 그 네덜란드 노부부는 꽃을 가꾸는 직업이었습니다. 노부부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굴라의 이야기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영감을 얻어 정성껏 아름다운 꽃 그림을 그리며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이 기사를 보고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잡지를 통해 세계인들이 공감을 하고 소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인터넷과 디지털 세상이 왔다지만 종이를 통해 세계인들이 따뜻한 정(情)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잡지는 정(情)을 나누는 따듯한 매체임에 분명했습니다.
  120년이 넘은 전통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대해서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2002년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 잡지대회에서 개막연사로 강연한 내셔널지오그래픽 테리아담슨(T.B Adamson) 이사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특별강연에 앞서 여러 잡지 관계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30초 짜리 짧은 비디오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한 기자가 밀림 속에서 10m 길이의 거대한 아나콘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불행히도 갑자기 얼굴을 물리고 말았습니다. 카메라 촬영기자는 계속 아나콘다에 물린 상태의 그를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비디오를 본 강연장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겠죠. 놀랍게도 그 기자는 손으로 아나콘다를 제압하고 응급대처하면서 피 흘리는 얼굴로 태연하게 카메라를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이처럼 큰 뱀과 마주쳤을 때는 특히 주의가 필요하며 얼굴을 물렸을 때는 이러한 상처가 난다고 마무리 했습니다.
  제가 아는 상식에서는 현장에서 이러한 큰 사고가 났을 때는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촬영을 하던 사진기자나 스텝들이 아나콘다에 물린 기자에게 재빨리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중한 생명마저 건 완벽한 프로페셔널 기자들이었습니다.
  이 짧은 비디오는 120년 전통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정신을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나 비디오를 통해 편안한 안방에서 지구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생명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연은 마술이나 요술 없이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즉 진실한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권 잡지의 힘, 한 장 사진의 힘, 하나의 진실한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의 힘은 이처럼 매우 큽니다.
  일반적으로 매월 정기적으로 나오는 잡지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담습니다. 제가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지구환경이며 특히 과학잡지를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이들 잡지를 보며 공감하고 있습니다. 잡지를 통해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시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는 걷기, 자전거타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나무심기, 텃밭 가꾸기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저탄소 생활패턴으로 조금씩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귀찮고 번거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잡지를 통해 녹아내리는 북극의 빙하와 위태로운 북극곰의 생존 모습을 볼 때면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지구온난화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마음이 변하면 태도가 변하고, 태도가 변하면 행동이 변한다.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면 인생이 변한다.” 스위스 철학자 데미르의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해 갈 수 있는 작은 습관들은 하나하나 실천함으로써 그 힘은 커질 수 있습니다. 국민의 의식수준을 높이고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데도 잡지는 커다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잡지는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와 심지어는 실패 사례까지 친절하게 전해줍니다. 비슷한 생각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 카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지만 종이에 인쇄된 전문잡지의 정보는 좀더 믿음이 갑니다.  
 
  몇 해 전 아빠와 함께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영국의 제인구달(Jane Goodall) 여사의 특별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구 환경과 평화의 메신저로 불리고,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제인구달 여사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환경운동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세상에 환생한다면 어떤 동물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초등학생의 질문에 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대답했습니다.
  “지금처럼 숲이 파괴되고 자연환경이 좋지 않는 상태에서는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한 인간의 사랑을 받는 애완동물로 태어나고 싶단다. 하지만 아름답고 건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아프리카의 코끼리, 기린, 영양 등 어떤 야생동물이든 좋단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지구의 환경과 자연에 관심을 갖고 보존하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인구달은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 운동을 펼치며 어린이들에게도 환경의 소중함을 전파한다고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는 커서 제인구달 여사처럼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위태로은 지구환경과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살피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소외된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등의 일을 하고 싶답니다. 또한 사진을 찍거나 좋은 글을 써서 지구환경 보존의 중요함을 인류에 전파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 내 또래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려 지금은 편지로 해외펜팔을 하려 합니다. 영어가 서툴지만 사전과 참고자료를 이용해볼 생각입니다.    

  책이나 잡지도 도움이 됩니다. 이처럼 책과 잡지는 우리들의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들을 담는 커다란 그릇이 아닐까요?  
 
  우리 가족은 제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매주 텃밭과 도서관에 다녔습니다. 텃밭과 도서관은 바로 가까워서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다가 도서관에 가서 손을 씻고 가족 모두 책을 봅니다. 아빠는 “도서관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해주고, 텃밭은 우리 가족에게 건강과 휴식을 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족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거의 매주 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대출해서 읽은 후 그 다음 주에 전해 주곤 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책을 볼 수 있었죠. 특히 다양한 잡지를 볼 수 있는 정기간행물실은 항상 들르는 곳 입니다. 새로 나온 잡지는 마치 갓 구운 빵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죠. 갓 출판되어 나온 새 잡지를 손에 들면 가슴이 설렌 답니다.
  지금은 학생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담은 책과 잡지를 읽지만, 먼 미래에는 기회가 된다면 나의 생각을 담은 책이나 잡지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물론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고 준비해야 하겠죠.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열심히 지구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이나 생명을 만나러 다니는 나의 모습을 즐겁게 상상해 봅니다.
  또 우리나라에도 100년의 전통을 가진 우리 문화와 우리 시각이 담긴 좋은 잡지가 성장해 가길 진심으로 기대해 봅니다. 나의 생각, 우리의 생각, 대한민국의 생각, 그리고 세계인의 생각으로 사진을 찍고, 새로운 상상력이 가득한 기사를 써서 독자들이 사진과 기사를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는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잡지는 그러한 생각들을 담는 커다란 그릇 입니다. 그 그릇을 채우는 기발하고 멋진 생각들이 기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마치 어린아이가 빵 가게에서 갓 구운 빵을 기다리듯이 우리 집 우체통에서 내가 기다리던 잡지가 새로 꼽혀 있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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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제2회 전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수상작))
 
  [ 금 상]김영래-잡지에서 찾은 꿈
 작품명 :
잡지에서 찾은 꿈
 
 
 어렸을 적 내가 접했던 잡지라고는 의사인 아버지께 매달 발송되는 ‘의학 잡지’, 그리고 학교에서 주로 모범생(?)으로 통하는 친구들이 보던 ‘과학동아’ 정도였다. 매달 연재되는 만화책만 보던 나에게는 잡지라는 것은 아버지 병원에 가면 아주머니 손님들이 주로 보고 계시던 표지가 너덜거리는 여성지라는 이미지뿐 이었다. 조금 머리가 커서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여느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게임을 좋아했었다. 게임 월간지를 사면 그 속에 들어있는 쿠폰(게임아이템을 준다거나, 게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같은 것에 혹해 가끔 사보는 정도로 잡지는 나에게 별다른 눈길을 끌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 이후 잡지를 보는 일은 거의 전무후무했고, 대학교를 조리과학과로 진학한 후 아버지 친구 분의 소개로 만나 뵙게 된 어느 주방장님께 “요리의 트렌드를 알고 싶다면 잡지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라는 말을 듣고 가끔 서점에 가서 요리 분야의 잡지들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나에게 잡지라는 어마어마한 세계에 눈을 뜨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어느덧 2학년이 되었을 때 였다.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일을 하던 친구가 군대를 간다고 자신의 일을 이어받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이어받는다는 게 그 친구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밝은 사회 장학금’이라해서 일종의 근로 장학금 형식으로 교내 도서관 등 공공시설에서 일을 하고 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으로 뽑혀야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뒤늦게 학업에 대한 열의에 불타올랐지만 마땅히 집중해서 공부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주변 환경만 탓하던 상황이었다. 궁상맞은 자취생활에 도움이 될 용돈도 벌 수 있고, 또 이 기회를 통해 도서관과도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왠지 멋지지 않은가? 도서관에서 일을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뭔가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내는 듯 한 느낌이랄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지원을 하기로 했다.
 우연일까?(그것은 또 다른 기회였다.) 그 친구가 말했던 대로 나는 정말 ‘밝은 사회 장학생’으로 뽑혔고,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그 친구가 지난 학기 일을 했던 ‘정기 간행물실’에서 말이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너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던 중(그 친구말로는 자신이 했던 일이 정말 쉬운 일이라고 했었다. 군대에서 흔히 쓰는 말로 ‘땡잡은 보직’이라고나 할까?), 방학은 끝날 무렵이 되었고,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밝은 사회 장학생으로 뽑힌 학생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정직원분들(우리는 그 분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은 네 분이 계셨고 학생들은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저는 조리과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06학번 김영래라고 합니다.” 라고 소개를 하니, 그곳에 계신 선생님들 중 한 분이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아~ 네가 ○○ 친구구나!”, 웬일인지 이렇게 쉽게 뽑히나 했더니 내 친구가 그 분들에게 내 이름을 슬쩍 알린 모양이었다. 그게 인사권에 영향을 줬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 친구가 지난 학기 성실히 일한 덕분에 나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일은 정말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읽고서 카트에 놔둔 잡지와 신문 같은 간행물들을 돌아다니면서 제자리에 꽂아 놓는 일, 그리고 가끔 신간이 들어오는 날에 책에 도난 방지를 위한 탭을 붙이는 정도의 일이었다. 그 외에는 가끔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날 4시간 동안 일을 한다면 그 중 실제로 일을 하는 시간은 1~2시간 정도였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도서관에서 자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항상 도서관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일이 없을 땐 과제를 하거나 전공 공부를 했고,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잡지나 신문 등을 읽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에게 특별한 동기를 부여하는 사건이 될 줄은 몰랐다. ‘ㄱ’부터 ‘ㅎ’까지, ‘A’부터 ‘Z’까지 수백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분야의 잡지에 감탄하면서 그 때 그 때 끌리는 대로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평소 내 전공인 요리, 제과․제빵 분야를 비롯해 평소 관심사였던 축구는 물론이고,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잡지를 읽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분야에 대한 잡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이러한 경험이 내 인생의 소중한 재산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서 나에게 잡지는 하나의 여행이었다. 새로운 제목의 잡지를 펼쳐들 때의 느낌은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로 여행을 가기위해 여권에 비자를 발급 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 나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한 분야의 한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인물들, 그 분야에 이슈가 되는 사건들, 이러한 것들을 보고 읽는 일은 마치 여행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같은 잡지는 여행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보는 나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경제 분야의 잡지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 경제 시장의 동향을 알 수 있었고, 과학연구 분야의 잡지에서는 어떠한 신기술이 개발되었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지, 요리 잡지를 보면 최근 레스토랑들의 요리 경향과 떠오르는 쉐프(주방장)들을 알 수 있고, 제품 관련 잡지를 보면 최근에는 어떤 기기들이 나와서 대중의 이목을 끄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중 특히 내 눈길을 끄는 잡지가 있었으니 바로 디자인 관련 잡지들이었다. ‘디자인’이라는 말만으로도 무언가 시각적이고 화려할 것만 같은데, 그 분야를 다루는 잡지들 역시 내 시선을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에만 해도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순수미술 등 화려하고 창조적인 잡지들이 많았다. 나는 평소에 크게 디자인이란 분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잡지들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창조적인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중 시각디자인과 제품디자인 부분의 작품들은 나에게 특히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이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할 정도의 전율이었다. 

 나는 그러한 알 수 없는 매력에 휩싸여 기사들을 점점 깊고 자세하게 읽기 시작했다. 한 글자도 놓치기 아까울 정도로 기사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전부 새롭기만 했고, 기사를 읽을 때면 마냥 즐거웠다. 그러면서 나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었고,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면서 스스로가 한 단계 성장하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차츰 이러한 것들을 보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실제로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가끔 도서관 한 쪽 구석에서 그림을 끄적거리기 시작했고, 망상에 빠졌다가도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메모를 했다.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 작품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에 잡지에 나와 있는 관련 기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시회나 박랍회에 직접 찾아가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날짜, 장소는 자연스레 박람회 일정에 맞춰 정하기 시작했고, 마음 맞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가거나 혼자서 가기도 했다. 실제로 내 눈을 통해본 것들은 정말 신천지였다. 특히 작품을 만든 디자이너의 설명을 들을 때면 신기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한 작품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디지털 카메라가 없어서 핸드폰 카메라 촬영 버튼을 연신 눌러댔던 기억이 난다.
 내가 디자인 분야에 끌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어떤 분야나 직업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흔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디자인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아니었다. 다양한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디자이너들의 글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결코 그들의 화려한 작품처럼 그들이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요리사라는 직업 또한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에 ‘일류 호텔 주방장’ 같은 호칭은 그 사람의 화려한 일면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적은 연봉, 길고 피로한 업무, 창작의 고통 등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니 디자이너와 요리사는 공통되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은 나에게 티끌만한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단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 내가 애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두 가지나 찾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아직 젊은 나이이기에 도전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직업이든 화려한 이면 뒤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나는 나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디자이너로써 살아가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가 고민하고 찾기 시작했다. 나는 디자이너들을 동경했고 그들이 가진 능력을 부러워하면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을지 찾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하는데 꼭 필요한 포토샾 등의 툴 공부도 해보고 싶었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간절히 원했던 것은 그들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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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 상]이상훈-잡지여 날개를 펴라
 
 작품명 :
잡지여 날개를 펴라

  제작년인가, 이사하면서 책장을 하나 샀다. 진한 갈색에 튼튼하게 짜여진 게 높이는 바닥에서 천장에 닿을 정도고, 1미터 남짓 길이의 전면도세 칸으로 나눠져 있어 책을 분류해서 넣기도 좋다. 책장을 정리하는 일이 녹록치는 않다. 하지만 늘 책장을 정리할 때면 '아, 이 책은 언제 읽었고, 어떤 내용이 참 좋았어'하는 생각이 들면서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책장 맨 아래칸과 그 바로 윗칸에 벌써 10년동안 오롯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십권의 소장용 잡지들을 바라보면 마냥 뿌듯할 뿐이다. 이들을 정리할 때는 정말 감회가 남다르다는 말이 딱 맞다. 사실 이사다닐 때마다 갖고 다니려니 '이 무거운 녀석들을 계속 갖고 다녀야 하나?'하고 생각한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마다'내 대학시절, 회사생활의 역사이자 소중한 추억인 이 잡지를 어떻게 버릴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덕분에 이 녀석들을 계속 끌어안고 가게 한 것 같다. 한번씩 오래된 잡지를 다시 펼쳐보면 한참 팔팔했던 대학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9년째 차곡차곡 모아둔 사보는 내가 입사한 이래 회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인 동시에 치열했던 신입사원시절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보게 하는 바로미터이기도하다. 정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다.
  갑자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잡지를 좋아했을까? 날 사로잡은 그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느새 대학 1학년 시절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잡지에 대한 첫 인상은 놀랍게도 '충격과 공포'였다. 대학 1학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참 자유를 만끽하던 때였다. 수업간 빈 시간에 학과방에서 친구들과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처음 보는 잡지 하나를 발견하였다. 당시 SK그룹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낸 격월간지 '지성과 패기'였다. 무심결에 펼쳐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기사는 정식 기자가 큰 신문에 내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 잡지에는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학생기자로써 대학생활에 관련한 기사를 싣고 있었다. 대학생이 이런 기사를 쓴다는 것이 하나의 충격이었지만 어떤 글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내 수준이 이것밖에 안돼?'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이 '충격과 공포'는 나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안겨주었다. 시간을 이렇게 보내선 안되겠다는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세상은 넓고 도전해 볼 일은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으니까. 그 이후에 어떤 잡지건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했다.
  잡지에 대한 두번째 인상은 '세계를 보는 눈'이었다. 대학시절 영어를 심도있게 공부하기 위해 TIME지를 읽고 토론하는 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선배들의 TIME지에 대한 여러 소개중 가장 인상깊은 것은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비록 여기에 있지만, TIME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이 말이 TIME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단순한 영문 잡지가 아니라 전 세계를 볼 수 있는 천리안이라, 영어 공부에 세계를 흐름을 읽는 시야를 얻는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그만큼 애정이 더해졌음은 당연지사였다. 매주 쏟아져 나오는 각종 사건들, 그중에서도 TIME지에 실릴 정도의 이슈라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 관한 기사가 나오기라도 할 때면 더욱 관심을 가졌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TIME지를 읽는 데는 상당한 시사적인 배경지식을 필요로 했다. 국내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기사를 읽을라치면 그 배경지식을 아는게 칼럼을 이해하는 지름길이었다. 덕분에 도서관을 자주 들락거리면서 관련 기사를 찾아 여러 잡지들과 신문들을 두루 찾아보게 되었고, 그런 과정속에서 잡지가 어떤 매체인가하는 그 매력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잡지의 매력이라면 그 첫번째가 바로 차별화된 정보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 보통 정보매체라면 신문과 뉴스가 전부였다. 잡지를 알게 된 순간, 이 둘과는 차별화된 정보로 뭉친 잡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뉴스나 일간신문이 신속성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한다면 잡지는 주간 혹은 월간으로 발행되는 만큼 좀더 심도있는 취재 기사와 다양한 분석을 토대로한 기사를 무기로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게다가 신문이나 뉴스처럼 한번에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주는 잡지도 있지만 분야별 전문잡지들도 있다는 것이 잡지의 차별화된 정보에 한층 힘을 싣는다. 원하는 분야에 정통한 소식뿐 아니라 심도있는 지식과 트렌드를 알려면 잡지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잡지의 두번째 매력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읽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멋진 편집과 사진들, 그리고 알기쉽게 설명하는 도해와 다양한 컬러를 총칭한 것이다. 한마디로 가독성이 높다. 글보다는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사진이나 잘 정리된 그래프가 호소력이 더 강하다. 잡지에는 생생한사진들, 다양한 도해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출판물의 딱딱한 디자인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편집과 폰트의 변화, 다양한 사진과 그래프를 멋지게 배치하면서 읽는 재미를 더하는 매력이 있다. 

  세번째로 잡지의 매력은 역사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학생시설 관심을 갖고 보았던 학생잡지를 시작으로 TIME지와 컴퓨터 잡지를 모았었고, 입사 후 회사 사보를 꾸준히 모으고 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 모인 잡지들은 나름의 색깔을 가지고 오래 숙성된 와인마냥 멋진 색깔과 감미로운 향을 발산하고 있다. 한번씩 잡지를 펼쳐볼 때 마다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내가 잊고 있던 사실도 이 녀석들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나에게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해준다. 어디 그뿐인가?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하고 생각하고 찾을 때도 제격이다. 한편으로 역사성이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모아놓은 보상이란 생각도 든다. 10년 가까이 모이고 나니까 한 두해 모았을 때와 달리 변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깊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잡지라도 10년을 모은다면 그 분야의 독특한역사책을 갖는 효과를 가질 것이다.
 
  일찍부터 이런 매력에 빠져 들다보니 잡지나 모임의 간행물을 직접 만드는데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다. 학생때는 동아리에서 연 1회 제작하는 'Rehearsal'이란 회보를 만드는데 편집장을 맡은 적이 있다. 남들은 맡으면 짐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에겐 정말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회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관심 갖고 지켜본 잡지들과 TIME지중 몇 권을 골라서 같이 회보를 만드는 후배들에게 보여주면서 어떤 식으로 커버를 장식하고, 목차를 정하며, 어떤 선배들을 섭외할 것인가 회의하던 기억이 난다. 또 이런 때 아니면 선배들 못 만난다고 직장에 다니는 선배님께 인터뷰를 요청해놓고 무작정 후배들 데리고 가서 인터뷰를 빙자해서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 다음은 LG에서 발행하는 학생잡지 "미래의 얼굴"을 만드는 학생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학년때 받은 충격을 4학년이 되어 학생기자가 되면서 만회했다고 할까? 국내 유명 출판사중 하나인 안그라픽스에 있는 편집팀과 함께 잡지를 만들었던 기억은 내 대학시절을 장식한 멋진 추억이 되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함께 했던 동기들과 항상 화수분같은 이야기 샘이 되었다. 만드는 재미는 읽는 재미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아쉽게도 요즘 이런 잡지의 매력이 많이 빛을 잃은 것 같다. 먼저 경기불황이 잡지를 힘들게 한 것 같다. 어느 틈에 즐겨보던 컴퓨터 잡지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어떤 잡지들은 출판 회수가 줄어들었다. 또 어떤 잡지들은 웹진으로 변신했다. 변화의 흐름에 맞춘 것일 순 있으나 나처럼 매달 오는 잡지를 받아보는 즐거움이나 한장 한장 넘겨서 읽는 인쇄물의 추억이 강한 사람에겐 웹진도 섭섭할 때가 많다. 제작자나 독자나 다 힘드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지금도 경기 불황의 여파는 여전히 큰 시련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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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상 ]신형호-내 삶의 영원한 등대 학원잡지
 
 작품명 :
  내 삶의 영원한 등대 <학원>잡지

“신**, 책상 밑에 보는 책 가지고 나와. 야, 이놈! 지난주에도 <학원>을 읽다가 지적되었지. 도대체 나중에 무엇이 되려고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고 있어. 복도에 나가 꿇어앉아 있어.” 우리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로 불리는 수학선생님 시간이었다. 이번 달에 새로 나온 <학원>을 몰래 읽다가 두 번이나 걸리게 된 것이다. 벌쓰면서도 내 마음은 책 내용을 생각하는 즐거움으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책읽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틈만 나면 동화책이나 역사책의 내용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 만난 <학원>이란 잡지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이 한권의 책이 영원한 내 삶의 지표이자 애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시절 도서관이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다. 1960년대 중엽인 그때는 대부분 학교가 중고등학교 병설로 학생 수가 많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대구의 사학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였기에 다른 학교보다 도서관 장서량이 많았고 시설도 비교적 잘 되어 있었다. 요즘과 같은 개가식 도서관이 아니고 대출카드로 도서부원들을 통해 책을 빌리는 폐가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 운명을 바꾸게 된 <학원>이라는 잡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처음 그 잡지를 펼쳐보던 날, 지적 호기심과 새로움에 굶주려 있던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다양한 세상이 있나 하면서 그날 밤을 꼬박 <학원>과 함께 지샜다. 연재만화, 탐정 소설, 순정 소설, 시, 에세이, 화보 등 책장을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새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내 인생은 한층 성숙한 다른 궤도로 접어들었다.
 
그 당시는 변변한 잡지가 없던 시대라 <학원>은 우리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책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학원>을 빨리 빌려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매달 발간되는 <학원>을 도서관에는 열 부 정도만 사들였기에, 새달이 되어 대출을 신청해도 다른 학생이 대출중인 경우가 많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책이 들어오면 도서부원들이 먼저 대출을 한다고 하였다. 편법이었지만 묵시적인 그런 특혜가 있었다. 그들이 돌려보고 나서 일반학생에게 대출해 주었기에 좀 늦게 빌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도 도서부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중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입생이라 도서부원을 어떻게 뽑는 줄도 몰랐었다. 다짜고짜로 도서관 담당선생님을 찾아가서 도서부원으로 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이미 선발기한이 끝났기에 안 된다며 내년 초에 다시 신청을 하라고 하셨다. 무척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 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도서부원은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도서 대출과 반납을 담당하는 봉사활동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나는 읽고 싶은 책을 먼저 마음대로 읽을 욕심으로 희망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책도 많이 읽었지만, 당시는 오직 <학원>을 먼저 읽을 욕심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결국 도서부원은 되지 못했지만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채우기 위한 나의 노력 덕분에 과월호 <학원>도 거의 빠짐없이 섭렵하는 즐거움을 누렸었다.
 
처음에는 연재소설이나 만화, 탐방기사 등 흥미 위주로 읽기 시작한 <학원>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연스레 ‘학원문단’의 시와 수필을 자세히 읽게 되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던 나는 책 뒤편에 실려 있는 ‘학원문단’이란 곳에 관심을 많이 뒀었다. 전국에서 문예에 관심과 열정 있는 학생들이 투고하면 기성 작가나 시인들이 약간의 심사를 거쳐 발표하는 곳이었다. 연말에는 ‘학원 문학상’이란 제도도 있어서 같은 문예반 후배들이 ‘우수작 1석’ 또는 '가작'으로 뽑히는 것을 보고 더욱 글에 대한 정열을 쏟게 되었다. ‘학원문단’ 출신인 그들은 지금 여러 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성시인과 작가로서 후진을 양성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학원 문학상’에는 응모도 못해 봤지만, 월간 ‘학원문단’에는 두 번이나 내 작품이 뽑히는 영광도 얻었다. 체계적인 공부는 하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간단한 평과 함께 또렷이 인쇄된 내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날아갈 듯이 기뻤었다. ‘대체로 깔끔하지만 감성에만 너무 빠지지 마라.’는 그 평이 지금도 머리에 떠오른다. 친구들과 돌아가며 읽고 자랑도 하곤 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그 당시 ‘학원문단’에 오르내린 이름들이 지금은 유명한 작가나 시인이 되어 활동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육 년 동안 한 학교에서 문예반 활동을 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원>의 열렬한 팬이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직접 구매를 하지 못했지만, 새달이 되면 누구보다도 먼저 <학원>을 빌려 읽고 문학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진로도 사범대학 국어과를 지망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여학생>이라는 잡지도 읽게 되었지만 <학원>의 그 첫 매력과는 비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순정 연재소설에 ‘여물어 가는 얼굴’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여자 주인공 ‘명명이’라는 인물에 동화되어 글을 읽는 동안 내가 그 소설 속의 한 인물이 되어 작중인물과 대화도 하고 그리워하고 사랑을 하기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그해 처음으로 간행된 <문학사상>이라는 잡지와 인연을 맺기도 했고, 또 다른 전문 문예지와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학원>만큼 내 인생을 흔든 책도 없을 것이다. 한창 감수성과 지적 상상력이 넘치는 중고등시절에 <학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내 삶의 방향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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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상 ]김애라-추억 그리고 뜨거운 의미로 나를 채워준 잡지에게
 
 작품명 :
추억, 그리고 뜨거운 의미로 나를 채워준 “잡지”에게
 
김애라
 
안녕, 잡지야! 그 옛날 좋아했던 어느 순정 만화의 제목처럼 귀엽게 그렇게 너를 불러 보고 싶었어. 사실 내가 너를 나의 소중한 친구를 부르듯 이렇게 다정스럽게 부르게 될 줄은 그리고 내가 너를 이렇게 회상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물론 내가 너에게서 힘을 얻게 될지도 그때는 당연히 몰랐어. 아마도 ‘오늘’ 이라서 그리고 ‘지금’ 이라서 더 그럴지 모르겠어. 대학을 갓 졸업한 내게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어. 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일도 내 꿈을 결정하는 일도 그 모든 일이 백지였지. 쓰라린 실패에 낙담하기도 했고, 또 눈물 흘리기도 했었어. 때로는 나와 같은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 깊은 고민과 한숨에 긴 밤을 하얗게 새기도 여러 번이었어. 그러다 문득 나는 별자리 운세가 급작스레 궁금해 졌어. 그리곤 그 옛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습관대로 순정 만화 잡지의 맨 뒷장을 펼쳤지. 다른 서적도 아니고, 꼭 습관처럼 순정만화 잡지의 맨 뒷장, 그 익숙한 습관으로 나는 자연스레 너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어.
 
아이, 너를 처음 만나다
 
너를 처음 만난 건, 지금 보다 훨씬 어린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였어. 아는 것 보다는 배워야 할 것, 그리고 앞으로 느껴야 할 것들이 훨씬 많았던 눈 내리는 겨울이었지. 하루는 퇴근 해 오시던 아빠가 한 손에 '표준전과' 만한 크기의 잡지를 들고 돌아오셨어. 방학인 데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라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신 순정만화 잡지<<밍크>>. 그것이 바로 너와 나의 첫 만남이었어. 전과 보다 많은 페이지에 빽빽하게 그려진 순정만화를 보며 나는 긴긴 겨울이 행복했었어. 까슬까슬한 너의 표면과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특유의 향, 그 안에 가득한 예쁜 만화들과 별자리 운세, 그리고 독자 엽서. 내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너의 모습이야. 당시에 네가 보여준 많은 만화들이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긴 팔다리의 잘생긴 미남, 미녀들의 알콩 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그때는 많은 걸 이해하진 못 했었던 것 같아. 또 팔 다리가 짧고 동글동글한 얼굴의 어린이가 주인공인 순정 만화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나의 팔 다리를 한번 쳐다봤던 것도 같다. 그 때 나는 너를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생각과 늦은 밤에 몰래 혼자 봐야겠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었어. 사실 책을 빨리 읽는 편인 나는 <<밍크>>를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쉬워, 만화 속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생김을 외울 만큼 꼼꼼히 읽고 또 읽었지. 그리고 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별자리 운세’를 보는 건 내게 또 다른 재미였어. 나와 같은 별자리에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같은 운세를 말해주는 별자리 운세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한 구절 한 구절 기억하려고 애썼어. 어쩌다 '금전 운' 이 좋은 달이라는 별자리 운세를 보고 우연히 용돈이라도 생길라 치면, 나는 그 덕을 너에게 돌렸지. 그렇게 나는 너와 그 겨울을 함께 보냈어. 또 그렇게 너는 긴긴 겨울 밖에 나가 놀지 못하는 그 지루함 속에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어. 그 이후에도 아빠는 내게 종종 너를 선물해 주시곤 하셨어. 내가 매월 나오는 너를 책상 한편에 꼼꼼히 모아두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한 번씩 꺼내 본다는 사실을 아빠는 알고 계셨거든.
엄마가 해주던 이야기도 생각이 나. 내가 난생 처음 잡지라는 너를 만나 즐거워 할 때, 엄마도 아마 너를 보며 나름대로 즐거우셨던 모양이야. 엄마는
엄마가 어렸을 적 너는 ‘부의 상징’ 이었다고 하시며, 엄마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셨어. 당시엔 네가 너무 고가라 부잣집이 아니면 너를 살 수가 없었대. 그래서 엄마의 학창 시절엔 너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말 그대로 인기 짱 이었대. 쉬는 시간 이면 너를 갖고 있는 친구의 옆에 모두들 모여 한 장 한 장 찢어질 새라 조심하며 너를 구경하셨대. 엄마도 물론 그 중에 한 명 이셨는데, 너와 함께 나오는 ‘별책 부록’의 그 만들기가 탐이 났었다며 엄마는 웃으셨어.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잡지는 바로 <<어깨동무>>였대. 40명 남짓한 친구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너를 가진 친구 옆에 우
르르 몰려들 만큼 대단한 인기였다던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엄마는 어느 샌가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교복 차림의 소녀로 되돌아간 것 같았어. 소녀로 되돌아간 엄마와 나는 그 해 겨울 늦은 밤까지 독자 엽서에 그림도 그리고 깨알 같은 사연도 적어, 너에게 마음을 보냈었어. 눈 내리는 길을 뚫고 우체국으로 가, 너를 부치는 일도 엄마의 온기가 담겨 있는 손을 꼭 잡은 채였어. 그 해 겨울 처음 만난 너는 나를 소녀 시절의 엄마와 만날 수 있게 해주었고, 너를 선물 해준 아빠에 대한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고, 그리고 긴긴 겨울 나의 친구 이자 습관이 되어 주었어. 지금도 답답할 때면 서점에 달려가 나는 꼭 순정 만화 잡지의 마지막을 펼쳐 ‘별자리 운세’를 되뇌어 보곤 해. 고맙다. 진심으로.
 
 
쉿! 소녀, 너만 아는 비밀을 만들다
 
그 해 겨울 처음 너를 만난 후, 나는 어느새 깡총한 단발 머리에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는 소녀가 되었어. 어색한 교복을 입고 매일 아침 만원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학교로 향했지. 새로 만난 친구들과 낯선 교정, 그리고 낯선 선생님이었지만, 그 어색함은 한 달도 채 안 되어 익숙함으로 바뀌었어. 언제나 그렇듯 어색함에는 정말 시간이 약 이잖아. 그렇게 중학생이 된 나에게는 여느 사춘기 소녀들이 그러했듯 어떤 설렘이 찾아왔어. 낯선 기분이었는데 나는 어떤 연예인을 동경하고 좋아하게 되어, 설렘과 궁금증이 가득해졌지. 그렇게 그 연예인에 대한 동경과 설렘이 생겨나면서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 생겼는데, 혹시 기억 하니?  

사실 나와 친구들은 좋아하는 연예인이 표지 모델로 나오거나 혹은 그들의 인터뷰가 실린 너를 사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었단다. 원래도 반갑고 좋아했던 너였지만 그 시기에 나는 네가 유독 갖고 싶었기에, 방법을 찾아야만 했어. 엄마가 주시는 용돈으로 너를 사기엔 한 달 동안 나의 생활이 너무 캄캄해져버렸거든. 서점을 지날 때 우리가 동경하는 그 연예인의 모습이 너의 표지를 장식한 것을 확인 하고 난 후면 우리는 재빨리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너를 만날 수 있었을까? 너는 알고 있잖니. 당시에는 도시락 대신에 학교에서 급식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우리는 급식 비를 내고 식권으로 그날 그 날 밥을 사먹는 거였어. 밥보다 네가 더 간절했던 우리는 급식 비를 엄마한테 받아서, 그 돈으로 너를 만났단다. 물론 엄마한테는 지금까지도 비밀이지만. 그리고는 각자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이나 기사를 서로 맞바꾸어서 스크랩하고 잔뜩 모았지. 점심은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지? 우린 우리가 가로챈 급식 비 덕분에 점심 밥 대신 빵이나 군것질로 배를 채웠어. 때로는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네 집에 가서 바가지에 밥이랑 김치만 넣고 비벼 먹기도 했어. 물론 다 먹은 뒤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서 학교로 돌아와야 했지만,  늘어 가는 너를 보며 배고픔 보다 뿌듯함을 더 느꼈었던 것 같아. 어쩌다 엄마가 급식 비를 직접 내는 달에는 급식 비로 너를 사는 것은 포기했어야 했지. 그래서 생각했던 건 바로 전단지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였어. 정확히 기억은 나진 않지만, 아마 한 장당 20원 정도였던 것 같아. 천장 남짓 되는 전단지를 받아 들고 친구들과 시내 곳곳에 전봇대며, 아파트 단지며 돌아다니곤 했어. 한 낮의 뜨거운 더위에 땀이 뻘뻘 나고 아파트 단지에서는 경비 아저씨한테 혼나서 쫓겨나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곧 만날 너를 생각 하며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아. 혹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가끔 너무나 그립고 또 아련해. 누군가를 동경하고 그 동경하는 이에 대한 것을 모으기 위해, 온갖 애를 써 너를 만났던 순수한 내가
나는 조금은 그리워.
참, 그때 내가 자주 만났던 너는 <<Teens>> 라는 연예 잡지와 <<쎄씨>> 라는 잡지였어. 사실 <<Teens>>에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매월 뛰어가서 사고 별책 부록으로 주는 브로마이드를 받으려고 난리였어. 갓 나온 너를 조심스레 오려내서 파일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스크랩하며 왠지 모를 뿌듯함에 즐거웠었지. 그리고 그 큰 브로마이드를 방 어디에 붙여야 할까도 매번 고민이었어. <<쎄씨>>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풍성한 별책 부록을 줬었거든. 귀여운 파우치나 파우더, 립글로즈가 얼마나 탐이 났었는지. 그리고 거기에 나온 미인이 되는 법을 밤마다 스크랩하고 예뻐지려고 따라 하곤 했어.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너에 대해 수다를 떠느라 정말 바빴었어.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그때의 나는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만난 우리 엄마의 소녀 시절과도 많이 닮아 있었네. 엄마가 <<어깨동무>>의 별책 부록인 만들기나 <<어깨동무>>를 갖고 싶어 동경 했던 것처럼, 그리고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보며 살가운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나도 같은 모습으로 너를 만나고 있었구나. 그렇게 다시 만난 너는 또 한 번 나를 소녀 시절의 엄마의 추억과 나와 나의 친구들의 따뜻했던 시절을 선물해 주었구나. 그렇게 우리들의 시간을 채워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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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상 ]이은실-어둠속 더 빛나는 반딧불이
 
작품명 :
 
어둠속 더 빛나는 반딧불이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너와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친구에게 널 처음 선물 받고 이런 잡지도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농경과 원예’ 생소한 이름답게 너에게 끌리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세상에 잡지라고는 문학잡지나 여성잡지가 다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너는 시간을 잡아먹는 불청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존재했단다. 농촌에 태어나 농부의 딸로 자라오면서 농촌은 미래가 없다고 보았다. 농부는 새벽에 나가서 별보고 들어오지만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빚뿐이란 생각에 이런 잡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내가 널 바라본 솔직한 마음이었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매스컴에 농부의 자살이야기가 연일 보도되면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되었단다. 모 대학에서 총학생회장과 이장을 함께 병행하던 농부가 자살했다는 구나! 찢겨진 달력 뒤에는 ‘일하는 농민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지. 난 그 글에서 눈을 떨 수 없었단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농사를 하고 있다면 나 역시 그 글귀 앞에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지. 악만 남은 가운데 널 보게 되었어. 방구석에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농경과 원예’를 말이야.
 처음에는 너에게 어떤 꼬투리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잡지를 넘겼단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듯 너에게 있는 모순을 하나하나 밝혀내겠다고 생각했지. ‘농민을 위한 잡지라니 발행할 돈 있으면 농민을 위해 지원금으로 내놓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단순한 상상을 하기도 했어.
 너는 녹색장미 ‘그린뷰티’를 표지모델 삼아 자랑스럽게 표어를 내걸고 있었지. 녹색기술, 녹색성장, 현장중심의 농업기술전문지. 사실은 처음 읽으면서 웃음이 ‘뻥’ 터졌단다. ‘어찌 기술과 녹색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가!’ 하지만 목차를 보면서부터 조금씩 흥미로워지기 시작했어. 핵심기술, 친환경 농법, 농원화제, 농식품과 유통등 농업하면 떠오르는 것들과는 좀 생소한 단어들이라고 생각했거든. 농업이라고 하면 대부분 기술이나 유통들을 생각하지는 않잖아. 처음 잡지를 접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궁금증이 증폭되었단다.
 핵심기술 편에서는 과수원 해충방제도 이제는 첨단 IT 시대라고 말하고 있었어. 해충방제와 IT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농촌진흥청이 집에 앉아 있어도 과수원 병해충 발생상황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유비쿼터스 기반 해충발생 무인감지시스템’을 세계최초로 개발하였다는 내용이었어. 그러면서 연구개발의 성과, 기술적인 내용등과 함께 추진성과 활용도도 다루고 있었지. 이 내용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단다. 바로 내가 과수원집 셋째 딸이기 때문이지. 새벽에 일어나 과수원 소독줄을 잡고 학교에 가던 추억이 떠올랐어. 과수원 사과나무에 병이 걸리면 숨죽여 한숨 쉬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단다. 언젠가 태풍이 불어 사과나무가 다 쓰러지자 나무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시던 아버지였지. 이 시스템처럼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과수 재배 관리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어. 그리고 빠른 속도를 널 읽어갔단다. 

 너를 계속 알아가며 신기한 것을 발견했어. 그건 바로 농업이나 원예라는 것이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우리가 농업하면 다가가기 힘든 구식이라고 생각하잖아. 우리 아버지 농사일을 생각해도 기계 보다는 사람의 손과 발이 우선이고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시던 생각이나. 그런데 첨단 나노기술이나 한농대라는 농업대학을 소개받으면서부터 안일한 나의 생각이 확 바뀌기 시작했어. 농대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주며 좋은 전문 후계농업인 CEO를 양성하고 있었어. 항상 농업하면 가난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구체적인 이들의 비전을 듣고 놀랐단다. 바로 잡지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생생한 인터뷰였지. 똑같은 상황이지만 이들에게 농촌은 꿈이 있고 희망이 있었어. 사람은 보는 시각에 따라 절망이 희망으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지. 무한한 가능성은 바로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단다.
 너는 그 어렵다는 친환경, 유기농 농법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었어. 풍기 김성수씨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 인삼재배를 유기농으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를 통해 알게 되었단다. 유기농하면 그냥 농약을 치지 않는 것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유기농으로 기르기 위해 농부의 피땀 어린 수고와 노력이 있었다는 거야.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에 실패와 좌절을 수반한다는 사실이지. 하지만 김성수씨는 그 좌절에서 넘어지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한 결과 유기농으로 인삼을 재배하고 그것을 다시 홍삼액으로 개발해 유통하고 있었어. 재배뿐만이 아니라 유통을 손수 함으로 고객에게는 직접 믿고 살 수 있는 신뢰도도 함께 팔고 있었지. 또한 자신이 직접 재배한 것을 자신이 유통해 중간 마진을 남기지 않으니 소비자에게는 저렴한 가격으로 할 수 있었지. 우리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이런 사람들은 많이 봐왔어. 하지만 난 인터뷰를 읽으며 농촌의 무지개를 보았단다. 그건 바로 김성수씨의 마음이 대단하다는 거야. 인삼 친환경 전도사로 남고 싶어 하면서 그 재배농법을 사람들에게 무료로 공개하고 있었어. 자신이 실패를 거듭하며 어렵게 알아낸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 놀라웠지. 나부터 생각해 보면 내 것을 누가 알까 혹시 내 것을 도용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 그런 면에서 ‘농경과 원예’는 새로운 시각으로 발행되는 것 같아. 새로운 기술을 소개하고 그냥 좌절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잖아. 너를 읽으며 점점 내 자신을 반성했어. 농경은 어차피 죽어가고 있다는 불행한 생각을 했거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어. 미래가 없는 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것이 어디든 말이야.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너를 구체적으로 알아가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었단다. 

 기억에 남는 기사 중 하나가 바로 서천군수와의 인터뷰 내용이었어. 농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계셨지. 서천의 명품쌀 생산단지를 조성하고 농산물 공동브랜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심어주고 청보리 사업등 노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갈 수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었어. 사실 이상적인 생각보다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고 실천한다면 농촌에 그리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농민이 정직하게 생산하고 소비자는 믿고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이상적인 것은 없겠지. 군수와 지방자치단체의 구체적인 지원과 방안들이 더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농민이 기를 펴고 살지. 또한 지도자의 생각을 듣고 알아가면서 농촌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단다. 너에게는 마법 같은 힘이 존재하는 것 같아. 이 마법은 걸리기 전까지는 불신하다가 한 번 걸리고 나면 희망과 소망을 갖게 하는 마법 말이야. 
 얼마 전 오빠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골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어. 나이는 먹어가고 직장에서는 보이지 않게 밀려나고 가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오빠에게 널 소개 했단다. 어릴 적부터 나보다 아버지를 따라 더 농사를 지었던 오빠는 너를 소개하자 기겁을 했지. 너도 그 모습을 보았다면 처음 나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을 거야. 내가 생각해도 농경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는 오빠로서는 네가 반갑지 만은 않았겠지. 하지만 몇 번 읽어 보라는 권유를 하자 마지못해 읽고는 오빠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단다.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부분들이 너로 인해 구체적인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지. 아버지 시대에 지었던 농사보다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해 있는 모습을 보고 오빠도 적잖게 놀랐을 거야. 그리고 오빠 마음에 네가 작은 불빛을 전달했단다. 바로 보령에서 아름다운 귀농을 하고 있는 김경탁씨의 기사를 읽고 자신에게도 작은 소망이 생겼다면서 좋아했어. 보령에서 버섯 재배를 하며 직장생활의 연장이라고 말하는 김경탁씨 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귀농을 꿈꿀 수 있었거든. 아마 오빠는 ‘귀농’하면 막연하게만 생각했을 거야. 그야 당연한 것이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너를 통해 그분을 소개받고 마음만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가는 방법을 배웠단다. 이제는 단순한 농업이 아닌 배우고 익히며 기술을 전달받는 새로운 길을 알게 된 것이지. 이런 소중한 것들을 나눌 수 있게 만들어준 너에게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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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 상 ]곽동운-내 꿈을 펼쳐주었던 항공기 잡지
 
 작품명 :
내 꿈을 펼쳐주었던 항공기 잡지
                                                                               
시원스럽게 푸른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비행기! 그 비행기들에 흠뻑 빠져있을 때가 있었다. 새처럼 날아오르는 항공기들의 모습들을 가만히 지켜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귀를 찢을 듯한 항공기의 굉음도 내게는 한밤의 세레나데처럼 들릴 정도였다.
잠깐! 전 국민 잡지읽기 수기 공모에 항공기이야기가 왜 나오나? 본인은 이번 공모전을 공군참모총장배 항공경진대회로 착각하는 건 아닌가? 아니다. 나는 이번 공모전의 취지를 누구보다고 잘 알고 있다. 또한 잡지에 대한 재미있는 기억을 가슴 속 깊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공모전을 보고 이거다 싶어 응모하게 된 것이다.
다시 비행기이야기로. 난 하늘을 나는 모든 종류의 항공기들을 다 좋아했다. 수송기, 해상초계기, 훈련기, 수송기, 헬리콥터, 1차 대전 때 쓰이던 복엽기까지... 하지만 그 중에서 역시 제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전투기였다. 날렵하게 생겼으면서 강력한 무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전투기를 가장 멋있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비행기를 사랑하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그 욕구를 어떻게 푸느냐는 것이다. 매일같이 도시락 싸들고 김포공항에 나가 이착륙하는 여객기들을 감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전투기가 좋아 집에다 F-18전투기를 떡하니 모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백억 원 하는 전투기 값은 둘째 치고 집에 모셔둘 자리는 있는가? 어렸을 때 우리집은 가난해서 내 방도 없을 정도였다.
비행기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항공기 사진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연스레 항공잡지를 찾게 되었다. 그 때가 고1이었는데 그 시절부터 항공잡지를 본격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직접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몇 권 살 수 있었다. 돈 없는 고등학생에게 헌책방의 과월호는 복음서와 같은 존재였다. 어차피 내가 항공잡지에서 속보성이 강한 정보를 알아낼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난 비행기 사진을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내 헌책방 투어는 시작됐다. 황학동(청계천) 도깨비 시장을 기점으로 영등포, 청량리, 미아리, 용산 등 서울의 주요 지역을 두루두루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동네의 헌책방을 다니다가 차츰 영역을 넓힌 것이다. 누구는 희귀한 고서들을 사기 위해 헌책방 투어를 한다는데 나는 항공기 잡지를 사려고 헌책방을 다니니 헌책방 주인아저씨들이 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치였다. 한편 이상하게 내가 사려는 항공기 잡지는 헌책방의 메카라는 청계천보다 동네의 후미진 헌책방에서 좋은 매물이 숨어 있었다. 어떤 헌책방에서는 내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항공잡지를 떨이로 내게 팔았다. 권당 한 2천원 정도를 예상했었는데 오백원에 샀으니 그거야 말로 대박 아니었던가! 

이런 짜릿한 맛 때문에 난 매 주말마다 헌책방 투어를 다녔다. 먼지 쌓인 책들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항공기 잡지를 들어올렸을 때의 그 기분이란! 그 기분에 흠뻑 빠져있다가 헌책방의 ‘책탑’을 쓰러뜨려 주인아저씨한테 심하게 혼이 난적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책탑을 쓰러뜨린 것은 양반이었다. 당시 난생 처음으로 누명 아닌 누명을 써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때는 상당히 심각했었다.
 
영등포, 청량리, 용산, 미아리. 쩝! 그렇다. 이상하게 내가 항공기 잡지를 산 헌책방들을 홍등가 근처에 있었는데 유독 그쪽 동네에서만 내가 원하는 항공기 잡지를 넉넉히 구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성매매 특별법이니, 뉴타운 개발이니 해서 집장촌들이 많이 사라졌고 많이 정화가 됐지만 당시의 그 지역들은 상당히 선정적이었다. 좀 무섭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난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았다. 호기심이 왕성하던 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난 당시 날렵한 전투기 사진만 보면 오르가즘(?)을 느꼈던 터라 그런 선정적인 유혹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놈 취급했다. 아니 변태로 취급했다.
당시 국내에서 발간되는 항공기 잡지는 <XX 항공>이 유일했다. 내가 헌책방 투어에 나섰을 때가 199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 잡지의 창간호가 나온 후 1년 정도 된 시점이었다. 당연히 당시 국내에서는 항공잡지, ‘monthly aviation'이란 개념조차 잡히지 않을 때였다. 지금이야 격년마다 성남에 있는 서울공항에서 서울 에어쇼라도 하지 그 때는 그런 항공이벤트 개념도 없을 때였다.
사정이 이랬으니 내가 얼마나 목에 힘을 주고 다녔겠는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지친 까까머리 동급생들을 붙잡고 비행기 이야기를 해줬는데... 친구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내 말에 경청을 해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난 비행기 탄 느낌으로 항공기 잡지 구매용 헌책방 투어를 개척담처럼 입에 올렸다.
거기가 문제였다. 그냥 헌책방에서 잡지를 샀다고 했으면 됐는데 시시콜콜하게 구입한 동네 이름까지 말했던 것이다. 그 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일이 크게 번지게 된 것이다. 난 분명히 항공기 잡지를 구매하러 헌책방 투어를 했다고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들은 그것을 완전히 비틀어서 ‘집장촌 투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개구쟁이 녀석들이 일부러 그렇게 비틀어서 불렀을 것이다. 그 녀석들이 재밌으라고 한 이야기일 줄 몰라도 내게 후폭풍은 거세게 밀려왔다. 
 
나를 골려댔던 녀석들의 이야기도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었다. 어떻게 학생이 그렇게 집장촌만 쏙쏙 골라 다녔냐는 것이다. 어떤 녀석은 나를 ‘빨간’ 잡지 수집 전문가로 오해했고, 있지도 않은 도색잡지를 빌려달라고 생떼를 썼다.
나는 쌍수를 들고 부인했었다. 난 그쪽 동네가 집장촌인 줄도 몰랐고, 헌책방에서 무슨 포르노 잡지를 파냐고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증거도 보여줬고 논리적으로 설명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호기심으로 가득찬 나이에 있던 고등학생들인 또래 친구들에게 나의 ‘투어’는 키득키득 거리기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내가 부인하면 부인할수록 오히려 말은 더욱더 부풀려졌고, 결국 그 말이 담임선생님에게까지 전달되어 난 기합을 받기까지 했다. 또한 집에서도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덕분에 용돈이 한 달 동안 끊긴 적도 있었다. 
 
그런 오해들까지도 유쾌하게 만들었던 내 비행기 사랑이 요즘은 많이 식은게 사실이다. 몇 년 전,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전투기들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2차대전 당시 파시스트 세력들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던 용맹스럽고 멋진 P-51, F4U, B-29가 우리 땅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 사실들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전쟁통에 무장한 세력끼리 적대행위를 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비행기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전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혼란을 겪었지만, 요즘도 유유히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유쾌해지는 건 여전하니까. 또한 나는 국산 최초의 초음속 항공기인 T-50에 열광했다. 그렇다. 비행기는 비행기이다. 거기에 인마 살상용 벙커버스터를 실어 보낼 수도 있고, 꿈을 실어 보낼 수도 있다. 가미가제의 임무를 띤 제로센에는 욱일승천기가 펄럭이겠지만 비행사 생텍쥐페리 옆에는 어린왕자가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 꿈과 희망이었던 비행기에게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게 해준 내 항공기 잡지들! 지금은 내 방 한편에 꿔다둔 준 보릿자루처럼 쳐 박혀 있지만 그것들이 있어 내 학창시절은 유쾌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내 손때가 묻은 항공기 잡지들을 꺼내보고 잠이 들고 싶다. 그러면 오늘밤 꿈에 생텍쥐페리와 어린왕자가 같이 찾아오려나? 내 마음 속에서 종이비행기 한 장 접어 날려 보낸다. 어린왕자 안녕? 생텍쥐페리님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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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잡지라는 이름의 야생화를 피우기 위하여
 
 작품명 :
잡지라는 이름의 야생화를 피우기 위하여
                               
잡지는 내게 길동무다. 안산-서울 지하철 여행을 한 지도 어느덧 7년 째, 그 동안 지하철에서 책도 읽어보고, 공부도 해보고, 게임도 해봤지만 역시 길동무로는 잡지가 최고다. 그러다보니 지하철역에 들어서면, 지하철이 어디쯤 와있나 전광판을 확인하곤 재빠르게 가판대를 살펴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오늘 아침 내 눈에 띈 건 모 시사 잡지. 88만원 세대 이야기라면 신물이 나게 많이 봤지만, ‘88만원 세대의 슬픈 사랑’이라. 어쩐지 구미가 당긴다. 일단, 헤드라인만 믿고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표지사진이 약간 촌스러운 것 같아 영 찜찜하다.
“이번 기사 흥미롭더라. 근데 표지가 좀 촌스러워. 폰트 색깔이 이게 뭐니 진짜.” 스터디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잡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면서 구시렁거렸다. 이에 친구 왈, “기사 재밌으면 됐지, 뭘 그렇게 따져? 그럭저럭 봐줄 만 하구만.” 확실히 난 표지 디자인과 헤드라인을 심하게 따지는 편이긴 하다. 폰트나 레이아웃 하나도 쉬이 넘겨보지 않고, 기사를 읽다가 오탈자 하나만 발견해도 잡지의 수준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렇게 투덜투덜대면서도 잡지의 표1부터 표4까지 모든 글자를 꼼꼼히 읽는다. 잡지 한 권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그 수고로움이 빤히 그려지기 때문에,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전공부터가 신문방송학인데다가 대학 영자신문사에서 3년 동안 잡지를 만들었던 터라 내게 잡지는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가 잡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생활의 8할 잡지
 
대학시절 내게 잡지는 남자친구나 다름없었다. 모든 생활이 학교 신문사 일정에 맞춰 돌아갔고, 고생해서 만든 잡지가 나오는 전날 밤엔 설레고 두근거려서 잠을 못 이루곤 했다. 잡지는 내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게 해줬고, 사람관계를 돌이켜 보게 했으며, 조직과 개인이 맞물리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를 가르쳐줬다. 여담이지만 신문사 생활을 하면서 주량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내겐 잡지가 성장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물론 늘 좋은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기사를 쓰려 했으니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으면 한숨부터 나왔다. 기사를 쓸 때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 ‘이번만 끝나면 때려치워야지’를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생활을 3년을 했다. 보통 임기가 2년임을 감안하면 나는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후배들이 종종 묻는다. “어떻게 3년씩이나 하셨어요? 전 임기 채우기도 벅차고 힘든데…” 내가 3년이라는 시간을 버티고 또 편집국장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보람 때문이었다. 기사를 쓸 때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막상 잡지가 나오면 그 고생을 그대로 까먹었다. 그저 또 다시 해냈다는 생각에 보람되고 기쁘고 마냥 행복했다.
 

또한, 잡지는 내게 기자의 꿈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은행원이나 교사와 같은 안정된 직업을 갖길 원하셨으니, 툭하면 밤을 새는 학교 신문사 활동을 좋아하실 리 없었다. 수습기자에서 정기자가 되기까지 한 학기 내내 갈등을 겪었지만 내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고대하던 첫 잡지가 나오던 날이었다. 나는 부모님 앞에 잡지를 보여드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이게 그 동안 고생하며 쓴 내 기사라고, 내게는 1등을 했던 성적표보다 그 어떤 상장보다 이 기사가 더 가치있고 자랑스럽다고. 부모님은 결국 내 이름이 적힌 바이라인 한 줄을 위해 평생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내게 백기를 드셨고 그 이후부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파란만장 잡지 애정사
 
이렇게 시작된 잡지 애정사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그 정점은 편집국장으로서 처음으로 잡지를 만들었을 때였다. 방학 기간 내내 신문사에 매달려 잡지를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후배들을 다그치고 또 다그쳐서 마음에 들 때까지 기사를 새로 써오게 시켰다. 편집장이 되더니 사람이 변했다며 후배들은 볼 멘 소리를 했지만, 불후의 명작을 만들겠다는 내 열의는 지칠 줄을 몰랐다. 드디어 편집국장으로서의 첫번째 잡지가 나오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신문사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더랬다. 수차례 해온 배포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잡지 배포시각은 아침 7시 반, 이제나 저제나 하고 눈이 빠져라 잡지를 실은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뒤늦게 걸려온 전화 한 통. 공장에서 다른 잡지랑 헷갈려서 잘못 가져왔단다. 9시쯤에나 도착할 것 같다는 이야기에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운명의 9시, 잡지를 실은 트럭은 무사히 도착했다. 신이 나서 잡지를 학교 곳곳에 나르는데, 후배 한 명이 잡지를 몇 장 넘기더니 나를 불러 세운다. “언니, 기사 헤드라인이 없어졌어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무슨 소리하냐며 잡지를 받아들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했다. 말 그대로 헤드라인이 빠진 상태로 인쇄가 되었던 것이다. 디자인실 측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파악해보니 컴퓨터에서 필름으로 출력하는 과정에서 설정을 잘못한 듯 했다. 디자인실 사장님은 인쇄되지 않은 부분만 스티커를 붙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셨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무조건 전량 재인쇄를 해달라고 이야기 했다. 한참을 곤란해 하시던 사장님은 그 동안 첫 잡지에 대한 내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고 계셨기에 결국 내 요구대로 해주셨다.  

배포날짜를 새로 잡으며 사태를 수습했지만, 가슴엔 돌덩이를 얹은 듯 했다. 눈앞에는 배포되지 못한 송장 같은 잡지들이 쌓여있었다. 이미 배포된 잡지들은 회수하여 다시 트럭에 싣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내 손으로 만든 잡지를, 내 손으로 뿌린 잡지를 결국 내 손으로 거둬서 내 손으로 버렸다. 잡지들을 폐지 위로 던지고 있는데, 소각장 아저씨들이 수군거린다. “이 멀쩡한 걸 왜 다 버린대?” 수군거리는 아저씨들의 말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학생들 손에 내가 만든 잡지가 들려있는 것만 봐도 기뻐했던 나였다. 강의실에 누군가 잡지를 무심히 놓고만 가도 안타까워했던 나였다. 그랬던 나인데 눈 앞 어지러이 펼쳐져 한가득한 잡지무덤이라니… 그 멀쩡하게 나왔어야할 잡지들을 그대로 생매장시키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았다. 필름 확인을 디자인실 측에만 맡겼던 게 화근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편집국장으로서 마지막 하나까지 체크했어야 했는데 종이출력 최종본만 봤던 내 자신에 화가 났다. 자그마치 팔천 부였다. 한 달 동안 밥도 제대로 못먹고, 잠도 제대로 못자며 공을 들인 잡지였다. 그런 잡지를 내 손으로 버릴 줄이야. 후배들 앞에 차마 울 수도 없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난 3년이 영화필름 감기듯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날의 사고는 내게 큰 교훈을 줬다. 절대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 때부터 내 책상 한 쪽에는 그 때의 헤드라인 빠진 잡지가 놓여있다. 성가신 마음에 대충 해야지 싶다가도, 그 잡지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 때의 사고 덕분에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꼼꼼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자세를 갖게 됐다.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도 문제의 잡지를 볼 때면 가슴 한 구석이 저릿저릿하다. 내가 잡지를 꼼꼼히 볼 수밖에 없는 이유, 글자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파란만장 잡지 애정사에 기인한다. 잡지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 마음을 알기에 차마 함부로 볼 수가 없다.
 
 
고민하는 잡지인 
 

학교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한 학기 3차례씩 총 18권의 잡지작업에 참여했고, 단신기사를 제외하면 23개의 메인칼럼을 썼다. 정규잡지만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 학교에는 타 학교 영자신문사에는 없는, 별난 전통이 있는데 바로 연습 잡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방학교육기간 동안 만드는 연습잡지, 이름 하여 The Fresh Journal. 이 연습잡지는 수습기자들에게는 본 잡지 기사를 쓰기 전에 기사 연습을 해보는 기회가 되고, 정기자와 부장들에게는 차기 편집국에서 맡을 역할을 예행 연습해보는 의미를 가진다. 다음 학기 잡지에서 만들 칼럼을 TV에서 특집 형태로 방송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처럼 실험해볼 수도 있다. 실험 결과는 3박 4일간의 멤버십 트레이닝 중 오비 선배들과의 밤샘 평가회의를 통해 신랄한 평가를 받는다. 현역 기자들에게는 정규잡지보다 만들기 더 어렵고 무서운 잡지인 셈이다.
연습잡지를 만들던 당시에는 이게 무슨 삽질인가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때론 짜증도 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프레시 저널만큼 좋은 기회도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나하면, 연습잡지의 절반은 신문사 내부에 대해 고민해보는 내용으로 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잡지의 정체성 고민부터 시작해서 대학언론인으로서 잡지에 어떤 내용을 실어야 하는가, 우리 잡지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우리 편집국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운영될까 등등 수 많은 고민을 한다.
내가 만들었던 잡지에는 상업광고가 없었다. 광고를 싣더라도 공익광고만 실었다. 덕분에 기성언론처럼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율적인 편집이 가능했다. 단, 학교의 입김에서 자유롭긴 어려웠다. 학교의 재정 지원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학교는 인쇄매체에서 인터넷 매체로의 변화를 요구했다. 인터넷판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폐간을 시킬 기세였다. 인터넷 매체가 가진 영향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영자잡지의 특성상 무작정 인터넷판으로 변환하면 고사될 것이 뻔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학언론은 안팎으로 시달렸다. 대학언론의 위기- 이건 대학언론사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해본 문제일 것이다. 수업도 빠지고 밤 새가며 열심히 쓰고 만든 내 기사를, 내 신문을, 내 잡지를, 내 방송을 학우들은 읽어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기사에 깊이가 없다고 말한다.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많은 학생기자들이 독자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운다. 어떤 기사가 더 읽힐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학내 언론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또 고민한다. 그런데도 꾸준하게 외면을 받는게 현실이다. 대학내일, 캠퍼스헤럴드와 같은 잡지들은 배포되기가 바쁘게 사라져가고 내가 만든 내 새끼들은 쓰레기통에 쳐박혀 있는걸 볼 때마다 속상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다음에 더 잘만들어야지 다짐하는 수 밖에.  

외면하는 독자와 탄압하는 학교 사이에서 학생기자들의 고민은 깊어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생기자가 직면해있는 많은 문제를 풀기 위하여 신선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취합해서 펼쳐놓는 곳이 바로 연습잡지였다. 그 때 우리가 머리를 맞대며 고민한 결과는 ‘독자에게 길을 묻자’였다. 우선 독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 동안 받아왔던 독자엽서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따라서 설문지를 만들어 수요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분석해 연습잡지에 실었다. 우리 잡지의 부족한 점은 한 학기에 세 번 발행되기 때문에 발행주기가 일정치 않아서 학생들에게 월간지인지 계간지인지 정체성이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또한, 학술적인 기사가 많아서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다. 기본 레이아웃 작업 역시 학생기자들 머리에서 나오다보니 비주얼적으로 촌스럽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러한 독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기사를 쓰다보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연습잡지 평가회의에서는 보통 기사에 대한 비평이 주를 이루지만, 주제의식 자체를 화두로 삼아 토론을 하기도 했다. 문제점이 도출되었으니 해결방안을 찾고 발전방향을 다함께 모색해나가는 것이다. 양질의 컨텐츠를 만들어 내실을 갖추고,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예쁜 잡지를 만들고, 독자들과 지속적으로 소통을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을 매 잡지에 풀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프레시 저널은 삽질이었다. 오비가 된 후, 연습잡지를 부담스러워 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삽질 없이 저절로 생기는 우물은 없다. 좋은 기사, 좋은 잡지에 목마른 기자들이여, 그대 열심히 삽질하라.”라고.
 
 
디지털 시대에 잡지가 대처하는 방법, 하나
 
이는 내가 만들었던 아마추어 학생 잡지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점 한 켠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시사지, 패션지, 전문지 등 각종 잡지를 보면서 디지털 시대의 잡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책 위기론이 대두되었으나 소위 아날로그 감성이라 불리는 독자들의 감수성은 활자물을 지속가능하게 했다. 잡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잡지시장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잡지만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발전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에 발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잡지에서 고급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정보가 잘 정리된 인쇄물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잡지를 선호한다. 신문 역시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신문은 휴대성에서 잡지에 크게 뒤진다. 때론 어떤 잡지를 보느냐에 따라 상대를 가늠할 때도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잡지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겉보기 등급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잡지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잡지는 보다 고급화 되어야 하고, 전문화 되어야 할 것이다. 잡지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독자의 눈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양질의 컨텐츠를 확보함으로써 고급지 차별화 전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적인 문제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게 잡지의 표지는 이 잡지를 볼 것이냐, 보지 않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다. 모 경제지 잡지 기자로 일하고 있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학생기자들이 만드는 잡지나, 프로기자들이 만드는 잡지나 비슷한 수준의 디자인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지루한 경제기사들을 더 재미없게 만들던 잡지의 디자인! 독자의 읽고자 하는 의욕을 꺾어버리는 그 밋밋한 편집! 물론, 모든 잡지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잡지의 디자인이 비슷비슷한 느낌을 주면서 자신만의 색을 가지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 한국 잡지의 디자인은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2년 전, 독일의 저널리즘 스쿨에 탐방을 갔을 때의 일이다.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잡지를 몇 권 받아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만 잡지 표지에서부터 기가 죽고 말았다. 똑같은 학생인데, 그들이 만들었던 잡지와 내가 만들었던 잡지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기사의 내용이야 독일어로 쓰여 있으니 기사의 질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눈으로 넘겨봤던 그 잡지는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예뻤고, 미적 감각이 부족한 내가 봐도 뭔가 ‘있어’ 보였다. 어디에서 이러한 차이가 오는지 궁금해서 잡지작업에 참여했다는 학생에게 물었다. 그 학생은 그저 배운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성급한 일반화를 시켜서는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운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 환경 자체가 부러웠다. 보다 ‘보기 좋은 잡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잡지 관련 교육에 있어서 어느 정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멋있는 편집 디자인을 연구하고, 이를 발전시킬 전문 인력을 양성함으로써 잡지의 질적 상승을 꾀해야 한다. 편집디자인을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잡지는 한번 보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소장가치를 지닌 인쇄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잡지가 대처하는 방법, 둘
 
잡지는 ‘소통’의 측면에서 다른 활자매체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 책은 발행주기라는 게 딱히 없고, 오랜 세월 꾸준히 읽히고 다시 읽히면서 책 속의 담론이 재생산된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서평과 독서토론 등을 통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하지만 잡지는 발행주기라는 어느 정도의 유통기한이 있으며, 책에 비해 소모품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문제는 이 정보가 즉각적인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신문에 비해 속보성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신문과 잡지 모두 온․오프라인 상에서 공존하면서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기에 발행주기가 무의미해졌다고 볼 수도 있으나 신문에 비해 정보 업데이트가 늦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잡지산업이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자 모니터 요원 시스템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모니터 요원들이 잡지를 분석, 비평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컨텐츠를 가지고 2차 생산을 하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블로그 등을 활용하여 잡지 속 이야기를 밖으로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또다른 독자들과의 쌍방향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이들 모니터 요원이 일종의 홍보대사의 역할도 담당할 수 있다. 블로그의 경우, 트랙백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면 관련 정보가 쌓이고 쌓이면서 거대한 지식네트워크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온라인 상에서의 거대한 지식 네트워크를 보다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도 있다. 잡지는 잡지 나름의 고유의 매력이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보다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보기 어렵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다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다양한 종류의 잡지가 있기 때문에 그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어렵겠지만, 잡지기사만 한 곳에서 모아 볼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통합 잡지 미디어가 있어서 잡지를 통째로 휴대기기에 담아서 볼 수 있다면, 잡지시장이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 IPTV가 활성화 되면, 드라마를 보다가 드라마 주인공이 입은 옷의 정보를 바로 찾아보고, 구매까지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잡지에 접목시켜 보자면, 휴대기기에 잡지를 내려받아 보고, 관련 정보를 그 자리에서 검색해보는 일이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상호보완 된다면, 잡지산업이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잡지라는 이름의 한 송이 야생화를 피워내기 위하여
 
백두산 고원의 모진 바람과 추위는
그곳 야생화에게는 오히려 축복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밑둥을 꺾어버리는 강풍을 이겨내려고
뿌리를 깊이 내리다 보니 야생 동물에게 입과 줄기를 뜯어 먹혀도 말라 죽는 일이 없습니다.
꿈처럼 지나가 버리는 짧은 봄과 여름 동안에
벌과 나비를 유혹하느라 다투어
현란한 빛깔의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냅니다.
뼈까지 얼려버릴 듯한 북쪽 나라의 삭풍은
한순간 백두산을 낙원처럼 만드는 힘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을 내놓기 위해
3백번이나 진통을 겪은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동업자’의 양심상 앞으로는 더 즐겁고 좋은 일만
있으리란 말은 못하겠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동반해야
비로소 빛이 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끊임 없이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진절머리나게 서로 저주하고 욕하며 갈등하십시오.
그래서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신묘한 빛깔의 꽃을 피워내
기성세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길 바랍니다. 
지옥에 사는 걸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생활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요.
 
이 글은 내가 만들었던 잡지의 300호 발행을 맞이하여 모 시사지의 편집장님이 보내주신 축사이다. 잡지 산업에 불어닥친 뉴미디어의 바람은 오히려 축복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북쪽나라의 삭풍에 잠시 뼈가 시릴지라도 분명 잡지가 미디어 산업에 더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게 하는 순기능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잡지라는 이름의 한 송이 야생화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 위해선, 그리고 열매를 맺기 위해선 앞으로 더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 고통의 과정을 이겨낸 후 달콤한 열매를 얻기 위해 오늘도 나는 씨를 뿌린다. 마지막으로, ‘잡지산업의 동업자로서 끊임없이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진절머리 나게 서로 저주하고 욕하며 갈등할’ 그 날이 오길 고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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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 별 상 ]조선행 - 군대, 그리고 잡지의 추억
 
 작품명 :
군대, 그리고 잡지의 추억
 “이○○ 병장님! 『맥○』 10월호 사왔습니다!”
 “그래! 야 내가 이것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군 시절, 난 이런 저런 의미에서 선임들에게 예상치도 못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지냈다. 물론 내가 생활 잘하고 시키는 일 잘한 탓도 있긴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선임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던 이유는 아마 잡지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잡지라 할 수 있는 『맥○』. 흔히 잘 모르는 사람들은 커피 브랜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상은 그 내용 하나하나 혈기왕성한 청년 군인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 찬 ‘잡지’다. 비유하자면 그 옛날 『선데이 서울』의 현대판 잡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매 호마다 당대 최고의 레이싱걸, 섹시 여가수, 여배우들의 화보를 표지로, 내용도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유머, 패션, 자동차, 기계 등등이 실려 있다 보니, 외부와 단절된 군대라는 상황 하에 굶주려있던 우리들로서는 당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만들던 잡지였다.
 하지만 내가 상병을 갓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 연대 간부님의 엄명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껏 중대원들이 휴가, 외박을 다녀올 때 마다 목숨을 걸고 공수해 애지중지 모아온 그 잡지들을 몽땅 불태워야만 했다. 군대에서 제공되는 도서 및 간행물을 제외한 잡지가 모두 ‘불건전 도서’로 분류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한창 훈련 중이던 와중에 어떤 ‘정신 나가신’ 선임 한명이 경계근무지에서『맥○』을 몰래 가져가 보다가, 당시 훈련 상황을 둘러보시던 부연대장님께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군 생활 사상 최악의 조치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고, 이 날을 일제강점기를 넘어서는 탄압과 압제의 날이라 불렀다. 더욱이 난 누구보다도 더 씁쓸함을 느꼈다. 이제 좀 선임 눈치 덜 보며 잡지를 볼 수 있나했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조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이후로 우리 중대에선 『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한두 명 용기 있는 자들이 휴가 복귀 시에, 전투복 속에 숨기고 숨겨가며 사오기는 했지만, 번번이 소지품 검사에서 압수당하곤 했다. 우리는 마치 독립운동을 하듯 몰래 사온 『맥○』을 탐독했고, 잡지 문제에 엄격한 간부님이 당직근무를 서는 날이면 그 긴장은 배가 되곤 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 아니던가. 더구나 한창 혈기왕성할 시기에 군대에 입대해서 그런 잡지로나마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할 텐데, 그것마저 못 하게 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렇게 2년간의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나도 이제는 전역을 하여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난 군입대전까지는 잡지와는 거의 인연이 없던 사람이었고, 잘 보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굳이 잡지를 본 것이 있다면 지하철에서 심심풀이로 사보던 1000원짜리 영화잡지나, 은행에 가서 시간 때우기로 들춰보던 여성잡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깟 내용도 없는 잡지에 목을 매던 그 시절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왠지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우리 중대 생활관 책장에 보물처럼 자랑스럽게 꽂아놓았던 그 잡지들. 하도 봐서 겉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봤던 그 잡지들. 화장실갈 때 꼭 챙겨가던 그 잡지들. 간부님에게 걸릴까봐 밤에 불 끄고 몰래보던 그 잡지들. 만약 잡지가 없었다면 그 지겹던 군 생활을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잡지. 단어 뜻 그대로 잡스런 내용들이 섞여있는 책이다. 누군가는 이런 잡지를 ‘내용도 없는 삼류 도서’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에는 물론 과거의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잡지를 통해, 난 어떤 책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독특한 지식들을 알 수 있었고, 어떤 책도 풀어줄 수 없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갈수록 잡지들은 다양해지고 있다. 분야별로 마니아적인 내용을 담은 전문잡지들이 이미 있어왔으며, 또한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서점을 방문할 때마다 한 귀퉁이에 모여 앉은 잡지들을 보면서 난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저들은 분명 ‘별종’이라고. 이것저것 뒤섞인 잡종이지만 그것도 은근히 매력이 있지 않은가? 그 누군가를 위해 오늘도 흥미로운 내용으로 무장한 채 자태를 뽐내는 잡지들. 그것들은 아름다운 ‘잡종’이자 그 어느 것보다 빛나는 ‘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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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 별 상 ]임채수-‘잡지의 숲’ 산보기(散步記)
 
작품명:  ‘잡지의 숲’ 산보기(散步記)                  
        
  <프롤로그>
  서울 시내 열두 군데 초등학교에서 다섯 달 모자란 37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단(敎壇)생활을 명예퇴직으로 접은 후, 은퇴자 행렬에 합류한 지가 올해 8월 말로 10년이 된다. 교직을 떠날 무렵에는 마치 안온한 ‘온실(溫室)’에서 거친 ‘노지(露地)’로 나 앉는 것 같은 일말의 두려움으로 격변하는 세월의 흐름을 맞았지만,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정해진 시간에 출· 퇴근하던 일상적 틀 말고는 변함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여는 마을뒷산 산책을 시작으로, 밥 때 (세 끼 꼭)챙겨 먹고 잘 시간(자정 전)이 되면 자리에 드는 등 평소의 생활리듬을 크게 흩뜨리지 않은 것이다. 아침식사 후, 아내와 차(茶)를 들면서 친인척· 지인들의 경조사나 모임, 예정된 산행이나 여행 계획, 또는 시시콜콜한 신문· 방송 등의 가십거리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재로 꾸민, 출가한 큰 딸이 쓰던 방에 들어앉아 노트북 컴퓨터를 켜, 이메일을 열어보고, 배달된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언론사 별 신문기사들을 훑어보면서 종래 해오던 대로 글쓰기에 참고할 만한 칼럼을 출력시키거나, 스크랩 하여 분류하여 정리하고 나면 대강 9시가 된다. 이후는 조류 보호 단체 교육· 홍보활동과 공공 도서관에서 도서 정리를 돕는 등 주 3회 자원봉사활동,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이나 산행, 관심 분야 공개강좌나 심포지엄· 학술회의 등을 수강 또는 방청하는 것 등이 바깥 소일거리이고, 외부 예정이 없는 날에는 서재에서 우리네 삶을 소재로 한 글쓰기와, 잡지를 포함해 ‘생활 속의 이야기’를 다룬 가벼운 내용의 산문집(散文集)들을 읽는 것이 주된 일과이다.
  
  나의 ‘글쓰기’는 1980년대 후반(현직 교사 시절)부터 교육문제, 특히 관심분야인 청소년들의 ‘자연· 환경교육’ 문제에 초점을 맞춘 칼럼을 써, 일간지 등에 투고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는데, ’88. 8. 6 <동아일보> ‘論壇’란에 게재된 “靑少年「野營修鍊活動」質을 높이자”를 시작으로 꾸준하게 계속하여 왔던 바, 무던한 사이의 지인들로부터, “책으로 출간해보라”는 권유를 받을 만큼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던 글을 오려내 정리한 두꺼운 스크랩북들이 쌓였다. 퇴직 후에는 원고분량이 4-7매 정도인 칼럼보다는 15-30매 정도의 ‘생활 속의 이야기’들을 주로 하여 써 오다가, 우연한 기회에 계간 <隨筆春秋>에, 역시 자유기고 형식으로 보낸 “일자산(一字山)의 사계(四季)”제하 연작수필이 2007년 여름 호 등단작(登壇作)으로 뽑혔다는 연락을 받게 되면서, ‘작가(作家)’라는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해, 이 분야에 더욱 정진하는 계기로 삼고 있으며, 잡지라는 매체에 자유기고를 통해 ‘참여’하는 인연도 맺어졌다. 
 
  <잡지에 얽힌 추억담 셋>
  ① 내가 최초로 잡지와 대면한 것은, 6· 25전란 복구기인 1953년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인 유순형 군에게서 빌려서 본,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월간지<새벗>, <學園>으로, 만화가 가장 재미있었고, ‘얄개 전’ 같은 연재소설들도 좋았으나, 초등학교 아이들이 읽기에는 좀 어려운 내용도 있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이다. 이 잡지의 주인인 양조장 집 아들 순형 군은 당시 궁벽한 시골에서는 드물게 전교생 400여 명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학원> 같은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외에도 ‘동아전과’ 학습 참고서, 동화책 ‘쌍무지개 뜨는 언덕’, 만화책 ‘밀림의 왕자 타잔’ 같은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두고 읽을 수 있었던 친구로, 반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았으나, 책을 빌려달라는 아이들에게는 누구나 선선히 책을 내주는 바람에, 얼마 가지 않아 책이 너덜너덜하게 되는 일이 있어도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거쳐 사범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휴일이나 방학 때면 자주 친구네 집 사랑채, 친구의 아버지가 서재를 겸해 쓰시던 다다미방에서, 서가에 정리된 <思想界, 월>, <新女性, 월>등 과월호 잡지와 다른 책들도 ‘열심히’ 읽곤 했는데, 당시 나에게, 친구 아버지의 서재는 바깥 세상사에 대한 유일한 ‘정보원(情報源)’이었다. 내가 다니던 공주사범학교에는, 지금도 원로 수필가로 활동하시는 은사 원종린 선생님의 주관 하에 도서 분류체계)를 갖추고 정기간행물 코너까지 구비된 ‘도서실’이 있었으나, 학교에서 집까지 30리 길을 아침에는 버스, 저녁에는 걸어서 통학해야 하는 형편이다 보니, 도서실을 자주 찾지는 못했고, 대출받은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반납하곤 했으나, 점심시간에 도서실 정기 간행물 코너는 꽤 자주 찾았었다. 이때가 나의 잡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발아기(發芽期)’다.
  ② 1964년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면서 구독했던 잡지는, 교직생활과 관련되는 잡지로 <교육자료: 교육자료사, 월>, <새교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전신 대한교육연합회, 월>이 있었는데, 교직의 전문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간행물이라기보다는, 일선 교사들의 주요 업무의 하나인 주간(週間) ‘학습지도계획안(學習指導計劃案)’을 짜는데 참고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밖에 구독했던 잡지로는,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종합지, <新東亞, 월>, ’70년대 들어 (주)한국 브리태니카에서 창간한 <배움 나무, 월>, <뿌리 깊은 나무, 월>, <샘이 깊은 물, 월>로 이어진다. 꽤 상당 기간 구독했던 ‘신동아’를 통해서는 논 픽션이라는 장르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배움…’, ‘뿌리 깊은…’, ‘샘이 깊은…’을 통해서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개안(開眼)의 장(場)’이었었다는 느낌이 남아있으며, 묵은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한창기(발행인)의 창간사는 다음 내용이었다.
 
   “(…) ‘잘 산다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다. ‘어제’    까지의 우리가 안정은 있었으되 가난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물질가치로도 더 가멸돼 안정이 모    자라다. 곧 우리가 누리거나 겪어 온 변화는 우리에게 없던 것을 가져다주고 우리에게 있던 것    을 빼앗아 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나라의 자연과 생태와 대중문화를 가    까이 살피려 한다. 또 이 땅의 교육이 ‘생각하는’ 공부를 시키는 일을 힘껏 거들고, 학문과 토박    이 민중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도록 힘쓰겠다.(…)”
                                                                            
  ‘참 고집스러운 분’으로 생각했던 그의, 우리 전통문화와 민속을 다룬 글, 또는 문화시평(文化時評)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은, 제호( ‘뿌리 깊은 나무’)가 시사하는 대로 커다란 담론, 예컨대 남북통일 문제나 우리 민족의 운명 같은 내용은 없었고, 오히려 아주 작은 소재이거나 가느다란 이야기 즉, 한창기의 ‘언어’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 인상적이었고, 이런 점들에 끌려 관심 속에서 읽었다.
 
  그런데 싼 전· 월 셋집을 찾아 이사를 전전할 때마다 읽고 난 잡지의 권수(卷數)가 불어나면서, 이삿짐의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빛바랜 과월호 잡지 뭉치들을, “어디에 쓰려고 버리지 않느냐?”는 아내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스럽게 이들을 싸들고 다녔다. 특히 새로 나온 잡지 창간호들을 수집한 것만은 특별히 챙긴다고 했지만, 이들은 어느 결엔가 내 서가에서 거의 사라졌고, 지금은 ’80년대 이후 문화체육부에서 내던 <이달의 문화(역사) 인물, 월>지(誌) 100여 권 철(綴), <自然保存: 한국자연보존협회, 월> 80여권 철, <녹색평론: 녹색평론사, 월> 창간호-109호 전권(全卷). <환경과 생명: (사)환경과 생명, 계> 60호 전권,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사, 계> 40여 권, 최근에 구독을 시작한 <隨筆春秋: 수필춘추사,계>와 <月刊文學: 한국문인협회> 50여 권을 서재의 한 켠 서가에 따로 정리되어 있다.
  사전에서 ‘잡지(magazine)’를 찾아보면 ‘창고(warehouse)’라는 뜻도 있다는 설명이 있는데, 나는 신문이나 방송에 비해서 사람들이 삶 속 진솔한 ‘소리와 채취’들이 담긴 장기적인 정보들을 선호했던 까닭으로, 읽고 난 잡지를 보존하는 습벽이 생겨난 듯하다. 즉, 보관 중인 잡지들은 단순한 ‘헌 잡지’가 아니라, 시대적 ‘소리와 채취’들을 느껴보는 나만의 ‘정보 창고’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해묵은 잡지들을 가끔씩 무심코 펼쳐드는 버릇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③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광복이후 5.16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이듬해 대대적인 정기 간행물 구조조정이 시행된 1961년 사이, 모두 1,400여 종의 잡지가 명멸하거나 부침을 거듭했으며, 이때 229종이 살아 남았고, 해방기에 창간된 것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잡지는 대한교육연합회(한국교총 한국교육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새교육>이 유일하다는데, 도서관에서 본 이 잡지 최근호는, 현직 교사 시절 교무실 공람용을 읽던 때보다는 면수(面數)도 늘고, 편집도 미려해졌으나, 내용면에서는 혁신적인 변화를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장수한 잡지이면서)통권(通卷) 표시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최근의 잡지계 동향이나 부침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나, 1989년 당시 공보처 자료로는, 월간 이상의 상업 잡지가 2,074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그 수십 배 이상 불어나지 않았나. 추정해 보며, 그 중에는 기업체나 각종 단체가 자사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내는 사외보(社外報), 기관지 등을 무가(無價)로 내고 있는 곳이 많아진 것도 잡지계의 새로운 풍토로 생각된다.  

  또 짧은 영어 독해력에도 불구하고 해상력이 뛰어난 시원시원한 시사성 화보(사진)를 즐겼던 영문 월간지 <LIFE>가 칼라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70년대 초 사라진 것을 섭섭해 했던 일도 추억의 한 편이며,  어린이 잡지로 전통을 자랑하던 월간 <새벗: 월>, <소년: 월>과, 어려운 여건에도 어린이들의 생태적 감각을 높이고자 무던히 애를 쓰던, <까치: 월>, <생각쟁이: 월>지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또 잡지와의 인연으로 뺄 수 없는 추억의 하나는, 내가 ‘잡지성 간행물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경험이다. 현직 교사 시절 아이들의 글을 모아 ‘푸른 언덕’, ‘은방울교실’ 등 제호까지 붙인 등사판, 또는 복사기판 ‘학교신문’, ‘학급문집’을 여러 차례 낸 일도 있었지만, 96-137면의 오프셋 인쇄판, (사)한국청소년심신수련원운영자협의회 회보(會報), <靑修> 창간호<1992>, 한국일보사가 수여하는 ‘한국교육자대상’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수상자회가 연1회 내는 회지(會誌), <스승의 길>10호<1995>, 11호<1996> 편집주간(編輯主幹)을 무모하게도 ‘자임하듯’ 떠맡아 편집방침에 따라 원고를 모으고 교정을 보며, 편집회의를 주관했던 일들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가끔씩 이 책자들을 찾아내 어루만지듯 훑어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하는데, 결국 나는 오래 전부터 잡지를 무척 ‘사랑’해왔던 것 같다. 지금도 글쓰기의 적당한 인용구로 할 만한 자료를 묵은 잡지에서 찾았을 때, “응, 바로 이거야!” 하며 무릎을 치면서 쾌재를 부를 때가 가끔씩 있다.
 
  <잡지 숲에 묻혀 살기>
  퇴직 이후 요즈음 나는, 상업지(商業誌)인데 지대(誌代)를 지불하지 않고 읽는 잡지 4종외에 정기 구독하는 유가지(有價誌)가 10종, 무가지(無價誌) 18종 등을 합쳐 모두 32 종의 다양한 종류 ‘잡지 숲’에서 살고 있다. 읽고 있는 잡지 중 지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4종 중 셋(<새교육: 한국교육신문, 월>, <환경과 생명:(사)환경과 생명, 계>, <리더스다이제스트: (주)두산잡지BU, 월>)은, 기고한 글에 대한 ‘원고료’ 성격으로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보내주는 잡지들이고, <전원생활: 농민신문사, 월>은, 지난해 이 잡지의 ‘독자모니터’로 선발되어 1년간 매월 ‘독자의견’ 편집 소감을 썼었는데, 이후에도 계속해서 보내주어 읽고 있고, 유가지(有價誌)로는 환경 관련 잡지가 넷, (<녹색평론: 녹색평론사, 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녹색연합, 월>, <環境敎育: 韓國環境敎育學會, 순>, <Outdoor: OUTDOOR GLOBAL, 월>), 순수문학지가 넷(<창작과 비평: 창작과비평사, 계>, <月刊文學: 한국문인협회, 월>, <隨筆春秋: 수필춘추사, 계>, <대산문화: 대산문화재단, 계>), 기타 <語文生活: (社)韓國語文會, 월>, <공무원연금: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월> 등 10종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과, ‘글쓰기’에 참고하고자 구독하는 것들이다. 
 
  유가지 못지않게 관심 속에 탐독 중인 무가지에는 공공기관이나 단체들에서 내고 있는 <서울사랑: 서울시, 월>, <푸른도시, 푸른서울: 서울시, 격월>, <It's Daejeon: 대전광역시, 월>, <인권·人權, 국가인권위원회, 월>, <좋은 동네:서울 강동문화원, 계>, <한사람: EBS; 교육방송, 월>, <경실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월>, <새[鳥]와 사람: (社)韓國鳥類保護協會, 계>) 등이 있고, 기업들이 문화 마케팅 차원에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 잡지를 합쳐 18종에 이른다. 이들 잡지 중에는 기업 또는  단체의 이익 창출을 위한 홍보 목적의 일방적 ‘선전지(宣傳誌)’로 일관하는 것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의 간행물들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안의 논의를 통한 공익(公益)을 생각하는 노력, 독자와의 소통 차원에서 ‘독자란’ 운영을 통해 생산자· 소비자 간 소통을 꾀하는 노력이 돋보이는 사외보(社外報)들도 많다. 이들 중, 올해 7-8월호부터 제호를 <samsung & u>로 바꾼 <함께하는 사회: (주)삼성, 월>의 ‘아름다운 직업, 아름다운 세상’, ‘소통을 위한 연습’, ‘자연과의 소통, 상생하는 삶’, ‘여행의 발견, 삶의 발견’, ‘아름다운 선물’ 등 ‘아름다운 삶'을 테마로 한 연속 기획, 전문적인 문사(文士)들의 글이면서도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글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주)유한 킴벌리의 사외보 <숲은 마음의 고향입니다>에 실렸던, 5회에 걸친 연속 테마 기획, “저 출산의 미래를 준비하라” 등은 다른 상업지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훌륭한 기사였다. 이밖에 <엘(L) 플러스, 이전 제호는 ‘땅 이야기’: 한국토지공사, 계>, <느티나무: (주)LG, 월>, <생활 속의 이야기: (주)CJ제일제당, 격월>, <공감PLUS: 佛光寺, 격월>, 지역 관광 안내지 <GGi: 경기관광공사, 월>, <물, 그리고 사람: 한국수자원공사, 월>,<삼성포토패밀리: (주)삼성카메라, 계; 절간>, <자연과 꿈: (주)삼성에버랜드, 월>, <맥스웰 향기: (주)동서식품, 격월> 등이 있는데, 이 중, 아담한 판형(版型)에 이철수의 판화가 계속 표지에 실리던 <느티나무>와, 전문 사진· 카메라잡지 못지않았던 <포토패밀리>, 지령(誌齡)이 450호에 달하던 <SK 에너지: (주)SK, 월>, <GREEN REPORT: 환경재단, 격월>, <생명의 숲: (사)생명의숲국민운동본부, 격월> 등이 회사 경비 절감 등의 사유로 절간(切刊)되었거나, 구독이 끊긴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잡지를 섭렵하는 특징의 하나는, 필요로 하는 잡지를 단순하게 ‘사거나 구하여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유기고’라는 ‘참여’인데, 이를 통해서 느낀 것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상업지나 무가지를 따지지 않고 골고루 자유롭게 투고를 해 오면서, 유가지로부터 채택된 글에 대한 원고료를 현금으로 받은 경우는 <전원생활>로부터 두 차례 각각 6만여 원을 받은 것이 전부였고, 고정 독자가 5천 명을 넘었다는 잡지조차 글이 게재된 당월 호와 자사 발행 단행본 한 권만을 보내고 마는 등 외부 필자에 대한 대우가 소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이에 비해 무가지의 경우에는 ‘채택된 글에 대해서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가 유가지보다 많았던 것으로 보아, 우리 잡지계의 영세성을 느끼게도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글 쓰는 일을 전업으로 하는 이들의 어려움이 짐작되기도 했다. 자유기고 활동 중의 원고료 경험은 알려진 일간 신문에서도 비슷했다. 
  

*. 퇴직 후 자유기고(自由寄稿) 활동 초록(抄錄)
 
*. <隨筆春秋> 07년 여름호, “일자산(一字山)의 4계(四季), 그리고 수묵(水墨)의 캔버스”/ 수필     작가 등단작(登壇作)(무)
 *.     〃    07년 겨울호, “어린이들이 잊거나 잃어버린 자연”(무)
 *.< 리더스 다이제스트> 04년 2월호, “전기 꽃으로 휘감긴 가로수들의 겨울”(무)
 *.          〃         04년 7월호, “어린이들에게 자연을…”(무)
 *. <조선일보> 04. 6. 11, 독자칼럼 “6월이면 떠오르는 추억” (유)
 *. <중앙일보> 04.10. 1, “아이들과 함께 하는 평화기행(平和紀行)”/ 중앙일보·외교통상부 공동    주최 韓·美 同盟 50週年 記念 에세이 公募 獎勵賞 授賞 作 (상금 □00만 원)
 *. <산림조합중앙회>, 07. 10. 24, “마을뒷산과 도시자연공원”/ 산림조합중앙회 山林文化作品    公募 隨筆 부문 獎勵賞 授賞 作(상금 □0만 원)
 *. <좋은 동네> 08년 봄- 여름호, “마을뒷산 걷기, 읽기, 담기 수상(隨想)” 연재(유)
 *. <전원생활> 08년 6월호, “수수팥떡에 담긴 기원”(유)
 *. <조선일보> 08. 8.12, “초점/ 애완동물: 검역절차 없이 유입도…생태계 악영향 우려”(유)
 *. <경향신문> 08. 9.12, 독자칼럼 “개발만 있는 한강(漢江) 르네상스”(무)
 *. <서울사랑> 08년 5월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녀”(유)
 *. <환경과 생명> 08년 가을 호,  녹색산문 “‘동물 나치즘 시대’를 살면서”(무)
 *. <녹색 평론> 08년 1-2월호, 녹색산문 “‘바다 재앙(災殃)’ 앞에서”(무)
 *. <전원생활> 08년 1월호-12월호 ‘독자 모니터’ 활동; 독자 의견 제시(유)
 *. <조선일보> 02. 11. 13, 독자 칼럼 “먹이 남겨둔 ‘철새마을’의 감동” (유)
 *. <   〃   > 09. 3. 11, 편집자에게 “‘학력(學力) 평가(評價)’와 성급한 논조”(유)
 *. <   〃   > 09. 4. 6, 편집자에게 “비둘기 포획(捕獲) 작전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유)
 *. <중앙일보> 09. 4. 23, 독자의 소리 “계절(季節) 가리지 않는 농법(農法)에 땅은 지친다”    (무)
 *. <공무원 연금> 09년 4월호, “우대권(優待券)으로 전철(電鐵)을 타던 날”(유)
 *. <새교육> 09년 7월호, “아이들에게 방학(放學)을 돌려주자”(무)
 *. <62公州師範>동창회보 제2호(07. 9), “신(神)들의 나라 캄보디아” 여행기(무)
 *.           〃            5  (08. 6), “압록강(鴨綠江) 걷기와 백두산(白頭山) 등정기”(무)
 *.           〃            8  (08. 12),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동창회 여유기-(무)
 *. <It's Daejeon> 09년 6월호, “보리가 익어갈 무렵”(유)
 *. <숲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09년 7월호, 독자 가족 이야기, “외손녀 응석 소묘(素描)”(유)
 *. <月刊文學> 09년 8월호, “낙화서정(落花敍情)” (무)
 *. <조선일보> 09. 8. 19, 편집자에게 “농민(農民)은 농사(農事)에서 떠나라니”(유)
 
 
   *. () 안의 ‘유’는 투고했던 글에 대한 원고료 또는 문화상품권 등을 보내온 경우이고, ‘무’는         일정 기간의 구독권, 투고한 글이 게재된 당월 호나 자사 발행 단행본 한 권, 또는 어떤 형태        의 사례(謝禮)도 없었던 경우를 표시한 것임. 
 
 
 

<에필로그>
  지난 3월, 20여 페이지 분량의 얇은 잡지 <語文生活, 09. 3, 통권 136호>의 독후감 란, ‘나를 움직인 한 권의 책’, 몽테뉴의「隨想錄」’(필자: 李圭恒/ 韓國語文敎育院) 글에서, 짧지만 마음에 쏙 드는 구절, “다만 인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알 뿐이다· 吾固永不知人生之爲荷 而但知永不知人生之爲何”를 읽고, 숲길 산책 등 여유로운 시간에 뜻을 음미하고 있는데, 30대 후반에 ‘수상록’을 읽기는 했으나, 번역물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난해한 문장으로 인해 책 내용의 진수(眞髓)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며, 줄거리도 세워보지 못한 짐작만으로 책을 덮었었는데, 이렇듯 명쾌하게 수상록의 주제를 밝힌 이의 글을 통해 글쓴이의 감상에 공감할 수 있었던 기회를 가진 것이 작은 은총으로까지 느껴진다.
 
  ‘잡지’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기사· 소설· 시· 사진 등 다양한 내용이나, 특정한 취미나 관심, 또는 직업을 가진 일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 특수내용을 포함하는 정기간행물로,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같은 제호 하에 발행하는 정기성(定期性), 잡다한 여러 가지 읽을거리를 게재하는 내용의 다양성(多樣性), 책과 같이 제본하는 제책성(製冊性) 등 외적 특성과,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체에 비해서 장기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따라서 장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취미활동 등에서 신문보다 다양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기사를 통하여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현대는 각종 간행물들이 범람하는 ‘간행물 홍수 시대’이면서, 동시에 아이티(IT) 영상(映像) 미디어 매체들이 위력을 발휘하는 ‘미디어 융합(融合) 시대’다. 이러한 미디어 산업 시대에서, 아무래도 미디어 기법의 첨단성과 기동성 면에서 앞서는 IT 미디어 수단들이, 전통적인 잡지 등 아날로그 식 정기간행물에 도전하는 경향에 따라 쇠락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즉, 인쇄매체들이 비교적 적은 비용을 들여 대량으로 지식이나 정보들을 전달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매체였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지난달까지 기일을 어기지 않고 나오던 잡지가 이렇다 할 예고나 해명도 없이 갑자기 서점의 진열대에서 사라지거나, 아무런 연락도 없이 배송(配送)이 끊기는 간행물의 명멸과 부침 현상들이 이어지는 등, 정기간행물들의 입지나 환경에 많은 변화의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여행할 때면 필독서처럼 출발에 앞서 사 들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기고를 통해 3년간 책값을 내지 않고 받아보다가 정기구독을 하고 있는, 전 세계 78개국에서 21개 언어로 되면서, 한때는 1억3천만 명의 독자를 확보했던, 88년 역사의 미국 교양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가 과다한 부채와 광고수입 감소로 법원에 자발적인 파산보호신청을 하면서, 지난 6월부터는 발행부수를 550만 부로 줄이고 연간 12회 발행 횟수를 10회로 줄인다는 뉴스를 인터넷을 통해 보면서 까닭을 모를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잡지는 정기 간행물로서의 특성을 살리는 새로운 의사전달 방식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잡지 본래의 사명에 더욱 충실해가는 것이 무한경쟁시대를 헤쳐 나가는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먼저, 발행기관들은 간행물에 빠짐없이 표방하고 있는 ‘다짐’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소홀히 한 부면이 있었다면 이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모든 방송· 신문· 정기간행물들은 시작하는 면에서 매체별 ‘윤리강령(倫理綱領)을 준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잡지의 경우는, “잡지윤리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도서잡지윤리요강을 준수합니다.”, “도서잡지실천요강· 잡지윤리실천요강· 잡지협회의 잡지판매공정경쟁규약(雜誌販賣公正競爭規約)을 준수합니다.” 등 세 가지로 발행기관의 다짐을 표방하고 있는데, 각종 간행물로 인한 끊이지 않는 선정성· 폭력성· 청소년 유해성 등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광고(廣告) 속에서 어렵게 기사를 찾아내 읽어야 하고, 양 손에 들고 읽기조차 어려운(무거운) ‘광고 책’으로 바뀐 ‘여성 종합지’들의 무차별 광고 공세 경쟁 현상,    외부 필자에 대한 한심한 수준의 대우 등은, 독자들로 하여금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이런 현상은 윤리강령에 저촉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몇몇 잡지들이 재생지(再生紙)를 고집하면서 자원절약, 환경보호 실천에 앞장서고 있기도 하지만, 모든 간행물들은 나름대로 뚜렷하게 자사의 특성이 드러나는 바람직한 방향들을 찾아서 솔선수범하는, 잡지계 스스로의 자정(自整)하는 노력으로, 그 동안 실추된 독자들의 신뢰를 되찾아 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건전한 저널니즘(journalism)이 구현되기를 바란다.
 
  10년을 넘긴 은퇴자 생활을 이어오는 동안 가장 큰 변화로 느껴지는 것은, 가끔씩 젊은 세대로부터 받는 ‘쉰 세대’라는 무관(無冠)의 호칭 때문인지, 생의 한복판에서 귀퉁이 한쪽 구석으로 시나브로 밀린 ‘장외인간(場外人間· outsider)’이 된 것 같은 소외감과 적막감이 들기도 하며, 대인관계에서의 애증(愛憎)들이 더 애틋해지는 것이다. 또 늘그막에는 서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 한꺼번에 늙음을 맞는 것 같고, 그나마 머물러 있던 어줍고 빛바랜 추억의 부스러기들조차 기억력과 함께 봄꽃 흩어지듯 사라져가는 것도 같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들 눈에는 가느다랗고 누추하게 보였을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큰 욕심내지 않으며 살아온 60여 성상, 특히 70나이를 바라보는 지금의 내 시간표는 늘그막의 성취기를 맞고 있는 느낌이다.
  ‘독수리 타법’으로나마 문서를 만들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인터넷 창을 열어 원하는 정보를 검색하는 정도의, ‘컴맹’은 면한 수준 컴퓨터 실력이지만, 여전히 사전(辭典)을 집어 드는 것이 더 익숙하며, 살아가는 ‘소리와 채취’들을 담아낸 간행물들을 곁에 두는 것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니, ‘아날로그 식 쉰 세대’가 맞기는 한데,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시청했던 이어령 선생의 “첨단 디지털(digital) 식 지혜의 창출도 좋겠지만, 디지털이 아날로그(analog) 지혜 도출 방식과도 타협하며 결합하는 ‘디지로그(digilog)’ 식으로 가야 한다.”는 방담(放談)에서의 주장에 자위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자각되는 노화현상에, 젊은 시절에는 없었던 새벽잠에서 깨어나 잠이 오지 않는 고요한 시간에, 밀려드는 잡념들을 물리치면서, 집필과 마음에 두었던 책들을 읽는 것은 나만의 습관이 된 것 등 내 주변 잡지의 숲은 늘그막의 내 절친한 반려의 하나다.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깨달음이다. 고려(高麗) 말 문신(文臣) 우탁(禹倬)은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는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은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읊었다. 여생을 소걸음[牛步]으로 천리를 가는 지혜와, 비움과 느림의 정신으로, 지금처럼 ‘잡지의 숲’을 거닐듯 지난 세월을 되새김질하며, 소의 끈기와 성실함을 본받아 뚜벅뚜벅 세월을 헤쳐 갔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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