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J산림조합중앙회

공모전 안내

제17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2017년)

공모부문별 세부요강내역 다운로드

산림조합중앙회는 일반 국민과 청소년들에게 우리 숲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하고자 2001년부터 산림문화작품공모전을 개최해 왔다.

공모전 대상의 훈격을 제1회 때 농림부장관상에서 제3회부터 국무총리상으로 승격시켰으며, 지난해 16회를 맞이하여 그 동안 우리 산과 숲, 산촌, 자연휴양림 등과 아름다운 숲과 사람의 어울림 등 우리 숲의 울창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산림문화작품을 공모하여 우수작을 시상하였다.

산림문화작품공모전은 회를 거듭할수록 접수한 작품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공모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공모주제

  • 국내 아름다운 산, 숲, 산촌, 자연휴양림 등을 소재로 한 작품
  • 산림 및 임업을 소재로 한 드론촬영 작품(사진부문)
  • 산림 레포츠를 소재로 한 작품
  • 산림치유 및 숲과 사람의 어울림 등을 소재로 한 작품
  • 산림보호 및 각종 산림사업(조림, 숲가꾸기, 간벌 등) 소재로 한 작품
  • 임산물(수실류, 버섯류, 산채류 등) 및 재배현장 등을 소재로 한 작품

참가자격

대한민국 국민 또는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국내 거주 사실을 외국인 등록증 등으로 증빙 가능한 자)

  • 청소년부 : 초·중·고교에 재학 중인 학생 또는 만 19세 미만의 미성년자
  • 일반부 : 만 19세 이상의 성인(재외국민 포함)

공모부문

  • 청소년부 : 그림/글쓰기
  • 일반부 : 사진/시·수필/목공예/서각

출품료

  • 없음

접수기간

  • 청소년부(그림/글쓰기) : 2017년 6월 1일 ~ 8월 18일
  • 일반부(사진/시‧수필/목공예/서각) : 2017년 7월 1일 ~ 8월 18일

접수방법 및 장소

  • 접수방법 : 인터넷 접수
  • 접수장소 : 산림문화작품공모전 홈페이지
    - 주소 : http://www.nfcf.or.kr
    - 산림조합중앙회 홈페이지/산림문화행사/산림문화작품공모전/공모전 신청
    ※ 단, 그림/목공예/서각부문은 인터넷 접수 후 접수증을 첨부한 작품을 방문 또는 우편(마감일 소인분까지)으로 제출하고 접수시 파손부분에 대한 책임은 신청자에게 있습니다.
  • 접수처 : (05601)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호수로 166
    산림조합중앙회 문화홍보실(☎ 02-3434-7245)

공모요강

  • 일반부 / 사진
    - 디 지 털 : 1,200만 화소(4,256×2,832) 이상 / jpg파일(RGB 모드) / 한 파일 당 20MB 이내
    - 출 품 수 : 1인당 20점 이내
    - 출품제한 : 2014년 이후에 촬영한 작품에 한함
    - 작품접수 : 인터넷 접수(우편, 방문 접수 불가)
  • 일반부 / 시·수필
    - 출 품 수 : 1인당 2편 이내
    - 분 량 : 200자 원고지 15매 이내, 워드로 작성 시 신명조 12포인트, A4용지 2매 이내
    - 작품접수 : 인터넷 접수(원고지 작성의 경우 인터넷 접수증 출력 후 우편발송)
    <작품전달처> 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로 166. 산림조합중앙회 문화홍보실
  • 일반부 / 목공예·서각
    - 출 품 수 : 1인(팀) 당 2점 이내(팀 인원 - 5인 이내)
    - 출품규격 : 가로 1m × 세로 1m × 높이 0.7m 이내
    - 작품접수 : 인터넷 접수 후 접수증을 작품에 첨부하여 방문 및 우편(택배)으로 접수
    <작품전달처> 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로 166. 산림조합중앙회 문화홍보실
  • 청소년부 / 그림
    - 출품규격 : 4절 또는 8절
    - 출품형식 : 수채화, 크레파스화 등
    - 출 품 수 : 1인 당 2점 이내
    - 작품접수 : 인터넷 접수후 접수증을 작품에 첨부하여 방문 및 우편(택배)으로 접수
    <작품전달처> 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로 166, 산림조합중앙회 문화홍보실
  • 청소년부 / 글쓰기
    - 출 품 수 : 1인당 2편 이내
    - 분 량 : 200자 원고지 15매 이내, 워드로 작성 시 신명조 12포인트, A4용지 2매 이내
    - 작품접수 : 인터넷 접수(원고지 작성의 경우 인터넷 접수증 출력 후 우편발송)
    <작품전달처> 서울시 송파구 석촌호수로 166. 산림조합중앙회 문화홍보실

입상자 발표

  • 발표일 : 2017년 09월 18일(월) 예정

시상내역

  • 청소년부(그림/글쓰기 부문)
    청소년부 그림, 글쓰기 부문 시상내역
    훈격 그림 글쓰기 비고
    시상
    (명)
    상금
    (천원)
    합계
    (천원)
    시상
    (명)
    상금
    (천원)
    합계
    (천원)
    합계 407   5,700 306   3,550  
    대상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1 500 500 1 500 500  
    최우수상
    (산림청장상)
    2 300 600 2 300 600  
    우수상
    (산림청장상)
    4 150 600 3 150 450  
    장려상
    (중앙회장상)
    200 20 4,000 100 20 2,000  
    입선
    (중앙회장상)
    200 - - 200 - -  
  • 일반부(사진, 시·수필 부문)
    일반부 사진, 시ㆍ수필 부문 시상내역
    훈격 사진 시 · 수필 비고
    시상
    (명)
    상금
    (천원)
    합계
    (천원)
    시상
    (명)
    상금
    (천원)
    합계
    (천원)
    합계 114   32,000 29   10,500  
    대상
    (국무총리상)
    1 5,000 5,000 1 3,000 3,000  
    최우수상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1 3,000 3,000 1 1,500 1,500  
    우수상
    (산림청장상)
    2 1,000 2,000 2 500 1,000  
    장려상
    (중앙회장상)
    110 200 22,000 25 200 5,000  
  • 일반부(목공예 부문)
    일반부 목공예 부문 시상내역
    훈격 목공예·서각 비고
    시상
    (명)
    상금
    (천원)
    합계
    (천원)
    합계 7   6,400  
    대상
    (산림청장상)
    1 3,000 3,000  
    최우수상
    (산림청장상)
    1 1,500 1,500  
    우수상
    (중앙회장상)
    2 500 1,000  
    장려상
    (중앙회장상)
    3 300 900  
  • 일반부(서각 부문)
    일반부 서각 부문 시상내역
    훈격 서각 비고
    시상
    (명)
    상금
    (천원)
    합계
    (천원)
    합계 6   6,100  
    대상
    (산림청장상)
    1 3,000 3,000  
    최우수상
    (산림청장상)
    1 1,500 1,500  
    우수상
    (중앙회장상)
    2 500 1,000  
    장려상
    (중앙회장상)
    2 300 600  

시상식 개최

  • 2017년도 10월 「산림문화박람회장」 예정

수상작 전시회 계획

  • 전시기간 : 2017년 10월 ∼ 2018년 9월
  • 전 시 회 : 정부대전청사 중앙홀, 산림문화박람회장, 유관기관행사 등

부문별 공통 유의사항

  • 출품작은 국내·외에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이어야 하며, 상품광고나 음란물, 미풍양속을 해치는 작품, 대리작 및 타 공모전 수상작, 모방 또는 차용작은 출품 불가
  • 출품작품에 대한 저작권(2차적 저작물 및 편집 저작물 작성권 등을 포함한 모든 저작권)은 산림조합중앙회, 산림청, 임업단체 등 이를 공익목적 사용을 위하여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저작물 이용 동의서에 동의하여야 함
  • 산림청 및 산림조합중앙회에서 인정하는 타 기관(임업, 산림관련 단체 등)의 산림문화작품공모전 수상작에 대한 홍보 및 인쇄물 사용 허락함
  • 모든 응모작품은 국내·외 저작권(이미지, 영상, 음원, 캐릭터, 문구, 프로그램 등의 사용), 제3자의 초상권 등 기타 제반 권리를 침해하여서는 안 되며, 모든 권리는 출품자가 해결하여야 하고 이와 관련하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였을 경우 모든 법률적 책임은 전적으로 출품자에게 있음
  • 타 공모전 입상작(동일 작품이 아니더라도 연사 작품의 일부가 타 공모전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된 경우 포함), 메타데이터(속성정보) 변경, 모방, 차용, 합성, 조작, 변형한 사진으로 판명되면 입상 취소 및 상장과 상금 반환을 하여야 하며, 향후 3년간 본 공모전 출품 금지
  • 정해진 규격(원고량에서 10%이상 초과) 및 출품수를 초과하면 심사에서 제외되며, 출품자 1인당 부문별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중 1점을 입상 할 수 있으며, 부문별 총 3점 이내 입상 할 수 있음
※ 사진부분을 최근 2년간 산림문화작품공모전 수상자(대상, 최우수상, 우수상)에 대하여 수상 제한
   (※장려, 입선은 가능)

※ 기타 자세한 사항은 부문별 세부요강 참조
   

 


 

 

 

숲채비빔밥

이 성엽

지나는 구름한점 푹 떠서 하얀 고두밥을 지어 놓는다.
참나무 등껍질 파란바람에 들들 볶아 식혀두고,
봉긋솟은 꽃나무순 쓸어모아
내리쏟는 소나기에 후드득 씻어
칡넝쿨 엮어만든 채반에 얹어 물기를 찌운다.

코끝내음 향나무 파릇이 숨을죽여
졸졸졸 계곡소리 흩어뿌려 조물조물 무치고
겨우내 묻어두었던 산나물뿌리
돌바위에 듬뿍올려 송송송 채썰어 가지런히 놓은후
산새소리 모로꺽어 퍼렇게 불을지펴 숲을 데운다.

새벽녘 산란한 시뻘건 태양 한알을 과감히 깨뜨려 고명으로 올리고
뒷곁에 맛나게 익은 노을고추장
한숟갈 푹 떠서 탁탁탁 털어넣어 숲을 비빈다.

이른아침 짜놓은 이슬기름 두어방울....
그렇게 쓱쓱쓱 숲을 비빈다.
오늘도 밥짓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른다.

 

 

 

  • 늙은 밤나무 이야기

    김성옥

    나는 밤나무입니다. 이 땅에 뿌리내린 지 이천 년이 넘었고 시조는 참나무 할아버지입니다. 떡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와 사촌지간인 셈입니다. 외모가 엇비슷한 탓인지 어떤 이들은 저를 참나무라 부르더군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은근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도토리나 상수리 열매를 감히 알밤과 착각하다니요? 입이 건 상수리 댁 말마따나 도토리를 상수리라, 상수리를 도토리라 우기는 청맹과니들입니다. 쓰고 있는 모자만 봐도 이 둘의 차이를 금세 알 수 있거든요. 하긴, 사람들은 내가 수꽃과 암꽃을 피운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관심이란 애정의 또 다른 이름, 심미안이란 게 별 게 아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너무 제 말만 늘어놓았나 봅니다. 말이 많아지면 나이가 드는 징조라는데, 외로우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라던데. 아마 저는 한 바가지의 관심이 절실한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핸가, ‘매미’라는 태풍이 다녀가기 전까지 제게도 가족이 있었지요. 그때 젊은 나무들이 참 많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제 딸도 그때 죽었지요. 손님처럼 꽃이 오고, 밤송이가 젖멍울처럼 부풀 때 딸에게서도 제법 밤나무 태가 났었지요. 모녀가 마주보고 햇볕을 쬐거나 바람을 듣고 비를 타며 한마음으로 아람을 기다렸답니다. 그런 아이가 뿌리째 나동그라지는 걸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지요. 아이를 가슴에 묻은 뒤 눕고 싶은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능선이 나무와 풀과 꽃들을 붙안고 살아가는, 요람처럼 평온한 곳이거든요. 밤하늘 이정표로 서있던 별들이 꾸벅꾸벅 조는 새벽녘,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이 공원으로 들어섭니다. 공에 가속이 붙으면서 미명의 하늘이 터질 듯 부풀고 이내 말간 해를 순산합니다. 갓 부화한 햇살이 기지개를 켜는 이 시간을 저는 사랑합니다. 이때만큼은 옹이가 많은 제 몸도 푸르게 부풀어 오르거든요. 아, 이제 광합성을 할 시간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한 무리의 조무래기들이 소풍을 나왔습니다. 눈망울이 상수리를 닮은 아이들, 숲은 잠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개미굴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 들꽃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말을 거는 예쁜이도 눈에 띕니다. 그때 다람쥐처럼 뛰놀던 아이 몇이 제게로 오더군요. “선생님, 이 나무에 꽃이 피었어요. 이 나무 이름이 뭐예요?” 관심이 고마운 저,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슬며시 팔을 내려줍니다. 그때 한 아이가 마치 대단한 보물을 발견한 듯 소리를 칩니다. “앗~! 꽃 아래에 또 꽃이 있어요. 별처럼 생겼어요.” 순간 저는 너무도 놀라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지만 우리 나무에게도 고유의 언어가 있거든요. “응, 이건 밤나무의 암꽃이란다. 수꽃의 아래에 피지. 꽃에 암술과 수술이 있는 것처럼 나무도 암꽃과 수꽃이 있어. 나무들은 주로 바람을 이용해 번식을 하지.” “그럼 나무한테는 바람이 중매쟁이겠네요?” 아이들이 까르르 웃습니다. 빗방울이 듣는 듯합니다. 뉘 집 자식인지 거 참 영특하지요?
    웃음소리를 여운처럼 남기고 아이들은 유치원으로 돌아갑니다. 바람도 피서를 떠났는지 공원은 한 폭의 정물처럼 조용합니다.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오후 무렵입니다. 밤새 정자에서 술추렴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친 소나무 영감님이, 지하층층 물을 길어 가지로, 잎맥으로 나르던 상수리 댁과 굴참나무 댁이 오수에 드는 시간. 자꾸만 목이 길어집니다. 바로 그네들이 올 시간이거든요.
    오늘도 그네들은 수다거리를 한 보따리나 꾸려 왔군요. 아무개 할머니와 모 영감님의 로맨스가 오늘의 화두입니다. 화자의 입담이 워낙 차지기도 하려니와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가 않습니다. 공처럼 통통 틔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좋지만 생의 굽이굽이를 에돌아 온 그네들의 이야기엔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습니다. 제가 자신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때론 성도 낸다는 걸 알면 그네들의 반응이 어떠할까요? 겉으론 늘 쾌활한 척하지만 나름의 사연 주머니를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 그네들. 제가 해 줄 있는 거라곤 가만 바람을 모아 손 부채질을 해주는 것밖에요.
    그네들은 연둣빛 펜스를 두른 5층 건물에 삽니다. 그곳이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의 집이란 걸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그러니까 공원을 사이에 두고 유치원과 양로원이 마주하고 선 셈이지요. 그들을 통해 저는 생의 들머리와 저물녘을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꽤 오래 산 듯합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제 나이조차 잊은 걸요.
    다람쥐 눈을 피해 용케 싹을 틔운 이래 애오라지 하늘바라기하며 살아온 생애입니다. 봄이면 아랫도리에 불끈, 힘을 실어 사명처럼 물을 길어 올렸어요. 위로, 위로 물관 따라 오르는 길은 고됐지만 ‘끙’하고 힘을 줄 때마다 튀밥처럼 터지는 꽃숭어리들. 그저 물만 주었는데도 멀고 좁은 산도(産道) 지나 촘촘히 초록별로 뜬, 실한 밤송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으니까요.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조금씩 기력이 쇠하면서 해거리가 왔다는 것도, 비바람이 조금만 거세도 툭툭 관절이 부러져 날로 옹이가 늘어나는 것을, 사람들이 왜 저를 참나무로 착각하는지도, 밤나무 아래 길다란 나무의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더러 서글플 때도 있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아직은 저를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연둣빛 펜스를 두른 건물 안 사람들은 저처럼 일찍 일어나고 제가 물을 길어 올릴 무렵 식사를 하고, 햇살이 하품을 할 무렵 낮잠에 듭니다. 틈틈이 트로트가수가, 에어로빅 강사가 사회복지사도 다녀갑니다. 그때만큼은 행복해 보이지만 나는 그 시간대의 얼굴이 페르소나라는 것을 압니다. 외롭거나 이야기가 많은 노인들은 원래 수다가 많은 법입니다. 옹이가 많은 제 생애와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나무의 한살이나 사람의 생애나 매한가지라고 바람이 이야기합니다.

     

  •                

하산 (下山)
한숙희

몸은 산에서 내려왔는데 마음이 하산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시간 집을 나서면 온종일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랬던 내가 올해는 묵언수행이라도 하듯 텃밭 잡초만 뽑았다. 지난 오월 하순께 딱 하루 산엘 갔었다. 야생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들게 된 복주머니난이 내가 사는 양구 모처 산에 있다는 지인 연락을 받고서였다. 새벽같이 서울에서 달려온 일행과 함께 임도를 따라 정상 가까이 올라간 후 차에서 내려 다시 한참을 오르락내리락 길도 없는 숲을 헤쳐 나갔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멸종위기 종 2급으로 지정된 복주머니난이 바로 눈앞에 군락으로 펼쳐진 장관을 만났다. 용케 사람의 탐욕으로부터 비껴간 곳, 꿈이라기엔 너무 황홀했고 생시라기엔 너무 벅찼다. 간혹 들려오는 새소리, 나무숲 사이 햇살 몇 줌, 가쁘게 몰아쉬는 세 사람 숨소리만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 흩어져 잠시 지상으로 내려온 월궁항아인양 수줍게 피어난 복주머니난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꿈결 같았던 반나절 산행에서 내려오는 길, 다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말했다.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지 말자고, 오늘 자생지는 영원히 비밀이라고. 그 산행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말 하산했다.
야생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꽃쟁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나도 꽃쟁이였다. 세상이 좋아지고 먹고 살만해지면서 카메라는 더 이상 특정한 사람들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오래전 나도 렌즈교환 식 카메라와 접사렌즈를 장만했다. 그리고 산을 다니며 야생화를 찍었다. 찍어온 사진을 동호회에서 공유하는 일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몰랐던 꽃을 배우는 즐거움은 결혼 후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내 삶을 춤추게 했다. 꽃은 물론이고 새와 곤충, 동물, 자연생태와 환경에 이르기기까지 관심분야가 넓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꽃쟁이로서 산에 올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축복을 마음껏 누렸던 지난 10여년은 어쩌면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시름시름 여위어가는 산의 속살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해가 바뀔 때 마다 왠지 예전 같지 않은 산의 신음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앓고 있었는데 그동안 희희낙락 즐거움에 빠져 알아차리지 못했을 그 소리가 나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내 불편했다. 그러던 차에 올해 이른 봄 일부 얼빠진 진사들이 시화호 주변에 서식하는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로 겹치기 지정된 수리부엉이 둥지를 찍겠다며 둥지 앞 나무를 훤하게 잘라내고 밤늦도록 플래시를 펑펑 터뜨린 사건이 크게 보도됐다. 다른 맹금류나 천적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은폐된 곳에 둥지를 지은 수리부엉이 가족에게 아닌 밤중 날벼락이 떨어진 셈 인데 나 역시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 때문에 공연히 도둑놈처럼 발이 저렸다. 몇 년 전에는 원하는 구도를 얻겠다며 수백 년 된 금강송 몇 십 그루를 베어낸 사진가도 있었는데 이런 사건들이 보도를 통해 세간에 드러나는 것은 극히 빙산의 일부다. 자연을 학대하며 연출해서 만들어내는 사진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꽃쟁이들 중에도 귀한 꽃일수록 사진을 찍은 후 다른 사람이 찍지 못하게 꽃대를 꺾어버리거나 아예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오늘날 많은 동, 식물들이 멸종위기에 놓이게 된 이유는 이렇듯 삿된 욕심에 눈 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단단히 한 몫 했다. 꽃도 보고 건강도 챙기는 일거양득 취미라 여기며 룰루랄라 산을 누볐던 지난날들을 곰곰 뒤돌아보았다. 나만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연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했던 내 모습이 보였고 다른 사람들만 원망하며 분노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 목에 걸려있던 가시는 ‘너나 잘 하세요’라는 산의 경고였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산은 오랜 시간 분신처럼 사랑했던 카메라를 내려놓아야하는 일이기에 적잖이 갈등했지만 나는 결국 결심했다. 그리고 행여 마음 변할세라 동호회부터 탈퇴했다. 최근에도 지인으로부터 함백산 꽃 탐사를 가자는 문자를 받았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
작은 꿈이 있다. 머잖아 내 아이들이 결혼해서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손을 잡고 사부작사부작 소풍을 다니는 꿈이다. “이 꽃은 노루귀란다. 노루귀처럼 털이 보송보송하지? 여기 현호색도 피었네, 꽃을 자세히 보면 노래하는 종달새 입처럼 생겼어. 어머나, 저기 귀여운 도마뱀 좀 봐봐.”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는 접할 수 없는 체험을 하면서 저절로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며 자랄 것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일부로 살다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자연의 중심에 언제나 가장 고맙고 가까운 벗, 산이 있다. 산은 봄꽃부터 겨울눈꽃까지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미생물부터 맹수까지 온갖 생명을 품는다. 산은 생명으로 詩를 쓰고 우리는 산이 쓰는 詩를 평생 몸으로 읽으며 산다. 부모사랑은 내리사랑이다. 지혜로운 인디언들은 자연은 후손들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지금처럼 자연을 훼손하다가 먼 훗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후손들이 백과사전으로만 자연을 배우게 된다면 우린 내리사랑 부모도, 지혜로운 조상도 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산이 그립다. 그러나 이제 산을 향한 과거의 그리움을 접는 대신 내가 죽고 없을 먼 훗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워하려한다. 나의 손자, 손녀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대손손 건강하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도 안다. 고작 나 한사람 하산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몸짓에 불과한지. 그렇지만 믿는다. 나의 작은 몸짓이야말로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며 가장 어른스러운 그리움임을.

                 

제 목 : 같은 하늘, 다른 산

김준성

나는 오늘도 아내와 함께 관악산에 오른다. 산속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등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빈틈없다. 풀잎엔 아직도 아침이슬이 맺혀 촉촉하다.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밝다. 이젠 익숙해진 것인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 꽁지를 달싹이며 산새들이 갸웃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가끔 다람쥐며 청설모가 길을 홱 가로질러 달려간다. 동화를 연상케 하는 숲속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기운과 솔향이 마음을 기분 좋게 어루만진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하는 산행이 일과가 됐다. 산에 오르면 평일에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고 마음도 치유된다. 건강은 덤이다. 우리 부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산길을 오르내린다. 산행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행복과 즐거움이 묻어난다. 산중턱에서 보이는 서울과 과천의 광경도 장관이다. 관악산에는 여러 코스의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또 등산객들을 위한 정자와 의자를 비롯해 쉼터가 곳곳에 잘 꾸며져 있다. 관악산뿐이 아니다. 북한산과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모든 산들이 행복의 산, 보물산이다. 참으로 축복받은 아름다운 이 강산이다. 이곳에서 나도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산은 다 같은 산인데 왜 이렇게 다른 모습, 다른 느낌일까? 저 하늘 멀리 유유자적하게 제 갈 길을 가는 더미구름을 바라보며 어느새 상념에 젖는다. 내 고향은 북한 함경북도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북중 국경지역의 고향 뒷산에는 당시만 해도 수림이 빽빽했다. 밤이면 들려오던 늑대울음소리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가끔씩 산속으로 들어가셔서 소발구로 땔나무를 한가득 싣고 오곤 하셨다. 늦가을이면 할아버지가 따온 머루에서 방안 가득 감미롭게 퍼지던 머루향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해 우리 가족은 서해안의 한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새로 이사를 간 곳에는 00산이 있었다. 서해안 평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 산에는 고조선시대의 역사 유적인 고인돌 떼가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인돌 떼를 직접 볼 수 있어 정말 신기했다. 00산은 그 지역 학교들의 등산지였다. 봄과 가을이면 학생들은 그 산에 원족을 가 평평한 공터에서 체육경기와 장끼자랑, 보물찾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학창시절은 빨리도 흘렀다. 1990년대 초, 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북한군에 입대했다. 내가 배치된 곳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가 접해있는 중부 산악지대였다. 신설부대다보니 병영 등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군사훈련보다는 산에 가서 건설자재로 쓸 나무를 찍어내고, 땔감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부대 주변 산은 갈수록 푸른빛을 잃어갔다. 거기다 식량난이 닥치면서 화전을 일구려는 주둔 지역 주민들과 군인들이 일부러 산불을 놓아 많은 면적의 산림을 태웠다. 생존이 다급했던 사람들에게 산림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 몇 그루보다는 한 줌 옥수수와 콩을 얻을 수 있는 화전 한 뙈기가 더 중요했다. 그 시절, 사람들 뿐 아니라 산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7년간 병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찍어내고 불태운 수십 년 수령의 소나무만 해도 수백그루는 될 것이다. 1차원적인 생존 욕구 앞에서 산림보호, 환경보호라는 2차원적 가치는 설 자리가 없었다.
군 복무시절 내게 산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훈련과 제재목, 땔나무 때문에 올라갈 때는 원한의 산이었다. 추운 겨울 아침 일찍 기상해 조기작업이라고 하면서 땔나무와 제재목 때문에 산에 가야 할 때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나마 봄, 가을에 산나물과 산열매 따러 갈 때에는 허기진 창자를 채울 수 있어 힘이 났다. 하지만 야맹증과 영양실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병사들이 채취해 온 산나물 가운데 고급나물로 분류되는 참나물과 두릅은 군 간부들의 차지였다. “막나물”로 불리는 곰취나 이름 없는 산나물들은 병사들의 몫이었다.
산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어느 가을날 대대 간부에게 줄 다래를 따러 산에 올라갔었다. 부대 주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짝 벼랑 위에서 참나무를 타고 20m는 족히 위로 뻗어 올라간 다래넝쿨을 발견하고 도끼로 참나무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3분의 1쯤 찍어냈을 때 참나무가 육중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아래로 기울면서 “쩌어억~” 소리를 내며 쪼개져나갔다. 어쩔 새 없이 아름드리 참나무의 밑 둥이 바람을 휘가르며 내 얼굴에서 불과 한 뼘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위로 들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뼘을 사이로 생사가 갈린 순간이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데다 다리맥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산과 나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리고 군복무 7년 만에 처음 집에 간 날, 나는 뒷산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알고, 학창시절 소중한 추억이 깃든 울창한 00산은 오간 데 없고 나무 한그루 없이 왜소하고 황토만 드러난 민둥산이 떡하니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7년 만에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00산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하기는 그 시절, 그 땅에서 수난을 겪지 않은 산이 있었을까?
탈북하기 전 마지막으로 바라본 북한 산야의 모습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하늘아래 저 북녘 땅 산들과 수목의 고난은 현재진행형이다. 산은 태고 적부터 있던 그 산 그대로인데 세상이, 사람들이 산을 풍성하게 만들기도, 망치기도 한다. 산은 자기를 사랑하고 가꿔주는 사람들에게는 맑은 공기와 건강, 행복과 희망을 선물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산림을 파괴하는 사람들에게는 홍수 같은 재해와 환경오염, 불행과 절망을 벌로 주는 것 같다. 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풍성하게 가꿔 산이 준 축복을 모두 함께 누리는 이 땅의 오늘이 눈물겹게 고맙다. 이 땅의 모든 산을 푸르게 가꾸고 나날이 푸름을 더해가도록 애쓰고 노력해 온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나도 산이 주는 축복을 누리기만 하는 수혜자가 아니라 산을 푸르게 가꾸고 지켜가는 행복의 공여자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이 행복을 고향땅 사람들과 함께 누릴 남과 북의 “푸른 통일”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주산지(注山池)에서
 

오영록


 

스님들이 목욕탕에 왔다동안거를 끝냈을 뿐인데 누대 헤어졌다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등이라도 서로 밀어주는지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니 어 시원타, 어 시원타노승의 몸에서 쏟아지는 경전소리직박구리만 화들짝 난다햇빛으로 덥힌 온탕산그늘로 식힌 냉탕을 오가는 저 승가(僧伽)   바람 불 때마다 서로 머리를 밀어주는 저 모습아침이면 잠시 서산으로 바람 탁발(托鉢) 갔다가저녁이면 다시 동산에 올라 설법으로 몸을 말리는 그림자들때가 없으니 영혼을 씻고 있다저 속살을 슬쩍 훔쳐 본 적 있는데얼마나 씻고 있었는지 백옥보다 더 흰 성체(性體)만지면 뽀드득 소름 돋을 것 같은저렇게 천 년을 씻었으니 어찌 아니겠는가!얼마나 더 씻고 씻어야 혼까지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지유피(楡皮)가 되는지비 오는 날은 그 비 다 맞으며평등의 수면을 바둑판 삼아 똑똑 돌을 놓고 있다꽁꽁 얼어붙어 돌을 놓을 수 없으면무릎 착 꿇고 동안거에 들어묵언 수행 하겠지    


 

제 목 : 오동나무의 대물림

김화순

오늘은 시아버님의 제삿날이다. 남들은 조상의 제삿날이면 경건하고 엄숙하게 상을 차리고 망인께 절을 올리지만 우리 집은 딸이 켜는 가야금으로부터 제사가 시작된다. 딸이 할아버지를 위해 켜는 가야금소리가 온 방안에 퍼지면 나는 눈을 감고 가야금 선율을 &#51922;아가 아버님을 찾는다. 낭랑한 가야금의 소리 끝에 시아버님이 서계셨다. 삽과 괭이를 든 시아버님께서는 산밭에 나무를 심고 계셨다.
“손녀딸을 낳았으니 시집갈 때 이 할아버지 몫으로 장롱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어서…….”
이번 제삿날에 내가 시아버님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절을 올리고 술을 한 잔 따르며 그 분을 생각하니 오동나무로 덮은 산과 숲이 먼저 그려졌다.
돌아가신 시아버님도 조상님들이 묻힌 선영에 유택을 마련했다. 선영의 바로 옆에는 밭뙈기가 하나 있다. 우리 식구는 그 밭을 산밭이라고 불렀다. 시아버님께서는 그 산밭에 오동나무를 가득 심어 나에게 물려주셨다.
“이 밭은 네가 주인이다. 그러니 오동나무가 크면 우리 손녀딸 지연이에게 필요한 장롱을 만들어 주거라.”
예나 지금이나 오동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여자들에게 필요한 세간이었다. 그랬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딸이나 손녀딸을 위해 오동나무를 심었다. 아버님께도 손녀딸이 걱정되어 산에 오동나무를 심어 나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님의 정성이 깃든 그 산밭을 거의 잊고 살았다.
“저기 산에 있는 오동나무의 주인이 아주머니라면서요?”
어느 날 산밭에 서있는 오동나무를 팔라며 우리 집을 찾아온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가야금을 만드는 명장이란다. 그는 산밭에 심어져 있는 오동나무를 탐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의 유산인 산밭의 오동나무를 파는데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심고 가꾸시며 나에게 물려주신 나무를 싹둑 잘라낸다는 것은 시아버지와 며느리로써의 인연을 자르는 것과 같기에 망설인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이라는 사람은 돈에 욕심이 났는지 억지 논리를 펴며 나를 압박했다.
“스위스의 할아버지는 산을 일구고 자갈을 줍는데 일생을 바쳤지, 그리고 그 아들은 나무를 심고 풀씨를 심는데 평생이 걸렸지, 그리고 지금의 손자들은 그 땅에서 소를 키우며 젖을 짜 먹으며 행복을 누린다고…….”
어쩌면 남편의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나무란 자신의 대에서 끝을 보기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심는 사람 따로, 베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림사업에 적극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아버님의 덕으로 오늘은 오동나무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 혜택을 누린들 누가 걸고넘어질 사람은 없다. 며칠을 생각한 나는 고목의 오동나무를 산밭에 그냥 묵혀둔다는 것은 아버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오동나무를 팔 테니 가야금 2대만 만들어줄 수 있나요?‘
비록 아버님께서 손녀딸이 결혼할 때 장롱을 위해 심었다 하지만 가야금으로 대체해도 나무라지 않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 가야금 제작의 명장이라고 하지 않던가? 딸은 그렇게 얻은 명품의 가야금으로 국악공부를 시작했고 제법 명성도 얻었다.
“지연아, 오늘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기 전 네 가야금 소리를 한 번 할아버지께 들려 드리자.”
이렇게 시작된 우리 집의 할아버지 제삿날은 손녀딸의 가야금 연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분향을 하고 절을 올린 후 사신과 음복을 거친 다음 다시 아버님을 저승으로 보내드린다. 그러면 돌아가시는 아버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 같다. 아버님께서 애초에 오동나무를 심으실 때는 손녀딸을 생각하기도 하셨겠지만 놀고 있는 산밭이 아까웠을 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오동나무였으리라! 그렇게 오동나무를 심으셨기에 오늘의 가야금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동나무를 팔고서도 나는 오랫동안 산밭을 잊고 있었다. 오동나무를 팔아 돈을 쓸 줄만 알았지 후손을 위해 다시 나무를 심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돌아간 조상님께서 나무 심는 법을 알려주시고 그 쓰임까지 깨우쳐 주었건만 이를 실천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이던가?
“여보, 올 봄에는 산밭에 오동나무를 심어야겠어요. 우리가 누린 풍요를 이어서 후손이 또 누려야 되지 않겠어요?”
아버님께서 산밭에 심은 오동나무를 팔아 우리는 목돈을 쥐고 손녀딸에게 가야금을 선물했다. 그러면 이제는 내가 우리의 후손에 뭔가는 물려줘야 한다. 그러려면 아버님으로부터 배운 대물림의 정신을 본받아 산밭에 오동나무를 또 심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남편은 나무를 심어봐야 그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산을 가꾸는 것은 시간과 돈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산과 맞닿아 있는 거친 땅이지만 시어머니께서 아끼던 밭이고 시아버님의 오동나무 밭이다. 그런 산밭을 산에서 내려온 칡에 싸여 버려둘 수만은 없는 것이다. 나무를 심고 풀을 베고 칡을 없애니 어느새 산밭에 심은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다. 파란 오동 꽃의 꽁무니를 혀로 빨면 달달한 꿀맛이 느껴진다. 이 맛은 오동나무를 심어 후손을 생각했던 아버님의 사랑이 담긴 맛이고 산밭의 대물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오동나무에 기어오르는 칡을 끊고 봉황이 깃들기를 고대하며 나무를 가꾼다.


 

당신도 나 같은 코이가 되어 보실래요

박재현

저는 비단잉어 코이예요 제가 어릴 적에는 그저 숨 쉴 수 있는 작은 어항에서 살았어요 그땐 조금만 돌아다녀도 힘들고 숨도 가빴어요 조금씩 제 몸이 자라며 이제 그 작은 어항은 몇 번 몸을 뒤척이면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어요 아무리 몸을 뒤집어도 어항은 바뀌지 않았어요 저는 몸을 더 키웠어요 그제야 안 되겠다 싶었던지 주인이 저를 좀 더 큰 어항으로 옮겨주더군요 상황은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엔 아 다행이야 숨도 편히 쉬고 힘도 나더니 점점 더 형편은 작은 어항에서와 다르지 않았어요 저는 더욱더 제 몸을 키웠어요 그저 여기에서만 안주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주인은 매번 어항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어느 날엔가는 저를 차에 태우고는 인적 없는 산 아래 저수지에 풀어주더군요 얼마나 시원하던지 몸은 날아갈 것 같고 좋았어요 그러던 어느 비가 몹시 오던 날이었어요 꽈르릉 산이 무너지더니 흙과 돌들이 저수지로 몰아닥쳤어요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엄청난 물살에 쓸려갔지요 저수지 둑이 산사태로 무너졌고 저는 어느 새 강에 왔던 거예요 여기는 답답하지 않았어요 마음껏 헤엄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저수지는 사방이 막혀서 답답하기도 했거든요 이제 저는 상류로도 가고 저 멀리 멀리 바다로도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몸집도 키웠고요 그러 던 어느 날 바다를 산책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만약 제가 어릴 적 작은 어항에서만 살았다면, 그보다 조금 더 큰 어항에서만 살았다면, 산 아래 저수지에서만 살았다면, 강에서만 살았다면, 꼬리를 물고 지난날들이 자꾸만 생각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바다보다 더 큰 곳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어디로 가면 산들이 노닐고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더 큰 바다가 있을까 더 큰 바다가 있을까 언젠가는 그곳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살 수 있을까 분명 그리 될 수 있을 거라 여기면서 말이예요

* 비단잉어 코이 : ‘코이의 법칙’을 만든 비단잉어. 코이의 법칙은 어떤 크기의 꿈을 꾸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며, 비단잉어 코이는 어항의 크기에 따라 성장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작은 어항에서는 5-8cm,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15-25cm, 넓은 강에서는 100cm, 바다에서는 90-125cm까지 자란다는 비단잉어이다.


제 목 : 사랑의 살구나무

윤종원

고향집 풍경은 초가 집 두 채를 흙 담이 둘러쌓다. 토담의 높이는 살구나무 아래 둥치를 겨우 가렸다. 살구나무는 우리 집과 동네를 알리는 표지판 역할을 했다.
마을에서 우리 형제들을 가리켜‘살구나무 집 아이’로 불렀다. 봄날 살구꽃이 핀 집이 보이면 ‘구서’동네의 시작 이었다. 우리 집 살구나무는 그만큼 컸고 그림자는 아래채를 덮었다. 살구나무는 집을 지을 때 심어져 해마다 조금씩 그 몸피를 키웠나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림잡아도 이십 년 이상을 자라 해마다 맛있는 살구를 품고 있었다.
살구나무는 집안의 자랑 거리였다. 나뭇잎 보다 분홍색 꽃이 먼저 피는 살구나무는 초가집과 어울려 명화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며 떨어지는 날에는 장독대와 마당에는 꽃눈이 내렸다. 살구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 서 있으면 새콤함 살구 맛 생각에 침이 고였다.
여름철에는 살구나무 그늘 아래 멍석을 깔아 여름 한낮의 열기를 피해 달콤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멍석을 깔아놓고 여름 하루를 보냈다. 살구나무는 새들이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터 역할도 했다. 살구나무는 가족과 새들에게는 무한한 이익을 제공하는 자연의 어머니 품 같았다. 나무가 사람에게 주는 혜택을 일찍부터 보면서 자랐다.
가을철 퇴색되어 떨어지는 잎들은 한곳으로 모아져 사랑채 아궁이 땔감이 되었다. 깊은 겨울밤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는 자연의 교향곡이 되어 귀를 쫑긋하게 했다.
큰 키의 살구나무답게 살구 맛도 최고였다. 빛깔만 요란한 개살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풍부한 과즙의 맛을 동네에 떨쳤다.빈농의 집에 자랑거리가 되었다. 살구가 익어 수확하는 날을 이웃집도 기다렸다. 살구나무에는 부모님의 원칙이 있었다.
살구꽃이 떨어지고 작은 초록색 열매가 달리면 부모님은 살구 한 알이라도 따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호기심에 장대로 살구나무를 두드렸다가 호되게 혼이 나고 더 이상 나무를 흔들지 않았다. 살구는 우리 집안의 돈 벌이었다.
살구를 수확하는 날은 장날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에 우리를 깨워 커다란 비닐 네 귀퉁이를 붙잡게 하고는 살구나무를 흔들었다. 떨어지는 살구는 툭 툭 소리를 냈다 . 살구는 한 겨울의 폭설처럼 순식간에 비닐 위에 쌓였다. 부모님은 살구를 골라 좋은 것은 대부분 장터로 가져갔고 품질이 떨어지는 건 우리들이 먹을 수 있었다. 놋쇠 그릇에 골고루 담아 이웃집에 돌렸다. 제사를 지낸 다음날 아침 음식을 나누듯이.
장날의 저녁이 시작되고 더 어두워졌을 때 아버지는 손수레를 끌고 왔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품과 형제들의 고무신을 사왔다. 살구를 따는 날은 우리들 신발을 개비하는 날로 자리 잡았다. 장터 과일 집에 바로 넘기지 않고 더 많은 이문을 내고자 아버지가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살구를 사라고 외치는 소리를 조금 더 큰 후에 들었다. 살구는 생존방식을 가르쳐 주는 처음이었다. 내가 열 살 무렵 살구나무 법칙이 깨어진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저녁 밥은 밭에서 일이 늦게 끝나 늦었다. 배고픔이 더 크게 다가와 모두들 정신없이 먹었다. 밥상을 물리는데 거지가 동냥을 왔다. 내 또래의 낯선 거지였다. 처음이라 우리 집에 온 것이다. 우리 집 살림을 아는 동네 거지였다면 우리 집을 지나쳤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들이닥친 방문자에 어머니는 당황했다. 조금 전 밥솥을 긁어 밥을 다 퍼온 것을 식구 모두는 알고 있었다. 동냥 그릇을 채워주려면 밥을 해서 주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하늘에서 흰 쌀밥이 뚝 떨어지지 않는 한 거지의 간절한 눈빛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침묵의 고요가 잠시 어두운 마당에 깔렸다.
갑자기 어머니가 장대를 들었다. 거지를 &#51922;으려는 줄 알고 우리들도 일어났다. 어머니는 장독대를 돌아 살구나무를 두드렸다. 돌아오는 장날 수확을 준비하던 살구였다. 그해 살구는 유난히 컸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가지가 휘청거리며 살구가 떨어졌다. 벼락같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살구를 주어 담아 깨끗하게 씻어 동냥 그릇을 가득 채웠다.
“미안하다 쌀도 밥도 다 떨어지고 이것밖에 없다. 얼른 저 집으로 가 봐라”하며 살림이 넉넉한 이웃집을 가리켰다. 거지는 뒷걸음치며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행주치마로 눈물을 찍어냈다.
“야들아 살면서 가난한 사람을 절대로 외면 하지마라. 제일 큰 죄가 된다.”
고향집 살구나무는 보릿고개를 넘는 우리 가족의 지팡이였고 거지의 한 끼가 되었다. 그날 어머니는 사람사이 도리를 살구나무로 가르쳐주었다.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살구나무를 통해 배웠다.
세상의 모든 과일은 둥글다. 부자 입 가난한 입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굴러 가란 뜻이 아닐까. 


제 목 : 숲으로의 동행

장은선

봉분옆에 나란히 앉은 산꿩 한쌍
수풀을 박차오르며 우렁차게 울부짖는다
서로 짝을 잃지 않으려고
팽팽한 공처럼 울음통에서 하늘로 튕겨올리는 소리다
장끼가 날렵한 날개짓으로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를 빈하늘에 그리고 가면
까투리가 이미 읽었다는 듯이
오르락 내리락 날개죽지로 지우고 간다
하늘은 사방 팔방이 길이고 자유인데
마주보며 양날개짓하는 곡예비행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숲길마져 지우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한톨의 양식을 포착한 까투리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자
장끼는 파수병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아
그들의 사랑은 유희를 초월한 참생명이다
그들의 내밀한 언어인 오색꽁지로
영혼이 무르익은 사랑법이 펼쳐지면
청정한 솔숲도 화음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가을 저녁 노부부 비틀거리고 부축하며
숲속으로 산책하는 뒷모습이
멀리서보니 산꿩 한쌍을 닮았다

 

[15회 수상작]
수상내역
대상
금상
은상
동상
장려


 

대상

내 베개에는 아버지가 산다(이영혜)

파프리카 네 쪽, 오이 한 개, 신문, 책, 생수 그리고 견과류 약간.
출석을 부르듯 하나하나 배낭에 챙겨 넣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의 편백 숲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섶으로 지루한 초록 일색인 여름을 장식해주는 개망초꽃이 잔잔한 얼굴로 계절의 배경이 되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저 자리엔 보랏빛 용담이나 각시취, 쑥부쟁이가 대신할 것이다. 작년에 우연히 만난 투구꽃을 올해도 만날 수 있을까? 깊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그 꽃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허리를 숙여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꽃들과 정다운 눈인사를 나누고 아래쪽을 더듬어 내려가 보았는데 지난 여름, 콸콸 흘러내리던 계곡물은 폐경이 된 여자의 그곳처럼 바짝 말랐고 노루오줌꽃이 ‘괜찮으신가요?’ 고개를 기울이며 안부를 물었다. 혹독한 가뭄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의연히 제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며 만물을 쓰다듬는 바람의 손길을 느끼며 한 평 반 남짓 되는 편백 숲의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종종대며 살았고, 그리하여 병을 얻은 내 삶을 자연의 고유하고 느긋한 시간에 맞추어보고자 찾는 단골 장소이다. 나는 인디언의 달력처럼 나만의 그 장소를 ‘천사가 날개를 빗질하는 곳’이라고 명명했다. 만물의 근원이라 여기며 경외하던 자연이 개발의 걸림돌이라 생각하는 요즘, 깨어 부서지지 않고 오래 오래 남아 엉킨 내 마음을 언제든지 가지런히 빗질하여 주기를 바라면서….
자리 옆의 편백나무 열매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베개가 되어 나의 불면의 밤을 내내 지켜주고 있는 익숙한 내음. 몇 년 전, 지금은 먼 강을 건너가신 아버지가 맡고 싶어 하셨던 그 향! 그 당시 나는 편백나무 숲이 어딘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른 채 아버지가 “나 같은 사람에게 편백 숲이 좋다더라.” 하시며 가고 싶어 하시는 편백 숲을 찾다가 미숙한 운전을 핑계로 산을 서둘러 다시 내려왔었다. 아버지 몸의 뼈 구석구석에 퍼진 암세포가 편백 숲에 온다고 사라진단 말인가? 하며….
아버지가 산에도 머무를 수 없는 마른 몸이 되었을 때 내 몸에도 암이 자라고 있음을 알았다. 인터넷에 ‘피톤치드의 효과, 편백 숲의 효능’이라는 단어를 쳐서 검색을 해 보고서야 편백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목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분비하는 살균물질이라는 것과 균들에게 내성을 생성하지 않는 항균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란 말인가? 나에게 피와 살을 나누어주고 자식의 죽음도 대신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병은 아랑곳없이 내 몸의 병 앞에서는 적진을 향하여 진군하는 병사처럼 이 것 저 것 가리지 않고 좋은 것은 다 해보고 싶어 하다니….
어느 날, 항암치료로 듬성해진 머리카락을 숨기려 모자를 쓰고 아버지의 병실을 드나들던 나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시고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는 물음에 젊었을 때부터 괴롭히는 편두통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병원에서는 더 할 것이 없다는 의사의 권유로 퇴원 후 아버지는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편백 숲을 알아내시고는 편두통을 앓는 딸을 위해 편백 열매를 주워 베개를 만들어 주셨다. 그 작은 열매를 주워 베개 하나를 만들기 위해 온 몸 가득한 암의 통증을 참으며 얼마나 많이 허리를 굽혔을지…. 항암주사를 맞고 나면 시도 때도 없이 올칵올칵 게워내는 구토와 바이킹을 탄 것같이 어지러운 증세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아는데….
편두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베개는 유년의 억센 아버지 손이 되어 뭉친 어깨와 목덜미를 주무르고 잠들기 힘들 때 열매의 향은 바늘처럼 뾰족 솟은 마음을 녹차보다도 더 부드럽게 가라앉혀 수면을 유도하기도 한다.
베개 속에는 아버지의 시간으로 가득하다. 당신의 남은 시간을 헤아리고 아픈 통증을 참으며 열매를 주운 시간, 그늘에 잘 펴 말리며 기다린 시간, 어머니와 잘 여문 것을 고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따뜻한 시간, 재봉틀로 베개를 박음질하는 어머니 옆에서 귀여운 잔소리하셨을 시간, 그 시간의 힘으로 난 암환자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5년을 이제 몇 개월 남기고 있다.
다시 한 번 뱃속 가득 배부르게 편백나무의 피톤치드 몇 모금 마시고 부잣집의 값비싼 침대보다 좋은 숲에 누워 무심히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을 새어 보았다. 인간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곳에서 법정 스님이 즐겨 읽으셨다는〈월든〉을 펼쳐 들었다. 월든 호숫가에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부러워하며 읽다가 목덜미에 어릴 적 외할머니의 부채질에서 나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잠깐 잠이 들었다. 환한 꽃이 피던 내 삶의 뒤란이 아주 섧게도 적막해진 요즘의 우울을 잊은 채…. 모처럼의 단잠에서 깨어 보니 열대야로 밤새 뒤척여 무겁게 젖은 몸이 가벼워졌다.
정채봉의 시〈엄마가 하루만 휴가를 나온다면〉에는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고 했지만 내 아버지가 단 하루만 휴가를 나온다면 배낭 속에 당신이 좋아하셨던 막걸리와 김치를 챙겨 그 날 찾지 못했던 편백 숲으로 모시고 와서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고 싶다. 통증을 잊기 위해 나지막이 부르시던 현철의 노래 〈내 마음 별과 같이〉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노랫말처럼 아버지도 저 하늘 별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어둑해진 숲을 나오자 서녘 햇살이 ‘반짝’하며 멈춘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두려워 말자. 오늘밤도 내 베개 속의 아버지가 나와 큰딸의 이마에 잠을 풀어 놓고 건강과 원기를 선물할 것이다. 

산림조합중앙회

해가 읽고 있는 나무가 두꺼워 보인다
우두커니 열려 있는 낱장에 녹색 글자가 반짝반짝
나무가 해에게 자기를 읽어 주고 있다
느낌과 시각 사이에 착각 비스듬히 삼 층에 내가 있다

해가 내게 시각을 주면 나무가 착각을 녹색 언어로 바꾼다
표의문자를 한글로 받아 쓸 때는 소리 변환을 한다
나무의 목소리가 스것스것 한다
내 귀는 오역한 적이 있긴 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집중을 눈치 채고 해의 목소리와
따끔따끔한 눈초리까지 들려준다

소리를 본다는 것은 나무가 해를 듣는 것과 같다
나는 귀를 보고 귀는 나무를 듣는다
분명한 제 뜻으로 읽어 주지 않은 건 나무만이 아니다
활짝 열려 있는 원형 광장이 해와 나무를 듣고 있다

스스로 문자가 된 꽃이 광장의 귀를 당기는 느낌과
내가 듣는 음역 가운데 시각과 착각이 엉켜 있다
공원 옆에 산다는 것은 내가 나무를 듣고 있을 때
해가 나를 읽는다는 것

제대로 듣고 싶은 잠자리가 맴돈다
녹색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오후가 광장을 밑줄 긋자
잔디가 촘촘한 귀를 낮추고 시야 끝까지 받아 적는다

꼼꼼히 듣고 있는 내 눈을 나무가 다시 읽는다.    

산림조합중앙회

은상

바람이 숙면에 들어갈 때 숲은 한 폭의 잘 그려진 동양화다
흔들림 없는 나무에서 소리가 빠져나간 새들은 지저귀고
걸음을 세운 사람들 나무에 기대어 그늘을 발라먹고 있다
봄은 아직 여물지 않았는데 여름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 있다
잘 찍어낸 필름 한 통이 비 개인 하늘을 말아놓고
숨바꼭질하는 자작나무 잎에서 뭉개진 안개가 풀어진다
내일까지 물고 온 까치의 날개에서 구부러지는 숲의 배색
햇빛이 뿌려놓은 조각으로 퍼즐을 맞추고
외출하는 아내 닮은 꽃들에게 입맞춤하는 벌 나비
숲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 차려진 식탁으로 변신한다
막 샤워를 마친 풀잎들이 옷 벗은 체 체면도 없다
푸른 살갗을 다 드러내 놓고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나무
숲의 껍질을 발라낼 때마다 시큼한 단물로 맛있게 물든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걸어간 흔적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스스럼 없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풀잎 위에 잠깐 눈 붙이고 간
쪽잠이 풀어지면 몸을 웅크리고 있던 꽃들은 알을 깨고 부화한다
꽃들이 손가락 걸고 향기 풀어놓은 오솔길
사람들 발자국 나이테처럼 흙 속에 새겨 넣는다
나무마다 복사를 하는 그림자가 살을 찌우는&nbsp;&nbsp;
숲은 바람에 젖어도 한 폭 잘 다듬어진 절경은 젖지 않는다.

산림조합중앙회

동상


여름의 인공림 숲은 정말 아름답다. 먹구름과 흰 구름들은 꼬리를 물려 쫓고 쫓기는 그 틈을 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서 나를 앞지르는 바람과 조용히 뒤를 따르는 소음을 매달고 차는 질주한다. 겨울의 흔적 뒤에 여름의 색이 번지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목적지의 끝이 닿은 이곳, 경상남도 함양 상림 인공휴양림이라는 안내판이 미소로 눈앞에 다가선다. 세대와 분야는 다르지만 신라시대 선인들의 발자취가 천년의 바람을 일으키는 숲 속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흘려듣던 그 아련한 숲의 들머리에 들어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한 파도소리를 내는 숲, 아침이면 곤히 잠든 새들을 깨우느라 잎새들이 찰랑찰랑 하늘을 향해 몸을 흔든다. 느티나무 숲에 둥지를 틀고 사는 온갖 새들이 오늘도 무사히 창공을 누비다 마치고 오도록 하는 기도 같다.
어디선가 ‘뚝딱뚝딱 뚜따닥~’ 하고 나무 찍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나는 소릴까. 위를 올려다본 순간, 높은 나무의 기둥에 붙어 오색딱따구리가 연방 머리를 앞뒤로 젖히며 둥치를 쪼고 있는 게 아닌가. 오탁에 찌든 도심에서는 듣기 힘든 천연의 소리다. 소리는 점점 크게 확대된다. 딱따구리의 부리에 나무껍질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오전 이른 시간 이곳은 사위(四圍)가 완벽한 고요다. 모든 게 멈춘 듯 정밀(靜謐)한 여름날, 소음이라곤 오직 내가 내쉬는 숨소리뿐이다. 더위를 흠뻑 뒤집어쓴 소나무들, 무엇 하나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푸르름으로 빛난다.
재잘거리는 텃새의 낭랑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숲 속의 청량한 기운과 풀들이 내뿜는 자연의 향기는 나른해진 몸도 마음도, 얽히고설킨 시름도, 잡생각도 다 내려놓게 하는 이른바 삼림욕(森林浴)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나뭇가지 하나 꺾어 꽂은 게 벌써 천년이 되도록 우람한 낙랑장송으로 살고 있다. 인내하고 기다릴 때마다 가지가지에 사리처럼 오롯한 솔방울들이 돋았다. 보면 볼수록 단아하고 다소곳하게 치마폭을 펼치고 자리를 잡은 소나무의 넉넉한 자태가 바로 극락의 품이 아닐까 상상한다. 몸과 마음이 세정(洗淨)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럴 때엔 앞으로 매순간을 이렇게 맑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이 가슴에 그득히 차오른다.
그러나 피사체가 바뀌면 어느새 본태성 속기(俗氣)가 솔솔 피어오른다. 마음은 금세 간사해져서 속물(俗物) 근성이 도진다. 참 뿌리도 깊다 싶다. 삶이 끝난 후에는 다 부질없는 것인 것을, 과도한 물욕과 헛된 욕심의 크기는 밑이 빠진 독이니 이를 어쩌랴.
소나무가 나를 다독이듯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처진 채 드리워진 그의 품이 얼마나 넉넉했으면 천년 동안 거쳐 간 마음들을 넉넉히 잠재워 주었을까.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일을 몸소 실천하는 처진 소나무를 보며 나도 이제 느리게 살고 싶어진다. ‘기다림’이란 어쩌면 속세에서 선계로 이어지는 들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슴으로 품으며 고운 최치원 산책로로 발길을 옮긴다. 역사 속 문향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치원, 신라 진성여왕 때 태수로 와 있던 고운 선생이 함양의 너른 들 가운데로 흐르던 위천수의 범람으로 인해 홍수 피해가 심한 것을 보고 강을 서남쪽으로 돌린 후 수해로부터 멀어졌다. 196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 속을 거닐며 신라 최고의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을 더듬는다. 9세기 토황소격문이란 명문으로 중국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빛내며 통일 신라의 발자취를 남기고 돌아온 우리나라 한문학의 시조인 최치원의 삶을 되새겨 보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숲이다.
숲을 가로지르는 냇가 바로 옆 정자가 탐방객들의 눈을 붙든다. 천년의 숲을 조성한 최치원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43년(1906년)에 후손들이 세운 사운정(思雲亭)이다. ‘고운을 추모하는 정자’라는 뜻으로 건립했다는 산책로 길 위에는 선생의 넋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빛나는 세월의 흔적들을 남기고 떠난 영혼에서 울리는 목소리며, 글 속에서는 숨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세대와 분야는 다르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예술적 열정은 통한다는 이야기를 천년의 바람 일으키는 여름 상림 숲 에서 만난다.
우리는 옛날 역사 속의 뛰어난 사상가와 문학가와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남기고 간 소리와 그림자로 조우한다. 신라 천년의 고즈넉한 숲길을 걸으며 간단없이 쏟아지는 상쾌한 새소리에서 옛 문인들의 시를 듣는다. 자아를 성찰하기 좋을 뿐 아니라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경험해 보기에도 그만이다.
성하(盛夏)의 태양을 먹고 자란 온갖 나무들은 한층 푸르게 우쭐대며 하늘의 구멍도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졌다. 얼마 아니 있으면 낙엽 지는 가을이 자연의 정취를 흠뻑 분출시키는 상림 숲 전체를 수놓는 단풍으로 보는 이들을 황홀경(&#24627;惚境)에 빠지게 하리라.
참나무와 소나무는 한국의 대표적 수종이다. 어느 산 어느 곳을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강산을 지키는 나무들이다. 천 년 전의 통념이 박제된 여러 가지 기물들이 거미줄에 걸려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나무는 꿈과 희망이다. 나무가 희망의 대상인 것은 나무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인간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인간은 나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생명의 원천인 땅과 평생 동거하는 나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닐까.
신라 천년의 문화가 담겨 숨 쉬고 있는 이 숲 속에는 시대를 이어가면서 많은 문사(文士)들이 다가왔었다. 특히 신라의 최치원 조선전기에 김종직 조선후기에 박지원 등이 대표적인 외부의 인물이다. 허공을 향해 매달렸던 현고수(懸鼓樹),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고 곽재우 장군이 걸어놓고 의병을 훈련시켰다는 북채는 중앙을 얻어맞은 심장에서 노도처럼 호령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리가 바람의 파장을 타고 민족의 혼을 깨어내기 시작했을 것이고, 뻗어가는 소리는 산자락에 부딪혀 다시 소리를 낳고, 소리의 흐름은 질서 없는 질서로 일어서고 꼬리를 감췄을 것이다.
숲 속 모퉁이마다 오래된 역사만큼 많은 유적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척화비가 서 있고, 길옆 모퉁이에선 제법 단장을 한 묘지 한 기가 나왔다. 반쯤은 땅에 묻히고 반쯤은 하늘을 향해 있다. 세종대왕의 열두 번째 아들 한남군(漢南君)의 묘이다.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 혜빈 양 씨의 소생으로 단종의 삼촌이다. 김종직이 다섯 살 아들을 잃고 슬픔을 이기기 위해 심었다는 느티나무, 홍역으로 잃은 아이의 이름을 따 ‘목아(木兒)’라고 불렀다. 이듬해 함양을 떠나면서 학사루라는 누각 앞에 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아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는 사연도 걸려 있다. 그런가 하면 회재 이언적이 자신의 건강을 보살피기 위해서 심은 조각자나무,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백송도 눈에 띈다. 뇌계 유호인의 비석이 명불허전(名不虛傳)으로 전한다. 숲 옆으로 흐르는 강 위천은 그의 호를 따라 뇌계천이라 불렀다.
흔히 문화재라면 유리장 속의 금관만 생각할 뿐 나무 문화재란 말엔 익숙지 않은 국민이 대다수인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문화적 가치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듬어 준다면 그것 또한 문화재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백세토록 길이 전할 맑고 푸른 기풍을 뜻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글귀라고 한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고고한 선비가 지닌 절개를 대변하는 산은 만물을 낳는 어머니라 했던가. 만물이 있는 산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지만, 그러나 만물이 없는 산은 허전하기 그지없다.
자본이 몰리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거운 가치를 지닌 역사와 삶의 흔적들이 하나둘 지워지고 만다. 그와 함께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전통의 파괴다. 사라져가는 천년의 풍경과 시차를 잡아두기 위해 스마트폰 속에 가둔다.
어느새 해가 기울면서 구름은 바람 따라 떠나고 인생도 세월 따라가며 서쪽 산 그림자가 숲 속으로 길게 누우면서 보따리 같은 조각달이 높은 하늘에 걸려있고 뒷산과 먼 산에 가족을 찾는 뻐꾸기 소리가 한창이다. 그 소리에 애처롭고 애틋한 마음이 끝없이 이어져 아지랑이처럼 어디론가 흘러간다.
인근 농장에서 “이랴 이랴” 소를 모는 소리가 내 귓속에는 황폐해지기 쉬운 산림을 걱정하는 숲의 신(神)들이 한숨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산림조합중앙회

동상  숲속 들꽃 예찬(유인근)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우리나라 산과들 언덕에서 사시사철 피고 지던 많은 들꽃들이 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다 눈을 마주치던 그 흔하디 흔한 깽깽이풀도, 마을 뒷산 양지바른 언덕 밑 무덤가에 수줍은 듯 고개 숙여 피어나던 할미꽃도,
한여름 밤 마을 어귀 길섶에 함초롬히 피어나 함께 달마중하던 노란 달맞이꽃도.
어느 틈엔가 우리 곁을 떠나 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는 잊혀 진 존재가 되었다.
어릴 적 추억을 같이하던 그 많던 들꽃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립기만 하다.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옥산리 365번지.
서울에서 남동쪽 용인과 안성의 경계지역 드넓은 숲속에는 우리의 기억 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들꽃들이 가족처럼 한곳에 모여 살고 있다.
영동고속도로 양지 IC를 나와 17번 국도를 따라 백암방면 으로 가다보면 근곡 4거리와 만난다. 그곳에서 우회전 하여 다시 329번 지방도를 따라 삼죽방면으로 10여분을 가면 눈앞으로 제법 우람한 산이 펼쳐진다.
그 산자락 북서향으로 흘러내린 숲속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구분이 안 되는 온갖 진귀한 보석들이 가득 숨겨져 있다.
그 보석들은 다름 아닌 그 옛날 어디선가 한번쯤 눈 맞춰 보았을 법한 들꽃들이다.
야트막한 숲은 시골 외갓댁 처럼 친근하고 편안한다.
산자락으로 난 길을 따라 발을 옮겨 놓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소리, 새소리가 정겹다.
구불구불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갈수록 싱그런 풀내음과 향긋한 꽃내음이 밀려온다. 식물도감을 펼쳐 보아야 꽃 이름을 알 수 있는 야생식물들로 가득하다.
키 큰 나무들과 키 작은 나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숲속.
자연 그대로의 지형에 식물의 서식지를 만들어 놓아 고향 뒷동산을 찾아온 것처럼 아기자기 하다.
숲속 길섶 나무아래, 돌 틈 사이로 피어난 형형색색 어여쁜 들꽃들.
홀로 외로이 또는 무리지어 어느 것은 소박하게 또 다른 꽃은 탐스럽게 피어나 환하게 웃음 짓고 있다.
산속 구석구석에서 자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꽃식물들은 옮겨 심었다기 보다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서 나고 자란 듯이 보인다.
빼꼼히 돌 틈 사이로 보 일듯 말듯 피어난 앉은뱅이 꽃도 첫눈엔 심심 한듯 하나, 꽃에 눈 맞추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볼수록 꽃이 지닌 매력에 흠뻑 빠진다.
이곳 자연공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를 알려면 몸의 자세를 낮춘 채, 거북이 걸음걸이를 해야 한다.
가만히 귀 귀울이면 그들의 속삼임이 들려오고, 마음이 느낌으로 전해져온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마음속 문을 활짝 열고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생김새 만큼이나 신기하고 재미난 이름을 갖고 있는 들꽃들. 이파리에 얼룩이 많아 이름 붙여진 ‘얼레지’묘한 어감의 꽃 이름과 달리 연분홍 고운자태를 뽐내는 ‘개불알꽃’.
4월부터 늦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가장 오랜 시간동안 꽃을 피우는 ‘매미꽃’.
지름이 1미터나 되는 이파리가 달려있는‘큰병풍쌉’.
이파리가 치마처럼 둥근‘처녀치마’.
꽃받침이 매의 발톱처럼 생긴‘하늘매발톱’.
향기가 아침저녁으로 백리까지 뻗친다는 ‘섬백리향’.
벌써 오래전 이곳으로 옮겨져 새로운 안식처를 찾은 이들 하나하나 마다의 귀한 생명체들은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갖고 꽃으로 피어나 빛을 발하고 있다.
“어 깽깽이풀 아냐, 여기서 보네” .
이곳에선 가끔 감회어린 상봉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어린 시절들에서 소 풀을 먹이거나 나물을 캐면서 흔히 볼 수 있었던‘들풀’을 만나 반가움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고향의 옛 친구 같은 홍자색 꽃무더기 앞에 마주앉아, 이리저리 매만지며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반가움을 나눈다.
깽깽이풀과의 추억담을 나누는 얼굴은 어느새 어린 날의 동심으로 돌아가 있다.
엄마가 물동이를 이고 가던 물가에 많다고 해서‘동의나물’.
한창 바쁜 시골의 모내기철에 바쁜 일꾼들을 놀리듯이 저 혼자만 한가롭게 꽃을 피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깽깽이풀이다.
꽤 오래전 이곳은 그저 평범한 야산이었다.
듬성듬성하니 산언덕 곳곳에 몇 그루의 나무밖에 없는 보잘것없던 민둥산 이었다.
다양한 나무와 식물이 하나 둘 옮겨져와 숲을 이루게 되면서 작은 풀벌레들도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풀들이 저마다 꽃을 피우자 곤충들이 모여들었고, 이름 모를 새들과 다람쥐, 청솔모, 두더지, 꿩과 두루미까지 날아들었다.
자연 본래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풀’이라는 모든 생명의 근원, 그 자연의 이치가 깃들기 시작된 것이다.
이산 숲속의 한 뼘 잔디 밑 땅속에선 지렁이와 땅강아지가 서식한다. 그로인해 주변의 풀벌레와 개미들이 모여든다. 더불어 새들이 날아들고, 크고 작은 동물들까지 찾아와 낙원을 만들었다.
이들 모두는 숲에서 나고 죽는다. 그리고 이들의 살과 뼈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수천만개의 미생물을 살게 한다. 이렇듯‘풀’은 자연 생태계 먹이사슬의 첫 매듭이다.
모든 생명은 풀에서 시작되어 다시 풀로 돌아간다. 보잘것없는 작은 풀 하나가 이렇게 아름답고 울창한 숲을 만들어 주었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산책하듯 식물원 전체를 한 반퀴 다 돌아보는데 만도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도심지와 가까운 곳이어서 유치원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들에 이르기 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린 날 소풍을 와서 놀듯 이곳을 찾는다.
숲으로 난 여러 갈래의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해 가든 온통 나무 숲길뿐이다.
숲길을 걸어가며 고요히 생각에 잠긴 나무들의 몸통을 어루만져 본다. 나무들의 생각이 손을 타고 마음으로 까지 전해져 온다.
검붉은 빛깔의 흰줄무늬를 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날개를 나풀나풀거리며 날아들더니 은사시나무 옆 산초나무 잎 새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호랑나비다.
요즘 보기 드문 호랑나비를 이곳에선 쉽게 볼 수 있다.
호랑나비는 산초나무에 알을 낳고, 애벌레는 산초 나뭇잎을 먹고 살아간다.
산호랑나비는‘백선’이라 불리는 식물에, 애호랑나비는 족두리풀에 모시호랑나비는 기린초에 기대서 살아간다.
산초나무, 백선, 기린초가 있어 호랑나비들은 산과 들을 날아다니며 자연을 아름답게 수놓고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이른 봄, 양지바른 곳에 무리지어 피어나 봄을 알리는 복수초, 얼레지, 노르귀. 이들이 남보다 일찍 꽃을 피우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꽃을 피워내기 위해선 인간의‘출산’과 같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더욱이 추운겨울 언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겨우내 눈밭에서 먹은 것 없이 쏟아내야만 하니 제 몸을 태울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키 큰 관목 밑에서 생장하는 식물은 햇볕받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들은 이른 봄 씨앗을 맺기 위해 필사적으로 꽃을 피운다.
숲속 곤충이 활동하는 오전 10시에서 오후3시 까지만 꽃을 피운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벌과 나비가 활동을 하지 않으니 꽃잎을 닫는다. 일단 수정이 되면 꽃을 떨군다.
뱃속의 아기, 즉 씨앗을 튼실하게 키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씨앗을 퍼뜨리고 나면 이 풀들은 오랫동안 긴 휴면에 들어간다.
사람들 표현대로 라면 죽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고 미련 없이 가는 것이다.‘삼지구엽초’나‘깽깽이풀’은 씨앗에 작은 풀을 담고 있다. 그 풀로 개미들은 유인하여 씨앗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처녀치마’의 꽃대가 50센티까지 길게 웃자라는 이유는 그 씨가 바람에 날려 멀리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팽이 눈은 꽃잎의 크기가 2-3미리에 불과하다. 꽃이 너무 작아 벌, 나비가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꽃이 필 즈음이면 초록빛이던 잎이 노랗게 변한다. 그것이 꽃 인줄 알고 왔던 벌과 나비들이 본래의 꽃을 찾아 수정한다.
자연의 신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사람들은‘금강초롱’이나‘에델바이스’같은 고산지대에서 피어나는 꽃을 좋아한다. 키는 작지만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진하기 때문이다. 꽃은 보통 3월말에서 10월말까지 산다. 그러나 해발 8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살아가는 식물의 생존기간은 이 짧은 기간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고 퍼뜨려야 한다.
식물들은 저마다 생존을 위해 눈물겹도록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화 물결이 가속화되기 전 지금은 어른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시골생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른 봄 모내기를 하며 하루종일 논두렁을 누비고, 밭이랑을 일궈 고추, 감자, 고구마를 심거나, 무, 배추를 재배하며 땀을 흘리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우리 산야에는 수많은 들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때는‘잡초’또는‘잡풀’정도로 여겼던 것들이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지만,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생활주변에 분포하는 식물종이 풍부했던 그 당시 우리 모두는 자생식물이 지닌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식물 종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식물 종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식물을 채집하여 자국으로 가지고 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꽃이 아름다운 백합류를 비롯 원츄리, 비비츄 등의 다년초 식물들로 유럽, 미국, 일본 등지로 이송되어 갔다.
이들 나라는 우리 땅에서 가져간 식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복원을 거듭하여 종을 개량하여, 지금은 개량된 식물을 우리가 역수입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물은 인간의 삶과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필수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한부분이며, 전체 생태계의 균형유지를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종자는 상호 의존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산림파괴와 무차별 개발로 인해 그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식물들이 사라져 갔고, 지금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식물들이 멸종위기의 위험에 처해있다.
인간의 주곡으로 쓰이는 식물은 20여종에 불과하다.
특히 야생식물 종자 가운데는 의약품 원료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많다.
400여개 이상의 식물종이 처방약품의 원료로 쓰여 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약 30여종의 야생종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식물 종 가운데 상당수는 생육환경의 악화로 멸종위기를에 처해있고, 약용식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식물전문가들은 지구에 존재하는 종의 다양성이 파괴되는 것은‘핵전쟁’못 지 않은 무서운 일로 보고 있다.
이들 주요 식물이 멸종위기를 맞거나, 사라지는 것은 의약품 자원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은 이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곳 식물원은 지닌 30여년동안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자생식물을 보관시키는데 땀 흘려 왔다.
악화된 환경 속에서 멸종위기에 처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자생식물들은 살려 가꾸어왔다.
이곳 숲속에 가득히 피어나 밝게 웃고 있는 꽃식물들은 이처럼 따뜻한 손길이 미쳐 관리되고 보살펴진 덕택이다.
30년이 넘게 긴 세월동안 들꽃식물들과의‘깊은사랑’에 빠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자식 보살피듯 숲을 가꿔왔다.
이들이 흘린 영롱한 땀방울이 식물원 나뭇잎 새와 풀잎 풀잎마다에 이슬처럼 맺혀 빛나고 있다. 

산림조합중앙회

장려

나무들의 수화를 몸으로 읽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흔들리는 벚꽃이 소리 지를 때
성대의 울림통을 뚫고
혼신을 다해 메시지가 타전된다
함성에 나뭇가지가 기우뚱 중심을 놓치고
차가운 나무에서 보드라운 소리가 떨어진다
가지는 부러져도 나무의 말은 부러지지 않아
거친 껍질까지 환하게 부드러워진다
깊숙이 묻어둔 뿌리의 야심
하지 못했던 부드러운 말도 꺼내 놓는다
나는 가만히 속말로 대답한다
누구에게 전하고 싶어 속내가 굴러가는지
나무의 심장은 단단하게
말의 어깨를 받쳐 주었다
햇살 아래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며
달콤한 수다가 혈관을 타고 휘어진 가지 끝에서
끝으로 소문이 흘러 숲 속으로 뻗는다
나무 뒤에 응급실이 있다
다급한 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릴 때
나무의 수화는 그저 그뿐
더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침묵을 삼키고 응축한 나무 나이테
말을 종일 굶은 나무 입속에 혓바늘이 돋았다 


  • 산림조합중앙회

    장려  산촌의 봄(김정님)

  • 김칫독 깰 듯하던 매운 바람이 잦아들고, 햇 봄빛이 명주실을 풀어 놓은 듯 일렁인다.  가만히 한 줌 쥐어 보니 보들하고 따뜻하다.  순한 바람이 뜰의 늙은 소나무 겨드랑이를 지나 추녀 끝 풍경위에 슬쩍 앉는다.  북풍설한에 아직도 혼미한 쇠 물고기가 '쟁그랑' 꼬리를 흔든다.  호기심 많은 박새가 발코니 갓등을 콕콕 찍고, 직박구리, 동고비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숲으로 숨는다.  햇빛이 두툼한 잔디밭엔 눈을 감은 늙은 개 명상을 하고, 발아래 엎드려 콩콩 짖으며 어린 개 놀아 달라 아양을 떤다.  뜰아래 넓적바위 오르내리며 겨울 잠 깬 햇 다람쥐 까불거리고,  어느 결에나 보았는지 어린 개 타다닥 달려 나간다.  굴참나무 가지 끝 쪼르르 올라 산초씨 까만 눈으로 내려다보며, 햇 다람쥐 '쨉 쨉 쨉' 엿장수 가위질을 한다.  놈들의 특이한 엿가위 소리는,  '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나를 잡겠다고?  엿이나 드셈! '  강자에게 보내는 절묘한 비아냥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 개 굴참나무 둥치에 붙어 씩씩대고, 집착 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을 아는 늙은 개가 일으켰던 몸을 시큰둥 자리에 도로 눕힌다.  세 놈을 구경하던 흰 구름 두엇이 느릿느릿 산마루를 넘는다.
     
    뒷 뜰, 어린 꽃눈으로 엄동설한을 견딘 매화 꽃 더미가 신부의 면사포처럼 해사하다.  문을 열면 나비 떼처럼 달겨드는 매화 향에 심장이 어찔어찔하다.  뼛속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 어찌 기품 있는 향기를 얻을까.  서편 난간엔 생강나무 꽃잎들이 초저녁 별처럼 돋고, 꽃인지 그림자인지 어른어른 산수유도 안개처럼 번진다.  석축 아래 여릿여릿 진달래가 수줍고, 뜰아래 쪽진 종부마냥 목련이 단정하다.  맹렬하게 꽃불을 지를 영산홍과 꽃 잔디는 아직 천천히 불씨를 뒤적이는 중이다.  고목인 내게서조차 꽃 한 송이 돋을 것 같은 봄 날,  방 안에 있는 건 유죄다.  바구니 달랑 들고, 늙은 개 '청산이' 와, 염소 닮은 어린 개 '염이'랑  흔들흔들 산길을 오른다.
     

  • 발목까지 쌓인 춘설이 녹고, 엊그제 진종일 가랑비 날리더니 땅이 갓 구워 낸 빵처럼 말랑말랑하다.  골짜기 골짜기 마음을 푼 얼음들이 빗물을 따라 '돌돌돌' 계곡을 돌아 흐른다.  마른 계곡 어디에 몸을 숨겨 살았는지, 쉬리와 버들치가 다슬기 등을 거슬러 몰려 흐른다.  흐르다 쉬어 가는 소(沼 )에는, 한천에 통후추를 뿌려 놓은 듯 까만 개구리 알이 촘촘히 박혀 있다.  머지않아 사분음표 같은 놈들이 오두방정을 떨며 뒷다리 앞다리가 생기고, 초 여름내 산골이 떠나가게 울 것이다.  멧 까치 카악카악 가래를 뱉고, 휘파람새 휘잇휘잇 유혹하지만, 해탈한 딱따구리 딱딱 목탁만 두드린다.  문득, 마른 낙엽송 위로 후루룩 후루룩 국수 말아 먹는 소리를 내며 청설모가 날아간다.  겨울잠도 자지 않고 나뭇가지에 새처럼 집을 짓고 사는 묘한 놈을, 어쩌자고 염이가 빛의 속도로 쫓아간다.  달관의 경지에 오른 청산이도 춘정에 그만 도를 버렸는지 펄떡펄떡 뛰어 오른다.  지 목줄에 내 무게가 매달려 있으니 발광으로 그친다.  그믐밤처럼 칠흑 같은 놈이 음산하게 내려다보며 후루룩대니, 움찔한 염이가 포기하고 달려온다.
     
    양광이 쏟아지는 빈 밭엔 어린 쑥과, 냉이와, 씀바귀와, 광대나물과, 봄맞이가 꼼실꼼실 모여 있다.  누가 누가 더 있나 까치발로 오르는데, 밭 절반이 온통 냉이다.  쪼그려 앉자니 희미한 먼 옛날, 나물바구니 옆에 끼고 참새처럼 몰려다니던 옛 동무가 문득 그립다.  지금도 야무지지 못하니 어릴 땐 더 엉성했을 것이고, 바구니를 먼저 채운 친구가 반도 못 찬  내 바구니를 채워주곤 했었다.  그 어른 같던 아이, 어쩌면 종갓집 후덕한 맏며느리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잠시 청산이를 물푸레나무에 묶고 같이 캐자며 염이를 부르니, 이놈마저 봄바람이 들었는지 말처럼 튀며 냉이를 짓이긴다.  저 뜨거운 젊은 피를 어찌 할꼬.  뜨겁든 말든, 통통한 뿌리가 쏙쏙 뽑힐 때 마다 냉이 향이 툭툭 터진다.  겨우내 엎드려 칼바람 견디더니, 이토록 여린 풀이 향도 깊구나.  사람인 나는, 얼마나 더 세월을 건너야 은은한 향기 하나 품어 보게 될까.  기특한 뿌리에 코를 묻는다.
     
    뜰의 석축 사이 사이로 숨어 든, 지난 가을의 은행잎과 솔잎과 굴참나무 마른 잎들을 거둬 낸다.  패랭이와 꽃창포와 도라지와 쑥부쟁이 시든 줄기들도 뽑아 준다.  시든 줄기를 밀고 올라오던 새싹 몇 개가 끊긴다.  행여 힘들까 도와주려던 것이, 그만 녀석들 목숨을 해쳤다.  놀라 도로 묻어 보지만 소용없음을 안다.  혼자서도 잘하는 녀석들을 깜박 잊은 것이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쑤욱 밀며 올라오던 버섯의 이마나, 켜켜이 쌓인 낙엽 위로 불쑥 솟던 젖니 같은 새싹이나, 보도블록 틈새 활짝 피워 올린 꽃대나, 생명이란 그런 것임을, 치열하고도 장엄한 본능임을 잊었다.  지난 해 눈이 부신 푸르름과  그늘을 나누어 준 고마운 낙엽을,  미안한 마음으로 태운다.  생명이 있는 곳엔 늘 소멸이 있는 법.  낙엽 타는 냄새를 흠흠 거리다 화라락 일어서는 불기둥에 털신을 구울 뻔 했다.  봄 불은 보이지 않는 여우 불이라더니, 여우같은 봄 불이다.
     
    늙은 개와 어린 개가 저 아래 잔디밭에 뒹굴 거리니, 다람쥐란 놈이 지붕을 타고 벽난로 굴뚝을 오르내린다.  어떻게 드나드는지, 작년 가을 숨겨 둔 도토리를 또르륵 또르륵 굴리며 천장에서 장난질이다.  봄만 되면 이놈들이 굴뚝을 찾아 새끼를 낳고, 대를 물려 소굴로 삼는다.  꽤나 소란스러워  긴 간짓대로 천장을 톡톡 쳐 보지만 그 때 뿐이다.  쥐는 쥐건만 이놈들은 쥐처럼  갉거나 쏠지 않음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이사 오기 전에는, 황조롱이란 놈이 굴뚝위에 살다 벽난로 안에 뚝 떨어지기도 했다는데, 이놈들도 어느 날 뚝딱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피차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놈들이 굴뚝으로 오가는 길목에 개를 묶어 두면 겁을 먹고 오지 않는데, 청산이와 염이가 뜰에 있음을 용케도 안다.  겨울처럼 난방을 많이 하지 않는 봄에는 바깥보다 집안이 더 을씨년스럽다.  도시와 기온차가 나는 산골에 살려면 늦은 봄까진 난로를 피워야 하는데 연기가 올라가면 놈들이 또 걱정이다.  천장을 두드려 몰아내고 불을 피우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주 피울 수 없다.  이놈들을 호적에 올리고 같이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올 봄에는 새끼 낳기 전, "거기 매워 못 살겠어. 다른 데로 이사 가자." 부디 퇴거해 주길 바라 마지않는다.
     
    주방 쪽에선 딱새가 또 야단이다.  봄이 오면, 내비게이션 들고 이놈들 역시 어김없이 찾아온다.  바깥으로 뽑힌 렌지 후드 배기통에 알을 낳으려고, 마른 풀과 제 털을 뽑아 둥지를 만드느라 부산하다.  양철 통 속에서 파닥이고 긁어대니, 여름날 소낙비처럼  소란스럽다.  뜰에 꽃창포가 만개할 즈음 일제히 귀여운 주둥이를 벌려 '비비비비' 새끼들의 합창이 이어질 것이다.  도리 없다.  보통 다섯 개 정도의 알을 낳는데 엄마 따라 날아 갈 때 까진, 그저 신춘 음악회려니 하는 수밖에.
     
    꽃그늘 매화 아래 코를 벌름거리며 캐 온 냉이를 다듬는다.  냉이와 매화 향이 얼크러지니 정신조차 몽롱하다.  된장을 풀고 바지락 한주먹을 넣어 오글오글 끓이면, 청산이 염이도 침을 흘릴 것이다.  고추장에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연통 속 딱새들조차 고개를 내밀지 모르겠다.
     
    '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  옛 시<사철가>에선 짧은 청춘을 공연한 봄에게 푸념한다.  인생이거나 계절이거나 봄이 없었던들, 설레고도 치열한 시작이 있기나 했을까.  사람 사는 일 언제나 봄 같을 리 없겠지만, 봄이 있어 참을 만한 춥고 긴 겨울.  짧아서 애틋한 봄이다.  더더욱 잠깐이어서 그리운 산촌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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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림조합중앙회
    장려   숲의 능력(정시온)

    숲에는 사랑이 있다. 아프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회복되고 아문다. 큰 슬픔도 숲은 받아준다. 작은 슬픔도 숲속에서는 사라진다. 화려함은 없지만 숲은 엄마 품 같은 자연이 주는 능력이 있다. 숲에는 따스함이 있다. 계절에 따라 그 따스함이 다르긴 하지만 따스함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누구나 숲속에 가면 포근함을 느낀다.
    숲은 사랑이다.
    인간에 대해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숲에선 모든 인간성이 회복된다. 숲처럼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숲속에 서면 머리가 맑아진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가슴이 뻥 뚫린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에 서면 인생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간다. 그래서 숲에는 치유의 의미가 있다. 숲은 마음을 넓혀준다. 인간들 사이에서 터진 갈등 속에서 가슴앓이 하던 게 눈 녹듯 사라진다. 보통은혜가 아니다 그렇다. 숲에는 은혜가 있다. 누구나 품어주고 보듬어주는 은혜가 있다. 그래서 산이나 숲에 있으면 내 마음은 살아난다. 우리가 살아난다. 숲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준다. 숲에는 기쁨이 있다. 숲에 가면 그냥 기쁨이 솟는다. 나도 모르게 솟는다. 숲속에는 향기가 있다. 숲만이 갖는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그것은 생명의 향기다 그래서 숲에 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다. 생명을 느낀다. 숲속에는 생명의 흐름이 충만하다. 숲 안에 있는 자들만이 느끼는 충만함이다. 그래서 숲속에 들어가면 누군가 그 생명을 느낄 수 가 있다. 생명이 숨 쉬는 듯한 그 평안함을 맘껏 맛볼 수가 있다. 생명이 꿈틀대는 그 기분을 누리듯이 느낄 수 있다. 숲에는 쉼이 있다. 도시에 지친 사람도 그 속에서 안식할 수가 있다. 신의 유무를 떠나서 누구나 그 속에서 안식할 수가 있다. 지친 마음을 달랠 수 가 있다. 내가 달래는 것이 아니라 숲이 달래준다. 숲속에는 그런 신비함이 있다. 마치 자연의 품 같은 누구나에게 필요한 엄마 품 같은 고즈넉함과 아늑함 있다. 숲에는 따뜻함이 있다. 그래서 누구나 숲에 들어가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살아가면서 겪는 마음의 상처가 아문다. 그게 숲의 능력이다. 딱딱한 마음이 풀어진다. 나는 가끔 고향에 내려가고는 하는데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 고향은 산골짜기로 너무 깊어서 사람도 별로 없다. 강원도 영월 마차리 그리고 그곳에서 제일 깊은 산속에서 내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곳엔 지금 한 가구만이 산다. 몇 년 전에 가봤을 때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다. 그 깊은 산속에 별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손을 뻗으며 마치 닿을 것 같다.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속에 마치 별의 호수가 떠있는 듯 하다. 손으로 건지면 별들이 한 움큼 잡힐 거 같다. 마치 보석처럼... 또 아름다운 물고기처럼. 한때는 이곳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웃에 있는 탄광으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폐광되어 지금은 사람들이 없고 그 때는 백여 가구 살았다는데 그들도 지친 삶속에서 자연이 주는 치유를 경험했으리라. 벽촌까지 &#51922;겨 온 힘든 삶 속에서 그들에게 위로가 무엇일까? 아마도 내 생각에는 산과 숲이 주는 아늑함과 따뜻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손과 얼굴에 온몸에 검은 탄이 묻은 채, 지친 한숨을 쉬며 막장을 나온 그들에게 반짝이는 별빛이 주는 인사를 그들은 반가이 맞았으리라 숲에서 나오는 공기를 그들이 마시며 그들 폐속에 있는 더러운 탄가루를 그 신선한 공기들이 없애지 않았을까? 숲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따뜻한 가정이 또한 힘이 되었으리라.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던 가족의 마음이 그들에게 힘이 되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숲이 누군가로부터 생명을 받았듯이 숲과 자연도 또한 누군가에게 생명을 준다. 나는 그 흐름이 좋다. 그것은 기쁨의 흐름이다. 그것은 사랑의 흐름이다. 그것은 은혜의 흐름이다. 숲속에 있으면 그 흐름이 느껴진다. 숲은 생명을 품고 있다. 그리고 숲은 누구나 환영한다. 가난하고 찌든자도 환영하고 약하고 버림받은 자도 환영한다. 또 숲은 건강한 자도 환영한다. 숲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병들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숲은 누구나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받아들인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사실 숲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별반 할 일이 없다. 그들은 그저 산과 숲을 즐길 뿐이다. 그리고 가슴이 탁 트인다. 또한 마음이 새로워진다. 우리가 물속에 있으면 물에 온 몸이 젖듯이 숲속에 있으면 숲의 향기와 생명에 우리 전부가 젖어든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시름이 빠져나간다. 멍들었던 가슴이 펴진다. 아물어진다. 숲은 말이 없지만 우리에게 마음의 말을 건넨다. 누구나 마음을 열면 숲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그건 “괜찮아”이다. 그 정도만 산 것도 훌륭한 거야 숲은 그렇게 이야기해준다. 힘이 솟는다. 나는 교도소 안에 있다. 그러나 나는 숲에 와있다고 생각한다. 광주의 숲속에서 나는 정화되고 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크고 울창하고 멋있는 숲에 둘러싸여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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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회 수상작]
  • 대상
    금상
    은상
    동상
  • 산림조합중앙회

    대상


    옹이와 한 몸으로 사는 나무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난다
    찢어진 쪽수처럼
    상처는 나무의 이력을 늘려간다
    청설모는 굴참나무의 교정사
    밑줄 긋듯 나무를타고 오르며 상수리를 정독하고
    솎아 낸 탈자들로 새끼를 키운다
    새순에선 갓 출판 된 신간처럼 풋내가 난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놓친 알맹이들
    가벼운 것은 봄바람에 속을 드러내고
    묵직한 것들만 싹을 틔운다
    바람이 할퀸 나무는 더 단단하게 계절을 복사하고
    폭우를 뚫고 나온 풋열매로 빼곡하다
    금새 꺽이고 삭제되는 비문 같은 잔가지들
    벌레가 지워버린 떡잎,
    밝은 책 넘기듯 빛바랜 굴참나무를 펼치면
    잘 여문 행간들이 쏟아진다
    해를 거듭하며 고서古書가 되어가는
    굴참나무에선
    옆구리에 끼고 다녀 익숙한 문장처럼
    오래된 향기가 난다
    움푹 팬 밑동에 몰려든 풍뎅이들
    수액 마시기 전
    껍질에 숨은 숙성된 내용을 음미한다

  • 산림조합중앙회

     

    금상


    수목원에 들어선다. 나무와 나무가 반쯤 몸을 숙이고 객을 맞는 풍경이 흡사 일주문의 맞배지붕을 닮았다. 누군가 반쯤 읽다 만 경전 같기도 하고, 이마를 맞대고 선정을 청하는 구도자를 닮은 듯해 사뭇 경건해진다. 한순간 그 많은 번뇌를 벗겠냐마는 나무들이 보시하는 초록 기운에 마음이 한결 가볍다.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 씻고 들꽃들 염화미소에 마음 얹다 보니 잠시 벗어 놓고 온 일상이 하마 옛날이다.
    수목원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나무들이다. 나무는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의 하늘만 욕심내며 서로의 그늘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웃을 생각해 둥글게 등이 굽은, 이끼랑 풀, 들꽃이며 새와 곤충들에게 제 몸을 거처로 내주는 배려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자체가 살아있는 한 좌(座)의 목불이다. 울울창창한 미륵들의 미소와 눈 맞춤하며 나는 한 사람을 생각한다. 천생이 목성(木性)이라 봄처럼 따뜻했던, 다정하고 인자했으며 나무처럼 생애가 올곧았던, 아버지란 이름의…….
    아흔넷의 생애를 접고 아버님은 길게 누워 계셨다. 수액이 빠져 나간 몸이 고목처럼 앙상했다. 태아가 소리로써 최초로 모계와 소통하듯 혼을 벗은 육신이 마지막까지 감각하는 건 청각이라던가. 오열에 화답하듯 고인의 손은 따뜻했다. 검고 억센 손이 꼭 나무뿌리 같았다. 당신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사물이 작아졌다. 그 손으로 척박한 한 세기를 지탱하며 가지를 뻗고 잎을 틔워 열한 자식을 거뒀을 것이다. 가지가 여럿이니 바람은 오죽 잦았으랴.
    군데군데 옹이가 박혀 엿가새처럼 험한 그 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아 드리던 날이 떠오른다. 아버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시댁으로 향한 건 여름이 깊어지는 팔월 초순께였다. 때 이른 겨울이 든 듯 눈동자가 공허했으나 손만은 따뜻했다. 그 체온을 좀 더 오래 나눴어야 했다. 집 모퉁이를 돌아, 들깨 밭을 지나, 기와지붕이 멀어질 때까지 아버님은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마치 강대나무처럼…….
    딸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님께서 우리 집에 처음 오신 건. 쉰이 훌쩍 넘어 얻은 막내가 둥지를 마련했다는 소식에 당신은 소처럼 느껍게 울었다던가. 서른여 해를 품어 키운 자식임에도 혹여 폐가 될까 하룻밤을 주무시기 무섭게 귀가를 서두르셨다. 어느 틈에 넣어 두셨는지 베갯잇 안에 만 원짜리 지폐가 겹겹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모처럼 힘든 걸음을 하신 아버님께 ‘가장 가보고 싶으신 곳이 어디냐?’ 여쭸더니 대뜸 수목원을 꼽았다. 강원도 첩첩산중, 하늘 아래 첫 집이 바로 시댁이 아니던가. 생활의 영역 자체가 거대한 수목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하고 많은 명승지를 두고 하필 수목원일까, 그땐 당신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수목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버님의 차진 말씀이 이어졌다. 고유의 이름표를 달고 있음에도 내 눈엔 다 거기서 거기인 나무들의 특성을 족집게처럼 집어내셨다. 맨 처음 아버님께 간택된 나무는 수목원 입구에 서 있는 갈참나무였다. 갈참나무가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물참나무와 동기간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계수나무 이파리를 한 장 떼어 주시더니 냄새를 맡아 보라 하셨다. 향기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멋을 아는 선비들은 그 잎을 편지지 삼아 정인에게 속내를 전했으며 책갈피로 삼기도 했단다. 하트 모양의 계수나무 잎에 한 자(字), 한 자 연정을 수놓았을, 책을 펼칠 때마다 그윽한 낭만에 취했을 선비가 수 세기를 거슬러 향기로 오는 순간이었다. 뿐일까. 감태나무, 덜꿩나무, 노린재나무, 팥배나무, 자귀나무, 때죽나무 등 이름조차 낯선 수종이 아버지를 통해 나무라는 보통명사를 벗고 개성과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일 세기 가까이 산(山)사람으로 살아온 아버님에게 산과 나무는 곧 자신과 동격이었던 것이다.
    수목원에 다녀가신 그 해 추석, 시댁 마당가에 주목 한 그루가 새 식구로 왔다. 딸애가 태어나던 날 산에 심은 걸 옮겨온 거라 했다. 살아서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 아래서 유독 많은 시간을 할애하시던 당신이었다. 주목은 원래 줄기가 썩으면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살아가며 죽은 나무도 썩지 않아서 고사목 상태로 천 년을 서 있다고 한다. 주목의 장수 비결과 더불어 쓰임새가 많은 특성이 하나뿐인 손녀에게 전이되길 바랐을 당신이다. 여든 터울의, 손녀를 향한 자애가 열매의 주홍빛보다 따뜻하면서도 서늘했다. 주목이 유년기를 보냈을 산의 내력이 침엽처럼 마음을 찔러 왔기 때문이다.
    인근의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우람하며 잘생긴, 비를 몰고 온다 하여 ‘비(雨)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의 임자는 원래 아버님이었단다. 아홉 살, 채 여물지 않은 몸으로 농사를 시작한 이래 애오라지 땅을 파서 마련한 산은 노구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자존의 근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비산은 큰집 장손에게 명의를 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의 소유가 되었다. 장손이 궁색한 객지생활을 접고 고향에 뿌리내려 가문을 지탱하길 바랐을 당신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소박한 바람은 외려 사촌 간 분쟁의 빌미가 되었고, 너른 품성은 쓸데없이 넓은 오지랖의 주인이라는 비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산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 가계의 생채기로 머물러 있다.
    추억과 동행해 그날의 동선을 더듬는다. 아버님께서 굳이 수목원으로 가족들을 이끈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땅에 거처하는 나무며 꽃, 풀과 백 년 가까이 동반해 온 분이 아닌가. 시큰둥한 자식들에게 ‘너희들보다 잘하는 게 내게도 있다’는 걸 은연중 자랑하고 싶으셨던 게다. 그렇게나마 추락한 가장의 지위를 회복하고 더불어(자식들이) 나무의 너른 품성을 닮아가기를 바랐을 속내를 늦어서야 읽는다.
    살며시 나무의 등을 안아 본다. 그의 푸른 맥박이, 따뜻한 심성이 왼쪽 가슴께를 지나 온몸으로 온다. 그 느낌이 오로지 ‘내어 줌’의 자세로 한 세기를 일관했던 어느 한 생애를 꼭 닮았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그늘 안에서 한 그루 목불(木佛)로 살아오신 아버님을 뵌다. 수목원이 한 채의 도량으로 윤회하는 순간이다. 

  • 산림조합중앙회

    은상

    달이 부풀 때마다 새들이 내려와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새들이 무거운 신발을 벗어놓고 나무에 깃들면
    밤새 널어놓고 간 지문을 떠왔다.
    산의 어깨를 짚고 내려와 시키지 않아도
    선문답 같은 낱글자들을 숲에 그려놓는 수고에 새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고르게 지문을 남기는 버릇 때문이었다.
    해질녘까지 교대로 산의 정수리에 다가가 나무를 끓일
    제대로 된 불을 얻어오려다가 날개를 태워먹기도 했는데,
    촘촘한 자간에 그을린 깃털이 남아 있기도 했다.
    물비린내가 산을 감싼 날은 새들이 먼저
    수평선까지 다녀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는 순서를 기다렸다가 소금물로 얼굴을 씻고
    맨 나중에 온 새소리도 씻었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가 행간과 여백으로 통과시켜
    가지마다 더도 덜도 없이 23행 14글자로 나뭇잎들이 경작되었다.
    내장을 남김없이 비워야 깊이 울리는 목어(木魚)가
    산을 흔들어 깨울 때 팔만 개의 경판이 숲을 뒤덮고 있었다.
    닥나무를 헹궈 놓은 한지 위에
    산이 스스로 진하게 고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의 족적으로 천천히 번졌다.


  • 산림조합중앙회

  • 동상  소나무와 일엽초(정미영)


  • 여우비가 그친 오후, 영취산을 오른다. 빗물로 말갛게 세수한 소나무가 푸름을 뽐낸다. 줄기에 붙은 잎사귀들이 소나무 잎과 달라 보여 가까이 다가가니 일엽초다. 일엽초는 부드럽고 수분이 많은 고목에 뿌리를 내려 싹을 낸다. 그래서 다른 식물들과 양분이나 물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직접 구하지 않은 채 의지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야속하다.
    아버님은 일엽초처럼 어머님에게 의지해 살았다.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마을일에만 신경을 썼다. 물 한 그릇을 마셔도 어머님을 찾으면서, 가정은 외면한 채 동네나 친척들의 걱정거리에 앞장섰다. 그러나 어머님은 식구들을 건사하느라 힘겹게 살았다. 음식 솜씨가 좋은 탓에 시장에서 작은 반찬 가게를 했다. 새벽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과 발가락이 부르트게 애써 장사를 할 때도 아버님은 시장 번영회 회장직을 맡으며 상가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소나무는 자신에게 붙어있는 일엽초는 상관없다는 듯 의연하다. 나 같으면 얌체 같은 일엽초에게 물과 영양분을 나눠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공생하는 듯하다. 겉으로 보이는 삶만이 다가 아니라, 내면을 살피는 법을 내게 일깨워 주려는지 하늘 향해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외로움을 서로 다독이며 살고 있나 보다.
    가정을 돌보지 않은 무심한 아버님에게도 어머님은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을까. 아버님에게 모진 소리 한 번 내뱉지 않았다. 내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몰라도, 하루하루 살기가 버거워 무릎이 꺾일 것 같으면 단박에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찜부럭도 내지 않았다. 어쩌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아버님일지라도 곁에 머무르는 자체만으로 든든했으리라.
    어머님은 동전 한 닢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알뜰살뜰 모은 돈과 대출받은 돈으로, 연탄 공장을 하게 된 것도 고단한 어머님의 삶이 밑바탕이 되었다. 남편 몫까지 일했기에 남은 여정은 깊은 강처럼 여유롭게 흘렀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의 강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큰형님이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크고 작은 짐들을 떠안게 되었다. 당신의 자식 넷에 조카 다섯까지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시련은 속속들이 개인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연탄 공장은 도시가스의 보급에 따른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를 못해 부도가 났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만 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소나무는 일엽초와 헤어지지 않는다. 태풍이 몰아쳐 제 몸이 뿌리 채 뽑히더라도 어쩌면 일엽초와 함께일 수 있다. 시련을 함께 이겨나가면 육체적 고통은 남아도 정신적으로 덜 힘들 텐데, 어머님은 친척 집으로 보낸 자식들이 눈에 밟혀 자꾸만 가슴이 내려앉았다. 보듬고 품어야 할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질곡의 시간은 모질게 이어졌다. 그 사이 아버님은 담낭암 진단을 받고 삼 개월 시한부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님이 병간호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고 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병실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아버님이 보였다. 링거 꽂은 팔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에 홀로 잠 못 들고 괴로워했다. 아버님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누구도 병의 고통을 대신 나누어 질 수 없었기에 지독하게 외로운 상태였다.
    이제껏 어머님을 외롭게 했던 아버님이었다. 어머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어머님 곁에 머물기만 해도 가슴에 생채기가 덜할 것이다. 그런데 복수가 차오르고 음식을 못 먹는 날이 늘어갈수록 어머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무심해도 좋으니 병이 호전되기를 두 손 모아 간곡히 기도했다. 이제껏 삶의 무게가 버거워 휘청거릴 때도 있었지만,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머님에게는 힘이 되었다.
    소나무와 일엽초는 사시사철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있기에 비바람에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생명을 유지한다. 어머님에게 아버님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예전보다 더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일엽초는 귀한 약재라고 한다. 소나무에게 얹혀살면서 기대기만 하는 하찮은 존재인줄 알았는데 사람에게 이롭단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쓸모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소나무는 일엽초에게 자신의 양분과 수분, 햇살과 바람을 나눠준다. 그런 이유로 일엽초도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나눠주어 사람들의 병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리라.
    소나무와 일엽초는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나에게 이야기해 준다.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소홀했어도 믿음으로 서로 엮어져 있었기에, 어머님은 흔들리지 않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자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소나무와 일엽초를 쓰다듬는다. 세상과 이어진 연결 고리 하나가 내 손으로 건너온다. 

  •  [13회 수상작]

    대상
    금상
    은상
    동상
    입선
  • 산림조합중앙회

  • 대상
  • 오디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누에씨의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 오고 있다는 걸 안다

    그늘 밑의 저수지 빛이 새파랗게 바뀌는 동안
    뽕잎이 모으고 있던 부채 바람이 흰 빛으로 날리고
    아이들이 피어 있는 난간의 가지마다
    갈증 포개고 앉은 검은 입술만이 계속 오물거리고
    오늘도 입술 사이에 들과 날의 숨소리가 묻어 빛나지만

    뽕잎 꽁무니에 붙어 있는 누에의 운명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디가 익어 있는 높이로 떠 있는 아이들은
    운명을 네 번이나 벗어내고 꽃 피는 잠실을 펼쳐낸다
    그때 아이들의 몸이 검푸르게 투명해지고
    급기야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누에들이 몸을 비트는 소리 깊다
    날개를 가두고 공중을 생각하는지, 오줌을 찔끔찔끔 누기도 했다

    아이들은 희고 캄캄한 침묵 속에서 아름다운 봉분이 되었다
    푸르게 걸어온 길이 끊어진 곳마다 고치들이 우아하게 피었다

    아이들의 하늘은 가장 가까운 뽕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다고
    나는 믿었다 오늘도 비탈진 야산을 넘어온 아이들의 웃음들은
    뽕나무 그늘 속에서 주린 배를 오디로 달랬고
    저녁이 올 때까지, 땅 밑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디가 무르익을 무렵,
    나방이 된 아이들은 끈적끈적한 흰빛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 산림조합중앙회

  • 금상

  • “저희들 신고하러 왔습니다!”
    등에 색색의 배낭을 메고 양손에 스틱을 든 남녀 한 무리가 중태안내소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며 장난스럽게 큰 소리로 외친다.
    “어머! 여기가 실명제 안내소라는 걸 알고 계시네요?”
    “그럼요. 그냥 지나치면 큰일 난다고 인터넷에 소문이 났는걸요!”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에 지리산둘레길안내소가 있다. 일곱 평 남짓 될까, 컨테이너 건물로 지어진 중태안내소는 이제 이 마을의 명소가 돼 버렸다. 중태마을 어르신들도 중태안내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논에 물 보러 가다가 빼꼼 들여다보고, 덕산장에 다녀오다가도 불쑥 들어와 한마디씩 나누고 간다. 마을에 어떤 일이 생겼고, 누구네 집에는 손님이 다녀가고……, 온 동네 사정이 속주머니 까뒤집히듯 드러나고야 만다.
    중태마을은 산청군 사리와 하동군 위태 구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에서 중산리를 향해 달리다가 슬그머니 옆길로 빠지면 좁은 논길이 나오고, 휘돌아진 논길을 따라 4,5킬로미터 더 들어가면 도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중태마을을 만난다. 한자로 가운데 중, 탯자리 태를 써서 어미의 자궁에 아이가 들어앉은 마을 형세를 그대로 옮겼다고도 한다. 중태마을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많고 많은 마을들 중 하나고, 이 마을사람들은 곶감과 산나물, 약초를 채취해서 어머니의 산 지리산에 기대 살아간다.
    이태 전, 고요하기만 한 중태마을에 지리산둘레길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마을 정자나무 앞에 떡하니 둘레길안내소가 생겨났다. 안내소는 고요하던 이 마을에 이방인 같은 존재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으레 그러하듯 마을사람들은 이방인을 몹시 경계하면서도 한편 궁금해 했다.
    중태안내소는 농작물 보호와 이용객의 안전을 위해 지리산둘레길 최초 실명제 부스로 운영됐다. 중태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반드시 방명록을 작성하도록 한 것이다.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주소가 공개되다 보니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이를 꺼려하거나 실명제 부스 운영 취지를 오해한 일부 이용객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흔쾌히 방명록을 작성하고 따뜻한 한마디를 남기고 간다.

    “수동댁 때매 풀들이 못산다 한다. 풀들도 쪼매 살자!”
    뫼동댁이 감자를 삶아 함지박에 담아 나온다. 수동댁은 한낮 땡볕도 아랑곳 않고 저 아래 콩밭 고랑에 엎드려 있다. 울산댁이 감자를 먹자고 암만 불러대도 수동댁은 꿈쩍을 안 하다. 흥 많고 노래 잘하는 꿀벌할아버지는 벌써부터 평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유행가 한 가락 뽑기 시작한다. 여름날 중태안내소와 마주한 느티나무 아래서 흔히 보는 풍경이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하느라 바쁘고 가을부터 겨우내 곶감을 따서 깎고 말리느라 바쁘다 보니 유일하게 여유 부리는 시간이 여름 한철이다. 백여 년 가까운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마을 어르신들은 더위를 식히고 앉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커다란 양푼에 나물과 밥을 비벼 숟가락을 부딪혀 가며 맛나게 식사를 한다. 찐 감자, 옥수수, 부침개가 나오는 날도 많다. 하루하루 끼니를 잇기 고단했고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지난 시절이 녹음기처럼 되풀이되기도 했다. 불과 50, 60여 년이 흐른 것뿐인데, 몇 백 년 세월이 지난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중태마을을 지나는 둘레길 이용객들은 안내소에 들르기 위해 정자나무 평상에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식히며 쉬다가 간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마을 어르신들과 인사하고 얘기를 나눈다. 단 몇 분 사이 이들은 오래 알고 지낸 듯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야무진 살림꾼들은 마을 어르신들이 채취해서 말린 산나물과 곶감을 사가거나 전화번호를 적어가서 택배로 신청하기도 했다. 이용객이 점점 늘어나자 몇몇 집은 안 쓰는 빈 방을 민박으로 활용해서 적으나마 수익을 올렸다. 몇 푼 받는 돈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정을 나누는 일이 더 즐거워 보였다.

    길을 걷는 이들이 하나같이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건 아니다. 몸이 안 좋거나 실직을 하거니,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들도 지리산둘레길을 찾아온다. 사람에게서는 위로 받지 못한 것을 자연에서 찾으려 그들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묻지 마 폭행을 저지르는 심정을 알 것 같았어요. 만약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어쩌면 저도 그런 끔찍한 행동으로 분을 풀었을지 모릅니다.”
    지난해 늦여름 40대 중후반쯤 돼 보이는 한 남자가 방명록에 남긴 사연이다. 배낭 주머니에 빈 막걸리병 하나 끼우고서 묵묵히 길을 재촉하던 남자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훗날 노년을 보내며 남은 삶을 맘 편히 마무리할 곳을 알아보려 다니는 이들도 있다.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왔지만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치를 그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지리산자락에 흩어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 지리산둘레길이라면 중태안내소는 그 길 위에 놓인 징검다리다. 그리하여 길을 걷는 이들에게 휴식을 주고 길에 대한 정보를 나눠 주며 계속해서 걸어갈 힘을 실어준다. 그뿐인가, 마을 어르신들에게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갑자기 텔레비전이나 전화기가 고장 나면 곧장 안내소부터 찾아오신다. 글을 모르는 분은 우편물을 들고 찾아오고 귀가 어두운 분은 마을방송을 할 때마다 와서 다시 듣고 가신다. 그렇다고 도움만 바라고 찾아오시는 건 아니다. 철철이 나는 오이나 가지, 호박 등 갖가지 야채와 밤이며 감 등 과일을 봉지에 담아다 주기도 하고, 제사나 생신날에는 쟁반에 한 상 차려서 들고 들어오신다.
    중태안내소는 중태마을에 감사하고 중태마을은 또 중태안내소가 고맙다. 길과 길, 마을과 마을 사이에 놓인 소중한 징검다리는 오늘도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마을 뒤편 대숲 사이로 지나는 바람과 산새소리를 두 귀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 산림조합중앙회

  • 은상
  • 잊을 수 없는 물건은 지워지지 않는 장면의 다른 이름이다. 산길은 하나하나의 기억을 되살려내며 먼저 지나간 발자국을 멈추게 했다.

    지극히 평범한 녹음이 싸여 있는 어느 여름날, 산에 올랐다. 쏟아지는 햇빛은 어깨 위에서 천근의 무게로 느껴진다. 새마저 울지 않았다면, 초롱꽃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더 잔혹한 산행이 될 뻔했다. 산기슭에서부터 후끈후끈 발바닥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등산화 밑이 마치 겨우 마분지 한 장 깔아놓은 듯, 울퉁불퉁한 땅 표면이 무방비로 발바닥에 전달되는 느낌이다. 발바닥이 쓰라리고 화끈거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등산화가 화근이었다. 생전에 아버지가 신었던 등산화다.

    아버지의 등산화, 생각의 덜미를 잡았다. 결혼 후에도 아버지 둥지에 탁란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등산용품매장을 찾았다. 진열대 위에 등산화 한 켤레를 유심히 보시더니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망설이신다. 나는 선뜻 계산대 앞으로 가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그 등산화를 내려놓으시고 싸구려 한 켤레를 선택했다. 꼬깃꼬깃 구겨진 쌈짓돈을 펴신다. 장성하고도 무력한 자식이 행여 마음이라도 쓸까 등을 돌려 계산하신다. 가게를 나서면서 슬쩍 확인했다. 만오천 원이었다.

    시골 벽지 학교의 교사로 평생 근무하면서 하늘과 바람, 흙과 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그날 화단을 손질하신 후, 집무실에서 앉은 채 꼿꼿한 생生을 마감하셨다. 유품을 정리하든 중, 흙이 묻은 아버지의 싸구려 등산화를 발견했다. 퇴직을 앞둔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처럼 기름기가 다 빠진 채 앙상하게 놓여 있다.

    생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들이나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 또 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툭툭 터진다. 아름다웠던 추억보다 쓰디쓴 장면만 기억의 한편에서 서걱거렸다.

    우지끈, 발을 헛디뎌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았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발바닥의 쓰라림보다 더한, 가슴의 멍울진 그 무엇이 뜨겁게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도 이렇게 아팠을까. 제대로 된 등산화 하나 사 드리지 못한 미안함이 칼날 같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신을 벗었다. 거친 세월이 담긴 앙상한 등산화에서 아버지가 남겨놓은 체온이 느껴진다. 한 뼘의 발바닥 안에 치열했던 격정의 한 생애가, 가장으로서의 한 서린 무거운 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벽 미명 잠에서 깨어 뒷산 오솔길을 홀로 걸으며 앙다물었을 중년의 고독, 일몰을 바라보며 입 꾹 다물고 삼켰을 가슴속 쓸쓸함이 배어 있다.
    다시 등산화를 신었다. 아버지와 내가 발바닥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듯, 먼저 간 아버지의 발바닥과 지금의 내 발바닥이 닿았다. 생전에 이렇게 밀착된 적이 없었기에 가슴이 미어진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저 눈앞에 구부러진 길만 돌면 내달릴 수 있는 길이 펼쳐져 있을까. 이 언덕만 넘으면 잠시 숨 돌려 쉴 수 있는 너럭바위라도 하나 나올까. 아버지가 올랐을 인생의 산도 다를 바 없으리라. 들숨과 날숨을 바람과 주고받으며 조여드는 힘겨운 숨을 참았을 아버지, 험한 산과 같은 치열한 세상,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경쟁의 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날 때마다 손에 쥔 삶의 지팡이를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잠시 멈추고 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산은 아버지가 못다 한 남은 생애처럼 숭엄하다. 이렇게 생을 잇는 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던가. 앞만 보고 묵묵히 생의 고비를 넘긴 그 길을 이제 내가 아버지의 신을 신고 인생의 고갯마루를 넘을 차례다.
    고통을 느끼며 오를수록 아버지와의 대화가 깊어진다. 서서히 통증이 멎어간다. 아픔마저 익숙해진 것일까. 어느덧 나도 아버지의 생을 닮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오는 이 없는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들이 각자의 방에 들어가 제 울타리를 치고 있을 때, 새가 떠난 빈 둥지 같은 휑한 거실에 홀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내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처럼.
    아무도 없는 사이 잠시 펼쳐 보였다가 사라진 무지개처럼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던가. 시간은 극치의 사랑을 기다려 주지 않듯이 전하고픈 내 서툰 마음이 절정에 다 달았을 때, 아버지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생애 최고의 불꽃은 그 사람의 없는 사이에 잠시 솟아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이듯, 최고의 의미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것인가 보다.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느끼는 부정(父情)은 다시 올 백 년의 세월보다 깊고도 길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도 아버지란 명찰 하나를 가슴에 달아주었다. 한 번도 배워 보지 못하고 맞이한 아버지의 자리, 그 자리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앉아 징징거린다. 누구라도 가까이 있으면 나를 좀 돌봐 달라고 최후 항전으로 엉엉 울음을 터트릴 무렵, 나는 아버지의 한 생애가 흙먼지처럼 묻어 있는 등산화를 신게 된 것이다. 바닥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배워가고 있다.

    산을 내려왔다. 아버지의 등산화를 벗는다. 이제 내게 주어진 나의 아버지 길을 홀로 걸어야 할 때다. 아버지와 함께 하나의 공간 속에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도 당신의 숨결이 담긴 세월을 계승하며 산다는 것 또한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이렇게라도 내 기억의 돋보기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하늘을 버리고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산을 쪼아 대는 지빠귀 소리를, 아버지 발밑에 밟혔을 풀잎 꼼지락거리는 소리를.
    벗어 놓은 아버지의 등산화, 늘 그렇게 사셨던 아버지처럼 푼더분하게 앉아 있다. 

  • 산림조합중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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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상 : 숲으로의 망명(亡命)
  • 얼마 전 집 인근의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우연히 숲에 관해 적어놓은 책을 발견했다. 일본인이 저자인 이 책을 처음에는 대충 훑어보고 말려다가 나중에는 자리에 앉아 정독을 하게 되었다. 1960년대 암(癌)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저자가 자포자기 상태로 살다가 삶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숲 속에 들었는데 그곳에서 생활하며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세간에서는 보이지 않던 삶의 많은 것들을 숲에서 보게 되었다는, 이를테면 숲을 통해 깨달은 삶의 성찰(省察)을 기록한 책이었다. 그런 성찰을 토대로 저자는 1990년대부터 일본 홋카이도의 숲에 ‘숲 속 어린이 마을’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숲의 신비함과 생명을 전하며 팔십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던 것은 인류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숲’ 사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부분이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는 신성함이 깃들어 있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평등하여 쓸모없고 하찮은 생명은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숲은 단순히 나무가 많은 곳이 아니라 나무와 물과 흙 사이에서 뭇 생명들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자라는 곳이 숲이며 인간에게 내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숲과 인간이 서로 아끼고 보듬는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숲이 가르쳐 주었다고 역설하고 있다. 책을 읽고 난 후 이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오직 ‘빠름’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숲은, 그 안에 든 모두에게 호흡을 가다듬고 삶을 뒤돌아보는 여유와 넉넉한 포용의 자세를 갖게 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참으로 고마운 곳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숲은 고요해 보이지만 수많은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터전으로 그들의 푸른 공화국(共和國)이다. 그 어떤 정체(政體)나 이념(理念) 따위 필요치 않고 다만, 그곳에 속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 포용하는 나라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곳에 들어 깊은 날숨과 들숨으로 그곳에 충만한 생기(生氣)를 폐부 가득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광합성(光合成)이 때로는 식물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필요하던 것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들에 쫓겨 무작정 내달리다 생긴 삶의 지독한 관성(慣性)을 잠깐만이라도 멈추거나 내려놓고 들끓는 내부를 고요히 안정시켜야 하는데 숲에 들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안식(安息)과 평온(平穩)이 숲이 인간에게 베푸는 빛나는 광합성이다.

    십 년 후를 생각하면 자식을 교육시키고 이십 년 후를 생각하면 나무를 심어라,라고 하는 말이 있다. 교육(敎育)이든 조림(造林)이든 모두가 당대가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일 것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한 스피노자의 격언 또한, 그와 일맥상통한 말이 될 것인데 숲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숲을 아끼고 가꾸는 인간의 관심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숲이 인간에게 베푼 행복만큼 우리는 숲에게 빚을 진 것이니 모름지기 그를 갚기 위해서는 당대의 숲을 잘 보존하는 일뿐만 아니라 후대를 위해서 숲을 더 울울하게 가꾸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상상하기조차 싫지만 숲이 없는 불모의 지구는 그 어떤 것도 생존할 수 없는 황무지(荒蕪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최초로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가가린(Gagarin. Y. A.)이 지구를 너무도 아름다운 ‘푸른 별’이라고 했던 것은 인간이 이룩한 거대한 문명 때문이 아니라 태곳적부터 모든 생명들을 품고 키워왔던 모체(母體)로서의 푸른 숲이 있어서이다. 그에 비해 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행성인 금성이나 화성이 너무도 황량하던 것은 숲이 없어서일 것이며 그리 인해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한낱 불임(不姙)의 행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숲은 뭇 생명들의 모태(母胎)이며 또한, 그들을 낳아 온전하게 삶을 영위케 하는 근원임이 너무도 자명하다. 최근 미국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는 대형 산불로 수많은 나무들이 불타고 푸른 숲이 있단 자리가 검은 재만 남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 되었다는 기사나 지구의 허파라고 부르는 열대림들이 눈앞의 이익이나 필요에 의해 함부로 베어져 숲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인간의 부주의나 탐욕이 그 모태나 근원으로서의 숲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종국에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살고 있는 곳에서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방관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숲의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비록 세계 각국이 인위적으로 선을 그어 국경을 삼기는 하지만 지구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숲은 어디에 있든 지구의 숲이며 모든 생명들의 숲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숲을 훼손하는 것은 단순히 몇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며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올봄 즈음에 장성에 위치한 축령산의 편백나무 숲을 찾아갔다. 숲을 다녀온 여러 지인들로부터 꼭 가볼 만한 곳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찾아간 것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그때 숲을 거닐며 얻은 치유(治癒)의 기운이 여전한 것만 같은 것은 키 큰 편백나무며 삼나무가 마치 거인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시립해 있는 숲길을 그저 말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황홀하고 행복했었기 때문이다. 건강 숲길, 산소 숲길, 하늘 숲길, 그리고 숲내음 숲길 등으로 망명되어진 길을 바람과 함께 걷다가 나무의 진한 향(香)이 느껴질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서서 가슴 깊이 그를 들여 마시면 온몸 구석구석에서 푸른 새 잎이 돋아나는 것만 같아 흡사 나도 숲에 속한 한 그루 나무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숲은 축복(祝福)은 그처럼 세사(世事)에 지친 심신을 제 안에 품어 맑고 푸르게 물들임으로써 새 목숨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울러 그곳에서 더욱 놀라웠던 것은 숲이 한 독림가(篤林家)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미래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는 숲은 1950년대 중반부터 이십여 년을 나무를 심고 가꾼 한 사람의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는 것에 무한한 존경심이 들었고 특히나 가뭄이 극심했던 때에 나무가 말라죽는 것을 막기 위해 이십여 리를 물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물을 주어 살렸다는 그 열정에는 경외심마저 일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속성으로 이루어질 일도 아니고 당장 돈이 되는 일이 아님에도 그처럼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한 그루, 두 그루 나무를 심고 가꾸어 명품 숲을 조성한 것은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숲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를 미리부터 안 혜안(慧眼)이 없었다면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래전에 작고하셔서 노고에 직접 감사를 드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한 그루 나무로 숲의 일부가 된 그분의 숭고한 뜻을 되살리는 길은 숲을 잘 보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더 잘 가꾸어 후대에 온전하게 물려주는 일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숲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는 그 안에 든 많은 생명들을 살리는 숲이 되었으니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그 자체로 당장의 이익을 쫓기에 급급한 현 세태에 크나큰 시사점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대에게 전할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한 느낌이 일었다. 축복의 세례처럼 쏟아지는 청량(淸凉)한 공기를 한껏 숨 쉬며 내 지금 걷고 있는 발자국 위에 또 다른 발자국들이 더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고맙게도 숲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숲이든 그 안에 들기만 하면 머릿속이 박하처럼 맑아지고 저잣거리에서의 모난 마음과 생각들이 저도 모르게 닳아 바닷가 몽돌처럼 동글동글해진다. 그것은 그 무엇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숲의 무한한 포용과 정화(淨化)의 신통력이 탁한 마음의 눈을 씻어 삶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니 숲은, 그 어떤 불치의 병도 능히 다스려 낫게 하는 명의(名醫)이자 경배를 드려 마땅한 치유(治癒)의 성소(聖所)이다.

    지도를 펼치자 초록의 숲들이 일제히 눈앞에 울울하게 펼쳐진다. 그 어떤 혁명에의 기대도, 성공과 실패 같은 세속의 셈법도 푸른 공화국인 숲에서는 한낱 구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마음을 열고 언제든 그곳, 숲에 가면 숲은, 우리 모두의 깊고 푸른 망명지다.

  • 산림조합중앙회

  • 동상 : 소나무와 보굿


  • 엄마나무가 쓰러졌다. 비탈진 기슭에 서 있는 동안 허리 한 번 펴지 못해 비틀어지고 휘어진 나무다. 수백 년 동안 끄떡없더니 지난밤 태풍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가지 하나는 생으로 찢기고 뿌리가 반쯤 뽑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나무를 일으켜 지지대를 세우고 흙을 북돋워주면서도 소생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 안쓰럽기만 하다.
    엄마나무는 등 굽은 적송이다. 튼실한 뿌리 밑에 엄마의 유해를 묻어 수목장을 지낸 이후로 '엄마나무'라고 이름 붙였다. 다시 태어나면 양지식물이 되고 싶다던 생전의 말이 유언이 되어 엄마는 한 그루의 소나무로 서게 되었다. 전등사의 왼쪽에서 삼랑성의 서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엄마나무가 보인다. 산길 오른쪽 산등성에서 고즈넉한 절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계절 푸른 낯빛의 엄마를 만날 수 있어 정족산은 올 때마다 정겹다.
    근처는 붉은 수피를 드러내며 키가 쭉쭉 뻗은 소나무 군락이다. 군데군데 서어나무, 참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있어 오래된 숲의 나무들이 뿜어내는 정기가 예사롭지 않다. 조금씩 터를 넓히는 참나무의 위세에 점령당할 뻔했지만 인간의 손이 닿아 잡목은 솎아지고 숲은 아직도 울울창창한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얼마 전부터 수목장지로 지정되어 이곳의 소나무는 구리 명패를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석 같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의 애틋한 마음이 한 조각 명패 속에 스며 있는 듯하다.
    나무를 보면 한 사람의 이력이 묵묵히 말을 건네 온다. 거북등처럼 밑동에 금이 쩍쩍 벌어진 엄마나무는 굽어 있어 곡진한 느낌이 든다. 처음에 못마땅했던 마음도 볼수록 엄마를 닮은 듯해 위안이 된다. 소나무는 유난히 껍질이 두껍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겹겹의 나이테가 수피에도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수피가 떨어져 나가는 다른 나무와 달리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 해마다 표피 밑에 죽은 세포가 쌓이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겉껍질을 보굿이라고 한다. 누군가 떼어주기까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가 나무가 점점 자라 굵어지면 갈라 터져버리고 만다. 나무의 깊은 골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뜻밖에도 엄마와 내 모습이 보인다.
    날개가 달려 멀리까지 이동이 가능한 소나무 씨앗처럼 엄마는 남해 끝자락에서 대구로 이사를 왔다. 살림 밑천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어 억척 같이 일만 하였다. 그 삶에는 고운 단풍이 들거나 이목을 끄는 꽃잎의 화려함도 없었다. 입을 것 못 입고 먹을 것 못 먹으며 가족들을 위해서 살았던 엄마에게 하나뿐인 딸은 속내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친구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곰살궂은 딸이 아니었다. 엄마의 애를 무던히도 태웠다.
    남편이 잘못 서 준 빚보증으로 살던 집을 내어 준 데다 힘들게 한 사업마저 실패하자 나는 걸핏하면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끝났다 싶으면 도미노처럼 또다시 찾아오는 시련으로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나에게 심한 우울증이 찾아온 것이다. 강가에 내 놓은 아이 같다며 엄마는 한밤중에도 내 집 대문 앞에서 서성였다. 나무 밑에 수북한 솔가리가 엄마의 속내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푸르러 보이지만 내 울화를 받아주느라 아무도 모르게 문드러지고 있었다.
    빚을 갚느라 남은 돈 한 푼 없어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내게 엄마는 자주 누런 돈 봉투를 내밀곤 하였다. 몇 년을 차곡차곡 부었던 곗돈을 깨거나 시원찮은 무릎으로 맞벌이인 동생네 아이를 업어주고 받은 용돈이었다. 누구네 집은 딸내미가 외국여행을 시켜주고 두툼한 용돈까지 쥐어준다는데 나는 늙은 엄마의 몇 푼 안 되는 쌈짓돈까지 얻어다 썼다. 누구보다 잘 살 것 같았던 딸이 엄마의 애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때의 나는 보굿이었으리라. 고단한 엄마의 삶에 들러붙어 갈라지고 터지는 줄도 몰랐다.
    견디기 힘들었던지 엄마는 뿌리가 뽑힌 채 쓰러졌다. 평소에도 자주 머리꼭지가 얼음장을 인 것 같다고 했었다. 뇌졸중의 징후였다. 쓰러지기 며칠 전에도 오른쪽 귀가 갑자기 안 들린다며 수줍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는데도 그 말을 흘려들었다. 내 무릎에 얹힌 아픔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뇌졸중은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컸다. 평생 그 멍에를 지울 수 없었을 것 같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흙 한 줌 없는 바위틈에서도 자라는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닮아 엄마는 열흘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만 같았다. 속죄를 하듯 병원으로의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간병인이 따로 있어도 뭐든 내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궁핍한 살림에 병원비를 보탤 수 없어 병수발로 대신하던 그 몇 년은 처음으로 내가 엄마에게 온전히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던 시기였으리라. 재활치료실에서 기구에 몸을 의지한 채 서 있으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엄마 얼굴이 눈에 선하다. 쓰러질까봐 얼마나 용을 썼는지 야윈 두 다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아이처럼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나는 애써 웃으며 쓰다듬어 주곤 했었다.
    애틋하지 않은 엄마와 딸이 어디 있을까. 내 품에서 고이 잠든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마음속에서 고운 물결을 그린다. 그토록 엄마에게서 떼어내고 싶었던 보굿은 쉽사리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소나무와 보굿은 엄마와 딸 같은 사이가 아니었을까. 가장 가까운 사이면서도 가장 만만하기도 해 때로는 서로의 가슴을 누구보다 아프게 할퀴기도 한다. 그래도 엄마와 딸은 미우나 고우나 서로 부둥켜안고 가는 숙명을 지녔나 보다. 세월의 더께를 입으면 보굿의 골은 점점 동글동글해진다. 솔잎처럼 뾰족하던 아픔도 세월의 무두질에 점점 무뎌가는 것이리라. 엄마에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비탈을 밟고 서서 방금 몸을 일으켜 세운 엄마나무를 들여다본다. 가끔 나는 마음의 무늬가 딱딱해져 이유 없이 목 놓아 울 때가 있다. 미치도록 그리운 엄마 때문이다. 무조건 퍼주기만 하는 엄마로서의 삶만 살았지 기대고 사랑받는 여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간 것이 통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나무는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걸어온다. 인생마다 다 다른 크기와 무늬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엄마나무의 행복한 모습만 보라고.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에 송진이 엉겨 붙은 가지가 솔잎을 흔든다. 상처투성이여도 저토록 청량한 공기를 뿜어내니 엄마나무는 머지않아 굳건하게 다시 뿌리를 내리리라. 

  • 산림조합중앙회

    • 입선 : 비스킷나무 붓

  •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일을 만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이른 봄, 아직 나뭇가지엔 겨울 덴바람의 여운이 남았나 보다.

    “윙, 위잉…….” 소소리바람이다. 앙상한 가지에 부는 바람이 살 속으로 스미듯 차갑고 매섭다. 하여, 이런 바람을 사람들은 ‘소소리’를 붙여 그 이름으로 부를 테지. 봄이 오다 말고 저 남녘 언덕 너머에서 잠들어 버렸나. 제 걸음으로 봄은 오고 있는데, 괜히 내가 트집 잡는 걸까. 아니야, 삼월 중순 날씨가 이렇다면 시비 걸만도 하지 뭐. 그래도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애꿎은 봄을 두고 등산길에 혼자 사설을 풀어놓고 있다.

    비스킷나무. 몇 해 전 봄날, 한 문우文友와 걷다가 그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나무다. 문우는 갓 돋아난 연록 새 나뭇잎을 보고 다짜고짜 ‘배고프다’고 했다. 왜냐고 묻자, ‘비스킷 같아 그랬다’고 했다. 나뭇잎에 비스킷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어서였다. 그 후, 나는 이 나무를 ‘비스킷나무’라 불렀다.

    비스킷나무는 가지마다 작은 새눈이 봄맞이를 하고 있다. 소소리바람이 가지사이를 핥고 지나간다. 가지가 파르르 떨린다.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반갑다고 손짓을 하는 것도 같다. 두 귀를 가까이 들이대고 비스킷나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본다. 무딘 내 귀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비스킷나무 뒤에 턱 버티고 선 큰 참나무가 보다 못해, 윙윙대며 무슨 말을 소소리바람에 실어 보낸다. 하지만, 내 귀엔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어온 바람소리일 뿐이다. 다시 비스킷나무를 찬찬히 쳐다본다.

    “어! 웬일이야!” 혼잣말로 비스킷나뭇가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무가 붓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참나무가 전해준 말이 이것이었나. 가지 끝마다 뾰족한 붓을 참 많이도 쥐었다. 해마다 봄이면 나뭇가지들은 눈을 틔운다. 그런데, 오늘 다시 만난 이 비스킷나무는 웬일인지 눈 단 가지들이 붓으로 보인다. 붓들은 일제히 ‘바람을 쓸까, 하늘을 그릴까, 풀 나무를 써볼까, 꽃을 그릴까’ 하며 하모니카 떨판같이 소소리바람에게 속삭인다.

    아버지께서 벼루 통을 들고 사립문을 나선다. 내 고사리 손에는 붓을 들려 따라오게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랐다. 철 든 후에 안 일이지만, 그날은 새로 짓는 이웃집에 상량이 있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먹을 오래 가셨다. 먹 가시는 모습이 꼭 무슨 치성을 드리는 사람 같다. 붓에 먹을 몇 번이고 잘 먹여 다독인 다음, 대패로 곱게 깍은 커다란 소나무대들보에 상량문上樑文을 휙휙 잘도 쓰셨다. 어린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넓은 공간에 사람이 대여섯 명뿐이다. 붓글씨 공부하러 간 첫날이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아주 오랜만에 붓과 한지를 받아들었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 몇 번 써 본 후 처음이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세월이 흘렀다. 한지를 깔고 붓글씨연습을 시작했다. 먹물을 사서 쓰니 먹 갈 일은 없다. 선 긋기 연습부터 시작했다. 옛날 아버지가 대들보 상량문을 쓰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연습했다. 선 연습을 마치고부터 선생님에게서 받은 서체를 본本 삼아 연습했다. 한 주에 두 번씩 이 년을 연습했으나, 그 옛날 아버지의 글씨를 따르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주위를 살펴본다. 비스킷나무뿐만 아니라 옆의 생강나무도, 커다란 상수리나무도, 벚꽃나무도 붓을 가졌다. 아니 눈을 달고 있는 모든 나무들은 물론, 사철 푸른 소나무에게도 붓이 있는 게 아닌가. 그 것도 한두 개가 아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붓을 가지고 있다. 그랬다. 붓은 사람만이 가진 게 아니었다. 나무도, 풀도 붓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가늘고 뾰족한 비스킷나무의 붓은 일곱 살 초립동이의 붓일까. 커다란 참나무의 붓과 다른 나무들의 붓은 또 어떤 붓들일까.

    다시 세세히 나뭇가지들의 새눈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나무, 저 나무의 눈트는 모습을 유심히 뜯어본다. 어떤 것은 끝이 뾰족하게 붓처럼 생겼고, 다른 것은 뭉툭한 몽당연필 끝 같기도 하고, 또 끝이 둥글게 된 것도 보였다. 사람이 쓰는 여러 필기구의 모습들과 꼭 닮았다. 나무들은 왜 저 많은 붓들을 가지고 있을까. 무에 써 두어야 할 사연이 많기에 저리도 수많은 붓들을 부여잡고 살까.

    소소리바람 틈새로 한줄기 명지바람이 비스킷나뭇가지들의 붓끝을 간질인다. 붓들은 일
    제히 춤추듯 지나가는 바람에다 글을 쓴다. 시를 쓰고,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쓸 테지. 때론 일필휘지 휘호도 쓰고, 동화도 쓰며, 아포리즘도 쓸 거야. 사람이 만든 문학과 예술 장르는 물론, 사람이 모르는 장르의 글과 악보를 쓰고, 그림도 그릴 것이다.

    한 달가량 지났다. 비스킷나무는 하얀 꽃을 많이도 피웠다.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서 조금 멀리서 보면 한 무리 꽃이 한 송이로 보이기도 한다. 여름 초가지붕에 해질 녘 피어나는 박꽃 같기도 하고, 큰 것은 결혼식을 마치고 신부가 던지는 하얀 부케 같기도 하다.

    어린 붓들은 자라면서 잎도 되고, 꽃도 되고, 가지가 되기도 한다. 잎 붓, 꽃 붓, 가지 붓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비스킷나무 붓은 계절에 따라 변하고 있었다. 봄엔 눈이 잎이나 가지나 꽃으로, 여름엔 꽃이 열매로 변했다. 가을엔 약한 가지가 튼실한 가지로, 잎이 낙엽으로 변하고, 겨울엔 작은 눈을 깜빡이며 기다린다.

    붓은 자기 뜻을 전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삼라만상 모든 의사소통의 도구가 바로 붓이 된다. 사람들은 글, 그림, 악보, 소리, 행위, 또는 영상이나 전파 같은 다양한 붓들로 제 뜻을 나타내고 전한다. 나무들은 몸을 철 따라 다른 모양의 붓으로 변신하여 제 뜻을 나타내고 전한다. 사람은 붓을 참과 거짓, 선과 악,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도구로 쓰지만, 나무는 붓을 자기번식과 이웃 사랑만을 위해 쓸 뿐이다. 나무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동식물에게 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는가.

    사람이나 동물, 다른 식물의 먹이가 된 나무 붓들은 먹은 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산다. 사람이나 동물이 나무 붓들의 메시지를 알아듣기를 바라면서…….
    명지바람이 분다. 비스킷나무 붓들이 봄을 춤춘다. 

  • 산림조합중앙회

  • 입선  : 월정사 전나무 숲길

  • 우리 집에서 50km 정도 가면 어머니의 품 같은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 있다.
    친정어머니를 뵈러 가듯 마음은 흥겹다.
    여자에게는 어머니가 있는 친정은 맘 놓고 쉴 수 있는 곳, 아무리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도 계심으로 하여 얼마나 의지가 되고 갈 곳이 있다는 것으로 맘이 놓이는가!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마음이 심란하거나 화가 나고 외로울 때 어머니 계신 친정을 가듯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어머니가 마중 나와 반기는 듯하다.
    아무 때나 가도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왔냐! 하며 얼굴 내색을 살피는 어머니.
    행여 사위와 싸우고 온 것은 아닌지! 아니면 집에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로 일상을 살피시는 어머니의 따뜻함처럼, 월정사 전나무 숲은 나를 반긴다.
    금강교를 지난다. 마치 어머니가 계신 피안의 세상으로 가듯
    흙길은 부드럽고 숲에선 향기가 그득하다.
    햇볕이 틈 틈으로 와 비추면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처럼 웃음이 가득하고
    바람이라도 불면 속삭임처럼 감미롭다.
    소리라도 지르고 통곡이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은 마음도, 월정사 전나무 숲길만 가면
    봄눈 녹듯 녹고, 금세 얼굴에 분이 풀린 너그러운 평안한 모습을 한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마음이 풀리면 찡그린 얼굴 근육이 평안하게 바뀜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 해도 마음이 풀리지 않고 무겁지만, 숲에 가면 말 한 것도 아니고, 화풀이를 한 것도 아니어도 그냥 풀린다.
    숲은 서로 겨루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며, 자기를 존중하며 역할을 다 하기에 평화롭고, 숲에는 자신의 역할만 있을 뿐, 그 역할을 다 하였다 하여 공치사 하는 일도 없고, 비교하여 시샘을 하거나 자책하는 일도 없으며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도 없고, 다만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성실하는 자기 존중만이 있을 뿐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모르고 자기 있을 곳도 모른 체, 비교하며
    거미처럼 다리를 가지고, 나는 것을 잡으려 거미줄을 치고 사람만이 공치사를 한다.
    숲에 가면 비로소 나는 사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을 그냥 내려버리는 것이다.
    매혹적이지 않지만 평화롭고, 자극하지 않지만 전신을 깨우는 흙냄새, 풀냄새 나무냄새,
    코를 흥흥거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은 웃음이 가득하고, 가장 아름답고 개운한 나를 보듬어서 행복하다.
    시장 통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여도, 그 사람들이 숲으로 오면 모두 조용하다. 신성한 성지에 온 것처럼 겸손하며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다.
    백인백색의 사람이 와도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하나의 마음으로 걷는다.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걷는 연인들도, 어른도 아이도, 맨발로 걷는 교무님도, 수녀님, 스님도 모두 밖을 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보고 간다. 그곳이 월정사 전나무 숲길이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엔 오래된 전나무가 선 채 죽어 있다.
    스님께서 걷기 명상을 하다가 그대로 선종하신 것일까!
    몇 백 년 살다가 간 전나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냥 텅 빈다.
    탄허 스님께서 다언(多言)은 사자(士子)의 병이 되고
    번문(煩文)은 도가(道家)의 해가 된다며, 도를 밝힌 말이라도 다언과 번문은
    해가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그래서일까!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 가면 아무 생각도 없이
    오감만 살아 있고 나는 잊어버린다.
    그래서 좋다. 나도 잊어버리는 세상, 생각이 없는 세상은 본질만 있다는 는 것,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는 본질만 있고 사념은 없으며, 적정한 사랑의 거리가 있다.
    많은 식생들이 서로 얽힌 듯하여도 얽히지 않고, 서로 배려의 몸짓만 있을 뿐, 자기를 위해 악다구니 쓰는 소리는 없다. 그래서 숲길에 가면 나모 모르는 사이에 차분하고 마주 오는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서로 우축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숲에 가면 모두 자기 있을 곳에 있다. 빛을 좋아하는 나무 곁에 빛을 좋아하지 않은 작은 나무가 서고, 또 그 작은 나무가 서고, 모두 질서를 지킨다.
    사람처럼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만족하여 아무리 작고 볼품없다 하여도 자기를 존중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존중하지 않고 남과 비교하며 시샘을 하고 욕심을 부리며 화를 끌어안고 살아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나기 일쑤다.
    자기를 존중하며 다름이 화합이 되는 숲, 그래서 숲길을 걸으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서로 조화가 될 수 있게 자기를 다스려야 함을 알게 된다.
    숲길을 가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듣지 않아도 깨우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서로를 위해 비켜서고 상생하는 숲, 무념이 되는 까닭도 나를 잊은 최상의 정점이다.
    우리는 행복할 때 잊는다.
    부모님 계실 때 잊고, 아내, 남편이 있을 때 잊고, 아이가 제 자리에 있을 때
    잊어버리듯, 잊어버릴 때가 행복의 정점이다. 생각을 하는 것은 염려다. 그리고 부족함이다.
    그런데 숲에 가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잘 있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 새들이 날기 위해 빨리 배설을 하듯. 숲에 가면 날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비우고 새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걷는다.
    정상이 없어, 정상에 오르려 발버둥 거리지 않고, 정복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편안한 자세로 편안하게 걸으면 된다.
    친정어머니가 계시지 않아서 서울이 텅 빈 같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강원도)으로 이사 와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돌아와 내 얼굴을 살피며
    건강이 좋아졌는지 더 안 좋아졌는지 확인 하시며 “후유증은 없쟈?” 하시며
    내 등을 목을 팔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런 눈빛을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교통사고로 경추가 탈골이 되고 요추가 골절이 되어, 목에는 뼈 대신 쇠가 박혀 있고
    한동안 왼어깨 마비로 육체적 아픔보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육체적 마비는 정신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가족들의 도움과 운동으로 마비라는 육체의 무감각은 감각을 찾았고, 정신도 마비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왼어깨가 칼끝으로 찌르듯 아프다.
    우울하고 의욕이 없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냐고 원망을 하고 있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걷다가 아프다는 것은 장애가 없어졌다는 큰 사실을 알았다.
    순간 환호라도 지르고 싶었다. 오른손으로 왼어깨를 주무르고 걷다가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행복을 전하고 싶었다. 그냥 통화를 하고 싶었다.
    남편도 느꼈는지. “무슨 좋은 일 있어?” 하고 묻는다.
    “응” 하며 “월정사 전나무 숲 길 너무 좋아서요.” 했지만 그 순간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냐고” 하던 원망에 답을 얻었다.
    나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나는 사고 나서 다치면 안 되고, 남은 다쳐도 된다는 못된 마음이 부메랑으로 나를 찌르고 있었다.
    나는 화살을 당기는 것을 놓았다. 이젠 아픔이 행복이다.
    블록 쌓기 두 개도 올리지 못하고 쓰러트리던 그 비극, 그때는 어깨가 아프지 않아 마음이 불구덩이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아픔을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아프다고 화를 내고 있었었다. 아프다는 것은 왼팔을 쓸 수 있는 무엇보다 큰 행복이다. 의사도 경추 탈골은 하반신 마비인데 어깨만 마비인 것도 사후 처리를 남편이 너무 잘해 천운이라고 하셨다.
    천운, 그것은 아픔을 주는 것까지였다. 그런데 모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왼어깨가 힘은 부족하고 아프다.
    정말 천운이다. 아프다는 것은 팔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교를 건너 나온다. 피안은 내 안에 있었다.
    내 마음에 가려 보지 못하다 가린 마음을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걷어냈다.
    왼어깨가 칼끝으로 긋듯 아프지만 행복하다.
    워드를 양손으로 치고 두 팔로 일상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다, 왼팔의 아픔이 준 축복이다.

  •  [12회 수상작]

    대 상
    금 상
    은 상
    동 상
    입 선
  • 산림조합중앙회

  • 대 상
  • 명개리 원시의 빽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여태 숲에 가려져 있던 통마람골

    시원한 얼굴을 드러낸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멧돼지 녀석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정적이 감돌자

    내 등골은 쭈뼛쭈뼛 서오고

    그렇게 희푸른 속살 드러낸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을까,

    순하게 흐르던 물줄기 양옆으로

    갑작스레 기암절벽이 솟아났다.

    깊은 소와 담으로 이어지는 비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너럭바위다 싶으면 어느새, 자갈톱.

    물옷 입는 바람 소리 친구 삼아 얼마쯤 걸었을까.

    높다란 반석 위에 올라 짙푸른 소를 내려다보는데

    아니, 팔뚝만 한 그 무엇이 쏜살같이 바위 밑으로 숨는다. 열목어였다

    낯선 물고기들이 날랜 유영을 뽐내자,

    흰 구름 뒤에 숨어 호시탐탐 이쪽을 엿보던 햇살,

    슬그머니 나와 온몸에 물을 끼얹고

    은빛 물고기와 연거푸 물장구를 쳐댄다.

    불바라기 약수터 가는 길목,

    털북숭이 멍덕딸기 하얀 웃음보 터뜨리고

    길모퉁이 산뽕나무 다소곳이 까만 오디 물고 서있다.

    능선 따라 자줏빛 종덩굴 가뭇가뭇 조막손 내밀어오고

    미천골인가 계곡에서 본 듯한 찰피나무,

    깃털 같은 햇살 주워 담으려 노란 입술 헤벌리고

    먼 산 보던 수수꽃다리도 덩달아 하얀 가슴 부풀리며

    길을 나설까 말까 망설이는데

    어디선가, 코끝을 자극하는 순한 내 음…

    아뿔싸, 아무것도 준 것 없는 이 몸의 발아래,

    여태 나를 만나는 기다림으로 버티어 온 양

    하이얗게 매달려오는 당귀꽃 사태.

  • 산림조합중앙회

  • 금 상


     

    수년 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대전의 내동에서 산 적이 있다. 처음 그 집을 보러 갔을 때, 나의 발길을 붙잡았던 것은 집 앞 길을 따라 백여 미터쯤 펼쳐 있는 녹지였다. 사실 녹지라기에는 품격이 좀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아파트 담장 밑으로 흙을 돋우어 만든 경사진 둔덕에 잡초와 칡넝쿨이 어지럽게 엉켜 있고, 사이사이로 온갖 생활 쓰레기가 몸체의 일부만을 가린 채 숨어 있었다. 쓰레기야 치우면 되고, 도시에서 이만한 녹지를 만나기 쉽지 않거니와 마당 넉넉한 단독 주택의 아래층도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 집은 니은 자형 양옥으로 이층에는 갓난아기를 둔 새댁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이사를 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녹지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대형 쓰레기는 신고를 하고, 재활용이 안 되는 소형 쓰레기들은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고, 썩은 나무나 종이류는 소각했다. 혹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눈에 띄면, 불러서 회수해 가도록 하였고, 쓰레기 처리를 잘하자는 홍보 문안을 녹지 옆에 위치한 가구들마다 일일이 돌렸다.
    과연, 극성을 부린 보람이 있었다. 달포쯤 지나니 볼품없던 풀숲이 반짝거리면서 제법 눈요기가 되었다. 분주한 사이 계절이 바뀌고 붉은 칡꽃이 피기 시작하니 초록 일색이던 풀숲에 귀여운 악센트까지 생겼다. 그 무렵 새댁은 아기가 꿈을 꾸는 동안 종종 커피를 타가지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우리의 대화 내용은 다양했지만, 나의 녹지 복원에 대한 과찬과 쓰레기 버리는 사람을 씹는 일도 빠지질 않았다. 녹지가 아파트 담장을 낀 한산한 길옆이다 보니,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영장동물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복원에도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지만 유지하는 데도 만만치 않은 공이 들었다. 항상 대문 옆에 목장갑과 비닐봉지를 걸어두고, 들며날며 풀숲의 쓰레기를 주웠다. 당시 초등학교 일 학년이던 어린 딸도 신주머니에 쓰레기를 담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반드시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다 충고를 들었던 이웃들은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오직 새댁만이 진정한 나의 아군이었다. 그녀는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을 보면 신속히 나에게 알리고, 몰래 버린 쓰레기의 주인을 찾는 데도 많은 정보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침입자는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그사이 나의 녹지는 ‘근화원’으로, 내동 집은 ‘근화정’으로 승격이 되어 있었다. 이사 간 이듬해 봄, 모 신문사로부터 고맙게도 나는 무궁화 100수를 얻어 마당 가득 무궁화를 심고, 녹지 주변을 무궁화로 치장할 수 있었다. 근화정의 변화에 대해 집주인도 좋아하였고, 무엇보다도 내가 신이 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랑을 일삼으니, 나중에는 나의 지인들이 그렇게 불러준 이름이다. 이렇게 근화정과 근화원의 안주인으로 유유자적하던 나의 잔잔한 일상에 갑자기 누가 철퇴를 내리친 것이다.
    “언니, 언니, 큰일 났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이른 아침,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댁의 소리를 듣고, 놀라서 문밖으로 뛰어나온 나는 다시 한 번 또 깜짝 놀랐다. 하룻밤 사이에 그 좋던 황금물결이 시커먼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거짓말처럼 훅~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 검은 뼈로 서 있는 나의 무궁화……. 잔인한 광경에 말문이 막힌 나는 하릴없이 눈물만 흘렀다. 탐문을 해보니 어떤 오십 줄 여자가 불을 놓고 갔다고 한다. 이 난데없고 경우 없는 침입자는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오고 가는 행선도 없이 왔다간 흔적만 남겨 놓았다. 한동안 시커먼 재를 날리며 방치되어 있던 공터가 조금씩 일구어지더니, 때마다 땅속에서 나온 쓰레기들이 길 쪽으로 버려졌다. 알고 보니 김장할 무와 배추를 심어 먹으려고 하는 짓이었다.
    ‘어떤 철판인지 만나기만 해 봐라!’ 이를 갈며 가슴을 쓸며 벼르고 있던 나는 드디어 씨를 뿌리러 온 침입자를 만났다.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따지자, 침입자는 너무나 당당하게도, 이것이 네 땅이냐, 무슨 상관이냐, 쓸모없는 풀떼기 대신 푸성귀라도 뽑아 먹으면 좋지 뭐가 잘못이냐, 동네 사람들이 시어머니 하나 생겼다고 하던데 네가 바로 그 잘난 오지랖이냐며, 허공에 지휘를 해댔다. 분한 만큼 나의 기세도 등등하였으나, ‘시어머니’ 대목에서 맥이 빠져버린 나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도 한 번 더, 녹지를 훼손하는 짓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반격하였더니, 땅 좁은 대한민국에서 땅을 놀리는 것은 더 큰 죄라면서 애국자 행세까지 하였다. 상대는 무적의 철면피였다. 침입자에게 남의 입장이란 쉽게 걷어낼 수 있는 거미줄에 불과했다. 오냐, 독거미 맛을 한 번 봐라! 대문을 부서져라 닫아버리고 퇴각하면서 나는 속으로 부글부글 독기를 품었다.
    그날 밤, 나는 복수전을 감행했다. 작전명은 ‘눈에는 눈’, 작전의 관건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드디어 남편과 딸도 곤히 잠들었다, 행동 개시! 손전등을 켜고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누르자 뜻뜨뜨 소리와 함께 후루륵 복수의 칼날이 파랗게 피어올랐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사랑 녹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끓인 물을 들고 문밖으로 나오니 시커멓게 누워 있는 공터 위로 괴괴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위를 둘러본 후, 나는 우선 손쉬운 아래쪽부터 작전을 실행했다. 이놈의 씨앗들, 뜨거운 맛 좀 봐라! 흥, 백날을 기다려 보시게, 싹이 트나! 나는 씨앗을 심어 놓은 자리 위로 펄펄 끓인 물을 모질게 하나, 독하게 둘, 붇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복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시 물을 부으려는 순간, 땅속으로부터 씨앗이 냄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부질없는 미친 짓이었다. 결국 이 작전의 관건은 바로 내 마음의 눈이었던 것이다. 나의 복수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공터에는 제법 먹을 만한 배추와 무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가을 내내 싱그러웠던 풀꽃 향기 대신 진한 거름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김장 농사는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수확을 하던 날, 공터 옆의 집집마다 서너 포기의 배추들이 전달되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문 앞에 놓여 있는 전리품을 도로 배추 껍질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빈터에 가져다놓았다. 그것은 나의 근화원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였다. 그리고 곧, 녹지를 잃은 나는 미련 없이 내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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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길이 말랐다. 바닥이 훤히 드러난 소쇄원 계곡에 바위와 돌멩이들이 여실히 그 모양을 드러낸 채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젖듯 말듯 조용히 내리는 가랑비에 그래도 천천히 풀들이 젖고 돌들이 젖는다. 흐르지 않고 단지 젖을 뿐이다. 아마도 이 비가 저 계곡을 채우려면 수십 년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천천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제월당 마당에 나는 섰다. 뒤로는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계곡이 막고 있는 소쇄원 제월당 앞마당 풍경에 넋을 잃고 앉았다. 신록이 우거져 계곡 너머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던 집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보니 탐나게 들어앉았음이다.
    스승의 유배와 죽음을 보고 낙향한 제자 양산보는 소쇄원 풍경 안에서 그 마음을 온전히 가라앉혔을까. 시대의 불만과 내면의 갈등이 자연으로 녹아들어 편안히 살다 갔을까. 모를 일이다. 기록에는 그의 마지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제월당과 광풍각의 풍경만으로 그의 낙향한 삶이 정계의 삶보다 풍요로웠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 안의 갈등과 소요를 묻어둘 언저리를 빌리고자 나는 이곳에 왔으므로.
    소쇄원瀟灑園은 올곧은 선비 정원이다. 화려하지 않게 조용히 포개놓은 층층의 돌담과 기와가 자연스럽다. 어디에 서든 모든 것에 막힘이 없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도 나의 시선이 끝없이 가 닿을 수 있다. 그 마지막 시선에 언제나 자연이 펼쳐진다. 신록이 우거진 유월의 담양은 편안하다. 마당을 뛰어다니는 다람쥐 두 마리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제 길을 찾아다니는 모양조차 용감하다. 시선에 상관없이 나는 나의 길을 얼마나 바로 걸어왔을까.
    흔들렸다. 채우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왔기에 나는 심하게 멀미를 했다. 군데군데 구역질나는 속내를 게워놓고 지저분하게 살았다. 올곧게 뻗은 대나무가 아니라 휘어진 마디로 대나무의 기개를 드러낸 지난 삶이 옹졸하고 부끄럽다.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수년 전부터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힘들어하시다 결국 몸이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니 병이 찾아왔다. 응급실에서 수삼 일을 보내는 동안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긴 병으로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차츰차츰 흩어지는 나의 초심이 내게 가장 먼저 보였다. 조금씩 의식을 찾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곁에는 아들 셋과 딸 그리고 며느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병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그 자리에 오직 나의 몸과 마음만은 비어 있었다. 직장과 병원을 오고가는 남편의 모습이 존경스러워야 하건만 나는 그조차도 용납이 안 될 만큼 마음자리가 단단히 굳어져 버렸다. 어머니의 퇴원과 함께 통원치료가 시작되었지만 남편은 그 먼 길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며 어머니를 모셨다.
    집이 불타 잿더미에서 생활하는 나와 자식들을 버려두고 시골로 향하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어머니 때문이라고 여겼다. 힘들다 소리 못하는 남편이 밉고 말하지 않는다고 관심조차 없이 십수 년을 모른척하는 어머니도 미웠다. 형님들의 어려움에만 눈이 먼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이 물질로만 보였던 그때 가치로 보자면 나는 내버려진 며느리요, 남편은 버려진 자식이었다. 세상살이에 깊이 빠져 넓게 두루두루 보는 눈이 부족했던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못된 며느리의 불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빠르게 회복되어 건강을 찾으셨다. 시골집 너른 마당에 또다시 발걸음을 딛고 세상을 보고 계신다. 그 걸음이 회복되면서 어머니는 내게 유달리 부드러워지셨다. 이렇다 저렇다 하던 간섭도 않으시고 점점 침묵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마도 그 묵언의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오그라들고 있었던 것 같다. 기울어진 모습이 여실히 드러날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말없이 지켜보는 남편을 바라보는 것도 내겐 힘겨웠다. 모두가 나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나는 숨이 막혔다. 가타부타 말을 넣을 때보다 오히려 침묵하는 가족들이 더 감옥처럼 나를 힘들게 했다.
    툇마루가 제법 높다. 댓돌에 올라서야 비로소 엉덩이가 걸쳐진다. 가파르게 내지른 바로 앞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계곡이다. 계곡의 물길이 조금씩 모이고 있다.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처럼 조용히 내리던 비가 어느새 모여들었다. 물길을 만들어 소리를 채우며 흐른다. 높은 툇마루에 불어오는 바람도 제 길을 따라 흘러와 내 몸에 부딪히고 하릴없이 사라진다. 자연스럽다. 길게 이어진 툇마루도 제 딴엔 제 몸이 만들어낸 마루길이다. 선비들의 학문을 논하던 마루길 뒷산에 산길이 이어진다. 산길로 들어서는 뒷담장 아래에 세 잎 클로버가 몸을 펼치고 있다. 모든 것들이 말없이 제자리에 충실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평화롭다.
    나의 길도 여러 갈래다. 하고 싶지 않았던 며느리의 길이 부서지고 나니 아내의 길도 어머니의 길도 온전치 않다. 소쇄원의 풍경이 사람을 부르는 이유는 제각각의 길들이 바르게 나 있기 때문이다. 물길이 제자리에 잡혀 있고 마당길, 담장길, 툇마루 길과 심지어 바람길 조차도 함부로 넘나들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 흘러 다니는데 사람의 길이야 오죽하겠는가.
    한 달에 한 번 남편은 여전히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간다. 한 달 치 약을 받아 드신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복숭아의 희뿌연 살결 같던 피부가 독한 약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힘든 몸으로 농사 지어 내 손에 쥐어주신 참기름을 나는 아직도 뚜껑도 열지 못하고 있다.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라 우산도 없이 와 버렸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가벼운 비가 기분이 좋다. 소쇄원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몸을 씻어주는 것 같다.
    지나쳐 버린 길을 되돌아가는 게 쉽지는 않다. 물길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니 나는 오늘 맘껏 비를 맞고 세상에 찌든 몸이라도 설렁설렁 씻어내고 싶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내 안의 길이 오늘 문득 다듬어지지는 않을지라도 무너진 인간의 길, 자연의 길로 단장하고 싶어 나는 오래 툇마루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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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해, ‘병가(病暇)’라는 남루한 시간 앞에 서 있었다. 일상의 삶을 가로막은 아스라이 높은 통곡의 벽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암수술을 받고 퇴원한 직후였고, 몇 개월 뒤엔 대대적인 종합검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포감은 시시때때로 목을 조이며 달려들었다.
    어느 순간 피하지만 말고, 직면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계족산의 황톳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최소한 내 나이 수만큼 다녀오자고 목표를 세웠다.
    헉헉거리며 계족산에 오른다. 산줄기가 닭의 발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기에 유래된 이름이다. 어떤 마음이 선한 기업가가 계족산의 임도에 15t 트럭 100여 대 분의 황토를 사다가 쏟아 부었다. 촉촉하고 아늑하여 맨발로 걷기에 적합한 계족산의 숲 속 황톳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계족산성을 정점으로 산의 팔부능선을 휘감아 도는 널찍하고 순탄한 길이다. 13km 트랙 한 바퀴를 도는 데 5시간이 소요된다. 혼자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마음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호젓한 숲길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음에 맺혀 있던 쓰라린 감정들이 무의식의 빗장을 풀고 쏟아져 나온다. 그럴 때 초록의 숲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범벅인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무한다.
    ‘괜찮아, 괜찮아. 다 지나가. 지나가는 거야.’
    숲길을 걷는 걸음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수십 굽이를 돌아오는 청아한 산바람을 맞는다.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수선거리는 숲과 새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마을이 보인다. 한참을 걷다보니 전망이 확 트이며 저 멀리 대청호수가 파랗게 펼쳐진다.
    닭 발가락은 앞발가락과 몸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뒷발가락으로 되어 있다. 닭의 뒷발가락처럼 남에게 선뜻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픔이 있다. 그것은 재판상 이혼이다. 한순간에 삶 전체가 풍지 박산이 되는 참혹한 과정을 겪었다. 내게 남겨진 두 아이와 직장 일에 치열하게 몰두했다.
    하지만 피를 말리며 주저앉게 만들었던 끔찍한 고통은 사춘기 시절의 비행 청소년이었던 아들이다. 오토바이 질주, 흡연, 음주, 폭력사건, 무면허 뺑소니 교통사고 등 일탈 행동은 끝없었다.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불려갔다. 어느 장소에서든 못난 어미로서 무릎을 꿇었다.
    “제 잘못입니다. 자식을 잘못 키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내 눈물을 지켜본 아들은 서서히 마음을 잡고 돌아왔다. 머리를 깎고 전심전력으로 공부하여 수의대에 진학하였다. 지금은 수의연구사가 되어 있다.
    계족산성에서 눈부신 풍광을 내려다본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성벽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한다. 비로소 인생에서 이미 벌어진 일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고달픔 속에도 깊숙이 숨겨진 희망을 만날지도 모른다. 불안함을 털어내면서, 한여름 뙤약볕과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도 걷고 또 걸었다. 어떤 날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자욱이 피어오르는 깊은 계곡의 운무에 갇혀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숲길을 돌다가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나무가 있다. 그 산 벚나무는 숲길 트랙의 마지막 지점쯤 길모퉁이에 심하게 굽어 용트림하며 가로막듯이 서 있다. 볼 때마다 안부를 묻는 심정으로 우툴두툴한 검은빛 표피를 쓰다듬는다. 처음 만난 날, 누군가 방금 생가지를 꺾어냈는지 생살이 허옇게 찢겨져 처참한 모습이었다. 흘러넘치는 옹이의 진액은 꾹꾹 참다가 흐르는 그렁그렁한 눈물 같았다. 그 피폐한 몰골이 나와 같아서 망연히 서 있었다.
    직장 동료들은 승부욕이 강한 나를 ‘여전사(女戰士)’라고 불렀다. 승진은 코앞에 있었다. 가장 어려운 보직이 맡겨졌다. 성공리에 완수하고자 불철주야 매진했다. 이런 오만한 모습들이 신의 눈에는 거슬렸던 것일까.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 멈추어 서게 되었다. 직장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에서 예상치 못한 갑상선암이 발견되어 수술했다. 불행은 혼자서 오지 않았다. 6개월 뒤에는 유방암이 판독되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믿지 못할 상황에 병원을 서울로 옮겨보았다.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암수술을 마치고 방사선 치료를 받던 도중 이번에는 뼈 전이가 된 것 같다고 흉부외과에서 수술을 하잔다. 수술 결과는 다행히 양성 낭종이었다. 갈비뼈를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대는 듯한 통증으로 진통제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끝내지 못한 전쟁이었다.
    숲에는 치유 능력이 있다. 에코 힐링(eco-healing), 자연을 통한 심신의 치유를 의미한다. 억겁의 세월이 만들어낸 숲에는 피톤치드와 테르펜 등 인간의 세포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성분이 풍부하다. 숲길 걷기를 서너 달 정도 했을까. 차츰 마음의 화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결박하고 있던 번뇌를 하나씩 풀러 내려놓으며 마음을 비워갔다. 사실 아픔과 흔들림 없는 완벽한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살다 보면 길을 잃을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단풍 절정인 계족산이었다. 끝을 향해 색이 바래져가는 가을 숲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타박타박 걷는데 문득 불어온 바람에 낙엽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신의 장엄한 강복기도 같아서 온몸으로 맞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마지막 바퀴를 돌던 겨울날이었다. 걷는 발자국마다 소복소복 눈이 덮었다. 길게 펼쳐진 한 장의 수묵화 속에 서 있다. 마음은 고요 속으로 침잠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 흩날리는 눈발처럼 순간의 반짝임이리라. 그때였다. 등 뒤로 후다닥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내 곁을 빠르게 지나쳐 하얀 눈 속으로 달려가는 사슴을 보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순백의 세상에서 만난 사슴은 상서로운 징후였던가. 며칠 뒤, 가슴 졸이며 실시했던 종합검진에서 건강 판정을 받았다.
    산다는 것은 별게 아니다. 인생은 그다지 슬플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다지 기쁠 것도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나름의 작은 ‘화평(和平)’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화평의 방법은 계족산 숲길걷기였다. 느릿느릿 걸었던 걸음 위로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흘러갔다. 나를 돌아보았고, 삶을 바라보았다. 이 과정에서 살아가며 진정 포기해야 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순간 우울하고 암담했던 병가는 평온한 ‘안식년’으로 바뀌었다. 계족산 황톳길에서 심신이 치유된 나는 직장으로 복귀했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다. 혹 당신도 지금 인생의 여정에 지쳐서 고단한가. 그렇다면 산으로 가보라. 어떤 산이든 상관없다. 당신이 도착한 그 산의 싱그러운 숲 속 길을 느릿느릿, 될 수 있으면 더 천천히 걸어 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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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 선 : 우리나라 꽃, 무궁화
  • 내가 어렸을 때 마을의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야생화(野生花)나 텃밭의 파란 채소를 보아도 제각각 느낌이 있었으니 엊그제의 일처럼 기억이 새롭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큰길이라고 해도, 겨우 우마차가 지나가면 그 뒤에 따라오는 시외버스도 우마차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을 정도로 비좁은 길이었다. 게다가, 집과 집 사이에는 지금의 벽돌 담장 대신 생울타리 등으로 조성된 곳이 많았다. 이때생 울타리는 사철나무나 무궁화 꽃나무가 많이 보였다. 사철나무는 사철 푸름을 자랑해서 좋고, 무궁화는 나라의 꽃이기에 애착이 갔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가 이른 여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면 가을 무렵까지 쉼 없이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였다. 흰색, 분홍색, 적색, 자주색, 청색과 복합 색 꽃을 자랑이라도 하듯 제각각 특색을 나타내었다. 그와 같이 초여름부터 쉼 없이 피고 지는 꽃이기에 지금도 나는 무궁화가 친근한 꽃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릴 때 듣고, 보았던 일은 쉽게 잊히지 않고, 우리 곁에 정답게 와 닿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의 생활이 중요함을 느낀다.
    내가 초등학교의 시절 일이다. 봄이었는데 학교에서는 학교 주변에 나무를 심을 것이니 생나무를 꺾어 오라는 것이다. 나는 집의 울타리에 무성하게 있는 무궁화를 한 다발 꺾어 갔고, 내 옆집 친구는 울타리에 쭉쭉 늘어진 개나리를 한 아름씩 꺾어 갔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각자 꺾어온 생나무들을, 칼이나 손으로 뾰쪽하게 잘라서 얕게 흙을 판 자리에 심고 흙을 덮은 뒤에 약간의 물만 뿌려주는 것으로 심는 일을 마쳤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 있을 때 친구들하고 꺾꽂이했던 묘포 장으로 달려갔다. 삽목했던 나무에 움이 트고, 파란 새순이 나오는 것을 살펴보는 재미로 자주 들렸던 기억이 난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여름철에 간혹 소나기라도 뿌려준 뒤에는 꺾꽂이했던 장소로 달려갔다. 삽목수는 푸르고 싱싱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기는 것 같았다.
    세월은 강산을 여러 번 변할 정도로 흘렀다. 하지만, 지금도 어린 시절 해바라기, 나팔꽃, 봉숭아, 민들레, 할미꽃, 채송화, 달리아. 코스모스 등을 보면 나를 부르는 듯 정감이 간다.
    이와 같은 꽃들은 지금도 나를 볼 땐 고개만 삐쭉 내밀지만, 나는 옛 친구를 만나 본 듯 정겹고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에도 어릴 때 보았던 꽃을 대하면 순간에 마음이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것은 어인 일일까?
    지금은 좋은 꽃들이 사시사철 화원에 찾아가면 다양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릴 적에 보아왔던 꽃들보다는 정겨움이 덜하다.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어릴 적에 다양하고 관심 있게 접해 보도록 아동들을 지도함이 좋을 성싶다.
    올해 여름은 유별나게 불볕더위와 연이어 몰아닥친 태풍으로 농작물과 양식어장의 피해가 심했다. 매년 지구가 점점 더워지다 보면, 온난화로 지구의 재앙이라도 닥치게 될까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내 집 뒤에는 중외 공원이 있다. 시간이 있으면 나는 자주 산책을 나선다. 언제나 주변에 거주하시면서 건강을 챙기시는 여러 사람이 나와서 운동을 하거나, 팔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활보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가족끼리 나와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보기가 좋다.
    중외공원에서는 2년에 한 번씩 광주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올해는 9월 5일부터 약 60일 동안 전시회가 열려서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다녀가리라 예상한다. 이 공원에는 개나리와 무궁화가 유난히 많다. 개나리의 푸릇한 줄기가 수양버들처럼 길게 늘어진 모습도 보기가 좋고, 지금 한창 빨갛고, 하얗게 피어 있는 무궁화는 나의 눈과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오래 피어 있던 꽃잎이 오그라지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화무십일홍인 것을 어찌할 수가 있겠는가, 아쉽게 지는 꽃이 있지만 아직도 꽃봉오리가 수없이 많이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막 새롭게 피어나는 무궁화 꽃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생활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게 되면 우선 얼굴에 표정이 나타난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있으면 주름 잡혔던 얼굴은 다리미로 펴기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펴지고 미소를 머금는 얼굴로 바뀐다. 특히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는 오랜 기간 끈질기게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우리 국민의 성격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생육도 왕성할 뿐 아니라 7월부터 피기 시작하면 서리가 내리는 늦은 가을까지 쉼 없이 스스로 꽃을 교체해 가면서 핀다. 특히 무궁화는 단색이 아니고 특유의 혼합 색깔의 꽃이어서, 보기도 좋아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
    무궁화는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일제 침략기에 ‘한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꽃으로 주목받기도 했던 나라꽃이지만 진딧물이 잘 낀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두 차례 살충제만 뿌려준다면 병충해에 대한 피해는 없다. 휘묻이나 꺾꽂이 등으로 번식도 잘되고 적응력이 강하여 잘 자라기도 한다.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나라꽃인 무궁화부터 관심을 두고, 모든 일에 구심점을 찾아 한 목소리가 되면 국력은 신장될 것이라 믿는다.

  • 산림조합중앙회
    입 선 : 은행나무

  • 맥없이 무너진다. 서슬 퍼런 전기톱이 굉음을 내지를 때마다 떨어지는 허연 살점들이 눈물 쏟듯 한다. 백년해로한 노부부처럼 유치원마당을 지키던 은행나무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온 하늘을 떠받치고도 의연하더니 이젠 추수 끝난 빈들에 누운 짚동처럼 나동그라졌다. 사지를 버둥거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그 소리마저 무지막지한 기계소리가 삼켜버린다. 새파랗게 질린 잔가지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리 무성한 나무를 왜 베느냐고 묻지만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다.
    유치원 창문으로 내다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는 가게 문을 닫고 애써 모른 체한다.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업고 낯선 마을에 첫발을 들이는 우리 가족을 맨 먼저 반가이 맞아 주었던 이가 은행나무 부부였다. 짙은 그늘아래에서 땀을 식히며 우리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그늘의 끝자락에 작은 사진관을 차린 것이다. 나무는 내 아이의 서툰 걸음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빛으로 내려다보았고, 젊은 나이에 사진관을 운영하는 나를 엄마처럼 지켜보았다. 경험이 없어 손님을 대하는 일에 지쳐 울먹일 때면 처음엔 다 그런 거라며 힘을 주었다. 얼토당토않은 언쟁이 있을 때면 괜히 나무에게 화를 내곤 했다. 여름이면 은행나무의 부채바람에 잠을 재웠고, 가을이면 화르르 떨어진 수북한 은행잎을 이불 삼아 깔깔대며 구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나무 아래는 우리 집 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무 곁에 유치원이 생기자 나무는 더욱 활기차 보였다. 주변에서 이처럼 큰 나무는 흔치 않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 그곳은 쉴 곳이 마땅찮은 동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곧고 튼튼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의 표본이 되었고 술래잡기 놀이에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마음이 고달픈 사람은 시름을 내려놓고, 젊은이들은 사랑의 꽃을 피우며 미래를 꿈꾸던 곳이기도 했다. 참새도 쉬어가고 비둘기도 놀다갔다. 까치는 수없이 둥지를 틀었다. 삼십 년이 되도록 많은 사람이 지나갔지만, 친정 엄마처럼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 있던 나무다.
    그 나무가 잘리게 된 것은 그늘이 넓은 탓이다. 가지가 우거져 옆집 담을 넘었다. 옆 상가는 낡아서 지붕에서 빗물이 줄줄 샜다.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지붕을 고쳐 달라고 했지만, 주인은 머지않아 허물고 새로 지을 것이라며 지붕에 비닐을 덮어놓았다. 그리고는 유치원에 가서 나무를 베어달라고 요구했다. 유치원에서는 큰 나무를 베기가 아까워 담장을 넘어가는 가지만 몇 번이나 베어냈다. 한쪽 가지만 쳐내니 몰골이 꼭 해풍 맞은 솔 같았다. 그럼에도 잎이 자꾸 떨어져 자기네 건물에 쌓여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며 구청에 진정서를 여러 차례 냈다고 하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나 보다.
    환청일까. “재재재재” 새들이 지저귀고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느새 잔가지까지 정리되었는지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뙤약볕 아래 솔개그늘 한 점마저 없는 놀이터는 조용하다 못해 휑하니 적막만 돈다.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동그마니 백짓장 같은 등걸에 나이테만 뚜렷하고, 설자란 은행꼬투리가 낙태 당한 태아처럼 떨어져 있다.
    나무가 없어지니 놀이터 담벼락에 그려놓은 동물캐릭터 그림이 선명하다. 그네를 타는 다람쥐를 토끼가 밀어주고 있다. 아기 곰 두 마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하고, 아기코끼리는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다. 눈이 쭉 찢어진 여우 한 마리가 토끼에게 팔을 뻗고 있다. 여우의 간교한 웃음에 시선이 머문다. 어린이와 나무는 우리의 미래다. 이제 아이들은 어디에서 자연의 향기를 느끼고 풍경을 그릴 수 있을까. 사람에 의해 베어진 나무는 어느 누군가의 보금자리를 훈기 있게 해 줄 것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없고 불편하다고 여러 사람의 희망을 앗아가는 인간의 이기심이 가슴 아프다.
    수업이 끝났는지 우르르 아이들이 밖으로 나온다. 살아온 세월을 말하는 나이테가 말없이 아이들을 맞이한다. 나무의 흔적을 찾던 아이들의 엉덩이가 옹기종기 그곳에 앉는다. 아이들은 갑자기 사라진 나무를 어떻게 생각하고 선생님은 뭐라고 설명을 할까. 출근할 때마다 나를 반기던 까치는 어디로 갈까? 아직도 나무와 못다 나눈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봄이 빨리 기다려진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에 땅속 깊이 잠자고 있던 뿌리에서 새싹이 기지개 켜며 연둣빛 주둥이를 내밀지 않으려나.

    여름 햇살이 참 오지게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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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수필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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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상

  • 부부나무 / 김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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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수산은 소소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좋다.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작은 들풀조차도 환희를 자아내게 한다.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도 디딤돌이 된다. 돌돌거리는 냇물소리는 또 어떠한가. 세상과 겉놀던 마음을 말끔히 씻어 준다.
    돌탑을 보면서 짧으나마 느끼게 되는 숙연함, 오형제, 삼형제 나무를 지나 산 중턱에 이른다. 잘 닦아 놓은 계단 길을 오르다 갑자기 울퉁불퉁한 돌무더기 길을 만난다. 돌부리가 많은 산이어서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조심 산에 오른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구청에서는 뭘 하고 있느냐’는 식으로 투덜거렸는데 등산길은 묵언 수행의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왔다. 가파른 길도 있고 평평한 길도 있다. 오르막을 한참 오르면 잠시 쉴 수 있도록 너럭바위도 있다. 또 예고 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 같은 가파른 길도 나타난다. 이렇듯 산을 오르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던진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면서 헤쳐 나가는 인생길과 비슷하지 않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부부를 닮은 나무가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다정한지 시샘이 난다. 부러움으로 걸음이 안 떨어질 때도 있다. 살뜰함을 받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주책없이 눈물도 난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우리 부부 사이를 돌아보게 된다.
    남편은 무뚝뚝하지도 살갑지도 않다. 그저 자신의 일에만 골몰하는 일중독자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가족에겐 늘 소홀하다. 가정은 사랑이 없어도 주기적으로 월급만 주면 부도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념일조차 돈 봉투를 건넨다. 그렇다고 돈을 잘 버는 사업가는 아니다. 월급쟁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다정한 체 행동한다. 그런 걸 보고 자란 아이들은 결혼은 재미없다면서 혼자 살겠다고 한다. 귀감이 되지 못해서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좋지 않았다. 이러저런 이유로 남편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가정을 돌아보는 시간이 터졌다.
    둘째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자신이 만든 해킹 프로그램을 시험하기 위해 모 사이트에 접근했다. 해커로 단정한 서울 사이버 수사대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조사서를 쓰던 중에 아빠, 엄마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안다는 식으로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맞벌이 부부라서 바쁘다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합리화를 했지만 속마음은 뜨끔했다.
    자녀양육 프로그램인 P.E.T(부모교육)를 하는 내가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 내 가정, 내 아이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자녀가 올바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좋은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남들에게 외친 내 모양이 우습게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달라지고자 마음먹었다. 몇 년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이 우리에겐 몇 십 년의 간격으로 느껴졌다. 낯선 사람과 맞선 보는 기분이었다. 뇌의 쾌감조절중추를 자극해 기분을 흥분시키는 술을 먹는다면 서먹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엔돌핀의 힘을 빌려 분위기를 돌려보고자 애썼다. 술이 몇 잔 들어가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난 일이 기억나서 잘잘못을 따지다가 역효과만 났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부부가 같이 즐길 수 있는 취미였다. 남편은 골프를 같이 해보자고 했지만 그런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선뜻 내키지 않았다. 외려 산을 오르면서 자연스레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손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24년 동안 살면서 둘이서만 오붓하게 지낸 본 일이 없었다. 어색해서 그냥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인 양 앞만 보고 걷는 것이 전부였다. 부부간에 그렇게도 할 말이 없을 줄은 몰랐다. 맨송맨송 오르내리기를 서너 달 정도 흘렀을까. 조금씩 굳었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두터운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남편과 부부 나무 앞을 지나다 걸음이 멈췄다. 나무는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같은 생명체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부나무만도 못하게 살았던 것 같다. 사랑하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소중히 가꾸지 못하고 젊은 시간들을 냉랭하게 심리전으로 다 허비해 버렸다.
    대나무가 올곧게 자라기 위해선 마디를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기간도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다진다면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더 많으니까 아직 늦은 것은 아닐 터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남편도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변화는 내 쪽에서 먼저 달려가야 한다고 했던가. 우리도 잘 살아보겠다는 증표를 남기듯이 부부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한없이 베푸는 피톤치드와 테르펜이 세포 하나하나를 활기차고 건강하게 해 주었다. 심신의 불순물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정화시켜주었다. 산을 찾는 이들이 왜 그렇게 산을 오르는가를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이나 남편이나 주말에만 한 번 볼 수 있는 형편이라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남편은 산이 새삼 다시 보이며 어머니 품 같다고 한다. 일요일이면 먼저 산에 오르자고 서두른다. 가족과 함께 산을 오르면서 서로 못했던 동정에 대해 얘기도 하고 오순도순 보내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정이 해체되면 가족이라는 의미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앞서 가던 남편이 아들에게 한마디 던진다. ‘자신에게 할 말이구만.’ 웃음이 나왔지만 못들은 체했다. 겸연쩍어 아들에게 던진 말일 게다. 남편도 떨어져 살면서 가정의 소중함이나 자신의 역할을 생각해보았는지도 모른다. 나도 남편에게 잘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현미경을 들이대고 단점 하나하나를 캤으면서 나에겐 정작 돋보기조차 대지 않은 세월이었다.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니 비로소 내 허물이 보였다. 남편의 허물이 곧 내 허물이었다.
    산은 성경이었고 불경이었다. 말은 없으되 많은 말로 우리 부부의 마음을 교화시켰다. 산과의 대화는 신과의 교감이었다. 이젠 가족과 산을 오를 때가 행복하다. 가정이란 퍼즐 조각이 제 멋대로 흩어져 있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소중한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았다. 행복은 스스로 추구하는 자의 몫일 것인데 곁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멀리서 찾으려 애썼다는 걸 새삼 느꼈다.
    산은 덧셈법칙이 적용된다. 나무에서 나오는 유익한 물질이며 맑은 공기, 새소리는 자연의 음향이며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유산소운동이며 마음공부이다. 땅의 기운과 천기를 받아 심신이 맑아진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도 산에 올라 세속의 때를 씻고 도량을 넓혔다. 산은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자랑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군자의 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산을 좋아하고 산을 닮으려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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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

  • 깨달음의 산, 충남 가야산 / 지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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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예산에 가야산이 있다. 덕산도립공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산으로 깨달음의 산이기도 하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역사 현장인 동시에, 풍수지리학이 보고인 남연군 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산자락 안으로 짓쳐든다. 산의 정기가 흐르는 계류를 막아 축조한 옥계저수지가 차창 밖으로 스친다. 치산치수의 결정체라 그럴까. 유난히 맑고 푸른 물빛에 마음마저 푸르러지면서 이내 상가리에 당도한다.
     산의 형세를 얼핏 가늠한다. 석문봉을 중심으로 左로는 가야봉이, 右로는 옥양봉이 병풍을 두른 듯 웅장한 기세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중첩된 산자락을 향해 품안으로 든다. 길은 두 갈래, 옥양봉 가는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접어드니 우측 구릉의 끝 지점에 조금 높은 단이 쌓여져 있다.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알려져 있는 남연군의 묘다.
     남연군 이 구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다. 몰락한 왕족으로 자신의 목숨조차도 제대로 간수하기 어려웠던 대원군은 풍수지리설의 신봉자면서 야심가였다. 그래서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실권을 잡는 방법을 풍수에서 찾고자 했다. 어느 날,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대원군을 찾아왔다.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망설이지 않고 대원군은 가야산 자락의 이대천자지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대원군은 우선 가묘를 쓰기로 결정을 하고, 탑 뒤에 있던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린다. 그리하고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옮겼다. 그때가 1844년의 일이었다.
     1845년, 아흔아홉 개의 암자를 거느리던 가야사에 원인 모를 불이난다. 절은 소멸되고 탑이 부서졌다. 절을 지키던 승려들은 시체가 되어 연못에서 발견이 된다. 누가 가야사를 인위적으로 폐사시킨 것이다. 대원군은 탑이 있던 자리에다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관곽을 단단하게 다지고 부친의 묘를 썼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실제로 1869년(고종 5년), 통상 요구를 거절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에 그치기도 했다.
     이장의 효험이 가시화된 것일까. 대원군의 아들 이재황은 묘를 이장한 후 18년 되던 1863년 조선의 제26대 임금 고종으로 왕위에 오르고, 1897년 ‘대한제국’의 광무황제로 즉위한다. 그 뒤 대원군의 손자인 순종 또한 융희황제에 오르니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1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 속에 묻힌 가야사의 흔적과 숨겨진 비화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야사지가 있었던 남연군 묘 주변은 대부분이 개간되어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사위를 휘 둘러본다. 가람을 추측하여 판정할 만한 유구(遺構)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눈을 감고 땅에다 귀를 기울인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승려들의 비명 소리가 금방이라도 땅을 뚫고 새어 나올 것만 같다. 그들은 아직도 편히 눈을 감지는 못했으리라.
     세월에 밀려가는 바람의 흔적들 사이로 기와조각과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재가 흩어져 있다. 명당이란 무엇일까.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둔 좋은 집터나 묏자리를 의미한다지만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 되어야할까. 명당 중의 명당이란 효험에 대원군의 아들과 손자는 왕과 황제로 등극을 하였지만, 명당에 의해 수혜 받아야 할 대상은 개인과 국가 중 어느 쪽일까.
     피를 뿌린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얻었던 묘의 기운이, 주변 열강의 구도를 재편하였던 건 아닐까. 두 명의 황제를 내었지만 그것이 조선의 국권을 일본에게 찬탈당하는 빌미가 되었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할 것인가. 일본의 오랜 책략과 의도대로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종과 순종황제 제위 14년 만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일본천황의 조서로 고종황제는 태왕으로, 순종황제는 이왕으로 격하된다. ‘이왕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강요당했고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인 왕과 공으로 편성해 일본 국내성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왕족의 신분으로서 사욕에 얽매어 인명을 해하면서까지 권력을 재편하려 했던 과욕이 문제였다. 우리 민족에게는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오욕의 상처를 주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비극적 행위들이 나라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근래에 이곳 주변에 관심을 끌 만한 일이 하나 생겼다. 남연군 묘에서 상가저수지 우측으로 400여 미터 오르다 보면, 옥양봉 지능선 쪽으로 새로운 묘지가 생긴 것이다. 『터』의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풍수지리학의 대가 S의 묘다.
     그는 죽어서 무엇을 얻으려고 남연군 묘 위쪽에 묻히길 원했을까. 그 내막을 죽은 S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묻힌 곳이 덕산도립공원 내 가야산 자락이고 보면, 그는 죽어서도 후손에게 나라의 법을 어기도록 사주한 조상이 되는 셈이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을 죽어서도 그 끝이 없음이 안타깝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행위라도 개인의 공명과 직계의 후손에게만 미치는 것이라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의 개념보다는 다수의 개념, 사회와 국가, 인류 전체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아닐까.
     석문봉 주변의 능선에 올라 옥양봉 지능선 아래를 내려다본다. 남연군의 묘도, S의 묘도 발아래 보이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풍수는 과연 어느 선까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하산 지점인 개심사에 당도한다. ‘마음을 여는 절’이라 그럴까. 남연군과 육관도사의 묘를 둘러보았을 때 어두워졌던 심사가 조금은 풀리고 열리는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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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

  • 벗, 벚나무 / 장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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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예산군 예산읍의 금오산. 금까마귀가 나타났다 하여 금오(金烏)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보다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가 첫 구절이 모두 금오산으로 시작했던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이제 4년이 다 지났다. 나의 모교, 예산고교는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금오산에 말이다. 포근한 산의 정기를 감싸고 맑은 공기를 내어주던 학교. 지금 도시에 있는 학교들은 생각지 못할 풍광이리라. 교목인 히말라야시다는 운동장을 감싸며 울타리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학교 뒤로 이어진 오솔길은 깊은 산과 연결되어 등산객들의 발길을 재촉한다. 입시에 치열했던 우리와는 전혀 달랐던 학교. 무한 경쟁 속에 하루하루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우리 학교는, 세월에 가장 무덤덤한 숲과 산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을까. 집이 가까워 나는 저녁을 곧잘 집에서 먹곤 했다. 어김없이 저녁을 먹고 야간자율학습을 하러 나섰다. 그런데 배가 어찌 그리 아픈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화장실에서 씨름을 하고 밖에 나오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학교에 오르는 길은 가파른 언덕이다. 산 중턱을 깎아 학교를 세웠고, 오르는 길은 마치 협곡과 같다. 그나마 언덕길보다 빠른 계단이 있지만, 아찔한 그 수십 개의 돌계단은 아무리 건강한 고등학생일지라도 숨을 헐떡이게 만든다. 대부분의 지각생들은 언덕 핑계를 대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은 핑계를 댈 마음도 없었다. 그저 기왕 늦은 김에 천천히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학교에 오르고 교실에 들어가려던 찰나. 학교 뒤편에서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다. 어지럼증일까, 아니면 꿀밤을 맞아 별이 보이는 것일까. 주황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그 무언가를 따라 발길을 틀었다. 다가갈수록 더 반짝이며 손짓을 하는 광채. 그리고 알 수 없지만 달큼하며 알싸한 향내. 발길이 닿은 내 머리 위엔 쏟아지는 가로수 빛을 받은 벚나무 한 그루가 온 몸을 가득 붉히며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아, 그날의 광경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세상 어떤 공연장의 빛이 이보다 더 찬란하며, 세상의 어떤 배우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까.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티를 채 벗지 못한 나를 비웃듯, 벚은 그렇게 나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세월의 뒷전에 선 나를 만났다. 찬란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에 서 있던 벚나무. 나무는 그렇게 어린 내 가슴을 적시고 포근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향내……. 그런데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과 향내 사이로 어둡고 축축한 무엇인가가 흘러 들어왔다. 너무 고약해서 코를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나무는 아직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마치지도 않았건만 눈을 번쩍 뜬 나. 그리고 그 뒤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
     “야! 니들 몇 학년이야?”
     그렇게 꿈결을 걷듯 흐르던 벚나무와의 발걸음 뒤로, 교무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 내가 우두커니 서 있던 벚나무 뒤편엔 담배를 피우던 학생들 2명이 숨어 있던 것이었다.
     “너도 담배 피웠냐? 1학년밖에 안 된 녀석들이…….”
     선생님의 꾸중과 학생들의 몇 마디 대답이 오고가고, 다행히도 나는 담배를 피웠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야간자율학습에 늦은 것에 대해선 혼쭐이 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아쉽게도 이후로는 자율학습에 늦을 일도, 가로등 밑 벚나무에 집중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쉴 틈 없이 다가오는 수능시험에 대한 압박감과, 모의고사, 내신을 위한 시험공부가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좋은 대학과 미래만을 바라보도록 최면을 걸었다.
     수능시험을 보기 좋게 망치고 나서야 대학과 미래에 대한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3년을 온전히 바라보았던 목표를 넘어 숨통을 틀 수 있게 된 것이다.
     졸업을 앞둔 한겨울 밤. 벚나무는 그렇게 다시 나를 불렀다. 1학년, 그 어린 마음의 때엔 온몸을 태워가며 찬란하게 나를 만나주었던 벚. 그러나 그도 한겨울에는 앙상한 가지에 눈꽃만 고이 안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보여주었던 세월의 뒷전에 선 내 모습은 동일하다는 것을. 3년간 숨 가쁘게 내가 달려올 때에도, 학교를 둘러싼 숲은, 벚은 그대로였다는 것을.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는 지금 예산에서 살며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리고 가끔 학교 옆을 지나곤 한다. 학교를 들어서는 교문도, 오르는 길도 더 정리가 잘 되었고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울타리가 되어 주던 히말라야시다도, 학교 뒤편의 오솔길도, 그리고 나를 불러주었던 벚나무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것들은 세월이 아무리 흐를지라도 변함없을 것이다. 아니 벚나무는 나와 같은 이들을 수십 년 전부터 이미 만나고 있었으리라. 학교는 오늘도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은 대학과 꿈, 미래를 향해서 쉴 틈 없이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흐르는 시간 앞에 자유로운, 변함없는 숲이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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