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마루(真田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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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대본)
출항
1582년(텐쇼 10년) 2월, 카이의 명문 다케다 가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다케다 신겐의 죽음으로부터 9년,
오다 노부나가가 침공해 온 것이다
오다 군의 선봉이
매복해있는 산기슭을
다케다 가를 섬기고 있는 한 젊은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겐지로 도련님
이 이상 나가시면 위험합니다!
모처럼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적에게 발견되면 큰일난다구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게 좋겠군!
도쿠가와 군이로군
이만 돌아가시죠
대장이 누구지? 유명한 자인가?
겐지로 도련님!
웬놈이냐!
실례했습니다
접시꽃 문장의 도쿠가와 군에게 쫓겨 도망치고 있는 이 젊은이는...
이로부터 33년 후, 오사카 여름의 공성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할복 직전까지 몰아간 일본 제일의 용사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나다 겐지로 노부시게
스와 우에하라 성
이 당시, 다케다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는
다케다 카츠요리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에 맞서
다케다 카츠요리
스와의 우에하라 성에서
농성을 준비하였다
(상당히 노부나가의 야망 맵스러운데
이거 코에이가 CG 지원해준거임)
북쪽에는 우에스기, 동쪽에는 호조,
서쪽에는 오다, 남쪽의 도쿠가와와 같은
유력한 다이묘들에게
포위되어
세력 만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카츠요리의 매제 키소 요시마사가
돌연 오다 군으로 배신하였다
노부나가는 이 기회를 틈타
군대를 불러모아 다케다를 침공했다
아나야마 님!
스루가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다케다 인척 필두
아나야마 바이세츠
다케다 인척 필두
아나야마 바이세츠
불안해하고 있는 그대들을 북돋아주고자
바로 돌아왔네
부탁하네, 바이세츠
주군, 마츠오 성의 오가사와라 노부레이도
오다 쪽으로 배신을 하였나이다
- 뭐라?
- 오가사와라가?
이런 은혜도 모르는 놈을 보았나!
인척
오야마다 노부시게
빨리 군사를 보내시어
오가사와라를 징벌하시지요!
주군,
주저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수석 가로
아토베 카츠스케
더 많은 배신자가 나오기 전에
일각이라도 빨리...
아니 되오! 지금은 일단
신푸 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오!
아나야마 님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다 군은 이미 텐류 강에서
완전히 밀어닥치고 있소이다
지금 당장 우리의 본거지인 신푸로
돌아가 아군을 재정비하는 것이 중요하옵니다
오다 군 앞에서
꼬리 빠지듯 도망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이 무능했다면
이런 일이 어찌 일어났겠는가!
- 뭐라고 하셨소이까?
- 그만들 두어라!
아와노카미,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황공하오나
아뢰겠사옵니다
다케다 가신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
여기서는 아나야마 님의 말씀대로
다케다 가신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
일단 신푸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겁먹은 것인가
아와노카미!
서쪽의 수비를 담당하던
키소 요시마사의 배신으로 인하여
우리 땅의 서쪽은 지금
완전히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겐자부로 노부유키
요시마사가 오다 군을 그냥 통과시켜 버리면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겐자부로 노부유키
우리 군은 완전히 무너져버리옵니다
지금은 일단 신푸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옵니다
때를 잘 판단하소서
지금은 돌아갈 때,
힘을 모아 기다리소서
키소는 어찌할텐가?
키소를 토벌하는 것은
그 후로 하시지요
그 때는 이 사나다 아와노카미가
선봉을 맡아
신겐공께 전수받은 군략을 이용하여
요시마사의 목을 가지고 오겠나이다
오가사와라의 모반은 뼈아픈 일이로군
이 이상 배신자가 더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만큼 결속력이 강했던
다케다의 가신들도
지금은 그림자 하나도
안 보이는구만
그것이 바로
신겐공께오서 위대하셨던 이유지요
아와노카미
비록 우리만이라도 주군을 지켜드려서
다케다 가를 위해 온 힘을 다 해야 할 것일세
물론입니다
지금이 고비일세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사나다 마사유키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벌어지던 때,
적은 병력으로
신슈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3만 8천의 도쿠가와 군을 농락하였던
전국시대의 으뜸가는 명장이다
그러나 이 당시 마사유키는
그저 다케다 가의 평범한 가신에 지나지 않았다
- 겐자부로
- 예
너는 먼저 신푸로 돌아가 있거라
알겠습니다
서쪽도 큰일이지만
남쪽도 걱정이로구나
슬슬 도쿠가와가 스루가구치에서
군대를 몰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정보를 탐망하고 있겠습니다
이 시기,
사나다 마사유키의 가족들은
다케다의 본거지인
카이의 신푸에 살고 있었다
카이 신푸 성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가신의 배신을 방지하고자
가신의 가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
거주케 하였던 것이다
즉, 인질이었던 것이다
조심해라 모두 비싼 물건이다
살살 살살, 빨리
살살, 조심하고
노부시게의 어머니
카오루
그건 교토의 고노에 님께 받은 귀중한 우치카케(겉옷)이다
- 더욱 조심해서 다루도록!
- 네
왜 그러느냐?
노부시게의 할머니
토리
들으니, 오다 노부나가라는 자가
어느 정도로 막강한 거에요?
큰 소리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일본 중에서 가장 강대하지 않나 싶어
노부시게의 누나
마츠
다케다보다 더 강해요?
노부시게의 누나
마츠
그렇지 나가시노에서
천하의 다케다 기마대를 완전히
쳐부숴버렸으니까
그럼 이제부터 다케다 가는
어떻게 되는거에요?
- 그러게 어떻게 될까
- 오케하자마의 이마가와처럼 같은 꼴이 되나요?
마츠의 남편
오야마다 시게마사
주군은 신겐공의 훌륭한 후계자이셔
그래도 괜찮아질거라 생각해
걱정되네요
여기는 뭐니뭐니해도 장인어른께서
계시는 곳이니까
매형, 누님
오셨어요
- 이게 누구야
- 겐지로
어때요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괜찮으세요?
덕분에 우리는 즐겁게 살고 있지
그렇죠?
누님은 일단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그런 말은 들을 만큼 많이 들었어
- 그것보다도 겐지로!
- 네
전투는 시작된거야?
- 저한테 그런거 물으면 곤란해요
-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
오다 노부나가한테 물어보시죠
걱정 마세요 누님
만약 전투가 시작되어도 여기는
아버님께서 주군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이라서
오다 군이 여기를 공격할 리 없어요
- 그렇죠 매형?
- 응
- 내가 말했잖아 걱정 말라고
- 그러면 다행이겠지만요...
겐지로,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
뭔데요?
자네들 형제는 왜 장남이 겐자부로고
차남은 겐지로라고 부르는거야?
- 사실 저도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 그건 말이지
사나다 가는 대대로 장남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서
그걸 염려해서 장남에게 겐자부로란 이름을 쓴다고
아버님께서 말씀을...
- 전혀 몰랐었네
- 그럼 겐지로는?
겐자부로의 뒤부터는
일반적으로 겐시로라 부르지 않아?
- 그거는 얘가 차남이니까 겐지로라고 쓰셨던 거죠
- 복잡하네
아버님도 엉뚱한 부분이 있으신거죠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신경쓰지 못하시죠
그래도 전 그런 아버님이 좋습니다
제가 스루가로 잠입했을 때
아베카와 어귀에서 도쿠가와 군을 발견했습니다
도쿠가와가 국경에 다다르고 있으니
아마도 오다 군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한꺼번에 들이닥쳐 공격해오지 않을까요
이 곳의 형세를 들키지 않도록 잘 살핀다면
곧 적군도 흩어지겠지요
왜 그래요?
겐지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거냐?
누가 너보고 그런 위험한 곳에 갔다
오라고 허락을 했어?
제멋대로 굴지마!
형님은 다케다 가의 인질,
근데 나는 달라요
둘째인 나는 아무도 주목을 안 하니
원하는대로 오고 갈 수 있는거죠
그러니 그러한 나의 입장을
이용해서...
다케다 가의 존망이 걸린 전투가
곧 시작될 거다
한명 한명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수습이 될수가 없잖아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존망이 걸린 전투라면
앞서 선수를 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그건 사나다 가의 당주이신 아버님께서
생각하실 일이다
우리는 그저 아버님이 지도하신대로
따르면 돼
뭐야 그 표정은
제멋대로 혼자 행동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 하지만...
- "하지만" 붙이지 마
모두가 서쪽의 오다 군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남쪽의 사정도 걱정된 것이라구요
서쪽도 큰일이지만
남쪽도 걱정이로구나
남쪽이 걱정된다고 생각하냐?
네
그 말 곧 아버님께서 들으시게 되면
아버님께서 나보다도 더 화를 내실거다
그 전에 네 입으로 사죄를 하거라
나도 너와 같이 아버님께 사죄를 청하마
고맙습니다 형님
- 겐지로
- 예
여기가 고비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강적 오다와의 싸움이다!
옛!
사나다 가신
타카나시 나이키
사나다 가신
타카나시 나이키
문을 열어라! 나으리의 행렬이시다!
마사유키는 가족들과 한달 만에
만남을 가지게 된다
이야 모두들 건강해 보이는구만
- 시게마사
- 네
마츠가 내조를 잘 해주고 있나?
- 그거야 뭐...
- 더할 나위 없는 아내이지요
- 그렇죠?
- 그게 좋을 때지, 좋을 때
왜 그러나?
그 걱정스런 얼굴은?
모처럼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얼굴을
맞대는 와중인데
오늘 아침, 키소 요시마사 님의
어머님과 그 자녀들이 붙들려 갔습니다
아마 책형에 처해질 것 같습니다
(책형:십자가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
키소는 배신을 한 자 아닌가
어쩔 수 없는 게지
따님은 17살, 장남 센타로는 아직
13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인질은 원래 그러한 게요
나으리는 우리 역시도 인질인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 물론
- 괜찮은 것이겠지요?
- 나으리는 배반하지 않으실거지요?
- 바보같은 소리 마시게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절대로 주군을
배신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키소 요시마사의 배반은
뜻밖입니다
신겐공께는 사위이니
다케다 가의 인척이 아닙니까
말세로세
신겐공께오서 지하에서 통곡을 하실 것이야
그럼 다케다 가는 이제부터
어찌되는 것이옵니까?
- 안심하시게
- 오다 군이 정말로 이곳으로 쳐들어옵니까?
어머님께선 도망가시려고
짐을 꾸리고 계셨습니다
- 그것 참 빠르기도 하구나
- 웃을 일은 아닙니다!
확실히 지금 이곳은 오다 군이
세 방향에서 포위를 하고 있네
놈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다가
일제히 이곳으로 쳐들어올것일세
아직 말 안 끝났네
신푸성은 이 사나다 마사유키가
온갖 지혜를 짜내어 쌓아올린
천하제일의 성일세
이 신푸가 가장 안전한 장소인 것이야
어머님 제 말씀대로지 않습니까
나는 사나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이
- 할머님
- 이런 곳에서는 죽기 싫단 말이다
그렇다면 아버님께서 방금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여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구요
뭐?
여기에 계시면 아무 일 없다구요!
뭐?
할머님 억지부리시지 마세요
왜 그러세요
- 뭐가 억지라는게야...
- 할머님께서는 모든걸 진작 다 아시고
안 들리는 척 떼를 쓰셨던거라고
그렇죠?
걱정 마세요
이 사나다 아와노카미가 있는 한
다케다가 멸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다케다는 멸망할 것이다
네?!
물론 마지막까지 다케다를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계가 보인다
그 정도로 오다의 세력이 강대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강해
나가시노때부터 비교할 수가 없어
겐지로
아버님, 사실은 제가 제멋대로
남쪽의 동향을 몰래 살피고 왔었습니다
이런 과한 행동을 저질렀으니
부디 용서해 주소서
하지만 그 덕분에 도쿠가와 군의 움직임을
빨리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부디 겐지로를 용서하여 주시길 청하옵니다
- 말씀올리거라
- 제가 본 바로는 도쿠가와 군이...
되었다
- 흥미 없구나
- 저, 하지만...
난 이 성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네?!
이곳에서는 앞이 보이지가 않아
하지만 여기는 천하에 이름난 성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그러더냐?
아버님께서...
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완성시키기엔 일러
오다 군이 너무나 빨리 공격해오고 있어
- 허나...
- 신푸를 넘겨주면 그 뒤는 어찌됩니까?
- 나에게 계책이 있다
- 계책이요?
겐자부로, 겐지로 잘 듣거라
이건 우리 사나다 가에 있어서
일찍이 없던 위기다
장기말을 잘못 두는 순간
우리 사나다는 멸하게 된다
그 고난을 우리가 한데 단결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뚫고 나아가야 한다
명심들 하거라
- 옛!
- 넷!
가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있지
너무나 기량이 크셔서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때가 있어
우리는 당주의 명에 따를 뿐이지요
아버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틀림없을 거에요
그런가...
- 그럼요
-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 산주로? 잘 알고 왔구나
- 너무하세요 저한테 아무 말 안하시고
이 녀석 가끔 사람 짜증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사나다 가신
야자와 산주로 요리유키
겐지로 도련님이 계신 곳에
이 산주로도 있습니다!
사나다 가신
야자와 산주로 요리유키
눈을 한시도 떼지 말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산주로
- 예
너 역시도 사나다 가의 일원으로서
지금 이 풍경 눈에 단단히 박아두어라
아무래도 이 풍경을 즐길 마지막인 듯 싶구나
저기 좀 봐
만약 아버님께오서 이 세상에 계셨다면
이런 때에 어찌하셨을꼬...
그래
아버님께오선 이렇게까지 밀리시지도 않았겠지
바보같은 질문이구나
아버님께서 세우시고 닦아놓으신 이 카이 국을
내가 멸해 버리는 것인가
염려하지 마소서
주군은 신겐공의 영령께오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노부나가놈의 목을 베어
도쿠가와, 호조, 우에스기가 발밑에
무릎을 꿇고 빌 날도
곧 멀지 않았사옵니다
그렇지 않은가 사나다 공
주군의 곁에는
저희 가신들이 있사옵니다
그런가
후지산과 아사마산이 용암을 내뿜지 않는 한
다케다 가는 안녕하기 그지 없을 것이옵니다
2월 14일, 48년 만에 아사마산이
분화하였다
저건 화산이니까 그저 불을 뿜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버님!
- 큰일났습니다!
- 나으리! 아나야마 바이세츠가 배반하여
도쿠가와 군이 다케다의 영내로
쳐들어오고 있다 합니다
뭐라?!
아나야마 바이세츠가 갑자기
오다군에 내응, 배반하였다
꽤 오래 전부터 오다, 도쿠가와와
내통을 해온 그는
용의주도하게 배신해버린 것이다
어느새 여기까지라니!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다케다 가문 인척의
우두머리이거늘
그런 자가 배신을 했다는 것은
아군의 병력수, 배치, 전략
그 모든 것을 적에게 갖다 바친것이 아니오이까!
이제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이렇게 된 이상, 신푸에서 농성하여
적을 맞아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아니 되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정도라면
차라리 장렬하게 전장에서 죽는 것이 맞을 것이오!
전군에게 오다 군을 맞아 싸우라는 영을
내려주소서!
이것이 명예로운 다케다의 싸움이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이 싸움, 졌다고 결정났다 말할 수는 없사옵니다
- 이미 명운은 다 했네!
- 아직 다하지 않았소이다!
다케다의 대들보가 적의 손으로 넘어갔거늘
그 대들보, 아직 하나 더 남았소이다
주군
반드시 제 이와비츠 성으로 가시길 청하옵니다
이와비츠 성?
- 카이를 떠나라는 말씀이오?
- 그렇소
이 신푸 성, 지은 지 고작 1년이오
성내의 수비가 반석과 같이 견고하다 볼 수 없소
성에서 농성을 하는 것은 좋은 책략이라 할 수 없소
그러니까 내가 성에서 나가 적을 맞아
싸우자고 하지 않았는가!
무모한 수올시다!
오야마다 공은 다케다 가를 멸망의 길로 이끄려는 것이오?
우리의 기마대를 적군으로 돌진한다면
활로가 트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활로는 그런 방법으로 트이지 않소이다
목숨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자에게
길은 열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비츠 성의 수비는 이 마사유키가 이미
단단히 정비하여 철벽과도 같사옵니다
거기에 동쪽의 누마타 성은
제 아우 노부타다가 지키고 있고
서쪽의 토이시 성은 제 장남
노부유키로 하여금 지키라 명하였으니
이와 같이 시나노와 코즈케를 잇는 도로와
함께 묶는다면
거대한 요새가 되옵니다
주군, 부디 이와비츠로 행차하소서
그리고 힘을 길러 재기를 도모하소서
이 사나다 아와노카미가 있는 한
다케다는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알겠네
이와비츠로 가겠네
이와비츠 성은 신푸 성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코즈케 국 아가츠마 군 소재의 산성이다
신슈(시나노)에서 조슈(코즈케)까지 펼쳐진
사나다 영지의 요새이기도 했다
마사유키는 카츠요리를 영접하고자
먼저 이와비츠로 떠났다
- 겐자부로, 주군을 부탁한다
- 명 받들겠습니다
이와비츠에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겠다
겐지로, 형을 잘 도와다오
명 따르겠습니다
역시 이와비츠가 오다에 맞서 싸우기에는
최적의 성,
여기보다 훨씬 낫지요
과연 아버님이시다
주군,
이와비츠 성으로 가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이제와서 무슨 말인가!
이와비츠는 위험한 곳이옵니다
사나다가 다케다의 가신이 되었다 하나,
섬긴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사나다가 믿어도 좋은 사람인지
아직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나다가 나를 속였다는 것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옵니다
게다가 사나다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까지 있습니다
분명히 배신하여...
- 호조와 내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설마...
서신을 서로 주고받고 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주군, 차라리 제 이와도노 성으로
모시고 싶사옵니다
이와도노?
서쪽에는 사사코 고개가, 북쪽과 남쪽에는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해의 요새로서
오다의 군대를 맞아 싸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 생각하옵니다
이것이 가신들의 모아진 총의이옵니다
주군께오서는 카이 국의 주인
신겐공의 위광이 남아있는 이 카이의 땅을
그렇게 쉽사리 버리시고 난 후
조슈의 산에서 틀어박혀 계신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사옵니다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신다면은
돌아가신 주군의 아버님 신겐공께오서
어찌 이를 기쁘게 생각하시겠나이까
(뽀대나는 다케다 신겐의 갑옷)
- 형님 차례요
- 겐지로 됐다
- 뭐요?
- 지금이 놀 때냐?
다음은 언제 놀지 모르니
지금 이렇게 놀고 있는 거지요
그럼 적어도 이런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는 하지 마
정말로 장기를 두던가
하지만 형님은 장기 두는 것도
좋아하지 않잖아요
- 뭐야 그거는
- 형님의 수법은 너무 정직해서
뭐라 그래야 하나...
그냥 재미가 없어요
넌 나한테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는거냐?
이런 놀이도 바보는 할 수 없거든요
형님이 자신있어하는 장기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의외로 이것도 심오한 거라구요
- 항복하시죠?
- 까불지 마!
이런 산 무너뜨리기 놀이에도
정석 수법이 있지
그럼 처음엔 무리하지 않고...
누구냐!
주군...
나는 내일 여길 떠난다
저희들도 주군을 따라 모시겠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이와도노 성이지,
이와비츠 성이 아니다
이와도노...
어찌된 일이온지요?
나는 카이를 버릴 수가 없네
아버님께서 세우신 이 카이를
하오나...
마사유키에게는 안되었구나
내일 나는 떠난다
하지만 너희들은 굳이 나를 따라올
필요는 없다
이와비츠로 가거라
오늘밤으로 다케다 가의 인질 모두를 사면한다
내일부터 너희들은 자유다
저, 허나...
증명서다
도중, 오다군과 맞딱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내 수하 100명을 너희들에게 호위병으로 따라붙여주마
적어서 미안하구나
이런 분에 넘치는 것들을 받아도
되는 것이옵니까...
그리고 너희들에게
누이가 있었지?
예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가문으로 시집을 갔었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자네들의 누이도 같이
이와비츠로 데리고 가도록 하게
하지만 누이는 오야마다 님의 인질입니다
사나다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내가 결정한 일이다
누구도 아무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이다
내일 나의 수하들이 이곳으로 오면,
이곳에 불을 지를 것이다
너희들도 어서 떠나도록 하거라
알겠사옵니다
다케다를 생각하는 아와노카미의 충언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래서 그대들의 누이를 사나다 가로 돌려보내는 것도
그를 증명하는 것이다
주군의 도타운 마음쓰심에 망극하기
그지 없사옵니다
그럼...
- 주군!
- 겐지로!
신겐공께오서는 이미 이 세상에
아니계십니다!
- 겐지로, 무례하구나!
-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이와비츠 성으로 저희와 함께 같이 가주십시오!
나는 방해만 될 뿐이다
주군!
저희들이 주군을 배웅해드리고 싶사옵니다
주군의 그 100명 수하도 부디
이와도노로 데리고 가십시오
- 필요없다고 했는가?
- 아닙니다
주군께선 사나다 가의 기치
살아남으시어 일어서시는 것이
바로 사나다 재기의 길이옵니다
주군의 호위병을 줄이는 것은
저희의 뜻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정녕 너희들 만으로도 괜찮겠는가?
사나다 아와노카미의 아들들인 저희 형제,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일까지
크게 신경쓰지 마십시오
사나다...
훌륭한 가문이로고
주군께서는 따뜻하고 자상한 분이시네
자상하시죠 그리고...
슬픈 분이시죠
- 주군께서 이와비츠로 향하셨어야 했어...
- 또 되풀이하지마
이와도노에서는 오다 군이 공격하면
그걸로 끝장이에요
돌아가신 신겐공께 의리를 지키면
- 뭐가 되긴 하냐구요
- 그만하라니까
형님도 알고 있었죠?
사스케!
주군께선 신겐공의 위광을,
다케다 가의 명예를 지키는 길을 선택하신 거야
그런 것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지
아하! 그럼 이제 신푸는 어떻게 되는 걸까나
아버님이 1년에 걸쳐 드디어 성을
완공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게 다 재로 변하는게 아니야
부르셨습니까?
이것을 이와비츠 성의 아버님께 전해라
사스케
-네
-사스케, 건강했었느냐?
네, 새로운 무술을 또 배우고 싶습니다
- 서둘러라
- 넷!
아버님도 분명히 놀라실 일이겠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같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부터 듣자
아까 주군께서 친히 여기를 방문해주셔서
- 저희를 인질에서 사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에에?!
어머님, 축하드립니다!
- 그게 정말이냐?
- 정말입니다
누님도 저희와 같이 돌아갈 것입니다
- 세상에!
- 오다 군이 공격해 온 덕분이지요
나쁜 소식은?
내일 신푸를 떠나 이와비츠로 가서
아버님과 합류할 것입니다
- 이와비츠에?
- 우리 가족들만 갑니다
어디에 오다 군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곳곳에 산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도 낙오 무사를 습격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낙오된 무사가 아니지 않느냐!
이러다보니 다케다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즐거운 여정은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 싫구나
- 어머님
- 그렇다면 난 이곳에 남겠다!
- 그건 안됩니다
좀 따뜻해지고 난 뒤에 움직이면 안되겠느냐!
내일 이 신푸 성을 불태워 버린다고 합니다
- 어째서?
- 오다 군이 성을 뺏으면 안되니깐 그렇지
여기도 이제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이 확 울적해버렸네요
자, 짐 꾸리자!
괜찮아요 어머님
뭐라 그래야지...
형님도 있고 저도 있고
아버님 만나실 때까지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 부탁한다
- 얼마 안있으면 우리 가족 다시 다 뭉칠거에요 어머님
경솔히 떠맡는 것도 정도가 있다
- 정성을 다 하면 통한다 잖아요
- 몰래 얘기하지마!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3월 3일,
카츠요리는 신푸 성에서 출발하여
이와도노 성으로 향했다
왜요? 왜 나는 같이 못가는 거에요?
나도 몰라,
주군께서 그렇게 명하셨다고 하니
- 또 보게 될거에요
- 모두들 어때?
모두 이와비츠로 출발해서
아버님이랑 그곳에서 만날 겁니다
그런 후에는 아마도
모두 사나다의 본향으로 가겠죠
이와도노가 안정되면
그때 갈게
짧은 기간이지만 잘 참아주고
매형, 서둘러야 합니다
그럼, 가겠네
자 우리도 떠나죠
제군들!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서둘러라!
그건 두고!
- 곧 출발할 것이다! 서둘러라!
- 네!
어머님 시간이 없어요
모두들 기다린다구요
시간이 없다, 대충 싸서 가지고 가자꾸나
늦으시네요
주군께서 이미 성을 빠져나가신걸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우리가 출발이 늦어지면 더 위험해진다는 것을
어머님은 알고 계시긴 한건가
겐지로는?
그 날 아침을 지나서야,
사나다 일가는 신푸를 떠났다
이제부터 이와비츠까지
모두가 적이나 도적들 뿐이다
서두르죠
신푸에서 이와비츠까지는 37리
(37리: 약 145km)
걸어서 약 사흘 정도 걸리는 여정이다
(37리: 약 145km)
저건...
신푸 성이 불타고 있었다
다케다의 새로운 본거지가 될 성이었다
카츠요리가 이 성에서 머문지는 불과
달포밖에 되지 않았다
스와의 타카시마 성이 이미 함락당했다고 합니다
타카시마 마저...
이 와중에 탈영병이 끊이질 않아
신푸를 떠날 때 600명 정도였던 병력이
곧 백 명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주군, 저 고개만 남으면 바로 이와도노입니다
- 음
- 여기서부턴 길이 험해집니다
주군께선 천천히 조심해서 넘으십시오
- 전 먼저 가서 주군을 맞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 부탁하오
- 가자!
- 옛!
- 시게마사
- 예
문을 닫게
네?
주군을 통과시켜서는 안되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 관문을 넘으면 곧 이와도노 성입니다
주군의 행렬이시다!
문을 열라!
어찌된건가? 오야마다 공과 함께
이와도노로 갔던 일행이 아닌가
어서 열지 못할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뭐라?
소장의 상관이신
오야마다 노부시게,
오다 군으로 투항을 하셨습니다!
정신이 어떻게 되었는가!
단 한명도 이곳을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부디 물러가 주소서!
어디로 가란 말인가?
신푸는 이미 불타 없어졌거늘!
통과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 네 이놈 오야마다 노부시게!
- 그만두어라!
주군!
그만 됐어...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디로 가옵니까?
나도 모르이...
카이의 명문 다케다 가의 운명이
다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곧 역사는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이, 시나노, 코즈케를 무대로
전국시대 다이묘들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격동의 1582년(텐쇼 10년)이 시작된 것이다
주군, 엣추로 쳐들어오던 오다 군이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
우오즈 성에 다다르고 있다 합니다
그 수는 4만이라 하옵니다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
적의 대장은 시바타 카츠이에, 삿사 나리마사,
마에다 토시이에라고 합니다
이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포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군, 이제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북쪽에는 명장 우에스기 켄신을 이은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가츠,
우에스기 카게카츠
북쪽에는 명장 우에스기 켄신을 이은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가츠,
사가미 오다와라 성
동쪽에는 희대의 영웅 호조 소운으로부터
4대를 이어온 사가미의 호조 우지마사,
호조 우지마사
아뢰옵니다! 다케다 카츠요리 공,
스루가 국경 도쿠가와 진영
신푸로부터 도망쳐나온것 같사옵니다!
스루가 국경 도쿠가와 진영
남쪽에는 얼마 안있어 사나다 가의 최대의 적이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우미 아즈치 성
그리고 사상 최대의 광대한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
천하인이라고 불리우던 오다 노부나가가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천하인이라고 불리우던 오다 노부나가가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이 당시 사나다의 사람들은
작지만 서로 뭉쳐 조금씩 이와비츠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가의 다이묘가 되어
시나노 마츠시로 번 10만석의 기초를 쌓은
겐자부로 노부유키
그리고, 후대에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겐지로 노부시게
- 형님
- 뛰자꾸나
- 뛰세요
- 이제 뛰어야 하나 봐요
- 가자!
- 오옷!
전국시대라는 대해에
한 작은 배가 떠오르고 있었다
배의 이름은 "사나다마루"
파란만장한 출항이었다
제 1 회
출항
끝
다음 이야기
다음 이야기
- 겐지로!
- 누님!
주... 주군
저에게 무슨 분부가 계시옵니까?
- 아버지는 이미...
- 어린아이는 닥치거라!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군
난 사나다의 움직임을 전부 훤히 알고 있다
도고쿠의 패자는
우리 호조이니라!
약자를 도와 강자를 물리치는 것이
우리 우에스기가의 가풍이오
도쿠가와는 아직인가?
사나다는 어디에 있나? 사나다는!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이놈!
무얼 한거냐! 무얼 한게야!
사스케?
- 오랜만이다
- 절 구하러 와주셨군요!
- 겐지로!
- 겐지로 도련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아버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다케다가 멸망한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어떠한 수단을 가리지 말고
사나다 가를 지켜야 한다
도박이 시작되었도다!
>
http://amities.tistory.com/m/3232
「사나다마루」최종회를 완성한 미타니 코키를 직격 인터뷰. 구상을 바꾼 것은 "그 사람"
대하드라마「사나다마루」가 12월 18일(일) 방송으로 최종회를 맞는다. 각본의 미타니 코키는「신센구미!」('04년)이후 12년 만에 담당한 대하드라마에서 사카이 마사토가 연기한 주인공·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등 등장 인물들을 "생생"하게 움직였다.
그런 미타니에게 최종회를 완성한 감상이나 집필 중의 에피소드, 주인공 유키무라에게 담은 마음 등을 직격. 그리고 미타니 자신의 "의도를 뛰어넘었다"라는 한 등장 인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ㅡ 일단 최종회를 완성한 솔직한 감상을 들려주세요.
언제 다 썼는지는 기업 비밀인데요, 예년에 비하면 꽤 늦었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다 썼다고 해서 뭔가가 끝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각본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므로 최종회 방송이 끝나고 나서 어떻게 느끼는지 라고 생각해요.
우연이지만 최종회를 쓴 직후 10분 후 정도에 사카이 상에게 연락이 왔어요. 사실 사카이 상은 우리 집 근방의 마사지샵에 다니고 있어서 그에게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근처 찻집에서 선물을 건넸습니다.
탈고한 날도 "마사지샵에 와있으니까 차라도 마시는 건 어때요?"라고 해서 저도 "이건 만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해서 사카이 상과 둘이서 커피로 건배를 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기뻤어요.
ㅡ 작품 전체를 통해 유키무라 자신도 포함하여 "패자"나 "위대한 아버지를 둔 2대째"라는 캐릭터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들을 집중 조명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세요.
대학 시절에 무대「아마데우스」를 보고 거기에 나오는 궁정 작곡가 살리에리가 정말 좋아졌어요. 그는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져버렸다는 남자인데 그 자신은 "나는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들의 수호신이 되겠다" 같은 것을 말해요. 물론 살리에리도 굉장한 작곡가이긴 하지만 당시의 저는 앞으로의 인생이 불안투성이로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갖고 있기도 해서, 살리에리의 말에 매우 격려를 받았어요.
이번에 사나다 노부시게를 그릴 때, 노부시게는 어떤 인물인가 생각하니 그는 결코 인생의 승자가 아니라 모든 패배자들의 대표인 것처럼 생각돼서. 동시에 그는 위대한 아버지를 가지고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계속 발버둥질쳤던 사람들의 대표이기도 해. 그렇다면 그걸 전면에 묘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전국 시대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패배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타케다 가츠요리(히라 타케히로)도 내게는 영웅이고, 이시다 미츠나리(야마모토 코지)가 중반의 주역이 된 것도 필연이었다고 생각하고, 도요토미 히데츠구(니이로 신야)의 파멸을 정중하게 그린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고 싶은 일이긴 했어요.
ㅡ 그런 시선으로 전국 시대를 그리는 가운데 보다 입장이 약한 여성들도 매력적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그녀들을 그리면서 의식한 것은 있나요?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 정했던 것이 있습니다.
키리(나가사와 마사미)도 그렇지만 당시의 여성은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누구의 딸"이나 "누구의 아내" 혹은 "어머니"...그러면 그녀들을 그리는 측도 그 역할에 매여서, 또는 역할에 따라서밖에 그릴 수 없다는 사태에 빠지기 쉬워요.
하지만 그들도 실제로 살아있던 인간인 이상 "역할"이 아니라 "역"으로서 캐릭터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그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캐릭터화를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녀들을 "○○의 ××"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것은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남성보다 여성 쪽이 캐릭터가 짙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ㅡ 아테가키(각본가가 연기할 배우를 정해놓고 쓰는 것)가 많은 것도 미타니 상 각본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의미에서 미타니 상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사람은 있었습니까?
배우가 연기함에 따라 가장 성장했다고 생각한 역은 오코우(나가노 사토미)와 혼다 마사노부(콘도 마사오미)네요.
병약했던 오코우 상은 사실은 노부유키(오오이즈미 요)가 이나(요시다 요)와 결혼한 무렵부터 페이드 아웃하려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그것이 나가노 상의 연기가 저에게 무척 잘 맞아 캐릭터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을 깨달아서.
'반대로 정실 자리에서 떠난 뒤에 건강해지는 것은 어떨까. 그 나가노 상이 보고 싶어'라고 생각해서 끝내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요.
혼다 마사노부는 제가 좋아하는 무장이지만 콘도 상이 연기함으로써 매우 인간미, 깊이가 나와서 콘도 상의 대사를 쓰는 것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었어요. 점점 이미지가 부풀어져갔습니다.
마사노부는 나쁜 이미지도 있지만 키라 코즈케노스케처럼 실은 그런 사람일수록 현지에서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영주로서의 자세가 어딘가에서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영향을 주고 그 노부유키가 후에 시나노 마츠시로 번의 초석을 쌓아간다... 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최종회에 어느 장면을 포함시켰습니다.
ㅡ 돌이켜보면 제40회에서 노부시게가 "유키무라"로 이름을 바꾼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전 취재에서는「가능한 한 역사적 사실에 따라 그린다는 표명으로서 "노부시게"라는 이름을 쓴다」라고 설명했는데, 제비를 뽑아 새로운 이름을 정하는 아이디어는 언제쯤 떠오른 건가요?
기본적으로는 우리의 사나다 노부시게는 마지막까지 노부시게예요. 다만 마지막 오사카 전투에서 싸울 때만 어느 종류의 예명처럼 "유키무라"라고 자칭했다. 그것은 역시「사나다 유키무라」팬분들에 대한 서비스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노부시게」와 전설의「유키무라」가 그 순간 합체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형이 버린 "유키(幸)"의 글자를 계승함으로써 그의 각오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었고요.
"幸"의 출처는 바로 정해졌는데 "村"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것을 고민했네요. 제비뽑기로 한 것은 아시다시피 아버지 마사유키(쿠사카리 마사오)대부터 이어진 사나다가 전통의 "중요한 때 신의 가호를 바라기". 작중의 마츠(기무라 요시노)의 별칭 무라마츠 도노에게서 따오겠다는 방안도 있었지만 드라마 속에서 무라마츠 도노라고 부르지 않았고요.
거기에서 제비 뽑기라면 우연히 "村"를 뽑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다이스케(우라가미 세이슈)가 "村"까지 추첨 상자에 넣어 버린 것도 귀엽네 라든지. 그렇게 탄생한 아이디어네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九"를 뽑을 가능성도 있던 것으로.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설정이에요.
ㅡ SNS에서의 반향, 일본 각지에서 이벤트 등도 큰 열기를 보였는데 어떻게 느끼셨나요?
극단 시절부터 공연의 앙케이트는 읽지 않도록 하고 있어서. 하나라도 나쁜 평가를 들으면 그것밖에 머리에 남지 않으니까. 그래서 SNS는 가급적 보지 않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블로그 등에서 제대로 분석해서 적어 주시는 분들도 있어서 그러한 것은 가끔 보고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쿄에서 계속 쓰고 있었으므로 현지의 열기는 직접 느낀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벤트가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나오에 카네츠구 역의 무라카미 신고 상도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데 토크쇼를 하는 타입은 아니죠^^ 그런데도 여러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 신기해서. 하지만 너무 고맙더군요. 여러분께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ㅡ 개그 요소도 많은 작품이었는데 특히 성공했다는 장면, 대사는 있나요?
제1회가 방송되었을 때 (마사유키가 "아사마 산이 분화라도 하지 않는 한 타케다 집안은 망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직후에) 아사마 산이 분화했다는 장면에서 기분 탓인지 창밖에서 와 하는 웃음 소리가 들리던 것 같았어요.
"아, 지금 전 일본 국민이 웃었다"라고 느꼈어요. 물론「사나다마루」는 코미디는 아니지만 개그 요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어. 그도 그럴 것이 대하드라마는 일요일 밤의 엔터테이먼트예요. 조금이라도 즐겁게 있고 싶잖아요. 중요한 것은 웃음과 진지함의 밸런스. 그 분화 장면을 보았을 때 저는 "이번「사나다마루」의 터치는 이거야"라고 느꼈고, 거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ㅡ「사나다마루」는 작가 인생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할 것 같나요?
어떻게 시청자를 1년간 이끌고 갈지 설레는 마음을 지속시켜갈지를 계속 생각해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테크닉이 있을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포함해서 이「사나다마루」로 배울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자신을 기본적으로는 희극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고「사나다마루」는 다른 대하에 비하면 개그 요소가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개그만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것의 재미를 추구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실은 12년 전에「신센구미!」가 끝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요.
ㅡ「신센구미!」를 쓰실 때에 비해서 가장 큰 차이는 어디에 있나요?
저로서는「사나다마루」가 "이야기성"이 강한 이미지가 있네요.「신센구미!」는 거의 콘도 이사미의 마지막 5년 동안의 이야기로 그와 동료들의 시각에서 그려가면 됐는데, 이번에는 작중에서 그려지는 기간부터 크게 달랐습니다.
약 30년간의 이야기이고, 그동안 실은 노부시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므로 얼마나 이야기를 가지고 가느냐는 점에서 벽은 꽤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나름대로 국내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으면서 어쨌든 50편 질리게 하지 않는, 중간에 해이해지지 않는 작품을 만들자고 생각해서 공부했어요. 다 쓴 지금 뭔가 제 안에 그 축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ㅡ 다시 한번 대하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나요?
물론. 저는 정말 대하를 좋아해서, 대하를 보며 자랐다고 생각하므로 아직도 은혜 갚기엔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기회가 있으면 해보고 싶고 쓰고 싶은 인물이나 소재도 있습니다.
다만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은「신센구미!」나「사나다마루」나 제가 써서 봐주시는 분이 있는 한편, 제가 쓰니까 보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코미디를 쓰고 있는 것이나 저 자신의 캐릭터도 더불어, 보지도 않으면서「경박하고 콩트 같은 "코미디 대하"」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네요.
인간 드라마로서 제대로 만들고 있다는 자신이 있고, 이렇게 배우도 스태프 여러분도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저 때문에 작품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마는 것이 정말 죄송해요...그러니까 만약 다음에 할 때는 필명으로 하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완전 무명의 신인 작가가 갑자기 나타나서 엄청나게 재미있는 대하를 쓰면 저라고 생각해주세요^^
출처 쟈테레
미츠나리는 원래 33화 무렵에 퇴장할 예정이었지만 계속 연장돼서 37화까지 온 거라고 들었는데 그게 다 필연이었던 건가..
미타니 상은 살리에리를 좋아하고 같은 이유로 이시다 미츠나리도 좋아하는구나.
미츠나리가 병에 걸린 요시츠구를 대신해 편지를 대필하는 씬이 살리에리가 임종을 앞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대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감상을 본 적 있는데 나루호도~ 이렇게 연결되는군.
재미있는 건 야마모토 코지는 살리에리도 연기하고 이시다 미츠나리도 연기했다는 점이다.
둘 다 겁나 호평이었고. 역시 어딘가 코지군과 통하는 면이 있는걸까?
엄청나게 재미있는 대하를 쓰는 무명의 신인 작가를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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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mongthespirits.tistory.com/101
2015년 NHK 대하드라마 꽃 타오르다(花燃ゆ)는 완전 망했었다. 재미없기가 이렇게 없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일요일 저녁 시간에 볼 거 없으니까 그냥 기계적으로 NHK에 맞춰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니었을까..(-_-;;) 암튼 끝나서 다행..
그에 비해서 새로 시작된 2016년의 새로운 NHK대하사극은 첫회만 보았을 뿐이지만 매우 기대된다. 우선 흡입력이 있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 다음회차가 기다려진다는.
NHK 사나다마루의 홈페이지를 참고로 소개해보기로 한다. 사나다마루 홈페이지(일본어주의)
줄거리(홈페이지 줄거리 번역)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명장, 사나다 유키무라
본명은 사나다 겐지로노부시게(真田源次郎信繁)라고 한다.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하며 전국시대를 활보한 사나다 노부시게는 언제부터인가 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저도 두려워하게 되는 전설의 명장이 되었다.
사나다 유키무라의 전설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천재였던 아버지, 수재였던 형의 뒤를 쫓으며 고향 가족들과 함께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황하고 고민하고 괴로움을 견디며 성장해가는 가족을 사랑했던 차남 노부시게의 이야기.
오사카의 진(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를 멸망시킨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가 전국시대 최후이며 최강의 보루 "사나다마루(真田丸)를 만들어내기까지의 인생은 전국시대라는 거대한 풍파에 끊임없이 시달린 작은 가족배 사나다마루에서의 길고 긴 항해의 길이기도 했다.
기획의도
전국시대 중류층 가족 "사나다(真田)"가의 사랑과 서바이벌의 이야기
무로마치막부가 멸망하고 모든것이 백지로 돌아간 혼돈의 전국시대. 다이묘부터 그 땅의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데 필사적이었습니다. "재치", "지력", "체력", "통솔력" 그래고 "운"...타인과는 다른 무언가를 손에 넣은 자들만이 다음단계의 생존경쟁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시나노(信濃:현 나가노현)의 일개 영주에 불과하며 큰 힘을 갖지 못한 사나다가는 아버지 마사유키(昌幸)의 타고난 감과 전략에 기대 전국시대를 가까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성장해가는 노부유키와 노부시게. 형제끼리도 서로 죽이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전국시대에 그들은 결국 도요토미편과 도쿠가와편으로 갈라서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전국시대에 있어서 사나다 전설이 한층 매력적인 이유는 이 이야기가 가족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나날들을 통해 가족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궁지에 몰려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명장 사나다 노부시게가 성장해갑니다. 중류층 가문의 호기심많은 차남은 어느덧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도 위협하는 전설의 존재로...
"신선조!"에서 농락당하는 서민의 시선에서 막부를 그려낸 미타니 코키가 사나다 노부시게의 생애를 다이나믹하고 때로는 유머 넘치게 그려냅니다. 지금까지보다 더욱더 가까운 존재가 될 사나다 노부시게의 성장이야기를 1년간 함께 체험해주세요.
주요 등장인물
http://blog.naver.com/japansisa/220623654544
전국시대 인기무장 사나다 유키무라, 그리고 사나다마루 |
이미지 출처: http://www.sanada-jinja.com/yukimura/img/yukimura.gif
그럼 이번에 시작된 사나다마루의 주인공 사나다 유키무라가 누구인지 알아볼까요? 사나다 유키무라는 156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 다이묘가 된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으로 알려진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본명은 사나다 노부시게입니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져 일본의 패권을 두고 다툰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사나다 유키무라의 형인 사나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쿠가와가 이끄는 동군에 가세합니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와 부친인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가담합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3만 8천 명의 군세를 이끌고 사나다 유키무라가 지키고 있는 성을 공격하는데요. 사나다 유키무라는 고작 2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무려 1주일을 버텼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성도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서군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해,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적이었던 사나다 유키무라 부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형인 사나다 노부유키의 장인어른의 중재와 유능한 장수를 아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격으로 인해 목숨은 건지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http://indoor-mama.cocolog-nifty.com/turedure/images/2009/04/24/natunozinbyoubutokubetutenzi_2.jpg
그가 일본에서 존경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오사카 전투입니다. 1614년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관계가 악화되어 도요토미 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무유능한 무장들을 모집합니다. 이때 사나다 유키무라도 오사카성에 입성하게 됩니다. 오사카 성은 견고한 성이었지만, 대문 쪽이 약점으로 꼽혔는데,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나다마루’라는 성채를 건설하고 도쿠가와 측의 유능한 장수들을 차례로 격파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은 큰 피해를 입고 오사카 성에 화친을 제의합니다. 오사카 성은 전쟁에 부정적인 온건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사나다마루도 철거해버립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사나다마루가 없어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화친을 깨고 다시 쳐들어 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직속부대를 이끌고 도쿠가와 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무시무시한 용맹과 기발한 전략을 발휘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들어와 이에야스의 깃발을 쓰러트리는 등의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전세는 이미 도쿠가와 진영의 것이었고, 사나다 유키무라도 이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anadamaru.syuriken.jp/engetsu-379.jpg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유키무라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사나다야말로 일본 제일의 강자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역사에 의하면 온화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매사에 조용하고 화를 잘 내지 않았다는 인품을 가졌다고도 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도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적에게까지도 존경을 다하는 그 용맹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에까지도 그가 일본인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요? 매주 일요일 오후 8시에 방송되고 있는 사나다마루,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시청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대하드라마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의 인물이 등장한다면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1부)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V2pL&articleno=933
의외로 사나다 마루 검색 후에 제 서재를 방문하시는 분이 많군요. 네이버 블로그에도 옮길겸 오래 전에 정리했었던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전투 오사카성 공방전을 다시 옮겨옵니다.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의 최후가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를 즐길 분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에 스포가 있을 수 없는데, 스포라고 우기는 분들도 있어서 당부합니다.
일본 사극, 사나다 마루는 지금까지 완성도가 높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머리가 어설프게 분장한 티가 난 것을 제외하면요.
(이전 내용을 좀 다듬었습니다.)
이제 오사카 성으로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가 모두 정리됩니다. 두 번째 전투인 세키가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정리해두었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 어지러워져 전국의 영웅들이 군웅할거하던 전국시대는 오카사 동계, 하계 공방전을 끝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시대를 열면서 평화를 이어갑니다.
일본 전국시대 3대 영웅을 이렇게 표현하죠.
오다 노부나가 - 울지않는 새는 죽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지않는 새는 울게 만들어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지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논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댔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벼를 베어 탈곡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쌀로 낼름 떡을 해 먹었다... 라고요.
일본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쩌다가 운이 좋아 얼떨결에 지니의 요술램프를 집은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이에야스는 젊었을 때에는 패배를 모르는 대단한 무장이었다가 많은 위기를 넘기며 기구한 삶을 살다보니 나중에는 너구리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의 지략가(효웅)가 되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급사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본능사)에 친위부대없이 지내다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부터는 관대해졌다는 점에서 보면 누구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런 기회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모두 주어졌던 것이고 이에야스가 출중한 실력과 의지로 자신의 기회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다이묘와 달랐습니다.
젊은 때의 용장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음흉한 너구리 영감의 초상화입니다. 말년에는 너무 비만해서 갑옷도 제대로 못 입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호들갑이 심한 금수저 정도로 나옵니다. 실제로 그랬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죠.
오사카 공방전을 설명하기 전에 간단하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볼까요? 아래 나이는 우리나라 나이 기준입니다.
- 2살 때에 주변 강국의 힘겨루기로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와 생이별
- 7살 때에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가던 중 오다 가문으로 납치되어 엉뚱한 곳에서 인질생활
- 8살 때에 아버지가 가신의 배반으로 사망하고 마쓰다이라(도쿠가와의 당시 이름) 가문이 와해되어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됨
- 9살 때부터 19살 때까지 이미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 마쓰다이라 가문과 가신은 이마가와 가문의 선봉대가 되어 오다 가문과 대립
- 16살 때에 이마가와 가문의 여성과 정략결혼
- 17살 때에 이마가와 가문의 무장으로 첫 출전. 오다 가문에 큰 타격을 입히고 승전
-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경전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은 다음에도 이마가와 가문의 눈치를 보며 오다 가문과 계속 대립
- 20살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초대를 받고 기요스 돔맹을 결성.
가족 사이에서도 반란과 배반이 일상적이었던 전국시대에 보기 드물게 서로를 존중한 동맹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이에야스가 최선을 다한 동맹이었고 노부나가도 그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준 것 뿐이었습니다. 노부나가에게 동맹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건이 곧 터집니다.
- 분노해 자신의 중신을 죽인 이미가와 가문을 상대로 승전
- 자신의 아들 노부야스와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의 결혼
- 2년 동안 농민과 가신의 반란(일향종 신도)으로 내전
- 이미가와 가문을 멸망시키고 영지를 두 배로 늘림
- 30살 때에 다케다 가문을 상대로 패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겐신에게 맞섰다가 죽음 직전에 도망쳐오는 패배를 당하는데, 얼마나 공포에 질렸던지 말 위에서 똥을 지렸을 정도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이 일화가 잠시 나오죠. 그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이 날의 패전을 교훈삼아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신중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 37살 때에 장남 노부야스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자살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신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무장이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반란에 연관이 있다던가 어머니의 조종으로 아내와 극심한 불화였다는 다양한 설이 있었지만, 이유가 무엇이던 동맹국 그것도 자신의 사위에게 할복자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의 가신은 동맹을 깨고 노부나가에게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장남을 처형하고 동맹을 계속 이어갑니다.
- 40살 때에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의 배신으로 사망하고, 이에야스는 죽음 직전에서 가까스로 탈출
드라마에서 이에야스의 생환이 무척 코믹하게 재현되었죠. 말년은 어떻게 그릴 것인지 무척 기대됩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서 노부나가의 아들을 지원하며 나가쿠테 전투에서 승전
- 전쟁보다 화의를 선택한 히데요시가 늙은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보내 정략결혼시키고 이에야스는 복종.
아사히히메는 그 당시 남편이 있는 연상이었는데 강제로 이혼시키고 이에야스에게 결혼을 강요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이에야스입니다. 이 때에 이에야스가 기습공격을 받아 죽었고 가게무샤(암살 등을 피하기 위한 가짜 인물)가 역할을 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냥 이야기일 뿐입니다.
- 전국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호조 가문의 영지를 강요.
자신의 가문이 있던 미카와를 비롯해 가신이 피흘려가며 개발한 영지를 모두 빼앗기고 당시 시골이었던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라는 것은 사실 전쟁을 일으키라는 히데요시의 암시였습니다. 호조 가문의 영지는 이제 막 무력으로 병합한 지역으로 매우 적대적이었고 미카와 가신의 터전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싸워서 죽거나 말라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는데, 맞서다 멸망한 호조 가문를 지켜본 이에야스는 오히려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이동을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터진 임진왜란에서, 이에야스는 새 영지 개발을 이유로 참전하지 않았고 귀중한 전력을 전혀 낭비하지 않아서 히데요시의 사후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세카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굴욕과 위기를 넘겼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력있는 무장이 이 정도로 인내하고 노력해 일본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지 누구처럼 태어나니 수 백억 주식에, 20대에 부장으로 출발해 30대에 회장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역경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본론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이제부터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떡만들어 먹는' 오사카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1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제 오사카 성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에게 방향을 바꿔 본격적인 압력을 행사한다. 그는 도요토미 가문에 남겨진 총 200만 석의 영지를 마음대로 나누어 전공을 세운 다이묘들에게 나누어주고 히데요리에게는 겨우 65만 7천석의 영지만을 남겨주었지만 히데요리는 오사카라는 일본 최대의 거성과 함께 상업도시 사카이와 오사카를 계속 수중에 두었고 히데요시가 남긴 엄청난 양의 구리와 금괴를 숨겨 두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생력을 유지한 상태였다.
(우에스기 왈: 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전하지 않고 성 안에 틀어박혀서 일본 천하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주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당시 기록이 불분명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 나름대로 조합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에야스가 교활하게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할 때까지도 '히데요시 공을 위하여'라는 명목을 내세웠고 여기에 넘어간 히데요시의 많은 가신들이 동군에 합류합니다. 다른 의견도 있지만, 히데요시의 부인인 네네(출가 후에는 고다이인)조차도 자신을 따르는 많은 무장들에게 이에야스 편을 들라는 권유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히데요리 측근에는 미래를 내다볼 뛰어난 책략가가 없었습니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있었더라면 이에야스를 제지하고 히데요리 편으로 유리하게 전개해나가겠지만 도시이에는 이미 사망했고, 그 다음에 조언자로 임명된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이에야스를 지지하면서 히데요리가 어느 편도 들지 않게 합니다.
이제 창끝을 자신에게 돌릴 이에야스에게 세키가하라전투 승전축하를 했을 정도로 히데요리 진영은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적을 나누어 하나씩 처리하는 이에야스의 무서운 전략이 적중한 것입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책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 두 가문을 융합시키려고 했다. 먼저 아들 히데타다를 히데요리의 이모와 결혼시키고 1603년 10살이던 히데요리와 히데타다의 딸을 결혼시켰다. 전국시대가 얼마나 혼란했던 시대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오사카 성 전투는 손자 사위이자 손자 조카와 할아버지의 전쟁이 된 셈이다.
그러나 결혼으로도 두 가문은 융합되지 못했다. 이에야스가 쇼군(장군)에서 물러나 히데타다에게 넘겨주는 축하연에 히데요리는 참석하지 못했다. 어머니 요도기미가 이에야스를 의심하고 오사카 성을 나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풍운의 주연 중 한 명인 요도기미입니다. 전국시대에는 의외로 여성의 역할이 상당히 컸고 심지어 일본 최고의 무장 우에스기 겐신은 실제로 여성이었다는 낭설(?)도 존재합니다.
(우에스기 왈: 요도기미에 대해서는 워낙 흥미로운 인물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중간에 끊더라도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요도기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로, 노부나가의 누이 오이치는 당대 일본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미천한 직위에 있던 히데요시가 짝사랑에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첫 남편인 아사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죽음을 선택할 때에 함께 죽으려 했지만 히데요시가 계략을 꾸며 살려냈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노부나가의 최고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한 오이치는 남편이, 노부나가 사망 후의 천하를 두고 히데요시에게 패하면서 죽음에 몰리자 함께 자살을 선택해 히데요시를 좌절하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딸 세 명은 살아남았고 히데요시는 오이치를 가장 닮은 차차(요도기미)를 측실로 선택합니다. 차차는 노부나가의 성격을 닮아, 히데요시가 부모를 죽이고 천하를 빼앗은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확실한 권력을 선택하고, 히데요시가 그렇게 원하던 아들까지 낳아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실제로 오사카 성 공방전은 아들 히데요리의 의지는 거의 없고, 몇 명의 지략가와 요도기미의 욕망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도기미가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일본 역사를 또 다시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와 요도기미 그리고 숨겨놓은 막대한 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자, 도요토미 가문에는 패전 후에 갈 곳이 없어진 무사와 낭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되었고, 두 가문 사이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히데요리를 어머니 품에서 자란 유약한 애숭이로 포장해 전쟁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1611년에 니조 성을 드디어 방문한 히데요리는 가쓰모토의 뜻과는 반대로 재능과 의지를 발산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제거해 자신이 떠난 후 가문을 위협할 여지를 아예 없애기로 한다.
(우에스기 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워낙 험한 인생을 살아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아들 히데타다가 워낙 인물감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처형한 장남 노부야스는 가신들이 모두 기대할 정도의 대단한 잠재력을 보여줬던 반면에 히데타다는 비교가 안되는 재능을 보였고 거의 처형직전까지 몰린 인물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북쪽의 서군(우에스기 가문)을 압박하다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세키가하라로 달려와 전장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미리 내렸지만, 앞 뒤 못가리는 히데타다는 중간에 지나는 아무런 의미없는 우에다 성을 함락시키려고 집착하다가 이에야스가 전투를 끝낸 후에나 도착하게 됩니다. 한 주먹도 안되는 우에다 성은 함락시키지도 못했습니다.
히데타다가 거느린 전력이 히든카드였기 때문에, 그가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하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서군의 지리멸렬한 지휘체계덕분에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둔 이에야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히데타다에게서 병권을 빼앗았고 오사카 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도 쇼군인 아들은 자리에만 앉히고 실질적인 지휘를 했습니다.
우에다 성에서 히데타다의 대군의 발목을 잡은 사람이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인데, 오사카 성의 지휘관이 되어 겨울과 여름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도쿠가와 군을 괴롭히고 이에야스를 말년에 죽음직전까지 몰아넣습니다.)
이미 너구리영감이라는 명성아닌 명성을 가진 이에야스이니만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물밑에서 하나씩 전쟁준비를 했지만, 오사카 성 안의 도요토미 가문은 오래 전부터 '이에야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라는 소리만 외쳤을 뿐 큰 그림을 그릴 전략가가 없었다, 모여든 무장들은 직접 창칼을 들고 일개 부대를 지휘할만한 인물들이었고 아버지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다하던 다이묘들은 이에야스 진영에 가담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고, 히데요리 주변에 있던 인물들도 요도기미나 가쓰모토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17세기 초반의 일본 신문으로 오사카 성 전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까지도 문화는 우리보다 훨씬 뒤쳐진 상태였지만, 엄격한 신분제도와 관습에 얽매였던 조선과 달리 상대적으로 신분이동이 자유로운 편이었고 상인과 같은 중간 계층의 힘이 컸습니다.
1614년 경이면 일본에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진출해서 서양식 대포와 소총이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쟁준비를 하려면 대포와 화약을 대량으로 구입해야 할텐데, 오사카 성은 동인도 회사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 내가 가지고 있던 화약은 모두 히라도(중간 물류지)로 돌려보냈다... 여기(오사카)에서는 아무도 안사기 때문에 보내는 수 밖에 없다... 황제(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라도에서 피컬(pecul, 중국식 단위 약 60kg)당 6타이(일본 단위)에 샀으니까 네덜란드인이 가진 것까지 합쳐서 황제에게 모두 팔 수 있을 것이다....
동인도 회사가 주고 받은 다른 편지를 보면 오사카 성이 얼마나 허둥지둥 전쟁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편지에 썼듯이 여기(오사카)에서 화약을 급하게 원하고 있다. 지난 번에 되돌려보낸 화약이 모두 팔리지 않았거나 상태가 좋으면 특급으로 사카이(히데요리 소유의 무역항)로 보내기 바란다... 화약 가격이 이제는 피컬 당 26 타이로 치솟았지만 아마도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다. ...
첫 번째 편지가 1614년 6월, 두 번째 편지가 10월이었기 때문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를 4개월 만에 급하게 준비하고 있는 오사카 성의 상황도 한심스럽지만 그만큼 이에야스의 계략이 철저하고도 신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그 해 5, 6월에는 긴장정도로만 여기던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는 한가롭게도 엄청난 자금을 들여 히데요시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사찰, 부처와 종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전쟁의 뇌관이 되고 만다. 종에는 축복과 기원을 구하는 문구를 써넣기 마련이고 많은 문구 중에 '영지가 평안하고 번영하기를...', '동에서는 밝은 달이 뜨고, 서에서는 새가 지는 해에게 작별을 고하고'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첫 번째 문구에는 이에야스(家康)의 한자가 한자씩 들어가있고 두 번째 문구는 동쪽의 이에야스를 달에 비유해 서쪽의 해인 히데요리를 빗대어 모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너무 사소한 시비이고 그렇게 문제된다면 종을 부수고 다시 만들면 되지만, 일본 전국을 쥐고 흔드는 쇼군이 모욕을 당했다고 하는데 감히 반론을 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도쿠가와 가문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걸 명목만 마련하면 되었는데, 훌륭한 구실이 되었고 오사카 성에서는 이에야스가 진심을 보여주고 나서야 전국의 낭인들을 불러들이며 전쟁준비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에야스에게 가문과 영지를 빼앗긴 이름있는 무장들을 찾아다니며 지휘를 부탁하게 되고 사나다 노부시게가 합류하게 되면서 오사카 공방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내전으로 기록된다.
오사카 성 안에 전시된 공방전 미니어처로, 사나다 노부시게가 지휘하는 모습입니다.
(우에스기 왈: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역사인물은 단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는데, 작년에 있었던 모 잡지의 조사에서는 신세대답게 사나다 노부시게, 다테 마사무네, 나오네 가네쓰구가 첫 세 손가락 안에 꼽혔습니다. 아마도 식상한 기존 인물보다 시대를 거스른 반항아기질이 요즘 더 인기있고 TV 드라마나 만화의 영향도 크지 않을까 합니다.
전국시대 당시에 인물이 많이 나오기로는 시골 구석에 처박힌 사나다 가문만한 곳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노부시게는 유키무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참전해서 우에다 성에서 히데타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앞에서 설명했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서군이 완패한 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사나다 가문이 현명하게도 동군에도 가담해 공을 세웠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됩니다.
오사카 성의 요청을 받은 노부시게는 휘하부대를 붉은 색 갑옷으로 입히고 도쿠가와 군에게 타격을 입혀 겨울 전투 후에 이에야스에게서 영입제의를 직접 받지만 거절하고 다시 여름 전투에서 대활약을 펼칩니다. 결국 마지막 돌격에서 치명상을 입고 전사해서 전국시대의 전설로 남게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배경설명때문에 많이 길어져서 본격적인 오사카성 공방전은 다음 이야기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여행을 많이 다닌 분은 잘 아시겠지만, 일본이 우리보다 서구화가 일찍 되었고 개인주의도 상당히 심하지만 보수주의 색채가 아주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교회 십자가가 밤 하늘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신 분 있나요? 사당과 절이 시내에도 많지만 교회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왠만한 대중(고급이 아닌) 음식점에서도 물대신에 차가 나옵니다. 시장에 가면 차 잎을 흔하게 볼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상품도 출시되는데, 유키무라의 아이폰 케이스입니다. 한정판으로 옻칠을 한 명인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가격이 무려 150만원 정도 합니다.
몇 개나 팔았을지 궁금합니다.
저도 일본 여행에서 제가 좋아하는 우에스기 겐신 열쇠고리를 사려고 고생 고생 찾아갔더니만... 오사카에서는 안팔고 다른 지점에서 판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 인물에 대해 연구도 부족하고 현대에 재현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캐릭터화해서 일상생활에 남기는 일본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일본의 한 디자이너 회사가 공개한 월 페이퍼입니다.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사기급 능력치를 자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잡으면 바로 죽여버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왜소하고 못생긴 외모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원숭이로 불렸던 특징을 잘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태양의 자식'이라는 뜻의 햇살무늬 투구를 즐겼습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아서 여자를 밝혔음에도 자식은 말년에 겨우 한 명만 남겼고 그마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전쟁을 즐긴 댓가를 치뤘습니다.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에스기 겐신입니다. 일반적인 전국시대 무장과 달리, 명예를 너무 고집해서 흔한 스캔들 하나 없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본 최고의 무장으로 단 한 번의 패배(무승부는 많았습니다)도 몰랐던 그였지만 의외로 영지를 확장하지 못했고 출가승 신분으로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남기지 않아서 영지는 내란으로 반토막나고 맙니다.
다케다 신겐과의 7차례에 걸친 가와나까지마 전투가 유명하며, 이 전투에서 양쪽 모두 85%의 전력손실을 입는 전설적인 대결을 펼칩니다. 이후 다케다 신겐은 우에스기 겐신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모략으로 그의 진출을 방해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쵸소카베 모토치카입니다.
서남부 섬 지역인 토사를 장악한 실력자였지만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영토 대부분을 잃고 주종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입니다. 이건 초기의 일본 전통갑옷 차림이고
서양문물을 즐겼던 노부나가 답게 서양식 갑옥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갑옷입니다.
급사하지 않았다면 일본을 통일했을 다케다 신겐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의 몰락부터 시작되죠.
제 블로그에 워낙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으니까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입니다.
일본 무장들 중에는 붉은 색 갑옷을 좋아한 사람이 많은데, 노부시게역시 부대를 모두 붉은 색으로 무장시켰습니다.
코에이 게임때문에 노부시게가 꽃미남으로 나오는데 오사카 성 공방전 당시에는 이미 나이든 중년 늙은이였습니다.
가문이 좀 더 영향력있고 진출이 쉬웠던 중부지역이었다면 노부나가 이상 갔을 인물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2093&contentsParamInfo=isList%3Dtrue%26navCategoryId%3D58309&cid=58180&categoryId=58309
일본 다이묘
2천 명의 군사로 4만 명 군사의 발을 묶다
[ 眞田昌幸 ]
출생 - 사망 | 1547년 ~ 16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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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
지위 | 다이묘 |
별칭 | 겐고로(源五郎, 아명) 무토 키헤에(武藤喜兵衛) |
가문 | 사나다(眞田) → 무토(武藤) → 도요토미(豊信) |
부모 | 부 : 사나다 유키타카(眞田幸隆) 모 : 교운인(恭雲院, 가와하라 타카마사의 딸) |
배우자 | 정실 : 야마노테도노(山手殿) 또는 간쇼인도노(寒松院殿) |
사나다 마사유키는 1547년 사나다 유키타카의 3남으로 시나노에서 태어났다. 마사유키는 일곱 살 때 주군인 다케다 신겐의 모계 가문인 무토 가문에 인질로 보내졌다. 가독인 무토 사부로사에몬노죠의 아들이 일찍 세상을 뜨면서 마사유키가 양자가 되어 무토 키헤에라고 불렸다. 하지만 1575년 사나다 가문의 장남 노부쓰카와 차남 마사테루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하자 3남인 마사유키가 사나다 가문을 계승하게 되어 다시 사나다 성(姓)으로 복귀하였다.
다케다 신겐이 죽은 뒤 가장권인 가독을 상속받은 다케다 카쓰요리마저 죽자 사나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3개월 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사나다 가문은 주변의 호조, 도쿠가와, 우에스기 가문 등과 때로는 충돌을 하고 때로는 복종을 거듭하다 간토 주변에 히데요시 가문의 다이묘가 배치되자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고 사나다 노부시케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나고야 성에 진을 치고 500명의 군사를 파병하여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후시미 성 공사에 힘을 보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5위하 관직인 이즈노카미와 도요토미 성(姓)을 받았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소속되어 우에다 성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사 4만 명을 2천 명의 병사로 저지하였다(우에다 성 전투). 이 전투로 인해 마사유키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졌다. 서군이 패배하자 마사유키는 고야 산 주변 구도 산에 칩거 명령을 받고 유배생활을 하던 중 1611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2094&cid=58180&categoryId=58309
일본 다이묘
용맹과 지략으로 이에야스를 두려움에 떨게 한
[ 真田信繁 ]
사나다 노부시게 초상원본보기
출생 - 사망 | 1567년(?) ~ 1615년 6월 3일(일설에 1570년 3월 8일 ~ 16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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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아즈치 ·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
지위 | 무장 |
별칭 | 벤마루(弁丸, 아명) 유키무라(幸村, 통칭) 도요토미 노무시게(豊臣信繁, 통칭) |
가문 | 사나다(真田) 가문 |
부모 | 부 :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모 : 야마테도노(山手殿, 간쇼인(寒松院)) |
배우자 | 정실 : 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 딸 측실 :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의 딸, 홋타 오키시게(堀田興重) 딸, 다카나시 나이키(高梨内記)의 딸 |
사나다 가문은 운노 가문에서 시작되었다. 운노 가문은 시나노 국 지이사가타 군 운노 마을을 중심으로 번영한 일족이다. 센고쿠 시대 운노 고타로 무네쓰나의 차남 단죠노죠 유키타카가 지이사가타 군 사나다 마을에 머물면서 사나다 가문을 열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갑자기 부상한 센고쿠 다이묘 집안 대부분이 자신들의 가문을 명사(名士)와 결부지어 계보를 만들고 전통을 남겼던 것처럼 사나다 가문도 비슷하게 운노 가문과의 연계성을 내보였다.
사나다 가문의 2대 유키타카(유키쓰나)는 태생이 불분명하다. 운노고타로 무네쓰나의 아들이라는 설외에 무네쓰나의 사위, 손자, 또는 유키요시의 아들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유키타카는 가이 국의 다케다 하루노부(신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 노부쓰나는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가문과 항쟁하면서 서 고즈케 공격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1575년 나가시 전투에서 차남 마사테루와 함께 전사했다. 3남 마사유키는 다케다 가문의 아시가루 대장으로 활약하면서 다케다 가문의 분가인 무토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1575년 나가시 전투에서 장남과 차남이 전사하자 3남인 마사유키가 사나다 가문의 가부장권인 가독을 이어받았다.
초기에는 다케다 가문에 속해 있었지만 사나다 유키타카가 활약하여 사나다 가문은 노부쓰나를 거쳐 노부유키로 이어지며 다이묘 가문으로 존속했다.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는 1567년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센다이 사나다 계보(仙台真田系譜)』에서는 1570년 2월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본명은 겐지로 노부시게이지만 후세에는 사나다 유키무라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사나다 노부시게가 8세 때에 사나다 가문 중흥의 시조인 조부 유키타카가 사망하고 장남과 차남이 나가시노 전투에서 사망하자 3남인 마사유키가 가장권인 가독을 상속했다. 조부 유키타카는 고즈케 국 이와비 성의 성지기이자 에치고 국 우에스기 영지를 감시하는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 마사유키도 그 뒤를 이었다. 유키무라가 9세까지는 가이 국 다케다 가문에서 자랐다고 추측된다. 그 뒤 유키무라는 아버지를 따라 고후를 떠나 이와비로 옮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579년 다케다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 사이에 고후 동맹이 체결되어 우에스기 측과의 항쟁은 수습되었지만 한편으로 사가미 국의 고호조 가문과의 고소 동맹이 파탄에 이르렀기 때문에 고즈케 국은 계속해서 긴장 상태에 있었다. 1582년 3월에 다케다 가문은 오다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겠다는 뜻을 밝혀, 고즈케 국의 아가쓰마 군(郡), 도네 군과 시나노 국의 치이사가타 군의 영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1582년 6월에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갑자기 사망하자 다시 주군을 도쿠가와 가문으로 바꾸었다. 1583년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다케다 사후의 영지는 공백이 되어 우에스기, 고호조, 이에야스 세 명의 각축장이 되었다. 호조 가문과 동맹을 맺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옛 다케다 가문의 영토인 누마다 성 양도 문제로 불만을 드러낸 사나다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도쿠가와군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우에스기 가문의 후원이 절박해졌다. 결국 19세였던 노부시게가 1585년 8월 하순부터 1586년 5월까지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인질이 되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노부시게를 총애하여 인질치고는 높은 녹봉인 1,000석을 주었다. 당시 ‘벤마루’라는 노부시게의 어릴 적 이름이 쓰인 문서에는 당시 19세인데도 성인식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점에서 노부시게가 1570년생에 더 가까울 것으로 예측된다.
1585년 도쿠가와군 7,000명이 우에다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1차 우에다 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통설은 아니지만 이 전투에 노부시게가 잠시 귀국하여 활약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같은 해 우에스키 가게카쓰가 교토로 상경하여 에치고를 비워둔 사이에 아버지 마사유키는 노부시게를 우에다로 불러들이고 오사카 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인질로 보냈다. 그런데 도요토미 역시 우에스기 가게카쓰처럼 노부시게를 마음에 들어했다.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곁에서 당시 문화가 발달한 가미카타에서의 생활은 그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인질이라기보다는 도요토미를 섬긴다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나중에 도요토미의 성씨를 하사받은 것을 보면 노부시게는 히데요시가 아끼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이 분명했다.
한편 노부시게가 히데요시의 인질이 되었을 때,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히데요시에게 크게 화를 내며 노부시게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히데요시는 승낙하지 않았지만 말수가 적은 가게카쓰가 히데요시에게 대드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가게카쓰가 노부시게를 아꼈고, 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89년 호조 가문이 갑자기 사나다 영지를 공격하자 그것을 이유로 도요토미는 호조 가문의 본거지인 오다와라 공격을 감행했다. 노부시게는 아버지 마사유키, 형 노부유키와 함께 호조 가문 토벌을 위해 마에다 도시이에군으로 출전했다. 이 전투에서 마쓰이다 성과 미노와 성을 공략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노부시게는 1591년 이시다 마쓰나리의 오랜 친구인 오타니 요시쓰구의 딸과 결혼했다. 그 이후 종5위하 관직을 받고 도요토미의 성씨도 하사받아 사에몬노카미 도요토미 노부시게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야스를 측근에서 섬기느라 1593년의 조선 출병에는 출전하지 않고 오사카와 후시미, 나고야를 왕복했다.
1600년에 들어서자 이시다 미쓰나리와 동맹을 맺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이에야스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게 되고, 이에야스는 아이즈 원정을 결심했다. 노부시게는 이에야스의 요리키 다이묘(유력 다이묘의 수하 다이묘)가 된 아버지 마사유키와 함께 아이즈 원정에 참가하는 도중 시모쓰케 국 이누부시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때 미쓰나리의 밀서가 도착했다. 아버지 마사유키와 형 노부유키, 그리고 노부시게는 자신은 이에야스를 주축으로 하는 동군과 그에 맞서는 서군 중 어디에 속할 것인지를 서로 논의했다. 오타니 요시쓰구의 사위였던 노부시게는 아버지 마사유키와 함께 미쓰나리와 인연이 있는 서군 측에, 이에야스의 가신 혼다 다다카쓰의 사위였던 형 노부유키는 동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서로의 뜻을 달리했다.
같은 해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은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패배를 맛봤다. 한편 동군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이자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군은 9월 18일 3만 8,000명의 대군으로 나카센도로 진군했고,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던 서군의 사나다군, 즉 아버지 마사유키를 비롯한 노부시게와 맞서게 되었다(2차 우에다 전투). 단기전을 노린 히데타다는 소 병력의 사나다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고자 했지만 시간벌기 작전을 벌인 마사유키에게 걸려들어 3일 동안 발이 묶였다. 히데타다는 마사유키의 교묘한 전략에 쩔쩔매다가 결국 세키가하라 본전에 참전하기 위해 공격을 멈추고 세키가하라로 떠났지만 발이 묶여 지체된 시간 동안 전투는 이미 끝나 버렸다. 히데타다 군대가 떠난 뒤에도 가이즈 성의 무장 모리 다다마사는 가쓰라오 성에 이도 우에몬 부하 병사를 두고 우에다 성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에 반해 노부시게는 9월 18일과 23일 두 번에 걸쳐 심야 토벌과 이른 아침 공격을 감행했다. 2차 우에다 전투에서 마사유키는 전략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버지 이에야스의 분노는 엄청났다. 히데타다는 우에다 성 공격 실패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군과의 합류가 지체된 것으로 크게 힐책 당했다. 그 이후로 이에야스군과의 전투는 없었지만 마사유키는 서군이 패배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마사유키로 인해 체면이 깎인 바 있는 히데타다는 사나다 부자의 처벌을 호소했다. 이에야스도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두 번씩이나 쓰라린 맛을 보았기 때문에 이들 부자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해 보였다.
그러나 노부시게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는 자신이 받은 은상의 교환 조건으로, 그리고 장인 혼다 다다카쓰(도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의 탄원으로 목숨을 구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간청하는 노부유키를 보고 그 대단한 이에야스도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했다. 노부유키의 목숨 구걸로 죄를 감면받은 사나다 부자는 다카노 산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사나다 부자와 동행한 가신은 상당수였다(마사유키에게는 16명의 가신이 수행을 했고, 노부시게는 아내도 동행했다). 그들은 구도 산 암자에서 칩거 생활을 했고 칩거 중 1611년에 아버지 마사유키가 사망하였다. 이듬해 노부시게는 출가하여 고하쿠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사유키의 우에다 영지는 노부유키가 하사받았다.
구도 산으로 들어간 사나다 부자는 곤궁한 생활과 더불어 감시를 받았지만 외출은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마사유키는 다가올 날을 준비하며 무예 기술을 연마하고 재기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오직 사면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나다 부자의 구도 산 생활은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원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이 번에서 보내주는 연간 50석의 도움과 영지 우에다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곤궁한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사유키 부자가 사나다히모(넓적하고 두껍게 엮은 끈)를 짜서 생활 수단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생활이었음은 분명했다.
아버지 마사유키는 영지에 40료의 임시 도움을 요청했지만 동생 마사치카(마사유키의 셋째 아들)가 반액 20료를 보내주었다. 마사유키는 편지에서 “여기는 빌린 돈이 많아서 힘들다. 나머지 20료를 하루 빨리 보내주기 바란다. 그것이 힘들면 5마이(枚)든지 10마이라도 좋으니까.”라고 송금을 재촉했다. 또한 노부시게도 “구도 산 속 생활은 변함없지만 올 겨울은 모두 불편하고 한층 더 쓸쓸한 상태이므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한번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마사유키는 이에야스에게 사면 받을 날을 고대하고 있었지만 세파와 병으로 그 희망은 사라져갔고 1611년 마침내 구도 산 사나다 암자에서 세상을 등졌다. 이 기간 동안 노부시게의 아버지, 어머니, 딸이 모두 사망했다. 마사유키 사망 후 1주기가 지나자 우에다에서 마사유키를 수행했던 가신들 대부분이 영지로 되돌아가 동생 노부유키에게로 갔다. 가신들이 떠나고 난 구도 산 사나다 암자는 더욱 초라해졌다. 남은 가신은 다카나시 나이키 외에 2, 3명이었다고 전해진다.
노부시게의 아내도 구도 산에 동행했으며 여기에서 장남, 차남, 딸 3명이 태어났다. 마사유키 사후 노부시게의 생활에 대한 부분은 사료가 부족하고 불분명한 점이 많다. 『신무내전추가(真武内伝追加)』에 “노부시게는 항상 시골사람이나 노승과 사귀며, 절이나 신사에 들어가 장기와 주사위 놀이로 날을 보낸다. 숙소에서는 야심할 때까지 기다려 병서 등을 자세히 보며 잠시도 무예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어 평상시에 다가올 날을 준비하여 무예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오사카 전투의 활약으로 이어졌다.
1614년 호코지(方広寺) 종명 사건1)을 계기로 도쿠가와 측과 도요토미 측 관계가 악화되었다. 양측 대결이 불가피해지자 다이묘 추가 세력을 기대할 수 없었던 도요토미 측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영지나 성 등을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아 수감자가 된 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도 산의 노부시게에게도 사자를 파견하여 황금 100마이와 은 30관을 보냈다. 노부시게는 우에다에 있는 아버지 마사유키의 옛 신하들에게 참전을 호소하며 감시의 눈을 틈타 구도 산을 탈출했다. 노부시게는 아들인 다이스케 유키마사와 함께 오사카 성으로 들어갔다. 오사카에서 노부시게가 이끈 군은 투구를 붉은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노부시게를 아버지 마사유키 정도의 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부시게가 오사카 성에 입성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떨었지만 다행히 사나다의 부하로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오사카 성 입성 후 이루어진 군 회의에서 노부시게는 오사카 성에서 농성을 하자는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고토 모토쓰구와 함께 야전을 주장했다. 처음부터 교토 시내를 지배하에 두고 오우미 국 세타까지 적극적으로 토벌하러 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에 낭인들은 찬성을 표명했지만 결국 수용되지 못하고 끝났다. 그 이후에 의견을 낸 기습작전 계획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오사카 성에서 농성하기로 결정되었지만 허술한 성 남쪽 방어가 문제였다.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성을 쌓을 당시 고민했던 오사카 성의 유일한 약점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곳에 노부시게는 ‘사나다마루’라고 불리는 흙으로 만든 초승달 모양의 외성을 쌓았다. 그리고 철포 부대를 이용하여 도쿠가와 측을 도발한 후 선봉 부대에 크게 타격을 가했다. 노부시게는 이 외성에서 상대를 유인하여 철포로 공격하는 법, 즉 아버지 마사유키가 우에다 성 전투에서 보여준 전술을 사용하여 엄청난 전사자를 만들어냈다. 이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 전사자 80%가 사나다마루 공격을 방어하다가 죽었다. 도쿠가와 군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는 처음으로 무장으로서의 명예를 천하에 알리게 되었다(사나다마루 전투). 한편 이 사나다마루를 만들 때 오노 하루나가를 비롯한 도요토미 측의 다른 무장들은 노부시게가 사나다마루를 쌓자 도쿠가와 측으로 배반하기 위한 준비가 아닌가 의심하고 경계하기도 했다.
양측이 오사카 겨울 전투에 대한 강화를 체결한 후에 사나다마루(외성)는 양군 강화에 따른 수로 매립 때에 제일 먼저 파괴되었다. 그리고 도요토미 측의 약체화를 꾀한 이에야스는 노부시게의 존재가 중요함을 파악하고 1615년 2월에 사자로 노부시게의 숙부인 사나다 노부타다를 파견했다. ‘10만 석을 하사할 것’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여 배신하도록 설득했다. 이 제안이 거절당하자 다시 노부타다를 사자로 파견하여 이번에는 시나노 일국을 준다고 설득에 나섰다. 이것을 들은 노부시게는 “이 노부시게를 10만 석으로는 불충한 자로 만들지 못하지만, 일국(一國)으로는 불충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라며 다시 물리쳤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측과 도요토미 측의 강화 협상에서 도쿠가와 측이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조건은 오사카 성 외측 수로, 외성 건물과 수로만을 메우는 것이었지만, 도쿠가와 측은 마음대로 해석하여 모든 수로를 메워 사나다마루(외성)도 파괴되고 말았다. 오사카 성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기다렸다는 듯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에게 계속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었다. 결국 휴전 협정이 파기되고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로가 메워지고 사나다마루(외성)가 파괴되어 무방비 상태가 된 오사카 성에서는 농성을 해도 이길 승산이 없었다. 또한 군사력에서도 도쿠가와 측 16만 명의 병사에 비해 도요토미 측은 5만 5,000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고토 모토쓰구의 부대가 괴멸되고 모토쓰구는 전사했다. 기무라 시게나리 역시 목숨을 잃는 등 도요토미 측의 핵심 무장들이 연달아 전사하며 기세가 꺾였다. 그 속에서도 노부시게는 도묘지 전투에서 다테 마사무네 부대의 선봉을 총격전 끝에 일시적으로 후퇴시키며 분전을 거듭했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병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 본인이 직접 출전해야 한다고 직접 읍소했지만,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들과 히데요리 어머니인 요도도노가 적극 만류하여 히데요리의 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월 7일 노부시게는 오노 하루히사, 아키시 다케노리, 모리 가쓰나가와 함께 마지막 작전을 세웠다. 오른쪽 날개에 사나다 부대, 왼쪽 날개에 모리 부대를 시텐노지(四天王寺), 차우스 산 부근에 포진하도록 한 후 사격전과 돌격을 번갈아 진행하여 이에야스 본진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이어 아키시 다케노리의 경기 병단이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와 함께 공격에 나서도록 했다.
하지만 작전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리 부대가 신호를 기다리지 못하고 사격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노부시게는 크게 낙담했다. “지금은 이것으로 전쟁이 끝났다. 나중에는 기분 좋게 싸워야만 한다. 목표하는 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 단 하나뿐이다.”라고 말하며 이에야스 본진을 목표로 정하고 정면 돌격을 감행했다. 사나다 부대를 필두로 모리, 아카이시, 오노 하루히사 부대들을 포함한 도요토미의 각 부대가 일제히 돌격에 나서자 도쿠가와 세력은 기세에 눌려 붕괴되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노부시게가 이끄는 사나다 부대는 도쿠가와 세력과 계속 교전하며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 1만 5,000명의 대군도 무너뜨리며 후방의 이에야스 본진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이어 이에야스의 친위대, 하타모토, 중신 세력을 흩뜨려 그 본진을 유린했다.
이에야스가 자신의 본진이 공격받아 우마지루시(장수의 말 위치를 알리던 표지)가 넘어진 것은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후 두 번째였다. 사나다 부대 공격에 이에야스는 자결을 두 번이나 각오했을 정도로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운은 노부시게의 편이 아니었다. 위기에 빠졌던 도쿠가와 측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섰고,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도쿠가와 군사들에 쫓겨 마야스이 신사 경내에까지 밀려온 노부시게는 적병들이 경내로 공격해오자 “나의 목을 마음대로 하라.”라고 최후의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 시게노부의 목은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철포조인 니시오 무네쓰구에게 맡겨졌다. 향년 49세였다.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말수도 적어 화를 내는 경우가 적은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전쟁터에서는 제갈공명과 같은 군사(軍師), 책사와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오사카 여름 전투의 이에야스 본진 공격에서는 용장과 지장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또한 도요토미 가문이 이길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죽음에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장수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나다마루에서의 승리, 이에야스의 토벌, 도요토미에게 충성하는 것, 사나다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도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비극적인 인물이 영웅이 되는 것을 특징으로 갖고 있는지 노부시게에 관한 이야기는 에도 시대부터 인기가 있어서 일본 전통 예능인 고단과 연극에서 유명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나다 노부시게 [真田信繁] - 용맹과 지략으로 이에야스를 두려움에 떨게 한 (일본 다이묘, 세손출판사, 일본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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