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잡아먹고 오리발
극본 김 문 홍
〔등장인물〕
오리발 1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때〕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곳〕
부산 일원
〔무대〕
무대 후면 중앙에 단 하나가 있을 뿐 텅 빈 무대. 그 위에 의자 하나가 덜렁 놓여 있고, 그 의자 위 보통 사람의 키에 해당하는 높이의 허공에 섬찟한 느낌의 오랏줄 하나가 내려뜨려져 있다. 이곳은 천상 재판정이다. 그러므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 역시 생전의 죄과를 심판받기 위해 기다리는 죄인들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첫 장과 마지막 장은 천상 재판정이므로 오랏줄이 드리워져 있고, 제2장을 비롯한 나머지 장은 주인공 오리발의 지상 위에서의 삶이므로 오랏줄이 필요 없다. 무대 후면의 호리전트 스크린에는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현상과 사회적 이슈를 상징하는 슬라이드 사진과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이 투사된다.
제1장 너, 이놈 마침 이곳에 잘 왔구나
객석의 불이 꺼지고 뒤이어 무대 이미지 조명이 페이드 아웃 된다. (사이) 차량들의 질주음이 가까워 오다가 객석을 흥건하게 적실 무렵, 갑자기 자동차의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타이어의 마찰음이 들리며 ‘쾅’ 하는 충돌음과 폭파음이 연이어 들린다. (사이) 한 순간의 정적. (사이) 혼란스러운 음악에 이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몽롱하고 환상적인 음악이 겹치며 무대 밝아진다. 무대 후면 중앙에 단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투박한 낡은 의자 하나가 덜렁 놓여 있다. 그 의자 위의 사람 키가 닿을 만큼의 허공에 오랏줄 하나가 드리워져 있다.
(사이)
객석 후면에서 통로를 통해 주인공 오리발이 넥타이를 풀어 헤친 후줄근한 차림으로 등장하며 객석 주위를 의아한 눈초리로 기웃거린다. 오리발은 가까이 다가가 관객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아니면 관객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오리발 아이구야,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지? (관객 한 사람을 향해) 도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관객의 반응을 살핀 뒤에) 네, 여기가 그, 극장이라구요? 네? 지금 연극을 보고 있는 중이라 구요? (사이)보아하니 얼굴이 ‘비연극적’으로 생겨 먹었는데 새 삼스럽게 극장은 무슨 극장입니까? 네? 비연극적인 얼굴이 어 떻게 생겼냐구요? (다시 멀찍이 앉아 있는 한 남자 관객을 손 으로 가리켜 보이며)저, 저기 아저씨 얼굴 한 번 보세요. 머리 털 나고 연극 구경 처음 하는 사람 같지 않게 생겼습니까? 그 렇죠? 네, 맞아요! 저게 바로 전형적인 비연극적인 얼굴이라니 까요. (객석의 맨 앞쪽으로 걸어가 다시 객석을 한눈에 훑어보 다가) 그런데 웬 여성분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어느 관객을 빤히 바라보며) 네? 그럴 수밖에 없다구요? 요즈음 세상은 여 자들이 살기 좋게끔 세상이 꾸며져 있다구요? 네, 맞아요. 그 건 저도 동감입니다. (주위를 다시 한 번 훑어보며 씨니컬하게 웃고 나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 개판, 깽판, 여자판 아닙 니까. 참, 제가 우스운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무대 에이프 런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여기 20대부터 80대까지 남자 노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집에서 마누 라한테 쫓겨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쫓겨 난 사연을 늘어놓는데 이게 또 가관이에요. 20대는 마누라 생 일을 기억하지 못 했다고 쫓겨났고, 30대 아저씨는 “오늘은 집에서 저녁 먹을 거야.”했다고 쫓겨났고, 40대는 마누라가 외 출하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어 보았다고 쫓겨났다는 겁니다. 50대 중년 남자는 마누라가 외출하기에 나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서다가 쫓겨났다는 겁니다. 60대는 잘 모르겠으니 건 너 뛰고, (관객을 향해)70대는 왜 쫓겨났는지 아세요? 네, 모 른다구요? 아, 글쎄 젠장맞을......70대는 왜 쫓겨났는지 그 이 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겁니다. 80대는 아침에 일어날 때 눈 을 떴다고 쫓겨났다는 겁니다.(남자 관객을 향해) 보세요,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가정 내에서의 요즘 여성들의 지 위 상승, 경제권 장악을 신랄하게 빗댄 조크라고 할 수 있죠. 부계사회라는 말은 벌써 물 알로 사라지고 요즘은 모계사회가 가족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겁니다. (사이) 아, 그러지 않습디까. 아들 셋 자식을 두면 쪽박 차기 십상이고, 딸 셋 두 면 비행기 탄다 하지 않습디까? 우리 할아버지 세대 때와는 하늘 땅 만큼 세상이 바뀐 거죠. 옛날엔 이러지 않았습니까. 장에 갈 때 아버지는 "어험‘하고 뒷짐을 선 채 저만치 앞장서 걷고, 어머니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인 채 부랴부랴 쫓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어떤 줄 아세요? (흉내를 내 보이며) 여자는 껌을 질겅질겅, 히프를 요렇게 할랑할랑 뒤 흔들며 앞에서 간들거리며 걷고, 남자는 아기를 앞에 안고 가 방을 든 채 그 뒤를 따르는 세상 아닙니까.
(사이)
네? 시시껄렁한 소린 집어치우고 어서 무대 위에나 올라가 본 방송이나 하라구요? (에이프런에서 내려서서 무대를 살펴보다 가 의자와 오랏줄을 발견하고) 어라, 저게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무대 위로 올라가 의자와 오랏줄을 살펴보다가 갑 자기 진저리를 치며) 요렇게 의자 위에 올라서서 밧줄을 목에 걸고 의자를 탁 차 버리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쌔(혀) 가 만 발이나 빠져 헐떡거리다가 쾍 자빠지면? (갑자기 무대 전면으로 나서서 객석을 바라보며) 보세요, 이 보세요......오늘 누구 한 사람 홍콩 보낼 모양이지요? 네, 홍콩이 아니라 지옥 불구덩이라구요? 아, 그렇군요. ‘홍콩 간다’는 말은 남자 여자 가 거시기 할 때 여자가 오르가즘 상태에 빠지는 걸 말한다 고 합디다. 네, 거시기가 뭐냐구요? (수줍은 표정을 지어 보 이며) 거시기요? 아, 거시기는 거시기, 와 왜 거 있잖습니까?
(관객을 향해 뒤의 의자와 오랏줄을 가리켜 보이며) 오늘 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오랏줄을 목에 건 채 지옥 불구덩에 빠 질 사람이 누구라고 합디까? (뒤로 주춤 물러서며) 뭐요? 나, 나, 나라구요?
갑자기 천상의 소리처럼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지금까지의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는다.
소 리 누구긴 누구야, 바로 니 놈이지!
오리발 네, 나라구요? (푸실 푸실 웃으며) 헤헤, 무슨 말씀을 고 따위로 하십니까? (객석을 둘러보며) 아니,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그게 접니까?
소 리 이제, 이놈이 슬슬 오리발을 내놓는구나.
오리발 네? 아니 제 이름이 ‘오리발’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소 리 오리발이고 닭발이고......니놈이 니 죄를 알렸다!
오리발 아, 참 미치고 폴딱 뛰겠네. 제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렇게 다짜 고짜 다그치는 겁니까?
소 리 그럼, 니가 니 죄를 모른단 말이구나. 그럼 살아 생전에 부처님 마음처럼 깨끗하다 이 말이구나?
오리발 (갑자기 풀이 죽으며) 아, 이 세상에 죄 안 짓고 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야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객석의 관객들을 가리키며) 다 조금씩의 죄를 지었겠죠.
소 리 저놈이 또 물귀신 작전을 쓸 모양이구나. 거기 그 사람들 역시 니놈 재판이 끝나면 한 사람씩 나와 죄 지은 만큼의 벌을 받게 돼 있느니라.
오리발 (실쭉 웃으며) 나만 벌을 받는 게 아니라니까 조금은 안심이 됩 니다.
소 리 저런 놀부 심뽀를 봤나! 궁시렁 궁시렁 딴 전 피우지 말고 어서 니놈의 죄를 털어 놓아라.
오리발 (삿대질을 하며) 아니, 제가 무슨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고양이 에게 쫓기는 쥐처럼 닦달하는 겁니까? 증거를 대세요, 증거를!
소 리 오라, 니놈이 이제 ‘증거제일주의’라는 비장의 카드를 쓸 모양인 데, 그렇지 않아도 이미 모두 준비해 두었느니라.
오리발 아니, 무슨 증거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소 리 흐, 흐 증거를 대라 이 말이구나. 니놈이 태어난 1960년대 초부 터 교통사고로 죽은 어제 저녁까지의 죄상을 낱낱이 비디오 테 이프로 녹화해 두었느니라. 어디 한 번 보여 주랴?
무대 후면의 스크린에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갓난아기의 사진과 처참한 교통사고의 현장 사진을 투사하여 보여준다.
소 리 이래도 오리발을 내밀 생각이냐?
오리발 (객석을 가리키며) 아,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솔직히 죄 안 짓 고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객석을 향해) 에브리바 디, 죄 안 짓고 산 사람 있으면 어디 발 한 번 들어 보세요. 거 보세요, 아무도 없잖습니까?
소 리 너, 이놈! 정말 이렇게 오리발 먹고 닭발 내밀 거냐, 아니, 아니 다시 수정하겠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 거냐? (사이) 그래, 알았느니니라. 그럼, 지금부터 본 천상 재판정은 피고 오리발의 그간의 죄상을 만천하에 낱낱이 공개할 터이니 눈 똑 바로 뜨고 살펴보기 바란다.
1970년대 말 젊은이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상징하는 송창식의 노래 ‘고래 사냥’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제2장 먼저 잡는 놈이 장땡이다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가 흘러나오면서 유신선포, 장발 단속 등에 관한 신문기사의 헤드라인 제목과 사진들이 무대 후면의 스크린에 투사되기 시작한다.(사이) ‘딩동’하는 초인종 벨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진다. (사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오리발이 가방을 든 채 축 쳐진 어깨로 들어선다. 가방을 휙 내던지며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뱉는다.(사이)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한 듯 맥없이 일어선다.
오리발 (볼멘 소리로) 에이 씨, 엄마! 또 그놈의 한약이에요? 제 일은 제 가 알아서 할테니 이제 절 좀 그만 내버려 두세요, 네?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로) 야, 이놈아.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 다는 말 못 들어봤니? 몸이 허해 봐라, 그 많은 영어 단어, 수학 공식들 오글오글 비틀어져 기억 창고에서 푸슬푸슬 떨어져 내린 다니까. 넌 무조건 서울대 법학과에 붙어야 한다, 법학과는 곧 사 법고시와 연결되고, 사법연수원을 톱으로 졸업만 하면 앞길이 쫙 열리고......그러면 가문 좋고 돈 많은 집 쭉쭉 빵빵 아가씨들이 열 쇠 세 개를 쥐고 줄을 선다니까, 이놈아! (관객석을 향해) 우리 엄 만 늘 이런 식이었어요. 자기 맘대로 일방적으로 내 인생의 로드 맵을 짜놓고 날 거기에다 맞춰가며 스파르타식 훈련을 강행하는 겁니다. (관객을 바라보며)네, 열쇠 새 개가 뭐, 뭐냐구요? 아, 저 아가씨 소식이 영 깡통이네. 뭐긴 뭐겠어요? 그 당시엔 유행한 말 이었는데요, 하난 아파트 열쇠, 또 하난 자동차 키, 그리고 다른 하난 금고 키......즉, 말하자면 사법고시만 패스하면 호박이 넝쿨 째 굴러 들어온단 말이지요. 난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들어 갈 때까진 이처럼 우리 엄마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습니다. (관 객을 향해) 네? 그런데도 아무런 저항없이 그걸 곧이곧대로 따랐 느냐고요? 난 우리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 세뇌교육을 받아왔는데, 용빼는 재주나 힘이 없는 이상 어쩝니까. 그대로 따 르는 수밖엔 요. 그런데 나보다 세 살 많은 우리 형은 좀 달랐습 니다. 난 오징어처럼 흐물흐물 엄마의 명령에 이리저리 끌려다는 데, 우리 형은 줏대가 있어 뻣뻣하게 버텨 낸 겁니다.
갑자기 ‘쨍그랑’ 하고 유리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화가 난 여자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리발 아이구, 말도 마세요. 한 두어 달 됐는데 우리 형이 갑자기 폭 탄 선언을 하는 바람에 우리 집안에 난리 블루스가 일어난 겁 니다. 의과대학 의예과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형이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겁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뭐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음악 이나 듣고 책이나 읽으며 인생을 즐기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쓰고 싶은 글이나 쓰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우리 엄마가 게거품 을 물고 형에게 달려들며 다그치는 겁니다. (어머니의 목소리 로) 오이길, 오이길!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응? (형 의 목소리로) 엄마, 그럼 제 정신이지 않구요. 그럼 제가 머리 가 살짝 돌아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어머니의 목소리로) 남들 은 의과대학 못 가서 지랄발광을 하고 피똥 싸며 공부하는데 니놈은 지금 호강에 바쳐 난리 블루스를 추는구나. 뭐, 음악 듣 고 책 읽으며 좋아하는 글이나 쓰겠다고? (형의 목소리로) 야, 이놈아! 음악이, 책이, 그 알량한 글 나부랭이가 밥 먹여주니, 아니면 집을 장만해 주니, 응? (형의 목소리로) 엄만 돈만 있으 면 힘이 절로 솟을지 모르지만 난 안 그래요. (어머니의 목소리 로) 이놈이 열 달 배 앓아 낳아 놓았더니 작반하장도 유분수지 배신을 때리네. (형의 목소리로) 생각 같아선 엄마의 자궁 속으 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요. (사이) 아, 이걸 어쩝니까? 함흥차사 도 제 싫다면 그만인데 우리 형의 줏대가 여간 아닌데 이걸 어 쩝니까. 급기야 의사 노릇하는 큰 누나까지 동원되어 어르고 달 래고 협박까지 했지만 막무가내였어요. 누난 형에게 글은 의사 가 되고 나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의사가 되고 나서도 틈만 나면 책도 읽고 음악도 들을 수 있다 슬슬 꼬드겼지만 형의 결 심은 우리 집 안 그 어느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죠.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나서) 전 우리 형의 거부하는 몸짓을 충분히 이 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 고 3 때 형의 장래 꿈이 고고학이었는 데, 입 틀어막고 멱살 잡아 떡 하니 의과대학에 집어넣어 놓으 니 공부가 제대로 될 수 있었겠습니까? 실패를 모르는 우리 엄 마에게도 큰 좌절이 찾아온 겁니다. 형에게 실망한 우리 엄마는 그 이후로 내 멱살을 틀어쥔 채 한눈 못 팔게 으르렁거렸지요. 네? 난 어쨌느냐구요? 난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미 철저한 세뇌 교육으로 길들여져 온 놈인데 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게 좋 다고 엄마의 꼭두각시 노릇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 시 관객을 향해) 네? 그 후 우리 형은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형 은 지금 무전여행으로 아프리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습니 다. ‘오이길’이라는 형의 이름처럼 줏대 있게 형의 길을 가고 있 습니다. 난 꿈속에서 형을 만날 때면 한 마리 거대한 고래가 되어 바다를 헤엄치고 있다가도, 꿈에서 깨어나면 물벼락 맞은 생쥐가 되어 엄마의 치마폭 아래서 노는 처량한 신세가 됩니다.
(다시 어느 관객을 향해) 우리 아버지요? 복부인이 되어 아파트 를 이리저리 굴려 떼돈을 버는 우리 엄마완 차원이 다른 분이 지요. 우리 아빤 지금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며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지요. 우리 엄만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아파트 숲을 쏘다니지만, 우리 아빤 조용한 정물화처럼 원고지 위에다 언어의 집을 짓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와 아빤 앙상블 이 개판이라고 하는 게 딱 어울리는 표현일 것 같네요.
갑자기 안쪽에서 남자와 여자의 다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이) 오리발이 살금살금 걸어가 방 안을 엿보는 시늉을 해 보인다. (사이) 그러다가는 오리발이 무대 전면으로 나서며 속삭이기 시작한다.
오리발 네? 뭘 훔쳐 보느냐구요? 지금 안방에서 우리 엄마와 아빠가 또 다투기 시작하네요. 뭐 앙상블이 개판인데 안 싸우는 게 오 히려 이상할 정도지요. 무슨 일로 싸우느냐구요? 보나마나 또 그 ‘지상의 방 한 칸’ 논쟁이지요. 한 번 구경해 보실래요? (아 버지의 목소리로) 당신 도대체 집이 몇 채야? (어머니의 목소 리로) 왜 열 두 채에요. 뭐가 잘못 되기라도 했답디까? 집은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라 가족의 행복을 가꾸는 공간이야. 흥, 공간 좋아하시네.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해요. 돈이 곧 힘이고 밥이고 권력이라는 걸 모르세요? 이 지상엔 방 한 칸만 있으면 족한 거야. 당신은 지금 아파트 열 두채를 가진 게 힘이 될른지는 모르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 앗는 악랄한 수법이야. 그건 또 무슨 개 뼈다귀 철학이에요? 내 말 한 번 새겨 들어봐. 힘 없고 돈 없는 서민들이 집 한 채 장만하려면 몇 십 년이 걸린다구. 당신이 집 한 채를 사들일 때마다 당신은 그런 서민들의 집 구입할 기회를 빼앗는 거야, 알겠어? 어이구, 우리 집안에 노벨 평화상 수상 감 한 인물이 나셨네 그려. 이 보세요, 오진실 씨! 당신이 지금 밥술이나 먹 고 아랫목에 따땃하게 누울 수 있는 건 이 박미순의 능수능란 한 재테크의 덕인 줄 아세요, 이제 감이 좀 오시나요? 이봐, 박미순 씨! 당신 그러다 한 번 큰 코 다치는 경우가 있으니 조 심하라구. 에게게, 쥐꼬리만한 접장 월급이 뭐 그리 대단하다 고 큰 소리는 큰 소리야. 당신 한 달 월급 그거 나한텐 껌 값 에 불과해, 아셨어요? 박미순 씨, 우리 두 사람은 코드가 안 맞고 앙상블이 개판이나 이제 그만 둡시다. (사이) 보셨죠? 언 제나 이런 식입니다. 한 쪽은 논리적으로 따지는데, 한쪽은 무 지막지하게 현실론으로 나오는데 대화가 성립할 수 있겠습니 까? (다시 관객을 향해) 네? 그래도 아빠 엄마가 한 이불 속에 서 잠을 자는 게 신기하다구요? 아니죠, 그게 아닙니다. 아빠 와 엄마가 한 번 대판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아빤 학 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접장 짓을 그만 두어버렸으니까요. 아, 글쎄 우리 엄마가 아빠의 승진을 위해 돈보따리를 들고 교육 감인가 교육장 집을 찾았다가 된통 욕을 얻어먹고 쫓겨난 적 이 있었지요. 그 일로 아빤 제자들 앞에 얼굴을 들고 교단에 서기가 부끄럽다며 스스로 물러나버린 겁니다. 아빤 엄말 보고 속물이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지만, 엄만 이제부터 내가 당신을 먹여 살릴테니 그 알량한 시나 실컷 쓰라며 오히 려 큰소리를 쳤으니까요. 아빤 내가 집을 나가는 게 좋겠다며 가방을 꾸렸지만, 우리 엄만 아니다, 그게 아니다.....허수아비 라도 좋으니 집 안에 남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 그래, 썩은 기 둥이라도 좋으니 집안엔 가장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아빠의 가출을 역시 입에 게거품을 물고 막는 바람에 아버지의 계획 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관객을 향해) 네? 난 어쨌느 냐구요? 엄마의 소원엔 못 미쳤지만 지방대 법학과에 말석으 로 겨우 붙긴 붙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늘과 땅이 뒤집히 는 정치적 사건들이 내 젊음을 뒤흔들어놓기 시작한 겁니다.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 흘러나오며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제3장 케 세라 세라
어둠 속에서 시위대 군중들의 함성 소리,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 기총소사 소리가 느닷없이 쏟아진다. 배경 음악으로 ‘솔아 푸르른 솔아’의 멜로디가 나직하게 깔리며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 사건, 서울의 봄과 3김의 정치활동 재개, 광주민주화운동을 무차별 진압하는 특전사의 잔인한 작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프로야구 경기, 에로영화의 스틸 사진들이 후면의 스크린에 투사되기 시작한다. (사이) ‘케 세라 세라’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무대 밝아지면 청년 모습의 주인공 오리발이 선글라스를 낀 껌을 질겅질경 씹으며 팔자걸음으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나온다.
오리발 (침을 찍 뱉으며) 케 세라 세라 케 세라 세라..... 같은 과 학우들 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스크럼을 짠 채 최루탄 속에서 피 터지게
민주화를 부르짖었지만 난 ‘케 세라 세라 케 세라 세라’만 연신 휘파람으로 불어대며 여자 헌팅 하는 데만 바빴죠. (여자 관객 하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네? ‘케 세라 세라’가 무슨 뜻이냐구요? 음, 그러니까...... 본뜻은 ‘뭐가 됐던 될 것은 다 되게 돼 있다’ 즉, 될 대로 되라 배 째라 식인 거죠. (허공을 올려다 보며) 수철아, 영민 아, 지숙아.....(주먹 쥔 손을 아래 위로 흔들어 보이며) 니들이 아 무리 주먹 쥐고 입에 게거품 물고 민주, 민주!, 자유, 자유!, 독재 타도를 외쳐도 군부 독재 정권 수립은 다 되게 돼 있다 이거죠. 니들이 아무리 맨땅에 헤딩해도 그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 이 말이죠. (자신의 구두코를 내려다보며 무료한 듯) 아, 진짜 미 치겠더라구요. 학교 문은 굳게 닫힌 채 그 앞을 탱크가 진을 치고 있죠, 생각 제대로 박힌 계집들은 입에 마스크 하고 거리로 쏟아 져 나갔죠, 이거 참 심심해서 미치고 폴짝 뛰겠더라구요. (무대 위를 무료한 듯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 며) 그런데, 그런데 어늘 갑자기 말이죠,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더라구요. (갑자기 팔을 들어 춤을 추는 시 늉을 해 보이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우리 조상님네의 연애 철학이 섬광처럼 대가리 한 구석을 탁 치 는 거지 뭡니까. (음흉하게 웃으며 한동안 입맛을 다시다가) 그래, 결혼하고 나면 마누라에게 뒷덜미를 잡혀 옴짝 달싹 못하니 이참 에 계집들 헌팅이나 해서 재미 좀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 라구요. 참, 나의 생각과 행동을 언제나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우 리 엄마가 날 보고 뭐라는 줄 아세요? (어머니의 목소리 흉내로) 오리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명심해서 들어라. 이 구멍 저 구멍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들쑤시고 다니다가 신세 조질 때가 있으니 조심해라, 니놈이 데리고 살 계집은 가문 좋고 끝발 좋고 돈발 좋 은 여자여야 하느니라. 그런 여잘 발견하면 무조건 자빠뜨려 조져 놓고 볼 일이다, 알겠니? 그래도 엄마, 돈도, 끝발도, 권력도 좋지 만 둘 사이에 사랑이 있어야 하잖아요? (어머니의 흉내로 삿대질을 하며) 이런 쑥맥을 봤나? 야, 이놈아! 사랑이 밥 먹여주던, 돈다발 을 안겨주던, 끝발을 세워주던, 응? 그런 걸 제대로 갖추기만 하면 사랑은 에피타이저 식으로 절로 따라오는 거야, 알았어? 엄마하고 아빠 사이엔 그런 법칙이 없는 것 같은 데요? (어머니의 흉내로) 야, 이 녀석아! 그러니까 엄마 아빠 사이는 앙상블이 개판 아니겠 니. 너도 그런 개판으로 니 인생 종치고 싶어? 그런데 그런 조건 좋은 여자를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어머니의 흉내로) 그러니까 두 눈에 불을 켜고 그런 여잘 찾아다녀야지. 발견만 하면 어떤 수를 쓰던지 자빠뜨려 니 사람으로 만들어라. 뒷일은 이 엄마가 다 책임 질 테니 걱정은 붙들어 매고, 알았지?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 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술을 마시다 우리나라 굴 지의 재벌 맏손녀를 만나게 된 겁니다. 그 계집은 좀체로 빈틈을 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오리발이 어떤 놈입니까? 그걸 그냥 놔둘리 있겠습니까? 어느 날 그녀가 약간 취기에 오른 것 같 아 모텔에 데리고 들어가 그냥 자빠뜨리고 손을 본 겁니다. (갑자 기 컬썩 주저 앉으며)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가? 우리 오씨 가문의 씨앗을 그 계집의 몸속에 심어 두어야 하는데, 고 앙큼한 계집이 피임 관리를 과학적 체게적으로 잘 하는 모양인지 임신 소 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자빠뜨리기로 한 겁니다. (사이) 그런데 어느 날 그 계집이 정색을 나한테 묻는 겁 니다. (그녀의 흉내를 내며) 오빠, 날 사랑하기나 해? 뜬금없이 그 건 또 무슨 말이야? 오빤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보려고 하지 않 고 자꾸 몸만 탐하려고 그래? 야, 미정아. 이미 내 몸속에는 너의 몸에 대한 기억뿐이야. 니 몸을 탐해야만 너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걸 어쩌겠니? 너, 그런 말 모르니? 몸이 돋 사랑이고 사랑이 곧 몸이라는 거 말이야. 아이, 오빠두 무슨 개똥 철학을 풀고 있어? 아니야, 임마! 이건 실존철학을 주장한 하이데 거라는 철학자가 그의 저서 ‘몸의 철학’에서 주장한 학설이야. 그 래? 그럼 오빠의 사랑을 확인하려면 오빠에게 자꾸 내 몸을 주어 야겠네? 빙고, 빙고! 두 말하면 잔 소리지. (갑자기 운명 교향곡의 서두 부분이 흘러나오다 사라진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 력입니까? 덜컥 그 계집이 임신을 하자 자세한 뒷 조사를 해 봤 는데 재벌 맏손녀라는 건 말짱 꽝이지 뭡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의 관계는 서로의 좋은 추억으로 삼고 헤어지는 게 어떻느냐니까 아, 그래 이 계집이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지 뭡니까? 아, 혼인 빙자 간음협의로 고소하겠다는데 어쩝니까? 우리 엄마가 그 계집 에게 큰 거 한 장을 위로금 조로 주고 뒷마무리 깨끗이 해 버린 겁니다. 난 그걸 보고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줄 알았습니다. (관객 중 어느 한 사람을 내려다보며) 네? 그런데 학교는 무사하 게 졸업할 수 있었냐구요? 명색이 법대는 졸업했지만 사법고시하 고 나하곤 인연이 없었던 것 같아요. 헌법 조문을 달달 외워도 정 작 생각나는 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 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뭐 이런 정도만 기억 났으니까요. 까짓 건, 헌법 조문 많으면 뭐합니까! 모든 권력은 국 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이것조차 제대로 잘 지켜지지 않는 개판 세상인데 자질구레한 헌법 조항 있으면 뭐 합니까. (관객 석을 향 해 심드렁하게) 야, 이 정도 하면 박수갈채가 쏟아질 줄 알았는 데, (객석을 손가락질 하며) 오늘 관객은 영 수준이 아니구먼. 사 법고시 시험에 연거푸 네 번을 미끄러지고 나서야 주제 파악을 하고, 아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아 이 길은 내 인생의 로 드맵이 아니구나 하고 정신을 차리고 유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흉내로) 오리발, 그래 생각 잘 했다. 이제부턴 내 뒤를 따라다니며 돈 버는 기술이나 차근차근 익혀라, 돈이면 이 세상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돈 있으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권 력이 무릎을 꿇고, 그러면 사랑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거란다. 난 우리 엄마의 ‘가방 모찌’가 되어 재테크의 노하우를 차근차근 쌓아 나갔습니다. 아파트 한 채 뚝딱 사서 그 자리에서 한 오천 프리미엄 붙여 훌딱 넘기고, 한 두어 채 팔면 금방 큰 거 하나가 굴러 들어오는데 눈이 확 뒤집히기 시작했죠. (관객 하나를 찬찬 히 내려다보다가) 네? 그렇게 돈을 버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겠다구요? 빙고, 빙고! 네, 맞았습니다.
갑자기 카바레의 블루스 음악이 촉촉하게 깔리기 시작한다. 오리발은 앞에 여자가 있기라도 하듯 춤추는 포즈를 취하며 한동안 무대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오리발 왜 아니겠습니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낮에는 우리 엄마의 가 방 모찌, 밤엔 카바레를 드나들며 블루스, 지루박, 탱고, 차차차 등의 레퍼토리를 개발하며 주지육림에 빠져들기 시작한 거죠.(시 위대의 함성이 나지막하게 연신 깔리는 가운데) 머리 희떡 까진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들이 스포츠에 열광하여 비판정신이 해롱해 롱 해지게 프로 야구를 창설해도, 난 담배 연기 자욱한 카뱌레에 서 차차차를 추고, 얼굴에 개기름 번지르르한 전두환 대통령은 국 민들의 비판정신이 핼레레해지게 에로 영화를 마구 상영하라고 해도, 난 여인들의 욕망이 들끓는 캬바레에서 블루스를 추며 세월 아, 네월아 시간만 죽이며 아까운 청춘을 허비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색골 과부에게 뒷덜미를 잡혀 밤새도록 코피 터 지게 봉사하다가 문득 깨달은 겁니다. 이 짓도 오래 할 것이 못 된다. 허전한 아랫도리를 겨우 겨우 움직여 집에 돌아와 보니 이 게 웬 날벼락입니까?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우리 엄마가, 그렇게 날고 기던 우리 엄마가 뇌일혈로 쓰러진 겁니다. 얼굴 반반한 젊 은 사이비 교주가 소개한 투기업자에게 레저 타운 개발 자금을 몇 십억 투자했다가 홀딱 다 날린 겁니다. 빌딩 몇 채 떡 주무르 듯 하던 우리 엄마가 하루아침에 쪽박을 찬 겁니다. 투기업자와 사이비 교주의 사기극에 말려든 거죠. (사이) 그래서 우리 엄만 머리 빡빡 깎고 절로 들어가고, 형은 아직까지 김삿갓처럼 유럽 전역을 무전여행으로 돌아다니고, 아버진 고시방에 틀어박혀 시 나부랭이나 쓰게 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겁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오씨 가문이 공중분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겁니다. (사이) 인근에 있는 절로 우리 엄마를 찾아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난 아 슴하게 들려오는 염불과 목탁소리를 듣고, 난 문득 내가 갈 길은 바로 이 길이구나, 내 인생의 로드맵은 바로 이거구나 하고 전광 석화처럼 깨달은 겁니다. (갑자기 목탁 두드리는 흉내를 내며) 그 래 바로 이거야! 지금까진 우리 엄마의 조종에 의해 살아왔지만 이제부턴 내가 내 인생을 조종하겠다, 하고 말입니다. 베이루트로
잠적한 겁니다. 가자, 사이비의 천국으로! (무대 암전)
제4장 시절이 하 수상하니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목탁 소리와 함께 염불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대 후면의 스크린에 최근의 사건들에 관한 신문기사의 헤드라인 제목과 사진들, 그리고 조깅하는 사람들, 성형 수술로 몸매를 가꾸는 여인들, 촛불 시위, 4대강 삽질하는 장면, 보수와 진보 단체의 시위 장면 등의 사진들이 투사된다. (사이) 지하철 전동차 달리는 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지면 주인공 오리발이 머리에는 울긋불긋한 고깔 모자, 그리고 도포를 걸친 채 전동차에 흔들리는 마임을 하기 시작한다.
오리발 (소매 깃 속에서 아주 작은 목탁을 꺼낸 뒤 좌중을 둘러보며 입맛 을 다시기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어, 어, 음, 음...홍알 홍알, 홍알 홍알, 어쩌구 저쩌구, 저쩌구 어쩌구, 홍알 홍알, 홍알 홍 알...방금 베이루트에서 수도를 끝내고 방금 귀국했느니라. 베이루 트엔 나의 영적인 스승 칼릴 지브란에 계시는데, 난 그 분 밑에서 영적인 수련를 거치면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길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느니라. 계룡 산이면 게룡산이지 왜 이국 만리 베이루트까지 갔느냐고? 지금 우리 한국은 썩을 대로 썩어, 시절이 하 수상하여 세상 모르고 살 기 위해 그곳까지 갔었느니라. (객석을 한 바퀴 휘둘러 내려다보 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썩었느냐구? 모두 눈을 감고 자신의 가슴 에 손을 얹은 뒤 냉철하게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썩었는지 선명하게 보일 것이니라. (객석으로 내려가 어느 여자 관객 한 사람을 지목한 뒤) 그래, 썩은 것을 보았느냐? 뭐라 고, 난 착하고 깨끗하게 살아와 후회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허 허, 허... 남의 허물은 볼 줄 알면서 제 눈에 대들보는 보지 못 하 는 구나. (다시 다른 여자를 하나 지목한 뒤 자세하게 얼굴을 들 여다 본 뒤) 자세히 보니 너도 얼굴에 손을 좀 댄 모양이구나. 성 형 하면 서면이 으뜸으로 꼽히지.(CF 속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아직도 성형하려 서면에 가니? 요즘 이런 광고 문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더구나. (다시 무대 위의 에이프런에 걸터앉으며) 아침 저녁으로 집 주위를 한 번 들러 보거라. (갑자기 뛰어내려 엉덩이 를 비쭉거려 조깅하는 흉내를 내며) 아줌마고 할머니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살을 뺀다고 난리 블루스가 아니더냐.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어) 아저씨, 살 빼는 게 뭐 크리 큰 죄나 된다고 심각하게 씨부렁거려요, 네? 아니, 쭉쭉 빵빵 가슴 풍만 하면 남자들 눈요 기에 얼마나 좋아요. (갑자기 목탁을 두드리며) 홍알 홍알, 홍알 홍알, 어쩌구 저쩌구...허허, 말세로다 말세! 모두들 몸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걸 왜 모르느냐, 정신과 영혼에 끼인 때는 뺄 생각은 않으면서 추악한 비게 덩어리에 끼인 때만 빼려고 그리 안달인지 내 알다가도 모르겠느니라.
저쪽 어딘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사람의 신들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오리발이 갑자기 긴장한다.
소 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썩을 대로 썩어 이제 곧 심판을 받을 때가 다가 왔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천국의 문으로 들어갑 니다.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예수를 믿으십시오.
오리발 (볼멘 소리로) 이보시오, 이보시오! 거짓말을 해도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하세요, 네? 그렇게 협박 공갈에 으름장을 놓는데 누가 교회 문턱을 넘어 가겠소?
소 리 무신 씰 데 없는 소릴 씨부리고 있노?
오리발 (객석을 둘러보며) 여기, 여기 이 사람들 교회에 안 가도 다 착 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 많소이다. 그렇게 위협 아닌 위협을 하는데 누가 교회를 찾겠습니까? 입 닫고 가만 있는 게 신도수 늘리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소 리 치아라! 니나 아가리 쳐 닫아라!
오리발 (무대 위로 올라가서 객석을 향해) 네? 정말 베이루트에서 칼릴 지브란 밑에서 영혼을 수련했느냐구요? (주위를 흘낏 살피다가 속삭이듯이) 뻥이요, 뻥! 계룡산을 내려오면서 난 이렇게 결심했 습니다. 그래, 사기를 치더라도 격을 높여서 지적으로 사기를 쳐 야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내 설법을 듣기 위 해 좌정하면 저, 로마의 어느 노예 철학자가 했다는 무소유의 철 학을 설파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뻗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식을 잃었다고 슬퍼하거나 상심하지 말라. 그 아이는 원래 너 의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 아이의 원래 주인이 잠시 너에게 맡겨 놓은 것이니라. 이제 그 원래 주인이 아이를 찾아갔다고 생각하 라. 돈과 명예를 잃었다고 절망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그것들 은 원래 너의 것이 아니었느니라. 원래 주인이 너에게 잠시 맡겨 놓은 것에 불과하느니라. 다시 그 주인이 맡겨 놓은 것을 찾아갔 다고 생각하라...어쩌구, 저쩌구, 저쩌구 어쩌구, 홍알 홍알, 홍알 홍알...이렇게 미사여구에 철학적인 명상을 살살 풀어 버무려 설 법을 끝내면 모두들 아편에 취한 듯 살짝 맛이 가더군요. 먹물 좀 든 사람들이 더 지랄 발광을 하더군요. 자, 이 때가 기횝니다. 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얼맙니까? (여자 목소 리를 흉내 내며) 교주님, 한 10만 원이면 어떨까요? 어서 이마를 내미십시오. (이마에 도장 찍는 흉내를 내며) 쾅! 그쪽은 얼맙니 까?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어) 거, 한 백 만원 내겠어요. (더 큰 소리로) 어서 이마를 내미십시오, 쾅! (살그머니 눈을 뜨며) 그쪽 은 또 얼맙니까? (여자 목소리로 흉내 내며) 전 큰 거 한 장 내 겠습니다. (더욱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어서 이마를 내미십 시오, 쾅, 쾅!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로) 교주님, 전 돈 대신 쭉 쭉 빵빵, 이 아름다운 몸을 공양으로 바치겠습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입맛을 다시며) 어서 누우십시오, 홍콩으로 보내 드리지 요. 쾅, 쾅, 쾅! (관객 한 사람을 빤히 내려다보며) 네? 이상한 사이비 교주도 다 본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난 여느 사이비 교 주완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좀 유식한 표현을 쓴다면 인텔리겐챠 교주였지요. 난 설법을 통해 그들의 정신과 영혼에 자양분을 제 공하는 금쪽같은 삶의 철학을 주었고, 그들은 나에게 돈과 재물, 그리고 몸을 주었지요. 네? 여자들의 몸을 탐한 건 좀 너무 한 것 같다구요?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어 보이며) 아니, 그게 아 니지요. 내가 어디 몸을 달라고 보채기라도 했답니까? 그들 스스 로 몸을 주고 사랑을 주는데 안 받으면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고 받고, 주니까 받고, 받으니까 주고....어, 그 렇지 기브 앤 테이크! (주위를 들러보다가 속삭이듯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거, 얼마 전에 이런 사건 있었잖습니까? 건설업자들은 검사들에게 성 상납을 하고, 대신 검사들은 그들의 뒤를 봐 주다가 들통 난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에 연루된 검사 의 부인이 얼굴이 새파래 가지고 절 찾아 왔더군요. (여자의 목 소리로) 교주님, 제 남편을 어떻게 살릴 수 없을까요? 아니, 그 럼 댁의 남편이 죽어있단 말입니까? 두 눈 말똥 말똥 뜬 채 살 아 있는 사람을 살려 달라니요? 그게 아니라...그이가 자리에서 쫓겨나면 전 못 살아요. 교주님의 전지전능하신 주술로 제발 어 떻게 좀 해 주세요, 네? 부인,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부인 께선 검사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죄 지은 사람을 기소하여 재판정에 세우는 거지요. 부인, 죄 지은 사람을 기소하 는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히 죄 값을 받아야지요. 죄 값을 안 받고 미꾸라지 빠지듯이 빠져 나간다면 다른 죄인들이 누굴 믿고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돈이면 돈, 아님 몸을 바 치라면 바칠 테니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네? (사이) 허허, 그래요? 그럼 그러지요. 난 오늘 밤에 부인을 홍콩 보내 드릴 테 니, 당신 남편은 교도소로 고이 보내드리도록 합시다. (갑자기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오리발이 흠칫 놀라며 주위를 살피 다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다.)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 일이 있 듯, 호사다마라고...저의 그런 사이비 교주 행각도 그만 덜컥 덜 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사이) 한 몇 년 콩밥을 먹고 나오니까
세상 정말 많이 달라졌더군요. 우리 엄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다시 가발 쓰고 속세로 나와 본업을 신장개업하고, 형은 어느새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저명한 교수가 되어 있더군요. 우리 아버지요? 유명한 시인으로 베스트셀러 시집으로 강연이다 사인 회다 눈 코 뜰 새가 없이 바쁘더군요. (관객을 향해) 저요? 무슨 일로 젊은 나이에 이곳 저승 재판정에 왔느냐구요? (쓴 웃음을 짓고 나서)출소 기념으로 막걸리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걸 어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허공에서 거대한 손이 하나 내려와 내 뒷덜미를 낚아채 가더군요. 허공으로 끌려 올라가면서 무슨 차가 부딪치는 소릴 듣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 는지 금시초문, 황당무계, 어리벙벙,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습 니다. (관객 석을 한 바퀴 휙 들러보고 난 뒤) 그런데 여러분들 은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갑자기 ‘탕, 탕, 탕’ 하고 판결문 낭독을 선언하는 나무망치 소리가 들린다. 오리발이 자세를 낮추며 몸을 추스르기 시작하는 가운데 서서히 암전.
제5장 네, 제가 제 죄를 알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철문이 닫히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빈 복도를 울리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사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나무망치 소리가 좌중의 소란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세차게 울리는 가운데 무대 밝아지면, 주인공 오리발이 허공을 두려운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뒤이어 재판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소 리 피고, 오리발! 이래도 니놈이 니 죄를 인정 못 하겠느냐?
오리발 (객석 위 허공을 올려다보며) 하, 나 참...아니, 재판장님! 내가 무 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이런 닦달입니까, 네?
소 리 정말 니가 니 죄를 모른단 말이냐?
오리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아니, 그런 게 아니고...죄 를 지은 것도 같고 짓지 않은 것도 같고 뭐,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죄의 범위라는 게 애매모호해서 감이 잘 잡히지 않 는다 이 말입니다. (갑자기 객석을 한 바퀴 휘둘러 보며) 거기 모 인 당신들, 죄가 있는 사람 있으면 어디 발 한 번 들어 보세요.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보세요, 발 하나 꿈쩍 하는 사람이 없잖습 니까? 저 사람들 말이지요, 지금까지 죄를 하나도 안 지은 게 아 니라, 어디까지가 죽을죄에 해당되는지 망설이느라 저러는 게 분 명해요. 아, 사실 탁 까놓고 말해서 이 세상에 우리 말고도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 수두룩하잖습니까? 제가 하나씩 예를 들어 설 명해 볼까요? (오리발이 하나씩 예를 들어 설명할 때마다 신문기 사의 헤드라인 제목이나 관련 사진들이 무대 후면의 스크린에 영 상으로 투사된다. 성에 대해선 무지몽매한 초등학생이나 중학교 여학생을 잡아다 성폭행을 하는 놈들, 이런 놈들은 탁 잡아다 놓 고 거시기를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니까요. 검찰청 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전혀 그런 일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다가, 열댓 시간 심문 받고 나오면 어쩔 수 없이 그리 됐습니다 하고 동정표를 구하는 철면피한 경제사범들과 정치인들, 탈세를 해가며 변칙 플레이로 자식놈에게 수천억 재산을 물려주는 재벌 총수에게 한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면죄부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검찰 의 뻔뻔한 태도, 4대강 삽질 예산 10퍼센트면 전국 초중고생 무 상 급식을 할 수 있다는 데도, 또한 종교인들, 시인들, 사회 저명 인사들이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입에 침을 발라가며 얘기해도 소귀에 경 읽기인 경제 관료들의 무감각한 태도, 신성한 국토방위 의무를 수행해야함에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미꾸 라지 빠져 나가듯 병역을 회피하는 사람들, 브라운관에 한 번 얼 굴을 내밀려면 이 놈 저 놈에게 성상납을 해야 하고, 결국은 그걸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연예계 비리, 전직 대통령까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해야 하는 마녀 사냥, 어제는 원 수, 오늘은 친구 식으로 의리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정치판의 권 모술수...아, 이런 사람들은 왜 가만 놔두고 힘 없고 배경 없는 우 리 같은 서민들만 달달 볶느냐 이 말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부 터 솔선수범 먼저 조치하고 우릴 건드려야 한다고 강력히, 소리 내어 외치는 바입니다. (객석을 빤히 바라보며) 이쯤 되면 박수갈 채가 쏟아져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소 리 그건 내 알 바 없고, 그래 한 번 물어보자. 니 놈이 여태 건드린 여자들만 해도 솔찮이 될 텐데?
오리발 전 말이지요, 쩨쩨하게 어린 딸아이들을 건드린 적은 없습니다. 아, 내가 가만있어도 저쪽에서 먼저 옷 벗고 날 잡아 잡수시오 하고 달려드는데, 공자 맹자 아닌 이상 안 동하고 배겨 냅니까? (항의하듯 소매를 걷어 붙이며)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내 한 마디 하겠수다. 남녀 관계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왜 법이 떡 놔라 감 놔라 간섭하는 겁니까? 아, 남녀의 아랫도리까 지 국가가 관리해야 합니까? (객석응 향해) 여러분, 남녀의 거시 기까지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데 찬성하는 사람 발 한 번 들어 보세요. 이것 보세요, 아무도 발을 안 드는 거 보시라구요. 아, 손바닥도 마주 보고 때려야 울리지 한 손만 아무리 흔들어 봤자 말짱 도루묵이라니까요. 성 범죄, 성 범죄 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떠드는데, 물론 남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만...여자들도 문제 가 있다고 봅니다. 즉, 여자들도 원인 제공을 하고 있다 이 말입 니다. 여름철에 지하철을 한 번 타 보세요, 정말 가관입니다, 가 관! 속살이 환히 비치는 옷을 입지 않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데 속옷이 삐주름 비치질 않나, 풍만한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무방비한 앞가슴...아, 이렇게 원인 제공들이 부지기수 인데 어느 남자라고 아랫도리가 불끈불끈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 겠습니까? (가느스름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아, 나는 여름철 지 하철이 너무 좋아, 아이 러브 지하철 인 섬머, 아이 라이크 누 드 인 섬머!
소 리 좋아, 좋아! 그래, 니놈의 그 궤변 철학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 니니 내 어느 정도는 정상 참작을 하겠다. 그런데, 그런데 오리 발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를 너무 많이 저 질렀다. 그건 인정하겠지?
오리발 보이지 않는 죄요? 보이지 않는 큰 손 이야기는 내 들어봤어도 보이지 않는 죄는 금시초문인데요?
소 리 좋아! 그럼 니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부터 증거 자료를 제 시할 테니 잘 보도록 해라.
무대 갑자기 어두워지자 가쁜 숨소리를 배경으로 깔며 무대 후면의 스크린에 오리발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가지의 행적이 사진 자료로 하나씩 투사되기 시작한다. 국영수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을 들락거리는 아이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장면,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장면, 여자와 함께 모텔을 들락거리는 장면 등이 하나씩 펼쳐진다.
소 리 이래도 오리발을 내밀 터이냐?
오리발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글쎄 저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오 리발이라는 한 사내의 일생이 다큐멘타리처럼 소개된 게 뭐 큰 잘못이라는 겁니까? (회상에 젓는 표정으로) 그저 우리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하고, 그저 우리 엄마가 시키는 대로 밤늦 게까지 학교에 붙어 있고, 그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시위 현장은 위험하다니까 술집에서 노닥거리고, 그저 우리 엄마가 정해 준 여자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아, 사이비 교주 노릇한 건 우리 엄 마가 시켜서 한 건 아닙니다. 지금까진 내가 세상에 농락당해 살 아 왔으니까 이번만은 내가 세상을 한 번 농락해야 하겠구나 하 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한 겁니다. (허공을 빤히 바라보며) 그래, 이게 뭐가 큰 죽을죄에 해당된다는 겁니까, 네?
소 리 그래, 그래 바로 그게 죽을죄에 해당되느니라. 넌, 지금까지 한 번도 니놈 뜻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늘 니놈 엄마가 시키는 대 로 살아왔을 뿐이다. 즉, 자율적으로 주체적으로 니놈 인생을 산 게 아니라, 늘 타율적으로 조종하는 대로 허수아비처럼 니 인생 을 낭비하며 살아온 거야. 어때, 이래도 오리발을 내밀 터이냐?
갑자기 오리발이 털썩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하며 괴로워한다. (사이) 사이키델릭 조명과 함께 혼란스러운 음악이 무대를 흥건하게 적시기 시작한다. (사이) 오리발이 갑자기 일어서며 사이키델릭 조명 속에서 무대를 휘청 휘청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사이) 갑자기 판결을 언도하는 망치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무대 환히 밝아진다.
소 리 그래, 인제 니가 니 죄를 알겠느냐?
오리발 (무대 중앙의 단 위로 올라가 의자 위에 선 채 고개를 숙이며) 네, 제가 제 죄를 알겠습니다.
소 리 그럼, 지금부터 피고 오리발에게 선고를 하겠다. 피고 오리발은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꾸리지 못 한 채, 항상 타율적으로 인생을 낭비해 온 죄가 인정되기에...천 상 형법 제 72조 3항에 의거해 지옥 불구덩 행을 선고한다. (망 치를 세 번 내려친다.) 최후 변론을 하겠나?
오리발 (오랏줄을 목에 걸고 고개를 끄덕인다) 최후 변론을 로마의 노예 철학자의 말로 대신 하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돈과 명예를 잃었다고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원래 그것들은 그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잠시 맡겨 놓았을 뿐이다. 그것을 이제 원래 주인이 되찾아 갔다고 생각하라. (관객을 향해) 여러 분, 나처럼 타율적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자율적 인 나만의 삶을 꾸려 가십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늦었다 고 생각할 때가 빠른 것입니다. (갑자기 큰 소리로) 재판장님, 이 건 너무 억울합니다. 저기 저 사람들은 왜 가만 두고 왜 나만 희 생양으로 삼는 겁니까. 네? 빨리 이 오랏줄을 풀어주세요, 네?
오리발이 발버둥을 치며 발악을 하지만 오랏줄은 서서히 위로 올라간다. 갑자기 무대 어두워지며 혼란스러운 음악이 무대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사이) 무겁고 장중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서서히 幕.
? 초연 : 1981년(이영식 모노드라마 300회 공연)
? 재공연 : 2010년 다시 고쳐 씀(호민 모노드라마, 미리내 소극장)
** [KBS 시사기획 창] 전두환 353회 2021. 11. 28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