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나폴레옹으로 이름 바꾸고 30살에 쿠데타… 코르시카 ‘촌놈’, 대권을 잡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2] [나폴레옹 다시 보기] [상] 권력 잡은 섬소년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섬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그가 프랑스 장군이 되고 황제로 등극하는 것은 코르시카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768년,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소속 영토였던 코르시카가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di Buonaparte)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지지하는 편에서 싸우다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덕분에 프랑스 국왕에게서 귀족 작위를 얻었다. 나폴레옹의 운명은 여기에서부터 방향이 잡혔다.

당시는 장교가 되려면 귀족 작위가 필요하던 때다. 나폴레옹은 브리엔(Brienne-le-Château)의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파리의 군사 학교(Ecole Militaire)에 진학했다. 동급생 귀족 자제들은 코르시카 사투리가 심한 그를 거의 외국인 취급을 하며 놀려댔다. 코르시카어는 불어와 크게 달라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진격 명령을 못 알아들은 코르시카 출신 병사가 명령불복종 죄로 처형당한 일도 있다. 말수 없고 친구 없는 곱슬머리 코르시카 청년은 독서에 매진하였고, 계몽주의 사상과 문학, 역사에 흠뻑 빠졌다.

출처: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6/01/YICBWFXJRBGJPPXWECQQPC4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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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권력과 얼굴] 舊敎의 나라 프랑스에서… 최초로 新敎徒 왕이 된 '앙리 4세'

교황을 들러리로 만든 나폴레옹, 유럽을 가족기업처럼 주물렀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3] [나폴레옹 다시 보기] [중] 제국의 끝없는 전쟁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무력 팽창을 시도했다. 우선 프랑스혁명 중 상실한 식민 제국을 재건하겠다며 1801년 말에 처남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2만명의 원정군을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섬에 파견했다. 이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프랑스혁명 당시 해방되어 이미 자유의 맛을 알게 된 흑인들은 다시 노예제로 돌아가느니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여기에 가공할 만한 감염병인 황열병이 퍼져 엄청난 수의 프랑스군이 희생됐다. 결국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생도맹그는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해방 노예 출신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식민 제국 회복이 가망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이참에 루이지애나도 처분했다. 원래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이 광대한 땅은 7년전쟁(1756~1763) 패배로 스페인에게 넘어갔다가 나폴레옹이 되찾으려 했지만, 강력한 영국 해군 때문에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영국으로 넘어가게 내버려두느니 차라리 미국 정부에 판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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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이 정의라 믿은 독재자 나폴레옹… 러시아 눈밭서 신화는 끝났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4]
[나폴레옹 다시 보기] [下] 제국의 종말

나폴레옹이 겪은 최악의 실패는 러시아 침공이다. 러시아는 대륙 봉쇄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고, 폴란드에서 프랑스의 이해를 침해하려 했다.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선수를 쳐서 러시아 침공을 결정했다. 20국 출신의 병력 60만명으로 대군을 구성하여 1812년 6월 24일 네만강을 넘었다. 원정군으로서는 빨리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머쥐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이를 간파한 러시아는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9월 7일에 가서야 보로디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리를 거둔 대군은 모스크바로 진격해 갔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쿠투조프 장군은 스스로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가 화염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다만 성스러운 도시를 불태운 적그리스도라는 오명만 얻었다. 추위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대군은 10월 말 후퇴를 결정했다.

출처: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6/29/Y42QQZZ36REH7HHDQIC3YXL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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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60만 대군 이끌고 갔지만… 5만명 살아남고 패퇴했어요

입력 : 2022.04.06 03:30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러시아가 영국봉쇄령 파기하자 프로이센 등 연합해 응징 나섰지만
지형·기후 고려 못해 참패했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사실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가 유럽을 통치하는 것을 지지하고, 영국 대륙봉쇄령에도 참가했어요. 하지만 당시 영국은 식민지의 상품을 실은 배를 중립국의 배로 가장한 채 러시아 해안으로 들어가곤 했고, 러시아는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어요. 나폴레옹은 이런 상황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고 있었죠. 그러던 중 영국이 600척의 배를 한꺼번에 발트 해역에 정박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분노한 나폴레옹은 장군을 보내 그 지역을 점령하게 했는데, 하필 그곳에 알렉산드르 1세 친척의 영지가 있었던 거예요. 프랑스와 러시아의 갈등은 점차 극으로 치달았어요.

출처: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2/04/06/2022040600033.html

** KBS [시사기획 창] 368회 안전지대는 없다, 푸틴의 전쟁        2022. 04. 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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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국가 위기에 일어선 시민들… 세계 곳곳의 숨은 영웅이죠

의병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입력 2025.06.04. 00:35

1806년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에 실패한 뒤 영국에 대한 경제 봉쇄 조치인 ‘대륙 봉쇄령’을 선포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죠. 그런데 포르투갈이 이에 불응했고 나폴레옹군은 1807년 포르투갈 원정에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을 경유한 프랑스 군대는 무려 10만명이 넘는 군대를 마드리드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 주둔시킵니다. 사실상의 군사 점령이었죠.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프랑스 군인들(오른쪽)이 봉기에 가담한 마드리드 시민들을 처형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위키피디아

출처: https://www.chosun.com/national/nie/2025/06/04/R645IC72GFGXLDW6OEAB32IPYU/


스페인 화가 고야의 위대한 걸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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