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미사 공모전 "소설부문" 발표를 보고]
공모전 소설부문 발표를 보고
공모전 발표를 보고 소설부문에 전혀 입상작을 내지 않은데
대해 실망감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불모지에 가까운 카톨릭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전문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작품성과 신앙의 깊이를 황금비율로
갖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전문작가라고 해도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깊이를 주님 외에 그 누가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소설이라 하여도 문학작품인 만큼 작품성을 갖추지 않으면,
신앙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비중을 주다보면 문학작품이 아니라,
선전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이 커집니다.
시와 수필은 자신의 내면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내어도 작품이 되지만,
소설은 픽션(FICTION)에서 출발해야 하고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연설문이 아니라, 비유라든가 분위기,
상징등의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은은한 향기처럼 점진적으로
주제가 배어나오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19세기 미국소설 멜빌의 "백경"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오래 읽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얀 고래의 하얀색에 대한 선의 이미지와
악의 이미지를 여러 차례 작가가 작품 속에 헤깔리게 언급하므로서
주제를 "애매하게 만듬(AMBIGUITY)"탓이라고도 합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메세지가 아닌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내면 강력한 메세지 전달은 되겠지만,
문학작품으로서의 양질을 포기해야 하므로 그것 또한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닙니다.
소설이 형식이면 신앙은 주제입니다.
연설문이나 강론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인 소설을 쓰는 것이므로,
문학작품인 소설에 신앙적인 향기를 은은하게 배어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게
신앙 소설 쓰는 사람의 고민입니다.
소설부문에 대해 입상자를 전혀 내지 않은데 대한
이유를 읽으면서 잘 수긍하기가 어려워서 몇 자 적었습니다.
전혀 뽑지 않을 만큼의 이유는 되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서 말입니다.
이 의견이 앞으로의 공모전에도 도움되는 의견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3.10.23
황태영
끝.
[소설 관련 심사평]
......
특히, 신앙소설 부문은 3분이 응모하셨는데 문학적 완성도에 비해
신앙의 깊이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신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더욱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라며,
이번 미사 공모전에서는 시와 수필, 두 부문에 걸쳐서 시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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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2(수)
[공모전 시상안내]
미사 공모전 시상
그동안 미사 공모전에 관심을 가져 주신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1회 미사공모전은 신앙을 주제로 문학, 영상, 게임 부문에 걸쳐서 공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게임이나 영상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2회 공모전 때는 게임과 영상 부문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문학부문에서는 시, 수필, 소설에 걸쳐서 공모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직까지 미사 공모전에 대한 홍보가 되지 않아서인지, 많은 분들이 응모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신앙소설 부문은 3분이 응모하셨는데 문학적 완성도에 비해
신앙의 깊이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신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더욱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라며,
이번 미사 공모전에서는 시와 수필, 두 부문에 걸쳐서 시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신앙수필
우수상: 김명규 미카엘 형제님의 "안당"
장려상: 홍명선 마리안나 자매님의 "신부님께 용서를 청하며"
이영애 헬레나 자매님의 "아름다운 풍경"
신앙 시
대상: 강원남 도미니 형제님의 "고해소에서"
장려: 신혜경 루실라 자매님의 "주님안의 하루"
박헌영 님의 "성심유치원 졸업식"
수필의 경우,
공모작 모두 일정 수준의 신앙체험과 문장력을 구비하고 있는데 비해
두드러진 작품이 없었으므로 대상은 선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 신앙체험이 두드러진 김명규 미카엘 형제님의 "안당"은 글쓴이의 신앙은
물론 전대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두드러진 작품이라 여겨,
우수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외 홍명선, 이영애 자매님의 수필은 흔히 접하는 일상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이 돋보이며
아울러 수필로서 일정한 문장력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장려상으로 결정했습니다.
시의 경우,
공모작의 다수가 신자들의 신앙심이 잔잔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손과 발로 뛰어다니며 가슴으로 느낀 신앙체험이 없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시가 지닌 시어의 함축성은 내용의 추상성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형식의 특성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모작 다수는 추상적인 미사어구 및 관념적인 정서를 보여주는데 그쳤습니다.
그중 강원남 도미니꼬 형제님의 작품은 신앙의 원체험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신혜경 루실라 자매님의 작품은 기도시의 정서를, 박헌영 님의 작품은 일상의 사건 속에서
성숙해지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려로 결정했습니다.
그 외에도 최효근(베네딕도)님의 "이웃에 계시는 작은 예수님" 홍명선(마리안나)님의 "성서인물과 묵상"
허애란님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강원남(도미니꼬) 님의 "십자가를 내리다"
박원식(사무엘)님의 "나의 십자가" 항상기쁨(루시아)님의 "마음 다 비우고"등이
후보 작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미사 공모전'에서는 일상에서 일어난 사건을 신앙 안에서 재조명하고,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의 만남을 소재로 한 작품에 주목하였습니다.
'신앙소설'과 '신앙시'는 일반 '소설' '시'와 달리 무엇보다도 손과 발로 뛰어다니며
가슴으로 느낀 신앙체험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할 때,
대다수의 공모작은 문학적인 의장과 실제 하는 신앙 체험이 균형 있는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끝으로 공모해 주신 여러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미사 공모전'을 통해 '신앙'이 '문학'으로 영글어진 많은 작품이 발굴되어,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평론가 안미영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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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수상 작품]
신앙수필/우수상: 김명규 미카엘 형제님의 "안당"
안당
온양본당
김명규미카엘(kmk1559@hotmail.com)
"잉이형! 나먼저 갈께!"
지게작대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무가 잔뜩 실려있는 지게를 바찬채. 저쪽에서 부지런히 마른 나무를 모으고있는 잉이형에게 소리지르자 낮을 들고있는 손을 흔들어 먼저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끙! 하는 소리와함께 지게를지고 일어났으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발자국 비틀거렸다.
더구나 평지를 걷는것도 아니고 위로 올라가려니 금방 숨이 턱에 닿았다.
백골재 너머 바닥에서 날망까지의 거리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쉬지도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경사가 심하기 때문이다.
도중에 지게를 받쳐놓을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바닥에서 지게를 지고 출발을 하면 날망에 있는
"붉은베미"까지 죽으나사나 올라갈 도리밖에 없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랫듯이 중간쯤에서부터 가슴은 터질듯이 쿵쾅거렸고 헉헉거리는 숨결은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듯이 힘이 들었다.
그럴때마다 지게를 진채 선채로 잠시 숨을 고르고 또 올라가곤 했다.
마침내 "붉은 베미".
짖누르는 어깨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한걸음씩 띄어놓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바람이
확 불어오면 거기가 바로 백골재의 정상인 "붉은베미"인 것이다.
이제부터 내려가야하는 길목에 널찍한 공터가 있었는데 바닥이 붉은 흙으로 되어있어
그렇게들 불렀다.
"일석이 이구나. 누군가 했네,"
먼저 올라와있던 석호아저씨가 나뭇지게 받치는 걸 잡아주며 반가워 했다.
"처음 해보는 철나무라 힘들지?"
철나무란 봄부터 여름까지 자란 산풀을 미리와서 베어놓고 마른다음에 다발로 묶어서 집으로 가져오는 땔감을 말한다.
"예!"
대답하고 털썩주저앉아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는 일석이 온몸을 시원한 산바람이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저아래로 동네가 한눈에 펼쳐지고 그중에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중.고등학교 운동장이다.
주위에서 제일높은 백골재에서 내려다보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있는 학생들이 꼭 개미들이 움직이는것 같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운동장엔 활기가 넘치고 있으리라.
"너도 학교 다녔으면 고등학교 삼학년쯤 돼지?"
일석이 학교쪽을 바라보고 있자 석호아저씨가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빨면서 않됐다는듯 묻는다.
"예!"
대답하는 일석의 목소리가 힘이 없다.
잠시후 어두웠던 그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입가에 웃음까지 띄우자 석호아저씨가 눈치를 챘다.
"성당에 다니는게 그렇게 좋으냐?"
일석이 씨익 웃는다.
중.고등학교 운동장 앞쪽에 가발공장이 있고 그앞에 천주교회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일석의 눈길이 거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농사지을 땅한뼘을 남기지 못한채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가장(家長)이 되어버린 일석에게
생활은 너무 힘들고 고단했다.
이렇다할 공장 하나없는 시골이고보니 어머니와 동생을 거느린 어린가장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뚜렸한 것이 없었다.
친구들이 학교에가서 공부할 시간에 그는 동아일보신문을 자뜩 옆구리에 끼고 온동네를 돌아다녀야했고 가난은 그의 집을 떠나지않고 괴롭혔다.
매일 날품팔이 농사일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마침내 앓아 눞게 되고 쌀독에서 바가지가 바닥에 부딪쳤다고 소리를 지를때쯤 어린가장은 절망을 느꼈다.
무었하나 남겨놓지않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현실이 그로하여금 삶에대한 의욕을 상실 하게했다.
"한번 가 볼래?"
한동네에 사는 또래친구 근종이가 혹시 어머니 약이라도 얻을지 모르니 성당에 가보자고 했을때
망설일만한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베드로가 친구 얘기 많이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친구 힘 내세요."
커다란 키에 새까만 통옷(수단)을 입은 미국인 신부님은 그를 꼬옥 끌어안고 반겨 주었다.
서양인의 특유한 냄새가 났지만 일석에게 싫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신부님이 주신 알약을 한달쯤 먹었을 때부터 어머니가 차츰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영양제-그당시는 거의가 영양실조 였으므로-였다.)
근종이가 가자고 할때마다 성당에 따라가서 마침내 "안당"이란 본명으로 영세를 받았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하였다.
(지금은 "안당"이란 한자식발음의 본명이 "안토니오"로 바뀌었다.)
"저사람 미친거 아녀?'
무거운 신문뭉치를 옆구리에 낀채 싱글벙글 웃고다니는 안당을 보고 사람들이 그렇게 수근댔다.
아는사람 모르는 사람 가리지않고 볼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그럴만도 했다.
세상살이 힘들고 고되어도 열심히 착하게 살면 갈수있는 "천당"이 있기에.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이 지켜보고 계시기에 하루하루 삶이 즐거울 수 밖에 없었다.
응어리진 가슴이 조금씩 풀어지고 세상이 용서되었던 것이었다.
군대에 갔다와서 그가 일하게된 직장은 양조장 이었다.
자전거에 막걸리통을 싣고 영업소. 잔치집. 상가집. 심지어는 모를 심는 들녁에까지 쉴새없이 배달하는 것이 그의 일이 었다.
어디던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는 필수적으로 막걸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어이 안당!"
애경사집에서 또는 모를 심다말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반갑게 불렀다.
언제나 웃고다니는 그의 모습이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어디로 가고 "안당"으로 모든사람에게 회자(膾炙)되면서 그는 거의 "명물"이 되다시피 되었다.
그리 크지않은 면소재지 인데다 어려서부터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을 해왔으므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당이 저사람 이름여?"
"아녀. 성당에서 지어준 이름이랴."
"어쩐지... 성당에 다녀서 사람이 저렇게 착한가?"
교리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는것도 아닌데. 성당에 나오라고 붙들고 장황하게 전교를 한것도 아닌데 그의 인간적인 "삶"이 숱한 사람들을 천주교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고.
그중에 한사람이 나였다.
떠난지 삼십여년이 지난후에 고향을 찾았을때 성당 마당에서 잡풀을 뽑고있는 안당을 만났다.
세살이 위인 그는 그사이에 하얀 머리가 된채 우리 부부를 무척이나 반가워 했다.
그는 나의 "대부님"이기도 했는데 내가 고향을 떠나 떠돌아 다니면서 생활에 쫒겨 자칮 신앙에 헤이해지는 순간순간마다 보이지않게 채칙질한 것은 그 안당의 모습이었다.
그시절 고향본당에는 장궤틀이 없이 주저앉거나 꿇어 앉아서 미사에 참례하곤 했는데
매년 9월29일 이면 미사끝에. 꿇어 앉아있는 내옆에 어김없이 하얀봉투가 놓여 있었다.
"미카엘! 본명축일 축하해. 영혼과 육신이 더욱 건강해 지도록 기도할께."
예쁜 그림이 그려져있는 카드는 물론 아니고 투박한 글씨체가 쓰여진 그냥 흰 종이였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감동은 다른 어떤것과 비교할수 없었다.
그는 그랬다.
"천주교신자는 이래야 한다."고 한번도 남에게 이야기 한적은 없다.
성당에서 너무 오랬동안 꿇어앉아 있어서 복숭아뼈에 두껍게 생겨버린 굳은살이.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생활 자체가 장황한 연설보다 몇배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는걸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객지에서 자주 고향의 소식을 접하지는 못했지만 기회 있을때마다 들은바로 안당의 일생은
"신앙인" 바로 그 자체였다.
잡풀을 뽑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나의 손을 잡은채 안내한 그의 집이 그걸 웅변으로 말해 주었다.
성당 정문을 나서면 바로 길건너에 그의 집이 있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기전 그의 집은 읍내에서 좀 떨어진 작은 마을에 있었다.
성당에 좀더 가까이 머물고 싶어서 집까지 옮긴 그에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군대에 갔을때 삼년을 제외하고 그의 생활반경은 성당으로부터 1km를 벗어나지 않았다.
정년때까지 그가다닌 직장이 성당뒤에 있는 중.고등학교 였음은 우연이었을까?
집안이 어려워 다니지 못했던 학교를 "학교아저씨"로나마 이십여년을 다녔으니 소원을 풀었다고나할지...
성당앞에 있는 집에서 성당뒤에있는 직장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그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지붕꼭대기의 십자가가. 예수님 동고상이. 그리고 파티마의 성모님과 세아이의 동고상이
그의 고단한 삶을 지켜 주었을 것이다.
"오십만원밖에 안줘유,"사무장으로 일하면 봉급은 얼마를 주느냐 했더니 옆에있던 아주머니가
불만스럽게 대답한다.
"봉급바라고 하나 뭐."
안당이 허허웃으며 뒤끝을 얼버무린다.
그렇게 보아서 그럴까? 그 얼굴이 "평회스러움" 그 자체인듯 보이는 것은...
인생의 말년을 아예 자기가 좋아하는 공간속에서 살아가기로한 그 마음의 평화를 호화별장을 자랑하고 외제골프채를 짊어지고 인천공항출구에 줄서있는 졸부들의 마음과 어찌 비교할수 있을까?
"세상에 저런사람 첨 봤슈. 성당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원."
틈만나면 성당에가서 기도하고 주변정리하는 안당의 마음을 나는 안다.
"주님이 거기 계시기에" 그의 마음이 평화로워 지는 것을....
정크리스티나: 감동적입니다. 구성도 좋구요. 이 이야기도 하고 싶고 저 이야기도 하고 싶은 욕심을 줄인다면 더 좋은 글을 쓰겠네요. [10/17-14:22]
별지기: 틈만 나면 성당 가던 엄마가 떠오릅니다. 그것이 불만인 때도 있었어요. [10/18-01:02]
아이스크림: 글은 소재, 이야기 거리가 좋아야 합니다. 좋은 소재를 편안하게 잘 쓰시는 군요. 소설을 습작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10/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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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필/장려상:홍명선 마리안나 자매님의 "신부님께 용서를 청하며"
聖書人物과 묵상
홍명선 마리안나 (oioe52@hanmir.com)
.. 聖書人物과 묵상
주제: 나는 하갈을 사랑 할 수 있다.
묵상성서 구절 : 창세기 16장
홍명선 마리아나.
그 전까지는 이 하갈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무조건 나쁜 사람. 자식을 낳았다고 주인인 사래를 억압한 교만한 여자라고만 생각 했었는데 묵상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하갈이란 인물은 우리들의 世俗的,또는肉的인 모습을 많이 내포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맘에 우러나오는 여성들 세상.. 그 안에서의 묘한 신경 전. 갈등. 질투. 또 여자이기 전 나약한 사람이다 보니 가장 어렵고 힘들때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모습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
다음 내용은 필자가 하갈이 되어서 독백형식으로 써 낸 글 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들이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그날도 어김없이 난 집안 허드렛일을 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지. 내 주인인 사래를 위하여.. 뜯어진 옷을 꿰메고 , 방청소도 하고, 세탁도 하고, 말린 옷을 게면서 “아· 나도 이렇게 예쁜 옷도 입어보고 이렇게 좋은 집에서 주인님처럼 살아 봤으면 좋겠다...”하고 푸념을 습관처럼 늘어 놨었어.
“쯧~ 한 낱 종에 불과한 이 천하디 천한 이 몸 그래도 상상이라도 해 보니 좋구나. 허긴 내가 신분이 이래서 그렇지 나도 태어나길 잘 태어 놨어봐라 주인님보다 더 잘 살수 있고 멋있게 살수 있지”. 호호호 그러면서 청소를 마치고 문을 닫고 나오는데 주인님이 날 부르시는 거야. 또 다른 심부름을 시키는구나 하고 생각이 되어 단숨에 뛰어 갔었지. 똑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가 보니 역시 주인인 사래는 우아한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어.
“주인님 부르셨어요?”하고 물어 보니 사래 마님은 예전보다 더 조심스레 나에게 말을 걸며 오늘밤 아브람 어르신을 모시라는 거야.
어머머머머 아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 천하디 천한 내가 우리 집의 대들보이신 어...어... 어르신과 잠자리에 들라니..
호호호~그래그래 내가 아이만 낳아 주면 된 다는 거지?
그게 뭐 대수야? 그나저나 이 집안의 종들이 수 십 명이나 되는데 하필이면 그중에서 날 택했을까? 허긴 그들보다 내가 낮기야 낮지.... 머리에 든 거며.. 인물이며 일처리며 후후 그동안 열심히 한 나를 주인님께서 잘 보신 것 일께야.
그렇게 그날 밤 어르신과 밤을 보내고 일어나 보니, 난 다른 세상에 태어난 기분 이었어.
분명 내가자고 일어난 집은 같았는데... 하룻밤사이 나의 위치는 달라 있었던 거야.
평상시 너무 어려웠던 그래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모했던 아브람 어르신이 글쎄 나에게 밥을 먹었냐고 물어보시고 늘 세끼 잘 챙겨 먹으라고 웃어주시고 ,잘 잤느냐 꿈은 좋은 꿈꿨느냐 등등 세심히 물어 보시는 것 아니겠어? 그래서 어르신껜 부끄러운 척하며 “네~ 네~”하고 수줍은 미소를 띄며 대답을 했지
호호호 그런데 그 모습이 더 예뻐 보였나? 그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시며 생끗 웃어 주시는 거 있지?
아! 도무지 뭐 라 표현 할 수 없는 행복하고 황홀한 기쁨이여
그간 부모를 잘못 만난 종처럼 살았던 내가 하룻밤 만에 이런 귀족 대접을 받고 살날이 올 줄이야.
아! 난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어 . 이 뱃속에 태아와 날 세심히 챙겨주시고 아껴주시는 어르신이 내 옆에 떡 하니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람?
역시 여자팔자는 뒤 엄벅 팔자라고... 아! 세상이 이렇게 밝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구나. 어제까지 만해도 같이 허드렛일 하기 바빴던 다른 종들도 슬슬 내 눈치를 보고 말이야. 호호호...
...달이 갈수록 내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처럼 정실부인인 사래가 꼴 보기 싫은 마음도 비례했어. 쳇! 남들 다 낳는 애도 못 낳는 돌계집 주제에...
그러고 보니 그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했던 것이 너무 괘씸하네?
이제 집안의 기세는 모두 나한테 기울어진 마당에 내 눈에 거슬리는 일만 해 봐라!
내가 가만히 있나.. 나도 떵떵거리며 할 말은 하고 따질건 따질 거야. 내가 뭐 옛날에 하갈 인줄 알어?
가끔은 내가 봐도 사래에게 심하게 구박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다시 말하지만 난 아이를 가진 귀하신 몸이라고...
아침 내내 내가 한 마디 좀 했다고 저 구석방에서 훌쩍 훌쩍 우는 거야. 참 네... 소심하긴,,,그래서 그 날은 웬 지 눈치나 살펴보려고 사래 방문 앞에서 살짝 엿 듣고 있었어. 자세히 들어 보니 그 옆에서 우늘 사래를 달래주는 어르신의 목소리도 들리는 거야.
아니 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저것이 하나부터 열 끝 까지 내가 한 행실을 다 일러바치는 거 아니겠어?. 나쁜 년.. 너무나도 더 기가 막힌건 그래도 어르신은 날 너무나도 예뻐 해 주셨기에 내 편을 들어 주실 줄 알았는데... 사래 맘대로 하라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어.
어르신의 그 소리 한 마디에 난 아무것도 생각도 안하고
주인들의 몸을 피해 옷가지를 챙겨 야밤도주를 했어
멀리 들려오는 늑대소리 ..그날따라 밤하늘은 어찌나 까맣던지...
겉잡을 수 없는 공포가 나와 내 아이를 감싸고 있었어.
그 계속되는 공포가 밀려오면서 난 그때서야 후회를 했어.
그래... 난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기세등등하게 하늘같은 주인을 업신여긴 나야 말로 나쁜 계집이야. 그 나이가 되도록 아이를 못 낳아 나한테까지 잠자리를 허락한 주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난 왜 같은 여자로서 이해를 하긴 커녕 어르신이 잘 해 주신다는 이유로 , 종들이 날 떠받들고 있다는 이유로 교만으로 하늘 높은 줄 산 죄인이구나.....
그렇게 회개를 하며 “주여!”하고 외치며 나도 모르게 우물가에서 펑펑 울었어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침 환한 빛으로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내 앞에 섰어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뱃속의 아이의 성별(사내아이)과 이름(이스마엘)을 알려 주시고 내 아이의 삶 그리고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사래에게 순종토록 알려주셨어.
오 아노나이!(adonai)
이 천하고 죄인에게도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세심한 관심어린 눈과 작은 나의 신음에도 응답해 주신 주님이시여
이 죄인 하갈이 이렇게 당신을 부르나이다.
주님...
저에게 늘 당신 자비의보호로 아낌없이 날 지켜 주소서.....
신부님께 용서를 청하며
홍명선 마리안나 (oioe52@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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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본당에 신부님께서 새로 오신지가 한 6개월이 넘어 갑니다.매번 새 신부님께서 오시면 언제나 갖는 기대감이라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 신부님께서 새로 오셨을 때도 많은 기대를 했답니다.
'조금 더 성당 분위기가 활발해 지겠지?' 암튼 새 신부님께서 오셨으니 무언가 또
새로워지리라 예감하면서 신부님께 부푼 기대를 걸었답니다. 처음엔 정말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역시 신부님은 너무 멋지시고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강론말씀이 얼마나 좋고 마음에 쏙쏙 와 닿는지 ... 강론 말씀보다 부르시는 성가는 또 어찌나 더 좋고 아름다우신지... 신부님 성격은 화끈한 성격이셨고 미사 분위기도 좀 더 활발해지는 것 같아 우리 성당은 매번 훌륭하신 분들만 오신다며 정말 너무너무 좋아했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감정도 잠시..
신부님께선 미사시간에 신자들이 성가를 잘못 부르면 지적하시고 ,악보보다 신자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반음 내려가고 또 올라가는 것까지 어떻게 정확하게 들으시고 알아내시는지 그러나 신자들이 신부님처럼 뭐 음악적 조회가 그리 깊은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제 생각(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은...) 에 비해 너무나도 예민하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 점점 짜증이 나고, 싫고 ,오히려 성가를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이유 하나로 신부님이 밉다보니 괜히 여러 가지로 신부님의 많은 부분들을 트집 잡고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자꾸 다른 신부님과 전에 계신 신부님과 본당 신부님을 비교하며 신부님 흉을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을 처음 뵈었을 때 의 그 마음처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신부님을 향한 제 마음은 뾰족한 가시밭과 같았고 그중 제일 미움이 절정에 이를 때가 신부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저에게 충고 하시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나에게 이러 실수가 있냐며 그 말씀이 독설 같이 들리고 뼈에 사뭇 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이 남았는지 “신부님은 나쁜 신부님이야”라하며 어린아이처럼 신부님 원망만 하며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그래 내가 신부님을 용서 하자. 내가 용서 하자’ 라고 했습니다만 아무리 신부님을 용서하려해도 잘 되지 않고 오히려 신부님 차에 있는 타이어를 펑크 내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신부님대한 미움이 눈 덩이 같이 부풀었습니다.
이 날 이때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신부님이나, 수사님, 수녀님 정말 이런 분들은 하느님께서 집적 선택하신 분이라며 한 분 한 분 존경해왔고 또 그 분들을 흉보는 것은 독성죄라며 미워하면 안 된 다고 그렇게 살아온 저였는데.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이런 모습이었으니 그 미움이 오죽했겠습니까?
점점 하루하루 부활은 다가오는데
자꾸 신부님을 향한 저의 미움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매일매일 잘 다니던 평일미사도 일부러 나가지도 않으며
주변에 다른 본당을 찾아가 성사를 보면 잠시 좋아졌다가 또 미워지고 또 미워지고.
이런 미움의 악 순환은 계속 연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말씀에도 에도 나왔지만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 생각나면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그를 찾아가 화해를 하고 나서 예물 바치라(마태 5,23-24)]는 그 말씀을 저버린 채 저의 본심은 신부님을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말로만 성사를 봤으니 (그것이 제대로 본 성사가 아니어서 )그럴 수밖에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본당에도 판공성사를 보는 날 다가왔습니다.
그 날은 다른 날과 달리 여러 신부님들께서 오셔서 본당 신부님과 함께 주신다고 하셨으며 또 성사를 보기 전에 일찍 나와서 양심 성찰을 꼭 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양심성찰 시간 한 10분 전 성찰을 진행하시려는 전례차장님께선 제게 다가와서
“마리안나씨! 시작 성가를 앞에 나와서 같이 불러줘요. ”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소리가 떨어지자 무섭게 단호하게 거절 하였습니다.
“싫어요, 신부님 혼자 다 부르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하며 그 자매님이 무안할 정도로 아주 너무나도 차갑게 거절했답니다. 그런 냉정한 저의 모습에 매우 당황하면서 그래도 한 번 더 저에게 부탁을 했으나 전 듣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사 보러 직전까지도 본당신부님이 너무나 도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셨는지 구역장님께서 제게 오시며 신부님께선 잘 모르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하는데 왜 그런 삐뚫은 맘을 갖냐며 저를 타이르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싫다고 하고
구역장님은 저를 쿡쿡 찌르시면서"이제 곧 다른 신부님들도 많이 오시는데 자꾸 이럴 꺼야? 어서 나가~ 어여~”라고 하시며 절 앞으로 밀어 내셨습니다.
제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으나 구역장님 고집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입은 퉁퉁 부운채로 나가서 시작성가를 불렀답니다.
성가가 끝나자 조용한 음악은 흘러나오고 진행하시는 자매님은 천천히 묵상 자료를 낭독해 주셨습니다."내용이 참 좋다~"라고 생각하며 듣고 있는데 바로 그때 였습니다.
갑자기 영화필름이 스르륵 지나가듯이 신부님을 크게 미워한 저의 죄목이 머리에 하나 둘 스쳐지나갔습니다. 신부님께 대한 저의 무례하고 까불고 버릇없는 여러 행위들 감히 훌륭하신 신부님을 헐뜯고 흉을 보러 다니고 신부님을 위해기도 하기는커녕 다른 신부님과 비교 했던 이런 저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또 저는 그동안 제가 신부님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인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전 신부님께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그때서야 알게 된 것 입니다.
어찌나 죄송스럽고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할지 그때부터 ‘하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어떻 하면 좋습니까? 이렇게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용서해 주세요.’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은 “저 자매가 왜 저래?”라고 하시며 의아해 하셨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은 제 치마 자락을 온통 적셨습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기도가 “주님! 여러 신부님 계시지만 저 꼭 우리 신부님께 성사를 보게 해 주세요. 그 분께 먼저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라며 기도를 했지요
너무나도 짧고 순식간에 한 이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바로 들으셨는지 성사 보시기 전에
우리 신부님께서는 당신께서 성사 주실 장소를 미리 알려 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저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저는 너무나도 창피해서 얼굴을 들을 수가 없었으며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고해소에 들어가 다른 죄를 먼저 고백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신부님을 미워한 죄를 고백하는데 또 아까 보다 더 크게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부님께서는 괜찮다며 따뜻하게 저를 달래 주시며 성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던 그 목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정말 그 성사는 화해 성사며 치유 성사였나 봅니다. 제가 잘못했다며 진심으로 뉘우치니 세상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으며 신부님의 대한 그 미움들은 언제 그랬었냐며 눈 녹듯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부님께서 제게 독설 같은 말씀이 아니라 제가 신부님께 너무나도 가슴 깊이 감사드려야 할" 몸에 좋은 쓴 보약 같은 말씀"이었으며
더욱 겸손해 지고 낮아지는 "금 같은 훈계" 이었음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한번 신부님께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고백을 합니다.
성사를 보고 나서 그날 밤 저는 다음 과 같이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 홍명선 마리안나 에요.
오늘 그냥 잘 수가 없어서 신부님께 이렇게 메일을 씁니다.
아까 성사를 보고 나서 얼마나 회개의 눈물을 흘렸는지.
너무 울어서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봐요.^^"
성사주시면서 신부님께서 저에게" 마리안나 왜 나한테 성사를 봤니?" 라고 물어 보셨 었지죠? 그런데 아깐 제가 너무 울어서 그 말씀에 대답을 제대로 못 드렸네요.
물론 어느 신부님께 보건 다 같은 성사겠지만
신부님을 미워했던 저의 죄.
신부님께 대한 저의 건방지고 무례한 모든 행위들...
사실 신부님께 말씀드리기 너무나도 창피 하고
처음엔 너무너무 자신 없었지만
양심성찰을 하면서 이런 기도가 절로 나왔어요.
"하느님 오늘 꼭 우리 본당 신부님께 성사를 보게 해 주세요.
그 분께 제일 먼저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라고요.
이렇게
신부님께 용기 내어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더불어 신부님께 용서를 받고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싶은
저의 작은 용기이며
제 마음이 이게 전부였어요................
다시한번신부님! 너무 죄송해요. 그리고 너무나도 이 어리석고 부족한 저를 따뜻하게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그런 죄를 짓고 나서 (정말 그것이야 말로 독성죄인지) 저도 죄를 지으면서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이 들고 이를 계기로 신부님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 구차한 변명이 아님을 역시 알고 계시죠?
제가 사실 덩치만 크고 말만 많지 이렇게 너무나도 부족하고 철도 없고 많이 어리석답니다. 앞으로도 이런 저에게 많이 도와주시고 잘못한 것 있으면 야단도 쳐 주시고 많이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다음날 신부님께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답니다.
『마리안나구나. 선행을 할 때도 주님을 따를 때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오늘 강론 때도 얘기했다만,
네 용기가 참 놀랍다. 나 같으면 다른 데서 성사 봤을 텐데.... 내가 본의 아니게 섭섭하게 하거나 상처준일이 있다면 용서해줄래? 난 마리안나 보면 항상 반갑던데.... 어찌 미움을 샀는지는 모르나, 부족 한 게 있는 날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기쁜 부활 맞기를 바래. 좋은 하루 ^^ 』 라고요~
그리고 성사본지 열흘이 지난 후 제 축일이기도 하였던 성 목요일 성유 축성미사를 드리며 사제의 날 신부님께 축하드린다며 예쁜 꽃바구니를 선물로 드렸답니다.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 역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답니다. 그리고 성삼일을 잘 지내고 정말 너무나도 기쁜 부활을 보냈지요.
그 꽃바구니에 【신부님 축하드립니다. 홍 마리안나 드림】이라고 썼는데 그 표현보다는【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라고 써야 옳은 게 아닌가 싶어요. 왜냐하면 우리 신부님 때문에 너무나도 즐겁고 신나는 축일과 부활을 맞이했고 많은 부분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신부님께 썼던 메일 내용처럼 앞으로도 정말 계속해서 사랑으로 우리 신부님을 위해 또 우리 신부님뿐만 아니라 모든 이 땅에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할 거랍니다.그리고 언제나 잘못이 있으면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나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고 또 언제나 낮아지고 겸손한 예수님의 딸이 되고 싶습니다.
회고록
홍명선 마리안나 (oioe52@hanmir.com)
저는 어렸을때 유아세례를 받았으니 이제껏 신앙생활을 약 20년 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저 보고 혹시 모태신앙이 아니냐고 하지만 모태신앙은 아니고요.
어쨌든 저는 어렸을때부터 아주 재미난 신앙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당시도 역시 사는곳은 오정동이었으나 오정동에는 성당이 없었으므로 버스를 타고 삼정동 까지 성당을 다녀야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과 함께 성당을 다녔으나 우리집은 그 당시 아버지는 비신자이셨고 어머니는 냉담중이라 어린 동생 손을 꼭 잡고 버스를 타며 일요일 9시 어린이 미사를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 했는지
어린나이에 스스로 직접쓴 기도문을 가지고 (고아들을 위하여) 교리선생님도 또 어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사도신경이 끝나면 용감하게 신자기도 석에 나가 기도를 하고 왔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주신 돈은 무조건 봉헌을 해야했고
성찬의 전례때 왜 복사가 종을 치는지 너무궁굼하여 자주 질문을 했었고 첫영성체도 교리시간 미사출석은 부모님께서 챙겨 주시지도 않았는데 정말 혼자 꾿꾿하게 성당을 다니는것이 제 몫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 풍진이 유행이어서 얼굴에 뭐가 벌그스렇게 나는것이 (전염병 이었던것으로 생각이 나는데 참 무서웠음) 저 역시도 피해 갈수는 없었습니다.
또 손에 물집이 손바닥을 다 잡혀 고생을 했었는데
어린나이지만 어찌나 믿음이 좋았는지 예수님이 날 꼭 고쳐 주실거라며
십자고상아래 무릎을 끓고 "예수님 저 꼭 고 쳐 주실꺼죠?"하며 제 몸에 성수를 뿌리고 엉엉 울면서 기도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난참 외로웠습니다. 다른아이들은 부모님도 신자이기에
9시 미사가 끝나고 교리까지 받으면 약 10시30분이 되는데요
다른친구들은 11시 어른미사가 있으니 부모님을 기다린다며 성당 너른 마당에서 뛰어 놀았는데 전 쓸쓸히 집으로 돌아와야 했거나 아니면
나도 부모님을 기다리는척 하면서 아이들과 놀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아이들은 축일을 제대로 알아 교리선생님이 축일을 물어 보면
제때 답을 했지만 전 제 축일이 언젠지도 모르고 성당에서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기가 죽었고
첫영성체때 다른친구들 모두가 부모님이 나와 꽃다발도 주고 화려하게 축하 해 주웠지만... 전 어땠을까 짐작이 가지요?
또 친구들 집에 가면 현관문에 교패가 붙어 있는것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올라와 드디어 오정동에도 성당이 생겼고 장소가
가까워지니 저의 신앙 열정은 더 뜨거웠습니다.
지금 화수동 본당에 계시는 박희중신부님께서 그당시 잠깐 군생활 하시면서 학사님으로 계셨는데 사순때 학생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하는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잘 기억했다가 학원을 같이 다니는 영은이란 친구와 함께 성당에가서 우리 십자가의 길 하자 하며 둘이 "어머니께 청하오니~"하며 십자가의 길을 여러번 돌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렇게 뜨거웠던 신앙이 어느날은 눈물바다를 이룬적이 있었습니다.
중1 사회시간이었습니다.
사회시간에 여러가지 종교에 관해 말씀을 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종교라고 하시는게 아니겠어요?
(참 지금생각해도 그분은.... 쯧쯧~)
저는 그것은 잘못된것이라고 당당히 수업이 끝나고 말씀드렸지만 사회선생님은 무조건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고 고집을 피우셨습니다.
그소리에 너무나도 화가난 저는 사회책을 집어 던지며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같은반에 천주교가 종교인 친구들을 모아 점심시간에 시간이 남으니 우리 묵주기도라도 하는것이 어떻겠냐고,아니면 성서책을 읽거나
짧게 기도를 하자고 제안을 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고등학교때는 54일 묵주기도를 등교길에 하루하루 체크하며 기도하고
교복 주머니 안에는 꼭 묵주가 있었습니다.
저의 이런 열성 때문인가요?
우리집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 났고 고2때 드디어 아버지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점점 우리집도 변화가 일어났답니다.
처녀때는 말이지요 . 왜그렇게 성당에 가고 싶은거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성체 조배인데 무언가게 이끌어서 저는 성당에가서 주절주절 이야기 하고 기도하고
또 자기전에 꼭 성서책을 읽으며 잤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우리 친정부모님께서는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하시고요.
세월이 많이 흐른다음 부모님께서는제게 이런말을 하십니다.
"마리안나! 네가 우리집식구들을 변화를 시켰다. 너의 그 열성과 그뒤에 너의 뼈저린 희생이 밑 바탕이 되어 우리집을 일으켰구나.
얘야. 네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어찌 부모인 우리가 나약한마음을 가질수가 있겠니? 우리 정말 기도하면서 봉사하면서 사랑하면서 살자" 라고요. 정말 대단한 변화지요?
어른이 되어 힘들때 정말 이래도 되는가 속상할때도 많고 도
움이 필요할때도 많고 속상하고 힘들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만
그럴 때 마다 꼭 예수님께서는
저를 잊지않으시고 좋은것을 택해 주십니다.
어쩔땐 그 감사함이 얼마나 큰지
너무송구스러워서 "예수님 제가 어디가 예쁘다고 이런것을 주십니까?"하고 기도하며 여쭤보면 그때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답니다.
어렸을때 그 믿음과 또 유년기시절 신앙생활 말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어렸을때 부터 저를 끄셨다는것을 저는 알수가 있습니다다. 이런 크신분을 어찌 제가 모른다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전 할것 입니다.
모든곳에 복음을 전하러...
전 땅끝까지 그분을 증언하도록 힘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이끄셨나요? 생각이 안나다고요? 아니면 전혀 그런일이 없다고요?
천만에 말씀....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가지 기억들... 나자신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분명 끌어주셨던 때가 있을것입니다.
정크리스티나: 하갈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조근조근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10/17-14:14]
별지기: 하갈이 되어본 설정이 재미있네요. [10/18-01:24]
요한신부: 글이 두개가 더 있었는데 빠졌었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10/18]
... ...: 적은 액수의 상금이 아니라는 것은 이 공모전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힘입니다. 조회수 평가며, 이런 실수며 이 정도 상금에 어울리지 않는 실수입니다. [10/18-11:50]
아이스크림: 인간 하갈에 대해 잘 쓰셨습니다. 글을 많이 쓰시거나 활동을 많이 하시나 봅니다. [10/20-14:46]
홍명선 마리안나: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10/20-22:25]
김범호: 마리안나 자매님 의글 잘 읽었습니다.신앙심이 부렵습니다. ^ ^
[11/2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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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수필/장려: 이영애 헬레나 자매님의 "아름다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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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시/대상:강원남 도미니 형제님의 "고해소에서"
고해소에서
- 철원성당
강원남 도미니 (yusim80@naver.com)
코 찔찔 흘리던 시절
아버지의 도자기를 깨고
도망친 적이 있다.
가슴 한 귀퉁이
쩍하니 갈라지던 날
말없이
진지를 드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저녁상을 물리셨다
늦은밤 오래토록
안방문 앞에서
나는 떨어야 했나보다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다음부터 조심하거라
가만히 나를 품에 안은채
덥썩 넣어주시던
커다란 알사탕을 입에 물고
그렇게 나는 안방을 나와
한참을 울어야만 했나보다
이제
고해소를 나와
성체를 모신 나는
그렇게 소리내어
엉엉
울어야만 하나보다
십자가를 내리다
- 철원성당
강원남 도미니꼬(yusim80@naver.com)
십자가를 내려
당신의 가시관을
벗기옵나니
누군가를 탓하던
저의 말 한마디
날카로운 가시되어
그렇게 당신의 머리위에
조아리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내려
당신의 못을
뽑사옵나니
누군가를 미워하던
저의 마음
예리한 못이 되어
그렇게 당신에게
박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내려
당신을
품에 안사오니
십자가 그 한가운데
세글자 제 이름은
무거운 짐이 되어
그렇게 당신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비를
두 번 못박게한
못난 아들을
당신은 오늘도
바라보고 계십니다
Amen
- 철원성당
강원남 도미니꼬(yusim80@naver.com)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
눈을 감은 채
나즈막히
Amen -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주님의 뜻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울며
한숨쉬며
아파하며
소리지르며
가슴치며 외치나니
주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Amen -
한 가닥
속죄의 실을 풀어
촘촘히 엮어짠
거적을 둘러쓴 채
저 나사렛
문둥이의 마을로 간다
강아지도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주워 먹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두운 동굴 속
한 귀퉁이
무릎꿇고 기도드리나니
부디 토해낸 찌꺼기를
다시 삼키게 하진
마옵소서
울며
가슴치며 외치나니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Amen -
정순진: 많이 써보셨나요? 종습니다.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예배가 아니라 새롭고 절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0/17-13:51]
아이스크림: '고해소에서'의 시가 인상적입니다. 이 시 외, 모든 작품이 구체적인 신앙체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시를 쓰는 다른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의 구체성'이 잘 드러납니다. [10/20-14:20]
강원남 도미니꼬: 정순진님, 그리고 아이스크림님..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10/21-00:07]
느낌표: 짝짝짝~ 마음을 편안케해주는 시네요,잘 봤습니다. [10/22-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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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시/장려: 신혜경 루실라 자매님의 "주님안의 하루"
주님 안의 내 하루
신혜경(루실라)
노을진 바다
유난히 붉은 빛으로 대지를 품어
출렁이는 파도 속에
넘실대는 모습으로
오시는 님
길 따라
은빛자락 나부끼며 평화의 빛으로
천천히 오시는 님
달려가 맞으오리다
언제나
어머니의 가슴처럼 푸근하게 다가와
따듯한 마음 건네고
낮게 잦아드는 님
오늘도
아버지의 가슴처럼 든든하게 다가와
넉넉한 마음 주시고
총총히 가시는 님
감사의 마음 드리오리다
내일도
오늘만큼의 평화와
오늘만치의 웃음과
오늘만치의 넉넉한 사랑 주시라고
님의 노을 끝자락에 서서
두 손 모아 봅니다
정순진: 좋습니다. 시는 리듬감이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 매여 있으면 또 맛이 적어집니다. 그 점 마음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10/17-13:53]
아이스크림: 잘 읽었습니다. 정선생님의 지적말씀에 유념하시면 좋겠습니다. [10/20-14:22]
고평가: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늘 준비하는 삶을 노래한 것 같습니다 [10/21-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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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시/장려:박헌영 님의 "성심유치원 졸업식"
성심유치원 졸업식
박헌영
벽에 붙은 십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무예수의
깎이고 깎인 나이테 아래
아기들이 유치원을 졸업한다.
나무예수가 나무눈을 감고 있다.
여자들은 뒤에서
손에 든 꽃다발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자식만을 사랑한다 말한다.
자식 크는 재미로 산다 말한다.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
하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안녕히 계셔요 예수님
유치원을 떠납니다
우리 예수님 안녕 안녕-
골 깊은 갈비뼈,
뼛속으로 나이테가
한줄 더 그어지는 나무예수가
안 보이는 당신 몸을 홀로 보고 있다.
아기들은 뒤돌아가
웃고 있는 여자들에게 안긴다.
올해 처음인 선생님 한 분이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하늘 아래 그림자는
박헌영
우리들 처음에는
하늘 아래 모두가 다
사랑이었네
서로가 그리워지면서부터
사람들 사이로 강이 흐르고
물결의 기도소리 밤마다
점점 높아갔으니
어찌하면 강을 거두고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처음을 기억하면
사랑은 때와 곳이 없는 것
서로에게 기도하여
자기가 드러나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만날 수 있으려니
서로에게 자기를 숨기며
그것을 편하다고 하네
하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사랑으로
속 깊이 아파야 하리니
하늘 아래 그림자는
사랑의 모습이어야 하리
시장을 가거나
거리를 가거나
우리의 그림자는 모두들
성당에 섰을 때의 그림자와
같아야 하리.
아멘.
정순진: 자기만의 독특함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고민해 보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10/17-13:55]
아이스크림: '성심유치원 졸업식'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나무예수'의 나이테, 그리고 원아들의 졸업과 성숙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런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구체적인 시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10/20-14:25]
백민석론 - 안미영
1. 엽기적 인물의 탄생
내가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시간('비디오 테이프와 할리퀸 문고', '재수 시절') 어디에도 실제 '현실'은 없다. 성년기의 '나'는 '현실에 대한 탈주'와 '현실에 대한 반항' 양자 사이를 부유하면서 세계에 대한 사유방식을 터득한다. 『캔디』는 성년기에 접어든 내가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반현실주의자인 '반장(反長)'과 탈현실주의자인 '캔디(candy)'로 양분하여 보여준다. '나'는 무조건 현실에 배타적인 '反長'과 아예 현실에서 일탈한 동성애자 '캔디'를 통해, 현실에 반항(反현실)하던지 현실을 간과(脫현실)해 버리는 인물로 성장한다. 대학 시절, '나'는 시위현장에서 반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 문제와 정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시대감각으로 이 시대에 습관적으로 반항한다. 뚜렷하지 않은 현실의 저항 심리에 비해, 내가 캔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체의 의지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엽기(獵奇)'는 '괴이한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을 의미한다. '괴이한 것'이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소설의 허구성(fiction)은 이 시대 엽기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소설에서 작중 인물의 엽기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가로 백민석을 들 수 있다. 백민석 소설에 나타난 엽기적 인물의 특성을 살펴보기 앞서, 우선 소설의 인물 유형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E.M. 포스터는 인물을 성격 표출양상에 따라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과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로 구분한다. 고전 소설의 인물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이분법적 도식에 따라 시종일관 선(善)과 악(惡)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평면적 인물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 현대 소설에서 다수의 주인공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성격변모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입체적 인물에 근접해 있다. 입체적 인물은 개별적 능력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범 이상의 비범한 능력을 소지한 '영웅'과 평범 이하의 비천하고 비루한 모습을 보여주는 '악당' 및 '바보'를 들 수 있다. 전래적으로 소설에서 '영웅'은 '실현되어야 할 현실'을 장엄하게 보여주고 있는 반면, '악당'과 '바보'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현실'을 냉소적이고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 유형구분에 의하면, '엽기적 인물'은 '악당'과 '바보'를 동시에 구현하는 입체적 인물이며, 그들의 문학적 의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있다.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은 입체적 인물로서 '악당' 및 '바보'의 극단적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 남녀는 대학 강사와 수학 과외교사로서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띠지 않으며, 단지 '수컷'과 '암컷'으로 구분된다. 그들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광포한 동물성만 남아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악당'이다. 미소년을 추행하고 죽이는 범행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반인륜적인 범죄자라 추궁할 수 있지만 그에 앞서 적잖은 비감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이 '악당'이 행사하는 폭력은 종국에는 그들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당'인 동시에 '바보'이며, 범죄자(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피해자)라는 점에서 독자는 경악과 조소에 앞서 좌절과 비애를 절감한다. 그들의 악행이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자기 파괴에 그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이 현실에서 '받아야 할 그 무엇', '누려야 할 그 어떤 것'을 상실한 원초적인 결손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의 의의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의 비극적 삶을 통해, 현실에 부재한 제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데 있다(주1). 그런 의미에서 백민석 소설에 나타난 '엽기적 인물'의 추적은 현실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규명해 나가는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목화밭 엽기전』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의 성년과 유년 소급을 통해, '엽기적 인물'의 탄생과 진화과정을 추적해 보고, 그들이 원초적으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반(反)현실에서 탈(脫)현실로 질주
『목화밭 엽기전』의 '한창림'과 '박태자'가 '엽기적 인물'로 진화하기 이전, 그들 역시 평범한 일상의 소년과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 강사가 되고, 수학 과외교사가 되기까지 그들의 성장과정을 백민석의 이전 작품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캔디' 부류의 인물을 설명하자면, "실제로 뭔가를 때려 치우기보다는 살짝 비켜가는, 그저 때려 치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아이들"(31면, 『캔디』)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무수한 캔디들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내면 세계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세대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현실의 제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내고 불러낼 수 있는 환영(幻影·이미지)이라는 점에서, 캔디 세대는 탈현실주의자들이다. '반항'이 반항하고자 하는 그 대상(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전제해 있다고 볼 때, '일탈'은 그 대상(현실)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다. 탈현실주의자로서 '나'는 만화(漫畵)적 인물을 통해 점차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 경도된다.
백민석 소설에서 '캔디'와 같은 만화영화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는 크다. '엽기적 인물'은 유년시절부터 탈현실주의 세계로 질주해 나갔으며, 이들을 탈현실의 세계로 이끌었던 존재가 바로 컬러 텔레비전의 만화영화 주인공들(딱따구리, 오로라공주와손오공, 마이티마우스, 집없는소년, 달려라뽀빠이, 요술공주새리, 박스바니와 그의 친구들)이다. '애니메이션'이 "원래, 실제 동화(動畵)와 우리 눈 사이에 생기는 균열을 이용한 속임수"(234면, 『헤이). 밑줄:인용자)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이들은 유년 시절부터 '허상(動畵)'을 통해 '현실(눈)'을 간과할 수 있는 속임수에 감쪽같이 길들여져 왔던 것이다. 현실보다는 허상(動畵·이미지)에 정신을 집중했던 그들은 현실에 반항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일탈하는 일이 더 쉬웠던 것이다.
왜 이들은 집 밖의 실제 세계(현실)로 나아가지 않고, 텔레비전 키드가 되어 허상의 세계로 질주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나'와 '세계'를 연결해 주는 '매개'가 부재해 있기 때문이다. 『헤이』에서 '딱따구리들'이 즐겨 부르는 고아들의 노래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어른들은 물으시죠, 너희 아버지는 어딨니 얘야, 너희 어머니는 어딨니 --(중략)-- 저희가 뭘 알겠어요, 아빠는 출근한다고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오질 않고/저희가 어떻게 알겠어요, 엄마는 설거지하다 말고 끌려나가 고추밭이 다 죽도록 돌아오질 않는데"(『헤이』, 112면) - '가정'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 '나'에게 "그것(가족:인용자)은 내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조차 설명해줄 수 없"(「요람속의 고양이 둘」, 『16』, 111면)는 "신비", 또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
'엽기적 인물'의 유년기에는 세계라고 하는 '밖'과 나(我)라고 하는 '안'을 매개하는 '가정'과 '가족'이 부재해 있다. 그들은 오후 5-6시 가족들과 더불어 '생선가시'를 발라먹어야 할 저녁 식사시간에 홀로 앉아 '캔디'와 '뽀빠이' 등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부재한 그들의 '가정'에 대해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법을 배우는가 하면, 파이프를 물고 근육질의 팔뚝을 자랑하는 뽀빠이를 통해 외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의 비결을 터득한다. 그들은 온전히 돌아갈 가정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편입되지도 못한 채,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 주인공의 삶과 자신의 일상을 동일시한다. 그들은 유년기와 소년기, 가족과 가정 그리고 학교로부터 배워야 할 성장(성숙)과 관련된 모든 것을 텔레비전과 밀폐된 도서관, 진창 늪의 극장에서 배우고, 무허가촌의 뒷골목과 야산에서 실습한다.
현실의 체계 속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은 항시 자신과 세계를 매개해 줄 수 있는 가정과 가족이라고 하는 안전지대를 동경한다. 작중 '생선가시'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개인에게 부재한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여기에는 결손과 결핍을 채우려는 인물의 무의식적 욕망이 내재해 있다. 로즈메리 잭슨의 지적처럼 환상은 불연속적이지만 연결된 단위들로 구성된 리얼리티를 재현하는 정상적인 혹은 '상식적인' 관점을 위반하면서 각각의 것들을 분리시키는 구별이 부재한 상황을 설정하거나 그 부재를 폭로한다.(『환상성』, 69면) 작중 주인공들의 현실에 대한 일탈은 환상(幻想)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부재한 제요소들을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가령, 『한스』에서 '나'는 '생선가시'의 환영을 보는가 하면, 「Green Green Grass of Home」(『16』)에서 '나'는 '그린맨(green man)'을 만난다. 그러나, 현실에서 환영이 극히 일시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삶의 여유가 될 수 있지만, 현실보다 환영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커진다면 그것은 일종의 정신질환이 된다. '엽기적 인물'의 탄생을 둘러싼 기저에는 탈현실주의자의 환상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의 환상이 점차 현실을 압도해 나가면서 독특한 성격의 인물을 창출하기에 이른다.
3. 정신질환자에서 괴물로 진화
백민석 소설에 등장하는 엽기적 인물은 유년기부터 정신질환을 앓는다. 『한스』에서 초등학생인 '나'는 부족한 영향과 정서 불안으로 환영을 보며 병원에 출입한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소년 시절이래, 쭉 보아왔던 '생선가시'와 전이감 때문에 종합병원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헤이』에서 'K'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특정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다. '憙'의 종잡을 수 없는 독백과 환영, '아파트 수위'의 정신질환은 저 자신도 수위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일면을 반영한다. '새리'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신체(안구)의 정상적인 기능(시력)을 잃는다. 해부학적 손상이 아닌 정신적 외상(성폭행의 충격)으로 인해, 개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체 일부인 시신경을 스스로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은 유년기이래 타자를 비롯한 사회로부터 받은 상흔 때문에 제대로 현실의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스스로 가상의 이미지를 환영의 형태로 간직하며 살아간다. 유년기의 정신질환자들은 사회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현실에 반항하거나 탈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치지만,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은 난폭한 괴물이 되어 현실을 파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된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던 유년기의 정신질환자들이 이제 인간성이 부재한 괴물이 되어 현실을 파괴하려 한다. 정신질환자가 현실로부터 소외된 수동적 인물인 반면, 괴물은 현실을 전복하려는 적극적 인물이다. 심각한 정신질환이 급기야 납치, 폭행, 고문, 살인, 강간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폭력을 자행하는 엽기적 인물의 탄생을 초래한 것이다.
『목화밭 엽기전』에서 '박태자'는 울증과 조증 사이를 저속으로 왕복하며 생활한다. 처음에는 병원 정신과에서 처방을 받아왔지만, 이제 각성제 겸 진정제로 복용하는 암페타민을 직접 암거래한다. 그녀는 '박태자'라는 인간성보다는 '암컷'의 동물성을 실현한다. 이러한 사정은 '박태자'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창림'을 포함하여 '뷰티풀피풀'을 경영하는 언니와 그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정상적인 인간성이 거세되어 있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광포한 동물성이다. 이러한 괴물들에게 불편한 것은 '사색'이고, 필수적인 것은 '안전거리'이다.
인간이 '암컷'과 '수컷'으로 정의되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은 '사색'이 아니라 '안전거리'의 조절이다. 시인 최승호가 형상화한 '고슴도치' 인간들처럼(『고슴도치의 마을』), 그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공격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고슴도치 인간들 사이에 형성된 '방어'와 '공격'의 '거리'를 시인 정현종은 '섬'으로 형상화한 바 있는데(『나는 별아저씨』), 이때 '섬'은 도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독과 단절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거리'의 목적성을 의미하는 '안전'이라는 표식어는 역설적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원화 및 비인간화의 극한에 광포한 동물의 감각성이 꿈틀거린다. 그들에게는 이지적 요소보다 독취(촉각)와 같은 감각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광포한 '수컷'인 남편의 독취는 '박태자'가 남편을 인식하는 표식이다. "남편의 냄새와 비교할 만한 냄새를 굳이 찾자면" "대기가 무거운 날, 동물원 실내 관람장에 터질 듯 포화돼 있는 독취를 들 수 있다. 시멘트와 플렉시 유리의 사육장에 갇혀, 몇 년씩이나 인스턴트의 삶을 산 동물들의 독취를 들 수 있다."(195-196면) '인간의 이성'을 대변하는 '사색'에 대해 '동물의 감각성'을 대변하는 '독취', 이때 인간의 표식이 사색(이성)이라면, 괴물의 표식은 후각(감각)이다.
괴물들의 '사색 부재'가 감각성의 '독취'로 드러나고 있다면, '감정 부재'는 '인형(人形)'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무감정·무의지의 가공적 인간, 인형은 '웃는 플라스틱'으로서 "인간의 형상을 흉내낸 솜씨는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그 근원의 성질은 도무지 인간과 다른 점이 없"다. "휘면 휘어지고 자르면 잘라지고 뽑으면 뽑혀지고, 눈엔 초점이 없으며, 속은 텅 비어 가볍기 한이 없고, 아무리 사랑해줘도 반응이 없다."(72면) 『목화밭 엽기전』의 괴물들이 사색없이 감각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감동과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인형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무감정·무의지의 인조 인간, 괴물은 결국 현실의 체계가 조작해 놓은 또 하나의 인공물이자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조작된 존재, 만들어진 존재, 유희의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은 현실의 체계가 만들어 놓은 부속물에 불과하며 그런 까닭에 그들을 창조해 놓은 조물주(체계)에 대한 그들의 저항은 실상 조물주(체계)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수컷'과 '암컷'들은 "아무리 지랄을 쳐도 자기가 태어난 이 사회에 한뼘 손톱 자국조차, 한 뼘 이빨 자국조차 낼 수 없는 무력한, 비극적인 존재였다. 둔덕에 수백 구의 시체를 파내어도 비극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었다. 영원히 바깥의 존재로 운명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게 뻔했던 운명들이었다."(261-262면) 그들의 폭력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귀결된다. '수컷'으로서 '한창림'의 동물적 공격성은 경찰에게 자신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 수감되고, '암컷'으로서 '박태자'의 모성행위(유괴아에게 젖물리기)는 범행을 실패로 몰고 가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작중 괴물은 일세를 풍미할 악당으로서 그 위세를 떨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실의 체계에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못한 채, 고작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백민석 소설에서 '엽기적 인물'은 생래적으로 타고난 괴물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해 스스로 정신질환자에서 괴물로 진화해 버렸다는 점에서 가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실의 체계가 괴물과 같은 인형, 혹은 인형과 같은 괴물을 양산하여 체계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다시금 과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마치 '원형감옥'이 수형자들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외부 사람들에게 범법 행위에 대한 응징과 체계의 권력을 강조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푸꼬의 지적처럼, 백민석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의 출현과 비극적 종말은 현실에 건재하는 체계의 보다 원활한 기능과 위엄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그 소임을 잘 완수해 내고 있다.
작중에서 체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도시(과천)'와 '동물원'의 결합이 이를 반증한다. 동물들이 제아무리 포악스럽더라도 체계는 이러한 동물을 울타리 내에서 인위적으로 잘 규율하고 관리하여 광포한 동물을 인형('웃는 플라스틱')과 같은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체계의 권력을 과시한다. 『목화밭 엽기전』에서 현실의 체계는 "잠들어 있던 괴물을 억지로 깨워 불러들여 놓곤, 재미로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종국엔 괴물이 왔던 곳, 사회 체계 바깥으로 다시 쫓아보"(261면)낸다. 괴물의 악덕이 체계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명목하에 처벌받는 것으로 종결되는 『목화밭 엽기전』은 에르네스트 만넬의 지적처럼 정의와 범죄라는 이분화된 도식에 의해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국가, 사유재산, 법, 정의)의 본성을 은폐한다.(『즐거운 살인), 91-92면) 이러한 체계의 보이지 않는 거대 폭력에 비해, '엽기적 인물'이 창출해 낸 괴물은 그다지 난폭하지 않으며 교활하지도 않다. '한창림'과 '박태자'가 제아무리 극악한 괴물의 행적을 일삼더라도 "사회 체계 안의 내용물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괴물스런 위력이 얼마나 막강하든, 바깥에 존재하는 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260면)다. 괴물은 그저 "사회 체계 바깥의 존재"(260면)로서 이 땅의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체계에 편입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체계가 요구하는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캔디』에서 '한선생'은 교장을 향해 말한다. "도대체 그 뿌리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요. 증명해 봐요. 그게 학벌을 말하는 거요. 당신 고향집을 말하는 거요. 당신의 그 대단찮은 패밀리를 말하는 거요? 혹시 정권의 주구 노릇은 아니요?"(『캔디), 71-72면, 밑줄:인용자) '학벌', '고향집', '패밀리', '정권의 주구' 등 뿌리를 구성하는 제요소가 결국 체계로 편입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할 때, '박태자'와 '한창림'은 이러한 뿌리를 타고나지 않았다. 『헤이』에서 무허가촌(無許可村)의 아이들은 '집'이 체계로부터 허가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태생(삶)' 역시 체계로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허가되지 않은 마을과 허가되지 않은 집, 그리고 허가되지 않은 삶(태생)은 그들을 체계 밖의 존재로 몰고 간다. 이 때 체계에 의해 헐려 없어지는 것은 고향, 집과 같은 가시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유년시절의 기억 및 꿈과 같은 긍정적 세계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체계로 편입될 수 있는 발판이 없기 때문에 반항아이거나, 미성숙아이거나, 정신질환자, 기껏해야 '수컷'의 기질만을 보여주는 괴물, 아웃사이더로 진화한다.
이 땅의 아웃사이더들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이러한 괴물 한 마리를 키우고 있거나 괴물이 되고 싶은 잠재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웃사이더들은 설령 그들이 내면에 잠재해 있는 괴물을 현실의 체계에 불러들이더라도 자신이 인사이더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내면의 괴물을 현실에 소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림'은 '수컷'이 되고, '박태자'가 '암컷'이 되어 내면의 괴물을 불러낸 사실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미련스러울 만치 바보같은 짓이다. 체계의 아웃사이더에 불과한 그들이 체계의 내부를 변화시킨다는 일 자체가 무모하고 무용한 '엽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목화밭 엽기전』에 출현한 '엽기적 인물'은 우리들 내면의 슬픈 자화상을 대변한다. 종국에 괴물의 죽음은 이 사회에 일정한 '기의'를 형성하지 못한 채, 기표로서 상징적인 비극성만을 내포한다. '목화밭'에 출현한 '엽기적 인물'은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제 말이 되지 못한 그들 내면의 언어를 읽어내고 그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할 것이다.
4. 폭력과 환상을 통한 환멸 세계의 극복:'권장할 만한' 진화를 꿈꾸며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 출현한 '엽기적 인물'은 이전 소설에 나타난 유년기와 성년기의 작중 주인공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진화한 인물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정신질환자에서 괴물로 진화한 기표상의 변화가 소설내에서 일정한 기의를 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곧 작가로서 백민석의 소설 쓰기의 진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
엽기적 인물의 진화여부를 묻기 앞서 진화의 개념을 되짚어 보면, 진화는 단순히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혹은 하등에서 고등으로 생물 자체의 생물학적 진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의 가장 큰 의의는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는 데 있다. 진화가 개체와 환경 양자간의 조화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에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주체의 의지가 드러나 있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나'라고 하는 주체가 어떻게 세계라고 하는 거대한 환경에 적응해 나가려고 노력하는가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백민석이 창조한 '엽기적 인물'의 특징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진한 인물군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비감과 아울러 호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독특한 양가성('악당'인 동시에 '바보')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결손 인물로서, 그들은 자신에게 부재한 것에 대한 욕망을 각각 '폭력'과 '환영'의 형태로 표출한다. 체계에 대한 반항아들의 권력 욕망이 구체화된 것이 '폭력'이라면, 부재한 정서적 요소들에 대한 현실적 욕망은 '환상'으로 나타난다. 현실에 건재하기 위해 괴물은 폭력을 휘두르고, 정신질환자들은 결핍한 내면의 일부를 환상으로 대체한다. '폭력'과 '환상'은 언어가 되지 못한 엽기적 인물의 의사소통 행위이다. 제대로 자신의 말과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세계로 나와 버린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들에게 준비된 것은 행동할 수 있는 몸과 상상단계의 의식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엽기적 인물'의 '폭력'과 '환상'은 이 세계에 대한 미성숙한 언어로서 눈여겨 보아주고 읽어 들여야하며, 이 사회에 대한 간절한 소통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폭력'과 '환상'이 '언어'가 아니라는 차별성에 주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의사 표현방식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언어를 체득하지 못한 채 괴물로 진화한 '목화밭'의 '엽기적 인물'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부정적 세계인식과 조우할 수 있다. 백민석에 의하면, 한 인간을 괴물로 진화시키는 이 사회야 말로 환멸의 세계이다. 이 즈음에서 이제 '신세대작가'의 직함을 뛰어넘은 백민석에게 '환멸의 상상력'이라는 또 하나의 비전을 제시하고 싶다. 이 세계가 환멸로 가득 차 있을수록 이 땅의 작가는 사제(司祭)의 시선을 견지해야 한다.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을 뛰어넘는 자만이 성자(聖者)라고 할 때, 환멸의 세계에서 문학(작가)은 고통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 그 고통이 발효된 인고(忍苦)의 흔적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환멸의 세계에서 희망의 씨앗, 즉 다시 꿈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민석이 제시하는 '구멍'의 상상력은 일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엽기적 인물'은 그로테스크한 환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부재의 공간이 아니라 생성과 창조의 공간으로 다시금 정의하고 있다. 『헤이』에서 딱따구리들이 '동굴'을 찾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근작 『장원』에서 도시인들은 이제 자신의 내면에 '구멍'을 발견한다. 그 구멍은 '식물성 애완공간'(「검은 초원의 한켠」)이 되기도 하고, 내가 너에게 다가설 수 있는 '틈'(「아주 작은 한 구멍」)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 구멍은 일찍이 『목화밭 엽기전』에서 괴물이 꿈꾸던 '목화밭'이기도 하다. 이제 그 구멍이 자신의 내면에서 벗어나 이 땅에 버젖이 한 켠의 식물성 풍만한 목화밭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바란다.
(주)
1.백민석 소설의 인물들은 현실의 문법에 비추어 볼 때, 다분히 가상적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작중 인물의 언동이 현실의 문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독자들은 가독이 어렵다. 지금까지 발표한 6편의 작품집(『내가 사랑한 캔디)『헤이, 우리 소풍간다)『불쌍한 꼬마 한스)『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목화밭 엽기전)『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중에서 특히,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는 소설의 인물뿐 아니라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상황설정마저도 현실과 낙차가 큰 가상의 세계라는 점에서 쉽게 읽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적다.
[단 평]
남해 금산의 '돌' 이야기
이 시는 '나와 한 여자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가 문제적인 것은 그 여자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돌 속에 묻혀 있"던 여자라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여 그 여자의 고통마저 사랑하고, 한 걸음 나아가 고통에서 벗어난 그 여자가 떠나가는 것 마저 담담히 관조할 수 있는 작중 화자의 성숙한 내면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돌 속에 묻혀 있던 여자'와 '그 여자를 사랑해서 돌 속에 들어갔으나, 여자는 떠나고 돌 속에 혼자 남아 있는 나'라고 하는 두 가지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
'돌 속에 묻혀 있던 여자'의 입장이 어떠한 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돌'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이상(李箱)의 '이런 詩'에는 나를 주체로 내가 사랑한 "커다란 돌"과 "그 돌을 업어간 어떤 돌"이 등장한다. 이 때 '돌'은 특정 여인과 그 여인을 채 간 다른 남성, 즉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성복의 시에서 '돌'은 여자와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가 '돌' 속에 묻혀 있었으나, 이후에는 여자가 '돌' 속에서 자발적으로 떠나간다. 돌로부터 여자의 이탈 과정을 "해와 달이 끌어"준다고 하는 걸로 보아, 돌은 그 여자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써, 상처와 고통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돌이 물렁물렁하지 않고, 굳고 단단하며, 그것을 깨뜨리지 않는 한 외부에서의 틈입이 불가하다는 광물의 속성으로 볼 때, 돌은 그 여자의 상처와 고통의 밀도를 적절히 형상화 해 내고 있다.
흔히 우리는 외부와 소통할 수 없는 내면의 소유자를 돌덩이(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사물의 속성을 빌어 표현한다. 결국 여자는 자신이 받은 고통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면을 꼭 닫고 있으며, 이때 '돌'은 고통의 밀도(과거성)와 외부와의 단절(현재성)이라는 다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돌 속에 들어앉은 이런 여자가 내 사랑에 쉬이 동요될 리 없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나는 돌처럼 굳어 버린 그녀의 내면으로 직접 들어간다.
이제, '그 여자를 사랑해서 돌 속에 들어갔으나, 여자는 떠나고 돌 속에 혼자 남아 있는 나'의 내면을 쫓아가 보자. 한 여자를 사랑한 나는 그 여자의 보이는 부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고통과 상처까지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그 여자는 "어느 여름 비 많이 오"는 날 돌 속에서 떠난다. 이 때, '많이 내리는 여름 비'는 그 여자의 응어리진 상처를 씻어 내는 치유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아마도 여름 한철 내내 내린 그 비는 시속의 화자인 내가 여자에게 베푼 헌신적인 사랑의 환유일 것이다. 떠나가는 여자를 지켜보며,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라고 자조하며 인고할 수 있을 정도의 내면이라면, 소나기 같은 사랑이 아니라 여름 한철 내내 내리는 비와 같은 지극한 사랑이 선행해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떠나가고 나는 혼자 남는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나 혼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애잔하지만, '나 혼자 잠기'는 모습을 통해 그 여자가 지닌 돌덩이를 사랑하고 이제 자신이 또 하나의 돌 속에 무겁게 짓눌려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도 애감에 잠긴다.
그러나, 내가 처해 있는 곳이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이며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하늘과 바다의 푸름' 그리고 '남해에 있는 금산(金山)'이라는 밝은 이미지를 통해 청명하고 고귀한 사랑을 엿보며 이별의 비감보다는 미적 감수성과 조우한다.
우리는 내면에 돌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이 시의 여자는 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돌 속에서 빠져 나온 운 좋은 경우이다. 허나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슴의 돌덩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무거우면 무거운 채로,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먼길을 멍에처럼 들고 가야 하는 것일까. 이 시가 수록된 시집(『남해 금산』)의 다른 작품에서 이성복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위의 책, 16면).
이 말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전언이다. 그렇다면, 맹자의 이런 어구를 이 자리에서 떠올려 보면 어떨까. 생어우환이사어안락(生於憂患而死於安樂),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다. '우환'에 대해서 좀더 부연하자면, 사람은 항상 과실이 있은 뒤, 그리고 생각이 걸린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이성복의 전언으로 돌아와 그 의미를 되새겨 보자면, "삶"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많은 아픔을 주는 것이며, 이를 계기로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한층 개선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슴의 돌을 던져 버리기 위해, 굳이 먼길을 돌아갈 필요 없이 맹자의 '반구제신(反求諸身)'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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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들고 있었던 작품은 허서형의 [성장의 서사와 글쓰기의 소명-박완서론]과 안미영의 [엽기적 인물의 탄생과 진화-백민석론]이었다.
박완서의 작품을 성장소설 모티프와 연결시켜 예술가의 눈뜸과 성장, 교육과 소명의식 그리고 글쓰기 문제를 논한 허씨의 평론은 세련된 문장과 설득력 있는 논지가 돋보여, 필자가 평론가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주제가 좀 더 참신하고 내용도 좀 더 복합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최윤을 다룬 단평 [두개의 산책, 글쓰기의 기원]은 문학의 본질에 대한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고 있어, 이 평자의 역량과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
백민석의 작품세계를 다룬 안씨의 [엽기적 인물의 탄생과 진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점점 더 흐려지고 있는 이 시대에 현실로부터 일탈한 젊은 세대의 문제점을 고찰해, 문학비평을 사회비판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평론이었다.
이 글은 외부세계와의 교류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환영과 허상 속에 칩거하는 소위 탈현실주의 세대와 그들의 특징인 가족과 공동체 유대의식의 결핍에 대해 논하면서, 문학작품이 그러한 인물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현상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잘 천착하고 있다.
박완서론이 현실 수업을 통한 예술가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면, 백민석론은 텔레비전과 비디오와 인터넷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자라난 탈현실주의자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비록 두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후자가 전자보다는 더 새롭고 더 도전적이며, 더 호소력 있고 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어, [엽기적 인물의 탄생과 진화]를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앞으로 문학의 미래를 선도하며 어두운 시대의 등불이 되는 좋은 비평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1970년 울산생
△1993년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현대문학 소설 전공-이상(李箱) 연구)
△현재 충북대 경북대 목원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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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성당에서 미사를 보던 중 분명히 봉헌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헌금 봉투가 그대로 놓여있는 것이다. 아마 딸아이가 봉투를 여러 개 가지고 온 탓에, 그 중 빈 봉투를 내고 진짜 봉투를 그대로 놔둔 모양이었다.
봉투에서 돈을 다시 빼 내고 그 돈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며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남편과 아이가 다시 봉헌하고 오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나는 봉헌시간이 다 지났다고 우겼고 남편과 아이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봉헌을 하라고 했다.
허둥지둥 봉헌을 하고 돌아오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크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얼마나 변한 것일까. 몸은 성(聖)에 걸쳐두고, 마음은 속(俗)에 젖어 있었다.
강의를 나가면서, 내가 공부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정 기술 혹은 얼마간의 이윤 추구와 같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그저 인간 자체에 대한 학문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는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길로 인도해 주시고 불을 밝혀주신 충북대학교, 경북대학교 은사님께 감사드린다.
특히, 지난해 학위 논문 준비기간 내내 힘이 되어 주시며, 학문의 시야를 넓혀 주신 이주형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