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활동하던 스물한 살의 조선 청년 안창남(安昌男·1901~1930)의 고국 방문 비행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이 행사를 주최한 동아일보는 “반도(半島)의 천공(天空)에 최초의 환희/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 “5만 관중을 열광케 한 고등비행”이라고 찬사를 보냈다(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자). 안창남의 비행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 일대에 몰린 사람은 5만여 명. 당시 경성 인구가 약 30만 명이었으니 경성 인구의 6분의 1이 여의도에 모인 것이다.
1920년 8월 안창남은 일본 도쿄 오쿠리비행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3개월 만에 3등 비행사 면허를 딴 데 이어 1921년 5월엔 2등 비행사 면허증도 땁니다. 승승장구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안창남은 1921년 6월 일본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을 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무시험 1등 비행사 면허까지 딴 것을 넘어, 내로라하는 일본인들을 제친 그에 대해 일본에서도 “타고난 천재”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