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2-04-09 00:00
수정 2012-04-09 00:00
고려 개혁 핵심인물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vs 혁명파의 탄핵 표적 새 성리학 왕조 일구다
정몽주가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을 주도했던 것도 그가 개혁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창왕이 개혁 추진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1389년 11월에 이성계 등은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손인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 공양왕 추대를 주도한 9명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는데, 그 9명 중 한 사람이 바로 정몽주였다.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왕을 폐위하는 데 앞장설 만큼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을 열렬히 염원하였다.
[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2)] 위기의 고려와 조선 구해낸 최무선
- 입력 2023.11.19 14:24
- 수정 2024.10.25 15:39
권근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문신으로, 필명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시인이자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유학자다. 그의 상소는 문익점에 대한 설명이 보다 길고 상세하지만, 정작 권근이 더욱 높게 평가한 인물은 최무선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무선에 대한 설명이 더 간략했던 이유는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권근은 아비의 공덕에 보답하기 위해 자식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최무선의 활약에 크게 감동했던 듯하다. 최무선을 칭송하는 시까지 쓸 정도였다.
출처 :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38769
[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33)] 판 뒤집은 이성계파, 고려수호파 대학살
스승의 아들까지… 자비없는 피의 숙청
정몽주와 손잡았던 이색·이숭인·이종학 등 제거
절친한 도반도 척살… 혈육 고발하고 살아남기도
둘째 정몽주는 이성계파 내 급진파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을 유배시키거나 퇴진시켰다. 1391년 9월, 정도전이 유배되고, 10월에는 직첩과 녹권이 박탈됐다. 아들 정담과 정진도 삭탈 관직됐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전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정도전을 버린 것이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중흥노선을 받아들여, 고려왕조와의 공존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성계파의 두뇌를 제거하고, 지휘부를 약화시키고, 노선에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이성계의 추종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그 전열을 점진적으로 와해시키고자 했다.
조선 재상 열전 2 | 조준전(趙浚傳)
조선의 ‘宰相다운 재상’ 1호
조정으로 돌아온 조준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분야는 토지제도 개혁이었다. 《고려사》 ‘조준전’이다.
“그전부터 토지제도가 대단히 문란해져서 토지를 겸병(兼并)하는 자들은 남의 토지를 강점하여 그 해독이 날로 심하게 되므로 백성들 원망이 자자했다. 우리 태조는 조준·정도전( 鄭道傳)과 함께 사전(私田) 개혁에 대해 의논했으며 조준은 동료들과 함께 신창(辛昌·창왕)에게 글을 올려 이에 대해 역설했다. 명문거족들은 모두 비난 중상하였으나 조준은 더욱더 자기주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도당(都堂)에서 그 가부를 토의하게 되었을 때 시중 이색(李穡·1328~1396년)은 오랜 법제를 경솔하게 고칠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고집하면서 듣지 않았고,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변안렬(邊安烈), 권근(權近) 등은 이색의 주장을 따랐다. 정도전·윤소종은 조준 주장에 가담했고 정몽주는 이 중간에서 일정한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백관으로 하여금 의논케 한 바 의논에 참가한 사람이 53명이었는데 개혁을 요구하는 자가 10 중에 8~9였으며 요구치 않는 자는 모두 다 명문거족 자제들이었다. 우리 태조는 끝내 조준의 주장을 채용해 전제를 개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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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신문]
조건 건국 반대한 정몽주, 왜 조선의 지배자가 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