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공항에서 우연히 재직자와 퇴직자가 대기승객 신세가 되어 대기자 카운터 앞에 서다. ))


매시 40분마다 부산에서 서울로 항공기가 출발하는데 계속 만석이었다.

오후 1:40 출발 항공기를 타려던 나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공항직원에게 물어보니 명절 끝난 다음날은 늘 그렇다고 한다.

5시이후부터는 만석이 아니라서 좌석여유가 있지만 타고 간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고 한다. 5시 이후라면 5:40분 출발편부터 만석이 아니라는 소리.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다시 공항으로 올까 그냥 기다렸다가 탑승할까 잠시 고민하였다.


이왕 나온 김에 기다려 보기로 한다.

집을 나서기 전에 스카이스캐너(skyscanner) 앱으로 당일 항공편들의 실시간 예약 상황을 살펴 보았더라면 이렇게 공항에서 장시간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을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늙어가는 탓이다.


 매시간 25분마다 대기자 카운터로 오면 대기순번대로 탑승권을 준다고 한다.

출발 15분전에 대기자들 중에서 탑승 가능자가 발표되었다.

 몇 차례 탑승 실패를 한 후, 카운터 직원이 말하기를 4:40 출발편 탑승권을 받지 못한 직원들은 모두 5:40 출발편을 드리겠다고 한다.

5:40 출발편 좌석이 충분히 비어 있는 상태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1시부터 김해공항에 발목이 잡혔으니 4시간 40분을 공항에서 죽치고 있게 되는 셈.


매 시간 25분에 대기자 카운터로 모이다보니 아는 얼굴이 보인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다가 교육원으로 인사이동했던 후배 직원인데 그사이 얼굴이 더 늙었지만 못 알아볼 얼굴은 아니다.

그의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이혼했기에 그 옆에 서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재혼한 아내인가 궁금해서였다. 젊다. 아내가 아니라 장성한 딸인듯.

 그가 나를 보고도 더 늙어서인지 혹은 강렬한 햇빛에 타서 나를 몰라본 것인지 아니면 나를 못본 것인지 모르겠다.

대기자들의 신경과 시선은 대기자 카운터 담당 직원의 입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재직자이고 나는 3년 전에 퇴직한 퇴직자.

내가 먼저 아는 척 할 수가 없었다.

아는 척하면 공항에서 2시간 이상 더 묶여 있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항공기를 기다리며 많은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텐데 그는 은퇴한 나의 근황을 무척 궁금해할 것이다. 머잖아 그에게도 닥칠 미래이므로.


나는 그동안 기간제 노동자로서 공원에서 육체노동을 해왔다. 퇴직후 내가 원하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취업전선에서는 노땅 취급을 당하는 현실을 겪으며 실업상태가 1년 3개월이 되니 우울증의 조짐이 생길 정도.

그래서 내가 원하는 직장을 구할 것이 아니라 나를,노땅을 원하는 직장을 구하도록 생각을 전환하였다.

그랬더니 최저시급에 가까운 생활임금을 주는 기간제 노동자로서 공원의 조경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실업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출근할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뻤던지!

처음 해보는 노동이라 육체는 힘들었지만 우울증이 생길 뻔한 정신은 아주 좋아졌다.

 새로운 경험을 하며 조경 기술이 점점 몸에 익숙하게 붙으니 나름 재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료는 대체로 60대 중반과 70대 초반이 주축이어서 당시 50대말인 나는 여기에서는 막내 취급을 받으니 노땅취급이 아니라 "젊은 것"취급을 받게 되니 이 또한 즐거운 일.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데 조경 일에 첫 단추를 달다보니 계속 같은 일을 하게 된다.


최저시급이 오른 탓일까, 아니면 작년말에 베이비부머 중 가장 숫자가 많다는 58년 개띠의 정년퇴직으로 취업전선에 개떼처럼 몰려드는 탓인지 2년전보다 올해는 경쟁율이 2배 증가한 것 같다.

 운이 좋아 올해도 조경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경쟁율이면 내년에도 조경일을 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가 없다.

4대보험을 회사가 내어주므로 65세 이하의 연령에는 이 점도 좋은 점.

지난 2년은 예초기를 사용하는 법도 배웠고 어느 정도 능숙해졌다. 일하는 즐거움도 생겼다.

나이 많은 동료들이지만 사나이 세계에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의기투합하는 벗이 될 수 있어 이 또한 직장 다니는 즐거움.


젊은이들은 노인에 대해 정확히는 모른다. 오히려 노인들이 젊은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안다.

노인들은 젊은 시절을 겪어보았고 늙은 시절도 겪어보고 있지만, 젊은이들아 니네들이 노인이 되어보았느냐, 안되어 보았으니 노인에 대해 다 아는 척 하지마라.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는 재직자가 번듯하지 않은 퇴직자의 인생 제2막의 직장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이해 못하는 재직자는 은퇴자의 초라해보이는 직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헛소리하기 십상이다.

퇴직자는 그런 재직자에게 이해되도록 갑자기 피고의 입장이 되어 장황한 설명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재직자는 이해가 되지 않으니 자꾸 질문을 해대고, 은퇴자는 입 아프게 답을 해주다가 "아니 ,내가 왜 이렇게 길게 피곤하게 설명해야 되지? 어차피 후배도 퇴직후에야 스스로 나처럼 깨닫게 될텐데."하는 결론에 도달하고 지치게 된다.


그래서 퇴직자가 같은 고향의 재직자 후배가 설을 쇠러 왔다가 같은 대기자 신세로 대기자 카운터에서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리며 잠시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굳이 아는 채 하지 않은 이유다.


 몇년후 그도 퇴직자가 되어 같은 대기자 신분으로 다시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그때는 아는 척 하리라.

그때는 그도 육체노동의 신성함을,초라해 보이는 직장의 고마움을 서로 공감할 수 있을테니까.


항공사 직원은 은퇴후에도 수년간 할인 티켓이 주어지므로 공항에서 다시 만날 기회는 또 있을 것이다. 


                                                                                    2019.2.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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